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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6-06 14:38:04

남지(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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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00d45,#94153e><colcolor=#f0ad73> 조선 정승
충간공(忠簡公)
남지
南智
출생 생년 미상
1392년(태조 1)족보 기록 또는 1398년(태조 7) 추정[1]
사망 1453년(단종 1)
시호 충간(忠簡)
본관 의령 남씨
지숙(知叔)[2]
부모 부친 - 남경문(南景文, 1370 ~ ?)
모친 - 숙녕택주(淑寧宅主) 온양 방씨[3]
부인 전의 이씨 이문간(李文幹)의 딸
자녀 슬하 5남 3녀
장남 - 남윤(南倫)
차남 - 남칭(南偁)
3남 - 남구(南俅)
4남 - 남휴(南休)
5남 - 남의(南儀)
장녀 - 임영대군[4]의 정부인 군부인 남씨
차녀 - 의춘군(宜春君) 이우직(李友直, 1439 ~ 1454)[5]의 처 군부인 남씨
3녀 - 평양 조씨 조무영(趙武英)[6]의 처

1. 개요2. 생애3. 여담4. 사직 상소 시리즈

[clearfix]

1. 개요

남지는 조선 세종, 문종조의 상신[7]이다.

할아버지는 개국 1등공신 영의정부사 남재이며 종조[8]남은, 외할어버지는 참의 방순, 아버지는 남경문[9] 동생은 예문직제학 남간, 태종부마인 의산군 남휘이다.

젊어서 세종의 총애을 받아 문음으로 출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청요직[10]을 거쳐 당상의 반열에 올라 세종조에 우의정, 문종조에 좌의정이 되었고 문종의 고명대신이 되었다.

세종, 문종, 단종 3대를 모시며 삼공의 자리에 오른 그는 1452년 영중추원사[11] 재임중 사망.[12]

2. 생애

17세에 음보로 정6품 사헌부 감찰이 되고, 1422년 사헌부 지평을 거쳐 이후 부정, 부사정, 사헌부 지평, 장령을 거쳐 1428년 종3품 사헌부 집의가 되었고, 1429년에는 정3품 동부대언이 되었다. 1430년에는 우부대언, 좌부대언을 거쳐 좌대언, 우대언 등을 역임하였다. 이때 김종서와 같이 대언을 지냈다.

1432년에 형조좌참판이 되었으며 형조우참판을 역임 중 경기감사가 병으로 관직을 사임하자 경기 감사로 임명되었고 중추원부사를 겸하였다. 1433년에는 예조우참판에 제수되었으며 다시 형조우참판으로 제수되었다. 1434년에는 충청도 감사로 나갔으며 1435년에는 형조참판으로 성절사가 되어 에 가서 "음주자치통감(音註資治通鑑)" 1질을 받아왔다. 1436년 개성유휴사 부유후로 제수되었고, 1438년에 호조참판이 되었다가 바로 대사헌에 제수되었다. 1439년 재차 호조참판을 역임하고 경상도 관찰사로 나갔다. 1440년에 형조판서가 되고 정2품 중추원사를 거쳐 이듬해 호조판서가 되었다.

1445년에는 다시 형조판서가 되었고, 1446년에는 소헌왕후의 수릉관이 되었으며 중추원판사[13]를 겸하였다. 1448년에는 의금부 제조[14]를 거쳐 판중추원사 겸 판병조사가 되었다. 1449년에는 정승인 우의정으로 승차하여 명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중략) 남지(南智)를 등극사로 삼았으므로, 특별히 이를 제수한 것이고, (하략)
세종실록 126권, 세종 31년 10월 5일


남지(南智)는 의령부원군(宜寧府院君) 남재(南在)의 자손으로, 천성이 단정하고 온아하여 일찍부터 이름이 있더니, 갑자기 높은 지위에 오르매 광영(光榮)이 빛났었다.
세종실록 126권, 세종 31년 10월 16일 계해 1번째기사 1449년

문종 때 사창[15]의 시행에 대해 홀로 의견을 개진하여 사창의 제도가 유지되도록 하였다.
"사창의 시험은 신이 세종(世宗) 때에 헌의(獻議)하였거니와, 지금 다시 생각하여도, 비록 삼대(三代)의 법일지라도 폐단이 없지는 않았으니, 이는 법이 좋지 않은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달렸기 때문입니다. 의창법(義倉法)은 훌륭하다 하겠으나, 법의 시행이 오래되면 폐단이 생기는 것은 형세가 자연히 그렇게 되는 것이므로, 그 염산(斂散)할 즈음에 백성이 원망을 일으키는 것과 대체로 수령(守令)·감고(監考)의 문란[冒濫]한 폐단이 진실로 한 꼬투리가 아니니 뒷날 폐단을 일으키는 것이 다만 사창이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청컨대 우선 12고을로 하여금 모두 시험하게 한 뒤에 다시 의논하여 시행하소서."

문종이 외조부 심온의 직첩을 되살리는데 하문하니 이에 대해 찬성하는 의견을 개진하였고 이에 문종은 바로 그 직첩을 복권하였다.
"심온의 죄는 신이 알기로는 실로 영세(永世)토록 용서하지 못할 죄가 아닙니다. 전일의 의논은 신이 미처 알지 못하나, 신의 의견으로는 마침내는 도로 내려 주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어제 비문을 보고 김종서와 의논하기를, ‘종실(宗室)의 부옹(婦翁)으로서 직첩이 없는 자에게도 오히려 추증(追贈)하여 비문에 실려 있는데, 더구나 국구(國舅)로서 이미 지낸 직함(職銜)을 쓰지 못하는 것이 어찌 흠이 아니겠는가? 하물며 비문이 한번 새겨지고 나면 후세에 고치기 어려움에 있어서이겠는가?’ 하였습니다. 오늘의 하교(下敎)는 바로 신의 마음에 합당합니다."

1451년(문종 1년) 좌의정으로 승차하고 이후 문종의 고명대신이 되었다. 문종이 승하하고 1452년 단종이 즉위했을 때에는 이미 풍이 심해져 대부분을 집에서 요양하며 필요한 경우에만 출사를 한 것으로 보인다.[16] 세종, 문종, 단종 3대에 걸쳐 봉직하면서 신병을 이유로 수차례 사직을 청하였으나 모두 반려되는 기록을 갖게 되었다.
좌의정 남지(南智)는 풍병으로 재고(在告) 중에 있었고, 좌찬성(左贊成) 이양(李穰)은 무인(武人)인데, 의친(議親) 공신의 자손으로 세종의 수릉관이 되어 갑자기 1품에 올랐으니, 그가 묘당(廟堂)에 들어오게 된 것은 실로 물망에 오른 것은 아니었고, 국사는 모두 황보인과 김종서에게서 결정되었으며, 허후와 정분(鄭笨)이 참여하였다.
단종실록, 단종 즉위년(1452년) 5월 18일 기사

1452년 10월 1일 단종은 좌의정 남지의 원활한 와병 치료를 위해 영중추원사의 직위를 제수하고 격무를 줄여주는 대신 사직을 허가하지 않으며 계속 고명대신으로서 곁에 두었다. 그리고 1453년 영중추원사 재임중 사망하였다.

성종조에 손자인 공조정랑 남절[17]이 상소하여 충간으로 추시되었다.
좌의정(左議政) 남지(南智)를 추시(追謚) 하여 충간(忠簡)으로 하였는데, 청렴 방정하고 공정한 것이 충(忠)이고, 평이(平易)하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이 간(簡)이다. 남지는 세조조(世祖朝)의 구신(舊臣)인데, 계유년[18]에 졸(卒)하였다. 정난(靖難)[19] 후에 이용(李瑢)과 혼인한 일이 있어서 조정에서 시호를 의논하지 아니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그 손자 공조 정랑(工曹正郞) 남절(南折)[20]이 상소하여 청하므로 이 명(命)이 있었다.

성종실록, 성종 20년(1489년) 2월 8일

실록의 기사에 따르면 "남지는 명달하여 시사에 통달하고 모든 역사를 섭렵하여 이르는 곳마다 유능한 사람이라는 평을 들었으며 안팍의 여러 벼슬을 거치며 이재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고 한다.

비록 문음으로 출사했지만 훗날 율곡 이이가 평했듯이 능력이 출중했기에 세종에 의해 등용되어 평생을 세종, 문종 부자의 총애를 받으며 봉직하였다.

나이 50세 전후로 정승의 반열에 올랐을 때 풍이 걸려 걸음이 느려지고 말이 어수룩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직이 허락되지 않았던 것은 남지의 출중한 능력과 세종, 문종, 단종에 이르는 3대의 총애를 반증하는 것으로 보여진다.[21]

3. 여담

부친인 남경문이 요절하여 조부인 영의정 남재가 졸하였을 때 상주가 되었다. 이때 세종이 법가를 갖추어 백관을 거느리고 남재의 집에 직접 거둥하여 사제를 하였다. 일찍히 세종이 잠저에 충녕대군으로 있을 때 남재가 세종을 추대하는 발언을 뭇 사람 앞에서 한 적이 있었는데,[22] 태조, 태종, 세종 3대에 걸쳐 사랑을 받은 조부 덕에 남지는 음보로 관직에 나아갈 수 있었고 이후 세종의 사랑을 받으며 중용되었다.[23]
임금이 법가(法駕)를 갖추어 백관을 거느리고 남재의 집에 거둥하여 사제(賜祭)하였다. 임금이 그 집 문전 6, 7보 앞에서 말을 내려 악차에 들어갔는데, 상주(喪主) 남지(南智)가 길 왼편에 엎드려서 맞이하였다. 지에게 명하여 잔을 올려 제사를 드리게 하고, 소윤(少尹) 김상직(金尙直)이 교서를 읽었다. 제를 마친 다음 임금이 법가를 돌렸는데, 지(智)가 길 왼편에 엎드려서 애곡(哀哭)하니, 임금이 식(軾)에 이마를 대어 예하고 지나갔다. 그 교서에 말하기를,
"듣건대 원수(元首)와 고굉(股肱)은 한몸 한마음이라. 그러므로 임금이 신하에게 살아서는 작록으로 영화를 주고, 죽어서는 조휼(弔恤)의 은전을 베푸는 것이 고금에 통한 의리요, 국가의 떳떳한 법칙이다. 생각건대 경은 낭묘(廊廟)의 거룩한 자질과 산하의 뛰어난 정기를 타고 나서 백가(百家)의 학문을 다 닦고 세상 만사의 변화를 처리하는 재주가 있었다. 대[竹]를 쪼개고 물고기를 나누매, 백성들은 바지[袴]가 다섯 벌이라는 노래를 부르게 되고, 수레에 올라 고삐를 잡으매 노래는 《감당(甘棠)》에 미쳤도다. 착한 정책을 건의하고, 아름다운 정치를 실시하여 후설(喉舌)의 책임을 맡으매, 탁한 것을 물리치고 맑은 것을 드높였으며, 오대(烏臺)에 있을 때, 홀로 그 명망이 우뚝 솟았고, 암랑(岩廊)의 영수(領袖)가 되어 만사를 조화하여 정내(鼎鼐)와 같이 안정시켰으며, 중외의 여러 관직을 역임하여 성명(聲名)이 자심(藉甚)하였다. 옛날 고려 말기의 정치가 어지럽고 백성이 흩어져 천명과 민심이 덕있는 사람에게 돌아가자, 경은 그 기미를 밝게 알고 성조를 추대하여 억만년 무궁한 큰 자리를 개창하였고, 우리 상왕께서 명나라에 조근(朝覲)할 때 경도 또한 배종(陪從)하여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상왕의〉 고생스럽고 어려움을 막았으매, 〈내가〉 왕위에 오르자 비익(裨益)함이 더욱 많아, 어린 나에게는 경과 같은 늙은이가 더욱 수감(水鑑)과 약석(藥石)이 될 것인데, 지금 그만이니 무엇으로 마음을 잡을까. 하물며 [24]은 과인에게 옛 은혜의 교분이 있고, 경의 손자[25]는 인척의 경사가 있어, 장차 백료(百寮)의 의표(儀表)가 되어 네 세대를 보필할 것이라 하였더니, 하늘이 백성을 불쌍하게 여기지 않으심인지 갑자기 방아노래를 멈추게 하였으니, 마음 아픔을 어찌 참으랴. 이에 유사에게 명하여 삼가 상사(喪事)를 치르게 하고, 이제 박한 제물을 갖추어 소유(素惟)에 와서 제전(祭奠)을 드리노라. 어허, 국가와 함께 휴척(休戚)을 같이하는 마음을 처음부터 끝까지 길이 두 어깨에 졌으니, 애도하고 영광을 주는 예도 존망간에 극진하리로다."
라 하였다.
세종실록 6권, 세종 1년 12월 19일 기축 1번째 기사(1419년) 법가를 갖추고 남재의 집에 거둥하여 제사를 내리다.

조선시대에는 문음으로 출사하는 경우 당상의 반열에 오르기도 힘들었을 뿐더라 청요직에는 제수되지 않았다.

그러나 남지의 경우 문음으로 출사하여 초기의 모든 경력을 청요직(대간) 중의 하나인 사헌부에서 쌓았으며 이후 대언(승지)을 거쳐 참판, 판서, 정승에 이르렀으니 매우 드문 경우라 할 수 있다.

이에 대해 훗날 율곡 이이도 인재 등용에 대한 상소를 선조에게 올리며 남지의 예를 들며 "인재 등용의 폭을 넓혀야 한다"고 하였다.
(중략)
삼가 생각하건대 우리 세종대왕은 동방의 성주이십니다. 사람을 쓰되 자기 몸과 같이 하고 법을 만들어 치세(治世)를 도모하며 후손에게 복을 물려 주어 큰 터전을 마련하였습니다. 인물을 쓴 규모를 보건대 현인과 재능 있는 자라면 그 출신 성분을 따지지 않았으며, 임용을 직접 전담하셨으므로 참소와 이간이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남지(南智)는 문음(門蔭) 출신이었으나 젊은 나이에 삼공(三公)에 제수되었고, 김종서(金宗瑞)는 탄핵을 드러나게 받았으나 자기 의견을 관철하여 육진을 개척하였습니다. 초천(超遷)이 빠른 사람은 으레 경상(卿相)의 지위에 이를 것으로 생각되지만 재능이 그 자리에 합당하면 종신토록 바꾸지 않았고, 여러 해 동안 구임(久任)된 사람은 벼슬이 거기에 그칠 것으로 여겨지게 마련이지만 하루아침에 승진 발탁시키는 데 있어서 계급에 구애받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참으로 옛날 성제(聖帝)와 명왕(明王)이 현인을 임용하고 재능이 있는 이를 부리는 규모와 같았습니다.

그러나 어찌 세종 대왕만이 그렇게 했겠습니까. 조종(祖宗)께서도 대부분 성헌(成憲)에 따라 과거를 실시하였으나, 과거를 거치지 않은 인재들도 경상(卿相)에 이른 이가 많았습니다. 그런데도 당시에 이를 괴이하게 여기지 아니하였고 후세에서도 아름다운 일로 일컬었으니, 문음 출신의 벼슬길을 막아 관직을 제한시켰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문음 출신도 벼슬길을 막을 수 없는데, 더구나 도를 지키며 뜻을 숭상하는 선비로서 과거를 달갑게 여기지 않는 자일 경우 어떻게 과거에 합격한 선비보다 푸대접할 수가 있겠습니까.

선조수정실록, 선조 16년(1583년) 4월 1일

한 편 이러한 남지에 대한 세종, 문종의 총애를 시기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호랑이 김종서였다.

김종서보다 남지가 16살 이상 아래였고 출사 또한 10여년 늦었음에도 김종서보다 먼저 정승의 반열에 올랐으니 시기함이 있었던 것 같다.

남지도 이를 알았는지 문종 때 사직을 상신하며 신의 위차(位次)가 본래 한두 대신의 아래에 있었는데, 차례를 뛰어넘어 외람되게 승진하였으니, 마음에 실로 미안합니다.라고 하였으니 한두 대신은 본인보다 한참 선배였던 김종서 등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그는 다음해에 좌의정으로 승차하였다.[26]

또한 실록에도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중략)
남륜(南倫)을 경창부 소윤(慶昌府少尹)[27] 으로 삼았다.
(중략)
"국초(國初)에서 수상(首相)의 아들은 어질고 어리석음을 물론하고 당상으로 뛰어 제수하였고, 또 세종조(世宗朝)에는 수상의 아들을 갑자기 그 품질(品秩)을 승진시켰으니, 신개(申槪)의 아들 신자준(申自準) 같은 이가 그것이다. 지금 영상(領相)의 아들 황보석(皇甫錫)은 4품이 되고, 좌상(左相)의 아들 김승규(金承珪)는 3품에 불과하니, 무슨 외람(猥濫)될 것이 있는가? 대간(臺諫)이 어찌 그리 자디잔가?"
하였는데, 오래지 않아서 이 명령이 있었으니, 대개 두 정승이 자기를 덕스럽게 여기기를 바란 것이다.

남륜(南倫)은 영상(領相) 남지(南智)의 아들이었다. 처음에 남지의 위차(位次)가 좌의정(左議政) 김종서(金宗瑞)의 아래에 있었는데, 세종(世宗)이 의정(議政)으로 삼으니 김종서가 깊이 시기하였다. 남지가 그 뜻을 알고 두세 번 사양하여 피하고, 또 병으로 사면하여 집에 있었으나, 김종서는 분이 오히려 풀리지 않아서 적은 하자(瑕疵)를 가지고 남륜을 배척하였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복직(復職)을 시켰으니, 그 허물을 가리고자 한 것이다.

단종실록, 단종 1년(1453년) 10월 2일

남재의 손자 3형제가 모두 출사해서 남지는 1415년 전후 음보로 정6품 사헌부 감찰이 되었으며 둘째 아우 남간은 1419년에 생원시에 합격한 후 음보로 정6품 형조좌랑, 셋째 아우 남휘[28]는 1416년에 태종의 4녀 정선공주와 혼인하여 숭정대부 의산군에 책봉되어 일찍이 출사하였다.[29]

문종의 고명 3대신[30]였으나 풍질로 인하여 단종 재위기간 출사가 자유롭지 않았고 대부분을 집에서 요양했었고 계유정난 당시에는 이미 영중추원사로 물러나 있었던 탓에 안평대군과 사돈 관계였음에도 불구하고 화를 입지 않았다. 다만 시호를 받지 못하다가 손자대에 이르러 추시되었다.

어린 나이 17세에 정6품 사헌부 감찰이 되었을 때 조부인 남재가 그 한일을 물으니 '하급관리가 곳간에 들어가 금단을 품고 나오는 것을 넌지시 들여놓으라 세번 일렀더니 하급관리가 이를 따라 치죄하지 않았다' 하니 남재가 그만하면 거관을 잘하겠다 했다 한다. 종4품 경력(經歷)이 되었을 때 하연이 남지의 부임소식을 듣고 '어린 문벌자제가 일이나 그르치면 어찌하랴' 걱정을 했는데 남지가 부임하자마자 일의 경중과 중함을 잘 판단하여 처리하자 이에 탄복하고 그 후 모든 공무를 의논하고 잡스러운 일까지 논의할 정도였다는 일화가 있다. 하연이 영의정으로 있을 때 남지가 우의정으로서 함께 하였다.[31]

세종 시대 중국 사신에 대한 기개를 보인 기사기 있어 소개한다.
우부대언 남지(南智)를 보내어 사신에게 문안하고, 이내 고하기를,

"전일에 유시한 여석(礪石)은 본국에서 생산되는 가장 얻기 쉬운 물건입니다. 그러나 칙서에 기재되어 있는 것이 아니니 어찌 얻기가 쉽다 하여 감히 바치겠으며, 토표(土豹)는 본국 경내에서 나는 것이 아니오나 마땅히 전심전력하여 포획하는 대로 많고 적든 간에 바치겠습니다. 다만 칙서에 그 숫자를 기재하지 않았사온즉, 어찌 감히 30마리로 정(定)할 수 있습니까."

하니, 창성·윤봉 등이 낯빛을 변하며 말하기를,

"여석(礪石)은 우리가 구전(口傳)으로 바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하므로, 답하여 말하기를,

"앞서 온 칙서에 이르기를, ‘구전으로 하는 짐(朕)의 말은 모두 듣지 말라.’ 하셨사온즉, 구전으로 바치는 것이 사대(事大)의 예에 합당하겠습니까."

하니, 윤봉이 또 말하기를,

"은밀히 우리에게 주어서 바치면 될 것입니다."

하므로, 답하여 말하기를,

"이같이 한다면 사적으로 증유(贈遺)하는 것같이 될 것이니 중국을 공경히 섬기는 예에 어떻겠습니까. 우리가 비록 작은 나라이나 어찌 감히 칙유하신 바를 먼저 어길 수야 있겠습니까."

하니, 윤봉 등이 답하지 않고 남지에게 손을 저어 나가라고 하므로, 남지가 물러나오는데 무슨 물건을 때려 부수는 소리가 들여왔다. 이는 창성이 그 분노를 이기지 못하여 그가 먹고 있던 국그릇을 내동댕이친 것이었다. 남지가 다시 들어가서 묻기를,

"무어라 복명하오리까."

하니, 창성이 말하기를,

"이 나라는 지극히 불순(不順)하다. 장차 반역(叛逆)하려고 하는 것이겠지."

하고, 드디어 정부에서 베푸는 연회를 받지 않았고, 윤봉은 본국 사람이라 낯빛에 노기를 띄었으나 잠자코 있을 뿐이었다

세종실록 49권, 세종 12년 8월 4일 임신 2번째 기사(1430년)
명의 사신이 국서에 없는 방물을 바치라 하자 어찌 대국의 국서에 없는 것을 작은 나라가 어길 수 있겠느냐며 바칠 수 없다고 한 기사이다.

4. 사직 상소 시리즈

남지는 이른바 조선시대 프로 사직 상소러였다. 매우 큰 중병(풍)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재능때문에 끝내 사직하지 못한 명신이자 인재였다.

사직을 청한 역사를 살펴보면
첫번째, 1449년 사직을 청했으나 세종이 반려.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남지(南智)가 상서(上書)하여 사직(辭職)하기를,

"신은 바탕이 본디 용렬하고 어리석으며, 더욱이 배우지 못하여, 자못 밝은 시대에 쓰일 바가 아니옵니다. 다만 조상의 음덕(蔭德)으로 일찍 특별한 대우를 받자와 중외(中外)의 벼슬을 역임하여, 벼슬이 1품에 이르렀으니, 은총과 영예가 이미 극진하와, 분수를 헤아리매 소망에 지나치옵니다. 또 지난해에 특별히 겸판병조사(兼判兵曹事)를 제수하여 전형(銓衡)을 맡게 하시니, 명을 황공하와 두려움을 더할 뿐이옵니다. 거의 노둔한 재주를 다하여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하기를 도모하였더니, 이제 낭리(郞吏)의 속임수에 빠져서, 최순(崔淳)·김자려(金自麗)가 몰래 승품(陞品)을 청한 것과 김준(金俊)이 상(喪)을 무릅쓰고 벼슬에 제수된 것을, 모두 살펴 깨닫지 못하였고, 또 사실을 자백받지 못하였으니, 비록 신의 고의로 한 바는 아니오나, 이는 실로 신의 우매한 소치이므로, 신의 범한 죄는 법으로 용서할 수 없습니다. 돌이켜 보건대, 성상께서 신의 조부(祖父)의 잊을 수 없는 공을 생각하시고 소신(小臣)의 어리석고 어두운 정상을 살피시와, 특별히 너그러운 법에 좇아 형벌을 가하지 않으시고 정권(政權)만 파(罷)하시니, 은혜가 만번 다행하옵니다. 성은(聖恩)이 비록 중(重)하오나, 신이 어찌 스스로 편의함을 얻으오리까. 그러므로, 회포를 진술하여 신의 벼슬을 사양하였사오나, 또 윤허하심을 받지 못하옵고, 그대로 벼슬에 나아가게 하시오니, 이는 바로 하늘과 땅이 생명을 다시 만든 것과 같은 큰 은혜이옵니다. 그러하오나, 신은 정조(政曹)의 장(長)으로서 혼미(昏迷)하여 직책을 잃어, 죄가 장류(杖流)에 이르니, 위로는 성상의 지극하신 은혜를 저버리고, 아래로는 사림(士林)의 공론(公論)을 저버려서, 나라의 정치를 그르쳤으니, 사람들의 비난을 스스로 부끄러워하옵니다. 한산(閑散)한 곳에 던져 둠이 분수에 마땅하옵거늘, 어찌 부끄러움을 지고 외람되게 벼슬자리에 앉아 조정을 욕되게 하오리까. 엎드려 바라옵건대, 성상께서 신의 지극한 정상을 살피시와 신의 벼슬을 파하여 물망(物望)에 합하게 하시오면 다행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세종 31년(1449년) 3월 16일 병신 1번째 기사

2번째, 1450년(문종 즉위년)에 사직 상소를 올렸으나 문종이 반려.
"신은 본래 용렬하고 문무의 재주가 없는데, 한갓 조부(祖父)의 음덕으로 일찍이 선왕(先王)의 특별한 은우(恩遇)를 받아 빨리 화려한 벼슬을 역임하였습니다. 신의 나이 겨우 50을 넘었을 때 이미 1품에 올라, 성은이 망극하여 항상 두려운 마음을 품고 있었는데, 지난 해 겨울에 또 신을 우의정(右議政)으로 발탁하여 곧 사퇴하려고 하였으나, 바야흐로 사명을 받들고 중국에 가게 되고, 중국이 다사(多事)한 때라 어려운 일에 임하여 구차히 면하는 것은 신의 본의가 아니므로 억지로 종사하였습니다. 그 후로부터 의정(議政)의 열(列)에 참여하였으나 부끄러워 땀이 나고 송구하여 마치 깊은 못에 임하고 얇은 얼음을 밟는 것과 같을 뿐만 아니라, 대저 도(道)를 논하고 음양(陰陽)을 섭리(燮理)하는 의정의 직책은 지극히 중하여 본래부터 신과 같은 보잘것없는 자의 처할 바가 아닙니다. 신이 만일 오래 시위 소찬(尸位素餐)으로 자리에 있으면 물의(物議)에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실로 국가에서 정승을 둔 뜻에 어긋납니다. 하물며 신의 위차(位次)가 본래 한두 대신의 아래에 있었는데, 차례를 뛰어넘어 외람되게 승진하였으니, 마음에 실로 미안합니다.

신은 또 그윽이 생각하니, 증조(曾祖) 신(臣) 남을번(南乙蕃)이 태조조(太祖朝)에 부원군(府院君)이 되었고, 조부(祖父) 남재(南在)가 수상(首相)이 되었고, 신이 또 이와 같아 부(父)·자(子)·손(孫) 여러 대가 영달하였고, 신의 아우 남휘(南輝)가 또 숭반(崇班)에 있어 모두 한때에 빛났으니, 한 집의 은총(恩寵)이 예전에도 비교할 데가 없습니다. 신은 성만(盛滿)이 지극하니, 허물과 화가 장차 미칠까 두려워합니다. 반복하여 생각하니 놀랍고 두렵기 한이 없습니다. 신은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던 초기에 사연을 갖추어 들리게 하고자 하였으나, 입술만 들먹이고 말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불행하게도 선왕(先王)께서 승하하시어 국휼(國恤)로 한참 바쁜 때 구구한 소회를 가지고 슬픔을 무릅쓰고 말씀드리기 어려워 뻔뻔한 얼굴로 침묵하여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신은 또 초여름부터 귀가 멀고 설사하는 병이 번갈아 침공하니, 신이 기력을 헤아리건대 또한 지탱하기 어렵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는 신이 지극한 소회를 살피시어, 신의 무거운 짐을 풀어 주시면 신이 감히 한산한 자리에서 분수를 지키며, 성수(聖壽)의 무강(無彊)하심을 빌지 않겠습니까?"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남지(南智)는 시사(時事)에 통달하고, 안팎의 여러 벼슬을 거치어 이재(吏才)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정승이 된 뒤에 건백(建白) [32] 한 것이 없어 명성이 전보다 떨어졌다.

문종실록, 문종 즉위년(1450년) 6월 28일 경자 1번째 기사

3번째, 재차 사직 상소를 올렸으나 문종이 또다시 반려하고 오히려 우의정에서 좌의정으로 승차시킴.
"신(臣)의 자질이 본래 용렬하고 그 위에 배운 것이 없는데 외람되게 삼공(三公)의 자리를 차지하니, 밤낮으로 전전긍긍하면서 물러나 자리를 피하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제 동짓날을 당하여 짙은 안개가 사방에 끼어 연일 개이지 않았으니, 실로 이것은 재이(災異)의 상징입니다. 신은 엎드려 그윽이 생각하건대, 이와 같은 변(變)은 신의 부덕(不德)한 소치일까 두려워합니다. 더구나 신의 질병이 몸을 얽어 매어서 중임(重任)을 감당하기 어려우니, 엎드려 바라건대 신을 산직(散職)의 자리에 두고 현능(賢能)한 이를 골라 제수(除授)하여서 하늘의 견책(譴責)에 답하고 사람들의 소망에 부응(副應)하게 하소서."

문종실록, 문종 즉위년(1450년) 11월 12일 임자 4번째 기사

4번째, 또다시 사직을 청하지만 다시 반려.
"신은 본시 게으르고 소루하며, 재주 또한 천박하고 쓸모가 없으니, 진실로 의정부(議政府)에 있기는 적합하지 못했습니다. 더구나 지난해 가을부터는 풍질(風疾)을 앓기 시작하여 정신이 혼모(昏耗)하고 손발이 마비(麻痺)되었으므로, 출입하고 운동하는 것도 오히려 마음대로 되지 않는데, 처사(處事) 응변(應變)하는 것이 어찌 혼모(昏耗)한 지경에 이르지 않겠습니까? 가만히 생각하건대, 의정부(議政府)는 여러 벼슬아치의 장관(長官)으로서 온갖 책임이 모인 곳이니, 신(臣)처럼 녹록(碌碌)한 사람의 병을 요양하는 곳은 아닙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특별히 신의 관직을 사면(辭免)시켜서 신으로 하여금 직무를 게을리 했다는 비난을 면하도록 하여, 한가히 있으면서 병을 치료하여 남은 세월을 보전하게 하소서. 감내할 수 없는 지극한 소원입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아니했다.
문종실록, 문종 2년(1452년) 3월 19일 임자 3번째 기사

5번째. 단종에게 사직 상소를 올리지만 3대에 걸친 반려.
"신은 도량이 작은 사람으로서 조부(祖父)의 여음(餘陰)434) 을 입고 열성(列聖)의 특별한 사랑을 그릇되게 받아 태정(台鼎)의 자리를 외람되게 차지하였으므로 항상 소임을 감당하지 못할까 두려워하는 마음을 품었더니, 복이 지나쳐 화가 생겨서 드디어 풍질(風疾)에 걸렸습니다. 발[足]이 무겁고 말을 더듬거려 거동(擧動)이 마땅함을 잃었습니다. 비록 힘을 강하게 하고자 하지만 직책을 받들기 어려우므로 시위 소찬(尸位素餐)한 지 대개 오래이니 황공하고 부끄러운 마음이 그지없습니다. 빌건대 직사(職事)를 파면해 주시면 거의 안심하고 병을 치료하겠습니다. 길이 홍조(洪造)를 입는 것이 이것이 신의 지극한 소원입니다. 이제 전하께서 처음 정사를 베푸시고, 또 산릉(山陵)의 역사도 한창인데, 신자로서 걸신(乞身)할 때가 아니지만, 다만 병이 날로 중하여 고굉(股肱)의 힘을 다할 수가 없습니다. 더구나 정부는 양병(養病)하는 곳이 아닌데, 신의 병은 세월이 지나도 나을 병이 아닙니다. 유유히 생각하여 보아도 다시 무엇을 기다리겠습니까? 위태하고 급박한 정을 견디지 못하여 감히 이렇게 호소하니,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작은 정성을 굽어 살피시어 유음(兪音)을 내리어 허락하여 주소서."
하니, 노산군(단종)이 집현전 부수찬(副修撰) 한계희(韓繼禧)로 하여금 되돌려주게 하였다. 남지의 성품이 명달(明達)하여 모든 역사(歷史)를 섭렵하여 이르는 곳마다 유능한 사람이라는 평판이 있었다.

단종실록, 단종 즉위년(1452년) 8월 25일

6번째, 1453년 사직을 청하였으나 이제는 의정부에서 반대하고 단종이 반려.
영중추원사(領中樞院事) 남지(南智)가 상서(上書)하여 사직하기를,
"신은 용렬하고 우매(愚昧)한데 그릇 열성(列聖)의 은우(恩遇)를 입어 도당(都堂)에 반식(伴食)하면서 하나도 건명(建明)함이 없고 더하여 질병이 얽혀서 그치지 않으므로 여러 번 사직하기를 청하였으나, 주상께서 선조(先朝)의 구물(舊物)이라고 하여 차마 갑자기 버리지 못하여 신에게 영중추원사를 제수하여 한가롭게 있으면서 병을 다스리게 하시니, 성은(聖恩)이 지중하여 보답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신의 병이 날로 위독하여 심신(心神)이 혼모(昏耗)하고 언어가 간삽(艱澁)하며, 수족도 제대로 들지 못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돌아보건대 영중추원사의 높은 자리는 양병(養病)할 곳이 아니며 신은 또 훈공[勳勞]을 세워 반드시 공을 갚을 자가 아닙니다. 병들어 누워서 녹(祿)을 먹는 것이 마땅하지 못하니, 청컨대 신을 체직(遞職)하소서."

하고, 집현전 직제학(集賢殿直提學) 조어(趙峿)도 병으로 사직하였는데, 곧 의정부에 의논하니, 의정부에게 아뢰기를,

"처음에 남지에게 영중추원사를 제수한 것은 한가롭게 있으면서 양병하게 하고자 함이며, 조어도 또한 이미 사가(賜暇)하였으니, 그 청하는 바를 윤허할 수 없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단종실록, 단종 1년(1453년) 8월 26일

그는 결국 사직하지 못하고 영중추원사로 재직하고 있으면서 사망한다.
[1] 1450년(문종 즉위년)에 올린 상소에 '나이 겨우 50을 넘었을 때 이미 1품에 올랐다'고 하는데, 지중추원사(정2품)에서 판중추원사(종1품)로 승진한 시점이 1447년(세종 29)이다. 그러나 실직이 아니라 산계로 다른 시기에 1품에 올랐을 수도 있어서 단정은 어렵다.[2] 『국조인물지』에 보인다.[3] 예조참의 방순의 딸인데, 참고로 남지의 할머니인 변한국대부인 윤씨와 남지의 외할머니인 방순의 처 윤씨는 서로 자매관계다.[4] 세종의 4남.[5] 세종의 3남인 안평대군의 장남.[6] 개국공신 조준의 장손이자 부마 조대림의 장남.[7] 相臣,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을 통틀어 이르는 말.[8] 작은할아버지[9] 병조의랑 역임, 영의정부사 추증, 요절[10] 사헌부에서 감찰부터 대사헌에 이르는 모든 직을 역임했다.[11] 정1품 중추부 최고 명예직 현시대 국가원로자문회의 의장과 비슷하다.[12] 조부 남재는 태조, 정종, 태종, 세종 4대를 모시며 역시 영의정부사까지 이르렀다.[13] 후일 판중추원사로 직위명 변경, 종1품, 중추원 최고직위[14] 경국대전 반포 이전에는 의금부의 수장이었다.[15] 의창(義倉)의 원곡(元穀)이 감축하고 군자곡(軍資穀)이 감소되자, 민간에게 스스로 곡물을 염출하여 곡식을 빌어주고 취식(取息)하던 제도.[16] 조선왕조실록 기사 참조[17] 기록에 따라 남흔으로 되어 있음.[18] 1453년, 단종1년[19] 1453년 계유정난[20] 기록에 따라 남흔으로 되어 있음.[21] 우의정이 되었을 때 영의정인 하연, 좌의정 황보인, 찬성 김종서 등과는 나이차가 10살 이상 있었다. 하연 1376년생, 황보인 1387년생, 남지 1390년대 후반생(추정), 김종서 1383년생[22] 남재 기사 참고.[23] 그의 3형제 모두 중용되었다.[24] 남재[25] 남재의 손자이자 태종의 부마이며 세종의 매제인 의산군 남휘.[26] 김종서는 우의정으로 승차[27] 남륜은 단종1년 2월에 조산대부(종4품)가 가자되고 수 한성소윤(정4품)에 제수되었었다.[28] 남이 장군의 조부다.[29] 경국대전 반포 전에는 종실 인척의 관리임용이 비교적 자유로웠다.[30] 황보인, 남지, 김종서[31] 하연은 1376년생으로 남지와는 약 20살 가까이 차이가 난다.[32] 의견을 건의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