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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9d537><colcolor=#670000> 고려 제16대 대왕 예종 | 睿宗 | |||
유릉 전경 | |||
출생 | 1079년 2월 11일 | ||
고려 개경 개성부 (現 경기도 개성시) | |||
즉위 | 1105년 11월 10일 | ||
고려 개경 개성부 정궁 중광전 (現 경기도 개성시 만월동) | |||
사망 | 1122년 5월 15일 (향년 43세) | ||
고려 개경 개성부 정궁 선정전 (現 경기도 개성시 만월동) | |||
능묘 | 유릉(裕陵) | ||
재위기간 | 고려 왕태자 | ||
1100년 3월 10일 ~ 1105년 11월 10일 (5년) | |||
고려 제16대 대왕 | |||
1105년 11월 10일 ~ 1122년 5월 15일 (16년 6개월 5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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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 | 우(俁) | ||
부모 | 부왕 숙종 모후 명의왕후 | ||
형제자매 | 부왕 기준 8남 4녀 중 장남 모후 기준 7남 4녀 중 장남 | ||
배우자 | 경화왕후[1], 순덕왕후[2], 문정왕후, 숙비 최씨 | ||
자녀 | 4남 4녀 | ||
종교 | 불교 | ||
자 | 세민(世民) | ||
묘호 | 예종(睿宗) | ||
시호 | 제순명렬문효대왕 (齊順明烈文孝大王)[3] | ||
절일 | 창녕절(昌寧節) → 함녕절(咸寧節)[4]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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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려의 제16대 대왕.묘호는 예종(睿宗), 시호는 문효대왕(文孝大王). 휘는 우(俁). 자는 세민(世民). 어린 조카인 헌종(제14대)을 퇴위시키고 스스로 보위에 오른 숙종(제15대)의 장남이었다.
숙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부왕 숙종이 마련한 강력한 왕권을 기반으로 예종은 신하들을 억제하고, 정권을 차지해 국정을 주도할 수 있었다. 음악, 시, 연회를 좋아했지만, 국자감 세분, 학문 연구 각(閣) 설치, 서경 용덕궁 건설을 통해 중앙귀족 견제, 무과 최초 설치, 북방 정벌, 대(對) 여진 강경외교, 대(對) 송 친화외교를 성공시켜 국정을 탄탄하게 이끌었다.
그러나 숙종 때부터 이어져오던 측근 정치가 더욱 강화되는 동시에 개경파와 서경파의 대립을 심화시켰으며, 1115년 금나라를 세우고, 1125년 요나라를 무너뜨릴 정도의 힘을 가진 완안부 여진과의 관계는 악화일로를 걸었다. 강력한 왕권을 지니며 국정을 주도했던 예종 때까진 이런 단점이 억눌러졌으나, 다음 왕인 인종 대부터 안 좋은 점들이 연이어 발생하게 된다.
예종 사후 고려 왕조는 18대 270년간 더 이어졌으나, 이자겸 → 무신 집정자들 → 몽골 제국의 보르지긴 황실 → 권문세족 → 이성계 등 고려 임금을 뛰어넘는 권력들이 연이어 나타나면서 왕씨의 왕권은 유명무실한 상태가 지속되고 말았다. 그나마 제31대 공민왕이 병신정변과 원 간섭기 이전으로의 복고 정책 시행 등으로 이를 바로잡나 싶었지만, 노국대장공주의 죽음 이후 완전히 미쳐버린 상태가 되면서 고려는 결국 망국의 길로 치닫게 되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사실상 예종이 고려 왕권이 자주적이던 시절의 마지막 군주라고 할 수 있다.
2. 묘호와 시호
공식 묘호는 예종(睿宗)이다. <예종 시책문>(《동문선》 제23권)에선'허(虛)로 명(明)에 이르고 사(思)로 성(聖)을 만들었다'(虛以致其明 思以作其聖)
란 뜻으로 '예' 자 묘호를 올렸다고 한다. 또한 문(文)으로는 문학 진흥에 힘썼고, 무(武)로는 170,000명의 대군을 출정, 북벌을 진행하여 고려의 존재감을 드러냈으니 '예'(睿) 자에 맞다고 볼 수 있다. <현화사승통각관묘지명>에선 '예묘'(睿廟)로 등장한다. '현화사의 승통 각관의 묘지명'이란 뜻으로 각관은 예종의 아들로 출가한 왕자이다. 고려 역사에서 일반적으로 '宗'을 '廟'로 바꿔도 동일한 인물을 지칭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 두 글자를 합치면 종묘가 된다.고려의 예종은 묘호가 같은 조선의 예종과는 아버지가 조카의 왕위를 빼앗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시호는 '제순명렬문효대왕'(齊順明烈文孝大王). 아들인 인종(제17대)이 '문효'를, 또 '명렬'을, 4대손이었던 고종(제23대)이 '제순'을 올렸다. 대표시호는 '문효대왕'(文孝大王)이다. <예종 시책문>엔 '문' 자는
'경영의 근원에 통달하다'(達經緯之本)
'효' 자는 '사랑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배우다'(博愛敬之心)
란 뜻에서 올렸다고 한다.신하들이 예종을 '황옥'(黃屋)[5], 고려 조정을 '천공'(天工)이라 불렀다. (이상 《고려사》 <예종 세가> 재위 9년 8월조 기록). 신하 곽여는 자신의 시에서 예종을 '옥제'(玉帝), '일월'(日月)로, 만월대를 '천문'(天門)으로 비유했다. 예종은 자신의 보위를 '천서'(天序)라고 칭하는 등 천자로서 군림했는데, 이는 당시 완안부 여진족의 발호와 맞물려 고려는 더욱 보수적으로 변하게 된다.
3. 치세
예종 왕우는 할아버지 문종 재위 33년차인 1079년 1월 7일에 태어났다. 아버지 왕희와 어머니가 아직 임금과 왕후가 되기 전에 태어났으며, 그저 왕위계승권에서 먼 방계 왕족에 지나지 않았다.검교직 | 검교사공(檢校司空) | 백부인 선종이 봉한 검교직. 주국과 겸했다. 검교사공은 명예 사공이다. 사공은 삼공 직 중 하나다. |
훈위 | 주국(柱國) | 백부인 선종이 봉한 2등급 훈위. 검교사공과 겸했다. |
삼공 | 태위(太尉) | 검교사공 - 주국에서 태위 - 주국으로 승진했다. 태위는 삼공 직 중 하나다. |
하지만 할아버지 문종이 붕어하고 나서 그 자리를 이어받은 순종조차 한 달만에 붕어했고, 그 뒤를 이어 즉위한 선종이 재위 11년만에 붕어하면서 어린 사촌 헌종에게 왕위를 넘기자 왕우의 위치에 변화가 생겼다. 나라 사람들이나 조정, 심지어 같은 종실 친척들조차 아버지인 계림공 왕희가 왕위를 계승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의 형이었던 선종이 붕어 직전 유조를 통해 아들 헌종을 후계자로 임명했고, 끝내 그가 즉위하게 되었다.
하지만 어린 왕의 등극과 권신의 출현 등으로 인해 점차 조정이 어지러워지기 시작했고, 이를 틈타 세력을 키워 외척 이자의 등 반대파를 몰아낸 아버지 왕희가 병약한 조카인 헌종으로부터 선위를 받아 왕위에 오르게 된다. 이것이 이자의의 난이라 불리는 사건이다. 다만 이자의가 반란을 일으켰을 당시 그를 따르던 이들의 숫자가 적었던 점, 이후 숙청된 신료 역시 비교적 그 수가 적었다는 점을 근거로 숙종이 이자의에게 반역죄를 뒤집어 씌어 그를 제거한 뒤 헌종을 퇴위시킨 친위 쿠데타로 보기도 한다. 이 때 왕자가 된 왕우의 나이는 만 16세였다.
왕우, 즉 예종은 처음부터 태자 혹 왕자였던 것이 아니라 수많은 왕족들 중 한 명에 불과했으며, 장성하고서도 다른 왕족들 및 자신의 숙부들과 형제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근신들과 경쟁해야했다.
실제로 숙종의 치세때 그의 동생이자 예종에게는 숙부가 되는 부여후 왕수가 왕위에 오를 준비를 한다는 등의 소문에 휘말려 끝내 역모죄 혐의를 받아 유배형에 처해졌다. 자세한 기록은 없지만 당시 숙종의 맏아들이었던 왕우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상황이 벌어졌을 정도로 형제 상속이 일반화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당연히 왕우 입장에서는 이런 사회적 배경 속에서 왕위계승권을 지키기 위해 사력을 다해야 했을 것이다.
이런 배경 속에서 왕우는 살아남는 방법과 정치적인 감각을 익힌 것으로 보인다. 부왕인 숙종 역시 선례와 <훈요 10조>에 따라 왕위를 이어받을 수 있는 명분이 충분했지만 형인 선종의 장남이자 자신에게는 조카가 되는 헌종이 왕위를 이어받았고, 거기다가 외척인 이자의라는 인물이 나타나 권력을 노리며 대놓고 그와 대립했을 정도였다. 끝내 그를 죽이고, 반대파를 억누르고 나서야 선위를 받아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이리하여 왕우는 만 21세일 때, 드디어 태자에 봉해졌다. <이공수 묘지명>엔 '황태자'(皇太子)가 되었다고 한다.
만 26세가 되었을 때, 서경 장락궁을 순수하고 돌아오던 중 아버지가 붕어했고, 본궐 중광전(重光殿)[6]에서 뒤를 이어 즉위했다. 즉위할 당시 예종의 배향공신 위계정이 옥새(玉璽)를 전달했다고 한다.
3.1. 내정
3.1.1. 국자감 7재 설립과 경연 실시
학당을 많이 설치하는 한편 숙종 대에는 폐지론까지 나온 국자감(공교육) 진흥에 가장 두드러지게 나서기도 했다. 사학인 최충의 9재 학당을 모방하여 '국자감 7재'를 개설하였다.국자감 7재 국자감 7과목 전문 강좌 | ||
재(齋) | 과목 | 설명 |
여택재(麗澤齋) | 《주역》 | |
경덕재(經德齋) | 《모시》(毛詩) | 《시경》이다. |
구인재(求仁齋) | 《주례》 | '3례' 중 하나이다. |
양정재(養正齋) | 《춘추》 | '5경' 중 하나이다. |
복응재(服膺齋) | 《대례》(戴禮) | 《예기》 중 하나이다. |
대빙재(待聘齋) | 《상서》(商書) | 《서경》(書經)의 하나이다. |
강예재(講藝齋) | 무학(武學) | 무술과 병법. 별칭은 '무학재'(武學齋). |
조선왕조에만 행해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경연을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실시하기도 했다.
3.1.2. 무과 설치 및 군사력 강화
1109년(예종 4년), 앞서 언급한 국자감 7재 중 무관 양성을 위한 '무학재'라고도 불린 강예재를 설치했고, 후기에는 무학재의 인원을 상대적으로 더 늘리기까지 하는 등 여러모로 군사 분야에 신경을 많이 쓴 보기 드문 임금이었다. 고려시대에 유일하게 시행된 무과 역시 예종 대에 실시된 것이다.그러나 당시 문벌귀족 사회였던 고려는 이후의 조선시대보다 훨씬 무과에 대한 천대가 심한 편이어서 강예재 설치에 엄청난 반발이 따랐다. 그런 반발에도 불구하고 예종은 본래 유학재 70명, 무학재 8명으로 시작한 관학 7재를 10년 뒤에는 60명과 17명으로 조절해버리는 강수를 둔다. 겉보기로는 유학재가 3배 이상 많은 것 같지만. 유학재는 6재가 모인 것으로 각 재당 10명이었던 반면에 무학재는 17명으로 오히려 1.7배가 늘어난 셈이었다.
윤관의 별무반도 그렇고 예종으로서는 독한 맘을 먹고 군사력 강화를 진행한 것이다.# 문종(제11대)과 더불어 무관 대접을 잘 했던 군주이다.
전쟁에 나가 싸운 문·무 신료들의 죄는 그동안 공을 생각해서 묻지 않았는데, 이유는 부왕 숙종이 동북 9성을 추진했고, 당시 참여했던 문·무 신료들은 숙종의 뜻에 따라 움직였으니 참작이 가능한 부분이었다. 이는 조선의 세종대왕조차도 이 점을 인정하여 고려 예종의 장점을 흡수해 4군 6진때 참여한 문·무 신료들에 대한 견제를 하지 않고, 오히려 우대해주었다.
그러나 무과는 결국 예종 다음 군주인 인종 11년(1133년, 24년만)에 바로 폐지되었고, 7재는 '경사 6학'으로 재편되었다. 무과가 시험이 간단하고 뽑는 인원이 많은 탓에 상대적인 응시자가 적어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문과의 세가 약해진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려 시대의 무과는 사실상 없는 것과 같다고 해석되다가, 최근에 예종 때 아주 잠깐 했었다는 내용이 교과서에 추가되었다. 제34대 공양왕 2년에도 무과가 257년 만에 부활되었으나, 사실상 국가가 멸망 직전이라 의미가 없는 부활이었다.
3.1.3. 혜민국(惠民局) 설치
동북 9성 개척으로 인한 국력 소모의 후유증을 치유하기 위해 의약 부문을 담당하는 '혜민국'(惠民局)을 설치하는 등 민생에도 신경을 썼다.3.1.4. 제례악 정비
예종은 현재 '아악'(雅樂)의 근본인 북송의 '대성악'(大晟樂)을 들여와 이를 정비했다. 태묘 자체가 북송이 정비한 유교식 제사방식인 것을 고려가 수입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종묘 제도를 한 차례 개선한 셈이다. 그런데 완벽하게 태묘를 정비한 건 아니었다. 예종 대에는 '5묘 + 9실 + 묘호'라는 제후식과 천자식을 섞은 방식을 사용했다. 이는 손자 의종(제18대)이 '7묘 + 9실 + 묘호'로 바꾸어 완벽한 천자식 종묘를 완성한다.또한 고려의 태묘 악장을 완전히 새롭게 고쳤다. 예종 이전에도 분명히 태묘 악장이 있었겠지만 현존 기록상 예종이 제작한 악장이 제일 오래됐다.
《고려사》 <악지> 기록으론 1대 태조, 2대 혜종, 8대 현종, 9대 덕종, 10대 정종, 11대 문종, 12대 순종, 13대 선종, 15대 숙종 등 9명에게 올렸으며, 각 임금 문서에 내용이 나와 있다. 《고려사》 <악지> -아악- 부분엔 태자 인종이 올린 본인의 태묘 찬가가 적혀 있다. 제목은 <미성>(美成)이며 아쉽게도 가사가 없다.
3.1.5. 불교와 도교 진흥
예종 때에는 덕창(德昌), 담진(曇眞), 낙진(樂眞), 덕연(德緣) 등의 불교 고승들이 있었다.이 중 담진은 1107년 예종의 왕사(王師)가 되었고, 1114년 국사(國師)가 되었으며, 1116년 보제사로 행차한 예종에게 설법했다. 화엄학(華嚴學)의 대가로서 일승법(一乘法)을 선양하여 국가의 이익을 도모하였다.
한국사상 최초의 도관(道觀, 도교 사원)인 복원궁(福源宮)을 세운 것도 예종 때의 일이다. 예종은 북송의 '도군황제'였던 휘종에게 도사를 요구해서, 궁궐 내에 도관을 세웠다. 도가 책 보급을 중시해 고려에서 불교를 대체하려 했다고 보는 시각도 있는데, 속내야 어떻든 결과적으로 이루진 못했다.
3.2. 외정
3.2.1. 對 북송
송나라와의 관계는 문종, 선종 대를 거치며 주도적인 역할을 했는데 당시 송나라에선 고려의 사신을 '국신사'(國信使)로 승격시켜 당시 자신들을 제외한 나라 중에 가장 높은 직위로 인정해 주었다.정화(政和) 연간(1111년 ~ 1117년)에 고려의 사신을 국신사로 승격시켜 예우가 서하국보다 위에 있었고, 요나라 사신과 함께 추밀원(樞密院)에 예속시켰다.
인반관(引伴官) 등도 고쳐 접관반(接館伴), 송관반(送館伴)이라 했다.
《대성연악》(大晟燕樂)과 변두(籩豆), 보궤(簠簋), 존뢰(尊罍) 따위의 그릇도 하사하고, 심지어는 예모전 안에서 고려 사신을 위해 연회까지 베풀었다.
인반관(引伴官) 등도 고쳐 접관반(接館伴), 송관반(送館伴)이라 했다.
《대성연악》(大晟燕樂)과 변두(籩豆), 보궤(簠簋), 존뢰(尊罍) 따위의 그릇도 하사하고, 심지어는 예모전 안에서 고려 사신을 위해 연회까지 베풀었다.
흠종(欽宗)이 즉위하자 (고려의) 축하 사신이 명주(明州)에 도착하였다.
어사(御事) 호순척(胡舜陟)이 아뢰길:
“고려가 50년 동안이나 국가(國家)를 미폐(靡敝)케 하였으니[7] 정화(政和) 이후로는 사신이 해마다 와 회(淮)· 절(浙) 등지에서는[8] 이를 괴롭게 여기고 있습니다.
고려가 과거에 거란(契丹)을 섬겼으므로 지금에는 반드시 금(金)나라를 섬길 터인데, 그들이 우리의 허실(虛實)을 정탐하여 보고하지 않는다는 것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중지시켜 오지 말도록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에 조서(詔書)를 내려 명주(明州) 객관(客館)에 머물면서 그 예물(禮物)을 바치도록 하였다. 이듬해 그들은 비로소 귀국하였다.
왕휘(王徽) 이후부터 사신이 끊이지는 않았으나 거란(契丹)의 책봉(册封)을 받고 거란(契丹)의 정삭(正朔)을 사용하여 송나라 조정에 올린 글이나 기타 문서에 대부분 간지(干支)를 사용하였다.
고려가 거란(契丹)에 대해 한 해에 조공(朝貢)을 여섯 번이나 하였지만 가렴주구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거란은 항상, “고려는 바로 우리의 노예(奴隷)인데 남조(南朝)는 무엇 때문에 고려를 후하게 대우하는가?” 라고 하였다.[9]
송(宋)나라 사신이 (고려에) 왔다는 소식을 들으면 반드시 다른 일을 핑계하여 와서 정탐하고 하사한 물건들을 나누어 가져갔다.
거란이 한번은 고려가 서쪽으로 조공(朝貢)한 일에 대하여 힐책(詰責)하자 고려는 표(表)를 올려 사과했다. 그 표(表)의 대략 내용이:
“중국에서는 3갑자(甲子)만에 한 번씩 조공(朝貢)하고 대방(大邦)에게는 1년마다 여섯 번씩 조공(朝貢)합니다.” 하니
거란이 깨달아 마침내 화(禍)를 모면하였다.
고종(高宗)이 즉위하여서는 금(金)나라 사람들이 고려와 내통할까 염려하여, 적공랑(迪功郞) 호려(胡蠡)를 가종정소경(假宗正少卿)으로 삼아 고려국(高麗國)의 사신으로 임명하여 정탐하도록 하였다.
호려(胡蠡)의 귀국에 대해서는 사관(史官)이 기록을 빠뜨려 버렸다.
《송사》 <외국 열전> -고려-
심지어 송나라에선 고려 사신들이 행패를 부리는 데도 불구하고 아무런 제재를 가하지 못하자 이를 보고 한탄하는 기록이 남아있을 정도이다. 《송사》 <고려전>에서 11대 문종~16대 예종 사이의 기록들을 보면, 송나라에서 "와 고려 저 새퀴들 진짜 너무 깝치는데 우리가 손쓸 방법은 없고 어휴..." 같은 한탄이 굉장히 늘어난다.어사(御事) 호순척(胡舜陟)이 아뢰길:
“고려가 50년 동안이나 국가(國家)를 미폐(靡敝)케 하였으니[7] 정화(政和) 이후로는 사신이 해마다 와 회(淮)· 절(浙) 등지에서는[8] 이를 괴롭게 여기고 있습니다.
고려가 과거에 거란(契丹)을 섬겼으므로 지금에는 반드시 금(金)나라를 섬길 터인데, 그들이 우리의 허실(虛實)을 정탐하여 보고하지 않는다는 것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중지시켜 오지 말도록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에 조서(詔書)를 내려 명주(明州) 객관(客館)에 머물면서 그 예물(禮物)을 바치도록 하였다. 이듬해 그들은 비로소 귀국하였다.
왕휘(王徽) 이후부터 사신이 끊이지는 않았으나 거란(契丹)의 책봉(册封)을 받고 거란(契丹)의 정삭(正朔)을 사용하여 송나라 조정에 올린 글이나 기타 문서에 대부분 간지(干支)를 사용하였다.
고려가 거란(契丹)에 대해 한 해에 조공(朝貢)을 여섯 번이나 하였지만 가렴주구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거란은 항상, “고려는 바로 우리의 노예(奴隷)인데 남조(南朝)는 무엇 때문에 고려를 후하게 대우하는가?” 라고 하였다.[9]
송(宋)나라 사신이 (고려에) 왔다는 소식을 들으면 반드시 다른 일을 핑계하여 와서 정탐하고 하사한 물건들을 나누어 가져갔다.
거란이 한번은 고려가 서쪽으로 조공(朝貢)한 일에 대하여 힐책(詰責)하자 고려는 표(表)를 올려 사과했다. 그 표(表)의 대략 내용이:
“중국에서는 3갑자(甲子)만에 한 번씩 조공(朝貢)하고 대방(大邦)에게는 1년마다 여섯 번씩 조공(朝貢)합니다.” 하니
거란이 깨달아 마침내 화(禍)를 모면하였다.
고종(高宗)이 즉위하여서는 금(金)나라 사람들이 고려와 내통할까 염려하여, 적공랑(迪功郞) 호려(胡蠡)를 가종정소경(假宗正少卿)으로 삼아 고려국(高麗國)의 사신으로 임명하여 정탐하도록 하였다.
호려(胡蠡)의 귀국에 대해서는 사관(史官)이 기록을 빠뜨려 버렸다.
《송사》 <외국 열전> -고려-
이 시기 고려 사신의 위상은 엄청났는데 각국의 사신들이 북송의 황제와 대면하기 전 고려 사신을 먼저 접견해서 문제라는 기록도 남아있다. 1118년 음력 4월, 휘종은 예종에게 직접 '능인지전(能仁之殿)'이라는 글씨를 쓴 편액(扁額)[10]과 16나한의 불상을 보냈으며, 역시 직접 쓴 어필국서를 전달했고, 예종도 보답으로 어필국서를 써서 보냈다.
《고려사절요》 기록에 따르면, 예종 15년 1120년 7월 송나라의 사신들이 본국으로 떠날 때, 송 황제의 조서를 가지고 왔음에도 불구하고 신분이 낮다는 이유로 전각의 계단 밑에서 절하게 했다. 그 이전엔 계단 위에서 절했는데 너무 과하다고 여긴 것이다.
3.2.2. 對 요나라
당시 요나라는 마지막 황제인 천조제의 치세였으며 발해 유민 출신 장군인 고영창이 동경용원부[11]에서 반란을 일으켜 대발해를 세우고 후에 금나라로 발전하는 완안부 여진족이 독립을 위한 공세를 거듭하고 있어 요동 일대가 몹시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이러한 정세 속에서 고려는 완안부를 협공하자는 요나라의 지원 요청을 묵살하고(1114~1115년)[12] 음력 1117년 3월 3일에는 압록강 일대의 내원성(來遠城)과 보주성(保州城)[13]을 수복한다.[14] 이후 이곳은 의주로 개칭되며 의주방어사가 담당하게 되는데, 바로 지금의 평안북도 신의주시 일대인 것이다.《고려사절요》 기록엔 예종 15년 음력 1120년 7월, 요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여진을 요나라와 고려의 같은 원수란 뜻인 '동구'(同仇)라고 표현하며, 은근히 같이 금나라와 싸워 주길 바랬다. 하지만 고려사에 의하면 막상 고려에서는 예종 대에 요나라의 위상이 이미 크게 깍여 예종의 모친인 명의왕태후의 제사를 지낼 때에는 고려 조정에서 요나라를 인국(隣國)으로 칭하였고, 음력 1116년 4월 8일에 요나라가 여진으로 인해 형편이 어려우니 연호를 쓰지 말자는 중서문하성의 요청이 나오자 예종이 이를 수락하여 모든 문서에서 요나라의 연호를 삭제하였다. 또한 등거리 외교를 취해 음력 1117년 3월에 의주를 수복했을 때에 요나라와 금나라를 두 적국이란 뜻인 '양적'(兩敵)으로 부르며 서로 싸우다 망하라고 놀린 적이 있는 등 요나라는 늘 고려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심지어 고려는 완안부에 총력전을 걸었다가 점령에 실패한지 얼마 안 된 상황이라 서로 건들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결론적으로는 요나라만 망했지만 고려는 더욱 '양적'이 서로 싸우다 망하길 바랬을 것이다.
3.2.3. 對 여진
"여진은 본래 구고려(勾高麗)[15]의 부락(部落)으로, 개마산(盖馬山) 동쪽에 모여 살았다. 세세토록 공물을 바치고 직위를 받으니, 우리 조종(祖宗)의 은택을 깊히 입었다.
그러나 그들은 단 하루만에 우리를 배반했고 무도(無道)해졌으니, 선고(先考)께선 심히 분노하셨다.
늘 듣길 고인(古人)이 말하는 '대효자(大孝者)'란 '뜻을 잘 계승한 자'라고 한다. 짐(朕)이 오늘날 다행스럽게 제사를 끝마쳐 국사(國事)를 돌보게 되었으니, 마땅히 의기(義旗)를 들어 무도함을 벌하고 선군(先君)의 분노를 풀 것이다!"
《고려사》 <윤관 열전> 중 발췌. 예종의 북벌 선언문이다.
부왕 숙종이 여진 정벌을 앞두고 급작스럽게 붕어하자, 그 뜻을 이어 윤관에게 여진족 정벌을 명해 동북9성을 쌓는 등 꽤 큰 수확을 얻었다(1107년).그러나 그들은 단 하루만에 우리를 배반했고 무도(無道)해졌으니, 선고(先考)께선 심히 분노하셨다.
늘 듣길 고인(古人)이 말하는 '대효자(大孝者)'란 '뜻을 잘 계승한 자'라고 한다. 짐(朕)이 오늘날 다행스럽게 제사를 끝마쳐 국사(國事)를 돌보게 되었으니, 마땅히 의기(義旗)를 들어 무도함을 벌하고 선군(先君)의 분노를 풀 것이다!"
《고려사》 <윤관 열전> 중 발췌. 예종의 북벌 선언문이다.
허나 그만큼 손해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결국 완안부를 중심으로 한 여진족 연합의 끈질긴 게릴라 전술에 그 지역을 지키던 고려군의 피해가 누적되고, 결정적으로 공험진 전투와 갈라수 전투에서 고려군이 여진족 연합군에게 대파되자 예종은 동북 9성을 완안부에게 양도함으로써 아이러니하게도 완안부 중흥의 발판을 만들어주고 말았다. 이후 여진족은 고려의 총력을 다한 침공군을 막아낸 승전으로 위신을 얻은 완안부를 중심으로 금나라를 건국해버린다.
하지만 앞서 서술한 대로 금나라 역시 고려를 함부로 침입하지 않았는데 몇십 년 후 두 나라 사이에 국경 분쟁이 발생했지만 금나라는 고려를 공격하지 말라는 칙서만 내렸을 뿐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물론 사대 관계를 맺고 있는 것도 있었겠지만 그 속에는 고려와의 전쟁에서 입은 피해를 고려해 '적당히 숙여주는데 굳이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말자' 정도로 생각했을 것이다. 영토확장엔 실패했지만 전쟁억지에는 성공한 전쟁으로 볼 수 있다.
이후 패전의 책임을 명분으로 윤관을 탄핵하는 상소가 빗발쳤고, 결국 윤관은 파직되고 만다. 그리고 사망하기 직전(1110년, 1111년 사망)에 예종에 의해 복직되었다.
아울러 여진 정벌 중에 한국 역사상 최강의 장수로 일컬어지는 척준경이 본격적으로 활약하기 시작했고, 그 활약(?)은 인종 때까지도 이어진다.
1115년 8월, 불세출의 영웅 완안아골타가 세운 금나라의 성장에 당황한 요나라의 암군 천조제는 고려에 군사 파견을 부탁해 협공을 도모하고자 시도했다. 예종은 재추[16]와 시신[17], 도병마사의 의원들, 2군 6위의 대장군과 상장군[18]들을 소환해 다시 여진 정벌을 재개하는 것에 대해 의논하게 했다.
장기간 논의가 있었지만 결국 3차 원정은 포기하는 것으로 가닥을 잡았다. 《고려사》 <김부일 열전>에 더 자세한 상황이 나온다. 당시 모든 관료들은 3차 원정에 찬성했지만, 김부일, 김부식, 척준경은 반대했다고 한다. 척준경 본인부터가 여진의 군사력이 만만찮다는 걸 몸으로 겪어봤기에 내린 결론일 것이다.
그렇다고 금나라에게 저자세로 나간 것도 아니었다. 2년 뒤인 1117년,
"형인 대여진금국황제(大女眞金國皇帝)가 아우인 고려국왕(高麗國王)에게 글을 보낸다."[19]
"兄大女眞金國皇帝, 致書于弟高麗國王."
며 금 태조 완안아골타(1115년에 칭제건원)가 보내온 국서를 코웃음도 치지 않고 무시하는 모습을 보였다. 《고려사》 <김부의 열전>에 따르면 고려 조정은 금 태조의 사신을 참수하려다가 결국 답서를 보내지 않는 것으로 타협(?)을 보았다고 한다."兄大女眞金國皇帝, 致書于弟高麗國王."
중서주사(中書主事) 조순거(曺舜擧)를 파견해 금(金)을 찾아갔다. 그 서(書)엔:
"심지어 네 근원은 내 땅에서 발(發)한 것이다(况彼源發乎吾土)."
란 말이 있어 금주(金主)가 거절하고 받지 않았다.
이후 2년 뒤 1119년 8월 정축일, 금나라에 사신을 보냈는데 고려의 글 중엔 "심지어 네 근원은 내 땅에서 발(發)한 것이다(况彼源發乎吾土)."
란 말이 있어 금주(金主)가 거절하고 받지 않았다.
"너(彼)의 근원은 내 땅(吾土)에서 시작되었다."
라는 구절이 있어 금 태조가 받지 않았다고 한다. 고려사 윤관열전에도 언급되었듯이 여진족이 옛날 고구려에 종속되어 있었으며, 이후에도 여진족 여러 부족들이 고려의 제후급이었고, 금나라의 시조 함보가 신라나 고려 출신임을 비꼰 것이다.[20] 사신이 가져간 글은 고려의 국서인데 국서에다가 당시 황제를 자칭하던 완안아골타를 "너(彼)"라고 대놓고 부른 것이다.예종 14년(1119년) 12월 계미일, 여진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천리장성의 높이를 석 자나 더 높였다. 이 공사를 여진은 방해했지만 이를 무시하고, 천리장성 방비를 강화해 나갔다.
이 보고를 받은 금나라 조정은 그저 정찰만 늘릴 뿐, 공격을 시도하지는 않았다. 물론 고려 역시 여진과의 전쟁에서 큰 피해를 입었지만 여진족은 삶의 터전 자체가 갈려나가는 참화를 입었다. 더군다나 용장 척준경의 대활약으로 여러 번 쓴 맛까지 보았기에 건국 초기부터 고려에 대해 상당한 공포심을 가지고 있었다.
3.3. 말년
그러나 예종은 말년에 지나친 음주가무와 연이은 연회로 인해 종기가 발병, 발병 후 한 달만에 붕어하고 말았다. 향년 44세. 능은 개성에 있는 '유릉'(裕陵)이다.죽기 전 한국의 유명한 산과 강에 제사도 지내고, 이자겸을 시켜 하늘에 제사도 지내지만 곧 자신의 수명이 다했음을 느끼고 얼른 태자 왕해에게 양위한다. 예종은 태자가 어린 것을 크게 걱정하고 있었다.
1122년 4월 2일, 예종은 부축을 받고 앉았다. 여러 중신들을 소환해 일렀다.
짐(朕)이 부덕하니 하늘이 벌을 내렸다. 질병이 낫질 않으니 어떻게 신민(臣民)의 위에서 군국(軍國)을 총괄하겠는가.
태자(太子)가 비록 어리고 작으나 덕행이 이미 완성됐으니 제공(諸公)이 모두 마음을 합쳐 보좌하여 그가 다치지 않게 하라.
《고려사》<예종 세가> 중.
군신(群臣)들은 엎드려 울고 있었고 아무 말도 못했다고 한다. 곧이어 태자를 불러 말하니:태자(太子)가 비록 어리고 작으나 덕행이 이미 완성됐으니 제공(諸公)이 모두 마음을 합쳐 보좌하여 그가 다치지 않게 하라.
《고려사》<예종 세가> 중.
내(予) 질병이 커져 형세가 회복되지 않을 것 같구나. 이에 중임(重任)을 내려놓고 너(汝)에게 전해주마.
내 평생(平生)의 행동을 돌이켜 보니 얻은 것은 적고 잃은 것이 많으니(得少失多) 따르려 하지 말거라. 단지 옛 성현(聖賢)의 길을 따르고 우리 태조의 교훈(我太祖之訓)을 따르거라. (왕의) 자리(位)에서 게을러지지 말고 영원히 서민(庶民)을 품거라.
태자가 머리를 숙이고 울며 일어나지 못했다.
《고려사》<예종 세가> 중.
그가 태자에게 남긴 마지막 말은 내 평생(平生)의 행동을 돌이켜 보니 얻은 것은 적고 잃은 것이 많으니(得少失多) 따르려 하지 말거라. 단지 옛 성현(聖賢)의 길을 따르고 우리 태조의 교훈(我太祖之訓)을 따르거라. (왕의) 자리(位)에서 게을러지지 말고 영원히 서민(庶民)을 품거라.
태자가 머리를 숙이고 울며 일어나지 못했다.
《고려사》<예종 세가> 중.
"날 따라하지 말고 위대한 선조들을 배워라."
아버지로서 어린 아들이 걱정된 듯하다. 이 말을 마치고 태자에게 국새(國璽)를 넘겨주었다. 이후 신하에게 남긴 유조(遺詔)는 태자를 잘 따르라고 당부하고 있다.짐(朕)은 천지(天地)의 경명(景命)을 이끌고 조종(祖宗)의 유기(遺基)를 받들었다. 그렇게 삼한(三韓)을 가진지 18재(載)가 지났다.
쇠락한 자를 돕고 피폐한 자를 구했다. 만민(萬民)과 같이 생각하고 같이 쉬었다. 날이 밝기 전에 옷을 입고 해가 지고 나서야 식사를 했다(宵衣旰食). 하루도 잠시라도 게을러진 적이 없었다. 근심이 심하고 누적되니 질병을 요양할 시기를 놓쳐 결국 크게 심해졌다.
권국사(權國事) 해(楷)는 그 명철한 성격이 하늘이 내린 것이며 그 원량(元良, 태자)의 자질이 인망(人望)을 채울 수 있다. 내 명이 끝나기 전에 왕위(王位)를 이어라. 모든 군국중사(軍國重事)는 일체 사군(嗣君)의 처분(處分)에 맡긴다.
상례는 하루를 달로 계산하고 산릉을 검소하게 만들라. 지방의 수령들(方鎭州牧)[21]은 제 자리에서 애도하되 자리를 비우지 말라.
오호라(於戲)! 죽음과 삶은 늘 있는 길이니 사람이 도망치기 힘들다. 시작과 종말이 내가 원하는대로 이어지니 짐이 유감이 있겠는가. 묘(廟)와 사(社) 덕분에 저지(儲祉, 태자)를 세웠으니 신린(臣隣)들은 사군(嗣君)을 같이 보좌하여 왕실(王室)을 영원히 밝혀라. 우리 국조(國祚)가 무궁(無窮)하게 하라.
아(咨)! 너희(爾) 여러 나라(多方)[22]들아, 내 의지를 받들라!
《고려사》<예종 세가> 중. 예종의 유조.
쇠락한 자를 돕고 피폐한 자를 구했다. 만민(萬民)과 같이 생각하고 같이 쉬었다. 날이 밝기 전에 옷을 입고 해가 지고 나서야 식사를 했다(宵衣旰食). 하루도 잠시라도 게을러진 적이 없었다. 근심이 심하고 누적되니 질병을 요양할 시기를 놓쳐 결국 크게 심해졌다.
권국사(權國事) 해(楷)는 그 명철한 성격이 하늘이 내린 것이며 그 원량(元良, 태자)의 자질이 인망(人望)을 채울 수 있다. 내 명이 끝나기 전에 왕위(王位)를 이어라. 모든 군국중사(軍國重事)는 일체 사군(嗣君)의 처분(處分)에 맡긴다.
상례는 하루를 달로 계산하고 산릉을 검소하게 만들라. 지방의 수령들(方鎭州牧)[21]은 제 자리에서 애도하되 자리를 비우지 말라.
오호라(於戲)! 죽음과 삶은 늘 있는 길이니 사람이 도망치기 힘들다. 시작과 종말이 내가 원하는대로 이어지니 짐이 유감이 있겠는가. 묘(廟)와 사(社) 덕분에 저지(儲祉, 태자)를 세웠으니 신린(臣隣)들은 사군(嗣君)을 같이 보좌하여 왕실(王室)을 영원히 밝혀라. 우리 국조(國祚)가 무궁(無窮)하게 하라.
아(咨)! 너희(爾) 여러 나라(多方)[22]들아, 내 의지를 받들라!
《고려사》<예종 세가> 중. 예종의 유조.
1122년 4월 8일, 예종은 붕어한 뒤 본궐 선정전(宣政殿)에 재궁[23]이 안치됐다. 태자가 즉위하니 곧 파란만장할 삶을 살게 될 인종 공효대왕이다. 인종은 아버지의 빈전[24]인 선정전에서 며칠동안 크게 울었다고 한다.
4. 가족관계
- 제1비: 경화왕후 이씨 - 선종의 장녀
- 제2비: 순덕왕후 이씨 - 이자겸의 차녀
- 제3비: 문정왕후 왕씨 - 진한공 왕유의 장녀[27]
- 후궁: 장신궁주(長信宮主) 최씨 → 숙비(淑妃) 최씨 - 최용(崔湧)[28]의 딸
해주 최씨로 생전 장신궁주(長信宮主)였으며, 예종 사후 '숙비(淑妃)' 존호를 받았다. 최윤의와 남매지간이다. - 승통(僧統) 왕각관(王覺觀)(1121 ~ 1174)
자는 치허(致虛), 승통 덕겸(德謙)의 문하에서 공부하였으며, 18세에 대선(大選)에 합격하였다. 현화사를 비롯해 네 곳의 이름난 가람(伽藍)의 주지를 역임하였으며, 승통(僧統)이 되었다. 《고려사》엔 나오지 않지만 『현화사 승통 각관 묘지명』(玄化寺 僧統 覺觀 墓誌銘)이 남아있어 생애를 알 수 있다. - 후궁: 은씨(殷氏)
- 광지대선사 왕지인(廣智次禪師 王之印)) (1102 ~ 1158)
자는 각로(覺老), 자호(自號)는 영원수(靈源叟). 9세 때 혜소국사(慧炤國師)에게 의탁하여 15세에 승과(僧科)에 급제하였고, 18세가 되던 1119년에 법주사(法住寺)의 주지가 되었다. 1127년에 삼중대사(三重大師), 1132년에 선사(禪師), 1147년에 대선사(大禪師)가 되었다. 《고려사》엔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광지대선사 지인 묘지명』(廣智大禪師 之印 墓誌銘)에 생애가 기록되어 있다. - 후궁: 안씨 - 평주(平州) 향리(鄕吏)[29]의 딸
《고려사》 양리열전(良吏列傳)[30] 유석(庾碩) 편과 『유응규 묘지명』(庾應圭 墓誌銘)에 기록되어 있다. 서해도(西海道) 평주(平州)[31] 출신이다. 예종이 후궁과 혼인해 딸을 낳았는데, 유응규[32]의 묘지명에 따르면 성이 '안'(安)씨였다. 사위인 유필(庾弼)의 관향 역시 평주로 같다. - 왕녀: 안씨(安氏) - 유필(庾弼)의 부인
후삼국 통일전쟁의 명장으로 고려의 개국공신이었던 유금필의 후손인 유필(庾弼)과 혼인하였다. 왕녀 안씨의 증손자인 유석(庾碩)은 성품이 강직하고 청렴결백하여 백성들을 잘 다스렸으나 증조모인 안씨가 예종의 서녀란 이유로 높은 관직에 오르지 못했다. 봉호는 연창택주(連昌宅主)[33]일 것으로 추정된다. - 궁인: 미상
- 왕각예(王覺倪)
법천사(法泉寺)의 주지로, 성수원(聖壽院)을 창건하였다. 《고려사》 종실열전에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고려사》 세가 의종 편에 기록되어 있다. - 궁인: 미상
《고려사》 제신열전 이준창(李俊昌) 편에 원래는 천인(賤肄)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 왕녀: 이준창(李俊昌)의 어머니
5. 기타
- 43세 ~ 44세인 고려 군주의 평균 수명을 산 임금이다. 재위 기간도 17년으로 평균인 14년과 흡사할 정도이다. 폐위당하거나 비명횡사한 케이스들을 제외하면 사실상 제8대 현종 이후, 고려 왕조의 최전성기를 이끈 마지막 군주로 고려사에서 마지막으로 성공을 거둔 명군이라 칭할 만하다. 이 현종-덕종-정종-문종-순종-선종-헌종-숙종-예종-인종 라인은 조선의 태종-세종-문종-단종 라인, 고구려의 소수림왕-고국양왕-광개토대왕-장수왕-문자명왕-안장왕 라인, 신라 중대의 태종 무열왕-문무왕-신문왕-효소왕-성덕왕-효성왕-경덕왕 라인과 함께 한국 역사상 최고의 명군 라인이자 태평성대로 간주된다.
최충의 9재 학당 등 사학으로 인해 관학이 침체되자 살리려고 노력했고, 나중에 동북 9성을 완안부 여진에게 돌려주기는 했으나 아버지 숙종도 실패한 여진을 윤관을 시켜 이기기까지 한 숨겨진 성군이다. 예종 사후 사실상 고려 전기는 막을 내리고, 인종부터 혼란기인 고려 중기에 접어들었다고 볼 수 있다.
고려 제왕으로서 순번으로는 절반에 못 미치는 예종 이후로 무탈하게 재위 기간을 마친 왕이 드물 정도이다. 먼저 아들 인종은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이라는 대혼란을 겪었다. 이어 손자 의종은 무신정변으로 폐위된 이후 천민 출신 이의민에게 끔찍한 방법으로 시해당했으며, 우봉 최씨 집안 출신의 권신들이었던 최충헌과 최우 부자는 임금을 4번이나 바꾸는 등 무신정변 ~ 원 간섭기는 한반도 역사상 유례없는 기나긴 왕들의 수난사였다. 이 시기를 극복하나 싶었던 공민왕(제31대)은 말년에 실정을 저지르다 자제위에게 처참하게 시해당했고,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폐위당한 우왕(제32대) 이후로는 멸망 테크를 밟았다.
- 고려 중기 문제아 중 하나인 이자겸은 예종 이전에도 이미 외척으로 있었지만, 예종 대에서는 일반 친척으로 머물렀다는 것만 봐도 예종 이후와는 격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자겸을 견제하기 위해 예종이 일부러 한안인(韓安仁)을 측근 세력으로 양성하기도 했다. 다만 예종이 죽을 때 후계자였던 인종의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안전한 재위 보장을 위해 이자겸에게 힘을 실어주게 된다. 본인이 태자 시절 겪었던 경험이 은연 중에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본인 역시 숙부인 부여후 왕수가 대놓고 왕위 계승을 염두에 둘 정도로 형제 상속이 일반화된 상황에서 보위에 오르기까지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었을 것이다.
- 대내외적으로 시기를 잘 타고 나기도 했지만, 예종은 아버지 숙종이 강화시킨 왕권을 바탕으로 본격적으로 활약했는데, 이후 인종 때에 이자겸의 난이 발생하며 고려 왕조는 본격적으로 내리막을 걷기 시작한다. 막장의 후반기 300년은 설사 왕이 능력이 있어도 무신정권처럼 실권이 없거나 원나라의 내정 간섭을 극복 못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공무원 시험 한국사 과목이나 한국사능력검정시험에서 간간히 등장하는 왕인데, 보통 양현고와 국자감 7재, 도관인 복원궁 건립, 윤관과 동북 9성으로 대표된다.
- 예종은 예술에 조예가 깊어 1120년 서경 장락궁에 행차해 팔관회를 열고, 향가 <도이장가>(悼二將歌)를 지어 문학적 소양을 나타냈다. 이는 왕권 강화 목적으로 공산 전투에서 태조 왕건을 지키고 전사한 김락과 신숭겸을 기리는 글을 써 신하들에게 왕인 자신에게 충성할 것을 요구하는 목적이었다. 《고려사》 <악지> 중 -속악- 부분이 있는데 '속악'은 '향악'이라고도 하며 우리나라 가락과 우리 말로 만들어진 토착 노래를 말한다. 《고려사》는 유명한 고려의 <풍입송>[34]이나 고대 삼국인 고구려, 신라, 백제의 노래는 전부 속악으로 분류해놨다.
기록된 속악 중 <벌곡조>(伐谷鳥)라는 노래가 있는데 '벌곡조'는 뻐꾹새(뻐꾸기)의 음차로, 예종이 직접 지은 노래라고 한다. 노래가 우리말로 되어 있어 《고려사》는 실 가사를 기록하지 않고, 노래 내용만 기록했는데 <뻐꾸기>의 내용은 예종 자신의 과오나 실수를 겁내지 말고 언제든지 말해달라고 부탁하는 내용이라고 한다.
노래 <뻐꾸기>는 조선 시대까지 남은 듯하다. 조선 왕조에서 만든 《시용향악보》에 <유구조>라는 노래가 있는데 '유구조'는 비둘기를 뜻한다. 노래의 내용이 앞서 설명한 예종의 <뻐꾸기>와 똑같아 사실상 둘이 같은 노래로 보인다.
이 노래는 의외로 제법 많은 사람들이 들어본 기억이 있을 것인데, 2014년 KBS 드라마 <정도전>에서 이 노래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장면은 한양 천도 직후 열린 연회에서였는데 당시 흥에 겨운 이성계가 궁에서 판소리로 이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잠시 등장한다. 이 노래는 권근, 하륜 등의 무리들이 "궁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은 상서롭지 못한 일"이라고 하며 막는 바람에 끝까지 부르지 못한다. 예종 본인이 지은 <도이장가>도 그렇고 《고려사》 <예종 세가>에 보면 서경의 장락궁에 가서 노래를 하나 또 지었다고 하는데 예술가적 면모가 꽤 있었던 듯 하다.
비두로기 새ᄂᆞᆫ / 비두르기 새는
비두로기 새ᄂᆞᆫ / 비두르기 새는
우루믈 우루ᄃᆡ / 울음을 울지만
버곡 댱이ᅀᅡ / 뻐꾹쟁이야
난 됴해 / 난 좋아
버곡 댱이ᅀᅡ / 뻐꾹쟁이야
난 됴해 / 난 좋아
조선조《시용향악보》에 기록된 노래 <유구조>.
비두로기 새ᄂᆞᆫ / 비두르기 새는
우루믈 우루ᄃᆡ / 울음을 울지만
버곡 댱이ᅀᅡ / 뻐꾹쟁이야
난 됴해 / 난 좋아
버곡 댱이ᅀᅡ / 뻐꾹쟁이야
난 됴해 / 난 좋아
조선조《시용향악보》에 기록된 노래 <유구조>.
- 이인로의 《파한집》 <권중>에는 예종이 지은 시가 실려 있다. 예종이 시를 쓰자 신하 곽여가 응제한 문답시로 내용은 아래에 있다. 예종이 수춘궁에 머물며 태자로 있을 때 곽여라는 신하를 알게 되었다. 예종이 즉위하자 곽여는 관직을 버리고 산 속에서 살았는데 예종은 산 속 곽여의 집에 '동산재'(東山齋)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가끔 놀러 갔다. 어느날 예종이 '종실열후'(宗室列侯)라 칭하며 위장하고는 동산재로 갔으나 곽여는 임금이 올 줄 몰랐으니 타지에 가 있던 참이었다. 곽여를 놀래키는데 실패한 예종은 동산재에 잠시 있다가 직접 붓을 들어 벽에 시를 쓰고 갔다.
술을 잊을 곳이 어디일까? / 何處難忘酒
진인을 찾았지만 못 만나고 가네. / 尋眞不遇廻
창문엔 햇빛이 들어오고, / 書窓明返照
옥같은 꽃잎은 재를 덮었네. / 玉篆掩殘灰
지팡이는 아무도 지키지 않고, / 方丈無人守
문도 온종일 열려 있네. / 仙扉盡日開
원에서 새가 늙은 나무에서 울고, / 園鶯啼老樹
정에서 학이 푸른 우리 안에서 잔다. / 庭鶴睡蒼笞
도에 대해 누구와 얘기할까? / 道味誰同話
선생은 가서 오질 않으니. / 先生去不來
깊히 생각하면 마음이 생기고, / 深思生感慨
머리를 돌려 서성거리네. / 回首重徘徊
붓을 휘둘러 벽에 시를 남기고, / 把筆留題壁
누대에 내려가려 하니 싫증이 나네. / 攀欄懶下臺
시 읊게 해줄 태도는 많은데 / 助吟多態度
있는 곳은 아무도 없는 곳이네. / 觸處絶塵埃
더위는 숲 아래서 없어지고 / 暑氣蠲林下
좋은 바람은 전 안으로 들어오니, / 薰風入殿隈
이럴 때 한 잔 하지 않으면 / 此時無一盞
번뇌를 어떻게 씻겠는가? / 煩慮滌何哉
《파한집》<권중> <하처난망주>(何處難忘酒), 예종의 어제시.
진인을 찾았지만 못 만나고 가네. / 尋眞不遇廻
창문엔 햇빛이 들어오고, / 書窓明返照
옥같은 꽃잎은 재를 덮었네. / 玉篆掩殘灰
지팡이는 아무도 지키지 않고, / 方丈無人守
문도 온종일 열려 있네. / 仙扉盡日開
원에서 새가 늙은 나무에서 울고, / 園鶯啼老樹
정에서 학이 푸른 우리 안에서 잔다. / 庭鶴睡蒼笞
도에 대해 누구와 얘기할까? / 道味誰同話
선생은 가서 오질 않으니. / 先生去不來
깊히 생각하면 마음이 생기고, / 深思生感慨
머리를 돌려 서성거리네. / 回首重徘徊
붓을 휘둘러 벽에 시를 남기고, / 把筆留題壁
누대에 내려가려 하니 싫증이 나네. / 攀欄懶下臺
시 읊게 해줄 태도는 많은데 / 助吟多態度
있는 곳은 아무도 없는 곳이네. / 觸處絶塵埃
더위는 숲 아래서 없어지고 / 暑氣蠲林下
좋은 바람은 전 안으로 들어오니, / 薰風入殿隈
이럴 때 한 잔 하지 않으면 / 此時無一盞
번뇌를 어떻게 씻겠는가? / 煩慮滌何哉
《파한집》<권중> <하처난망주>(何處難忘酒), 예종의 어제시.
《파한집》에서는 예종의 시를 본 당시 사람들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6. 대중매체
- 2020년 네이버 웹툰 베스트도전의 작품인 《만월에 핀 연꽃》에서는 남자 주인공 왕세민으로 등장한다.
[1] 선왕인 선종(제13대)의 공주, 즉 예종은 백부였던 선종의 사위가 되는 셈이다.[2] 이자겸의 2녀로 예종비이자 인종의 어머니이다. 인종의 폐비들인 이씨 자매들의 언니이기도 하다.[3] 《고려사》 <예종 세가> 마지막 조 기준[4] 절일은 태자 시절엔 '창녕절'(昌寧節), 왕이 되어 '함녕절'로 바꾸었다. 제24대 원종과 절일이 같다.[5] 누런 집. 오로지 천자만이 누런 지붕을 가진 집에 살 수 있었다. 왕건과 견훤이 신라의 제후를 자칭할 시절에 신라를 '황옥'으로 표현한 적이 있다.[6] 정궁에서 가장 활발하게 사용된 편전이다.[7] 재정을 궁핍하게 하고 민생을 피페하게 했으니[8] 고려 사신이 오는 것을[9] 거란과 고려는 비록 사대관계를 맺고 전쟁을 멈췄다지만 늘 사이가 안좋아 이런 말을 한 것이다. 고려는 거란에 입조하지도 않았고, 자신들이 정복한 강동 6주를 돌려주지도 않았다. 천리장성을 쌓을 때도 거란이 항의했지만 결국 끝까지 쌓았다. 밑에도 나오는데, 거란은 고려가 북송과 만나는 걸 지독하게 싫어했지만 고려는 무시하고 연락을 지속했다.[10] '사찰 간판'이라는 의미이며, 송휘종이 그 편액을 보낸 사찰은 안화사로 예종의 왕후이자 인종의 모후인 문경태후 이씨의 원찰이다.[11] 즉 옛 고구려의 요동성 일대이다.[12] 총력전을 일으켜 완안부를 척살하고 여진족을 완전히 장악하고자 했던 고려의 여진 정벌이 실패로 끝난 게 당장 5~6년 전이었다. 고려가 한창 치고박고 할 때는 가만 있다가 이미 힘 다 빠진 이런 상태의 고려에 협공을 제의하는 천조제의 놀라운 전략적 안목을 엿볼 수 있다(...).[13] 다른 이름은 포주성(抱州城)[14] 성을 지키고 있던 요의 통군(統軍) 야율녕(耶律寧)과 내원성자사(來遠城刺史) 상효손(常孝孫)이 금나라의 공세가 심해지자 고려에게 성을 잠시 맡길 테니 나중에 다시 돌려달라고 당부하고 나서 바닷길로 탈출했는데 물론 다시 돌려받을 일은 영원히 없었다(...)[15] 특이한 건 《고려사》 <윤관 열전>엔 고구려는 일관되게 '구고려'라고 적혀 있다.[16] 중서문하성과 추밀원의 고위 관료들[17] 임금의 자문관인 내시들. 고려시대의 내시는 조선시대의 고자 환관이 아니라 고등 교육을 받은 신진 문벌귀족들이다.[18] 고려의 최고위 무관직[19] 《고려사》 기록의 원문으로 보이는 〈제왕운기〉에는 "고려국왕(高麗國王)"이 "고려국황제(高麗國皇帝)"로 표기되어 있다.[20] 금사에도 금의 조상은 말갈에서 나왔으며, 시조 함보는 고려에서 왔다고 적혀있다.[21] '방'(方)은 '나라 방' 자로 쓰인 것으로 천하 혹은 제후들을 지칭한다. 진(鎭), 주(州), 목(牧)은 고려의 행정단위이다.[22] '方'은 '나라 방' 자이기도 하다. 즉 '多方'은 '많은 나라', '천하'란 뜻이다.[23] 국왕의 관을 높혀 부르는 말[24] 재궁을 왕릉에 묻기 전 안치해둔 전각을 이르는 말[25] 승화백 왕정(承化伯 王禎)의 아들로 현종의 4대손[26] 광평공 왕원의 아들로 문종의 증손이자 숙종의 외손자[27] 진한공 왕유는 예종의 숙부로, 문정왕후는 그의 사촌이다.[28] 최충의 증손자[29] 해당 지역의 관리[30] 백성을 잘 다스린 어진 관리들에 대해 기록한 책[31] 현 황해도 평산군[32] 유필의 아들[33] 의종 대에 유필(庾弼)의 사택이 연창궁으로 승격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의종 대 별궁 문서 참조[34] 고려의 외왕내제적인 성격을 드러내는 노래이다.[35] 전한제국의 최전성기를 이룩했던 세종 무황제 유철[36] 흰 구름과 같은 시 솜씨[37] '정관의 치'를 이룩하며 수말 당초의 피해를 복구하고, 북방 유목민족들로부터 '천가한'(텡그리 카간)이라 불린 태종 문황제 이세민[38] 춤추는 학과 같은 글씨[39] 명나라 말 청나라 초 때의 사람 진침(陳忱)의 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