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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348년 1월 30일[1] (음력 1347년, 충목왕 3년 12월 22일) | ||
고려 경상도 진주 | |||
사망 | 1416년 12월 3일[2] (향년 68세) (음력 태종 16년 11월 6일) | ||
함길도 정평군 | |||
재임기간 | 제8대 영의정부사 | ||
1408년 3월 17일[3] ~ 1409년 9월 27일[4] (음력 태종 8년 2월 11일 ~ 태종 9년 8월 10일) | |||
제10대 영의정부사 | |||
1409년 11월 26일[5] ~ 1412년 10월 5일[6] (음력 태종 9년 10월 11일 ~ 태종 12년 8월 21일) | |||
제12대 영의정부사 | |||
1414년 5월 15일[7] ~ 1415년 7월 2일[8] (음력 태종 14년 4월 17일 ~ 태종 15년 5월 17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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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 문충(文忠) | ||
본관 | 진주 하씨[9] | ||
자 | 대림(大臨) | ||
호 | 호정(浩亭) | ||
학력 | 문과 급제 (1365년) | ||
부모 | 부친 - 하윤린 모친 - 진주 강씨(晋州 姜氏, ? ~ 1380) 강승유(姜承裕)의 딸 | ||
부인 | 진한국대부인(辰韓國大夫人) 성주 이씨 - 이인미(李仁美)의 딸 | ||
자녀 | 슬하 1남 2녀 장남 - 하구(河久, 1380 ~ 1417) 장녀 - 남양 홍씨 홍섭(洪涉, ? ~ 1422)의 처 차녀 - 이승간(李承幹)의 처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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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하륜(河崙)[10]은 여말선초의 관료, 조선의 정승이다.다소 결과론적이지만 인간지사 새옹지마, 끝까지 버틴 사람이 강한 사람이라는 말의 표본인 인생을 살았으며 그러면서도 자신의 분수를 알아 공신으로서 편안히 와석종신하고 주군의 묘정에 배향되는 등 수와 복을 누린 인물이다.
2. 생애
2.1. 고려 말, 기복이 심했던 관직 변천사
1347년(충목왕 3) 순흥부사를 지낸 아버지 하윤린(河允潾)과 어머니 진주 강씨[11] 사이의 아들로 태어나, 정도전, 정몽주 등 신진 사대부들처럼 이색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1360년 국자감시에 합격하고 1365년(공민왕 14) 을사방(乙巳榜) 문과에 을과 3위로 급제한 뒤 여러 내직을 지내며 승승장구했지만 신돈의 미움을 사서 파직되었다가 복직되었다.1365년 윤10월 흥안부원군 이인복, 첨서일직사사 이색이 주관한 과거에서는 윤소종이 장원 급제하고 하륜, 박상진(박상충의 동생), 맹희도(맹사성의 아버지) 등이 급제했다. 고려 시대 함께 급제한 동방 사이의 관계는 각별했음에 주목한다면, 만약 조선 건국 이후 윤소종이 더욱 오래 살았다면 어쩌면 하륜과 행동을 같이 했을수도 있다고 짐작해 본다.
하지만 워낙 강직한 성격으로... 개국공신에는 오르지 못했을 정도로 개성이 강한 윤소종이었기에 단언할 수는 없다. 또한 비록 함께 급제한 동방이라고 해서 반드시 정치적인 행보를 같이 한다는 보장은 없다. 일례로 심효생은 자신보다 18살 어린 이방원과 1383년에 함께 급제한 동방 사이지만, 자신의 딸이 세자 방석의 세자빈이 되었기에.. 무인정사 때 죽음을 피할 수 없었다.
이후 하륜은 보문각 직제학, 성균관 대사성 등의 요직을 거치다가 최영의 요동 정벌에 반대하면서 양주로 추방되었고 위화도 회군 직후에는 이색 계열로 몰려 이성계 일파의 눈 밖에 나서 추방당했다가 복직되기도 했다.
고려사 간신 열전 이인임 전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1388년 우왕 14년에 임견미, 염흥방를 처형하고 이인임을 경산부(京山府)에 안치(安置)하였으며 이인임의 아우 전 평리 이인민(仁敏)은 계림(鷄林)으로 추방하여 봉졸(烽卒)로 만들었다(이인민은 태종 대 정승 이직의 아버지이다. 또한 우현보와 함께 이방원의 좌주로서, 이방원이 과거 급제한 시험을 주관하였다) 여담으로, 맏형 이인복은 동생인 이인임과 이인민의 품성에 대해서 앞날을 걱정하고 우려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인임의 서자인 대호군 이헌과, 이인임의 서사위 지신사 권집경(權執經), 이인임의 조카 우대언 이직(稷), 인척인 첨서 밀직 하륜(河崙), 이숭인(李崇仁), 밀직부사 박가흥(朴可興)은 곤장 치고 귀양 보냈으며 종손(從孫)인 삼사우사 이존성(存性; 이인임의 형 이인복의 손자)은 처단하였다고 한다. 당시 하륜은, 이인임의 동생 이인미의 사위인 관계로 이인임과 인척 간이라 곤장을 맞은 셈이다.
실제 온건 개혁파이기도 했고 본인부터가 이인임의 조카사위[12]로서 권력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13] 그래서 관직 변천사가 제법 파란만장하다. 이성계 세력과 정몽주 세력이 고려 조정에서 대립하던 공양왕 시절에는 전라도 순찰사로 나가 있었고 조선이 건국되자 경기도 관찰사를 지냈다.
2.2. 조선 초기, 태종의 사이드킥
태조가 개경에서 계룡산으로 도읍을 옮기려는 계획을 세우고 이를 실행하기 시작하자 풍수학설을 근거로 계룡산 천도를 무산시킨 후 지금의 신촌 근교인 무악 일대를 새 도읍지로 밀었으나 정도전 등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특히 정도전은 하륜을 직접 거론하지는 않았지만 "술수하는 자들의 말 따위는 믿을 수 없다"며 하륜의 주장을 대차게 깠다.[14] 오늘날의 경복궁 일대로 조정의 대세가 모아져도 끝까지 무악을 고집했으나 결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15] 재주도 있고 출세욕과 성취욕도 강했던 하륜이었지만 당시에는 정도전이 정계를 쥐고 있었고 사적으로도 한양 천도를 둘러싸고 벌였던 논쟁에서 정도전에게 거의 모욕을 당하다시피해서인지 기록으로는 알 수 없지만 정도전에 대해 원망을 품게 되었던 것 같다. 별거 아닌 말 같지만 '술수하는 자'라는 말은 유학자에게는 엄청난 모욕이다. 음양술수 같은 괴력난신이나 논하는 소인배라는 사이비와 같은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정도전과 하륜은 이색 휘하에서 같이 배운 동문이지만 나중에 스승 이색의 비문을 쓰다가 불충 시비로 경을 칠 뻔한 하륜과 달리 정도전은 조선 개국 이후 스승과 동문들을 가혹하게 대우했으니 하륜 입장에서는 정도전을 좋게 보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태조 정권에서는 하륜이 스스로의 능력을 펼칠 기회도 없었고 정도전처럼 중앙에서 나라를 좌우하는 위치로 올라가는 것도 불가능했다.
하륜은 태조의 5남 이방원의 장인인 민제와 친구였는데 민제를 통해서 이방원과 친교를 맺게 됐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방원의 사람이 되어 1차 왕자의 난을 성공으로 이끌어 종국에는 태종의 즉위에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하륜이 이 과정에서 한 일은 또다른 인재인 이숙번을 태종에게 추천하기도 했고 사병이 혁파되는 상황에서 이숙번의 병력을 1차 왕자의 난 때 동원 가능하도록 조치를 취했다. 당시 이숙번은 지안산군사(안산 군수)였는데 정릉(오늘날 정동)을 지키는 임무를 맡게 되어 사역군을 이끌고 상경하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이숙번의 사역군이 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의 기동 호위 병력이 될 수 있었다. 민담집에 의하면 하륜과 이방원을 떼어 놓기 위해 정도전이 하륜을 충청도 관찰사로 내려보냈다. 이방원이 하륜을 불러 송별연을 가졌는데 하륜은 취한 척하고 이방원의 옷에 술을 쏟았다. 화가 난 이방원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자 하륜은 사과한다는 핑계를 대고 이방원을 쫓아가 독대하게 되었고 자리에서 이방원에게 결정적인 책략을 진언했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하륜이 올린 것으로 보이는 진언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하륜이 일찍이 임금(태종 이방원)의 잠저[16]에 나아가니 임금이 사람을 물리치고 계책을 묻자 하륜이 말하기를 "이것은 다른 계책이 없고 다만 마땅히 선수를 쳐서 이 무리를 없애는 것 뿐입니다."하니 임금이 말이 없었다. 하륜이 다시 "이것은 다만 아들이 아버지의 군사를 희롱하여 죽음을 구하는 것이니, 비록 상위(태조 이성계)께서 놀라더라도 필경 어쩌겠습니까?"
<태종실록> 태종 16년(1416년) 11월 6일 하륜의 졸기
<태종실록> 태종 16년(1416년) 11월 6일 하륜의 졸기
하륜이 이숙번을 추천하면서 그 병사를 동원 가능하도록 조치를 취하여 왕자들의 사병을 혁파하고 있던 움직임을 피해 반란을 성공시킬 수 있었고 이후로도 이방원이 태종으로 즉위하는데 많은 역할을 했다. 정종이 즉위했을 때 정사공신 1등으로 진산군에 봉해졌고 마침내 이방원이 태종으로 즉위하자 좌명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 그야말로 태종의 킹메이커이자 사이드킥.
2.3. 조선의 불도저 재상
태종 즉위 후 그토록 바라던 재상의 반열에 오른 하륜은 왕권 중심의 강력한 중앙집권제 아래 태종의 개혁 정책을 계획하고 집행하는 데 앞장섰다. 6조 직계제의 도입이나 도평의사사를 의정부로 개편하는 등의 정치 개혁, 관제 개혁에 직접 관여했고 태종이 실시했던 군제 개혁, 호패법 시행, 조세 제도 정비 등에서도 계획을 입안하고 집행했다. 신문고 설치에도 일익을 담당했는데 신문고를 함부로 칠 우려가 있다는 반대 주장이나 실효성이 있느냐는 등의 비판이 제기되자 "이 제도는 백성이 신문고를 직접 치느냐 마느냐 하는 것보다 백성의 송사를 결단하는 관리들이 스스로 신중을 기하도록 하는 상징성에 더 의미가 있다"는 요지의 말로 비판들을 반박했다. 이외에도 저화(화폐)를 유통시키고자 태종에게 건의하여 이를 실행에 옮겼지만 당시 상품 화폐 경제의 미발달로 실패로 끝났다.[17]조선 초기의 법률인 경제육전(經濟六典)의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정도전이 지은 조선경국전이 있었지만, 정도전의 조선 경국전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저작물에 불과해서 정식 법전으로 사용되지는 못했고, 태조 6년 조준의 지휘로 조선 최초의 법전인 경제육전을 새로 편찬하게 된다. 이를 속칭하여 처음 만들어졌다고 해서 '원육전' 또는 중심 인물인 조준의 이름을 따서 '조준육전'이라고도 한다. 태종 7년 이두 혼용이었던 이 원육전을 하륜이 주도해 순한문화하며 논란이 되던 부분들을 다듬었는데 같은 맥락에서 '속육전' 또는 '하륜육전'이라고 부른다. 속육전은 세종 시기에 이직과 황희에 의해 다시 수정되었고 경국대전의 바탕으로서 조선시대 법률 체계의 원형으로 자리잡는다. 태종의 뜻에 따라 <고려사>와 <동국사략> 등의 역사서 편찬도 감독했으며 <조선왕조실록> 중 태조실록의 편찬 주임이기도 했다. 다른 신하들은 왕자의 난 등 관련자가 살아 있는 사람이 많아서 이르다고 반박했지만 오히려 하륜은 "노성한 신하가 살아있을 때 마땅히 기록해야 되는거 아니냐"며 얼굴을 붉혀가면서까지 실록 편찬을 실행했다고 한다. 이렇게 보이듯이 처세술의 달인이라는 이미지와는 달리 정치 스타일은 전형적인 불도저 타입으로 일 처리가 빠르고 거침없었다고 한다. 일 처리 방식은 태종의 장인이자 친구인 민제까지 화나게 하여 민제가 "저러다가 정도전 꼴나지"라고 디스하게 된다. 이에 하륜은 이렇게 받아쳤다.
"죽고 사는 것은 하늘에 달려 있는 것이오. 옛사람들도 바른 도리를 가지고 억울하게 죽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요행이 죽음을 면한 사람도 있소. 후인들이 스스로 공론이 있을 것이니, 내 무엇을 두려워하겠소?"
이후 민씨 가문은 멸문지화를 당하고 하륜은 천수를 누렸다. 태종을 섬기며 정승 반열에도 올랐고 능력과 이상을 마음껏 펼치기는 했으나 결국 무악 천도는 태종 밑에서도 이루지 못했다. 태종이 종묘에 들어가 돈으로 점을 쳐서 한양의 궁궐터를 정했는데 무악이 한양보다 더 낮게 나오고 만 것이다.
2번이나 운하 건설을 주장한 적이 있다.[18] 본래 삼남(충청, 전라, 경상)에서 세금으로 걷혀 올라오는 곡식을 실은 조운선은 당시에는 섬이 아니었던 안면곶 앞바다를 지나 태안 반도를 돌아 올라가는 항로를 거쳐갔는데 안면곶과 태안 안흥항 앞바다, 강화도 일대의 물살이 거셌기 때문에 배 수십 척이 한꺼번에 침몰하면서 손실되거나 바닷물에 젖어 못쓰게 되는 곡식들의 피해량이 결코 무시하지 못할 정도였다. 때문에 고려 시대 때부터 태안 반도의 좁은 지협을 굴착해 만과 만 사이로 항로를 만들고자 노력하였으나 도중에 중지된 것을 하륜이 이 때 완공하자고 주장한 것이다. 1412년 충청도 안흥량에 운하를 팔 것을 건의했는데 태종이 사람을 보내 주변을 확인하자 다녀온 이들은 운하를 파는 것이 어렵겠다고 보고했다. 하륜은 5,000명의 병사를 동원하여 운하 건설을 강행했지만 결국 실패로 끝났고 1413년 한강과 면해 있는 용산 포구에서 숭례문까지 운하를 파자고 또 주장했지만 1412년 운하 건설 시도가 발린 것을 생각했는지 이번에는 태종이 나서서 의견을 기각했다.[19]
서얼금고법 제정에 크게 기여했는데 하륜은 이자춘의 첩의 자손은 현직에 등용하지 말자고 주장했고 재혼한 여자의 아들과 손자도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게 할 것을 건의했다. 참고로 하륜과 함께 무인정사에 가담하여 태종을 왕으로 만든 이숙번도 재가녀의 아들이고 태종을 지지한 의안대군 이화, 완산부원군 이천우, 완원부원군 이양우도 첩의 자손인데 쿠데타 동지들에게 불이익을 주자는 저런 주장을 당당하게 한 것이다. 무모하다고 봐야할지 아니면 용기가 가상하다고 봐야할지. 당연히 의안대군, 완산부원군, 완원부원군이 하륜에게 눈총을 주었으나 태종이 비호해주었다. 다만 그래도 태종은 왕족에게는 적용대상으로 보는 게 언짢았는지 결국 왕족에게는 예외적으로 서출이라 해도 왕족 취급과 계승권은 주어졌다.
2.4. 탐욕스러운 호정대감
태종 휘하에서 신생 국가 조선의 확립을 주도했던 인물이고 행정을 처리하거나 정책을 입안하거나 정치적 판세를 짜는 부문에서는 매우 뛰어난 인물이었지만 큰 단점이 하나 있으니 바로 권문세족 시절의 버릇을 못 고쳤는지 물욕이 강한 인물이었다는 것. 일례로 신덕왕후의 능인 정릉이 도성 한 가운데를 차지하고 있어 불편하다는 이유로 능 100보까지는 집을 지을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는 상소가 올라오자 태종이 이를 받아들였는데 하륜은 사위들까지 동원해서 가장 먼저 노른자위 땅들을 낼름 집어삼켰다.[20][21] 물론 하륜은 소유욕이 강했어도 어그로는 끌지 않을 각을 보는 능력은 탁월해서 고려시절 몸담았던 권문세족 파당이 일삼던 소작민 수탈이나 사유지 강탈 같은 것은 태종이 추구하던 중앙집권에 정면으로 반하는 지라 하지 않았고, 피해자가 명시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금품 수수와 부동산 개발로 재산을 모았다.예를 들면 친인척들과 함께 백성들을 부역 명목으로 동원하여 국유지를 개간해 전답을 조성한 후 그냥 꿀꺽했다가 들켜서 탄핵당하기도 했고 고려 시절 이인임 일파가 하던 뇌물에도 손을 댔는지 노비들에게까지 벼슬을 팔아먹는다는 욕도 먹었다. 인재를 추천하라는 명을 받자 일도 제대로 모르는 관리들을 추천했다가 태종에게 질책당하기도 했다. 대간들이 가만히 있을리 없었지만 그 때마다 태종이 극구 하륜을 비호해줘서 무사히 넘어갔다.
한편 사상적 측면에선 하륜 본인이 이토록 탐욕스러웠음에도 불구하고 이(理)와 인간의 본성을 하나라고 보았으며 인간의 본성은 선량하다고 생각했다. 저서 <호정집>에서 인간의 본성은 인의예지신이라고 했는데 하륜의 주장은 후대의 이기론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2.5. 말년
이처럼 여러모로 머리가 비상하고 처세술이 뛰어난 인물이었지만 나이가 든 후에는 판단력이 흐려져 말실수를 자주하여 태종에게 핀잔을 들은 적도 많았다. 민무구, 민무질 형제를 처리할 때는 가볍게 벌해야 한다고 말했다가 "그건 옳지 못하다"는 태종의 지적에 기겁한 적도 있고, 이후에도 정신을 못차려 "세자도 아니고 겨우 왕자를 죽이려 한거니까 죄가 크지 않다"고 했다가 태종이 "그런 말은 두번 다시 입밖에 내지 말고 생각없이 말하지 마라”고 하여 "살려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꼬리를 내린 적도 있었으며,[22] 선위 파동 때는 민제를 찾아가 "전하 뜻이 정 그렇다면 선위하시라 합시다"라고 했다가 들킨 적도 있다. 스승인 이색의 비문을 지을 때 조선의 건국 과정을 부정적으로 적은 것[23]이 들통나 거의 목이 달아날 뻔도 했지만 태종은 끝내 하륜을 지켜 주었다. 영의정을 지냈던 이직이 안치되는 일이 있자 하륜이 대놓고 태종의 결정을 비웃으며[24] 이직이 외방에 보내질 죄가 어딨냐고 디스를 하자 태종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일도 있었다.[25]이러한 추문에도 불구하고 친구 민제의 아들들이나 이숙번, 이거이 등과는 달리 공신으로서 부귀영화와 천수를 모두 누렸다. 고금의 예를 보면 보통 개국공신은 장자방처럼 아예 정치와 부귀영화에서 손을 떼지 않는 이상은 토사구팽이 되는 숙명을 피할 수 없는 법인데 하륜은 용케 토사구팽을 피해갔다는 점에서 이상적인 모사 라이프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진짜로 오늘 내일하던 1416년에야 정치 일선에서 완전히 물러나 부원군 작위를 받고 1416년 말에 함길도에 있는 조선 왕가 시조들의 무덤을 살피러 갔다가 객지에서 향년 70세로 죽었다. 하륜의 부고를 들은 태종은 몹시 슬퍼하여 3일간 조회를 하지 않고 7일 동안 고기 반찬을 먹지 않았으며 직접 애절한 조사를 지어 애도했다. 묘는 경상남도 진주시 미천면에 있는데 하륜 묘 뿐만 아니라 하륜의 부친과 조부의 묘도 있다. 이 묘들을 '오방리 팔각형 고분군'이라 하는데 특이하게도 봉분이 8각형으로 되어 있는 형태라서 여말선초의 장례나 묘지 연구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묘들이다.
<조선왕조실록>은 하륜에 대해 "천성적 자질이 중후하고 온화하며 말수가 적어 평생 빠른 말과 급한 빛이 없었으나 관직에 나아가서는 의심을 결단하고 계책을 정함에는 조금도 헐뜯거나 칭송한다고 해서 그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태종의 후계자인 세종은 하륜을 그렇게 좋게 보지 않았던 모양이다.[26] 세종은 하륜에 대해 이렇게 평을 내리고 있다. 요약하자면 '아버지가 단수가 높으셔서 하륜을 데리고 일하셨지 나였으면 진작에 박살냈다' 정도의 의미다.[27][28]
"하륜은 학문이 해박하고 정사에 재주가 있어 재상으로서의 체모는 있지만, 청렴결백하지 못하고 일을 아뢸 때도 여염의 청탁까지 시간을 끌며 두루 말하곤 했다. 내 생각으로는 보전하기 어려울 것인데도 태종께서는 능히 보전하시었다."
<세종실록> 세종 20년(1438년) 12월 7일
<세종실록> 세종 20년(1438년) 12월 7일
임용한은 저서 <조선국왕 이야기>에서 그래도 하륜이 선을 지키면서 욕심을 부렸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물론 하륜이 절제력이 뛰어나서 그런건 아니고 당시 관료들에게 용인되던 수준이나 더 욕심을 부리면 태종에게 목이 달아날 수준까지는 넘지 않을 정도로 해먹었다는 의미다. 하륜이 살면서 온갖 스캔들에 휘말렸지만 주로 재물을 해쳐먹은 일과 늙어서 태종의 정치쇼를 잘 못참아 넘긴 일뿐이고 혈연으로 연결되어 관련성을 피할 길이 없었던 민씨 형제나 세자와 어울리고 뇌물을 바친 구종수 형제에게 얽히고 양녕대군 면전에서 태종의 정책을 비판한 이숙번과 달리 주군 태종이 극도로 혐오하던 외척짓거리, 귀족짓거리와는 끝까지 담을 쌓았으며 언행의 실수는 했어도 태종이 숙청한 외척과 공신들의 주 레퍼토리이던 '네가 누구 덕에 보위에 올랐느냐?'같은 발언을 하지 않았고 무엇보다도 다른 공신들과 달리 가능한 오래도록 태종의 정치적 실무를 계속해서 주도함으로써 자신의 이용 가치를 유지했다. 말년에 몇 번 태종의 심기를 건드리기는 했지만 역린을 자극하는 것은 끝까지 피하는데 성공했다. 태종이 더 건드리지 않은건 상술대로 욕심은 많아도 왕권에 직접적으로 위협은 가하지 않았고, 태조-정종-태종 3대를 보필하며 세운 공훈이 있는 원로대신인데다 태종보다 나이가 20살 더 많아서 세자가 왕위에 오를 때면 이미 죽거나 정계에서 물러났을 테니 굳이 애써서 죽이거나 숙청을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하륜은 70이 되던 해 스스로 관직에서 완전히 물러나 함경도에서 조선 왕조 시조들의 무덤 살피는 일을 하다가 그해에 사망했다.
3. 여담
- 고려 말에는 권문세족, 조선 초에는 공신으로 부귀영화를 누렸다. 태종 즉위에 큰 공이 있어 2번 공신에 올랐다. 일흔살까지 천수를 누리며 고려와 조선 두 왕조의 신하로서 충목왕 대부터 태종 대까지 아홉 왕의 시대를 살았으며 공민왕부터 태종까지 7명의 왕을 섬긴 인물이다. 정몽주보다는 10살, 정도전보다는 5살 어리나 이방원보다는 20살 많다.
- 연려실기술에 의하면 하륜은 죽기 직전에 꿈에서 태조가 몹시 화를 내는 것을 보고 나서 병이 나 죽었다고 한다. 사실 태조 입장에서는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이 자기 조상의 묘를 돌아보러 왔으니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이다.
- 기본적으로 유학자였지만 천문이나 의술, 풍수, 지리 등의 잡학에도 관심이 많아서 이런 부분에도 전문가 수준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하며, 특히 사람의 관상도 볼 줄 알았다고 한다. 용의 눈물에서 묘사된 하륜은 이런 면모를 강조하여 묘사된 셈이다.
- 용재총화에 의하면 조선시대판 인생게임이라고 할 수 있는 승경도 놀이를 고안한 사람이 바로 하륜이라고 한다. 후대 사람들에게 인생과 처세술에 통달한 인물로 여겨진 하륜이 인생게임을 만들었다는 건 굉장히 절묘한 부분이다.
- 왕족이던 태종의 종친 이백온[29]이 하륜의 첩실을 탐내 하륜이 죽은지 얼마 안 돼 부하들을 보내 보쌈하려다가 걸리자 그동안 이백온의 온갖 더러운 짓을 눈감아주던[30] 태종도 더 이상 봐주지 않고 모든 권리를 박탈하고 유배보냈다.#
- 연려실기술에 기록된 바로는 태종의 목숨을 두 차례나 구한 은인이다. 태종이 아버지를 달래서 함흥에서부터 오게끔 하였는데 하륜은 아직 태조의 앙금이 다 가라앉지 않는것을 간파하여 태종에게 그에 대해 대비할 것을 일러주었고 그것이 적중하여 태종의 목숨을 구원했다고 한다. 이런 기록 때문인지 그간 여러 매체에서 하륜이 조사의의 난 당시 태종 옆에서 그를 돕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실록에 따르면 사실 하륜은 당시 명나라에서 영락제가 즉위하여 이를 축하하기 위한 사신으로 조사의의 난이 발생하기 전인 태종 2년 10월 15일에 출발해서 태종 3년 3월 17일에 조선에 돌아왔다고 한다.[31]
태조가 함흥으로부터 돌아오니, 태종이 교외에 나가서 친히 맞이하면서 성대히 장막을 설치하였다. 하륜 등이 아뢰기를, "상왕의 노여움이 아직 다 풀어지지않았으니 모든 일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열 아름이나 되는 큰 나무로 기둥을 만들었다. 양전이 서로 만나자, 태조가 바라보고 노한 얼굴빛으로 동궁에 백우전을 힘껏 당겨서 쏘았다. 태종이 급히 차일 기둥 뒤에 몸을 가려 화살이 기둥에 맞았다. 태조가 웃으면서 노기를 풀고 "하늘이 시키는 것이다." 하고 옥새를 주면서 이르기를, "네가 갖고 싶어하는것이 이것이니 이제 가지고 가라." 하였다. 태종이 눈물을 흘리면서 세 번 사양하다가 받았다. 마침내 잔치를 열고 태종이 잔을 받들어 헌수하려할때 하륜 등이 몰래 아뢰기를 "친히 하지 말고 내시에게 주어 드리시오." 하므로, 태종이 또 그 말대로 하여 내시가 잔을 올렸다. 태조가 다 마시고 웃으면서 소매 속에서 쇠방망이를 꺼내 놓으면서 이르기를, "모두가 하늘이 시키는 것이다." 하였다.
<연려실기술> 1권 <태조조 고사본말>, 축수편
<연려실기술> 1권 <태조조 고사본말>, 축수편
- 진주 하씨 문충공파의 시조이다. 진주 하씨 11대손[35]이며 고려 현종 때의 문신 및 무장이자 여요전쟁에서 활약했던 하공진[36]의 자손이다. 할아버지는 식목녹사에 추증된 하시원, 할머니는 정균의 딸 증 정경부인 진주 정씨이고 아버지는 순흥부사 증 진양부원군 하윤린, 어머니는 증 진한국대부인 진주 강씨이다. 하륜은 이인임의 조카사위로, 이인미의 딸 진한국대부인 성주 이씨와 결혼했다. 아들 1명, 딸 2명을 얻었는데 장남은 좌군도총제 하구이고 첫째 사위는 홍섭, 둘째 사위는 이승간이다.
4. 대중매체
- 1983년 MBC 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 1부 추동궁마마에서는 배우 신충식[37]이 연기했다. '꾀주머니'라는 평이 맞도록 탐욕스럽고 온갖 음모를 꾸미는데 <조선왕조실록>에서 부정적으로 묘사된 정도전의 이미지를 모두 하륜에게 옮긴 냄새가 난다.
이성계 즉위 이전 시점, 고려 말.. 이성계가 말에서 떨어져 타치기 얼마 전 시점에서 이방원(이정길 배우 역)과 처음 만나며, 방원에게 자중자애해야 한다고 충고한다.
- 1996년 KBS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는 배우 임혁[38]이 연기했다. 임혁 배우는 1983년 kbs 드라마 개국에서 고려 공민왕을 맡아 열연했다.
고려 말 여러 문신들 가운데 한 명으로 극에서 등장하며, 여러 정쟁에 휘말려 귀양지에서 돌아온 후에 포은 정몽주와 함께 목은 이색을 찾아뵙고 절한다(이색은 하륜의 좌주이다)
그 자리에서 하륜은 민심은 이미 고려를 떠났다고 하며 자신은 이제부터 순리에 따르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친한 사이인 민제의 집을 찾아 포부를 밝힌다. 그리고 이성계의 생년일시를 민제에게 물어본 후 사주를 점친다. 그리고 천하가 이성계의 손에 달렸다고 이야기한다.
어느 시점부터 이성계를 돕는 역할로 슬슬 갈아타기 시작했다.[39] 태종을 보좌하여 왕위에 올리는 지략가의 이미지가 매우 두드러지며 악연이자 정적 관계인 정도전을 한편으로는 존경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정도전이 죽기 직전에 "편히 뫼셔 드리게나"라고 태종의 집사에게 부탁할 정도.[40] 그래서인지 탐욕스러운 모습은 크게 묘사되지 않았고[41] 오히려 강직하고 호탕한 인물로 묘사된다. 심지어는 민씨 형제에 대한 태종의 처분을 두고 이숙번이나 정승들 앞에서 "그들은 무고하게 희생된 것 뿐 아닌가?"라고 일갈. 그 말을 들은 이숙번이 몸조심하라는 식으로 반 협박을 하자 오히려 "천하의 이숙번 대감께서 이 하륜의 목숨을 걱정해주다니 별일이구만!"이라며 받아넘기는 모습도 보여준다.[42] 킹메이커이자 지략가의 포스를 뿜어내지만 실제 하륜이 가지고 있었던 탐욕스럽거나 경솔한 면모는 나타나지 않는다. 드라마에서 정도전이 한 국가의 기틀을 다지는데에 공을 세운 참모라면 하륜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고 똘똘하고 충직한 참모 정도의 이미지가 강하다.[43][44]
여담 : 조선왕조실록에서는 하륜이 민무구, 민무질 형제의 처벌을 청하는 대신들 사이에 끼어있는 대목이 보이지만... 용의 눈물 드라마 상에서 하륜은 끝까지 민제와의 의리를 지킨다(민제가 세상을 떠난 후 문상을 온 유일한 조정 대신이다...)
드라마 상에서 태종이 성석린, 하륜, 조영무 앞에서 민무구, 민무질 형제에게 자결을 명할 것을 말하자.. 하륜은 '하오나 상감마마~' 라며 뭐라고 아뢰려고 하나 태종은 조용한 어조로 뒷 말을 막는다..
드라마 상에서 태종이 성석린, 하륜, 조영무 앞에서 민무구, 민무질 형제에게 자결을 명할 것을 말하자.. 하륜은 '하오나 상감마마~' 라며 뭐라고 아뢰려고 하나 태종은 조용한 어조로 뒷 말을 막는다..
- 2008년 KBS 드라마 <대왕 세종>에서는 배우 최종원[45]이 연기했다. 처음 등장시에는 조그마한 떡을 먹고 다른 대신들에게도 권하는 동네 할아버지 같은 모습을 보여주지만 얼마 안가 자신을 찍어내려고 작정한 박은을 연거푸 엿먹이며[46] 노회한 정객의 포스를 드러낸다. 오래 등장하지는 않았지만 태종의 어전에서 나와 물러나는 23회의 퇴청 씬은 호평이 많았다. <용의 눈물>의 하륜과 실제 역사의 하륜을 섞어놓은듯한 모습으로 태종을 위해 셀프 탄핵을 시전한 하륜에게 던지는 "그렇게 충심이 깊은 놈이 비리를 그 따위로 저질렀냐?"는 태종의 질문이 이를 아주 잘 나타낸다. 이에 대한 하륜의 대답은 "전하를 왕위에 올려놓은 댓가로 그 정도는 챙겨도 된다고 생각했나봅니다." 셀프 탄핵 후 궁을 나설 때까지도 "토끼를 사냥(하륜의 제거)하면 남은 것은 사냥개를 삶는 것(박은의 숙청)"이라며 비꼰다.[47] 그리고 태종은 하륜이 예견한 대로 의정부서사제를 혁파한 뒤 육조직계제를 실시하면서 이조판서였던 박은을 좌의정으로 승진시킨다. 물론 말이 승진이지 실권 없는 명예직에 불과한지라 박은은 당연히 경악한다.[48]
- 2014년 KBS 드라마 <정도전>에서는 배우 이광기가 연기했다. 정도전[49]과는 애증 관계의 사형-사제 관계로 나온다. 정몽주가 죽고 본격적으로 이방원을 점찍기 전까지 이성계를 제대로 돕는 면이 없다. 실제 역사에 부합하게 묘사된 하륜이 "소생 하륜입니다"라는 대사로 컬트적인 인기를 누렸다. 하륜(정도전) 문서 참조.
- 2015년 SBS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에서는 배우 조희봉[50]이 연기했다. 22회에서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책략으로 이성계와 정도전을 견제하며 첫 등장한다. 이인겸이 죽었다는 소식이 누구의 귀에도 들어가지 못하게 막아 정도전과 그의 일파들의 관심을 죽은 이인겸에게 쏠리도록 만들고 이인겸의 이름을 이용해 창왕을 옹립하는데 성공한다. 재밌는 것은 훗날 하륜의 도움을 받아 왕자의 난으로 끝내 왕의 자리에 오르는 이방원이 첫 대면에서는 하륜에게 제대로 농락을 당하는 모습을 보였다는 점인데 이방원과 하륜의 첫 만남은 악연으로 시작했다. 그런데 22회에서 보여줬던 지략이 무색하게 24회에서 이방원에게 털리고 정도전에게 털린다. 역대 하륜 중 개그 캐릭터적인 특징이 가장 두드러지는 캐릭터이기도 하다. 하륜(용비어천가 시리즈) 문서 참조.
- 2021년 KBS 드라마 <태종 이방원>에서는 배우 남성진[51]이 연기했다. 하륜(태종 이방원) 문서 참조.
5. 관련 문서
[1] 율리우스력 1월 22일[2] 율리우스력 11월 24일[3] 율리우스력 3월 8일[4] 율리우스력 9월 18일[5] 율리우스력 11월 17일[6] 율리우스력 9월 26일[7] 율리우스력 5월 6일[8] 율리우스력 6월 23일[9] 11세손.(족보)[10] 1990년대 이전에 나온 역사책에는 간혹 '하윤'이라고 표기되어있다. 현행 맞춤법에는 하륜과 하윤 둘 다 맞다. 원칙적으로 이름(성씨 제외)의 첫 글자는 두음 법칙에 따라 두음으로 적게 돼 있지만, 외자인 경우 원음대로 적는 것도 허용한다. 따라서 살아 있는 사람이면 본인의 의사를 물어서 바라는 표기대로 적으면 되는데, 두 표기가 혼용되고 있다. 다만 현재는 하륜이 압도적으로 많이 쓰이는 듯하다.[11] 강승우(姜承祐)의 딸이다.[12] 이인임의 동생인 이인미의 딸과 결혼.[13] 이색 이전에 학문을 배웠던 스승이 이인임의 형인 이인복이어서 이러한 인연으로 조카사위가 되었다.[14] 하륜을 일부러 저격했다고 하기는 좀 그런게 사실 정도전이 한양 천도를 미는데 있어 진짜 난적은 하륜이 아니라 똘똘 뭉쳐 부소명당(송악)에 남자고 빼액대는 서운관 관리들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한양을 밀었던 정도전 이외에는 저마다 음양풍수를 가지고 논했으니 하륜도 싸잡아 까인 건 맞다.[15] 정도전은 무악 일대가 너무 좁다고 반대했다.[16] 즉위하기 전의 왕이 있던 집을 의미한다.[17] 이는 태종의 후계자인 세종도 이루지 못했으며 뒷날에도 다른 왕들과 재상들이 시도했지만 실패로 돌아갔다. 조선의 화폐 유통은 먼 훗날 숙종 때에야 정착(상평통보)된다.[18] 하륜의 주장은 일리가 있는 편이었다.[19] 이후 태안 쪽은 조선 인조 때까지 시도를 했지만, 중간 지점에 자리한 화강암반 때문에 실패하고 인조 말 충청도 관찰사에 부임했던 김육이 대안으로 판 곳이 지금의 안면도이다. 강화도 쪽 역시 마찬가지로 훗날 경인 아라뱃길이 생길 때까지 지속되었다고 한다.[20] 그러나 혹자는 이런 행위를 태종의 하륜에 대한 의심을 풀기 위한 처세술의 하나로 해석하기도 한다.[21] 중국의 대표적인 킹메이커이자 명재상이었던 소하도 고조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물욕이 있는 척 비리를 저지른 적이 있는데, 하륜은 진짜 물욕이 있었다는게 차이점이다.[22] 당연한 소리가 무인정사를 감안하면 정말 하륜이 아니면 목이 떨어져도 남아나지 않을 죄다. 이해가 안 된다면 정도전이 이방원 등 왕자들을 죽이려 한 '종친모해죄'를 덮어쓴데다 그 태종도 태조 시절에는 세자 이외에 유능한 왕자였다.[23] 이숭인 장살사건이었는데 이숭인의 장살을 주도한 '당시의 권력자들'을 비판한 사건이어서 당시 권력자들이 누군지에 대해 태조가 자유롭기는 불가능했기에 태조의 친아들이기도 한 태종이 현위 군주라 위험했지만 태종이 하륜을 살려주려던 의지가 강하여 '이숭인 장살을 주도한 권력자=정도전' 논리를 관철시켜서 빠져나갔고 정도전이 이 죄를 다 뒤집어쓰는 것으로 사건이 종결된다.[24] 왕의 면전에서 말 그대로 피식 웃었다.[25] 이직과 하륜은 사촌동서지간이다.[26] 그럴 수 밖에 없는게 세종이 본 하륜은 전성기 시절이 아니라 말년에 실책하던 모습이기 때문이다. 세종과 하륜은 서로 50살이나 차이가 난다.[27] 그런데 세종은 자기 집이 시끄럽다고 서대문까지 틀어막은 이숙번에 대해서는 의외로 하륜보다 좋게 평가했다.[28] 다만 세종의 이 말은 자기 부정이기도 했는데 세종 본인 또한 총신의 비리와 부정부패를 온 힘을 다해 비호한 전력이 아주 화려한 왕이라서 까놓고 말해 능력만 있으면 관리들의 인성적 결함은 끝까지 실드쳐준건 세종이나 태종이나 부전자전이다.[29] ? ~ 1419년, 태종의 사촌(이성계의 이복형제인 이원계의 아들)들 중 하나로 왕자의 난엔 참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행태가 불량하고 주색을 너무 밝혀 왕조 초기부터 저런 왕족이 있으면 백성들의 민심을 잃는다는 공신들의 권고를 자주 들었음에도 태종은 눈감아주었다. 하지만 죄도 없는 머슴들을 잔혹하게 학대하다 죽이고 여색을 탐하는게 심해져서 결국 하륜의 첩실까지 탐내어 그가 죽은 직후 보쌈하다 걸리자 모든 특혜를 박탈당하고 유배당하여 초라한 신세를 한탄하다가 오래못가 죽었다. 참고로 이 작자의 이야기는 고우영의 '수레바퀴'에도 실려있다.[30] 다 눈감은 건 아니다. 1405년 이백온이 죄도 없는 여종의 남편을 잔혹하게 꼬챙이로 찔러죽이자, 대사헌 이래(李來) 등 대신들이 아무리 신분이 낮다고 해도 죄도 없는 사람을 잔혹하게 죽이는 악귀같은 왕족은 왕조에 이로울 게 없다고 끈질기게 탄원해 곤장 20대를 치고 멀리 3년동안 유배를 보낸 바 있다. 헌데 지평(持平) 이흡(李洽)이 이백온을 묶어 호송하자 이걸 본 태종은 분노해 이흡을 하옥시켰다. 그러자, 이래는 "이흡은 맡은 일을 다한 것 뿐이온데, 왜 처벌하십니까?" 라고 강력하게 반대했다. 태종도 분노해 "경(卿)은 이씨 나라의 신하가 아닌가? 어찌하여 종친(宗親)을 이와 같이 대우하는가!”라고 화냈으나 이래는 굽히지 않고 “신은 종친을 모욕하려는 것이 아니라 전하의 덕을 보필하려는 것입니다.”라고 물러서지 않았다. 이래는 1400년에 이방간이 일으킨 2차 왕자의 난을 진압한 공로를 인정받아 태종으로부터 추충좌명공신(推忠佐命功臣) 2등에 올랐고 나중에 좌군동지총제(左軍同知摠制), 계림군(鷄林君) 칭호,즉 준왕족급 칭호를 받은 1등 공신이니 태종으로서도 함부로 대할 수 없었기에 결국 이릅을 풀어줘야 했다. 그러나, 유배지에서 먹을 거 잘 먹고 그렇게 이백온은 고생하지 않았다. 이래는 1416년 하륜보다 같은 해, 몇달 먼저 세상을 떠나서 이백온의 처벌을 다시 주장하지 못했다.[31] 태종 2년 10월 15일 을축 2번째기사, 태종 3년 3월 17일 갑오 1번째기사[32] 재미있게도 SBS 용비어천가 드라마 시리즈인 <육룡이 나르샤>의 하륜, <뿌리깊은 나무>의 한명회 둘 다 배우 조희봉이 연기하였다. 뿐만 아니라 배우 최종원도 왕과 비에선 한명회를, 대왕 세종에선 하륜을 연기했다.[33] 하지만 전 왕조(=고려)의 문과를 급제한 하륜과 끝내 문과를 통과하지 못 한 한명회 두 명 사이에는 일정 시점 임관한 관료들과 동등한 학문 수준을 국가 시험을 통해 본인이 증명한 후 본인이 갖고 있는 정략에 대한 식견을 결합하여 입신 출세에 성공한 케이스인 전자와 입신 출세의 시작점이 '정략' 하나 뿐이었던 후자라는 차이가 존재한다. 또한 황희도 행정 능력은 뛰어나지만 하륜처럼 권력 쟁탈은 하지 않은 만큼 어찌보면 황희의 행정 능력에 한명회의 야심을 모두 가진게 하륜이라고 할 수 있다.[34] 진나라 왕전은 60만 대군을 이끌고 출정하면서 시황제에게 끊임없이 하사품을 요구했다. 심지어 전쟁중에도 좋은 땅과 보물을 약속해주기를 바랬다. 덕분에 1년동안의 장기전에도 모반의심은 꾸준하게 받았지만 경질되지 않으며 진나라의 통일을 이룰 수 있었다. 현대의 관점에서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과거에는 왕권에 대한 도전은 용서받을 수 없었지만 큰 능력에 비해 뇌물이나 탐욕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나(신하)는 너(왕)의 권력에는 관심도 없고 오직 눈앞의 코묻은 돈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라는 것은 그 시대의 신하된 자로서 갖추어야 할 덕목이었다. 신하는 왕보다 인망(인기)을 갖추어서는 안되는 것이 지금의 도덕성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겠지만 조광조나 이순신처럼 신하가 왕보다 뛰어난 인재들의 말로를 보면 알 수 있다.[35] 4대손은 오류임. 시조(하공진공)께서 1011년에 순국하셨으니 그로 336년이 지난 점을 보면 알 수 있다[36] 강조의 정변에 참여한 인물로 2차 여요전쟁 당시 거란이 고려를 침범하자 적진에 들어가 현종의 친조와 자신의 볼모를 조건으로 거란군의 철수 교섭에 성공하였다. 이후 거란에서 탈출하려다 발각되어 친국을 당하고 회유를 받았으나 끝내 거절하여 살해되었으며 고려에서 상서공부시랑을 추증하였다. 후일 '하공진 놀이'라 하여 하공진의 충절을 기리는 잡극(일종의 연극)이 예종 때 열리기도 했다고 한다.[37] 1985년 MBC 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 5부 임진왜란에서는 원균 역, 1990년 MBC 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 11부 대원군에서는 미우라 고로 역, 2000년 KBS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는 석총 역.[38] 1990년 KBS 드라마 <파천무>에서는 단종의 충신 성삼문 역.[39] 이를테면 정몽주가 이성계를 죽이려고 할 때 "이성계를 꼭 살려야 한다"는 등 이성계를 위한다.[40] 실제 이색 문하에서 같이 동문수학한 사이.[41] 경기 관찰사 시절 이방원이 하륜에게 "신수가 훤한데 혹시 가렴주구하시는게 아니오?", "많이 해 먹었냐? 기방도 많이 섭렵했지?"라고 묻는 장면이 두어 번 스치듯 나오기는 한다.[42] 그 외에도 풍수지리와 역학에 능하고 천기를 읽을 줄 알아 이성계의 사주를 듣고 왕이 될 것을 예언하였으며 이방원이 왕이 될 것을 읽어내었고 여흥 민씨 가문의 몰락과 자신이 죽을 날도 미리 알고 있었다. 죽을 때에도 '역사는 이 하륜이를 어찌 평가하겠는가'하고 자신이 걸어온 길을 되짚어보다가 '인생무상, 제행무상'이라는 글을 남기고 걸어나가다가 그대로 쓰러져 사망하는데 이 때의 모습도 폭풍간지.[43] 이제 갓 출사한 이숙번에게 "도량이 좁아서 남의 집 모사꾼 노릇이나 할 만하지 재상감은 아닌 양반"이라는 평을 들은 바 있다.[44] <용의 눈물>을 시청한 세대들은 추억 보정 때문에 실제 하륜의 이미지에 가까운 다른 배우들의 하륜보다 임혁을 선호하기도 한다.[45] 1998년 KBS 드라마 <왕과 비>에서는 한명회 역.[46] "나 하륜이야! 하륜!"이라고 박은에게 호통을 치는 장면이 나온다.[47] 박은의 아버지인 박상충은 하륜과 이색 문하에서 공부한 사형-사제 지간이다. 애초에 아버지뻘하고의 싸움이니 짬밥 자체가 다르다.[48] 정승이 실권을 휘두르던 의정부서사제와는 달리 육조직계제에서는 인사권을 담당하는 이조의 권한이 제일 막강하였다. 실제로 박은이 좌상에 임명되기 전까지는 '이제 박은의 세상'이라고 한탄할 정도.[49] 둘은 각각 이인임의 당여와 이성계의 혁명파 소속으로 정적 관계로 시작하기는 했지만 조선 개국 전까지 둘 사이의 접점은 같은 사대부이자 스승 목은 이색의 제자이자 성균관에서 동문수학했다는 것 이외에는 그다지 없었다.[50] 2011년 SBS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에서는 한명회 역.[51] 2014년 KBS 드라마 <정도전>에서는 공양왕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