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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08 00:58:55

가별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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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평가

1. 개요

여말선초사병집단. 가별초()는 말 그대로 '가문의 정병'이란 뜻으로 여말선초 권문세족과 신흥 무인 세력이 특별히 가려 뽑은 정예병으로 구성된 사병집단을 의미한다.

여러 가별초 중 태조 이성계의 가별초가 가장 유명해 흔히 가별초하면 이성계 가문의 동북면 병사들을 일컫는다. 이성계의 가별초는 조선 건국 후 조선군에서 왕실 근위대 역할을 수행하다 태종의 사병혁파 때 해체되고 중앙군으로 흡수되었다. 전투인원 등은 조선 전기의 중앙군 오위 중 하나인 호분위나 친군위로 전환되었고 소수 인원은 갑사로 배속되었다.

2. 평가

이성계의 가별초는 원나라 장군 나하추의 부대, 홍건적, 호바투의 여진족, 왜구, 고려군까지 상대했던 그야말로 당대 동아시아를 뒤흔들었던 여러 세력과 싸워 승리한 한국사 최강의 사병집단으로 평가받는다. 참여한 전투만 해도 개경 탈환전, 함흥평야 회전, 제1차 요동정벌, 황산대첩, 길주전투, 위화도 회군의 개경 전투 등 고려 후기 때 벌어진 거의 모든 대규모 전투에 참전해 승리했다.

이성계의 가별초는 이성계의 조상이자 전주의 토호였던 이안사가 삼척으로 이동할 때 거느렸던 가병들, 다시 동북면 의주로 북상할 때 동행한 170여 호에서 연원을 찾을 수 있는 사병집단으로 이안사가 원에 투항한 1252년을 기준으로 잡아도 무려 100여 년 넘게 전주 이씨 가문을 섬겼다. 그야말로 대를 이어 섬긴 셈이니 단결력과 충성심이 여느 사병집단에 비길 바가 아니었다. 전체 병력은 최대 3,000여 명, 전투 병력만 적어도 1,000여 명 이상이었으며 또한 동북면 토착민, 여진족, 한족, 몽골족을 아우른 혼성 기병 부대였다. 일명 가별치(加別赤)라고 부른다.

고려 중기의 무신정권도 이만한 규모의 사병은 동원하지 못하였는데,[1] 제 3대 무신정권 집권자인 경대승이 설치한 사병집단인 '도방'의 인원도 겨우 100여 명이었으며 다른 무신들이 그 경대승을 두려워했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경대승 외 유력 무신들의 사병도 최대 100여 명 안팎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나마 진주에 기반을 쌓은 최충헌의 사병이 약 1천여 명이었으며 이후 사병들은 계속 늘어나 여말선초의 가별초들은 규모가 더 커졌으나, 이성계의 가별초처럼 수천에 달하는 강력한 기병군단에 비할 바는 못되었다. 고려 말기에 왕실조차 이성계 앞에 벌벌 떨었던 것도 바로 가별초의 존재 때문이었다. 이런 무장집단을 등에 업고 위화도 회군 이후 조정까지 장악했으니 실상 그 이후로부터는 이성계가 왕이나 다름없던 것.

이성계가 한국사 최강의 무인으로 평가받는 것도 본인의 무인으로서의 능력은 물론, 이처럼 강력한 정예병 집단이 함께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전투력과 전공, 그리고 정치적 위상 등에서 훗날 19세기 초 나폴레옹 시절의 프랑스 제국 근위대에 견줄 수 있다. 실제로 이성계와 나폴레옹 모두 대외 전쟁에서 세운 무공으로 명망을 얻고, 이를 앞세워 권력을 차지하여 스스로의 왕조를 창건한 공통점이 있다. 군주 개인의 영지에 기반한 무력집단이라는 점에서는 합스부르크 제국황제군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정도전, 조준 등 급진파 신진사대부와 함께 이성계의 조선 건국의 원동력이 되었기 때문에 이성계의 생애 및 조선 건국 관련 역사를 다루는 대중매체에서 거의 항상 등장한다.

[1] 기이하게도 무신정권은 무신이 주축이 되었지만 군사력은 처참할 정도로 허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