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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병마사 / 도평의사사 식목도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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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는 고려 후기부터 조선 초기까지 있었던 최고 의결 기관이다.고려 초기 도병마사의 후신이며 도당(都堂)이라고도 한다.
여러 관청의 관원이 참여하는 합의 기관이며 국방 기관이었다가 정무를 아우르게 되었다는 점에서 조선 시대의 비변사와 비교된다.
2. 연혁
고려 시대의 도병마사는 원래 재추, 즉 중서문하성의 재신(宰臣)과 중추원의 추밀(樞密)이 모여 양계의 국방 문제를 다루던 회의로 여기에는 삼국시대의 화백회의와 같은 귀족 회의 전통이 나타난다.[1] 고려 중기 이후 구휼을 담당하면서 기능이 확대되다가 고종 연간(1213 ~ 1259) 말기에 이르러 도당이라 불리며 재추 전원이 참여하여 국정 전반을 다루기 시작했다.원 간섭기 관제 격하로 1275년(충렬왕 1) 중서문하성과 상서성이 합쳐져 첨의부(僉議府)가 되고 추밀원이 밀직사(密直司)로 바뀌자 1279년(충렬왕 5) 도평의사사라는 이름의 관청이 되어 중국에서 북송 때 중서문하(中書門下)와 추밀원을 아울러 이부(二府)라고 부른 것처럼 첨의부와 밀직사의 양부 합좌(兩府合座)로 운영되었다.
관제 복구 이후에도 문하부, 삼사, 밀직사 관원이 합좌하는 최고 의결 기관으로 남았으며 참여하는 관원의 수가 70명에 달하는 것이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조선 건국 후에도 문하부, 삼사, 중추원이 합좌하는 형태로 남아있다가 1400년(정종 2) 의정부로 명칭이 바뀌었고, 여러 관청의 합의 기관이라는 성격도 1401년(태종 1) 문하부가 없어지고 재신의 소속이 의정부로 옮겨지면서 사라졌다. 단 도당이란 이름은 여전히 의정부의 별칭으로 계속 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