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8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c00d45,#94153e> 태조 | 조준, 의안대군, 이지란, 조인옥, 남재, 이제, 남은 |
정종 | 익안대군 | |
태종 | 하륜, 조영무, 정탁, 이천우, 이래 | |
세종 | 황희, 최윤덕, 허조, 신개, 이수, 양녕대군, 효령대군 | |
문종 | 하연 | |
세조 | 권람, 한확, 한명회 | |
예종 | 박원형 | |
성종 | 신숙주, 정창손, 홍응 | |
중종 | 박원종, 성희안, 류순정, 정광필 | |
인종 | 홍언필, 김안국 | |
명종 | 심연원, ■이언적 | |
선조 | 이준경, ■이황, ■이이 | |
인조 | 이원익, 신흠, 김류, 이귀, 신경진, 이서, 능원대군 | |
효종 | 김상헌, ■김집, ■송시열, 인평대군, 민정중, 민유중 | |
현종 | 정태화, | |
숙종 | 남구만, ■박세채, 윤지완, 최석정, 김석주, 김만중 | |
경종 | 이유, 민진후 | |
영조 | 김창집, 최규서, 민진원, 조문명, 김재로 | |
장조 | 이종성, 민백상 | |
정조 | 김종수, 유언호, 김조순 | |
순조 | 이시수, 김재찬, 김이교, 조득영, 남연군, 조만영 | |
문조 | 남공철, 김로, 조병구 | |
헌종 | 이상황, 조인영 | |
철종 | 이헌구, 익평군, 김수근 | |
고종 | 박규수, 신응조, 이돈우, 민영환 | |
순종 | 송근수, | |
■ : 문묘 종사 동국 18현을 겸하는 6인(동무종향) ■ : 문묘 종사 동국 18현을 겸하는 6인(서무종향) | }}}}}}}}} |
이천우 관련 틀 | |||||||||||||||||||||||||||||||||||||||||||||||||||||||||||||||||||||||||||||||||||||||||||||||||||||||||||||||||||||||||||||||||||||||||||||||||||||||||||||||||||||||||||||||||||||||||||||||||||||||||||||||||||||||||||||||||||||||||||||||||||||||||||||||||||||||||||||||||||||||||||||||||||||||||||||||||||||||||||||||||||||||||||||||||||||||||||||||||||||||||||||||||||||||||||||||||||||||||||||||||||||||||||||||||||||||||||||||||||||||||||||||||||||||||||||||||||||||||||||||||||||||||||||||||||||||||||||||||||||||||||||||||||||||||||||||||||||||||||||||||||||||||||||||||||||||||||||||||||||||||||||||||||||||||||||||||||||||||||||||||||||||||||||||||||||||||||||||||||||||||||||||||||||||||||||||||||||||||||||||||||||||||||||||||||||||||||||||||||||||||||||||||||||||||||||||||||||||||||||||||||||||||||||||||||||||||||||||||||||||||||||||||||||||||||||||||||||||||||||||||||||||||||||||||||||||||||||||||||||||||||||||||||||||||||||||||||||||||||||||||||||||||||||||||||||||||||||||||||||||
|
<colbgcolor=#b82642><colcolor=#f0ad73> 완산부원군 (完山府院君) 양도공 (襄度公) 이천우 李天祐 | |
<nopad> | |
출생 | 미상 |
사망 | 1417년 |
묘소 |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성석동 산203 (고양시 향토문화재 제7호) |
본관 | 전주 이씨 |
호 | 차산(此山) |
봉호 | 완산부원군(完山府院君) |
시호 | 양도(襄度) |
주요 관직 | 지삼군부사(知三軍府事) 이조판서 병조판서 의정부 찬성사 의금부 도제조 |
부모 | 완풍대군 이원계 삼한국대부인 남평 문씨 |
자녀 | 장남 이굉(李宏) 차남 이완(李完) |
[clearfix]
1. 개요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무신, 군인. 이자춘의 손자이며 태조 이성계의 백형 이원계의 차남이다. 즉 태조 이성계의 조카이다. 본관은 당연히 전주 이씨. 어머니는 경주 김씨이며, 계모인 남평 문씨는 목화로 잘 알려진 문익점의 딸이다. 즉 이천우는 문익점의 의붓외손자인 셈이다.민제의 사위이기도 하는데, 즉 태종 이방원의 사촌형이면서 동서지간이다. 다만 조선왕조 실록과 선원속보[1]에는 이천우의 두 번째 부인 황보씨에 대한 기록이 있으나 누구의 딸인지는 기록이 없고, 여흥 민씨 세보에는 민제의 딸이 3명(조박의 처, 원경왕후, 노한의 처)으로만 기록되어 있어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없다.
2. 생애
2.1. 태조 이성계의 총애를 받는 조카
조선왕조실록 졸기에 따르면 어려서부터 활쏘기와 말타기에 능하였고 풍모가 아름다웠으며 재기와 도량이 있었다고 전해진다.1369년 동녕부의 수령으로 있다가 숙부인 이성계의 휘하에 바로 들어가게 되었고, 그 이후 이성계를 도와 각종 전투에 참가하게 된다. 이후에는 이성계의 최측근으로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사에서는 그의 행적이 사실상 이성계 휘하로 들어간 이후에는 보이질 않지만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이성계 즉위시에 이성계가 그의 부축을 받는다는 기록으로 사실상 첫 개인 행적을 보여준다.
이후 1393년에 원종공신에 책봉되었고, 1394년에는 상의중추원사로 임명된다. 그리고 1396년에 강원도 조전 절제사가 되어 강원도 일대에 출몰하던 왜구를 격퇴하게 한다. 그리고 1398년에는 중추원부사에 이른다. 이 때까지는 확실하게 태조 이성계의 총애를 받는 조카였다.
2.2. 사촌 태종 이방원의 최측근
하지만 1398년 무인정사에 사촌 이방원의 편을 들게 되면서 숙부인 태조와는 반대의 길을 걷게 된다. 사실 이천우는 이방원의 봉기 사실을 알지 못했으나 중간에 사태를 파악하고 곧바로 이방원 편을 들게 되었고 무인정사가 성공이 된 이후 동지중추원사 겸 병조 전서 의흥 시위사 상장군 지삼군부사라는 상당한 직책을 받음과 동시에 자신의 형인 이양우와 함께 정사공신 2등을 책록받게 된다.이후 정종이 즉위하게 되고 제2차 왕자의 난이 발생하자 이방간을 쳐야 한다고 숙부인 이화와 함께 이방원을 설득하는데 앞장서게 되면서 좌명공신 2등을 책록받게 되고, 1400년에는 완산후에 봉해진다. 1402년에는 안주도 도절제사가 된다.
그러다 곧바로 조사의의 난을 맞게 된다. 난 당시 박순, 송류 등과 함께 선발대로 나갔으나 초기에 강력한 조사의에게 패배했다. 이천우가 초반에 보낸 기병 백여 명은 조사의에게 잡혔으며, 다음날 전투에서 포위당했다가 아들을 포함한 10여 명의 기병과 겨우 탈출하였다. 이후 다시금 본군에 합류하여 조사의의 난을 진압하고 태조 이성계를 시위하게 된다.
그가 이렇게 우선적으로 조사의의 난 진압에 나섰던 이유는 이성계가 총애하는 조카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래서 난 초기에 시간을 끄는 목적으로 그를 내세우고 이후 조사의의 난을 완벽하게 진압한 이후 이성계를 데려오게 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했다.[2] 실제로 그가 조사의의 난에서 한번 패했음에도 불구하고 태종은 내전에서 그만을 위한 잔치를 베풀고 비단옷을 내려주게 되는데 그 이유를 공전에서 수고하였다는 것을 내세웠다는 점에서 이러한 내막을 파악해볼 수 있다.
이후에도 그는 태종의 측근으로 활약하며 한양 천도 등에도 참가하고, 1407년에는 세자를 명나라 하정사로 보내는데 부사가 되어 베이징에 다녀오게 되고, 1408년에 의정부 찬성사가 되어 중앙 정계에 다시금 복귀하게 된다. 그리고 1409년 병조판서가 되었다가 곧바로 판의흥부사 겸하면서 다시금 의정부 찬성사가 되었고, 1410년에는 판의용순금사사를 의정부 찬성사와 함께 겸하게 된다.
그리고 1413년 이조판서가 되었고 곧바로 서북면 도체찰사가 되어 성과 병사 등을 챙기게 하였다. 그리고 1414년 완산부원군이 된다. 또한 곧바로 의금부 도제조가 되는데 이 직책을 꽤나 오랫동안 유지하게 된다. 특히 1416년에 있었던 민무휼, 민무회 형제의 숙청작업 등을 돕는다. 그러다 1417년 병에 걸려서 죽게 된다. 그야말로 마지막까지 사촌이었던 태종 이방원의 최측근으로 활동한 셈이 되었다. 한편 태종 이방원은 그가 죽자 한동안 고기를 먹지 않을 정도였다.
그리고 태종이 죽자 하륜, 조영무 등과 함께 태종의 배향공신이 된다.
자녀로는 이굉과 이완이 있는데 유일한 적자였던 이굉은 여러 문제를 일으키다가 아버지가 죽은지 얼마 되지 않아서 불효의 죄를 받게 되면서 직첩이 거두어지고 곧 죽게 되었으며, 그의 아들들이 어머니와 함께 담양으로 낙향하여 그 지역에 종파를 이루고 살게 된다.
3. 대중매체
인지도가 높은 인물은 아니라서 그런지 여말선초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에서 비중 있게 나온 건 <용의 눈물> 뿐이고 <육룡이 나르샤>에서는 카메오 수준으로 출연하는 정도다.[3]- 1996년 KBS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는 배우 김옥만[4]이 연기했다. 민무구, 민무질, 박포 등이 동료로 삼을 만한 인물들을 태종에게 소개할 때 처음으로 등장하는데, 태종의 사촌이라는 사실은 극 초반부에는 딱히 언급되지 않는다. 태조와 이화는 이천우에게 숙부가 되는데도 이천우가 이들을 숙부라고 부르는 장면도 없는 것으로 보면[5], 아무래도 제작진 측에서 왕실의 일원임을 나중에야 발견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1차 왕자의 난에서는 공신들 중에서 가장 가깝게 그려지는 조영무와 짝을 이루어 활약하는데, 정안군이 공신들을 충분히 챙겨 주지 않는다고 느끼고 불만을 품지만 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다시 조영무와 함께 공을 세웠다. 다만 초반에 회안군 세력이 유리하자, "일단 목숨은 부지해야 하니 항복하자" 라고 조영무에게 제안하기도 했다.
2차 왕자의 난 이후에는 정안군의 다른 공신들과 마찬가지로 부귀영화가 눈앞에 다가왔다고 생각하게 되지만, 세자가 된 정안군이 사병 혁파에 나서자 조영무, 조온 등과 마찬가지로 반항하다 귀양을 가게 된다. 귀양 직전 정안군에게 불려와 술자리를 하게 되는데, 귀양을 간다는 말을 듣고는 인상을 마구 구기며 "이것이 어찌 사람이 할 수 있는 짓거리오이까", "저하께서는 인면수심이시옵니다!", "토끼 사냥이 끝나면 개를 삶아 먹는다더니... 우리 신세가 참으로 처량하구나"라고 울부짖는다. '은혜를 배신으로 갚다니 뒤가 두렵지 않사옵니까. 그러고도 편히 주무실 수 있사옵니까' 라는.. 평상시에는 도저히 할 수 없는 극언까지 서슴치 않고 울분을 토하지만 정안군은 전혀 질책하거나 노여워하지 않고 가만히 듣기만 하며 내심 괴로워한다[6].
한편 이 술자리에서 정안군은 이천우에게 처음으로 "형님" 이라고 부르며 친척인 티를 내는데, 문제는 이천우의 아버지인 이원계의 어머니가 천한 노비의 신분이었는데 그런데도 지금 이 자리에 계신 것은 아버님(태조)와 자신이 힘을 쓴 덕이라고 생색을 낸 것이다. 이천우는 지난 이야기는 무엇하러 꺼내시냐며 언짢아하는데, 실제로도 이천우의 조모가 천민이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7].
이후 귀양지에서 조온과 장기를 두며 세월을 보내게 되는데, "곧 죽임을 당하지 않겠느냐" 라며 불안해하는 조온과 달리 "죽이든 살리든 어차피 사병을 빼앗긴 이상 목숨을 빼앗긴 거나 마찬가지다" 라며 자포자기한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곧 정안군의 부름을 받게 되는데, 사병을 빼앗아 위험 요소를 제거한 다음 적당한 시점에 불러들이는 정안군의 정치력에 "참으로 대단하신 분"이라며 경외심을 보인다. 뒤이어 정안군은 이천우를 귀양 보내기 전의 술자리에서 했던 발언을 사과하기도 하는데, 종친부의 여러 어른들께 집안 내력에 대해 알아보니 자신이 잘못 알았었으며 우리는 친사촌간이 되는데 형님의 가슴을 아프게 했으니 미안하다는 것. 이로써 이천우는 정안군에게 서운했던 마음을 완전히 버리게 되며, 정안군이 태종으로 즉위한 이후에 변남룡 등이 정종을 복위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태종에게 이를 고하기도 한다.
이윽고 조사의의 난이 일어나자 진압에 참가하는데, 조사의로부터 "삼국지로 비유해서 장비라고 하면 딱 좋을 자"라는 평을 듣고 대패한다. 다만 태종에게 큰 질책을 받지는 않고, 친정을 나온 태종에게 전장의 상황을 설명하는 등으로 보좌한다. 난이 진압되어 정국이 안정되면서부터는 조정 대신 중 한 명으로 나오며, 세자인 양녕대군을 보필해 명나]에 사행을 다녀오기도 한다.
조정 대신으로서는 정이 많고 소탈한 조영무와 달리 왕족으로서 태종의 왕권 강화 정책을 철저히 지지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특히 이화와 함께 민씨 4형제를 숙청하는 데 앞장섰다. 조사의의 난 때까지만 하더라도 민무구, 민무질과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는 점에서 씁쓸함이 느껴지는 부분[8].
민씨 4형제가 숙청되고 하륜은 세상을 떠나고 이숙번은 귀양에 처해진 이후, 태종은 조정의 빈 자리들을 메울 겸 분위기를 바꿀 겸 대대적인 개각을 단행한다. 그리고는 극이 1년을 건너 뛰는데, 이 사이에 세상을 떠난 탓에 졸기도 없이 퇴장한다. 졸기가 없는 것이 이천우 한 명은 아니지만 웬만한 인물들은 모두 띄워 주는 와중에 언급도 되지 않고 사라지는데, 극중의 비중을 생각하면 다소 아쉬운 일.
용의 눈물의 원작 소설인 박종화의 '세종대왕' 에서는 조사의에게 사로잡혀 처형되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 2015년 SBS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에서는 등장하기는 했으나 비중은 매우 낮다. 무인정사 즈음에 등장했는데 사실 드라마 특성상 굳이 등장하지 않아도 상관없는 배역이 이름까지 달고 등장한건 당시 흑화하고 있던 정도전에게 불만을 품고 있던 종친 세력의 대표격 인물이라서인 듯하다.
- 2021년 태종 이방원에 등장하며, 조사의의 난에서 태종의 명에 의해 출정했으나 패배한다. 태조는 태종이 이천우를 선봉으로 보낸 것이 자신의 조카라는 점을 이용해 자신을 머뭇거리게 하기 위함이라 말하면서, 성정이 급한 녀석이니 유인 후 매복하면 패할 것이라고 하였는데 실제 그렇게 되었다. 그것 때문에 승리를 축하는 자리에서 이방원에게 벌하여 달라고 빌지만 이방원은 승패는 병가지상사라면서 넘어간다.
[1] 완풍군파속보 기준[2] 드라마 태종 이방원에서는 이 해석을 그대로 따랐다.[3] <용의 눈물>은 159부작의 장편이고 <육룡이 나르샤>는 50부작이다. 그만큼 뒤로 갈수록 사극 제작 여건이 안 좋아졌음을 알 수 있는 대목. 또 <육룡이 나르샤>는 실존과 가상, 역할들이 겹친 인물들이 나오는 경우가 많아서 인지도가 낮은 실존 인물이 설 자리가 그만큼 없다.[4] 2000년 KBS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는 충주 지역의 장군이던 금식 역, 2001년 SBS 드라마 <여인천하>에서는 류순정 역.[5] 상왕으로 물러난 태조가 궁 밖으로 나가려 하자 금위장으로서 말리다 싸대기를 얻어맞기도 한다. 다만 아무리 조카라도 골육상쟁에서 정안군의 편을 들며 뛰어들었던 만큼 원망스러울 만도 하다.[6] 실상 정안군 자신도 인면수심이라는 말을 곱씹을 정도로 이천우 등의 말에 논리적으로 반박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안군의 인간적인 면모를 볼 수 있는 장면 중 하나.[7] 이원계의 어머니인 한산 이씨는 환조의 첫 번째 부인으로 1333년에 세상을 떠났고, 그리하여 맞아들인 후처가 영흥 최씨이며 환조가 그와의 사이에서 1335년에 얻은 아들이 태조다. 즉 이씨는 환조의 정실 부인이지, 측실이나 천민이 아니다.[8] 이건 이숙번과 민씨 형제 사이도 마찬가지인데, 한양 재천도 이전까지는 서로를 높이 인정하며 가깝게 지냈으나 재천도 이후로는 사사건건 대립하는 모습만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