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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4 20:43:38

제1차 왕자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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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조선 어기 문장.svg 조선 시대의 성공한 반정
무인정사 계유정난 중종반정 인조반정

파일:조선 어기 문장.svg 조선 시대의 왕자의 난
제1차 왕자의 난 제2차 왕자의 난
<colcolor=#f0ad73> 제1차 왕자의 난
第一次 王子之亂

무인정사(戊寅定社)
<colbgcolor=#c00d45> 시기 1398년 (태조 7년) 8월 26일 ~ 8월 27일 (음력)
장소 조선 한성부 경복궁 및 인근
원인 정도전급진파 사대부이방원 견제
사병 혁파 및 제3차 요동정벌 추진
교전 세력 왕세자(이방석) 지지파
(진압군)
정안군 지지파
(반란군)
주요 인물
지휘관

태조 (국왕)[별칭]
이방석 (왕세자)
정도전 (의흥삼군부사)
지휘관

정안군
하륜 (충청도관찰사)
이숙번 (안산군수)
참가자

남은
심효생
이제
정영[2]
정유[3]
정담[4]
박위
참가자

정녕옹주 민씨
이지란
익안군
회안군
이화
박포
조영무
조온
조준
박은
이거이
이애
병력 병력 규모 불명 병력 규모 불명
피해 피해 규모 불명 피해 규모 불명
결과 반란군의 승리
- 왕세자 이방석과 정도전 세력 숙청
- 태조의 정종에 대한 양위
영향 태종의 정권 장악 및 왕위 계승
제3차 요동정벌 저지
1. 개요2. 여타 명칭3. 사건의 성격4. 발생 원인
4.1. 태조의 후계자는 누가 될 것인가
4.1.1. 왜 방석인가?
4.1.1.1. 불가피한 계승이다
4.1.1.1.1. 건국에 신덕왕후 강씨가 기여한 지분의 존중4.1.1.1.2. 알동천호 시절의 폐모살제 예방4.1.1.1.3. 장남 이방우의 좌절과 요절4.1.1.1.4. 이방번을 통한 고려왕실과의 통혼4.1.1.1.5. 외부적 명분
4.1.1.2. 무리수이다
4.1.2. 말자상속?
4.2. 간과한 것4.3. 예방책?4.4. 정도전의 대명강경책과 군제개혁
5. 쿠데타의 전개와 결과6. 여타 기록 왜곡
6.1. 왕자 살해 음모는 실존했는가?
7. 태조의 병환
7.1. 태조 병환 조작설7.2. 반론
8. 만약 조선과 명의 결혼동맹이 성사되었다면?9. 사극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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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봉화백 정도전·의성군 남은과 부성군 심효생 등이 여러 왕자들을 해치려 꾀하다가 성공하지 못하고 형벌에 복종하여 참형을 당하였다.
태조실록 14권, 태조 7년(1398) 8월 26일 기사 1번째 기사. 태조실록에 기록된 공식 사건 개요이다. 물론 진실은... 이하 내용 참조.
조선 태조대에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이 중심이 되어 이방석정도전 일파를 제거하는 동시에 왕위를 찬탈한 반란. 왕세자 이방석과 정도전, 남은, 심효생, 이방번 등이 숙청되었다. 그로부터 2달여 뒤 태조는 차남 이방과에게 양위했다.

2. 여타 명칭

무인년(戊寅年, 1398년)에 일어났다 하여 무인정사()라고도 하며, 이방원이 주도하여 일으킨 난이라고 하여, '방원의 난'이라고도 한다.[5]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음력 8월 26일에 있었던 일이다. 여기서 정사란 사직을 안정시켰다는 뜻. 삼봉집에서는 '공소(恭昭)의 난'이라는 표현도 보이는데, 이는 이 난으로 살해된 무안군 이방번의 시호 공순(恭順)과 세자 이방석의 시호 소도(昭悼)에서 한 글자씩 따서 부른 표현이다.[6]

그래도 국내에서 가장 흔하고 익숙한 명칭은 왕자의 난 혹은 1차 왕자의 난. 역사상 다른 여러 왕자들의 반란을 제치고 왕자의 난하면 이 1차 왕자의 난을 의미하는 경우가 잦다.

3. 사건의 성격

신덕왕후 강씨 소생 이방석을 세자로 삼고 사병 혁파 등 급진적인 정책을 추진한 것에 대해 신의왕후 한씨 소생인 왕자들과 방계 종친들이 불만을 품고 일으킨 쿠데타이다. 흔히 이방원의 난으로 알려져 있으나 참여한 인물들의 면면을 보면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과 방계 왕족들이 태조에게 반기를 든 왕실 내분이다.

이성계의 막내동생 이화, 이성계의 조카 이천우(이성계의 이복형 이원계의 아들)와 조온(이성계 누이의 의붓아들), 3남 이방의, 4남 이방간, 사위 이저(경신공주의 남편)와 그의 아버지 이거이 등이 자기 휘하의 사병들을 이끌고 적극 가담했고 장자 이방우의 아들이자 장손인 이복근도 숙부 이방원을 지지했다.[7] 주요 친인척들 중 참여기록이 없는 사람은 차남 이방과뿐이다.[8]

얄궂은 점은 아버지의 위화도 회군 때 이방원이 손수 계모와 이복동생들을 피신시켰는데, 불과 10년 후 이복동생들을 자기 손으로 죽이게 됐다는 점이다.

4. 발생 원인

4.1. 태조의 후계자는 누가 될 것인가

1392년, 조선이 건국되었을 때 태조는 이미 50대 후반이었고 왕위를 물려줄 후계자를 생각해야 될 나이였다. 애초에 태조의 나이도 나이였지만 장남인 이방우부터 시작해 한씨 아래의 아이들은 이미 장성한 성인이었던 만큼, 누가 후계자가 되어도 이상할 건 없는 수준이었다. 오히려 이방우의 나이를 고려하면 장남이 나오고 38세가 되어서야 후계자 선정을 시작한 꼴.
왕후 아들 생년 개국 당시 나이 비고
신의왕후 한씨 진안군 이방우 1354 38 배제[9], 개국 공헌
영안군 이방과 1357 35 실질적 장남, 개국 공헌
익안군 이방의 1360 32 개국 공헌
회안군 이방간 1364 28 개국 공헌
정안군 이방원 1367 25 개국 공헌
이방연[10] 1370? - 개국 이전에 사망[11]
신덕왕후 강씨 무안군 이방번 1381 11 -
이방석 1382 10 -
당시 태조의 아들들을 살펴보면 장남 이방우[12], 차남으로 훗날 정종이 된 이방과, 셋째 이방의, 넷째 이방간, 다섯째로 훗날의 태종인 이방원, 여섯째로 위화도 회군 시점에서 사망한 이방연, 일곱째 이방번, 여덟째 의안대군 이방석이 있다. 방연까지가 개국 이전에 사망한 신의왕후 한씨 소생의 아들이고, 이방번이방석신덕왕후 강씨 소생의 아들이다. 세자 책봉 당시 이방번은 11세, 이방석은 10세로, 당시 이방과가 35세, 이방원이 25세였으며 여섯째 이방연이 살아있었다면 20살 이상이었을 것으로 짐작되므로 신의왕후 소생의 아들들과 나이 차이가 심했다.[13] 이미 장성해 있던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은 요절한 방연을 제외하면 크건 작건 다들 개국과정에 참여해서 일정한 공을 세웠다.

사가의 적장자 계승 원칙을 따른다면 한씨 소생 이방우가 세자가 되어야 할 것 같지만 그는 공양왕 시기부터 활동이 크게 줄어든다. 진안대군파에서 1631년 이지란의 후손들이 편찬했다고 알려진 청해백집을 인용하고 정조가 공인한 고려 왕조에 충절을 보이다가 폭음으로 사망했다는 설이 잘 알려져 있지만, 고려사와 실록 같은 정사에선 전혀 그런 흔적이 없고 조선 개국후에도 태조의 맏이로서 움직였다. 실제론 당대 평판이 매우 나빴던 지윤의 딸과 결혼하고 이색의 손자 이숙묘를 사위로 들여 조선 건국에 저항한 고려의 보수파 핵심과 인척 관계로 엮인 그의 배경[14], 신돈의 후손이 된 창왕의 입조를 요청하는 대명 사신단의 부사로 활동한 경력으로 인한 정치적인 문제에서 기인했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다. 아내와 사위 문제, 설상가상으로 이방우의 서자 이덕근의 아내, 즉 이방우의 며느리는 이방번의 장인이기도 한 정양군 왕우의 딸이다. 설사 한씨가 살아서 왕비가 되었어도 고민할 수밖에 없는 배경이었다.

아무튼 이방우는 조선 개국 직후인 1394년에 사망해 버린다. 방우가 생전에 가졌던 '적장자'로서의 위상은 방우의 아들 이복근 대신 차남 이방과에게 내려가 방우의 후손들은 정치실권에서 완전히 배제된다. 대신 이복근은 1차 왕자의 난 당시 반란을 일으켰던 넷째 숙부인 이방원과 이숙번, 하륜 등 이방원의 부하들을 지지했다.[15] 방우 문제는 그렇게 일단락되었지만, 여전히 걸리는 게 있었다.

그리고 세자는 가장 막내인 이방석으로 결정된다.

4.1.1. 왜 방석인가?

조선 왕조에서 처음 맞이한 왕비에서 나온 아들이 방석인데, 이는 고려 시대 얻은 부인으로부터 얻은 아들은 조선 왕조에서 적합성을 두고 논란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고는 하지만 애시당초 조선왕조실록에 그런 내용이 없는 것을 보면 그런 논란 자체가 없었다고 봐야 한다. 그보다는, 신덕왕후의 영향력이 태조에게 미쳤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4.1.1.1. 불가피한 계승이다
결론적으로 태조의 입장에서 보면 신덕왕후 강씨가 미는 이방석이 가장 좋은 선택지였을 수 있다.
4.1.1.1.1. 건국에 신덕왕후 강씨가 기여한 지분의 존중
태조 이성계가 보기에 여자여서 관직이 없었을뿐, 조선 건국의 1등 공신은 바로 신덕왕후 강씨였다. 향처 한씨 소생 왕자인 이방우, 이방과, 이방원도 전주 이씨의 흥기에 상당한 기여를 했지만 그들이 동북면 촌구석에서 썩지 않고 개경에서 활약할 수 있었던 것은 이성계가 경처로 뒀던 강씨의 집안, 고려말기부터 급성장해 당대에 이름 있는 권문세가 중 하나로 올라섰던 곡산 강씨 집안의 지원 덕분이었다.

만약 곡산 강씨와 혼사가 없었더라면 이성계는 권력가의 비호를 받지 못했을 것이라는 점과 고려 말기에 들어서 명망을 쌓은 신흥 고위관료에 그쳤을 것이기에 적어도 문중 입장에서 조선 건국의 기반과 지분에는 신덕왕후의 영향력이 크게 자리하고 있었다. 심지어 이방과와 이방원이 조선 건국을 보조한 개국공신의 수하들이라면 신덕왕후 강씨는 정도전과 더불어 건국의 '동지'라는 보다 확고한 입지가 있었던 만큼 신덕왕후 강씨가 이방석을 세자로 삼아달라고 하면 그것을 거절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향처 한씨가 조선 건국 이전에 죽었고, 한씨 집안의 영향력이 없었다는 점 역시 또 하나의 결정타로 작용했다.
4.1.1.1.2. 알동천호 시절의 폐모살제 예방
이미 훨씬 후대의 광해군과 중종반정의 사례를 들 것도 없이, 전주 이씨는 몽골제국의 봉건영주인 알동천호 시절부터 이복형제들끼리의 권력다툼이 굉장히 심했다. 특히 이복형제들의 친모가 이 권력 다툼에 끼는 경우가 다반사라서 원래 정부인의 적자였는데 권력다툼에 패배해 첩실의 서출로 격하되는 경우도 있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추존 도조 이춘부터 모친의 권력이 강해서 적장자를 제치고 가독을 물려받았고, 이자흥은 권력이 강한 한양 조씨 계모와 싸우고 이복동생들을 축출해 겨우 가독을 물려받았으며, 이자흥이 일찍 죽자 그 아우 이자춘은 조카가 아직 어리다는 이유로 가독을 가져가서는 돌려주지 않았다. 그 다음 대의 이원계는 이성계의 형이었으나 이성계에 밀려 가독을 물려받지 못하고 서자로 기록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향처 한씨 소생 왕자가 보위를 물려받으면 신의왕후 한씨가 정통이 되어야 하는 이상 신덕왕후 강씨는 격하를 피할 수가 없었는데 이것은 강씨도 이성계도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이성계는 이미 늙었고 신덕왕후 강씨는 이성계보다 훨씬 젊었기 때문에 당시로서는 이성계 사후에 무슨 변을 당할지 알수 없는 일이었으므로 이성계로서는 왕의 친모인 대비의 자리를 못박아놓는 것 말고는 강씨를 지킬 방법이 없었다.
4.1.1.1.3. 장남 이방우의 좌절과 요절
이런 상황에서 장남 이방우가 끝끝내 세자가 되기 위해 전주 이씨 문중의 적통 후계자 지위를 고수한다는 것은 즉 계모 강씨는 물론 아버지 이성계를 적으로 돌린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방우는 가뜩이나 개경에서 같이 활약할 일이 많았던 계모를 굳이 적대하기도 싫고 그렇다고 죽은 친모 한씨가 정당한 조선 최초의 왕비로 대접받지 못하고 계모에게 치여 억울하게 백안시당하는 현실에 순응할 수도 없어 은둔과 과음을 택한 것으로 추정되며 그대로 일찍 죽게되었다. 따라서 그동안 전주 이씨 문중의 정통 후계자 자리를 가지고 있었던 이방우가 정계에서 스스로 퇴장함에 따라 나머지 형제들은 모두 '장자가 아니기로는 모두 마찬가지인 동생'의 입장으로 대권에 도전하는 모양새가 되었고, 적어도 신덕왕후 사망 전까지는 세자 이방석의 입지 굳히기에 성공하는 듯 보였다.
4.1.1.1.4. 이방번을 통한 고려왕실과의 통혼
이성계가 곡산 강씨의 중개로 개경 중앙 귀족으로서의 입지를 굳히는 과정에서 경처 강씨의 장자인 이방번이 고려 왕실의 귀의군 왕우의 딸에게 장가들었었다. 귀의군의 형인 정창군 왕요는 공양왕이 되었고 결국 망국의 군주가 되었다. 문제는 지난 500년 동안 고려의 국성인 개성 왕씨는 당연히 삼한에서 제일 존귀한 가문이 되었고 전주 이씨 가문은 건국을 하고도 위격이 개성 왕씨에 한참 미치지 못했다는 것이다.[16] 그 때문에 이성계와 정도전은 기껏 민본과 유교를 내세워 개국하고도 고려부흥운동이 두려워서 왕씨들을 학살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나중에 이방번의 자식이 왕위를 잇는다면 높은 확률로 다시 왕씨가 실권을 차지하고 그 모든 개혁을 무위로 돌려 조선을 개국한 의미가 하나도 없어지게 되는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었으므로 이방번이 세자가 되는 것에 신진사대부들이 동의할 리가 없었다. 결국 신덕왕후 강씨의 소생들 중에서 이방번을 제치고 나니 남는 건 이방석 밖에 없었다.
4.1.1.1.5. 외부적 명분
방석의 형제들의 간략한 혼인 관계는 다음과 같다.[17]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사망한 '향처' 한씨는 건국 후 절비(節妃)라는 시호를 내려 예우를 갖추긴 하였으나 왕비로 대우받지는 못했다. 건국 이전에 죽은 그녀의 권위가 새 왕조의 유일한, 첫 번째 왕비인 신덕왕후를 뛰어넘을 순 없었다. 태조 2년 한씨의 삼년상이 끝나고 잔치를 베푸는 것을 마지막으로 그녀에 대한 태조 이성계의 예우는 끝난다. 반면 신덕왕후 강씨는 조선 왕조의 초대 왕비로서 그 권위가 공인되어 있었다. 왕조 국가에서 왕과 왕비 사이에서 난 적자가 세자가 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그렇다면 '적장자'라고 할 수 있는 신덕왕후의 맏아들 이방번은 왜 세자가 되지 못했는가? 방번은 장인이 정양군 왕우라서 세자가 될 수 없었다. 이 인물은 태조가 죽인 공양왕의 형이자 신료들이 수시로 제거를 노리던 옛 고려 왕족이었다. 그러면 이방번을 이혼시키면 되는데 그러지 않았으니 단지 이방석을 세자로 삼고 싶어서 핑계를 댄 것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그리 간단히 이혼시키기는 어려웠던 것이, 정양군 왕우는 태조가 고려 왕실의 제사를 받들어야 한다는 명분으로 유력 왕씨 130여 명을 제거하는 가운데서도 중앙에 남겨둔, 조선 왕실의 정통성과 밀접하게 이어진 인물이었기 때문이다.[20] 결국 남은 선택지는 이방석 뿐이었다.

창업 군주가 왕조 국가에서 얼마나 특별한 위상을 가지는지 생각해 보자. 신덕왕후 강씨는 자연인 이성계의 후처일지언정 조선왕조의 첫 왕비였다. 이 무게감을 잊어서는 곤란하다. 이 때문에 태종 이방원은 치세 내내 조선왕조의 첫 왕비 신덕왕후와 첫 대비 정안왕후의 권위를 떨어뜨리는 조치를 취해야 했다.

한편 적장자 계승을 명분으로 이방석을 제거한 이방원은 이 때문에 정종이 된 친형 이방과와 형수 정안왕후의 양자가 되는 무리수를 감내해야 했다. 또한 왕권을 강화하는 과정에서는 즉위 명분을 이전의 적장자 계승에서 택현으로 전환하기 위한 조치로 후궁 출신인 성비 원씨를 모친, 즉, 이성계의 부인으로 대우하며 극진히 모심으로서 조선의 첫 대비라는 정안왕후의 위상을 무너뜨렸다. 신덕왕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태종은 자신의 친모인 한씨를 신의왕후로 추증해 신덕왕후를 대체할 권위의 매개체로 삼았다. 신덕왕후의 권위와 존재감을 유지하기 위해 도성 안에 그녀의 능을 조성한 태조의 뜻을 알아채고[21] 신덕왕후의 묘와 석물을 들어내 버리고, 제사마저 왕비가 아닌 후궁의 예로 치르다가 태조 사후에는 아예 제대로 된 제사조차 지내지 않았다. 공식석상에서도 신덕왕후를 폄하하는 발언을 누차 함으로서 그녀의 위상을 지속적으로 떨어뜨렸다.[22]

정말로 처음부터 자격 없는 어린아이를 억지로 세자에 앉힌 것이 명분도 없고 납득하기 힘든 일로 받아들여졌다면 애초부터 형과 형수의 아들로 즉위할 필요가 없었다. 유교에서 택현()[23][24]은 요순 이래 적장자 계승보다 한 수 위의 강력한 명분이다. 또한 여말선초는 아직 적장자 계승이 사회 윤리로 정착되지 않았던 시기였다.[25][26]

한편 '택현'이라는 정성적인 기준이 왕위 계승의 명분이면 매번 왕실에 분란이 일어날텐데 그건 말이 되는가? 이를 증명하듯 조선왕조를 통틀어 적장자 출신 왕은 단 7명 뿐이다. 그리고 한국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아는 사실이지만 세자의 교육과정은 다른 왕자들의 그것에 비해 매우 혹독하다. 사도세자와 정조의 예를 생각해보자. 이 모든 것이 적장자든 택현이든 어느 잣대로 보나 정통성을 위협당하지 않을 왕자로 육성하기 위한 교육과정인 것이다. 개국 초기부터 왕좌를 둘러싼 골육상쟁을 겪은 조선 왕실은 교육을 정비하고 점진적으로 세자 이외의 왕자의 정치 참여에 제한을 걸어갔다.

정리하면 통설처럼 이방원이 개국 공신이며 고려 과거에 합격할만큼 명석한 두뇌를 지녔으며 부친의 정적인 정몽주를 제거하는 탁월한 정치적 식견 등 타 왕자들을 압도하는 제왕적 자질이 있었다면 택현으로 즉위하면 그만이지, 구차하고 번거롭게 형과 형수의 양자로 입적했다가 점진적으로 그 형 부부의 권위를 깎아내린 다음 다시 태조의 아들로 돌아가고 수년에 걸쳐 지난한 정치적 공작을 벌이며 즉위를 위한 명분을 다질 이유가 없다. 바꿔 말하면 이방원은 왕위를 잇기엔 적자도 장자도 아니었으며 위의 나열된 것이 사실이더라도 세간에 회자되는 제왕적 자질이 다른 왕자들을 압도하기엔 모자란 것이라 후대를 거쳐 윤색되어 고평가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여기에 정도전, 조준, 남은 등 특정 공신들이 태조의 신임 아래 권력을 가지었던 태조 대의 미성숙한 관료제, 이에 대한 타 공신 세력의 불만, 어머니가 개국 전에 사망해 붕 떠 버린 한씨 소생 왕자들의 불만 등이 용광로처럼 한데 섞여 제1차 왕자의 난이라는 참사가 발생한 것인데 이것을 후대 왕통 계승자들의 편의에 맞게 설명하려다 보니 나이 든 태조가 합리적 이유 없이 어린 신덕왕후를 총애하고 신덕왕후는 이를 기화로 위화도 회군 때 자신들의 목숨을 살려준 방원을 배신하고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을 탐하였고 여기에 신권주의자 정도전이 거들어 자격 없는 어린 왕자를 세자에 올렸다는 인식이 생기고 말았다. 그러나 이방원과 이방석, 이성계라는 이름을 다 지우고 보면 왕과 왕비의 아들이 왕세자가 된 일반적인 계승일 뿐이다.

신의왕후 한씨 소생도 적자인 것은 맞다. 그러나 상술했듯 자연인 이성계와 창업 군주 이성계를 구분해야 하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사대부가에도 한씨 소생들 같은 처지는 드문 일이 아니었다. 일부일처제가 원칙이던 고려 말기에 경처, 향처로 구분되는 불법 중혼이 성행해서 둘다 적자녀로 인정해 주되 재산상속 같은 사안에선 불만이 나오고 시비가 생겼다. 자연인 이성계의 적장자라고 한다면 첫 번째 부인인 신의왕후 한씨 소생 자녀들에게 우선권이 있을지도 모르나 조선왕조 창업군주 이성계의 후계자라고 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어디까지나 첫 번째 왕비인 신덕왕후 강씨 소생에게 정통성이 있는 것이다. 이를 방증하듯 1차 왕자의 난은 초대 왕비가 죽은 후 기다렸다는 듯 일어났다.
4.1.1.2. 무리수이다
반론하자면 오히려 이방석의 세자 책봉이야말로 무리수이다.

두말할 것도 없이 장성한 형들을 놔두고 막내 아들을 세자로 책봉한 것 자체가 애시당초 말도 안 되는 소리다.[27] 일단 위에서 택현이 장자보다 우선한다고 하는데 이 역시 틀린 소리다. 택현은 어디까지나 적장자가 없거나 드물게 왕위에 오르기에 결격 사유가 있을 때 적용되는 방법이다.[28][29] 그리고 여기서 이미 태조와 태종의 차이가 드러난다. 태조의 이방석 세자 책봉은 누가 봐도 종법제와는 거리가 있으며, 그걸 왕의 권위로 무리하게 통과시켰지만 결국 사대부들은 이런 상황을 그리 기꺼워하지 않았다. 그에 비해 태종은 스스로 형의 양자가 되는 무리수를 동원해서라도[30] 차선책으로 사용하는 선택지이고 근본적으로 동아시아에서[31][32][33] 인정받는 원칙적인 상속법은 당연히 유교의 예법에 따라 적장자가 우선해서 계승하는 것(종법제)이다.

종법제에 따르면 계승은 어디까지나 적장자가 우선시된다. 그래서 왕-적장자-적장손로 이어진다. 그래서 종법제의 원칙상으로는 이성계-이방우-이방우의 적장자(이복근)로 이어져야 했다. 이방우가 모종의 이유로 승계 대상에서 배제된 후에는 당연히 적장자 자격을 계승한 이방과로 이어져야 한다. 그나마 개국 초니까 택현이라는 말이 나올 수 있었던 거지 기본적으로는 종법제가 절대적으로 중요시된다. 사실 이것도 어리지만 정통성을 가진 적장자 vs 경험많고 능력있는 서자의 구도에서나 나오는 말이지 이때처럼 똑같이 적자에 경험많고 능력있는 제1부인 출신인 형들 vs 나이어린 후처 출신인 동생 구도도 아니었다.

택현이라 해도 입적 등을 통해 종법상의 위치를 확보한 뒤에 승계하는 것이 정석이다. 조선 왕조 27명의 군주를 통틀어 택현이라는 명분으로 장자가 있음에도 중자(衆子)가 어떠한 종법상의 조치도 없이 후계자로 지명되어 등극한 사례는 딱 한 번, 세종의 경우 뿐이었다. 이 외의 사례를 보면 이렇다.
당장 장자가 사망해 발생한 차자승계 상황(효종)에서도 이 적장자 승계 위배로 인한 정통성 문제는 재위 내에는 물론이고 심지어 사망 후에도 온 조정을 뒤흔들다 못해 갈아엎을 지경이었다.[38][39]

여기에 덧붙여 폐모살제 부분은 아예 선후관계 자체가 뒤집혔다. 애시당초 형제 순위따위 엿바꿔먹고 막내가 형들을 제쳤기 때문에 목숨에 위협이 가게 된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대체 왜 형들이 동생의 목숨을 노리겠는가?[40] 막내가 막내답게 왕위를 노리지 않고 조용히 있었다면 굳이 신덕왕후의 목숨이 위험해질 일 따위 없이 태종이 신덕왕후와 동생 둘까지 지극히 잘 돌봐줬을 것이다. 이미 태종은 위화도 회군 때 목숨이 위험할 뻔한 강씨와 배다른 동생들을 달리는 말에 채찍질을 해가면서 구해낸 적이 있었다.[41] 또, 태종은 형 정종에 대해서도 라이벌이 아니었기 때문에 형제간 우애를 유지했다.[42][43]

이성계가 강씨를 만나지 않았다는 세계선. 그러니까 동북면에만 머무르는 인물이었을 것으로 지목하는 것에 대해서는 여러 생각할 부분이 많다. 신덕왕후가 1356년에 태어났고, 강씨가 8살이던 1363년에 이성계는 이미 29살의 나이로 정3품 판종부시사로 개경수복 1등공신에 오른 대표적인 신흥무신이자 유망주였다. 그녀가 이성계와 결혼했을 가능성이 높은 1371년에 이성계는 정2품 지문하부사로 임명되며, 공민왕이 젊은 문신으로는 이색, 무신으로는 이성계를 꼽아 총애할 정도로 승승장구했다. 그러니까 이성계는 강씨와 결혼하기 전에 이미 고려의 대표적인 신흥무신으로 성장하는 것을 넘어 재추의 지위에 있었다. 전주 이씨 집안이 수도 중앙귀족으로 자리잡을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 곡산 강씨 집안의 지분도 있지만, 이성계의 형 이원계가 음서로 출사해 과거에 급제하고, 이성계의 직계인 이방원과 이방연이 과거 급제로 떳떳한 중앙 문벌의 자격을 보여줬다. 또 엄밀히 말하자면 강씨의 아버지였던 강윤성이 이성계를 포함한 쌍성 전주 이씨 가문에 배팅한 쪽에 가깝다.

신덕왕후 강씨의 집안이었던 곡산 강씨는 당대 고려 말기에 권세를 휘두른 집안이었지만 사실, 호족, 문벌귀족부터 시작해 권문세족으로 그 지위를 유지한 케이스는 아니었다.[44] 고려사에 강윤충[45]이 천예의 후손이라고 내용이 적혀 있고, 고려 말기에 들어서 강윤성과 강윤충 형제를 제외하면 이전과 이후를 통틀어 곡산 강씨 집안 내에서 두드러질만한 관직을 차지한 이를 찾기 어려운데다가 이는 같은 강씨인 신천 강씨를 포함해도 매우 드문 수준이었다. 다시 말해, 곡산 강씨는 전주 이씨 집안과 비슷하게 14세기 초를 기점으로 벼락출세한 신흥 권세 집안에 가까웠다는 의미가 된다. 그리고 앞서 언급되었듯이 이성계는 항상 본인의 실력과 전공+공민왕의 총애+민선과 민제를 포함한 여흥 민씨와 최영의 집안인 동주 최씨, 고려 왕족인 개성 왕씨 집안과도 사돈을 맺음으로써 다양한 인맥을 구성하고 인척관계를 쌓아나갔다. 그러니까 전주 이씨 집안은 곡산 강씨의 비호에만 국한되지 않고, 다방면에서 가문의 입지와 실력을 키우면서 승승장구했다.

요순의 선양으로 택현에는 강력한 명분이 있었지만 연왕 쾌의 사례에서 보듯 현실에서는 그게 먹히지 않아서 택현이 적장자보다 우선이라는 것은 공허한 말잔치에 불과하다.[46][47][48][49][50][51]

청나라처럼 장자상속을 따르지 않고 다른 방법을 채택하기도 하지만 이것도 시간이 지나 나라가 안정되면 장자가 승계를 하게 된다.그래도 적장자로 왕위를 계승한 사람은 얼마 안 된다.[52][53] 청나라의 경우도 누르하치의 여덟째 아들 홍타이지가 워낙 능력 면에서 뛰어났고 그 다음인 순치제의 경우 도르곤이 얽혀서 이야기가 복잡해졌던 거지 이후로는 대부분 장자 상속이 원칙이었다. 애시당초 홍타이지는 도르곤을 숙청하지 않고 등용했는데 이후 홍타이지가 후계 구도를 마련하지 않은 채로 급사하는 바람에 누르하치의 적자였던 도르곤이 후계자로 급부상했지만, 반면 도르곤은 선황 홍타이지의 직계 후손이 아니다 보니 반대파도 많았다. 이들 반대파는 홍타이지의 서장자로 난폭하지만 군공도 세운 적이 있고 나이도 적당한 호오거를 밀었으며[54], 이 두 파벌 사이는 전쟁이 벌어지기 일보 직전까지 갔으나 타협하여 적자 풀린이 황제가 되었다.[55] 하지만 왕위계승 때마다 이런 식으로 택현의 논리를 적용하면 왕위를 계승할 때마다 피바람이 몰아치게 된다.[56] 당장 세종만 봐도 세문치세 자체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조선의 황금기였으나 적장자 승계의 원칙이 한 번 무너진 결과 끝내 계유정난이라는 조선 왕사에서 손꼽힐만한 대참사가 도래해버렸다. 거기다가 택현을 주장해도 그런 논리에 따르면 과거에 급제했고 개국에 가장 공이 큰 이방원이나 이성계가 무인 시절에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군공을 쌓은 이방과 등이 먼저지 막내에 아무것도 검증된게 없는 이방석이 세자가 되는건 암만 봐도 이치에 맞지 않다.

이는 단순히 유교, 성리학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방석 옹호론자들은 적장자 세습의 원칙이 이전에는 별 문제가 되지 않다가 무인정사를 계기로 강화된 것처럼 호도하지만 한반도에서 적장자 세습이 정착된지는 조선 건국 당시에도 이미 수백년에 이르고 있었다.[57] 유교와는 하등 상관이 없는 지구상의 다른 지역들에서도 정주민 치고 장자상속을 외면한 경우는 손에 꼽을 정도고,[58] 장자상속을 거부한 경우 예외없이 지리한 계승권 분쟁 등으로 왕권이 추락하고 국가시스템이 엉망이 되는 길을 피하기가 어려웠다. 당장 일본만 해도 인세이라는 비정상적인 제도로 인해 장자승계의 원칙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자 그 결과로 막부 시대가 도래하게 되었고, 유교이념은 고사하고 약육강식의 시대였던 후삼국시대에도 후처 소생을 후계자로 지명하려다 유폐당한 견훤 같은 사례가 있었다. 이렇게 적장자 승계의 원칙이 깨져버리면 표면적으로야 더 훌륭한 자질을 가진 왕재를 옹립할 수 있다지만 실제로는 해당 계승권자를 둘러싼 외척이나 친위세력 간 파워게임으로 치닫는 것이 세상 이치고, 당연히 나라는 훌륭한 막장 테크를 타게 된다.

현실적인 문제도 이러한데, 정치 이념의 영역으로 들어오면 더욱 골치아파진다. 유교, 특히 성리학에 있어 종법제는 단순히 상속제도가 아니라 왕실/대종-사대부/소종의 관계를 규정하고 사회적으로 상속문제로 인한 골육상쟁의 위험을 제거해 안정을 구가하는 정치이념의 중심축이다. 즉 종법제가 흔들린다는 것은 장기적으로 조선왕조 스스로 일으킨 역성혁명이 재발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유럽이야 기독교 세계에서 제멋대로 찬탈을 해봤자 교황이 승인 안해주면 끝장이고, 교황이 아니더라도 워낙 많은 국가들의 왕실, 혹은 국내 제후들과 귀족집단이 얽히고 섥혀서 찬탈을 해도 제대로 왕 노릇 하기가 쉽지 않지만[59][60][61][62][63] 동아시아, 특히 중앙집권이 상당한 수준으로 진행된 조선에서는 사정이 달랐다. 국제관계래봐야 상국인 명 한 곳에서 승인 받으면 그만이고, 중앙 권력을 틀어쥐고 있으면 지방에서 이를 뒤집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 모든 것을 조선 스스로가 역성혁명 과정에서 제대로 확인한 마당에, 국초부터 후계 문제로 성리학 정치이념과 질서가 송두리째 흔들리는 것은 재앙 그 자체였다.[64]

위에서 세자의 빡빡한 교육 커리큘럼을 들어서 능력이 정통성보다 우선시한다고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인과관계를 완전히 혼동한 것이다. 오히려 능력은 교육과 훈련으로 어느정도의 성취를 기대할 수 있지만 정통성은 그럴 수가 없으니 차라리 정통성을 중시한 승계의 원칙을 세워두고 유아기부터 빡빡하게 굴리는 쪽을 택하는 것이다.[65] 원칙을 깨버렸으니 능력이라도 내세워야 하는 것이지, 능력이 출중하다고 원칙을 깰 수 있는 게 아니다. 이 적장자 승계의 원칙을 깰 수 있는 건 다른 계승권자의 능력이 아니라 적장자 본인의 중대한 결함이다.[66] 그리고 태조고 누구고 간에 초유의 말자상속[67]을 강행하면서 이방번이야 성격이 난폭하다고 둘러대기라도 했지 그 외 이방석의 형들이 세자가 될 수 없는 이유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해명이 없었다. 이자춘의 적장자 이원계는 서장자로 만들고 태조의 적장자 이방우는 고려 왕조의 충신으로 포장해 본인의 의지라는 명분으로 승계 구도에서 완전히 탈락시킨 것과 비교하면[68] 이방석의 세자 책봉은 그야말로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백번 양보해서 이방우에게 정말 결격사유가 있어서 쳐냈고 이방원이 태조의 눈 밖에 났다 한들, 이방우 다음의 차남이자 능력도 검증되었고 이방원처럼 아버지에게 밉보일 짓을 하지도 않은 이방과는? 이라고 물으면 논리가 완벽하게 막혀버린다.

위의 문제없다는 주장의 핵심은 이방석이 왕비의 아들이니 당연하다는 논리인데 사실 그 이전에 왜 신덕왕후만이 왕비로 인정받는가부터 논의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되면 대체 한씨의 위치는 어떻게 되냐는 문제도 있으며 이와 연관하여 한씨 소생 자식들은 서자인거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런데 한씨는 향처라고는 하지만 엄연한 정처고 그 아들들도 엄연한 적자로 적서차별이 심했던 고려에서 음서와 과거급제로 멀쩡히 관직생활을 했다. 즉, 두번째 아내한테는 왕비 칭호를 줬으면서 가장 권위가 커야 할 첫번째 아내한테는 비록 사망했다고는 하나[69] 절비라는 칭호만 주고 퉁친 것 자체가 큰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당연히 종법제에 따른 태조의 적장자가 후계자가 되어야 하는 거지 현 왕비의 장자라고 후계자가 되어야 한다는 법 따위는 없다.[70][71]

사실 논의할 것도 없이 위에 다 나온다. 태조의 권위로 뭉개버렸다는 게 바로 답이다. 이는 거병의 시점만 봐도 알 수 있다. 옹호론에서는 1차 왕자의 난이 신덕왕후가 죽자 기다렸다는 듯이 일어났다고 주장하나, 실제로는 신덕왕후의 3년상이 다 끝나고 나서야 난이 터졌고, 그 직접적인 계기는 다른 무엇도 아닌 태조의 와병과 그로 인한 경복궁 및 도성의 통제력 약화였다. 그 3년 내내 세자 이방석의 지위가 불안했던 조짐은 전혀 발견되지 않고 다들 태조의 권위 앞에 그저 바짝 엎드렸을 뿐이다.[72]

문제는 이게 동아시아 유교식 전통인 종법제와는 완전히 어긋났다는 것이다. 결국 신덕왕후의 아들이 세자로 책봉된 것은 왕과 왕비의 아들이어서가 아니라 태조에 대한 신덕왕후의 영향력 때문인 것이고 그 때문에 원래는 추증되었어야 했던 한씨를 절비라는 칭호만으로 퉁쳤던 것이다. 즉, 태조가 신덕왕후를 총애, 내지는 곡산 강씨 가문에 대한 정치적 부채의 정산 과정에서 생긴 일이고 유교 도덕과 명분에 대해 잘 몰랐거나 알아도 자기 권위로 충분히 뭉갤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었을 것이다.[73] 태조실록이 아무리 태종 대에 편찬되었음을 감안한다 해도 이방석의 책봉에는 택현이란 명분이 전혀 개입되어 있지도 않았고[74] 아래에서 다시 설명하겠지만 본인의 행적부터가 택현과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었다.

그리고 이방석의 책봉과 이에 대한 반발은 따로따로 봐야 한다고 하는데 이 역시 틀린 말이다. 사실 세상 일 중 따로 돌아가는 법따윈 없고 모든 것이 서로 영향을 주게 마련이다. 신덕왕후의 아들이 왕세자가 돼야 한다는 생각은 사실상 태조와 신덕왕후 두 사람의 머릿속에만 그렇게 돌아간 것이고 거기에 정도전 등이 업어간 거지 그 외의 조선 팔도의 모든 사람들은[75]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당장 사상 초유의 막내 책봉으로 그 위의 형들 모두의 입지가 불안해졌으니 이들과 혼맥 학맥 등으로 엮인 다른 사대부들, 동북면에서부터 개경까지 함께 동고동락해온 여타 종친들이 누구 편을 들지는 뻔한 일이다. 이방석에게 힘을 몰아줘야 하니 큰 왕자들을 대놓고 찬밥 대우하게 되었고 무리한 중앙집권화의 와중에 비정상적인 신덕왕후계 우대와 대외강경책이 봇물을 이루었는데 당연히 큰 왕자들 본인이 아니더라도 종친이든 사대부든 반발이 일어나지 않을수가 없었다. 이 두 문제의 연계성을 생각하지 못했다는 것은 그냥 태조와 신덕왕후의 정치력이 그정도에 불과함을 입증할 뿐이다.

그 증거가 바로 무인년에도, 태종의 세자책봉과 즉위에도 유의미한 반발이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76][77] 당장 세조가 즉위했을 때의 상황과 비교해보면 견적이 나온다. 태종이 조사의의 난까지 해결되자 1차 왕자의 난으로 귀양 보낸 사람들까지도 슬슬 재기용해 폭넓은 인재풀을 향유했던 반면,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자 사육신, 생육신, 이징옥의 난, 이시애의 난[78]이 차례로 발생했고 척신들의 발호를 제대로 통제할 수가 없었다.[79]

또, 태종이 정종의 양자가 된 것은 이방석과는 상관없는 얘기다. 태종이 이방석을 죽이고 1차 왕자의 난을 성공시킨 시점에서 이미 신덕왕후는 후궁으로, 이방석은 후궁의 아들로 격하되어 있었다. 이방원의 '세자' 책봉에 관해 이런저런 가설이 제기되지만 이 중에서 이방석의 살해와 연관이 있다고 할만한 것은 이방석 살해로 태상왕인 이성계의 진노를 사서 세제 책봉에 걸림돌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지[80] 정당한 왕세자 이방석의 살해로 정통성에 금이 갔다는 것이 아니다. 왕자의 난으로 인한 태종의 정통성 문제보다야 오히려 막내인 방석을 세자로 삼는 쪽이 훨씬 무리수였고, 태종과 방석의 정통성은 따지고 보면 별 차이도 없었다.(둘 다 적자이고 장자는 아니라는 공통점이 있으므로) 오히려 순위만 보면 손윗형인 태종 쪽이 더 우위였고, 위에서 주장한 택현이라는 논리를 들먹여봤자 고려 과거 급제자에 개창의 최고 공신인 이방원에게 유리하면 유리하지 불리할 요소는 (정몽주 살해건 정도를 제외하면)[81] 전혀 없었다. 이방원의 정통성이 문제면 애초에 유교 이념으로 풀무장한 사대부들 - 조준, 정도전을 포함해서 - 이 왜 처음에 나이와 공로를 나란히 세자의 자격으로 거론했겠는가? 난을 일으켰다고 해도 이는 정통성 문제로 번질 일은 없었고, 애초에 난의 명분도 '종친살해모해죄' 즉, 선공을 당해 이를 반격했다는 것이지 아버지를 공격하거나 한 것이 아니었다.[82] 차라리 이방원에게 적장자 자격을 부여해 자신의 서자들을 둘러싼 어떠한 후계 시비도 일어나지 않도록 하려는 정종의 정치적 노림수 혹은 거래라면 모를까[83] 이방석의 정통성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문제다. 물론 가장 큰 이유는 태종 스스로가 종법에 들어맞는 적장자 세습의 틀을 갖춤으로써 쿠데타의 정당성을 사대부들에게 각인시키고 동시에 정종의 서자들과 형들인 방의, 방간보다 낮은 서열도 극복하려는 이유가 가장 컸을 테지만.

이방원이 난을 일으킨 것은 신덕왕후가 죽고 태조가 병환 때문에 자리를 비웠기 때문이라는 말도 결국 변명에 불과하다. 당연히 사람은 언젠가 죽게 마련이고 이미 그 신덕왕후도 젊은 나이에 사망했는데 당시 60을 넘었고 70을 바라보던 노인인 태조가 언제까지 방석을 비호해줄 수 있을 것인가? 이 말은 결국 부모가 죽으면 방석은 다섯 형들의 압박에 고스란히 노출된다는 말이나 다름없는데 이걸 과연 정도전, 남은 등의 힘으로 막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나마 태조의 수명은 아직 10년은 남았다는거고 그럼 세자 이방석은 20대 중반의 나이가 되어 계승할만한 나이는 되는데 그 시간동안 나이 먹는 건 형인 이방원도 마찬가지다. 더군다나 이 때의 이방원이 골골대는 나이라면 모를까 41세로 적은 나이는 아니지만 왕이 되지 못하리란 나이는 아니다. 오히려 10년이란 시간동안 정치싸움을 해야 하는 이방원은 더 노회한 정치인이 되어있을 텐데 그걸 20대 중반의 새파란 방석이 감당할 수 있을지 의문이며, 게다가 정도전(67세), 남은(55세)은 나이가 많다. 특히 정도전은 저 나이면 이미 죽고 없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는 나이인데 태조도 없고 정도전도 없는 이방석은 이방원에게 간단하게 처리된다.

비슷한 사례로 베트남의 딘 왕조가 있는데 딘 왕조를 연 딘보린은 말년에 막내인 딘항랑을 태자로 삼았다. 문제는 막내라는 점에서 알 수 있듯 딘항랑 외에도 아들들이 더 있었고 그 중에서 장남 딘리엔은 아버지가 왕조를 열기 전부터 공헌을 해왔기에[84] 큰 불만을 품게 되었고 결국 딘리엔이 딘항랑을 죽여버렸다. 게다가 몇달 뒤 딘보린과 딘리엔이 동시에 살해당하는 바람에 딘 왕조는 망하고 전 레 왕조가 들어섰다.

4.1.2. 말자상속?

일각에는 막내아들을 후계자로 삼는 말자상속 풍습이 있는 유목 민족 즉, 여진족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특히 이성계의 전주 이씨 집안은 대대로 이런 경향이 강했는데, 이안사 이래 쌍성 전주 이씨 가문은 이자흥 이전까지 계속해서 적장자나 차남이 아닌 4남 이하의 아들이 쌍성의 천호직을 이어왔다는 점[85]은 이러한 주장에 더욱 힘을 실어 주었다.[86]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그냥 어름어름 비슷해보인다 정도가 아니라, '"과연 이방석의 세자 책봉이 유목민의 말자상속 원리에 부합하는가?"'라는 점이다. 말자상속의 핵심은 장자부터 재산을 분배받아 먼 땅을 개척하고, 말자에게는 마지막으로 남은 본가를 물려준다는 데 있다. 다만 이것이 정말 문자 그대로 무조건 애송이 막내한테 가장 지위와 재산을 모두 물려준다는 의미였던 것은 아니다. 말자상속 제도가 이상적으로 작동한다고 가정하면, 형제들은 각각 나이 순서대로 장성하여 일가를 이루면 아버지의 재산(가축떼) 일부를 물려받아 새로운 목초지를 찾아 떠나게 된다. (단위 면적당 인구 및 가축 부양력이 낮은 목초지의 특성상 같은 지역에 너무 많은 인구와 가축이 몰려있을 경우 이는 재산의 감소와 세력의 쇠퇴를 불러오게 된다. 따라서 인구/가축밀도가 높아지기 전에 새 목초지를 찾아 떠나야 유목민의 재산 기반인 가축이 불어날 수 있다.) 그러다가 시간이 흘러 형들이 모두 독립하고 마지막으로 막내가 장성하여 일가를 이룰 시기가 되면 아버지는 이제 나이가 들어 스스로 일가를 이끌기에는 힘에 겨운 노인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니 막내는 굳이 독립할 필요가 없이, 아버지 곁을 지키다가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남은 재산과 본가를 물려받게 되는 것이다. 막내가 이렇게 본가를 물려받는다고 해서 물려받는 재산의 지분이 조금이나마 더 클 것이라는 보장도 없는 것이, 각 아들들이 독립할 때마다 재산을 얼마씩이나 나눠받을 것인가는 가장인 아버지의 마음과 또 그 시점에서 일족의 처지에 따라 다르겠지만 일단 유목민의 재산 개념은 정주 농경민의 재산 개념에 비해 훨씬 탄력적이고 유동적이라는 것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농경민의 재산 기반인 농토는 한번 나눠주면 스스로 늘어나지도 않고 줄어들지도 않는다. 하지만 유목민의 재산 기반인 가축은 목초지만 있으면 스스로 번식해서 수가 계속 불어나는 반면 한파나 가뭄, 약탈등으로 인해 확 줄어들수도 있다. 막내가 본가를 상속받는다는 명분으로 알짜를 물려받을수도 있고, 형들에게 떼줄만큼 떼주고 남은 쭉정이만 물려받을수도 있지만 그 모든 것이 그저 복불복이고, 또 자기 일가를 꾸릴 만큼 물려받기만 했으면 그 이후로는 각자 알아서 잘 꾸려나가면 될 일이지 누가 좀 더 받고 덜 받았느냐를 비교할 의미조차 별로 없는 것. 결국 유목민의 말자상속제란 흔히 '장자상속제'라고 하면 연상하는 장자 단독 상속제, 또는 장자 우선 상속제에서 장자를 말자로 바꿔놓은 것이 아니라 기본적으로는 균분 상속제이고, 다만 본가(종가)의 명분을 물려받는 것이 막내, 형들의 일가는 그 본가에서 갈라져 나간 분가가 되는 것일 뿐이다.

심지어 유목민 사회에서는 종가의 권위조차 그렇게 실질적이지는 않다. 유목민의 씨족이란 결국 혈연을 통해 퍼져나간 집단이므로 씨족의 모임이라도 있다면 당연히 본가가 상석을 차지하는 것과 같은 우대를 받게 된다. 하지만 씨족을 구성하는 다른 일족들에게 특별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다못해 해당 씨족에서 씨족 전체를 지휘할 이라도 선출할 경우, 이 칸은 본가 출신이든 분가 출신이든 해당 씨족의 귀족 혈통을 가진 인물이면 씨족 구성원들의 지지를 받아 추대될 수 있는 것이지 꼭 본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굳이 이점을 찾아보자면 만약 비슷한 입지를 가진 경쟁자가 있을 경우 본가 출신이라는 상징성을 가진 쪽이 약간의 유리함을 가지는 정도는 가능할 수 있겠지만, 이정도라면 왕실의 권위는 커녕 정주민으로 치면 시골 양반집 종가 정도의 권위에 비해도 별로 대단할것이 없는 것이다. 그 외에 또 막내가 이어받는 본가의 유리한 점을 찾아보자면 형들이 독립할 때마다 새로운 영역(목초지)를 찾아 사방으로 퍼져나가 영역을 개척하는 유목민의 특성상 본가를 물려받은 막내의 영역은 그 씨족이 차지한 영역의 중심부에 위치하게 된다. 즉, 유목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관계인 혈연동맹으로 맺어진 씨족들의 영역으로 둘러싸인 상대적으로 안전한 영역을 차지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반대로 생각하면 혈연동맹 씨족들을 배신하지 않는 한 확장할 공간을 찾을 수 없는, 확장과 약탈에는 상대적으로 불리한 입지라는 의미가 된다. 이 역시 일장일단이 있는 것이지 일방적인 장점은 될 수 없는 것. 결국 유목민 특유의 말자상속제는 분권적이고 분산적인 유목민의 사회상에서 기인한 것이며 이를 농경정주민 사회인 조선에서, 그것도 철저한 중앙집권을 지향하던 조선 국왕의 계승 원칙으로 적용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것이다.

유목민 상속제도가 왕권의 상속에 적용된 대표적인 사례인 칭기즈 칸과 그 아들들의 사례를 비교대상으로 삼아볼수도 있다. 일단 몽골 제국의 경우, 유라시아 유목민 중에서도 제일 깡촌이던 몽골 고원에서 기원한 특성상 제국 성립의 초기인 2대 계승 무렵까지도 유목민 전통의 영향이 아주 명확하게 드러나는 것은 사실이다. 예를 들어 주치킵차크 칸국의 영토를 물려받은 것은 <장자가 아버지의 본거지에서 가장 먼 땅을 물려받는> 몽골족(및 유목민)의 전통에 따른 것이었고, 칭기즈 칸의 적자들 중에서도 가장 용맹했다는 툴루이는 각각 일군을 이끌고 다른 전선의 사령관을 맡은 형들(주치, 차가타이, 오고타이)와는 달리 아버지의 막하에서 아버지의 곁을 지키다가 아버지 사후 일족의 기원인 몽골 초원을 상속받았으며 쿠릴타이에서 오고타이가 정식으로 2대 대칸에 선출되기까지 2년간 대칸의 직위를 대행하기도 하였다. 즉, 툴루이가 말자 상속을 받은 것은 분명히 맞다. 그러나 이 사례를 통해 유목민의 말자 상속권이 가지는 한계 역시 알 수 있다. 정식 대칸이 선출되기까지의 기간동안 임시 대칸의 역할이 툴루이에게 맡겨진 것은 그가 일족의 발상지와 본가를 물려받았기 때문이었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심지어 툴루이는 애송이이기는 커녕 이미 여러 차례의 원정에서 용맹을 떨친 30대 중반의 당당한 성인이었음에도) '본가를 물려받는 것'과 '일족 전체의 수장으로 추대되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던 것이다. 말하자면 유목 일족에서 본가의 위상이나 권위가 전혀 없던 것은 아니지만 이는 '막내가 이어받은 본가가 일족의 수장이 된다'는 수준이 아니라 '쿠릴타이를 열어 칸을 뽑기 전까지는 명시적인 수장이 없으니, 그동안은 본가가 자리를 주재한다'정도였다고 볼 수 있다. 물론 툴루이에게도 나름 대칸의 위에 도전할만한 세력은 있었지만 아버지(칭기즈 칸)가 생전에 후계자로 지정한 형(오고타이)에게 굳이 맞서지 않고 아버지의 뜻에 순순히 따른 것이라는 분석 역시 있지만 이 역시 달리 보면 막내에게 본가를 물려주는 말자상속 전통을 지킬만큼 유목민 전통에 충실했던 칭기즈 칸(사실 평생 유목민으로 지낸 그는 다른 전통은 잘 알지도 못했을 것이다.) 역시 '본가의 계승자'와 '일족의 수장'을 분리해서 생각했음을 보여주는 근거라 할 만한 것.

게다가 몽골 제국의 초기에 이런 유목민식 계승이 가능했던 것조차도 칭기즈 칸 당시의 폭발적인 영토 확장+아직 유목민의 문화에만 익숙했던 몽골족의 사회상 때문이었다. 일단 툴루이의 죽음에 대해서도 모살설이 제기된 것에서 알 수 있듯 '어떻게 분할상속하건 다 고만고만하게 나뉘어 살게 되는' 유목민 시절과는 달리 광대한 영토를 지배하는 막강한 권력을 가진 제국의 황실이 된 이후에는 누가 우선 상속권을 가지고 대칸의 자리를 물려받느냐가 심각한 갈등의 원인이 되기 시작한 것. 게다가 팽창할 대로 팽창한 몽골 제국이 더이상 확장할 영역이 없어지면서 각 아들들에게 저마다의 영토를 분봉해주는 것도 불가능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황실 내의 권력투쟁이 격화되어 원나라는 결국 98년의 짧은 역사를 거쳐 멸망에 이르고 만 것이다.[87]

이 점에서는 이성계 관련 문서에서도 설명된 것처럼 이성계와 칭기즈 칸이 비슷한 실수를 저질렀다고 볼 여지도 있다. 두 사람은 자기 인생 대부분의 기간을 키야트 보르지긴 씨족이나 동북면 이씨 일족의 수장으로 지냈고, 그 행동원칙에 익숙했다. 그래서 자신의 후계자를 마치 '일족의 차기 수장을 지명하듯' 가볍게 지명했던 것. 하지만 후계자 지명 시점에서 두 사람은 단순한 일족의 수장이 아닌 황제(카간)나 왕이었고, 왕권의 계승은 일족 수장의 계승에 비해 훨씬 심각하고 엄중, 가혹하기까지 한 문제였던 것이다. 그나마 몽골 제국은 유목민 전통도 강하게 남아있었고, 폭발적인 영토 확장 덕분에 제위 계승에서 밀려난 왕자들에게도 나름 영토를 분봉해줄 수 있었다. (대신 몽골 제국의 후신인 원나라는 역대 중국 왕조중에서도 중앙집권도가 눈에 띄게 낮았다.) 하지만 농경 정주민 국가에 영토 한 뼘 넓히기 쉽지 않은 고려-조선에서 왕자들 중 하나를 차기 국왕으로 결정한다는 것은 이후 대대로 왕은 그 가계에서만 나오고, 다른 왕자들의 후손들은 운이 좋아야 그 신하에 머무르며 운이 나쁘면 왕권에 위협이 된다는 이후로 숙청의 칼날을 맞이할 수도 있는 처지가 된다는 의미였던 것. 이 점에서 볼 때 이방석을 후계자로 지명할 당시 이성계가 자신의 결정이 얼마나 무겁고 무서울 수 있는 것인지 제대로 실감하지 못한 것이 아니냐는 의심은 분명 일리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들을 보면 당시 갓 10대에 접어든 이방석을 지명하는 것은 유목민의 상속제도에 비춰 봐도 크게 무리수였다. 성리학을 근본 이념으로 삼는 중앙집권국가 조선에서, 그것도 왕실에서 큰아들에게 무슨 밑천을 마련해 줘서 독립시키겠는가? 혹은 이방석이 무슨 근거로 택현을 내세우겠는가? 이성계 이전의 사정을 보면 이행리의 경우 형들이 이미 원 조정에 출사하여 벼슬을 했고, 이춘은 동복형 이송이 고려 숭록대부였던 것을 봐서 쌍성을 떠나 고려에 출사했던 것으로 보이며, 이원계 또한 이자춘의 귀부 이전에 이미 고려에서 음서로 벼슬길에 올라 과거에 연이어 급제하는 등 일찌감치 쌍성을 떠나 있었다. 즉, 큰아들은 중앙에서 벼슬살이를 시키고 집안에 남은 아들들 중에서 서열이 높은 쪽에게 쌍성 천호직을 물려주는 것이 이성계 집안의 말자상속방식이었는데, 사실 이성계가 고려 귀부 이후 동북면, 즉 옛 쌍성 전역을 개인 영지 수준으로 다스리게 되어서 그렇지 과연 쌍성 총관도 아니고 천호직이 원이나 고려 중앙조정의 벼슬보다 값나가는 자리인지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88] 결정적으로 유목민족도 장남에게 떼어줄 거 없으면 집안을 줬다.

애초에 전주 이씨 가문 자체가 쌍성 시절 내내 고려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끝까지 여진이나 몽골족에게 동화되지 않았다. 익조 이행리는 아예 고려계라는 이유로 여진족 천호들에게 다굴당해 쫓겨났을 정도고, 이후로도 고려에게 귀부하는 그 순간까지 전주 이씨 가문의 기반은 고려계 주민집단이었으며, 줄기차게 고려계 집안끼리 통혼해왔다.[89] 큰아들을 출사시킬 수 있을 때는 어떻게든 벼슬살이를 시키려 했지만, 그렇지 못할 때는 오히려 이자춘의 형 이자흥처럼 원 조정으로부터 직접 적장자 인증을 받아 집안을 이었으며 이자흥 사후 이자춘이 어린 조카 이천계를 제치고 천호 벼슬을 꿀꺽(...)하자 이자춘 사후 이천계가 적장자임을 이유로 이성계를 죽이고 가주 지위를 돌려받으려 하기도 했다.[90] 이성계는 아버지와 함께 공민왕에게 귀부할 때부터 고려인을 자부했고 고려인 대우를 받기 원했으며, 여진족 티를 내지 않고 철저히 개경의 중앙귀족으로 정착하려 하였기 때문에 유목민 풍습은 설령 있다 해도 척결 1순위였다. 이성계가 개경으로 나온 이후에는 고려 귀족으로서 형제간의 서열과 가문의 후계구도가 확실하게 정착되어서 장남 방우가 개경의 대귀족인 전주 이씨 가문의 차기 당주로서의 특권으로 음서로 벼슬에 나아갈 수 있었고, 차남 방과 또한 이미 동북면 영지와 가별초를 물려받을 군사 방면의 후계자로서 아버지에게 군인 수업을 받고 있었다.[91] 더구나 조선 건국을 주도한 세력이 사대부 중에서도 공민왕 이래의 급진 반몽주의자들이었던 것만 봐도 몽골유목민의 말자상속제를 여염집도 아니고 다름 아닌 세자 책봉에 적용한다는 것은 재고할 가치가 없다.

그보다는 이성계 집안의 내력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우선 이행리는 두만강변 여진족 천호들에게 밀려난 뒤 안변의 최씨집안에게 후원을 받아 천호 자리를 되찾고 최씨 여식을 계실로 들여 정실의 자식들을 제치고 최씨의 아들인 이춘을 후계자로 삼았다. 또 본인부터가 출중한 능력을 기반으로 먼저 고려에서 벼슬살이하던 이복형 이원계를 제치고 사실상 전주이씨 가문의 당주 노릇을 하고 있었다.[92] 큰아버지 이자흥이 계모와 싸워가며 천호 자리를 물려받은 사례가 있긴 하지만 이것도 이자흥 사후 자기 아버지가 자기 사촌형을 제끼고 자리를 물려받았다. 즉 적장자 계승이 원칙적으로는 맞기야 하지만 확실한 뒷배가 그 원칙보다 낫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것이며, 특히나 이행리가 최씨에게 그랬듯이 자신의 개경 정착과 성공에 강력한 힘을 보태준 현 중전 강씨의 요구는 절대 무시할 수 없었다. 여기에 대신들이 단순히 적장자 원칙만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공이 있는 왕자까지도 후보로 언급하고 있으니, 더더욱 굳이 장자는 아니어도 된다는 발상까지 더해졌을 것이다.

어쨌든 문제는 조선이 유목제국이나 봉건국가가 아니었다는 것이다.[93] 게다가 태조가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에게 취한 태도는 토사구팽으로 받아들여질 여지가 많았다. 왕자들과 고려 구 세력의 딸들을 혼인시켜 중앙 정계에 진출했으면서도, 정작 새 왕조가 세워지자 왕자들을 권력의 중심에서 내치려 한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한양 천도 직후 신덕왕후가 사망하면서 세자의 배후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살아있는 현 왕비의 아들이라는 타이틀이 어머니 신덕왕후의 사망으로 사라지면서 이복형들과 다를 바 없게 된 것이다. 태조는 일부러 그녀의 능 정릉(貞陵)을 도성 내, 그것도 광화문 바로 남쪽에 조성하고 원찰로 흥천사를 창건해 강씨의 존재감과 권위를 유지해 세자의 권위를 지키려 했다. 또한 세자빈 심씨를 현비로 책봉하고 방석과 현비 사이에 아들이 태어나자 왕손의 개복신 초례(開福神 醮禮)를 세자전 남문에서 거행해 태조 - 세자 - 왕손의 후계구도를 공고히 하려 했다. 그러나 왕손이나 세자나 아직 어렸고 신의왕후 때와 마찬가지로 죽은 사람의 권위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으로 정말 이성계 집안이 여진족이나 몽골족 같은 이민족과 다름이 없다 해도 문제가 된다. 이성계가 세운 조선이 기존의 중화문명권 국가인 고려를 무너뜨리고 세운 나라이며 이성계까 이 고려를 정복하고 세운 것도 아니고 심지어 이성계의 정치적 파트너들은 유학자였다. 유학자들 입장에선 당연히 멀쩡한 장자를 놔두고 막내를 왕으로 세운다는 것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4.2. 간과한 것

일단 방석을 세자로 정한 건 태조가 직접 나서서 결정한 일이니 불평하거나 반발하는 순간 불충으로 찍힐 수 있어서 일단 따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안의 분노와 실망은 절대로 지울 수 없었다.





4.3. 예방책?

태조도 이에 대한 걱정을 안 한 게 아니라서 나름대로는 예방 조치에 심혈을 기울였다. 국초 왕자들과 사위를 책봉하면서 이들의 절제사(節制使) 임명도 병행해 친위군사력을 재편성했는데 이때 이방과와 이방번, 이제가 함께 의흥친군위절제사(義興親軍衛節制使)로 임명되어 친위군의 중추가 되었다. 이방번과 이제야 세자의 동복형과 매형에게 힘을 실어주어 세자의 입지를 강화하겠다는 조치였고 개국에 공을 세운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도 아예 모른 척 할 순 없으니 정치적으로 입지가 좁아진 방우 대신 적장자가 된 방과를 대표로 중임을 맡긴 것이다. 이 조치 이후 10일 뒤에 방석이 세자로 책봉되었다.[122] 신의왕후 소생의 다른 왕자들에겐 중앙의 군권 대신 지방의 지휘권이 주어졌다. 이성계에게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동북면의 가별초 지휘권은 이방원에게 잠시 주어졌다. 태조 3년 정도전의 군제개편 제안으로 각 도에 절제사를 두고 종실이 이를 맡게 할 때[123] 방번이 넘겨받는다.(방원은 전라도 절제사로 전임) 이성계에게 동북면이 가지는 의미를 생각하면 결국 세자 방석의 위상을 확고히 하겠다는 의미였다.[124]

더불어 왕자들을 지방 절제사로 전임시키면서 아예 지방으로 내보내 영향력을 약화시키려는 시도도 있었다. 실록에 따르면 정도전 일당은 환관 김사행을 사주하여 왕자들을 아예 제후처럼 분봉시키는 방안을 밀어붙이려 했으나 태조가 답을 안해주고 오히려 정안군에게 하도 말이 많으니 조심하라고 넌지시 일러주었다고 한다.[125] 사실 고려식 외왕내제도 아니고 대명 사대를 국가전략으로 채택한 주제에, 또 성리학적 중앙집권국가를 지향한 주제에 왕자들의 분봉책을 시도한 것은 무리수에 지나지 않았다. 또한 아예 중앙에서 벗어난 왕자들이 지방군을 이끌고 도성을 공격한다면 이 또한 죽쒀서 개주는 꼴이다.[126] 왕자들의 지방행이 좌절된 정도전은 이후 요동정벌과 이를 구실로 한 사병혁파 정책을 추진한다. #

그러나 정도전 일파에 대한 불만, 사병혁파와 요동정벌 등 급진정책에 대한 반발은 태조의 예상 이상으로 거세었다. 사병혁파와 요동정벌을 위한 군사 징집은 반대파로서는 자신들의 수족을 자르려는 것으로 생각되었고, 실제로 이방원의 경우 신덕왕후에 대한 경계심까지 합쳐져 사병혁파를 계기로 목숨의 위협을 받기도 했다. 정도전은 분명 출중한 인물이지만 정치적 능력은 뛰어난 인물이 아니었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정몽주나 하륜이 중앙에서 치열하게 부대끼며 정치가 뭔지 몸으로 체득할 때 정도전은 지방에 유배되어 그런 경험을 전혀 쌓지 못했다. 힘을 가진 1인자에게 사상적 기반을 제공해주는 것과 직접 똥물에 몸담그는건 전혀 다른 문제인데 이 부분에서 사형 정몽주나 경쟁자 조준, 하륜보다 서툴렀다.[127][128] 그래서 건국 이전에는 2인자 자리를 홀로 차지하지 못하고 조준과 나눠야 했고, 조준의 전제개혁 때 전혀 끼어들지 못해 존재감이 낮아졌다 교우관계(이숭인, 권근)를 단절하며 척불정책을 강행해야 했다. 그의 정책들은 건국 초기 필요한 것이었지만 너무 급진적으로 전개한 데다, 반대파의 반발을 지나치게 강경하게만 대처했기에 그 불만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했다.

4.4. 정도전의 대명강경책과 군제개혁

이렇게 세자 문제로 혼돈의 폭풍이 휘몰아치는 와중에, 정도전은 요동정벌을 발표한다. 당시 조선과 명은 표전문 사건 등 외교문제로 인한 사신 억류 등의 문제가 터지면서 골이 깊어지고 있었는데[129] 이 때 표전문을 짓는데 참여했던 권근은 태조가 따로 부르지도 않았어도 스스로 찾아가서 '저도 표전문 사건에 관련되어 있으니 제가 가서 직접 해결하겠습니다.'라고 하며 자원해서 명에 다녀왔다.[130] 권근의 노고로 일은 잘 처리되었고 권근도 황제(주원장)에게 대접까지 융숭하게 받으며 성공적으로 귀국했다. 하지만 정도전과 그 파벌은 일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고 온 권근을 사헌부를 통해 탄핵해버렸다. 이유는 정총 등 표전문 관련으로 억류된 이들 가운데에 홀로 살아 돌아왔다는 것. 물론 태조는 '만리 길 마다 않고 자원해서 일 처리하고 온 권근에게 상은커녕 무슨 탄핵이냐?' 라며 씹어버렸다. 결국 정도전은 이에 아무런 대답도 못하고 민심과 사대부의 지지만 잃어버렸다.[131] 물론 그렇다고 태조가 그를 버리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표전문 사건이 마무리된 후 정도전은 이참에 아예 요동을 공격하여 명에 본때를 보여주자는 과격한 모습을 보였고 그를 위한 군사 개편까지 기획했다. 그리고 그 첫발로 공신과 종친이 보유하고 있는 사병들을 회수하여 조선의 중앙군을 강화하는 '사병 혁파'를 추진한다.

하지만 그의 사병 혁파 시도는 말처럼 쉽지 않았다. 애초에 이성계 본인이 사병을 가지고 왕이 된 만큼 이를 모두 혁파하려면 사병의 준동을 진압할 수 있는 훌륭한 관군이 확보되어야 가능하다. 그런데 당시 조선의 중앙군이라곤 본래 함흥의 이성계 일가에게 충성하던 직속 가별초들이었다. 이들이 함흥과는 아무 인연이 없는 정도전이나 이방번에게 복종하여 다른 전주 이씨 문중 인사들을 가차없이 적대할 수 있을지 미지수였다. 또한 함흥 출신 왕자들과 문중의 종친이 보유하는 사병들 또한 본래 가별초였기 때문에 이성계의 지휘 아래 생사고락을 함께하며 수많은 주변 이민족들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역전의 용사들이다. 이들은 일반 사병보다도 더 특정 가문에 대한 사병화의 정도가 심각했기 때문에 모시는 주군들이 극구 반대하는 관군으로의 강제편입을 순순히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당장 사병 몰수 대상 리스트에 있는 이지란이 가별초의 실질적 2인자, 이방과가 가별초의 차기 수장이었는데, 아무리 1인자의 위세를 빌린다 한들 낙하산 문신 정도전과 큰마님을 밀어낸 후실의 막내아들이 가별초에 발휘할 수있는 영향력은 한계가 명백하지 않았겠는가. 정 사병 혁파를 하려면 이성계 본인이 앞서서 사병을 빼앗고 자식들이 말 안들으면 줘패서라도 뺏어야 되는데 이성계가 이러지 않았다는 것도 문제.[132]
물론 사병혁파는 필요한 정책이었지만 당시 실행자가 당시 독단적인 정책으로 정계의 온갖 어그로란 어그로는 다 끌고다니던 정도전이었다는 게 문제였다. 정도전은 이러한 사병혁파를 추진하면서 당연하게도 공신은 물론 신의왕후 소생의 왕자들과 왕실 종친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특히 신의왕후 소생의 왕자들은 안 그래도 세자 책봉 문제로 골이 깊은 상황에서 이러한 발표가 나오니, 자신들의 수족이 잘린다는 생각을 넘어서 정도전이 기어이 나라를 뺏고 자신들을 모조리 죽여버리려고 수작을 부린다며 이를 갈았다.[133]

게다가 사병혁파의 명분으로 내세웠던 요동 정벌도 오히려 역효과만 불러일으켰다. 조선 건국세력이 본격적으로 고려를 뒤엎은 시발점이 위화도 회군이었기 때문. 이미 두 번의 요동 정벌이 모두 별 소득 없이 끝난 마당에, 조건은 오히려 더욱 불리해진 상황에서[134] 추진되는 요동 정벌은 그다지 지지를 얻을 수 없었고, 요동 정벌에 명분이 없으니 이를 명분삼아 추진되는 사병혁파도 자연히 명분을 잃었다. 특히 태조조차도 요동 정벌을 크게 지지하지 않는 상황에서 정도전만이 이리저리 날뛴다는 것이 어떤 그림으로 보여졌을지는 누구도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심지어 친정도전, 친이방석파로 분류되는 남은, 이제, 이방번, 유만수, 이무, 이지, 정신의조차 태조 7년 8월 진도강습 태만 처벌대상자 명단에 들어있을 정도인 것을 보면 정작 이방석의 친위세력들이 요동정벌에 열성적이었다고 보기도 어렵다.[135][136]

여기에 형평성이나 제대로 맞췄으면 모를까, 방석의 동복형 방번에게는 상당한 규모의 사병을 유지하도록 해주면서 대놓고 사병혁파의 목적이 방석 반대파에 대한 견제에 있음을 인증해버렸다. 자연히 요동 정벌의 진짜 목적에도 의심을 가질수밖에 없는 상황이 조성되었다.[137] 이런 배경을 생각해보면 종친모해죄라는 발상이 거저 나온 것은 아니며, 의외로 당대 사람들에게도 이방원을 비롯한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의 정변을 동조하거나 최소한 묵인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본다.

5. 쿠데타의 전개와 결과

기본적으로 실록의 내용 자체와 당대 문집과 증언들이 하나로 일관되지 못하고 전부 제각각이다. 어떤 것이 진실인지 알기 어렵다. 반군의 병력이 많았다고 하기도 하고 적었다고 말하기도 하며, 전투가 있었다고 하기도 하고 없었다고 하기도 한다. 박위가 이방원의 군세를 살피러 갔다가 잡혀 죽었다고 하기도 하고, 난전 중에 전사하였다고 하기도 한다. 김사형과 이무 등은 미리 포섭된 것인지 아니면 나중에 투항한 것인지 알 수 없다.[138]

일단 거사 당시부터 이방원에게 합류한 지휘관급 인원은 지안산군사 이숙번, 전 평안도 병마도절제사 이거이, 전 충청도 도절제사 조영무, 상장군 신극례 등이었다. 지안산군사 이숙번은 안산군 병력을 동원했을 것이며[139][140], 왕자들을 진법 훈련에 투입해가며 열을 올리던 시기인지라 상장군 신극례나 각 왕자 및 종친들이 훈련시키던 각 진의 병력만 족히 네자릿수는 동원이 가능했을 것이다. 특히 실록의 표현을 따르자면 시위패를 폐한 지 10여 일이 지난 시점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중앙군으로 편입된 각 집안의 가병들이 옛 주인들에게 달려와 합류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방원 일파의 또 다른 주요 인물인 하륜같은 경우는 그의 졸기에 나온 기록을 참고하면 7월 19일에 충청도 관찰사로 임명되어 내려가 있다가 거사를 전후하여 단기로 서울에 올라와 이방원 지지선언을 하고 후속 병력이 올라오는 것을 기다렸던 것으로 보이는데[141], 다만 그가 8월 2일에 태조로부터 직접 교서와 부월을 받은 기록이 있는데다 충청도 병사와 경기좌도 병사로 구성된 3700명이 도성 보수에 참여했다는 7월 27일의 기록이 있는 것으로 봐선 충청도 관찰사로 임명되었지만 담당한 도의 병사들이 참여한 도성 보수 때문에 얼마 지나지 않아서, 혹은 충청도에 가지 않은 채 한양에 있었을 가능성이 있어보이고, 어쩌면 도성 보수를 위해 온 충청도 병사 또한 그의 지휘 아래 반군에 합류했을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142] 또한 박은의 졸기에 따르면 당시 지춘주사였던 그가 군사를 이끌고 왔다가 태종에 의해 춘주로 돌아가지 않고 사헌중승에 임명되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봐선, 무인정사 관련 기록에는 언급되진 않았지만 하륜이나 이숙번 만이 아니라 지방에 있던 이방원의 또 다른 지지자들도 반군으로 참여했을 것으로 보인다.

거기다 당시로부터 시간이 좀 지난 뒤의 기록이기에 잘 안 알려져 있지만, 세종 20년 9월 25일에 헌릉 비문 속의 무인정사 관련 기록을 수정하는 것과 관련해서 무인정사 당시 이방원의 진무였던 전흥[143]이 한 진술에 묘한 내용이 들어있는데, 이 때 전흥이 무인정사가 벌어진 날에 이방원이 본인과 더불어 도성 내 야간 순찰을 맡은 감순청에서 감순을 맡았고, 알려진 대로 명이 내려와 이방원이 다른 종친, 부마들과 궁으로 들어가게 되었을 때도 본인은 이방원의 명으로 감순청에 남아있었으며, 그 사이 이방원이 다시 나옴으로써 무인정사가 진행되었고 그 뒤 궁에서 나온 흥안군 이제가 그의 저택에서 살해되자 이방원의 명으로 본인이 그의 시신을 수습하고 경순공주를 안심시키는 역할을 맡았다고 주장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다만 당시 도승지였던 김돈이 그가 말한 것이 상세하지 않다는 점. 그가 이방원을 따랐다고는 해도 신분이 미천했다는 점을 들어 이의를 제기하며, 유배 중인 이숙번에게서 당시 이야기를 들을 것을 제안했고, 이후 이숙번이 상경하여 당시의 일을 진술하게 되는 것으로 결론[144]이 나긴 하지만, 만약 전흥의 말이 진실이라면[145] 무인정사가 일어난 날 밤의 도성 안은 당시 감순청에 있던 이방원 측에게 장악되었다는 것으로, 친군위 등이 수비하는 궁궐을 제외하곤 이방원 측이 도성 안에서 상당히 자유로이 움직일 수 있었을 가능성이 높았다는 것을 의미하며, 더 나아가서 정보 통제도 가능해져 정도전 측이 이방원 측의 움직임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을 가능성도 높았다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어쨌든 일단 객관적 기록으로 보자면, 이숙번, 하륜 등은 확실히 반군 편에 서서 군대를 지원했고 이화, 이천우 등 많은 종친들이 참여했다. 이천우는 특히 정도전이 살해된 이후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입궁하려다가 정안군 측에서 일을 벌인 것을 알고 바로 합류해 왜 자신한테는 미리 말 안 해줬냐며 불평하기도 했다. 정도전, 남은, 심효생, 장지화, 이제, 유만수, 변중량 등이 살해되었으며 왕씨 제거 때 태조가 끝까지 보호한 정양군 왕우의 아들 왕조와 왕관도 죽임을 당했다. 정도전에 이은 신권 2인자 조준은 점쟁이를 불러 누가 이길지 점을 쳐보고 반란군이 이긴단 점괘가 나오자 또 다른 재상인 김사형과 더불어 왕도 세자도 아닌 정안군 이방원에게 끓어 엎드렸다.[146][147] 다만 조준과 김사형이 갑옷을 입은 반인들과 함께 왔다는 기록도 상술된 기록과 더불어 태조실록의 무인정사 당일 기록에 남아있는지라 조준이 처음부터 무조건 저자세로 움직였다기보다는 어느 정도 준비를 하고 나섰으나 이미 상황이 끝났음을 파악하고 김사형과 더불어 이방원 측에 동조했을 가능성도 없잖아 있다.

신덕왕후 소생의 세자 이방석과 무안군 이방번 또한 살해되었다. 특히 이방번은 당시 유일하게 사병 보유가 허가되어 이방원이 거병 초반에 찾아가 합류할지를 물었는데, 이방원에게 합류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이성계나 이방석에게 이방원의 거병 소식을 알리지도 않았다. 이방석이 제거되면 자신에게 세자 자리가 오지 않을까 하는 계산이 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결국 이방번은 이방원에게 아무 답 없이 그냥 집안에 들어가 드러누웠고 후에 죽음을 맞이했다. 아이러니한 것이 이방원은 태조가 위화도 회군을 일으켰을 때 신덕왕후와 두 이복동생이 고려 조정에 의해 인질이 되거나 보복 살해를 당하지 못하게 구해줬는데, 신덕왕후와는 척을 지고, 두 이복동생은 자기가 죽이고 말았다는 것이다. 사실 정몽주를 죽인 직후에도 이방원이 신덕왕후에게 왜 자신의 편을 안 들어 주냐며 하소연할 정도로 서로 믿고 의지했다는 것을 보면 참 씁쓸한 일이다.[148][149]

태조의 사촌동생인 순녕군 이지는 난이 터진 당일 신덕왕후의 오빠인 강계권, 보성군 오몽을, 지중추원사 정신의, 대장군 강택, 정도전의 아들 정진 등과 함께 순군옥에 갇혔다가 귀양살이를 한다. 친형 이방번조차 이방석을 돕지 않은 마당에 이 사건에서 아마도 유일하게 이방석 편으로 기록된 왕족일 것이다. 사실 그는 도조 이춘이 후처 조씨 사이에서 낳은 아들 이완자불화(李完者不花)의 아들로, 완자불화가 이자춘과 천호직 승계를 놓고 원 조정까지 개입하는 개싸움을 벌였던 걸 생각하면 이자춘의 후손들로서는 꽤 껄끄러운 존재였다. 그런데 졸기를 보면 그가 어려서 부모를 잃자 이성계가 잠저로 불러 키우다시피 했다 하니 그야말로 태조가 죽으라면 죽는 시늉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곁에서 함께 머리가 굵어지며 커 온 이지란이나 이화가 어쨌거나 이방석 편을 들지 않은 것과 비교되는 부분. 이후 태종이 즉위한 뒤 그를 불러서 다시 요직을 맡기니 영의정에 영돈녕부사까지 승진하다 천수를 누리고 죽는데, 졸기에서는 무인년에 어떤 사건에 연좌되어 귀양갔다고 대충 넘어가버린다. 그리고 67세에 57세 과부와 재혼을 하는 전대미문의 스캔들을 일으켰다. 재혼 상대인 낙안 김씨는 심덕부와 함께 신도궁궐조성도감판사로서 한양 천도를 총괄한 김주의 딸이었고 개국공신 조준의 조카며느리로 나름 명문가의 자손인 데다 전남편 소생의 자식도 있었다. 당연히 전남편의 자식들은 이지를 넘어뜨리는 등 극렬하게 재혼에 반대했지만 결혼을 막지는 못했다. 그래도 재혼 생활은 행복했던 듯 하다.

이직은 원래 제거 대상에 있었으나 종으로 위장하여 목숨을 건졌다.[150] 영안군 방과는 아버지의 쾌유를 위한 제사를 준비하다 반란 소식을 듣자마자 달아나 숨었고, 익안군 방의와 회안군 방간은 실록 묘사를 빌리면 말도 없이 뛰다가 자빠지기까지 하면서 열렬히 반란에 호응했다. 이방우의 장남이자 이성계의 적장손인 봉녕군 이복근은 이방원 편에 붙어서 공을 세우고 봉녕부원군의 작위를 얻었다.[151]

궁궐수비대 총지휘관 박위 또한 살해당하고 공동으로 지휘를 맡았던 조온은 반군에 합류했다.[152] 궁궐 내 다른 곳의 수비를 맡았던 이무도 조온이 투항하고 박위가 죽었단 소식을 듣자마자 투항했다. 특기할 만한 것으로 궁궐 오위군 중 하나인 호분위의 군사 전원이 이성계 가문 가별초(사병)들이었다는 것. 이들은 이성계의 지휘 아래 황산대첩, 개경 탈환 작전, 나하추 전투, 이오르 티무르 전투 등에서 승리한 당시 조선 최고의 정예부대였다.

오랜 세월 동북면에서 이성계 일가에 충성을 바쳤던 가별초들이라면 태조가 직접 내린 공격명령이나 태조가 시해될 정황이 없는데 자기들이 도련님으로 모셨던 동북면 출신 왕자들에게 칼을 빼들고 대항할 의지도, 필요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동북면 출신 왕자들이 주축인 반군도 전심전력으로 자기 가문의 정예 사병들과 적대할 계획은 없었을 것이다. 가별초를 포함한 수비대 전원을 전멸시킨다면 피해가 심할 것은 자명했기에 미리 지휘관들을 포섭했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오히려 가별초들은 동북면 도련님들이 내세우는 "이 나라가 이씨의 나라냐, 정씨의 나라냐?"라는 구호에 누구보다도 쉽게 동조가 가능할 세력이었다. 그들은 도련님들과 함께해온 동료였기 때문. 실제로 이방원은 즉위한 후 이 때의 일을 가리켜 "무인년에 입직하는 갑사가 갑옷을 버리고 달아났으니, 이것이 서얼을 도울 것이 아님을 안 것이다."라고 하여 당시 궁궐수비군의 투항으로 일이 쉬웠음을 시사하고 있다.[153]

그렇게 보면, 반군이 공성전을 하지 않았을 것이고 궁궐에 입성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당일 현장을 지휘하던 박위는 이미 궁궐 내의 다수가 이미 포섭됐다는 것을 파악하고 전투의지를 상실해 투항했을 것으로 보인다. 아니면 아예 조온, 이무 등에게 포로로 잡혔을 가능성도 있다. 박위, 조온, 이무 등이 이끌던 지휘부 군대가 모두 투항한 후, 궁궐 내 다른 곳을 지키던 나머지 잔존 부대도 전세가 꺾였다는 걸 알고 투항, 모두 무장해제 당한 후 집으로 돌려보내졌다고 한다. 그렇다면 실록에서 묘사되었듯 전투가 거의 없었다는 것이 납득이 간다.

또한 다른 방어군은 가별초를 포함한 대군과 대치했다는 것만으로도 사기가 빠르게 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위에서 보듯 반군 측 자체 군세도 결코 적지는 않았을 것이다. 불확실한 숙위군 지휘관들과의 밀약만 믿고 일을 진행할 순 없으니까. 실록에선 세자 이방석이 연이어 줄지어진 병력을 보고 놀랐다는 듯한 기록이 있다. 계유정난처럼 정말 세력이 약한 상황에서 주저하는 사람들 걷어차 가며 일을 벌였다기보다는 사전에 주도면밀하게 계획된 쿠데타였다.

난이 일단락된 후, 이방원이 도평의사사를 소집해 좌정승 조준과 우정승 김사형을 중심으로 상황 정리 뒤 신하들이 태조에게 정도전, 남은, 박위 등이 역적이라 죽였다는 문서에 서명을 요구하자 이름을 적고는 토하려다가 그리하지 못하고 "목에 뭐가 걸린 것 같은데 넘어가질 않는다."라고 말하며 울었다고 한다.

1차 왕자의 난으로 이방원은 단번에 권력을 장악했다. 이후 2차 왕자의 난도 불만분자의 돌출행동에 가깝고 별다른 위협조차 되지 못했다.[154] 1차 왕자의 난으로 태조 이성계는 상왕이 되어 실권이 없어졌고 새로 왕이 된 정종도 별다른 실권이 없었다.[155] 반면 이방원은 실권을 쥐고 세자가 되어서[156][157] 공식적인 왕위 계승권자가 되었고 측근들이 조정을 장악했다. 보통 이런 경우 있을 법한 반대 세력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고 왕위 등극 후 가장 큰 위협인 조사의의 난조차 초기 진압에 성공했다.[158]

반면에 태조는 쿠데타 한 번에 너무나 쉽게 무력화 되고 말았다. 여러 면에서 판박이인 견훤의 경우 견신검은 쿠데타 후에도 쉽게 정부를 장악하지 못했다. 신검의 쿠데타는 견훤에 충성하는 이들을 숙청은커녕 군대를 맡겨서 전쟁터에 끌고 나올 수밖에 없었을 정도로 기반이 취약했다. 견훤이 고려로 망명 후 고려군을 이끌고 쳐들어왔을 때 후백제의 중신들은 견훤을 보고는 별다른 저항없이 투항했다. 후백제의 우군을 이끌던 견훤의 사위 박영규는 아예 전투가 시작되면 깃발을 바꿔 달기로 약조까지 한 상황이었다.[159] 하지만 왕자의 난은 쿠데타 과정에서 중신들과 왕실 친인척의 지지를 받았고, 당일에 이복동생인 세자를 폐세자한 후 살해하는건 물론이고 이성계의 손발이 될 측근을 모조리 참살해버리고 빈자리에 자기 사람들을 심는 데 성공했다. 덕분에 궁궐에 고립된 이성계는 이방원에게 변변한 반격 한 번 못해봤고, 결국 몇년을 벼르고 별러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서야 그나마 칼을 뽑아볼 수 있었다. 건국 왕이라는 권위가 있음에도 최측근만 정리되자 중앙에 고립된 건 막내의 세자 책봉과 연이은 큰 왕자들의 토사구팽이라는 무리수와, 그로 인한 이들과 혼맥, 인맥으로 연계된 주류 사대부들의 지지를 엄청나게 잃었다는 방증이다.[160]

6. 여타 기록 왜곡

1차 왕자의 난에 관해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은 왜곡되어 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이는 1차 왕자의 난에 대한 기사가 실린 태조실록이 반란의 주동자인 태종 시절에 편찬되었기 때문이고, 실록 편찬 멤버들 또한 직간접적으로 1차 왕자의 난에 가담한 자들이 많기 때문이다.

실록에는 이방원의 군사들이 무기가 없어 서로 창을 쪼개어서 들었다고 하고 또 이숙번이 거느린 장사 2명과 기병이 10명, 보졸이 9명에 여러 군의 종자와 노복 10여 명이 동구 앞에 진을 치고 있었다고 한다. 언뜻 봐선 수십명으로 나라를 엎었다는 곡필 같지만, 이들은 일단 정안군과 왕자들을 경호하기 위해 궁문 바로 바깥에 대기하고 있던 인원 정도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정도. 어차피 같은 기록에서 광화문에서 남산까지 병력이 쭉 늘어서 있었다고 함께 밝히고 있으며, 원경왕후 민씨가 몰래 병장기를 준비하여 거병을 도왔던 사실도 몇 차례에 걸쳐 언급된다.

이방원이 마냥 많은 병력을 처음부터 직할로 거느렸다고만 보기도 어려운 것이, 공식적으로 사병이 몰수된 마당에 여전히 대대급 이상의 사병을 몰래 육성하고 있었다면 이방석의 친위세력이 이를 감지하지 못할 일도 없었을 것이고, 그랬다면 정도전이 맥없이 선공을 허용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결국 쿠데타측은 최초에 저 수십명 수준의 경호 인력과 이숙번의 안산군 병력 외에 직접적으로 손에 쥔 병력은 없었고, 거사 직후 동원한 병력은 대부분 몰수되어 재편된지 얼마 안되는 사병 출신의 중앙군과 포섭된 친위군을 주력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161] 당장 실록에서 직접 언급된 전현직 절도사급 지휘관들만 다섯 손가락을 넘어가고 군수급 지휘관들까지 합하면 두 자릿수인 데다가, 상술되었듯 해당 사건이 일어난 태조 7년에 충청도 병사와 경기좌도 병사가 도성 보수를 위해 올라와있던 상황이었고, 하륜 또한 해당 사건이 일어나기 얼마 전인 8월 2일에 태조로부터 친히 교서와 부월을 받았다는 기록도 있는 등 이 병력들만 모아도 최소 연대급 인원은 충분히 기대할 수 있다.[162]

난 초기 이방원의 직속 사병은 그리 많지 않다고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근거는 이방번의 애매한 태도다. 이방원이 정말로 남산을 뒤덮을 정도로 거대한 수천의 군세를 처음부터 동원했다면 이방번이 아무리 어리석더라도 어느 쪽의 승산이 높은지는 단박에 결론을 내릴 수 있었을 텐데, 정작 이방원이 직접 찾아갔음에도 불구하고 이방번은 그저 관망을 택했다가 죽고 말았다. 즉 적어도 이방원과 이방번이 대면했을 당시 눈에 들어온 것은 경복궁을 들어엎기엔 택도 없어보이는 소~중대급 인원이 고작이었으나, 이후 지속적으로 지휘관들이 합류하면서 이방번이 예측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는 추측도 가능하다.

오히려 만약 태조 병환 조작설이 사실이라면 소수의 병력으로 왕을 구금하고 그를 통해 정권을 장악한 것은 말이 된다. 반대로 수백명이면 은밀히 왕을 구금하기도 애매하고 정면승부하기엔 정규군에 비할 정도가 안되므로 수백명으로 쿠데타에 성공한것이 더 가능성이 낮다.[163]

그런데 당시 경복궁 숙위병 사령관은 이방석이었는데, 당연히 이에 대처를 하려고 했지만 저항을 못했다. 숙위병의 수가 적어 중과부적으로 밀려서 변변한 전투 한 번 치르지도 못하고 제압당했든지, 아니면 숙위병들마저도 칼을 거꾸로 잡았든지, 그도 아니면 숙위병이 대처하기도 전에 반란군이 들이닥쳤을 것으로 보인다. 여하튼 이방원 측에서 적지 않은 병력을 동원해 급습했던 것은 사실인 듯하다.

정도전의 최후에 대해 실록에서는 정안대군 이방원에게 목숨을 구걸하다가 처형되었다고 나와 있으나 이 역시 왜곡되었을 공산이 크다. 자세한 얘기는 정도전 문서를 참조할 것.

6.1. 왕자 살해 음모는 실존했는가?

실록에서는 정도전이 왕자들을 태조의 병을 핑계로 궁으로 불러들여 죽이려 하자 이를 눈치채고 역관광시킨 것으로 서술했으며 이것이 이른바 종친모해죄의 직접적인 명분으로 제시되었다. 심지어 이후로도 잊을만하면 "무인년에 태상왕이 아프시자 정도전 일당이 적자들을 쳐 없애려" 했다는 기사들이 몇 번씩 나온다.

이후 월탄 박종화의 세종대왕이나 이를 기반으로 한 용의 눈물, 후의 정도전 등에서 모두 이를 따랐지만[164][165] 실제 그랬는지는 의문이 남는다. 아무리 정도전이 당대의 알아주는 권신이라지만 명색이 다른 종친도 아니고 태조의 친아들들을 죽이는 일을 태조의 윤허도 없이, 그것도 궁 안에서 저지른다면 그 정치적 파장은 만만치 않은 일이고, 특히 왕자들과 이리저리 얽힌 구파 공신세력들의 반발을 진압하자면 사실상 친위쿠데타 수준의 후속행동이 필요한데 정작 무인정사 당시 정도전파는 실로 맥없이 여기저기서 쿠데타군에게 각개격파당했을 뿐이다. 게다가 그 사실상의 친위쿠데타를 지휘 혹은 묵인해줘야 할 태조는 기록을 보면 병으로 누워있다가 급작스러운 반란 소식 앞에 극도로 무기력한 모습만 보일 뿐이며, 이방석 또한 아무 대응을 못했다.

당시 궁 안에서 태조를 간호하던 것은 세자의 매형인 흥안군 이제와 태조의 서제인 의안군 이화인데, 이화는 칼 들고 싸우겠다는 이제에게 집안일일 뿐이니 가만 있으라고 구슬릴 정도로 확고한 정안군파였다. 위의 여러 정황들을 보면 경복궁 친위병들 역시 상당수가 이방원 측에 이미 포섭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높은데, 이런 상황에서 왕자들을 죽이려 했다면 당장 정보가 새어나갔을 것이다. 왕자들을 죽인다는 무시무시한 일을 모의하면서 정작 궁 안에 정안군파를 남겨두고 내부단속부터 실패한다는 것 역시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이다. 이 정도의 일을 실행하려 했으면 이미 한차례 궁 내부에서 친이방원계들에 대한 대숙군이 벌어졌어야 정상이고, 그랬다면 하륜은 태조실록에서 또 정도전이 태상왕이 아프시자 궁인과 갑사들을 장악하려 들면서 어쩌고 하는 식으로 신나게 손을 놀렸을 것이다. 게다가 정작 정안군과 함께 또 다른 최유력 적장자였던 영안군 이방과는 궁밖의 소격전에서 태조의 건강을 비는 제사를 지내고 있었지 입궁하지 않았다. 남은의 경우는 일단 몸을 피했다가 "정도전이야 어그로 만땅이라 죽었지만 난 괜찮겠지" 하면서 정안군을 찾아갔다가 죽었다고 하는데 무려 살해모의까지 해놓고서 미움받을 짓을 안 했다며 밖으로 나가는 것이 정상적인 판단력으로 가능할 일일지는 의문이 남는다.

이와 관련하여 하륜의 졸기에 꽤 의미심장한 기록이 있다. 해당 기록을 그대로 옮기면 아래와 같다.
(전략) 그때에 정도전이 남은(南誾)과 꾀를 합하여 유얼(幼孽)을 끼고 여러 적자(嫡子)를 해하려 하여 화(禍)가 불측(不測)하게 되었으므로, 하윤이 일찍이 임금[166]의 잠저(潛邸)에 나아가니, 임금이 사람을 물리치고 계책을 물었다. 하윤이 말하기를,
"이것은 다른 계책이 없고 다만 마땅히 선수를 써서 이 무리를 쳐 없애는 것뿐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이 없었다. 하윤이 다시,
"이것은 다만 아들이 아버지의 군사를 희롱하여 죽음을 구하는 것이니, 비록 상위(上位)[167]께서 놀라더라도 필경 어찌하겠습니까?"
하였다. 무인년 8월에 변이 일어났는데, 그때에 하윤은 충청도 도관찰사(忠淸道都觀察使)로 있었다. 빨리 말을 달려 서울에 이르러 사람으로 하여금 선언(宣言)하고 군사를 끌고와 도와서 따르도록 하였다. (후략)

즉 이방원이 "쟤들이 자꾸 우릴 죽이려고 하는데 어쩌지?"라 묻자 하륜이 먼저 공격해야 한다고 대답한 것이다. 하륜은 1398년 8월 초에 충청도관찰사로 내려갔으니 이는 적어도 무인정사가 일어나기 1달 전에는 있었던 대화다. 이를 보자면 이 사태를 이방원 측의 잘 준비된 선공과 계획된 누명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궁에 갔다가 돌아온 이방원이 자신이 죽을 뻔했다며 병력을 모으려고 해서 무전기 같은 게 있던 시절도 아니고서야 한두시간만에 갑자기 여기저기에 흩어진 수천의 병력이 뚝딱 - 그것도 사병이 혁파된 마당에 - 모일 리가 있겠는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도전 측이 아주 결백해지는 것은 아니다. 우선 하륜의 합류시기가 미묘한데, 만약 이방원의 거병이 잘 준비된 각본에 따른 것이었다면 하륜은 졸기에 나온 것처럼 혼자 상경하여 후속병력의 합류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드라마 정도전에서처럼 충청도의 대군을 이끌고 당일 밤부터 주력을 맡아야 했을 것이다. 정작 무인정사 당일 기록에는 하륜은 행적은 고사하고 아예 이름이 언급조차 되지 않는 수준이며 거병 4일이 지난 9월 1일에서야 정당문학으로 임명되면서 재등장한다.[168] 또한 갑자기 병력이 준비되는 것도 숙위군이 이미 포섭되어 있다면 어려울 일은 없다. 미리 계획을 입수하고 한성 상주 인원에게 준비시켜두면 그만이니까. 이와 관련하여 실록에서는 정도전 일당이 송현방 남은의 첩 집을 밤낮으로 들락거리고, 이화, 이무 등이 계획을 알려주며, 박포가 정도전 진영을 정탐했다고 서술하는 등 어떻게 이방원이 계획을 알 수 있었는지를 매우 자세하게 적고 있다.[169] 이무는 특히 당시 정도전의 친구들 중에서 유일하게 훈련 소홀 문제에 대한 실드를 못 받고 파직당했기 때문에 신발 거꾸로 신을 동인도 충분했다

영안군 이방과가 입궁하지 않은 사실도 어찌보면 결정적인 증거까지는 아니다. 이방과는 분명히 차적장자의 명분을 지니고는 있었지만 권력욕이 없는 사람이었고, 따라서 이방석 측에서 포섭 내지 타협하기에 그나마 편한 상대였다. 특히 효심이 깊은 이방과로서는 아무리 동복형제들과의 우애가 깊다 해도 막내의 안정적인 즉위를 위해 아버지가 살해를 지시 혹은 묵인했다는데 적어도 직접적으로 반발할 가능성은 적었고, 설령 반발한다 해도 차라리 산으로 들어가 은거하면 모를까 반란을 일으킬 정도의 정치적 리더십을 보일 가능성도 낮았다. 만에 하나 반란을 일으킬 수 있는 근거자산조차 하필 이방과 이전에 이성계에게 충성하는 동북면 가별초이기 때문에 충분한 안전장치가 존재했다. 그런 그를 살려둔다면 정도전이나 태조의 입장에서는 왕자들의 살해에 적어도 몰살이라는 꼬리표가 붙어 신의왕후 소생 vs 신덕왕후 소생의 구도로 낙인찍히는 상황은 면할 수 있고, 나아가 이방과의 묵인이라는 명분까지 얻을 수 있다. 즉 어디까지나 이방원을 비롯한 '일부' 왕자들의 불온한 소행 때문에 부득이한 일이었으며 그 증거로 품행이 방정한 영안군은 아무 일 없다고 잡아 뗄 수 있는 것이다.

종합해 볼 때 거병일의 결정 타이밍은 한성의 병력은 동원이 가능하지만 충주의 충청감영에는 빨라야 8월 하순 중반쯤에야 연락이 되는 시점이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반군의 중추가 될 수 있는 하륜과 충청감영의 합류를 포기하고 일단 일을 벌일 정도로 이방원 측이 상황을 급박하게 인식했던 것이다.[170] 문제는 왕자살해음모를 긍정하자면 정도전은 왕의 윤허도 없이 왕자들을 죽이려 하면서, 피아 구분도 못하고, 보안유지도 실패했으며, 심지어 현장 지휘조차 손을 놓은, 그야말로 작전의 신 수준의 재능을 가지고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는 것이다. 게다가 실록에 따르면 이게 정도전 혼자 준비한 게 아니라 남은, 심효생, 이무, 이근, 장지화, 이직, 이제 등 송현방 멤버들이 함께 준비했다고 하니 읽는 사람 입장에서는 좀 황당한 일이다.

이를 고려하면 실제로 살해계획이 있었다기보다는 정도전 측의 별 의미 없는 움직임을 가지고 이방원 측에서 심각하게 오해해서 다소 급작스럽게 일을 벌였을 가능성도 있다. 위에서 봤듯이 정도전에게 억하심정이 있을만한 내부배신자도 존재하고. 그렇다고 해도 이방원 측이 이미 거사를 위한 만반의 준비를 갖춰놨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고, 그러자면 이방석의 친위세력이 왕자들을 살해하려 한다는, 혹은 살해할 것이라는 예측 자체는 이미 세간에 파다했을 가능성이 높다. 어차피 막내의 세자책봉이라는 초유의 명분제로 승계시도는 큰왕자들의 존재와는 절대 양립할 수 없는 것이며, 특히 능력, 세력, 야심의 3박자를 모두 갖춘 이방원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위에서 이방번이 세자 자리에 욕심을 부렸다는 언급도 있었지만, 같은 기록에서는 이방원이 이방번에게 그가 멀쩡할 리는 없으니, 지금이라도 같이 가자고 구슬렸다는 대목도 있다.

7. 태조의 병환

7.1. 태조 병환 조작설

태종이 반란군을 이끌고 가장 먼저 제압한 곳은 정도전과 친구들이 놀고있던 술집이 아니라 태조가 기거하고 있던 경복궁이다. 실록에는 태조가 당시 와병 중이었다고 나와있지만, 실제로는 반란군들에게 체포, 구금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태조는 1차, 2차 왕자의 난 이후에도 아주 건강하게 지냈으며 조사의의 난 때는 태종을 겨냥해 실질적으로 군대를 지휘하기도 하는 등 와병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당시 왕자의 난 전후한 실록의 기록을 보면, 태조의 병환에 대한 기록은 총 6번인데, 태조 7년에 무려 5번이 몰려 있고[171] 그 중에 왕자의 난이 발생한 8월에 4번이 몰려 있다. 그런데 8월 아파서 누웠다는 사람이 3일 만에 흥덕사에 가서 신덕왕후의 명복을 비는 모순된 기록이 보이고, 태조가 아팠다면 아내 신덕왕후 때처럼 거처를 옮긴다든가 대사령이나 불공처럼 회복을 기원하는 행동이라도 보여야 하는데 1차 왕자의 난 직전 태조의 회복을 위한 행동은 오로지 영안군 이방과가 태조의 건강을 위한 제사를 지냈다는 것 하나뿐이다. 그리고 정종에게 선위하는 이유 중 하나가 건강 문제임을 봐서는 태조의 와병은 조작이고 태조가 구금되었을 가능성은 매우 크다는 논리다.

당시 태조는 언제 급사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62세의 나이였고, 요동 정벌을 앞두고 있는 중대한 시기였다. 그런데 태조가 몸이 아픈데 재상이자 의흥삼군부사로서 군권을 모두 틀어쥐고 있던 정도전이 즉각 입궐해 상황을 살피면서 계엄령을 선포할 것인지 저울질하는 것이 아니라 밖에서 태연하게 술을 마신다는 것은 대단히 이상하다.

실록에 나와있는 것처럼 태조가 걸핏하면 골골대며 자리에 누워버렸다면 상왕이나 태상왕으로 물러났을 때 심심하면 사냥을 나가거나 타 지역으로 유랑을 갈 수 없었을 것이고 조사의의 난 때 군대 지휘 또한 불가능했을 것이다. 태조는 죽기 몇 년 전에 딸을 얻을 정도로 매우 건강했다.

7.2. 반론

실록을 보면 예전의 씩씩했던 태조치고는 너무 무기력해보인다. 기록을 믿는다면 태조가 진짜 아프긴 했다는 쪽에 힘이 실린다. 무인정사 당시 태조의 나이(64세)라면 한 번쯤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겉보기에 건강해도 어느 날 손바닥 뒤집히듯 바뀌는 게 노인들 건강이다. 아무리 실록에 윤색이 되었다 해도 앞뒤의 기록과 교차해보면 어느 정도의 신뢰성은 검증할 수 있는데 이 건이 바로 그런 예이다.

태조는 2년 전인 1396년에 그토록 사랑했던 신덕왕후가 41세의 젊은 나이에 급성 신부전증으로 급사하는 충격적인 비극을 겪었다. 배우자의 사망은 당사자에게 엄청난 스트레스를 주는 사안으로[172][173], 특히나 그 사망이 급작스럽거나 비참하다면 젊은 사람도 하루만에 머리가 새하얗게 변한다. 애처가 사망하자 실의에 빠져 사망한 사례는 군주들 중에서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는데, 중국사에서도 손꼽히는 강건한 군주였던 청태종이나 순치제도 배우자(정확히는 총애하던 후궁)가 죽자 고작 1년만에 각각 뇌출혈과 천연두로 세상을 떠났다. 이미 환갑을 넘긴 태조라면 피를 토하며 쓰러지지 않는 것이 이상한 일이었다. 게다가 세자의 가장 든든한 배경이 되어줘야 할 신덕왕후의 죽음으로 이성계가 직접 나서서 후계구도를 공고화해야 하는 상황이 도래했는데 위에서 보듯이 신덕왕후의 친척들조차도 이방석의 승계에 그다지 긍정적인 입장이 아니었으며, 정도전이 추진하는 요동정벌과 사병혁파 정책 덕에 조정 내의 분열과 대립이 개국 이래 최고조에 달한 상황이었으니 차기 권력구도와 관련된 정치적 안배 문제로 스트레스가 배가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슬픔으로 몸을 채 가누기도 힘든 상황에서 어떻게든 죽은 신덕왕후의 권위를 세우려고 직접 수도권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묫자리를 찾는 등 꽤나 무리를 했다. 실제로 실록에 기록된 태조의 병환은 난이 일어난 그 날만 갑자기 등장한 게 아니라 1398년 내내 꾸준히 등장한다. 후일 태조가 건강했다 한들 그 당시의 병환을 의심하는 건 음모론에 지나지 않는다.

다만 태조가 목숨이 위태로울 정도로 위독한 상태라면 정도전 일파가 신하가 되어서 술자리를 벌이고 있었을 가능성은 없으니 중병까지는 아니었고, 몸이 안 좋긴 한데 며칠 푹 쉬고 약 잘 먹으면 완쾌될 정도라서 회복에 집중하느라 태조의 대응력이 떨어진 상황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태조가 대응하고 싶어도 병환 중 태조를 대신할 인물이 없고 경복궁이 장악된 상태라서 태조가 적극적으로 나서기 어려웠을 공산이 크다. 술 마신 다음날의 숙취나 무리하게 움직인 다음날의 몸살같이, 꼭 중병이 아니라도 젊은 사람조차 걸렸을 때 무력화 되어서 자리보전해야 하는 병은 있다. 태조 역시 처방 잘 받고 하루이틀 푹 쉬면 나을 잔병이 걸리지 말란 법은 없다.[174] 애초에 또 60대라 그런 잔병을 앓는 게 오히려 정상일 나이이기도 하고 말이다. 여말선초의 60대는 당시의 평균수명이 매우 짧았음을 감안하면 21세기의 60대와 동일선상에 놓는 것 자체가 곤란한 연령대다.

당시는 음력 8월 말로 양력으로는 10월 초[175]에 해당하는 환절기였기 때문에 국사나 군무 등으로 조금 무리했다면 심한 감기몸살이 들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시기다. 게다가 이 해 하반기에는 계속해서 폭우가 내리고 우박이 쏟아져 법석(법회)을 열게 하는 등 날씨도 영 좋지 않았다. 어디 거동이라도 잘못 했다면 꼼짝없이 몸살나기 딱 좋은 상황이다. 실제로 7~8월 태조의 행적을 보면 병이 날 수밖에 없는 사정을 짐작할 수 있는데, 7월 27일 폭풍이 불고 우박이 내리던 날 태조가 흥천사에 거둥하고[176] 바로 이틀 뒤인 29일에 5월 이후 3개월만에[177] 병이 났다는 기사가 등장한다. 이후 8월 3일과 6일 잇달아 병이 난 직후 8월 9일 흥천사에 거둥했고, 13일에 세자 이방석이 길복[178]을 입고 정릉을 지키던 이서와 강인부를 표창한 다음날 14일에 다시 태조의 병환 기사가 나온다. 이로 미루어보면 7월까지 중국 사신 접대 등으로 스트레스가 쌓인 상태에서[179] 7월 말 궂은 날씨에 무리해서 외출을 한 태조가 감기몸살, 혹은 인플루엔자 등 환절기 질병에 걸렸고, 완치되지 않은 상황에서 계속해서 국사와 신덕왕후의 3년상 마무리 등으로 무리하다가 증세가 도지기를 8월 내내 반복했다고 추측해도 크게 무리는 없으며, 이렇게 병세를 질질 끌고 있는 상황이니 이방원 측에서 궁내 지휘관들을 포섭하고 날짜를 잡을 틈을 포착할 수 있었을 것이다. 사실 감기몸살 정도면 다행이지 인플루엔자는 정말이지 꼼짝없이 드러눕는 것 외에 방법이 없고, 그 외에 위염이나 장염 등등 좀 괜찮다 싶어서 무리하면 바로 재발해서 드러눕게 만드는 병은 한둘이 아니다.

이를 보면 태조의 병은 정릉 원찰인 흥천사 거둥에서부터 시작한다. 위에서 살펴봤듯이 태조가 이방석을 책봉한 가장 강력한 근거가 신덕왕후였고, 나이도 어리고 큰왕자들에게 능력과 세력 면에서도 밀리는 이방석의 정통성을 강화하기 위해 태조가 택한 방법도 정릉을 왕궁 코앞에 조성해 죽은 신덕왕후의 존재감을 각인시키는 것이었다. 태조에게 있어서 신덕왕후의 3년상 관련 행사들은 자신의 몸이 상하는 한이 있어도 무조건 챙겨야 하는 최우선 일정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태조의 몸이 병들자 난이 터졌고 그 주력으로 지목되는 것이 정릉 숙위를 위해 상경한 것으로 추측되는 안산군 병력이니, 결국 이방석의 승계를 위해 택한 행보가 정작 이방석을 죽인 아이러니한 결과였다. 태조의 병은 9월 초에 수정포도를 구해 먹으면서 점차 회복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미 정권을 장악한 이방원 측에게 실무를 떠넘기고 양위까지 하면서 분노와는 별개로 그동안 격무에 시달렸던 몸이 자연스레 회복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정도전 측이 태조의 병환에 기민하게 대응하기에는 오히려 이제는 정말 이방석이 즉위할 판이라, 뭐라도 하지 않으면 끝장이라는 시그널을 줄 가능성이 적지 않았다.[180] 사실 7월 말부터 내내 태조의 병이 도지고 낫고를 반복한 상황이라 매번 경복궁에서 숙위했다간 정도전부터가 몸이 남아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정도전 측이 아무것도 안 하고 손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닌데, 이미 사병이 혁파되어 중앙군으로 편입되었고, 왕자 및 종친들에게 군사훈련을 시키고 그 결과가 미흡하다 하여 그 휘하 사람들에게 태형을 내린 것이 약 2~3주 전이었다. 즉 이미 삼군부의 군령이 왕자들에게 직접적으로 미치는 상황이었으며 세자의 동복형인 이방번에게는 상당한 규모의 사병을 들려놓았으니 나름대로는 안전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태조가 앓아누워있긴 하지만 역전의 용장인 박위가 궁내에 있었고 삼군부 절제사를 지냈던 흥안군 이제가 입궐해 숙위중이었으며, 자신이 열심히 키워놓은 만16세의 세자가 궁궐 친위병 정도는 충분히 지휘할 수 있으리라 믿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혁파해서 모아놓은 중앙군과 이방번이 아무 도움이 안 될줄은 몰랐을 것이다.

흔히 정도전 일당이 송현방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록에서는 '노복들은 잠들어 있고 정도전과 남은 등은 웃으며 얘기하고 있었다.'(奴僕皆睡, 道傳、誾等, 張燈會坐言笑)고만 기록되어 있다. 술을 마신다면 노복들이 계속 심부름을 해야 하니 주인들을 두고 먼저 잘 수는 없었을 것이다.

다만, 일부에서 말하는 것과 같이 가별초가 이성계에게 충성하기 때문에 이성계가 건재했다면 가별초가 창끝을 반대로 돌렸을 것이니 병환이 든 것이 분명했다는 주장은 약간의 어폐가 있다. 자기의 소속 아래 있는 군대의 중견급 지도자에 의해 그 주인이 시해되는 경우는 역사를 통틀어 너무나 흔한 일이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일본 전국시대만 가도 흘러넘치는 사례다. 이성계가 걸어나와서 가별초에게 호통을 쳤다 해도 가별초가 멈추지는 않았을 것이다. 가별초가 저능아 소굴도 아니고 정도전과 세자를 죽인다는 것이 태조에게 어떤 의미인지 아는 사람이 없었을 수가 없으며, 몇 사람이라도 알고 있었다면 곧 그런 인식이 전염되었을 것이다. 현대 사가들의 기본적인 이해 역시 "가별초 지휘부는 이방원에게 속아 간신들을 처단한다고 굳게 믿은 것이 아니라, 사병혁파를 비롯한 구체제 전복에 가까운 개혁에 반감을 품고 이성계에게 창날을 돌린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방원 시기에 사병 혁파령이 떨어졌을 때, 무인정사 당시 성문을 열어준 장본인인 조영무는 무기를 수거하러 온 사령을 두들겨 패기까지 했던 것이다.

흥안군 이제는 직접 시위병력을 이끌고 나가 싸우겠다고 했지만 함께 있던 이화의 만류와 태조의 부동의로 실패했다. 태조의 기력이 충분한 상황이었다면 당연히 이제가 반격을 시도해봤을 것이고 실록 혹은 연려실기술같은 야사에 흔적이 남았을 것이다. 태조실록은 음모론자들이 막연히 주장하는 것과는 다르게 무인정사 이전까지는 세자책봉의 책임이 정도전이 아닌 다른 이들에게 있었음을 밝히는 등 생각보다 윤색이 적은 기록이다.[181] 더군다나 멀쩡한 태조를 힘들여 구금할바에야 차라리 모든 문제의 시발점인 정도전을 몰래 암살해버리는 게 훨씬 견적이 나올 일이다.

위에서 의문점으로 제시한 조사의의 난은 오히려 무인정사 당시 태조가 멀쩡한 상태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입증해주는 좋은 반례가 된다. 이미 무인정사로부터 4년이 지났고 아예 이방원이 왕위까지 확실히 차지해 그야말로 뒷방 늙은이 신세가 되었지만 그럼에도 이성계는 자신과 가별초들의 근거지였던 함길도에서 순식간에 1만의 병력을 모아 내전을 일으킬 수 있을 정도의 권위가 남아 있었다. 하물며 현역 군주인 그가 난을 감지하여 반군 앞에 상방검을 들고 나타난다면? 그야말로 반역죄로 삼족을 멸할 일이다. 의심하는 쪽에서는 태조가 그렇게 아팠다면 어떻게 여기저기를 그렇게 쏘다니며 함흥까지 올라가버릴 수 있었겠냐며 의문을 제기하는데, 반대로 멀쩡한 상태의 태조를 강제로 구금해 난을 성공시킨 것이라면 오히려 그대로 궁 안에 유폐하고 외부와의 접촉을 끊은 채 태조가 거동을 할 수 없다고 열심히 둘러대도 모자를 일이다.[182] 태종이 이성계의 무기력함을 직접 확인하지 않았다면 사신을 접대하고 흥천사에 불공을 드리러 다니고 평주(평산)니 낙산사니 신도(한성)니 오만 곳을 쏘다니도록 놔뒀을 리가 없다.[183]

명분 면에서도 무인정사는 다른 반정들과 크게 차이가 나는데, 직접적으로 왕을 폐위시켜버린 중종반정이나 인조반정은 아예 왕을 폭군으로 지목해버렸지만 무인정사 지도부는 창업군주이며 친아버지인 태조를 상대로 폭군의 ㅍ자도 꺼내지 못했다. 그보다는 차라리 임금 옆의 간신을 몰아낸다는 명분으로 일어난 계유정난과 비슷하겠지만, 그 계유정난 때에도 수양대군은 어리디 어린 단종을 압박하여 양위를 받는 데 무려 2년의 시간을 소비했다. 반대파를 전멸시키고 조정을 다 장악하고도 어린 왕을 상대로 이 정도인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기력이 충분한 창업군주 친아버지가 멀쩡한 몸으로 반란군 앞에 선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는가? 아무리 사대부와 종친들이 이방원을 지지하며 몰려왔다고 해도 가별초를 이끌고 당당히 나타난 이성계의 면전이라면 이방원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무릎을 꿇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면서 한줌 부자의 정에 의지해 폐서인을 목표로 하는 것 뿐이었다.[184] 특히 조준 같은 주요 관료들이 한 번 머뭇거린 것을 제외하고 생각보다 순순히 따른 것을 보면 이들도 태조의 병환으로 경복궁이 쉽게 대응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감지하고 있었다는 데 무게가 실린다.

태조가 병환중이었음을 뒷받침하는 또 다른 근거는 바로 거병시기다. 전술했듯이 이 사건은 사병이 혁파된지 약 10여일이 지난 시점에서 터졌는데, 상식적으로 거병을 시도한다면 사병을 손에 들고 있는 상황이 사병이 몰수된 상황보다 훨씬 쉬울 노릇이다. 거병과 거의 동시에 경복궁을 장악할 정도로 주도면밀하게 일을 진행한 이방원이 사병의 유지를 포기하면서까지 기다릴 조건이라면 오로지 태조의 병환과 그로 인한 경복궁의 일시적 혼란 외에 다른 답이 나오지 않는다. 또한 사병이 이미 몰수된 이방원에게 궁궐수비군이 내응할 이유 역시 태조가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 아니면 찾을 수가 없다. 각종 야사나 음모론이라면 환장을 하는 대한민국 방송작가들이 유독 무인정사만큼은 태조의 와병 상황으로 묘사하는 것은 그 외에 도저히 개연성 있는 전개가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여러 정황을 종합해 보았을 때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이방원 일파가 마침 태조가 가벼운 병치레로 앓아누운 틈을 타 전격적으로 쿠데타를 감행하여 성공시켰다고 해석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다. 따지고 보면 태조가 신속하게 밀어붙인 위화도 회군과 비슷하게 1차 왕자의 난도 신속하게 펼쳐졌다.

여담으로 과거 이 항목은 드라마 정도전이 종영된 이후 기레기들에 의해 토씨 하나 수정되지 않고 무단 도용되었다.기사 1, 기사 2 지금은 항목에 수정이 좀 가해진 상태.

8. 만약 조선과 명의 결혼동맹이 성사되었다면?

한가지 흥미로운 점은 이성계주원장이 서로 사돈을 맺을뻔한 적도 있었다는 사실인데 잘 안 알려져있지만 실제로 양국간에 있었던 혼담으로 1396년 6월-1397년 4월까지 진지하게 조선명나라 양측에서 논의되었던 사안이라고 한다. 만약 성사되었다면 이방석의 세자빈이 명나라 황녀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실록의 기록을 보면 주원장이 먼저 사돈관계를 맺자고 주장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태조실록 9권, 태조 5년 6월 13일 기해 1번째기사 황제가 혼사 맺자고 했다는 것을 종묘에 고유하였다.

그 이후 진지하게 조선과 명나라 양측에서 혼담이 오가면서 서로 잘 풀리는 듯 싶더니 1397년 4월에 주원장이 갑자기 이성계에게 "내가 이렇게 진지하게 사돈 맺으려고 했는데 니가 열받게 굴어서 없던일로 하겠다”라고 공문을 보내면서 결국 파투가 났다고 한다.
"본부(本部)에서 흠봉(欽奉)한 성지(聖旨)에, ‘중국 주변에 인접한 사이(四夷)가 멀고 가까운 것이 같지 않는데, 오직 조선(朝鮮)이 동쪽 변경에 가까이 있어 다른 곳과 비교하면 심히 절근(切近)하다. 전자에 왕씨(王氏)가 정사를 게을리 하여 망하고 이씨(李氏)가 새로 일어났는데, 자주 변경에서 흔단(釁端)을 내므로 짐(朕)이 두세 번 말하였으나, 마침내 그치게 하지 못하였다. 오래되면 병화가 생길까 염려하여 실은 서로 혼인을 하여 두 나라의 생민을 편안히 하고자 했고, 이런 생각을 가진 지 여러해가 되었다. 그러므로 29년 6월에 다만 행인(行人)으로 이 뜻을 통하게 하였는데, 사자(使者)가 돌아오매, 왕이 나와 영접하였다는 말을 듣고, 짐(朕)이 장차 반드시 혼인의 일이 이루어지리라고 생각하였다. 30년 봄에 조선에서도 이 일을 위하여 사람을 보내어 안장 갖춘 말까지 바치어 성의를 표하였는데, 다음날 안장 갖춘 말을 조사하여 보니, 기구와 짐승에 모두 흠이 있었다. 물건에 대해 용심한 것을 보니 처음 사귀는 데에도 오히려 이렇거늘, 오래되면 반드시 그렇지 못할 것이다. 군자(君子)의 좋은 벗이라는 것은 각각 하늘의 한쪽에 있어 모이고자 해 모일 수 없더라도, 반드시 천리(千里)에 정신으로 사귀어 뜻을 통하게 하는데, 지금 조선은 짐이 성의로 보냈는데도, 그쪽에서는 거짓으로 응하니, 천리라 하지만 정신으로 사귀고 뜻으로 통할 수 있겠는가? 일은 처음에 잘 판단하지 못하면 뒤에 반드시 뉘우치는 법이다. 조선과 혼인하는 일은 두 번 의논하기가 어려우니, 너희 예부(禮部)는 조선에 이문(移文)하여 인친(姻親)의 의논은 파하고, 행인(行人)을 잘 대접하되, 돌아가서라도 변경의 흔단을 내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 설장수 등이 남경에서 돌아오다. 인친 의논을 파한다며 흔단을 내지 말라는 자문

아마도 정황상 주원장은 "결혼 정도면 요동 가지고 지랄 안 하기 충분한 대가겠지"라고 생각했고 이성계는 "결혼까지 시켜줄 정도면 요동 정도는 지참금으로 챙겨먹을 수 있겠지" 하고 서로 정반대로 오해하는 바람에 파투가 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이렇게 혼담이 완전히 파투나자마자 조선에서는 거의 곧바로인 1397년 6월부터는 요동정벌 논의가 본격화돼서 조준이 반대하니까 남은이 조준은 셈은 잘 세도 큰일을 도모할 수 없다며 디스한다거나 하는 사건이 일어나고, 1397년 9월에 심씨를 공식적으로 세자 이방석의 현빈으로 삼으면서 관련 논의들은 완전히 끝이 나게 되었다.

이 국혼이 성사되었다면 정난의 변과 얽혀 조선의 행보가 전혀 달라졌을 거란 IF도 있는데 일단 주원장이 1398년 5월에 사망하기에 저 때 저 국혼만 성사됐으면 주원장이 죽자마자 8월에 터지는 정난의 변과, 마찬가지로 8월에 터지는 1차 왕자의 난에서 조선의 입장이 너무너무 재밌어 진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처갓집이 명나라 황실이 되면 원래 막내였고 나발이고 세자 이방석의 위상이 엄청나게 높아질 테니 함부로 비비기도 힘들고, 공식적으로 명나라랑 척지고 요동정벌 하자는 것도 아니니 그거 핑계로 쿠데타도 무리니 1차 왕자의 난은 아무래도 불가능해질 가능성이 매우 높고[185] 대신 그렇게까지 명나라 황실이랑 가까워진 상태라면 아무래도 정난의 변에서는 조선이 건문제의 편을 안 들 수가 없어진다. 주원장도 말년에 번왕들 따로노는거 눈치 못챈것도 아니니 저 시점에 조선이랑 결혼동맹 했다 치면 당연히 건문제랑 가까운 혈연으로 맺었을 질테고 그렇다면 장인의 나라를 도와준다는 명분으로 정난의 변에 조선이 개입을 할 수 밖에 없어질테니 말이다. 즉, 주원장쿠빌라이처럼[186] 자신의 딸(황녀)을 조선에 직접 시집보낼 경우 조선의 입장에서는 명나라의 원병 요청 요구는 역으로 거부하기가 매우 어려워지게 된다는 뜻이다.
각도에서 군적(軍籍)을 올렸다. 이보다 먼저 남은(南誾)·박위(朴葳)·진을서(陳乙瑞) 등 8명의 절제사(節制使)를 보내어 왜구(倭寇)를 방비하게 하였는데, 왜구가 물러가매, 남은은 경상도에서, 박위는 양광도 에서, 진을서는 전라도에서 군사를 점고(點考)하여 명부(名簿)를 만들게 하고, 그 나머지 여러 도(道)에는 안렴사로 하여금 군사를 점고하게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군적(軍籍)을 만들어 올리게 되니, 경기 좌우도와 양광도 ·경상도·전라도·서해도(西海道)·교주도(交州道)·강릉도(江陵道) 등 8도에 마병(馬兵)·보병(步兵)과 기선군(騎船軍)이 합계 20만 8백여 명이고, 자제들과 향리(鄕吏)·역리(驛吏)와 여러 유역자(有役者)가 10만 5백여 명이었다.
- 각도에서 군사를 점고하여 군적을 올리다 태조실록 3권, 태조 2년 5월 26일 경오 3번째기사 (1393년)

이 경우 이성계 시절 부터 준비된 조선의 20만 병력들은 연왕측의 후방 공격을 위해 동원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조선과 명의 국혼이 정상적으로 성사되었을 때를 가정한 경우이지만 말이다.

그 이후에 잘만 스노우볼이 굴러갔다라고 가정한다면 연왕(燕王)의 뒤통수를 공격한 대가로 조선측이 전후 요동이나 만주를 건문제의 명나라로부터 선물로 받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주 망상도 아닌게 북경이 아닌 남경 조정의 입장에서는 조선 덕분에 연왕과의 내전에서 승리하고 거기다 북방 최정예군인 연왕군 15만이 날아가버리고 내전으로 재정지출까지 늘어나버리면 그나마 가까운 요동도사를 연으로 이동시키고 혈연으로 이어진 조선에게 요동을 떠넘기는 것도 생각 못할 대안은 아니기 때문이다. 즉, 나비효과로 인하여 다른 방식으로 요동만주를 확보하였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물론 역으로 연왕이 건문제와 조선 양측을 모두 격파하였다고 가정한다면[187] 빡친 영락제에게 조선이 아예 멸망당하고 명나라령 조선성이 되는 그런 결말도 있을 수 있겠지만 말이다.[188]

9. 사극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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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칭] 당시 명나라는 '권지조선국사'로 칭했다. 당시까지는 명나라가 조선의 건국은 인정해줬지만 정식으로 책봉을 허락하지는 않아 제후가 아니었기 때문에 이러한 임시칭호를 내렸다.[2] 정도전의 차남[3] 정도전의 삼남[4] 정도전의 사남[5] 하지만 역사의 승자는 이방원이므로 보통 이렇게 불리지는 않는다.[6] …9월에 공소의 난에 공(정도전)이 천년(天年)을 마치지 못했다. -삼봉집, 8권 부록 중 <사실>(事實).[7] 방우에게 남아 있던 군사들은 방우 사후 그의 아들 복근이 아니라 이성계의 형 이원계의 3남 이조(李朝)에게 인계되었기에 다른 종친들과 달리 실질적인 보탬이 되진 못했을 것이다.[8] 당시 이방과는 태조 이성계의 쾌유를 비는 제사를 지내고 있었다. 그러나 이방과가 이를 모를 리는 없었을 것이고, 방원이 난을 일으키는 것에 딱히 반대했다는 기록도 없으니 암묵적으로 이에 동의했다고 볼 수 있다.[9] 창왕 시기까지는 제2차 요동정벌 중 우왕과 최영에게 인질로 잡혀있다가 위화도 회군 직후 정종, 이화상과 탈출했다든지, 사신으로서 명에 가는 등 기록이 어느 정도 남아있을 정도로 활동했으나, 공양왕 집권기 이후에는 기록이 전무하고, 조선 건국 이후엔 맏아들로서 제한적인 역할만 하며 술로 시간을 보내다 1394년에 일찍 사망하였다. 지윤과의 사돈관계를 비롯하여 권문세족 간의 인척관계가 다져져 있었기에 의도적으로 배제된 것으로 풀이된다.[10] 태종 때 문안군으로 추증. 고종 때 덕안대군으로 재추증.[11] 위화도 회군때 우왕에게 처형#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명태조실록이 출처인만큼 한다리 건너 전해진 것이긴 하나 이방연의 사인에 대한 유일한 기록인만큼 완전히 무시할 수도 없다.[12] 당시 그의 장남이자 태조의 장손인 이복근이 15세쯤 되었다.[13] 두 왕후의 나이차는 19세나 되었다. 신덕왕후의 나이는 이방우보다도 어리고 이방과보다 겨우 1살 많았으니 그 자식들이 어린 건 당연한 수순.[14] 다만 이색은 1395년(태조 4)에 한산백(韓山伯)에 봉해지고, 이성계의 출사(出仕) 종용을 받았던 사람이다. 조선을 이미 건국한 이성계로서는 이미 사망한 포은을 대신하여 신진사대부들의 스승이자 원로인 목은이라도 회유하여 소수의 급진건국파를 넘어서 보다 넓은 인재들의 출사를 해야 할 입장이였다.[15] 정종 이방과는 적자가 없이 서자들만 있었기에 자연스레 계승권이 박탈당했고, 익안군회안군 두 사람의 후손들도 마찬가지로 배제되었다. 태종과 세종의 후손들만이 적통을 이어나가게 설계했고 조선 멸망까지 이행되었다. 밑에서 다시 검토하겠지만 태조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도 형 이자흥이 죽은 직후 어린 조카에게 돌아가야 할 천호 자리를 차지했으니 이 점도 참고가 되었을 것이다. 다만 이자춘은 안 그러면 계모의 집안인 한양 조씨네(정확히는 그쪽 외손자인 이복동생들)가 천호 자리를 잡아먹었을 것이라는 나름의 명분은 있다.[16] 이는 조선건국 직후 전주이씨 족보에 원래 시조 이광희위로 이한-이자연-이천상의 3대를 추가하여 등재하는데 가문의 격을 높이기 위해 고려 최고 명문가였던 특정 가문(인천 이씨)의 족보를 차용하는 결과로까지 이어진다[17] 태조실록 권4 태조 2년 9월 18일 기사.[18] 다만 진안대군 항목을 보면 알 수 있지만, 충신설을 반박하는 증거로 언급되는 당시 그의 행적들이 다른 관점에서 보면 반박이 어느 정도 가능한 묘한 부분들이 일부분 존재하기 때문에, 그가 정치적인 이유나 외부의 압력에 의해서 후계자가 되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꼭 고려에 대한 충성심 때문만이 아니더라도 다른 이유로 인해 그가 스스로 후계자 자리를 물려받지 않았을 가능성도 어느 정도 있음을 보여준다.[19] 민선과 민제는 모두 여흥 민씨로 재상지종으로 불린 유력 권문세가다.[20] 왕자의 난 때 왕조와 왕관이 죽은 것도 방번의 사돈이면서 군직에 있어 불똥이 튄 것이다. 태종도 자신의 권위가 어느 정도 서자 왕씨들에 대한 탄압을 완화시키고 공주에 살던 순흥군 왕승의 후손들을 보호했고 뒷날 이들이 끊어진 왕씨의 제사를 이어가게 된다.[21] 사실 도성 안에 능을 조성한 것 자체가 태조의 억지였으며, 오히려 이를 핑계로 이숙번이 도성에 들어와 있을 수 있었다.[22] 이 떨어진 신덕왕후의 위상은 현종대인 1669년에서야 복권된다.[23] 어진 사람을 고른다는 뜻.[24] 그러나 택현이라는 명분으로 이방석을 세자로 세울려면 최소한 5살 때부터 책을 읽으면 바로 암송해버리는 강희제 수준의 미친 수준의 재능을 보여줘야 했다.[25] 중국에서는 대체적으로 적서간의 차별 없이 장자를 우선시하지만, 한국 역사에서 적자라는 것은 전통적으로 서자와 차별되는 위치에 있었다. 이는 정식으로 혼인한 여성을 더 우대해주는 결과였다.[26] 다만 중국에서 적서간 차별이 아예 없다는 말은 틀린 말이다. 예를 들자면 한고제 같은 경우도 혜제가 뒤를 이었지만 사실 나이만 놓고 따지만 혜제보다 나이많은 서자도 있었다. 그리고 당태종도 자식은 상당히 많았지만 왕위 계승 후보는 왕후의 자식들인 승건, 태, 뿐이었다. 홍타이지의 서장자인 호우거 역시 나이도 많았고 강력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결국은 나이는 어렸지만 정실(정확히는 적복진) 푸린에게 순번에서 밀렸다.[27] 이는 이후 왕자들에 대한 처우로도 명백하게 나타나는데, 왕자들을 분봉하겠다는 말이 나오지 않나, 요동정벌에 왕자들을 보내겠다고 하는 등 누가 봐도 어처구니없는 말이 계속 나온다. 그리고 사병 혁파도 이방번만 예외로 하는 등 원칙도 지키지 않았다. 이게 다 이방석을 세자로 책봉함으로써 계승 순위가 꼬였기 때문에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소리가 계속해서 나온 것이다.[28] 주로 적장자나 높은 서열의 대상자가 있지만 너무 나이가 어릴 경우 사용하는 논리가 택현이다. 물론 그 외에 왕위 계승자에게 심각한 결함이 있을 때도 사용한다. 마지막으로는 위의 사항들이 다 해당되지 않음에도 건국 초나 나라가 혼란스러워서 유능한 후계자가 꼭 필요할 때에 적용된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나이가 어리면 수렴청정을 하든가 해서 보좌하는 쪽을 택하지 택현을 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는 점에서 택현이 종법보다 우선한다고 보기는 힘들다. 세조 이후 원손/원자의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차순위 후계자가 등극하긴 했지만 이건 정말로 세손/세자 책봉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너무 어렸기 때문이고 그나마도 적차자인 해양대군, 또 예종의 양자로 입적이 가능한 의경세자의 차남 자을산군이 등극하는 등 어떻게든 종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방식을 택했다.[29] 사실 보통 이런 경우 장남이 아닌 차남을 양자로 보낸다. 장남은 그 집안의 대를 이어야 하니까. 따라서 자을산군의 형 월산대군을 양자로 보내지 않은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30] 당시에는 대를 잇기 위해 형제나 친척의 자식을 양자로 삼는 것 정도는 흔한 일이었다. 그래도 일단 족보가 꼬이기는 하므로 왕세자()가 아니라 왕세제()라고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지만 정종이 직접 자신이 이 동생(이방원)을 아들처럼 생각하겠다 하여 받아들여졌다. 무엇보다 태종 본인이 세제가 될 생각이 없었고.[31] 정확히는 중원, 조선, 베트남 등으로 일본이나 몽골에서는 잘 지켜지지 않았다. 일본에서는 무로마치 막부 중기부터 서서히 등장해 에도 막부 시대에 들어서야 자리잡는다. 그 이전에는 인세이라 불리는 일본 특유의 제도로 인해 적장자 계승 원칙이 잘 지켜지지 않았고 이로 인해 일본 황실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게 된다. 아이러니한 건 인세이도 사실 종법제처럼 안정적인 왕위 계승을 위한 제도였다는 것이다.[32] 아무튼 이후에도 막부에서도 이황의 성리학이 들어오면서 장남에게 계승하는 종법제가 유지되었고 나름 안정된 정세를 유지하게 된다. 나중에 가면 에도 막부도 쇼군의 권위가 떨어지지만 이 때는 이미 도쿠가와 종가 혈통 자체가 끊어졌기 때문에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33] 조선 후대에 세도정치가 판을 친 것도 결국은 순조 이후로 조선 왕조의 혈통이 끊어지는 바람에 생긴 일이다. 이미 영조 시절에 남은 직계 자손이 정조 뿐이었고 정조도 효명세자와 순조 뿐이었는데 효명세자가 일찍 죽었다. 그래서 방계를 데려오게 되었는데 방계에는 권위가 서지 않으니 강력한 후원자가 필요했고 그 후원자가 된 가문(주로 외척)이 또다시 강력한 권력을 갖게 되는 악순환을 겪는데 이게 바로 세도정치이다.[34] 적장자는 원칙적으로 양자로 보낼 수 없었기 때문에 선조의 큰형 하원군과 사촌 풍산군은 우선적으로 제외되었다.[35] 그래서 광해군이 영창대군에 비해 왕위 계승권이 떨어진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럼에도 광해군이 애를 먹은 건 선조가 광해군을 견제하기 위해 영창대군을 밀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 때는 이미 광해군은 장성한 왕자였고 왕후의 양자로 입적한 상태였다. 사실 광해군이 왕좌에 오르는데 애를 먹었던 것도 영창대군보다는 오히려 형 임해군 때문이 더 컸다. 명나라에서 왜 장남인 임해군을 왕세자로 삼지 않느냐고 딴지를 걸었기 때문. 그리고 당시 명나라에서도 왕위 계승에 문제가 있어서 그 결과 임해군 포지션의 황족이 제위를 계승한 탓에 광해군의 왕위 계승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물론 조선에서도 인간말종인 임해군의 왕위 계승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선택지였다.[36] 성종의 경우 한명회의 사위라는 정치적 배경도 있지만, 일단 제안대군이 너무 어린 탓에 승계 대상에서 탈락한 시점에서 다음 국왕은 예종의 장남 자격으로 입적되어야 하기 때문에 오히려 덕종의 차남인 자을산군 외에 선택지가 없었다. 적장자는 양자로 보낼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승계로 인해 제안대군과 월산대군이라는 잠재적 왕위 요구권자가 생긴 탓에 성종은 유능한 왕이긴 했으나 왕권 자체는 꽤 떨어져서 훈구파사림파의 갈등을 일으키거나 불씨가 되기도 하였다.[37] 이 때문에 인조가 추진한 정원군 추숭 문제는 꽤 많이 반대를 받았다. 선조와 인조라는 대통이 있는데 더이상의 추숭은 맞지 않다는 이유로.[38] 물론 그 적법이라는 게 민회빈 강씨를 어거지로 역모로 몰아 처리하고 소현세자의 아들들을 죄다 연좌시켜 제주도로 유배보내는 것이었다. 그런데 하여간 그렇게라도 명분은 만들었다는 점에서 이방석과 크게 차이가 난다. 다만 원래는 당연히 적법한 상황은 아니다. 장자가 사망하면 장손이 적통을 물려받는 거지 차자가 받지는 않는다.[39] 참고로 세종이 별 다른 조치 없이 바로 세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종법제에 비춰봐도 그게 맞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단순히 적장자가 사망하여 부재상태라면 적장손이 물려받는 것이 맞지만, 적장자가 자격을 잃어 폐해진 상황에서 유교 가치상 아들이 아버지를 제끼고 지위를 차지할 수는 없으니 아예 양녕대군 가계 전체가 폐세자와 함께 대종에서 탈락해버린 것으로 취급된 것이다. 후에 영조가 사도세자를 폐서인시켜놓고 사망하자마자 복위시켜준 것도 죄책감 따위가 아니라 세자-세손으로 이어지는 혈통의 정당성을 해치지 않기 위해서였다.[40] 당장 그 연산군도 중종을 죽이지 않았다. 중종도 장자만 아니었지 왕비에게서 낳은 적자였는데도 말이다. 그만큼 정통성에 차이가 많이 났기 때문. 반면 광해군은 영창대군을 죽였는데 이는 물론 근본적으로는 광해군의 잘못이기는 하지만 이건 선조가 먼저 분쟁의 씨를 뿌려놓고 갔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소북 유영경같은 자들이 부화뇌동한 거고.[41] 더구나 이때 동복동생 방연은 죽기까지 했다.[42] 물론 이는 후대 관점이고 당시 관점으로 보면 얘기가 다를 수는 있다. 당시 이방원은 아버지도 반대하던 정몽주 살해라는 행위를 저지른 적이 있는지라 보는 이에 따라서는 막가파처럼 비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정작 이방석 일파의 행보를 보면 그저 돼지 눈엔 돼지만 보인다 라고 해야 하겠지만...(당장에 정도전이 편법을 써서 이숭인, 이종학 등을 장살로 때려죽였다.)[43] 사실 이것도 말이 안 되는 게 정작 이방원이 정몽주를 살해하고 나서 이성계 앞에 나서자 이성계가 분노하여 이방원을 죽이려 했지만 정작 이때 신덕왕후는 이방원을 비호하였다. 그리고 이성계의 당여들은 다들 정몽주를 어떻게든 해야 한다는 점에는 동의하고 있었고 이는 온화한 성격인 이방과조차도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아무도 정몽주 암살을 실행하지 않은 것은 이성게의 눈치를 봤기 때문이며 그렇기에 사실상 막내지만 가장 시류를 읽는 눈이 밝고 정치적인 능력과 결단력도 좋은 이방원이 이 일을 실행한 것이다. 물론 이방원 본인이 왕조 변경에 적극적이기도 했고 자신의 권력 및 위상 강화를 통해 차기 대권을 노렸던 것도 있었겠지만 그게 다는 아니었던 것.[44] 이성계가 혼맥을 맺은 지윤이나 강윤성은 당대 이름있는 집안의 사람이었지만 우리가 익히 생각하는 권문세가는 아니었다. 되려 이성계의 사돈 집안 중 우리가 아는 끝판왕 권문세족은 부분적으로 서술될 충선왕 제정 재상지종 15가문에 추증된 여흥 민씨, 최영과 최영의 딸(우왕의 2비)이 속한 동주 최씨 역시 문벌귀족부터 시작해 권문가로 등극한 케이스이다.[45] 강씨와 이성계가 혼인할 시기에 곡산 강씨 집안의 가장 유력자는 강윤성이 아닌 강윤충이었고, 왕석기의 반란음모에 휘말려 숙청된 후에 처형당했다.[46] 당초에 택현이라는 것도 결국은 택현을 행할만큼 유능한 군주여야 가능하다. 그리고 그 이전에 선왕에게 자식도 없어야 한다. 그런 점을 고려하지 않고 겉모양만 따라하면 연왕 쾌 꼴이 난다.[47] 연왕 쾌는 종횡가 소대(소진의 아우)의 언변에 속아넘어가서(혹은 자지의 부하였던 대부 녹모수) 요와 순의 전통을 좆는다며 상국 자지에게 선양하겠다고 했지만 멀쩡히 태자도 있었던 상황에서 이런 짓이 용납될 리가 없으니 당연히 내전이 벌어졌다. 그 와중에 연왕 쾌는 결국 자살하게 되고 자지는 쳐들어온 제나라에 의해 거열형에 처해진다.[48] 사실 순도 요로부터 선양을 받은 것이 아니라 찬탈해서 왕이 되었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진짜 선양은 훨씬 더 나중에 가야 나온다.[49] 무엇보다 위에서 이방석이 세자가 된 것에 대한 변명을 보면 한마디로 '그래도 되잖아'이다.(요컨대 명분의 중요성을 그리 고려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신의왕후가 정처이고 신덕왕후는 후처지만 "첫 왕비는 신덕왕후니까 그래도 되잖아?" 이고 이방번 대신 이방석이 세자가 된 것도 "이방번은 결격사유가 있고 이방석은 그보다는 덜하니까 그래도 되잖아?" 이며 반대로 이방원이 왕자의 난 이후 굳이 정종의 왕세자가 된 것도 "굳이 그럴 필요가 뭐가 있어? 택현으로 해도 되잖아?"라는 말을 경계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래도 된다. 하지만 당연히 최선의 수와 차선의 수가 있다면 최선의 수를 고르는 것이 당연하다. 그래야 나중에 가서도 뒷말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당장 위에서 말한 대로 그 택현을 골랐다가 나라를 말아먹은 자의 예시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바로 세조이다. 당장 조선 초기 왕권과 국방력이 강력했던 조선이 그 왕권과 국방력을 깎아먹는 계기가 된 것이 바로 세조의 집권 때문이다. 명분이 없는데도 왕위에 올랐으니 믿을 놈이 없고 측근만 계속 써야 하니 이놈들이 말을 듣지 않아도 통제할 방법이 없다. 그놈들이 죽으면 그 다음이 자기 차례가 아니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 국방력도 마찬가지다. 자기 측근 아닌 놈한테 병사를 맡겨 놓았다가 무슨 일이 벌어질 지 어떻게 아는데? 택현으로 가면 이렇게 뒷끝이 좋지 않으니 명분을 쌓는 것이다. 괜히 태종이 정치 9단인 게 아닌 것이다.세조가 할아버지의 야심만큼이나 정치력도 물려받았다면 그 사단은 안났겠다.[50] 사실 세조는 유능한 인물로 결코 정치력이 없다고만은 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애시당초 정치력이 없었으면 계유정난을 성공시키지도 못했겠지. 그런데도 이 모양이 된 것은 결국 다 명분 문제에 귀결된다. 명분이 허약하니 제아무리 유능하다고 해도 결과가 이렇게 나오는 것이다.[51] 태종의 경우는 세조보다는 그래도 명분을 쌓기 좋았다. 개국한 지 얼마 되지 않기도 했거니와 형들 중에서는 왕위에 뜻이 없는 이들이 꽤나 있었기 때문에 다섯째인 태종에게도 기회가 돌아올 수 있었던 것.(물론 태종 본인이 태조의 아들들 중에서도 독보적으로 유능했던 것도 있다.) 당장 방과와 방의는 왕위에 뜻이 없었고 방간은 욕심만 많았지 능력은 없어서 실수라도 하지 않는 한 방간이 왕이 될 일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반면 수양대군에게는 모든 면에서(학문, 정치, 명분 등 말 그대로 모든 면이다.) 수양대군의 업그레이드 버전인 문종이라는 거대한 벽이 있어서 수양대군이 왕이 되기 위해서는 계유정난 외에는 답이 없었고 그나마도 문종에게는 어림도 없어서 문종이 병사한 후 어린 단종을 타깃으로 삼았다.[52] 위에서 말이 나왔기에 부연하자면 택현이 문제인 건 다른 게 아니라 종법제를 따르지 않음으로써 분쟁이 일어날 소지를 만드는 것 때문이지 단순히 적장자가 오르지 않아서가 아니다. 기본적으로 왕위 계승 순위(종법제)에 따라 다음 왕이 될 인물을 정하는 것이 가장 알기 쉽고 빠르고 왕권이 안정적이다. 그런데 모종의 이유로 그게 안 될 것 같으니 택현의 논리가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적장자가 왕위에 오른 것이 조선시대 고작 일곱 번이라고 하지만 택현은 그보다도 훨씬 더 적었다. 이외에는 설령 적장자가 아니더라도 종법제에 의해 순서를 정해서 그대로 왕위에 올랐다.[53] 애시당초 적장자를 올리지 않았을 뿐 엄연히 종법제의 논리에 따라 왕위를 계승하였기 때문에 적장자가 아니더라도 큰 문제는 없었다. 종법제에 따라 적장자-적장손-적장자의 다른 자손들-적자-적손-서자-서손 식으로 순서가 정해져 있었고 태종 이후를 보면 계유정난이나 인조반정 같은 사태를 제외하고 보면 대부분 종법질서에 따라 왕이 결정되었다. 예시로 선조-광해군만 봐도 광해군이 세자가 될 수 있던건 임진왜란 덕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임진왜란이 없었다면 서장자인 임해군이 왕이 될 수 있었냐면 임해군은 누가봐도 폐급이라서 그럴 일은 없었고 대신 동복동생이자 바로 아래 동생인 광해군이 주목받고 있었기에 위기상황+인망이 합쳐져 장남이지만 폐급인 임해군이 아닌 장남은 아니지만 바로 아래인 차남이고 자질있는 광해군이 세자가 된 것.[54] 호오거는 도르곤보다 연상이었다. 형의 아들이었던 만큼 나이차가 크지는 않았지만.[55] 즉, 순치제도 종법제를 따른 건 아니지만 결과적으로는 적장자 상속인 셈이다. 황후의 소생이 아닌 순치제가 적자인 이유는 황후는 아니지만 적복진의 소생이기 때문이다.[56] 실제로 택현의 논리로 왕위계승권을 정한 왕조는 대부분 형제끼리 숙청하는 경우가 많았다. 사실 말이 좋아 택현이지 실제로는 배틀로얄에 가까운 방식이기도 하고. 그나마 청나라의 경우는 내전이 일어날 뻔하다 최후에 타협이 먹혀들어가는 바람에 직전에 멈췄던 거고. 아예 택현에 가깝게 가장 센 놈이 황제가 되라는 오스만 제국은 황제가 죽은 뒤 형제들간의 내란국룰이었고 아흐메트 1세 이전에는 그 이후 형제들을 죽이는건 아예 명문화되어 있었다. 아흐메트 1세가 이를 고쳤지만 그렇다고 이전부터 있던 배틀로얄식 계승법을 바꾼게 아니라 형제들을 죽이지 말고 감금하는 것으로 바꾼 정도였다.[57] 훈요10조에서도 3조에서 적자적손 계승이 원칙이라고 박아놨다. 맏아들이 못났을 때에만 인망있는 자에게 승계가 가능할 뿐이나 이조차도 일단은 차순위 승계자가 우선이라고 명시했다. 고려시대의 3형제간에 돌려먹기(?) 해먹은 이들만 봐도 결국은 먼저 오른 순서대로 나이가 많다. 형제끼리 배틀로얄을 하던 혜종-정종-광종 시대나 그냥 정상적으로 승계된 덕종-정종-문종 시대도, 굴곡이 좀 있던 순종-선종-(헌종)-숙종 시대도, 혼란스럽던 의종-명종-신종 시대 모두 이것만은 공통적으로 유지되었다. 게다가 이들조차도 공식적으로 '황태제'를 책봉한 경우는 전무하고 대부분은 태자 부재 혹은 폐위 상태에서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 식으로 올랐다.[58] 분할 상속제가 많았던 중세 유럽도 영토의 상속이 그랬지 작위의 상속은 장자 우선이었다. 예시로 프랑크 왕국의 경우 영토는 3분할되었지만 프랑크 왕국이 가지고 있던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자리는 장남인 로타르에게만 돌아갔다.[59] 물론 현실적으론 힘 있으면 그만이었다. 당시 제후. 왕실들은 너나할거 없이 패륜이 일상이었기에 아버지 몰아내고 왕이 되었다고 제후나 타국 왕실들이 단결하여 반발할 일은 없었고 반발해봐야 밟아버리면 그만이었고 가톨릭교 역시도 인정해주었다. 애초에 근친혼을 기피하던 가톨릭교인데 당시 왕실들은 근친혼만 일삼은 점에서 찬탈 따윈 큰 문제는 아니었다. 오히려 찬탈 그 자체보다 찬탈의 명분과 조건이 문제였는데 당연히 현 왕과 아무 혈연관계도 없는 듣보잡 따위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고 정말 안 되면 어떻게 해서든 왕위 계승권을 가진 사람으로부터 그걸 넘겨받아야 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윌리엄 1세였다. 둘째는 어쨌든 그럴듯한 명분은 있어야 했다. 그러니까 어느날 갑자기 왕위를 계승하는 중입니다를 할 수 없었고 억지 명분이라도 짜내야 가능했다. 그러나 이 두 가지가 충족되면 몰아내려는 대상이 자기 아버지라도 상관없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리처드 1세.[60] 그러나 앞의 사례들은 어디까지나 왕조 내부에서의 찬탈이었다. 혈통 자체를 갈아버리는 역성혁명은 선거군주제가 아니면 동아시아보다도 찾아보기 어려웠다.[61] 영국의 노르만 왕조와 플래테저넷 왕조, 튜더 왕조, 스튜어트 왕조, 하노버 왕조, 윈저 왕조는 직계 후손이 물려받은 것이 아니라 왕조명이 바뀐 것일 뿐 실제로는 한 핏줄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프랑스의 카페 왕조와 발루아 왕조, 부르봉 왕조도 마찬가지. 심지어 부르봉 왕가의 루이 16세는 처형당할 때 호명된 이름이 루이 카페였다.[62] 다만 이 사례들의 문제라면 왕조 내의 일은 맞고 역성혁명도 아닌건 맞는데 그렇다고 해도 심한건 맞다. 물론 근친혼이 잦고 하다 보니 의외로 순번이 꼬이는 경우가 많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서양이 종법제 수준으로 절대적으로 1번, 2번, 3번 딱딱 정하는 원칙이 있는 것도 아니다 보니 일단 왕과 혈통적으로 가깝다면 너도나도 도전할 수 있는 상황이 된거다. 종법제에 따라 계승한 조선에서는 상상도 못하고 어쩌다 해도 그 후폭풍이 오지게 닥치는 것과는 대조점이다. 물론 서양 역시도 후폭풍이 없지는 않았지만 여기는 어차피 너나없이 군침을 흘리는지라 정상적으로 계승하든 아니든 시달리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절대왕정 시기쯤 되면 정말 왕이 시퍼렇게 살아있는데 왕위 내놔 식은 줄어들게 된다.(보통은 왕이 죽고 난 뒤 그 후계자에게 딴지를 거는 식으로 하게 된다.)[63] 사실 유럽 쪽도 정상적인 적장자가 있으면 이렇게 혼란한 왕위계승 문제가 벌어지는 일은 드물었고 대부분 어디까지나 선왕의 후계자가 없거나 일찍 죽었기 때문에 벌어진 것이다. 그리고 유럽이 아시아보다 더 왕위계승 문제가 불궈진 것은 결국 원칙이 아시아처럼 철저하지 않고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처럼 원칙이 혼동되기 쉬웠던 탓이 컸다.[64] 이후 3세기가 지난 18세기, 성리학적 질서가 강화되어 사회가 안정을 누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왕실의 승계율이 붕괴되는 상황은 조선 사회를 그야말로 재앙으로 몰고 갔다. 효종의 승계와 지위 문제로 촉발된 예송논쟁과 이를 둘러싼 붕당 간 대립은 당대에는 나름 평화적으로 해결되었다지만 결국 숙종 대 환국정치의 발단이 되었고, 그나마 2대 적장자의 정통성을 갖추고 강한 왕권을 휘둘렀던 숙종이 자신의 후계자인 경종의 교체 의사를 내비치자 기어이 피로 피를 씻는 경종 대 대옥사가 벌어졌으며, 이는 다시 임오화변에도 (노론음모설과는 별개로) 영향을 미쳤다. 이런 난장판을 수습하겠다며 정조가 시도한 준론 탕평은 결국 견제장치 없는 권력을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후계자인 순조가 덜컥 물려받으면서 마침내 붕당체제가 양반으로 보일 세기말적 세도정치로 이어졌다. 그나마 원래부터 시스템이 갖춰져 있기에 예송논쟁만 해도 타국에서는 내전으로 벌어질 수 있는 일임에도 그때는 그냥 논쟁으로 끝났고 이후에도 왕위 계승과 관련된 내란은 딱 하나 이인좌의 난 정도였다. 그와 별개로 역모가 많긴 했지만 역모의 경우 권력이 없는 쪽에서 빼앗기 위해 아무 왕족 하나 일단 지명해두고 하는 식인지라 계승 순서는 그들에게 중요하지 않았다.[65] 무엇보다 유교는 정통성을 매우 중시한다. 애초에 유학을 창시했다 여겨지는 공자부터가 옛 주나라 질서로 돌아가자고 외친 사람이다.[66] 태종도 세종대왕의 자질을 알고 있었지만 본인이 5남이라는 한계를 극복하고 왕이 되는 과정에서 숱하게 피를 흘린 탓에 중대한 결함이 발생하기 전까지는 아무리 못마땅해도 적장자인 양녕대군을 계속 세자로 놔뒀던 것이다.[67] 막내아들이 상속하는 것[68] 이방우가 설령 진짜 고려 왕조의 충신이라 해도 왕실 입장에서 왕의 적장자가 개국 반대세력이라는 사실은 매우 부담스러운 문제였다. 그럼에도 조선 왕실은 그냥 이방우를 전 왕조의 충신으로 인정하는 길을 택했다.[69] 하지만 한씨의 사망 자체는 큰 걸림돌이 아니다. 그렇게 따지면 목조, 익조, 도조, 환조로 추숭한 조선왕조의 조상들은 대체 뭐란 말인가?[70] 예시를 들어서 설명하면 성종폐비 윤씨를 쫓아낸 후 새 왕비를 들였는데 그렇다고 폐비 윤씨 소생의 연산군이 서자로 격하되고 새 왕비 소생의 진성대군(중종)이 유일한 적자 자격으로 세자가 되지는 않았다. 중종 역시도 정실 소생이었기에 적자 자격은 얻었지만 이미 그보다 더 높은 서열인 연산군이 여전히 세자 자리를 유지했다. 그나마 성종이 폐비 윤씨를 후궁 자격으로 내치는 조치를 취했다면 달라질 수 있겠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비록 성종이 나중에 가면 폐비 윤씨를 매우 증오하긴 했어도 그렇게 윤씨를 내치게 되었다면 아무리 그래도 삼사에서 틀림없이 달려들어 태클을 걸었을 것이다. 애초에 이미 연산군은 세자 전인 원자로 책봉되기도 해서 무를 수도 없었다.[71] 그리고 신덕왕후가 정실이라는 이유로 신의왕후 소생을 모조리 서자로 내칠 수 있는지도 의문이다. 태조는 결혼을 두 번 했는데 신의왕후 한씨와는 그녀가 15세 때인 1352년경에 결혼했고 신덕왕후는 출생부터가 이보다 4년 뒤인 1356년생이며 태조와 언제 결혼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당대 고려의 평균 결혼 연령이 여자 기준 16세 무렵이라고 하니 1368년경이 가장 낮춰볼 수 있는 시기다. 그런데 이 때는 이미 5남인 이방원도 태어났다.(1세) 즉 태조가 신덕왕후와 결혼했을 무렵에 적어도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은 모두 태어났을 것이고 때문에 과연 그저 신덕왕후가 정실이라는 이유로 신의왕후가 유일한 아내이던 시절에 태어난 왕자들이 적자 취급 못 받는게 말이 되냐는 것이다. 명백히 혼례를 치렀고 그 이외 아내가 없으면 당연히 그 아래 자식들은 어딜봐도 적자다. 물론 당시 사정상 경처와 향처라는 개념 때문에 전자쪽에 무게가 실리긴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현실적인 사정'이고 그런걸 고려하지 않는 '명분' 측면에서 보면 신의왕후 소생은 당연히 적자다. 오히려 명분으로 치면 신의왕후가 살아있었다면 당연히 신덕왕후는 후궁이고 그 소생은 서자다. 신의왕후가 죽었으니 정실, 적자의 자격이라도 생긴 셈.[72] 애시당초 태조의 가문인 전주 이씨는 고려에 귀순하기 전까지는 함경도 지방을 근거지로 하면서 집안 내 다툼이 굉장히 잦았다. 그리고 대부분은 힘이 센 편이 가문의 헤게모니를 잡았고(당장 이성계도 배다른 형이자 적장자인 이원계가 있었는데도 집안의 헤게모니를 본인이 쥐었다.). 그렇다보니 태조도 신덕왕후와 그 자식들에게 가문의 계승권을 넘겨주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던 듯하다. 물론 일개 가문이 아니라 왕가인 이상 당연히 그런 생각이 통할 리가 없었지만 태조는 이를 간과했다.[73] 이 경우 후자일 가능성이 클 수도 있는데 단순히 '모른다' 정도로는 납득이 되지 않기 때문. 태조와 함께 조선을 개국한 신진사대부 세력은 모두 유학으로 무장했는데 모른다면 이들이 나서서 아니되옵니다 라고 외치면 되는 일이다.[74] 굳이 찾자면 형 이방번이 난폭해서 이방석을 택했다는 것 정도인데 이건 동복형을 제낀 이유는 될 수 있어도 여럿 있는 다른 이복형들을 제낀 이유는 되지 못한다.[75] 특히 사대부들과 왕족들. 거의 대부분의 왕족들이 태종에게 붙었다. 심지어 이성계의 최측근인 이지란, 그리고 신덕왕후의 친척들조차![76] 물론 이방간이 반발해서 2차 왕자의 난이 벌어졌고 조사의의 난이 있긴 했지만 그건 이것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이다. 이방간의 거병 명분은 태조 조차도 씹어버릴 정도의 개소리였고 조사의의 난은 그저 태조 개인의 복수심과 권위로 밀어붙였을 뿐이지 동북면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호응도 없었으며 그나마도 태조의 신병이 확보되자마자 난은 흐지부지되어버린다.[77]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두 난은 조선의 지배층인 사대부들이 일으키거나 동조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2차 왕자의 난은 이방간이 자기 몫을 내놓으라고 주제넘게 달려들었다가 깨갱한 것이고 명분따위 당연히 없었다. 조사의의 난은 태조가 일으키긴 했지만 정작 선비들은 태조를 따르지 않았고 결국은 함경도 일부에서만 소란스러웠을 뿐이고 결국 태종이 태조를 확보하자마자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만약 조선의 양반들이 들고 일어났다면 절대 이런 식으로 흘러가지는 않았을 테지만 태종의 치세는 너무나도 평온했다.[78]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지만 간접적으로는 당연히 영향이 있다. 세조가 무리하게 계유정난을 일으킨 탓에 왕권이 추락했고 이를 만회하기 위해 무리하게 중앙집권화를 추진한 탓에 손해를 본 지방호족들이 분기한 것이 이시애의 난이다. 특히나 동북면은 이성계의 연고지로 풍패지향이라 불리며 전주 이씨에 절대적인 지지를 보냈다, 비록 태종과 세종때부터 왕실에 반감이 들긴했어도 조사의의 난같은 특이한 경우를 제외하면 난을 일으킬정도까진 아니였다.[79] 원래 정통성없는 정권이 즉위하면 제일 날뛰는 게 바로 이런 흔히 친위세력이라 말하는 측근들이다. 아무리 패악질을 부리더라도 이 놈들은 다 한 배를 탄 거나 마찬가지이므로 없으면 당장 목숨을 위협받기 때문.[80] 물론 이것도 그냥 그럴 지도 모른다는 썰일 뿐 실제로는 이미 태조의 정치적 능력은 완전히 거세된 거나 마찬가지였으므로 태종이 태조의 눈치를 볼 이유도 필요도 없었다. 오히려 태조는 태종이 대놓고 신덕왕후와 이방석의 지위를 격하시키는 것을 보면서도 어떻게 손을 쓸 방법이 없어서 그저 가슴앓이를 할 뿐이었다.[81] 이것마저도 가장 위험한 순간의 태조를 구했기에 원래라면 흠잡힐 일도 아니다. 오히려 자기 손으로 죽여놓고 다시 자기 손으로 명성을 복구시킨 태종이 특이한 거지.[82] 반면 세조의 경우 단종은 아버지 문종이 세종의 적장자였고 단종 역시 문종의 적장자였으므로 둘째에 불과했던 세조 따위와는 정통성 면에서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탄탄했다. 그리고 이 차이를 뒤집기 위해 세조는 엄청난 무리를 해야 했고 이는 훈구파 탄생에 기여하기도 하였다.[83] 그도 그럴 것이 실제로 자신의 서자가 원자라 칭해지면서 파동이 일었다.[84] 십이 사군 시대가 열리기 전에는 아버지의 명령으로 응오 왕조의 군주인 응오쓰엉반에게 볼모로 잡혀가기도 했고 이 때에 응오 왕조의 왕들이 딘리엔의 목숨을 놓고 딘보린을 협박했는데 딘보린은 딘리엔에게 화살을 쏘게 했다. 그러다가 응오쓰엉반이 죽고서야 돌아갈 수 있었다.[85] 이행리: 4남, 이춘: 4남/최씨의 2남[86] KBS 대하드라마 정도전에서도 이 점을 파악했는지 세자 책봉 문제를 두고 태조가 여진의 말자상속 문화를 언급하기도 한다.[87] 참고로 칭기즈 칸 사후 오고타이 칸이 즉위한 것은 아무렇게나 결정한 건 아니고, 사실 장남 주치에게 심각한 결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칭기즈 칸의 정처 보르테가 메르키트족에게 납치되었다가 이후 돌아왔을 때 임신한 채였던 것. 그래도 칭기즈 칸은 자신의 약함을 한탄했을지언정 주치 본인은 쿨하게 자기 아들로 받아들였고 칭기즈 칸과 주치 사이에는 그 어떤 앙금도 존재하지 않았지만 차남 차가타이와는 그렇지 않았다. 차가타이는 형 주치를 메르키트 종자라고 불렀고 당연히 이 두 형제(?) 사이는 최악이었다. 그래서 칭기즈 칸은 이 둘 중 한 명을 자기 후계자로 삼았다가는 자기가 죽는 그 즉시 내란을 벌일 것이 뻔하다고 생각해서 성격이 온화한 오고타이 칸을 대칸으로 지명한 것이다.[88] 당장 이성계조차도 고려 벼슬을 하게 되자 개경에 가서 개경 여자를 후처로 맞이했으며 5남이 최연소로 과거에 급제하자 덩실덩실 춤을 추고 (급제했다는)증명서에 절을 했으며 방문한 손님들에게 이를 보여주고 자랑했다고 한다.[89] 도조 이춘의 계처가인 한양 조씨 집안이 정강의 변 때 북송에서 넘어온 집안이라 조금 애매하긴 하지만 적어도 여진이나 몽골계는 아니다.[90] 이천계의 정체에 대해서는 이자흥의 친아들이 맞다는 설과 원래 이원계의 동복동생인데 이자흥의 친자가 죽은 후 이자흥 밑으로 입적되었다는 설이 대립한다. 세조실록에서 이천계가 태조의 서제라고 밝힌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다만 고종대에는 이천계가 이자흥 소생이 맞다고 결론내렸다.[91] 여기까지는 이송, 이원계가 일찌감치 중앙조정에 출사하던 것과 비슷한 테크라고 볼 수 있다.[92] 이자춘 문서에도 언급되어 있지만 이원계가 서장자라는 것은 진짜 서자인 이화와 달리 항렬자를 사용한 점을 봤을 때 조선 왕실의 윤색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93] 보통 왕조국가는 정국의 안정을 위해서 나이로 형제 간의 왕위계승 서열을 구분하고 장자 계승을 실시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뭐 고려 태조 왕건처럼 제대로 준비를 안 하고 적장자 계승을 밀어붙였다가 후계자가 오히려 낭패를 본 경우도 있지만,[189] 적장자 계승을 제대로 지키지 않아서 나라 말아먹는 경우의 리스크가 더 컸다.[94] 계유정난 역시 단종의 할머니인 소헌왕후와 어머니인 현덕왕후가 연속해서 사망한게 수양대군이 쿠데타를 일으킬 수 있는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했다.[95] 양녕대군은 대놓고 계유정난을 지지했고, 계유정난에서 비롯된 조의제문 사태는 무오사화라는 피바람을 불러일으켰다. 이인좌의 난효종의 증손영조 대에 소현세자의 증손(!)인 밀풍군을 내세웠으며 밀풍군의 동생 밀운군마저 역모에 연루되어 죽었다. 소현세자의 죽음으로부터 이인좌의 난까지는 무려 1세기 가까운 세월이다.[96] 물론 다른 형제들도 정몽주 암살에 찬동하기는 했지만 책임은 이방원 혼자 오롯이 뒤집어쓴다. 정몽주 암살에 가장 적극적으로 행동한 것이 이방원이다. 하지만 방원의 입장에서 보면 정몽주의 존재는 조선 개국에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상황이었는데 이성계든 정도전이든 아무도 손도 쓰지 못하고 있던 터라 결국 방원이 나서서 손에 피를 묻힌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조선 개국을 안 한 것도 아니고 할 건 다 해놓고 이제와서 넌 정몽주를 죽였으니 안된다는 식이면 당연히 어이가 없을 노릇이다. 백주대낮에 상갓집에서 나온 사람을 다른 사람들 다 보는 데서 때려죽였으니 할 말이 없긴 한데 정작 여기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흥안군 이제나 의안백 이화는 멀쩡히 공신에 책봉되었다. 심지어 태조도 정몽주를 죽인 것에 대한 질책은 하면서도 아들이 준 기회는 그대로 받아먹었다.[97] 이 자질도 강희제의 조모이자, 순치제의 생모이고, 홍타이지의 적복진이었던 효장문황후가 공인하고 뒤에서 버텨주었기에 인정받았다. 심지어 강희제는 5살 때부터 차기 군주로서 엄격한 교육을 받으며 성장하였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을 때도 순치제의 유지와 각지의 신료들과 친왕, 군왕들이 한데 모여 후사를 논의한 끝에 황위에 오른 것이다. 나이도 형제들 중 가장 어린데다 능력도 검증이 안 된 상태에서 친모 신덕왕후의 총애만으로 덜컥 세자에 책봉된 이방석과는 차원이 다르게 청나라 전체가 강희제의 권위를 인정한 상황이었다. 그런 강희제조차도 나이 어릴 때는 구왈기야 오보이의 전횡을 제어하지 못하다가 16세가 되어서야 친위 쿠데타를 통해 오보이를 숙청하고 진짜 황제로서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는데 오보이 같은 방계왕족과 공신들이 수두룩한 조선초기라면 말할 것도 없다.[98] 앞에서도 살펴보았지만 태조는 놀라울 정도로 세자 책봉에 있어 적장자 세습의 원칙에 대해 고민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다시 말하지만 정도전조차도 처음에는 나이와 경력에 따른 책봉을 건의했다가 태조가 강씨의 아들을 하도 강력하게 주장하자 데꿀멍하고 입을 닫았을 정도며, 방석 책봉에 뽐뿌를 넣는 악역은 정도전이 아니라 배극렴에게 돌아갔다. 왕 옆의 간신 제거라는 명분을 내세운 이방원 입장에서 차라리 태조가 적장자 세습을 고민하고 강씨나 죽은 정도전이 이를 부추기는 그림이 훨씬 자신에게 유리했을 텐데도 실록은 정도전이 죽기 전까지는 일관되게 강씨 아들의 책봉이 태조의 의지였다고 서술하고 있다. 어쩌면 자신과 같은 무장 출신의 방과가 공신들에게 휘둘리는 미래가 자신의 모습과 겹쳐보였을지도 모른다.[99] 태조는 일단 약 73세(72세 7개월여)에 사망하여 역대 조선왕 중 2위의 장수기록을 가지고 있다. 1위는 영조(83세), 3위는 고종(67세), 4위는 광해군(66세), 5위는 아들 정종(62세)이다. 그런데 잘 보면 순위권들 중에서 태조 밑으로는 나라가 망해서 당구치며 여생을 보내다가 죽거나, 반정으로 쫓겨나 유배지에서 할일없이 노닥거리다 죽거나, 2년간 실권 없는 왕 노릇 하다가 뒷방으로 물러나서 격구나 치고 유람이나 다니며 인생 즐길만큼 즐기다 죽은 케이스들이다. 독보적 1위인 영조는 조선사에 길이 남을 건강관리법으로 유명하다(...) 사실 태조도 만 6년의 재위 기간보다 만 10년에 가까운 태상왕 시절이 훨씬 길었고, 원래 강골인 몸이 원치 않게 정치 스트레스에서 일찍 벗어난 덕에 저만큼 장수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설령 신덕왕후가 그렇게 빨리 죽지 않았다 해도 태조 본인이 어린 세자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 노심초사하는 나날을 지속했다면 무인년의 그 병환이 언제 어떻게 커져서 태조를 저세상으로 이끌었을지 모르는 일이다. 거기다 어차피 태조는 즉위할 때만 해도 50대 중후반이라 몇 년 뒤부터는 언제 죽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100] 대군들에게 연회를 베풀거나 도성 밖에서 어가를 맞이하거나 법회를 열게 하는 정도가 전부다.[101] 좀 변호하자면 이 시기에는 흔히 알려진 세자교육의 커리큘럼이 없었다. 즉 이방석은 조선의 첫 세자였던데다 개국 초인 만큼 흔히 알려진 커리큘럼을 그대로 받을 수 없었다.[102] 그럴 만도 한 게 왕실의 후계자 교육이라는 것은 원·세자가 5살이 되면 강학청을 설치해서 조기교육으로 체화시켜야 할 정도로 빡빡한 커리큘럼이었다. 그걸 10살이 되도록 호랑이 같은 형님들을 두고 권신의 막내둥이로 어리광부리며 자유롭게 지냈을 방석이 소화하자니 죽을 맛이었을 것이다. 조선왕조를 통틀어 이방석 외에 10세가 넘어 원자 혹은 세자, 세제로 책봉된 사례는 정종(만40세)(!), 태종(만31세), 세종(만21세), 의경세자(만19세), 광해군(만17세), 소현세자(만11세), 효종(만26세), 영조(만27세)의 8명이다. 그런데 이 세자, 세제들은 효종 정도를 제외하면 이미 혈통이나 야심, 재능 등등 여러 가지 요인으로 후계자로 거론은 되던 사람들이다. 의경세자조차도 왕위에 욕심 만땅인 세조가 잠저에서부터 후계자로 키워왔던 장남이고 효종은 형인 소현세자가 묵던에 인질로 간 이래 줄곧 아버지 인조와 정치적으로 갈등관계에 있어 어느 정도 낌새는 있었다. 정말로 이방석처럼 아무 준비도 없이 덜커덕 세자가 된 사례는 찾기 어렵다.[103] 일례로 세종이 수양대군에게 활자 간행에 참여하도록 한 것이 그가 만16세 때였다. 문종은 세종이 하도 몸이 안좋아서 이미 10대 초반부터 툭하면 사신을 접대해야 했다. 당장 이방석의 형인 이방번도 13살에 삼군부 절제사 노릇을 했고, 무인정사 직전에도 한창 진도훈련에 투입되었으니 세자 역시도 군사훈련 등에 얼굴을 내밀게 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런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104] 이와 대조적으로 단종의 경우는 실록에 단종이 나름 왕으로서 뭐라도 해보려 했다는 기록이 제법 남아있다. 그 실록이 계유정난을 미화하는 내용이라서 비판을 받는 단종실록인데도 말이다.[105] 다만 이조차 완벽하지는 않다. 신진사대부권문세족은 딱딱 정확히 나눌 수 없어서 권문세족이라 하더라도 성리학을 익히고 성리학을 따르면 그게 신진사대부였고(대표적으로 조준) 신진사대부라 해도 권문세족에게 숙이고 들어가면 그게 곧 권문세족이었다.(대표적으로 염흥방) 거기다 서로 인척으로 얽혀있는 경우도 많아서 권문세족을 완전히 배제하려고 하면 신진사대부들도 불만을 가졌을 것이다.[106] 훗날 명종이 외삼촌 윤원형을 숙청하긴 했지만 어머니 문정왕후가 죽은 이후에나 가능했다. 그나마도 파직에 그쳤고 아예 확실하게 조지라는 백관의 주청을 계속 묵살하며 자살에 이를 때까지 내버려두기만 했다.[107] 물론 이 점은 이방원 측도 비슷했다. 그에게는 고려의 구세력(우현보) 등도 있었으니까, 그러나 이방원이 이방석과 다른 점은 그런 이들이 있어도 이들을 휘어잡을 정도의 정치력이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방원이 내세우는 종법에 따른 승계는 그 자체가 성리학 정치이념의 근간으로 오히려 조선왕조의 건국이념과 개혁의 방향을 되새기는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108] 때문에 이방원도 일단은 공식 적장자인 형 이방과를 얼굴마담으로 세우고 그 양자로 들어가는 형식을 취해 사대부들의 지지 혹은 묵인을 확보하려 했던 것이다.[109] 본인의 복권은 불발되었지만 이미 태종 대부터 가족들이 복권되고 본인의 정책이 수용되며 문집이 멀쩡히 간행되는 등 사실상 복권에 가까운 조치들이 잇따랐다. 당장 그가 집필하던 경국전부터가 지속적으로 국책사업으로서 진행되었다.[110] 하지만 그랬다간 오히려 고려 구세력의 반발이 더 커서 문제가 더 심각했을 것이다. 당장 구체제라고는 하지만 대체 뭘 가지고 구체제라고 해야 할 지 의문이기도 하고. 고려에 종사했던 인물들을 전부 쫓아낼 수는 없는 노릇이고 조선 건국에 반대한 자들은 이미 살해되었거나 쫓겨난 지 오래였다. 오히려 두문동 전설도 있듯이 고려의 구세력도 포용하는 편이 훨씬 나았다. 그쪽이 백성들의 신망을 모으기도 쉽고. 조선 건국의 주역인 신진사대부조차 고려 구세력으로 여겨졌던 권문세가와 사실상 큰 차이가 없지 않냐는 말이 나오는 판국이다.[111] 반대로 명분은 그래도 충분했지만 엄연히 황제였던, 그것도 적장손으로서 황태손까지 거친 조카를 상대로 난을 일으킨 영락제는 상당히 많은 사람들을 죽여야 했으며 개중에는 자신의 회유에도 불구하고 넘어가지 않고 죽은 이도 많았다.[112] 후술하겠지만 이들은 사실 집안만 권문세족이지 사상은 이미 성리학을 배운 사대부 세력이었다.[113] 이들의 공통점이라면 그저 권문세가 같이 잘나가는 집안 출신으로서 성리학을 공부했다는 점 뿐이다. 즉 정도전 등과는 성리학이라는 키워드로 통하는 면이 있지만 그 외에는 생판 다른 이들이다.[114] 이와 관련하여 사대부 항목에 있는 실체 관련 논점도 같이 참고해보면 좋다. 당연히 조준, 권근, 민제, 김사형 등은 방원 편에 붙거나 나중에라도 합류했다.[115] 4명 왕자들의 처가마다 처남, 동서가 두셋씩만 있어도 벌써 10여개 가문이 얽힌다. 당장 이방원만 해도 처남 4명에 처형 2명, 처제 1명이었으니 이들의 처가, 시댁과 처외가까지만 쳐도 이방원 한 사람의 안위에 이미 9개 가문의 목숨줄을 깔고 시작하는 싸움인 것이다.(사실 동서 중 하나는 사촌형인 이천우였지만) 이래서 혼맥이 무서운 것이다.[116] 애초에 정몽주 등 온건파 사대부들에 맞서 역성혁명을 지지하고 실행한 이들 자체가 강경파 사대부였다. 정도전은 그 강경파들조차 고개를 저을 정도의 초강경파였다.[117] 그래도 순치제홍타이지의 유일한 적자라는 명분은 있었다.(정확하게 말하면 공인된 복진 5명의 소생 중에서 장남이였고, 다른 복진이 낳은 남동생이 하나 있었다.) 다른 아들도 있긴 했지만 다들 서자다.(그래도 서장자 호격 같은 경우에는 나이상 숙부인 도르곤과 비슷한 연배에 여러 전공을 세운 사람이기에 후계자 다툼시 홍타이지의 측근세력들에 지지를 받았다.) 사실 홍타이지 사후 이러한 후계 분쟁이 생겼던 이유는 누르하치가 어느 정도 세력분배를 하고 난 이후이지만, 누르하치가 급사한 상황에서 홍타이지가 공동 통치자인 다른 형제들을 제거하고, 자신의 독재권을 확립한 것에서 불만이 나왔던 것이다. 여기에 홍타이지 본인도 갑자기 급사를 하면서 혼란이 커졌는데, 홍타이지는 후계구도를 명확하게 정하지도 않은 상황이였다.(원래의 팔기의정에서 황제 중심의 행정체제로 변신하면서 두 체제 간의 간극이 생겼다. 홍타이지는 이를 자신의 능력으로 커버했으나, 사망하게 되자 누르하치의 방식대로 후계자를 팔기의정에서 선출하고자 했다.) 그러나 당시 누르하치의 마지막 정실이던 아바하이의 소생들(원래대로라면 이들은 누르하치의 유일한 적자였으나, 홍타이지와 그의 이복형제들에게 압박받아서 아바하이는 순장당하고(활시위에 목을 졸려 죽었다고 한다.) 도르곤 형제는 강제로 칩거해야 했다. 이후 도르곤과 도도는 홍타이지가 불러내면서 이복형 휘하에서 많은 전공을 세워서 팔기 중 2기를 장악하게 되었다.)이 팔기의정에서 다음 후계자로 선출될 가능성이 높아지게 되자, 홍타이지의 측근세력들은 유언에서 아들로 후계를 삼으라고 했다고 하며 호격을 중심으로 뭉쳤다. 이러한 분란이 커질 위기에 이르게 되자 도르곤은 자신과 호격의 후계지위를 포기하고, 홍타이지의 인정받은 복진의 소생 중 연장자인 복림을 즉위시키자고 하고, 당시 가장 원로였던 홍타이지의 이복형 다이샨이 자신 대신 도르곤과 지르갈랑을 신황제의 섭정인으로 추천하여 결국 통과되었다.[118] 현빈 유씨가 내시 이만과 간통한 혐의로 내쫓겼다는 내용은 정황상 그렇지 않을까 하는 추측이지 확정된 사실이 아니다. 실록에서는 그냥 어느 날 유씨가 폐출되고 이만이 참수 당했다. 이후 다들 대체 이유가 뭐냐며 시끄럽자 태조가 역정을 내며 이를 논한 대간들을 잡아 가두도록 했다고 기록했을 뿐이며 간통 혐의라느니, 정치적 의도에 적합한 새 세자빈을 맞기 위해서라느니 하는 것은 모두 추측의 영역이다.[119] 백제나 신라의 왕릉들이 수도 내에 위치한 경우가 여럿 있지만 이 시절의 공주, 부여, 경주는 본격적인 성곽도시는 아니었다. 공주는 백제의 도성 위치가 아직까지는 불분명하지만, 후보지 중 한 곳인 공산성이라면 성밖에 조성한 것이 되는 것이고, 부여는 확실히 나성 밖에 묘지들을 조성하였다. 경주는 4~5세기 조성된 무덤들이 경주시내 한복판이기는 한데, 이시기 왕성이 어디인지는 불명확하다. 대채로 월성을 통일 이전까지 왕성으로 보는데, 역시 성밖 인근에 조성한 것이 되고, 신라 중대 이후에는 주변에 산지에 무덤들이 조성된다. 반면 본격 성곽도시인 송악을 도읍으로 삼은 고려는 도성 바깥에 왕릉을 썼다.[120] 물론 신덕왕후의 친가인 곡산강씨 집안은 여러모로 보복을 당하긴 했다. 하지만 당장 신덕왕후의 친가만 해도 오빠인 강계권이 직첩과 전민을 몰수당하는 정도에 그쳤다. 이종조카들의 경우도 신극례의 큰형인 신극공과 같은 항렬의 신극온이 직첩과 전민들을 회수당한 것 외에 처벌받은 이력이 전무하고, 그 신극공도 태종 13년에 풍패지향인 완산부윤으로 화려하게(?) 부활한 모습이 기록된다.(부윤은 비록 지방직이지만 지방관 중 가장 높은 직위로 품계만 놓고 봐도 2품에 특례시장급이며 지방직 중에서는 거의 관찰사에 버금가는 고위직이다. 특히 완산(전주)은 왕가의 본향이라 하여 단순한 지방 대도시가 아니라 거의 부수도에 가까운 투자를 받았다. 오늘날로 치면 그냥 제2의 도시인 부산시장이나 손꼽히는 대도시 중 하나이며 그 중에서도 서울과 가까운 인천시장 같은 자리에 앉혀준 셈이라 할 수 있을듯. 아니면 그리 큰 도시는 아니지만 대통령의 고향에 임명된 것이라거나. 현대에도 대통령 고향 지역구에 누가 공천되는지는 초미의 관심사이다.) 종친, 그것도 당숙인 순녕군 이지마저 투옥 후 귀양보낸 마당에 고작 직첩과 전민을 몰수하는 것으로 끝났다는 것은 매우 온건한 처분이었다.[121] 이제나 경순공주, 이제의 아버지인 이인립 모두 생년을 알 수 없다.[122] 태조실록 권1 원년 8월 20일[123] 태조실록 권5 태조 3년 2월 29일[124] 다만 이방원이 밀려났다고 보기에는 약간의 어폐가 있는 것이 전라도는 전주이씨의 본적지라고 할 수 있는 全州가 있는 곳으로 중요도가 있는 곳이였다.(전주의 경기전에 조선이 망하고 난 오늘날까지도 태조 이성계의 초상이 그냥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실질적인 권한을 빼앗기는 것이기에 신덕왕후의 소생들에게 힘을 몰아 주겠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125] 시기가 명시되어 있지는 않으나 기사의 서술을 볼 때 대강 이방번이 좌군절제사가 된 1393년쯤의 일로 보인다.[126] 월탄 박종화의 작품인 소설 세종대왕, 그리고 이를 원작으로 한 용의 눈물에서 이 부분이 꽤 살벌하면서도 유머러스(?)하게 묘사되어있다. 정도전 일당이 왕자들을 지방에 분봉하자고 건의하여 태조가 대신들을 모아 의견을 묻는데, 자리에 참석한 정안군의 장인 민제는 손바닥만한 나라에서 이게 무슨 소리냐며 황당해 했고, 정안군과 손을 잡은 하륜은 대번에 "그거 천자만 하는 건데 명나라에는 어떻게 설명하시게요?"라고 했다. 이에 다급해진 정도전 쪽에서 "아니 뭐 꼭 분봉까지는 아니어도 절제사 같은 걸로 내려보내서 경험도 좀 쌓게 하고 왕자들끼리 왕실도 수호하고요" 라며 둘러대자 역시 하륜이 "그랬다가 왕자들이 반란 일으키면 어쩌려고?"라고 받아쳐 정도전도, 태조도 아무 말도 못했다. 실제 역사에서도 왕족들을 경계해서 지방으로 보냈더니만 지방으로 내려간 왕족들이 난을 일으킨 사례도 있다.[127] 애초에 정몽주에게 정치적으로 당해서 귀양도 가고 목숨도 잃을 뻔했다. 이방원이 아니었으면 본인 뿐만 아니라 본인의 당여들까지 싸그리 박살나도 어찌하지 못할 정도로 정도전의 정치력은 만렙급은 아니었던 것.[128] 정도전의 정치력이 떨어진다는건 이미 개국 전부터 드러나서 반대진영을 공격하려는 계획을 세우다 정보가 누출되는 실수를 저질러 역으로 공격받기도 했다.[129] 이 과정에서 홍무제는 정도전 파벌이면 억류하거나 죽이고 그의 반대파나 중도파면 우대해 자신의 뜻을 전한다.[130] 이때 태조는 권근이 노모가 계시는데도 스스로 자원하여 명에 가는 것에 고마워서 노자까지 두둑히 주어 그를 배웅했다.[131] 이것이 이렇게 크게 작용하는 것은 표전문 사건때 홍무제정도전을 꼭집어서 오라고 명령하면서, 당시 파견된 사절단과 이후 사건을 해명하러간 사절단들을 억류하거나 죽여버렸다. 이에 명나라의 수도 난징까지 가는 길이 어렵고 힘든 것은 둘째치고 가면 무자비한 홍무제의 칼에 목숨부지가 어려운 일이었다.[132] 제 아무리 방과, 방원의 사병이라고 해도 일단 근본적으로 이성계의 사병이 그리로 흘러간 것이며, 가별초라는 집단은 이성계를 따르던 집단이었다. 아들들의 사병들에가 가장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게 이성계 본인인데 이걸 그냥 정도전에게 맡긴 것부터가 실책이었다.[133] 반면 이후로 태종이 직접 사병을 혁파했을 때는 반발이 거의 없었다.[134] 1차 요동정벌은 원이 명의 북벌을 막아내는 와중에, 2차 요동정벌은 나하추가 명에 귀부한 지 얼마 안 되어 아직 명의 요동 장악력이 낮은 상황에서 추진되었다. 반면 위화도 회군으로부터 이미 1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태조 치세 말기쯤 되면 이미 명사 최강의 인간흉기로 꼽히는 연왕 주체가 북경에 부임하여 북방을 평정한지가 벌써 20년이 다 되어간다. 게다가 정난의 변 항목을 참조해보면 알겠지만, 요동은 무주공산이 아니라 연왕을 견제할 만큼의 상당한(명사 철현전에 의하면 10만의 군사.) 중앙 직속 병력이 따로 주둔하고 있었다.[135] 드라마 정도전에서는 이때 남은이 송현방 집에 새로 첩실을 들이면서 훈련에 소홀해진 것으로 설정했다.[136] 이 중 이무는 17일 후에 정도전을 배신하고 정안군에게 살해계획을 알리는 역할로 실록에 기록된다. 이무는 당시에 왕실의 지친도, 공신도 아니라는 이유로 유일하게 파직당했는데 이 때의 원한이 작용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137] 태조 7년에 사병을 혁파하고 중앙군으로 재편하면서 군사훈련을 맡긴 것이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을 비롯한 종친들이었다. 즉 의안백 이화와 이방과 형제들이 모두 군무를 맡고 있던 상황인데, 이는 다시말해서 요동 공격이 실행에 옮겨진다면 왕자들이 병력을 이끌고 출전하는 상황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이야기가 된다. 2차 요동 정벌도 최영이 이성계를 제거하려는 복안이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지만 최영과 이성계의 사이가 좋았다는 반론이 있는 데 반해, 정도전은 이미 신의왕후 소생 및 종친들과 사이가 틀어질 대로 틀어져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정도전이 요동 공격을 통해 왕자들이 전장에서 명군의 칼에 맞아 죽기를 바라고 있다는 의심을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혹여 요동 공격이 성공한다 해도 왕자들은 요동 방위를 구실로 현지에 처박힐 것이고 세자가 어물쩡 숟가락을 올려 후계구도를 다질 것이며, 요동 공략에 실패한 채 살아돌아온다면 패전을 빌미로 숙청당할 가능성이 높다. 위화도 회군을 직접 겪어본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 특히 아버지를 따라 종군했던 이방과나 개경의 가족들을 직접 피신시키고 뒷수습을 한 이방원이라면 뜬금없는 요동 공략의 진짜 저의가 무엇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한마디로 이방원을 비롯한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 입장에서는 정도전 본인이 직접 왕족 신분인 왕자들을 제거해버리면 어찌됐든 후폭풍이 생길 수 밖에 없으니 차라리 외부세력인 명군을 이용해서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을 제거하려는 고도의 차도살인을 계획했다고 볼 수 밖에 없다. 차도살인만 성공하면 세자 이방석과 정도전 본인의 입지를 굳힐 수 있게된다.[138] 용의 눈물에서는 이방원이 궁에서 무사히 탈출하자 일이 글렀다고 판단한 이무가 급히 신발을 거꾸로 신은 것으로 설정했다.[139]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는 이숙번이 정릉숙위군으로 안산병력을 이끌고 도성에 들어와 있는 시기를 쿠데타 결행일로 잡았다. 당대의 정릉은 바로 지금의 영국대사관 자리에 있었으며 이곳은 광화문에서 도보로도 20분이 채 안 걸리는 곳이다. 현대인들보다 훨씬 달리기에 능한 당대의 병사들에게는 정말로 궁궐 코앞이나 마찬가지. 정말로 이랬다면 정릉을 굳이 도성 안에 쓴 태조의 고집이 파멸을 불러온 셈이다.[140] 극중 이숙번의 정릉숙위는 야사인 용재총화에 기록되어 있는 사건인데, 다만 용재총화에는 정릉 이안군(移安軍), 즉 정릉을 이장하는 병사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실록에서는 그의 정릉숙위에 관한 기록은 없는데, 대신 이방원이 미리 이숙번에게 일러 자기 집 근처에 있는 신극례(辛克禮)의 집에 병장기를 갖추고 유숙하도록 했다는 내용이 무인정사에 대한 실록 기록에 적혀있다. 물론 임지를 떠나 수도에 체류하고 있으려면 정릉숙위 같은 공식적인 명분이 갖추져 있긴 했을 것이다. 태조가 8월 병든 상태에서도 무리해가며 흥천사를 찾았던 점을 생각해보면 뜬금없이 이장을 추진했을 가능성은 낮고, 이후 정릉의 이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미 태조 때 이장이 결정되었다는 식으로 포장했을 가능성도 있다.[141] 12.12 군사반란 시기 대구 50사단장으로 내려가있던 정호용의 상황과 비슷하다[142] 상술되었듯 얼마 전까지 충청도 도절제사로 활동했던 조영무도 같은 편이었던 만큼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143] 원경왕후의 족부이자 전 정당문학이었던 곽추라는 이의 노비에서 시작하여 의안대군 이화의 구사가 되었으며, 이방원의 이서이자 진무로서 방원이 왕자 시절이었을 때부터 그를 섬긴 이로서 그 공으로 세조 때까지 여러 관직을 두루 거치게 된다.[144] 그런데 연려실기술 속의 이숙번 관련 기록에 따르면 당시 상경을 원한 이숙번이 김돈에게 금띠를 주며 청원했고, 이에 김돈이 당시 용비어천가를 만들려던 세종에게 이숙번을 추천했으나 일이 끝난 뒤 이숙번이 전처럼 오만하게 행동하여 세종이 그를 다시 내보냈고, 그리되자 김돈은 금띠를 되돌려줬다고 나와있다. 다만 상술했듯 이 때 이숙번을 불러올린 명분이 용비어천가 관련으로 되어있기에 실록의 헌릉 비문 수정과는 전혀 다른 내용이고 출처가 야사인 점도 있는지라 진실이라 보긴 애매한 부분이 있다.[145] 일단 전흥이 이제의 죽음 이후에 그 뒤를 수습한 것은 태조실록의 무인정사 당일 기록에도 남아있다.[146] 사실 지금의 광화문 앞은 당시 육조거리로 행정관청들이 밀집된 지역이었다. 이 거리에서 남산까지 불분명한 무리들이 가득찬 상황에서 좌정승인 조준이 할 수 있는 행동이 있을리 만무했다. 그렇다고 누구인지도 모르고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가서 항복할 처지도 아니니 잠깐의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다만 조정대신들의 수장이라는 자가 위급상황에서 이도저도 아닌 어정쩡한 행동을 보인 것에 대한 악필이지 않을까 싶다. 비슷한 사례로 12.12 사태 당시 국방장관이었던 노재현이 있다.[147] 다만 조준의 입장을 생각해보면 좀 애매한데, 조준은 정도전과 요동 정벌 및 세자 책봉 문제로 인해 갈등을 빚고 있었으며, 고려 말 자신을 유배 보낸 뒤에 처형하려 했던 정몽주를 도모하여 자신의 목숨을 구명해준 이방원에게 꽤나 호의적인 감정을 품고 있었다. 이방원이 명나라에서 돌아왔을 때, 조준의 집에 머무른 적이 있는데, 조준은 당시 이방원에게 대학연의를 선물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세자 책봉 문제 당시에 난세에는 이방원을 세우는 것이 좋다는 의견을 내비친 적도 있다.[148] 태조가 아버지의 천첩이었던 김씨를 개경으로 모셔와 깍듯하게 대접하고 이복동생인 이화나 집안의 눈엣가시였던 사촌동생 이지 등도 보살펴주며 모범을 보인 것을 생각하면 후계자 문제만 아니었어도 큰아들들이 아버지의 사례를 좇아 서모와 이복동생들을 챙겼을 가능성은 꽤 높다.[149] 사실 신덕왕후가 10년만 더 살았어도 이방석을 왕위에 올려놓는 정도는 충분히 가능했을 것이다. 물론 그것도 이방과와 이방원만 숙청할 수 있었다면 말이다.[150] 운 좋게도 그의 딸이 태종의 장인인 민제의 자손들과 혼사를 맺은 것과 이방원을 도와서 왕자의 난에 가담했던 하륜이 그의 사촌동서지간인 것이 그의 생명을 구원해주었을 가능성도 크다. 그는 이후 다시 복귀하여 태종 대에 우의정까지 오르는 등 탄탄대로를 걸었지만 양녕대군의 폐세자 문제와 민무휼 - 민무회 옥사로 귀양크리를 타는 등 크게 곤욕을 치렀고 세종이 즉위하고 나서야 정계에 복귀할 수 있었다.[151] 이 시점에서 이성계의 적장남은 방과다. 이복근한텐 왕위를 주장할 정통성 같은 건 없었다.[152] 이로 인해 이성계의 노여움을 사 조영무와 함께 잠깐 유배당한다. 정황상 미리 포섭당한 인물이었을 것으로 보인다.[153] 용의 눈물에서는 조영무와 이천우가 궁궐수비대와 대치하면서 투항을 종용하고, 박위는 궁궐 수비병력의 부재에 전전긍긍하는 모습이 부각된다. 참고로 이천우 역시 이원계의 아들로 아주 가까운 종친이다.[154] 심지어 당시 이방원이라면 백정 놈이라며 이를 갈았던 태조조차도 방간의 반란 소식에 방간이 바보같은 짓을 했다며 방간을 나무랐다.[155] 명목상 왕은 정종이었으나, 정종에게 올라오는 모든 상소와 국서는 이방원이 모두 보고 있었으며, 정종은 항상 이방원과 상의한 후에 정책을 시행했고, 대부분은 이방원의 뜻대로 되었다. 애초에 정종 본인도 전형적인 무골이지 정치에는 관심이 없던 데다가, 괜히 왕위에 욕심을 부려서 이방원과 틀어지면 좋을 게 없다는 건 잘 인지하고 있었을 테니 바지사장인 것에 대해 딱히 불만은 없었을 것이다. 그 자신이 상왕으로 물러난 후에도 이방원과 장난을 치며 같이 놀기도 할 정도로 형제애를 유지하기도 했고.[156] 정종의 아우이니 세제(世弟)가 맞지 않냐는 사람이 있는데 이방원은 당시에 세자가 맞다. 정종도 '아우를 어떻게 세자라 할 수 있느냐'는 신하들의 말에 '이참에 아우님을 아들 삼아버리면 되지 않느냐'고 대답했다. 정종에게 아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모조리 서자라서 태종이 계승권을 잡아도 별다른 반발을 할 수 없었다. 유교적 소양이 깊은데다 과거 합격까지 한 이방원이 세제와 세자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했을 리는 없고 이후 숙종 때까지 정종에게 제대로 된 묘호도 올리지 않았던 사실을 보면 정종은 그저 징검다리일 뿐이고 이방원은 자신을 태조 이성계의 세자로 인식했던 듯 싶다. 또한 현실적으로 이전까지 태제/세제가 책봉된 전례도 없었다. 다른 해석으로는 세제는 형의 후계자인 동시에 아버지의 후계자이기도 하므로 두 눈 멀쩡히 뜨고 살아있는 아버지, 즉 상왕 이성계의 윤허, 적어도 묵인이 필요하기에 꼼수를 쓴 것으로 보기도 한다(용의 눈물에서 이를 따랐다.) 이를 보자면 실록에서는 상왕, 정종, 세자가 서로 하하호호 하며 왕의 도리를 논하고 있었다지만 실상은 여전히 살벌한 대립이 이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157] 여담으로 순종 융희제는 동생인 영친왕 이은을 태자로 세웠고 이에 대신들이 태제라며 반발하자 오늘부터 영친왕을 아들로 여긴다고 말하며 밀어붙였다. 이 경우는 실권이 영친왕에게 있는 것은 아니지만 순종이, 혹은 고종이 직접 후계자로 영친왕을 지목하고 정통성을 부여한 것으로 추정된다. 즉 고종 입장에서는 순종이든 영친왕이든 모두 자신의 후계자라는 것이며 이는 특히 일본의 강압에 의한 양위에 대해 일종의 항의 제스쳐를 보인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이러나 저러나 왕조의 시작과 끝이 비슷한것도 우연의 일치.[158] 조사의의 난의 경우는 명목상 조사의가 들고 일어난 난이지만 실제로는 태조가 배후에서 지휘하여 일으킨 난이라는 것이 정설이며, 실제로 태조의 거처에 태종이 방문한 뒤로 손쉽게 와해되었다. 태조가 결국 태종을 정식으로 인정해준 이유야 정확하지 않지만 조사의의 난 이후 시점에서 더 이상 왕이 될 적합한 사람도 없었고, 백성들의 여론도 썩 우호적인 상황은 아니었기에 조선을 지키고 이어가야한다는 이해관계와 현실적인 부분으로 인해 결국 다른 선택지가 남아있지 않았다.[159] 신검의 경우에는 견훤이 금강을 세자로 세우려는 것에 대한 개인적인 원한과 왕위 욕심 그리고 금강이 왕이 되면 자신이 죽을 것이라는 불안감에 쿠데타를 일으킨 것일 뿐이다. 신검의 지지층으로서는 딱히 견훤에게 불만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는 신검이 왕위에 오르고 나서도 민심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고, 견훤이 고려군으로서 침공했을 때 후백제의 군사들이 쉽게 무너진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즉, 태조와 정도전의 정책에 불만을 가진 공신과 종친이라는 지지층이 있던 이방원과 달리 신검은 개인적인 욕심에서 쿠데타를 일으켰을 뿐, 신하들의 입장에서는 딱히 견훤의 구정권에 불만을 느끼지 못한 상황이라 공신들의 지지가 약했고 신검 본인의 통치능력도 이방원에 비해 한참 모자라 정부 장악에 실패한 것이다.[160] 당장 이성계와 오랜세월 함께했던 의형제인 이지란도 신덕왕후의 조카딸을 후처로 들였지만 이방원편을 들었었다. 말년에 이성계를 배신해서 가슴에 대못을 박았다며 슬퍼했지만 그의 눈에도 막내를 세자로 세우는건 아니였던것.[161] 용의 눈물에서는 이 대목에서 경복궁 수비병력에게 항복을 종용하는 이천우와 조영무가 "횃불만 많이 들려놨지 실상은 별 거 없는데 이거 언제까지 이래야 하나" 하며 안절부절하는 모습을 통해 실록의 상반된 기록을 이방원 측의 허장성세와 블러핑으로 해석, 나름 설득력있게 그려냈다.[162] 이 경우에도 충청군은 어쨌든 관군이므로 이방원의 사병 자체는 많아야 수백 정도에 불과한 것은 매한가지다.[163] 이 경우에는 특히 세자 이방석이 급작스런 공격에 당황해서 대응하지 못해서 삽시간에 제압되었다는 것이 근거가 되지만 이 또한 추측만 가능한 상황[164] 세종대왕이나 용의 눈물이 실록의 기록에 충실했다면, 정도전은 이를 약간 뒤틀어서 다른 왕자들이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며 내빼는 와중에 이방원 혼자 당당히 입궁했다가 정도전에 의해 강제로 태조에게 은퇴선언을 하는 굴욕을 맛보는 것으로 각색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바로 거병하면서 제1차 왕자의 난 개막.[165] 단 용의 눈물도 기록을 뒤튼 부분은 있는데 왕자들을 살해하려는 음모는 남은과 심효생이 꾸몄고 정도전은 이를 전혀 모르고 있던 것으로 각색했다.[166] 본 기록은 태종실록에 수록되어 있으므로 여기서의 임금은 태종 이방원을 말한다.[167] 한반도에서는 임금에게 이따금씩 쓰였던 것 같지만, 중국에서는 정식으로 건국하기 전의 군웅에게 주로 쓰이는 표현이었다. 즉 주군의 다른 표현.[168] 하륜은 태조실록 편찬 당시 영춘추관사로 편찬작업을 총지휘했으며 아직 생존한 관계자가 많아서 시기상조라는 반대를 정면으로 돌파해가며 편찬을 성사시켰다. 그런 그가 자신의 공적을 부풀리면 모를까 굳이 숨기거나 축소할 이유가 없다.[169] 이상할 것도 없는 게 쿠데타라는 게 원래 이 사람 저 사람 끌어들이는 과정에서 말이 새나가는 경우가 허다하다. 당장 5.16 군사정변만 해도 박정희가 쿠데타 일으킨다는 첩보가 몇 달 전부터 마구 날아다녔다.[170] 다만 상술했듯 전개 항목에도 적혀있듯 실록에 따르면 하륜이 8월 2일에 태조로부터 직접 교서와 부월을 받은 기록이 있는데다, 충청도 병사와 경기좌도 병사로 구성된 3700명이 도성 보수에 참여했다는 7월 27일의 기록도 있는지라 하륜이나 충청도 병사의 이동이 생각보다 오래 걸리거나 힘들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171] 그 중 한 번은 천도를 위해 순방하던 중에 난 병으로 인한 물갈이로 추측된다.[172] 어떠한 스트레스 상황에서 받는 스트레스의 정도를 수치화해서 표현한 '사회재적응평가척도'에 따르면 배우자의 죽음으로 받는 스트레스는 100점으로, 이와 같은 수치는 본인 생명의 위협밖에 없다. 그래서 배우자와 오랫 동안 해로하던 노인들 중 한쪽이 먼저 세상을 떠나면 남은 사람도 무기력이나 상실감으로 건강을 해쳐 얼마 못 가 사망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이다. 그리고 태조는 한번도 아닌 두 번이나 배우자를 잃었다. 첫 번째 부인 신의왕후는 1391년에 죽었고, 5년만에 두 번째 부인 신덕왕후마저 갑자기 가고 만 것이다.[173] 다만 그렇다면 참척이라 불릴 정도로 배우자의 죽음에 버금가는 슬픔인 자식의 죽음과 멀쩡한 사위마저 죽은 1차 왕자의 난을 겪고서는 심각할 정도의 병환이 없었다는 반론이 가능하다. 그래서 이 당시 병환은 아마 잔병 치레였을 가능성이 크다.[174]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서는 승녕부 항목에서 태조의 병이 이질이었다고 적었는데 딱히 근거를 제시하진 않았다.[175] 1398년의 동지는 음력 11월 5일이었으므로 8월 26일은 양력 10월 초였음을 알 수 있다.[176] 심지어 실내 일정도 아니고 부도탑을 참관하는 야외 일정이었다.[177] 이 해에는 윤달이 있었다.[178] 3년상이 끝난 후 갈아입는 평상복[179] 이 때 명나라 사신으로 온 환관 신귀생은 원래 영흥 출신의 고려인으로, 6월 말 조선에 들어와 태조를 만나고 7월 초에 고향 영흥으로 돌아갔다. 태조가 베푼 연회자리에서 칼을 빼드는 등(...) 행패가 막심해 오죽하면 연회자리에서 신귀생을 말린 환관 조순을 사대부들이 초청해서 극진히 대접했을 정도. 그리고 신귀생이 돌아간 직후 조정에서 본격적으로 요동정벌을 둘러싼 논쟁이 격화되었다.[180] 동서고금을 통틀어 왕의 병은 물론이고 죽음마저 은폐한 사례는 수도없이 많다. 애초에 조선왕조 500여년을 통틀어 왕이 아프다고 계엄 때린 사례도 찾기 힘들다.[181] 실록의 기록을 보면 이제는 이화와 태조의 만류로 반격을 포기한 후 이방원의 지시로 그냥 집에 갔다가 반란군의 습격을 받아 죽었다고 되어 있다. 즉 기록대로라면 이방원은 자기가 집에 보내준 사람을 쫓아가 죽인 희대의 통수왕이라는 소리인데(물론 이방원은 이제가 죽었다는 소리에 놀라서 수습을 지시했다고 하지만) 태종대에 편찬된 실록이 굳이 금상을 통수왕으로 만들 이유가 없다는 점을 생각하면 정안군 변호 부분을 제외하고는 윤색의 가능성은 낮다. 정 윤색을 시도했으면 통수질을 변호하느니 차라리 이제가 태조의 만류에도 뛰쳐나와 칼부림을 해대니 부득이 죽일수밖에 없었다고 쓰지 않았겠는가?[182] 실제로 중종반정 이후의 연산군이나 인조반정 이후의 광해군이 모두 이랬다. 심지어는 이들이 죽고 난 이후에도 명 사신만 오면 살아있다고 해야 하나 죽었다고 해야 하나 고민했을 정도.[183] 반대로 태조 역시 조사의 등이 동북면에 부임하고 자신의 측근들을 동북면에 올려보내 병력을 마련하는 등 준비가 갖춰질 때까지 무인정사 당시의 무기력했던 모습을 이용해 힘빠진 뒷방 늙은이를 열심히 연기하다가 한순간에 타이밍 잡아서 동북면으로 올라가버렸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태조는 이미 조사의의 난을 일으키기 전에 한 번 안변까지 올라갔다가 개경으로 환궁한 뒤에 다시 안변으로 가서 난을 일으켰던 것이다.[184] 일각에서 태조가 태종 이방원을 사람 대접도 안 했다는 인식이 있지만 적어도 무인정사 이전까지는 태조가 여러모로 다섯째 아들인 이방원을 신경쓴 기록이 있다. 태종이 17세에 과거를 전국 10위권 내 합격을 하자 기뻐해 체면이고 뭐고 신경쓰지 않으며 합격 증명서를 몇 번이나 읽게 하고, 자신도 직접 읽고 좋아하다가 궁궐에서 몇 번이나 절까지 하는 등 팔불출 아버지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또한 위에서 나온 것처럼 분봉 이야기가 나오자 넌지시 이방원에게 말이 많이 나오니 조심하라 이르기도 하고, 이방원을 명에 보낼 때는 눈물을 글썽이며 "너의 체질이 파리하고 허약해서 만리의 먼 길을 탈 없이 갔다가 올 수 있겠는가?" 하며 걱정하기도 했다. 정몽주 살해건으로 인해 국왕으로서의 재목은 아니라고 보긴 했지만 그래도 이만한 능력자 아들, 그것도 과거에 급제하여 자신의 컴플렉스와 한을 풀어준 아들은 이방원 밖에 없었으니 마음이 쓰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평소에 태종을 아끼지조차 않았다면 조사의의 난을 일으키기까지 해놓고 차라리 자결 소동을 벌이든가 했지 조용히 환궁하여 여생동안 태종과 잘 지내진 않았을 것이다. 그런 점에 있어서 부자간의 끊을 수 없는 애증이다.[185] 다만, 설령 이방석이 명나라 황녀와 결혼을 했다고 하여도 무사히 왕위를 지킬 수 있었을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는 반론성 의견도 일부 있다. 이미 대다수 사대부들은 자질이 검증된 이방원을 더 선호하고 있었는 데다가, 명나라에서도 정난의 변이라는 초대형 변수가 터졌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정난의 변 이후에는 조선에 신경 쓸 여유가 없어졌기 때문이다.[186] 고려의 경우 쿠빌라이 사후부터 방계 왕녀들하고만 혼인을했지만 쿠빌라이 생전에는 쿠빌라이가 자신의 딸(황녀)인 제국대장공주를 직접 고려에 시집보냈었고 주원장도 실록에서 본인의 딸을 시집보내는 것을 전제로 말하였다.[187] 조선이 참전했다고 가정하면 쉬운 일이 아니다. 조선이 없었어도 연왕은 전 중원을 상대로 버티는 게 한계였다. 건문제가 막판에 다잡은 것을 판단미스로 군을 뒤로 물리지만 않았어도, 연왕이 이기는 건 불가능했다. 이런 상황에서 추가로 조선군이 들이닥치면 버티는 것은 더더욱 어려워진다. 설사 버틸 때까지 버텨 기회가 와도 후방이 신경 쓰여 단숨에 남경까지 돌파하는 기책을 쓰기가 불가능해진다.[188] 그리고 역으로 방석이 명나라 공주와 결혼했을 경우 오히려 왕좌와 멀어졌을 가능성도 있다. 사실 조선이 건국되기 얼마 전만 해도 고려는 원의 부마의 나라라는 말을 들으면서 간섭을 심하게 당하고 있다가 공민왕 때에 와서야 원의 간섭을 물리칠 수 있었는데 만약 명의 부마가 된 방석을 왕위에 올렸다면 명의 내정간섭을 심하게 받았을 가능성도 있었다. 인조가 청에 인질로 끌려갔던 소현세자를 의심해서 민회빈 강씨를 사사한 것과도 어느 정도 비슷한 원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