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서진의 황제에 대한 내용은 민제(서진)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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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339년(충숙왕 복위 8) |
사망 | 1408년 10월 13일[1] (향년 69세[족보상]) (음력 태종 8년 9월 15일) |
봉호 | 여흥부원군(驪興府院君) |
시호 | 문도(文度) |
본관 | 여흥 민씨[3] |
자 | 중회(仲晦) |
호 | 어은(漁隱) |
부모 | 아버지 - 민변 어머니 - 양천현부인(陽川縣夫人) 양천 허씨 허백(許伯)의 딸 |
부인 |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 여산 송씨 송선(宋璿)의 딸(1342 ~ 1424) |
형제자매 | 민개 |
자녀 | 슬하 4남 4녀 장녀 - 조박의 처(1355 ~ ?) 차녀 - 삼한국대부인 민씨(1357 ~ ?)[4] 3녀 - 원경왕후 4녀 - 교하 노씨 노한(盧閈)의 처[5] 장남 - 민무구 차남 - 민무질 3남 - 민무휼 4남 - 민무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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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여말선초의 인물.민변의 아들로 희비 윤씨의 외사촌이다.[6] 민개의 형이며 원경왕후, 민무구, 민무질, 민무휼, 민무회의 아버지. 태종의 스승이자 장인. 태조의 조카인 이천우와 다섯째 아들인 태종의 장인이면서 겹사돈인 것을 보면 대단한 외척 가문이다. 사후 아들이 모두 사위 손에 죽는 비극이 일어난다.
조선의 제4대 임금이자 최고의 성군으로 꼽히는 세종대왕의 외조부이다.
2. 생애
2.1. 고려시대
여흥 사람으로 성품이 온화하고 인자하면서 맑고 소박해 사치를 싫어했다. 독서를 좋아했으며 1번만 읽어도 바로 기억할 정도로 명석했다고 하며 특히 역사에 뛰어났다. 사위인 이방원도 민제에게서 학문을 배우기도 했다.1357년 4월 19세의 나이로 과거에 급제해 국자직학에 임명되었고 춘추검열로 선발되었다가 1362년 예문관, 1363년 통례문지후, 1366년 전리좌랑, 1371년 예부직랑, 1372년 전리정랑과 지제교, 1373년 성균사예, 1375년 전의총랑과 성균사성, 1382년 판전교시사, 1387년 지춘주사가 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1388년 판소부시사와 예문관제학에 임명되고 봉익대부의 품계에 올랐으며 8월에 전공판서로 옮겼다가 예의판서 동지춘추관사 상호군이 되었다. 1389년 판도가 되었다가 7월에 전리, 9월에 개성윤 상의밀직사사 겸 예의판서가 되었다. 1390년 첨서밀직사사 겸 도평의사사가 되었고 세자 좌빈객을 겸직했다가 1392년에 한양판윤이 되었다.
2.2. 조선시대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7월에 자헌대부 예문춘추관 태학사에 임명되었다. 1394년 정당문학 동판도평의사사 수문전학사에 임명되었다가 겨울에 명나라에 하정사로 파견되었으며 돌아와서 삼사우복야 보문각대제학에 임명되었다. 1398년 정헌대부가 더해졌다가 옮겨서 보국숭록대부 여흥백 영예조사 겸 판봉상사농시사 수문전 태학사가 되었다.젊어서 예를 안다고 알려져 숭록대부가 되어 예조를 겸직했다가 1399년에 지공거가 되고 겨울에는 판삼사사가 되었으며, 1400년 3월에 수충보조공신에 봉해지고 보국숭록대부 문하우정승 판도평의사사병조사 겸 판상서사사 보문각태학사 감예문 춘추관사 영경연사 여흥백으로 작위가 올려졌다. 4월에 좌명공신으로 고치고 9월에 좌정승으로 옮겼으며, 11월에 태종이 즉위하고 원경왕후가 중전이 되자 순충(純忠)이라는 호를 받으면서 여흥백에 봉해졌고, 1401년에는 순충동덕보조찬화공신의 호가 내려져 여흥부원군(麗興府院君)에 봉해지게 된다.
사극에서 제대로 묘사된 적이 없어 알려져 있지 않은데 민씨가 나중에 맞이하는 횡액은 원경왕후나 아들들 책임이 아니라 민제의 책임이 가장 크다. 왕자의 난이 불러온 혼란상이 어느정도 정리가 되고 태종과 하륜이 이전 정도전의 구상보다는 덜 하지만 기존 체제보단 훨씬 나아간 온건 개혁 드라이브에 시동을 걸었을 때 가장 적극적으로 막아세운 수구파 우두머리이자 정종~태종 초기 가장 큰 장애물이 바로 민제였다. 민제의 아우 민개가 고려 멸망이 결정된 순간 통곡한 일화는 단순히 개인의 감정적 행동이 아니라 이들의 본질이 개혁이 아닌 반동에 가깝다는 것을 드러내는 징표였다.
왕조의 간판은 바꿨을 지언정 기존에 누리던 특권은 그대로 누리길 원했던 민씨는 정도전의 조선경국전과 조준의 경제육전으로 이어지는[7] 태조 시절 개혁은 물론 경제육전에 실리지 않은 판지와 조례를 수록하고 의정부 신설 등 새로운 개편안을 담기 위해 시작된 태종 때 속육전 편찬까지 일련의 개혁 행보에 쉴 세 없이 반발하며 기득권 챙기기에 전념했다. 덕분에 태조~태종 시기 제도 개혁의 선봉이었던 조준과 하륜은 지속적인 음해와 정치 공세에 시달렸다.
결국 태종은 즉위한 후부터 민씨 견제에 돌입한다.
1402년에 정종의 만류로 취소되었지만 태종이 가례색까지 설치하려는 시도까지 하며 의빈 권씨를 후궁으로 들이고, 이후 몇달 뒤인 4월에 이러한 태종의 행동을 문제삼은 상소가 올라왔는데 그 표현이 문제가 되어 논란이 된다. 그런데 이 상소를 올린 이 중 한명이 민제의 문생이었던 전가식이었고, 그가 상소를 올리기 전에 민제에게 사실 확인을 한 것이 순군부에서 국문을 받던 중에 밝혀지게 되어 그 이후로 문생과 거리를 두게 된다.[8] 거기다 7월에는 관리 추천을 잘못해서 윤곤, 이공효와 함께 탄핵당하기에 이르는데[9], 다만 그 해 8월에는 태종이 원경왕후와 함께 그의 집에서 잔치를 하였고, 11월에 조사의의 난이 일어났을 때는 태종이 직접 출전하면서 그를 수성도통사에 임명하여 도성 수비를 맡기고 떠났으며, 태종 6년인 1406년 12월에도 그의 집에서 태종과 원경왕후, 그리고 왕자들까지 참석한 잔치가 열리는데, 이 때 후술되었듯 태종과 서로 말을 놓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는 등 원만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아들인 민무구와 민무질이 태종의 양위 소동 당시 보였다는 반응이나 과거에 한 발언들, 그리고 당시 세자였던 양녕과 명나라 황녀 간의 혼인 문제와 연관된 것 등이 문제가 되어 두 아들이 유배형에 처해지면서 비극이 시작된다.
2.3. 말년
1407년 아들들인 민무구과 민무질을 살리기 위해 먼 지방에 유배보낼 것을 요청해 각각 여흥, 대구에 유배되도록 했으며, 1408년 9월, 병으로 눕다가 향년 69세로 사망했다.[10] 묘소는 북한에 있으며, 현 북한의 행정구역을 기준으로 하면 개성시 광수리에 있다.3. 여담
- 상술한대로 사치를 싫어하는 소탈한 성격의 소유자인데, 이에 관한 일화가 김창윤이라는 사람이 집필한 《조선왕조 사람들》에 실려있다. 민제는 태종의 장인이 되어 부원군 작위를 받았지만 이를 내세우기를 꺼렸다. 그래서 항상 사치를 멀리하고, 퇴근하고 오면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이웃 사람과 바둑두는 것으로 소일하고는 했다. 근데 어떤 녹사 하나가 민제의 집에 찾아갔다가 그가 없어서 이웃집에 왔는데, 그의 얼굴을 몰라서 민제를 보고도 알아보지를 못했다. 그래서 민제에게 무례하게 굴면서 외모를 놀렸다. 이에 그는 짐짓 모르는 척하며 부원군을 찾아왔다는 녹사에게 자기는 부원군이 될 수 없냐고 묻자 "암탉은 울지 못하고 수탉은 알을 못 낳지."라며 비웃었는데, 이웃 사람이 뒤늦게와서 "부원군 나리를 기다리게 해서 죄송하옵니다."라고 사죄하자 녹사는 그대로 빤스런했다는 일화가 있다.
- 아들들의 이름이 '무구(無咎, 허물이 없다)', '무질(無疾, 병이 없다)', '무휼(無恤, 가여움이 없다)', '무회(無悔, 후회가 없다)'로 '無~(~가 없다)' 돌림인데, 각 글자 자체들은 모두 부정적인 의미이지만 그걸 이어서 '~가 없다' 식의 긍정적인 의미로 지은 게 특이하다. 즉, 이중부정으로 이름을 지은 셈이다.[11] 물론 아들들의 최후를 보면 이름대로 살지는 못했다.
- 조선의 개국공신들 중 한 명이자, 이방원의 킹메이커인 하륜과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다. 하륜은 진보적 정치인으로 명망이 높았던 정도전에 비견되는 강경한 급진주의자라서, 민생 안정을 위한 각종 개혁 정책을 불도저처럼 밀어붙여서 진행나간 덕택에 이후에도 자신이 왕으로 옹립한 이방원에게 엄청난 신임을 얻었다.[12][13] 문제는 이를 위해 기득권 세력과의 충돌도 불사하는 강직한 성격의 소유자였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그가 정치적으로 화를 당할 것을 우려한 민제가 "그러다가 정도전 꼴이 나겠네그려."라고 충고하니, 하륜은 태연작약하게 "운명은 하늘이 정해주겠지."라고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근데 정작 정치적으로 박살이 난 쪽은 민제였고,[14] 하륜은 죽을 때까지 부귀영화를 누리다가 천수를 누리고 편안하게 눈을 감았다.
- 아들 민무구 형제가 유배당하기 전에 왕이 된 태종이 원경왕후와 왕자, 공주들을 대동하고 민제의 집을 찾은 적이 있었는데 분위기가 좋았는지 태종은 민제를 '사부님'이라 부르고 민제 역시 태종을 '이 선달'이라고 부르며 연회를 즐긴 적도 있었다.[15] 어찌 보면 조선 역사상 신하의 신분으로 합법적으로 공식 석상에서 왕에게 말을 놓았던 인물인 셈.[16]
- 자신의 동생 민개와 나이차이가 무려 22살이나 차이가 난다.
4. 대중매체
4.1. 용의 눈물
배우는 송재호.[17] 역사적 모습 그대로 매우 온화하고 소박한데다가 강직한 인물로 나온다. 국왕의한양으로의 재천도 이후 세월이 흐른 2부 시점에서는 나이가 들어 병석에서 자리보존하는 처지였고 민무구와 민무질이 권력에 취해 갈수록 방자하게 구는 것에 몇 번이고 따끔하게 꾸짖었다. "전하께서는 물항아리에 물을 7홉만 부으시는 분이다. 그 물이 8,9흡 상승할 경우 물항아리를 깨뜨리시는 분이다. 너희는 물이 아예 물항아리 밖으로 넘치고 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무구와 민무질의 태도는 바뀐 것이 없으며 결국 그로 인해 민제의 사망 직전 아들들이 숙청당하고 딸 원경왕후도 비참하게 몰락하면서 민제의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그 신호탄이 된 이방원의 첫 양위 파동에서 하륜이나 이숙번도 태종의 정확한 심중을 몰라 난감해하던 차에[21] 유일하게 그 진위를 예측하고 있었고 이런 때 민무구와 민무질이 원경왕후를 찾아갔다는 걸 알고 경악한다. 이후 아들들을 불러 가문이 멸문지화의 위기에 처했다고 말하며 유일한 희망은 하륜 뿐이라 말하지만 그 때 하륜이 좌정승 자리에서 물러난다[22]는 걸 알고 절망한다. 결국 두 형제가 직위가 박탈되고 유배형에 처해지자 집안에 사람의 발길이 끊기는 지경에 처했다. 그러나 그 피도 눈물도 없는 이방원도 민제가 살아있을 때는 차마 민무구와 민무질 형제를 사사하지 못했고 민제를 대할 때는 극진한 예우를 갖춰 대했다. 민제가 죽기 직전에 실제 역사대로 태종에게 제발 자신의 아들들을 내쳐달라고 간청하는 상소문을 올리자 역시 장인어른이시라며 탄복하는 장면 또한 나온다. 죽기 전 충녕대군이 심온의 딸과 결혼한다는 소식을 듣고 "심온 그 사람도 참 불안하겠구나. 왕실의 사돈이란게 결코 편한 자리가 아니거늘..."이라고 말하며 동병상련의 형태로 우려하는데 그 우려도 현실이 되었다.
이성계가 세상을 떠나자 병석에 누운 몸에도 불구하고 상복을 입고 매일 곡을 하다가 병세가 악화되어 임종을 눈앞에 두게 된다. 원경왕후와 그 아래 대군들의 필사적인 호소로 귀양에서 일시 풀려난 민무구와 민무질 형제가 찾아오자 그 둘에게 "전하는 이미 너희들을 용서할 생각이 없으니 지금이라도 낙향하라"고 말하고 여전히 그 진위를 이해하지 못하는 네 아들들에게 "이 집의 문을 걸어닫고 한양에 다시는 얼씬도 하지 않는 것만이 이 가문을 지킬 길"이라는 당부를 끝으로 숨을 거두고 만다. 민제 본인은 당대의 존경받는 대학자였지만 민무구와 민무질의 죄인 이미지 때문에 여기저기 부고를 돌렸음에도 문상을 오는 사람이 없다시피 한 상황이었다. 그나마 온 건 생전의 친분으로 온 하륜, 두 형제에게 죄가 없다고 공개적으로 주장한 이지성, 부원군에 대한 예의 차원에서 온 태종 일가 뿐. 이 때는 그나마 최소한의 제동을 걸어줄 존재였던 이성계가 앞서 세상을 떠난터라 이방원은 철저하게 민씨 집안을 숙청하고 만다. 민제의 상이 끝나자마자 두 형제를 제주도로 유배보내 버렸고 이에 반발하는 양녕대군의 탈선이 심해지자 아예 둘을 사사할 것을 결정하고 만다. 민무구와 민무질이 사사되기 전날 민무질의 꿈에 나타나 "이제 갈 때가 되었다"고 슬프게 말했다고 하며 이후로 종종 이방원이 민제와 그 자식들을 비교하며 디스하는 가운데 민무구와 민무질 형제를 사사하는 과정에서 중전과 갈등을 빚을 때에도 용포를 잡은 부인과 실랑이를 하다 패대기치며 "장인어른의 반만 빼어닮았어도! 부끄럽다!"하고 소리지르는 장면이 있다. 하지만 심온은 딱히 민씨 형제들처럼 권력을 휘두르지도 않았는데 집안이 멸문지화를 당한 것을 살펴보면[23] 과연 원경왕후와 동생들이 얌전히 지냈다고 해도 가만 놔뒀을까?[24]
'용의 눈물' 드라마에서 민제는 매우 강직하고 올곧은 성격의 인물로 묘사되었다.1회 위화도 회군, 2회 창왕 옹립 및 조민수와 최영 제거 이후 사돈인 이성계가 서서히 권력을 잡아가며 고려가 점점 기우는 과정에서는 관망만 하는 입장으로 그다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입장이다. 조선 개국 과정에 별다르게 참여하지 않았다(민제의 아들 민무구, 민무질은 정몽주 순절 다음 회인 8회에서 처음 등장한다)
드라마 속 민제의 성격이 가장 잘 드러나기 시작하는 부분은 조선 개국 후 신덕왕후와 정안군, 정안군 부인 민씨 사이의 갈등이 커지면서부터이다. 이 나라는 정안군의 나라라고 말하며, 계 시모인 신덕왕후를 불여우라고 칭하는 딸 민씨(최명길 배우 역)를 질타하는 등 딸의 과도한 욕심을 경계한다. 그리고 1차 왕자의 난 얼마 전에 숨겨두었던 무기들을 옮기려는 아들 민무구(신동훈 배우 역), 민무질(나한일 배우 역) 형제를 혼낸다. 하지만 민무질은 아버지 민제의 말을 무시하고 무기들을 옮긴다.5회 초반에서 자신의 집에 찾아온 제학 하륜을 버선 차림으로 달려나가 반갑게 맞이한다. 칡으로 담근 술을 대접하며 하륜과 이야기하는데, 귀양 생활 이후 하륜의 생각이 왠지 변화했음을 느낀다. 하륜은 민제에게 시중 이성계의 생년월일시-사주를 묻고, 눈을 감은 채 생각하더니 천하가 이시중의 손 안에 있다고 놀라워한다..
정몽주 순절 이후 8회에서 사돈 이성계에게 정시중(포은 정몽주 ; 이전에 송재호 배우가 맡은 역할.. 용의 눈물에서는 정승현 배우가 담당)이 효수되었음을 별 감정 없이 담담하게 알려 준다. 드라마 속에서 묘사된 민제의 성격이라면, 충신 정몽주를 살해한 사위 방원을 나무랄 만도 한데 그러지는 않는다. 아뭏든 절친한 사이였던 하륜(임혁 배우 역)을, 사위인 정안군 방원(유동근 배우 역)에게 소개시켜 준다.
9회에서 민무질을 따라 방원의 집에 온 하륜은 방원과 대면한 첫 만남 자리에서 방원이 장차 옥좌에 오를 것이라고 말하며 전하 라고 부르고 절을 올리는데 방원은 당황스러워한다(9회 마지막 장면) / 8회 끝부분에서 이성계가 즉위함) 민제의 딸 민씨 부인이, 민제의 집에서 조준을 만나는 장면이 있는데 거기서 민씨 부인은 조준에게 정안군을 도와주면 그 은혜를 잊지 않겠다고 하는 대목이 있다.
정몽주 순절 이후 8회에서 사돈 이성계에게 정시중(포은 정몽주 ; 이전에 송재호 배우가 맡은 역할.. 용의 눈물에서는 정승현 배우가 담당)이 효수되었음을 별 감정 없이 담담하게 알려 준다. 드라마 속에서 묘사된 민제의 성격이라면, 충신 정몽주를 살해한 사위 방원을 나무랄 만도 한데 그러지는 않는다. 아뭏든 절친한 사이였던 하륜(임혁 배우 역)을, 사위인 정안군 방원(유동근 배우 역)에게 소개시켜 준다.
9회에서 민무질을 따라 방원의 집에 온 하륜은 방원과 대면한 첫 만남 자리에서 방원이 장차 옥좌에 오를 것이라고 말하며 전하 라고 부르고 절을 올리는데 방원은 당황스러워한다(9회 마지막 장면) / 8회 끝부분에서 이성계가 즉위함) 민제의 딸 민씨 부인이, 민제의 집에서 조준을 만나는 장면이 있는데 거기서 민씨 부인은 조준에게 정안군을 도와주면 그 은혜를 잊지 않겠다고 하는 대목이 있다.
이후 한결같이 지조를 지키며 바른 말을 하고, 일체 교만하게 굴지 않는다. 사위가 왕이 된 후 후궁 문제로 중전 원경왕후와 다투는 일이 생기고... 부원군 민제는 입궐하여 딸인 원경왕후를 매우 호되게 나무란다. 정말 눈물 쏙 빠질 정도로 나무란다. 한편 이성계가 차사들을 죽이는 일과, 조사의의 거병이 다가오는 와중에 사위인 태종을 알현하여 태상왕 전하 앞에 낮은 자세, 사죄드리는 자세로 임해야 한다고 충언한다.
하지만 결국 아들 민무구, 민무질과 결정적으로 중전 원경왕후는 이러한 아버지 민제의 신중한 품성과 너무도 달랐고... 급기야 1406년 민무구 옥이라는 파국을 맞아 민무구 형제는 귀양가고.. 원경왕후는 남편 태종과 급격하게 나이가 나빠진다. 1408년 태조 이성계 승하 얼마 후 민제는 집안의 장래를 염려하며 감기지 않는 눈을 감는다,
민제의 병이 깊어지자 딸 원경왕후가 친정에 다녀가고, 태종은 일단 귀양갔던 민무구, 민무질을 도성으로 불러들여 아버지 민제를 만나도록 한다. 임종의 자리에서 민제는 아들들에게 가문의 문을 닫고 낙향할 것을 말하지만, 여전히 민무구 민무질은 이제 좋은 세상이 왔다며 의기양양해한다. 민제는 이런 불쌍한 것들 이라고 한심해하며, 여전히 정신차리지 못하는 아들들을 두고 눈을 감는다. 민제의 부고를 알렸음에도 조정 대신들 가운데 오직 하륜과, 하륜의 생질 이지성만 문상을 온다. 태종과 원경왕후, 왕자들도 문상을 왔다. 매형 태종 앞에서 민무질은 억울하다는 표현을 하고... 급기야 민무구 민무질 형제는 다시 귀양가는데, 이제는 나라의 끝 제주도로 간다.
이후 방송되는 KBS 정도전, 태종 이방원 에서 묘사된 민제의 모습과는 다른 성향이다.결국 1410년 민무구, 민무질 형제는 제주에서 자결하며 1416년 민무휼, 민무회 형제 역시 세상을 떠난다. 1420년 딸 원경왕후도 눈을 감는다.
(태종 이방원 드라마에서 등장한 전가식(민제가 주관한 과거에서 장원급제한 문생)은 용의 눈물에서는 등장하지 않는다)
비록 민제의 네 아들이 모두 희생되어 고려의 권문세족 가문이었던 여흥 민씨 가문은 조선 초기에 큰 타격을 입었지만, 민제의 숙부인 민유의 직계 후손들에서 인현왕후와 명성황후가 등장한다.
4.2. 정도전
2014년 KBS 드라마 <정도전>에서는 배우 안승훈[25]이 연기했다. 드라마 조선 건국 후인 후반부에 들어서는 시점에서 심효생 등과 함께 등장하기 시작하는데 <용의 눈물>과 다르게 권력욕을 부리는 것으로 묘사된다.사위 이방원을 음으로 양으로 지지하고 대권을 잡는 데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모습으로 역사와는 달랐다. 정사에도 하륜과 이방원의 접점이 되는 것이 팩트이긴 하나, 정도전에서는 사위가 책사를 얻게끔 적극적으로 엮어주기도 하고 딸 군부인 민씨와 함께 조준을 자기 편으로 설득하기도 한다. 정도전을 명나라가 트집잡을 때 정도전을 명나라에 보내라 말하려다가 하륜에게 제지당한다. 조영무와 함께 정도전에게 직접 가서 말다툼을 하는 등 아들 민무구, 민무질 등과 같은 결의 인물로 그렸다.
4.3. 육룡이 나르샤
2015년 SBS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에서는 배우 조영진이 연기했다. 해동갑족의 수장격 인물로 나오지만 그에 대한 자부심이 지나쳐서 사돈인 이성계와 사위인 이방원을 일족으로 보지 않을 정도이며 딸에게도 이 점을 분명히 할 정도였다. 실제로 사위인 이방원이 폭탄으로 협박을 해야할 정도의 정적 관계에 놓이는 모습들이 나오기 때문에 역사적 모습과는 상당히 괴리가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장인의 그런 모습과 아내인 원경왕후가 부부와 가족 관계가 아니라 그런 냉혹한 정치적 파트너 관계로 있는 것을 보면 장차 앞으로의 미래를 볼 때 이방원이 왜 그리 처가댁을 개박살을 내놨는지 보여주는 행보를 이해할 수 있을 정도라고 하겠다.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으로 주도권을 장악한 후에는 이방원의 요청에 따라 도당에 입성하여 혁명파를 지원하고 이성계가 낙마한 후에는 사돈을 걱정하는 모습을 보이는 등 점차 이방원과 가까워지는 모습을 보인다. 조선 건국 후에는 하륜과 함께 이방원 파로 활약한다.4.4. 태종 이방원
2021년 KBS 드라마 <태종 이방원>에서는 배우 김규철[26]이 연기했다. 극 중에서는 '예의판서' 역으로 시작하는데 우왕의 명을 받은 군사들이 들이닥치고 정국이 혼란해지자 "만일을 위해 우왕과 최영에게 협조하는 시늉이라도 하자"고 제안하나 부인 송씨와 딸 민씨의 설득에 의해 결국 무기를 숨기고 협조에 동참하지 않는다. 숫제 무장 느낌이 나던 <정도전>과 숙청을 안 당하는 게 이상할만큼 야심을 드러내던 <육룡이 나르샤>의 묘사에서 벗어나 역사 속 학자의 이미지로 돌아왔다 여겨졌으나, 이쪽도 이방원의 쿠데타의 정치적 기반을 만들어 놓는 등 적극적으로 가문의 번영을 위해 애쓰는 모습을 보이면서, 권력에 대한 욕망이 존재함을 드러냈다. 다만 자신의 권력욕 보다는 문주로서 가문을 더 번창시키는 데에 더 중점을 두고, 이방원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도록 노력하는 등 용의 눈물 시절의 이미지도 절충되어 있다. 더불어 1차 왕자의 난에서 민제의 공적이 대거 늘어나 훗날 태종의 민씨 숙청의 필요성이 생겼다.전체적인 행적들은 민제(태종 이방원) 참조.
4.5.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태조, 정종실록, 태종실록에서 등장하는데 태조, 정종실록에는 조연에 불과해서 별로 등장이 없었지만 태종실록부턴 주연으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그는 생전에 바둑을 두면서 민무구, 민무질에게 “주상께선 우릴 좋게만 보시지는 않는 것 같다며 모두들 자중해라.”라면 충고를 했다. 이후 1408년에 70세를 일기로 세상을 뜨면서 등장종료. 사망할 때 '가문이 풍비박산나는 꼴을 보지 않고 사망하는 것이 마지막 복이었다'라는 표현이 나온다.[1] 율리우스력 10월 4일[족보상] 70세.[3] (족보)[4] 이천우의 정부인.[5] 노사신의 할머니.[6] 즉 충정왕의 외당숙에 해당된다.[7] 조선경국전과 경제육전은 사찬과 관찬으로 나뉘어지는 법전이 아니라 한몸이다. 오늘날 연구에서 조선경국전은 태조 이성계의 감수하에 향후 조선 사법체계의 규범을 정한, 지금으로치면 헌법에 해당하고 경제육전은 향후 본격적인 종합법전 편찬을 위한 전단계로 여말선초의 잡다한 법 조문과 판지(왕의 결정), 조례(행정기구의 판례)를 수록, 정리한 모음집에 가까움이 밝혀져 있다.[8] 태종 2년 5월 11일 계사 1번째기사[9] 태종 2년 7월 11일 임진 1번째기사[10] 여담으로, 민제 본인이 숨지기 4개월 전에는 사돈인 이성계가 먼저 세상을 떠났다.[11] 민제의 조카들(민제의 동생 민개(閔開)의 아들들)의 이름 역시 '불해(不害, 해로움이 없다)', '불탐(不貪, 탐욕이 없다)'인데, 민제의 아들들과 비슷한 방식으로 이름을 지었다. 이들 중 민불해는 계유정난으로 참살당한 민신의 아버지이다.[12] 태종도 자신과 정치적으로 대립했던 정도전은 물론, 자기 아들인 세종 못지않은 급진적 개혁론자였다.[13] 신문고를 설치한 것도 하륜의 업적이다. 당시 조정에서 신문고 제도의 현실적인 효용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의견이 빗발치자, 그래도 백성들이 국가에 직언할 수 있는 창구가 있어야 한다는 이유로 그냥 밀어붙였다.[14] 본인은 무사했으나, 아들들이 전부 사사되었다.[15] 태종실록 12권 태종 6년 12월 10일자 기록으로 기록에서는 임금이 매우 즐거워하여 서로를 부르기를 잠저때(=태종이 왕이 되기 전)와 같이 하였다며 민제가 임금을 선달이라 하고 임금이 민제를 사부라 하였다고 기록하였다. 다만 이 때도 뭔가 있긴 했는지 잔치가 파하고 태종이 돌아가는데 민제가 문 밖에 나와 전송하니 태종이 들어가라고 했지만 민제는 황공해하며 들어가지 못하며 말 앞으로 나아가 섰는데 무질이 이에 아버지가 물러나셔야 임금께서 돌아간다고 하자 민제는 네가 어찌 아느냐 말하고 기록은 결국 민제는 공읍하여 물러나지 않았고 임금은 10여보를 걷다가 말에 올랐다는 것으로 끝난다.[16] 고려의 사회적 통념에서 장인도 아버지였고 유학적으로 스승은 아버지와 같았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말을 놓은 것이 이상할 일은 아니다. 물론 일단 두 사람은 군신관계인지라 진짜로 말을 놓은 상황인건 좀 굉장하다. 당장에 세조 시절에는 정인지가 세조를 너라고 불렀다고 조정이 발칵 뒤집어졌다. 정인지는 원로대신일 뿐 거사를 함께 치른 동기도 아니고 사적인 혈연·인척 관계도 없는데다가 사저가 아니라 조정에서 벌어지는 술자리에서 만취하여 한 것이니 격이 다르긴 하다. 결정적으로 태종-민제의 관계는 아직 세조 때처럼 왕조가 어느 정도 안정되고 나서가 아닌 왕조 극초기이고 장인-사위 관계를 고려 시절에 맺었기 때문인 점이 크게 작용한다.[17] 1998년 KBS 드라마 <왕과 비>에서는 세종 역.[18]
용의 눈물 자막팀의 실수로 졸지에 자기 사위의 하인이 돼 버렸다(...)[19] 무인정사 당일, 이복동생 방석의 세자책봉에 찬동한 대신들을 도륙하는 방원의 모습을 보며 일찌감치 왕실의 외척인 자신의 가문의 운명도 직감한 듯 굉장히 어두운 표정을 짓는 것으로 나온다. 다만 이를 일찌감치 예감했으면서도 자식들에게 시원스럽게 설명해주지 않는다. 늘 자중하라고 말하면서도 왜 자중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으니 자식들도 시청자들도 답답하기만 할 노릇. 물론 설명한다고 쉽사리 알아들었으리라는 보장도 없고 사실 본인도 권력을 과하게 탐하던 사람은 언젠간 최후가 비참하다는 역사적 교훈만을 알았을 뿐이지 구체적으로 그게 어떻게 나타날지는 몰랐을 것이다. 아들들 성정을 보면 자세히 말해주면 되려 이방원을 경계하다가 우려하던 일만 더 앞당길 수 있을수도 모르기도 했다. 작품 외적으로 보면 뭘 하더라도 자식들이 사위에게 죽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바꿀 수는 없었을 것.[20] 실제로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아버지인 태조겠지만 그건 당연한 일이라 언급할 필요도 없었던듯. 혹은 태종이 아버지를 대하는 태도가 존경을 뛰어넘은 외경의 경지라 그랬을지도 모른다.[21] 양녕대군의 경우 이 소동으로 누군가 또 숙청될거라 예상은 했지만 그것이 자신의 외숙들이 되리란 것까지는 아직 모르다가 양위 철회 후 감을 잡게 된다.[22] 태종이 세 정승들을 불러 민무구와 민무질에 대해 숙청을 암시했을 때 조영무와 함께 아량을 베풀어달라고 변호하다가 이제 좀 쉬어야겠다는 말과 함께 조영무와 함께 정승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고 만다.[23] 심온의 집인 청송 심씨는 여흥 민씨만큼 명문가였고 무엇보다 심온의 아버지는 이성계가 공양왕을 옹립할 때 함께하던 9명 중 1명인 심덕부다. 동생도 고관직에 올랐고 본인도 처세를 잘해서 주변의 평판이 좋았기에 이방원으로서는 자기 사후 외척들이 난립을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민제도 심온과 마찬가지였으나 그의 아들들인 민무구와 민무질은 누이와 자기들의 공만 믿고 방자하게 행동하였다. 민제는 개국공신이 아니었으나 심덕부는 고려 말부터 조선 건국에 큰 역할을 하던 사람이었으니 비교 대상이 되지도 않았다.)[24] 실제 민제의 3남과 4남인 민무휼과 민무회는 형들과 달리 딱히 죽을 짓을 한 것도 아닌데 죽였다. 죽인 이유도 고작 "언젠가 좋은 날이 올 것"이라고 한 말을 꼬투리 잡아 역모를 꾀한게 아니냐고 몰아붙여 죽였다. 이미 윗형제들을 죽인 이후였고 자신을 원망하는 원경왕후까지 고려한다면 훗날을 도모할 수도 있기 때문에 처벌을 준비해버린 것 같다.[25] 2002년 SBS 드라마 <야인시대>에서는 이화룡 역, 2004년 KBS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녹도 만호 정운 역.[26] 2003년 KBS 드라마 <무인시대>에서는 의종 역, 2015년 KBS 드라마 <징비록>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역.
용의 눈물 자막팀의 실수로 졸지에 자기 사위의 하인이 돼 버렸다(...)[19] 무인정사 당일, 이복동생 방석의 세자책봉에 찬동한 대신들을 도륙하는 방원의 모습을 보며 일찌감치 왕실의 외척인 자신의 가문의 운명도 직감한 듯 굉장히 어두운 표정을 짓는 것으로 나온다. 다만 이를 일찌감치 예감했으면서도 자식들에게 시원스럽게 설명해주지 않는다. 늘 자중하라고 말하면서도 왜 자중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으니 자식들도 시청자들도 답답하기만 할 노릇. 물론 설명한다고 쉽사리 알아들었으리라는 보장도 없고 사실 본인도 권력을 과하게 탐하던 사람은 언젠간 최후가 비참하다는 역사적 교훈만을 알았을 뿐이지 구체적으로 그게 어떻게 나타날지는 몰랐을 것이다. 아들들 성정을 보면 자세히 말해주면 되려 이방원을 경계하다가 우려하던 일만 더 앞당길 수 있을수도 모르기도 했다. 작품 외적으로 보면 뭘 하더라도 자식들이 사위에게 죽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바꿀 수는 없었을 것.[20] 실제로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아버지인 태조겠지만 그건 당연한 일이라 언급할 필요도 없었던듯. 혹은 태종이 아버지를 대하는 태도가 존경을 뛰어넘은 외경의 경지라 그랬을지도 모른다.[21] 양녕대군의 경우 이 소동으로 누군가 또 숙청될거라 예상은 했지만 그것이 자신의 외숙들이 되리란 것까지는 아직 모르다가 양위 철회 후 감을 잡게 된다.[22] 태종이 세 정승들을 불러 민무구와 민무질에 대해 숙청을 암시했을 때 조영무와 함께 아량을 베풀어달라고 변호하다가 이제 좀 쉬어야겠다는 말과 함께 조영무와 함께 정승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고 만다.[23] 심온의 집인 청송 심씨는 여흥 민씨만큼 명문가였고 무엇보다 심온의 아버지는 이성계가 공양왕을 옹립할 때 함께하던 9명 중 1명인 심덕부다. 동생도 고관직에 올랐고 본인도 처세를 잘해서 주변의 평판이 좋았기에 이방원으로서는 자기 사후 외척들이 난립을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민제도 심온과 마찬가지였으나 그의 아들들인 민무구와 민무질은 누이와 자기들의 공만 믿고 방자하게 행동하였다. 민제는 개국공신이 아니었으나 심덕부는 고려 말부터 조선 건국에 큰 역할을 하던 사람이었으니 비교 대상이 되지도 않았다.)[24] 실제 민제의 3남과 4남인 민무휼과 민무회는 형들과 달리 딱히 죽을 짓을 한 것도 아닌데 죽였다. 죽인 이유도 고작 "언젠가 좋은 날이 올 것"이라고 한 말을 꼬투리 잡아 역모를 꾀한게 아니냐고 몰아붙여 죽였다. 이미 윗형제들을 죽인 이후였고 자신을 원망하는 원경왕후까지 고려한다면 훗날을 도모할 수도 있기 때문에 처벌을 준비해버린 것 같다.[25] 2002년 SBS 드라마 <야인시대>에서는 이화룡 역, 2004년 KBS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녹도 만호 정운 역.[26] 2003년 KBS 드라마 <무인시대>에서는 의종 역, 2015년 KBS 드라마 <징비록>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