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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삼사(三司)는 전근대 고려, 중국의 재무 관부이다.2. 고려
고려 시대에 화폐와 곡식의 출납과 회계를 담당한 기구. 지금으로 치면 농림수산식품부,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의 역할을 했던 기구라고 생각하면 된다. 고려사에는 고려 태조가 태봉의 조위부(調位府)를 삼사로 개칭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성종대 당 및 북송의 제도를 본떠 만들었다. 허나 고려의 삼사는 중서문하성, 상서육부의 재상권이 건재했기에 북송의 삼사와는 다르게 제한된 권한만을 시행할 수 있었다.현종대 1014년(현종 5년) 김훈, 최질의 난으로 삼사를 철폐,[1] 무신이 겸임할 수 있는 도정사(都正司)/도정서(都正署)을 설치했다가 1015년(현종 6) 김훈, 최질이 주살되어 반란을 토벌하자 1023년(현종 14년) 도정사를 혁파하고 삼사를 재설치했다.
여말선초에는 도평의사사에게 기능이 사실상 빼앗겨 상서성에 합쳐졌다가 다시 분리되어 떨어졌고, 관원의 수가 증가하고 지위가 재상의 반열에 올라 문하부, 밀직사의 재추와 더불어 도평의사사에 합좌 참석할 수 있었다.
조선 초기 사평부(司平府)로 바뀌었으며 나중에 호조로 흡수되었다. 애초에 북송의 삼사가 호부의 4개 속사 중 3개를 합쳐 만든 것이므로 결국 원래 자리로 돌아간 셈.
한국사 관련 시험에서는 고려와 조선의 삼사[2]를 구분하는 낚시 문제가 출제된다.
3. 중국사
북송의 재정(財政) 담당 관청으로 염철(鹽鐵),[3] 호부(戶部),[4] 탁지(度支)[5] 등 3개 부서를 합쳐 만들었다. 정확히는 6부 24사 체제에서 호부 산하에 호부사, 탁지사, 금부사(=염철사), 창부사가 있었는데, 이 중 창부사[6]를 제외한 나머지 3개 사를 삼사로 독립시킨 것.당 말부터 중앙 재정의 부족으로 그 중요성이 커졌으며 재상이 직접 겸직하기도 하였다. 무장이 겸직한 오대십국을 거쳐 송나라 때도 재정은 중요한 요소였기 때문에, 민정을 담당하는 중서의 동중서문하평장사, 군령권을 담당하는 추밀원의 추밀사가 양부(兩府)로 있고 그 뒤를 이어 삼사를 관장하는 삼사사는 계상(計相)이라고도 하였다.
송나라 이후에는 도로 호부에 흡수되어 재상의 반열은 감찰을 담당하던 어사대(도찰원)로 대체되었다.
4. 관련 문서
[1] 문신 장연우, 황보유의가 녹봉을 관장하는 삼사로 하여금 여요전쟁에서 싸운 군인들의 녹봉과 영업전을 빼앗아 문관들에게 돌리는 병크를 터트렸기 때문이다.[2] 조선의 삼사는 재무 관청인 고려의 삼사와 달리 감찰 및 간언, 교육을 맡는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즉 대간의 합칭이다.[3] 현대의 전매청에 상당. 소금, 철이 전근대에 화폐 역할을 하기도 했으므로 한국은행에 대응된다고 볼 수도 있다. 이외에 단순히 전매 뿐이 아닌 상세를 걷는 역할도 하였으므로 국세청, 관세청의 역할도 맡고 있었다. 창부사와 함께 대사농 및 소부를 계승한 것으로 인식된다.[4] 인구, 공납 등 조세 및 국가 재정을 총괄, 현대의 기획재정부 및 국세청, 통계청에 상당.[5] 춘대추납 등 현대의 금융 및 여신 정책 등을 총괄, 구한말의 탁지아문, 탁지부의 어원이다. 현대의 금융위원회 등에 상당.[6] 현대의 조달청에 상당. 지방에서는 공부(工部)의 일원으로 인식되기도 하는 등 변동이 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