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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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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 로마 제국 자체의 군대에 대한 내용은 제국군(신성 로마 제국)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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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 신성 로마 제국 구성국들의 군대의 경우 프랑스 대혁명이 터진 1789년 당시의 세속 선제후국과 그 이상급 국가만 기재.
※ 라인 동맹 및 독일 연방, 북독일 연방 구성국들의 군대의 경우 왕국 이상급 국가만 기재.
※ 독일 제국 구성국들의 군대는 독립적인 전쟁성을 가진 경우만 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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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기

1. 개요2. 명칭3. 정체성
3.1. 신성 로마 제국군?
4. 상세
4.1. 황립 및 왕립 육군4.2. 황립 및 왕립 해군
5. 재편성6. 주요 인물

1. 개요

황제군은 신성 로마 제국황제가 거느린 사병집단이다. 존속기간은 1618년부터 1806년, 길게는 1918까지다. 주로 황제 가문 영지의 병력[1]이었지만 타 지역, 특히 제국도시에서 지원군도 받았다.

사실상 합스부르크 제국의 군대를 지칭하며 후에 오스트리아 제국군, 나아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으로 이어진다.

2. 명칭

라틴어 Exercitus Imperatoris '엑세르키투스 임페라토리스', 임페라토르의 군대
독일어 Kaiserliche Truppen '카이저리셰 트루펜', 카이저의 군대

줄여서 Kaiserliche(카이저리셰)라 불린다. 한국어로 번역할 때에는 황제군, 황실군, 근황군 등으로 번역한다. 어떤 형태든 신성 로마 제국이라는 나라가 아닌, 황제 개인의 군대임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18세기 중반, 정확히 말해 1745년 이후로는 로마의 황립 및 왕립 육군(Römisch-kaiserlich-königliche Armee)이나 황립 및 왕립 육군(Kaiserlische-königliche Armee), 줄여서 K.k 육군(K.k Armee)라고 불리기도 했는데 이 명칭은 훗날 오스트리아 제국군의 공식 명칭으로 이어진다. 여기서 황립은 신성 로마 제국을, 왕립은 보헤미아 왕국을 의미했는데, 훗날 오스트리아 제국 시절까지는 오스트리아와 보헤미아를, 그리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시절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왕국을 의미하는 것으로 변화했다.[2] 한편 비텔스바흐 가문카를 7세에게 신성 로마 황제위와 보헤미아 왕위를 잠시 빼앗겼던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당시의 공식적인 명칭은 헝가리 왕국군(Königlich Ungarische Armee)이었다.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가 없었기 때문에 당시의 합스부르크 가문이 가진 가장 높은 작위는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이었기 때문이다.

편의상으로는 사실상 제위를 독점하던 합스부르크 가문명을 따서 합스부르크군(Habsburgische Armee)이라고 하거나 그냥 오스트리아군이라고 불렀다. 심지어 상술한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당시에 졸지에 헝가리군이 되었던 때도 마찬가지다. 이 둘은 공식 명칭은 아니었지만, 18세기가 넘어가면서부터는 당대 사람들도 대충 통칭상 오스트리아군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

해군, 즉 황립 및 왕립 해군(Kaiserlische-königliche Marine)의 경우 등장 이래로 딱히 이름의 변화가 없었다. 이 명칭은 그대로 오스트리아 제국 해군, 더 나아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군으로 이어진다.

3. 정체성

신성 로마 제국선거군주제 국가였으므로, 원래라면 특정 가문의 군대가 황제군 지위를 독식할 일이 없었다. 실제로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당시 바이에른 비텔스바흐 가문의 카를 알브레히트가 신성 로마 황제 카를 7세였을 때에는 바이에른군이 곧 공식적인 황제군이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대공국에 기반한 합스부르크 가문선제후 중 하나인 보헤미아 왕위를 차지하고 대대로 황제 자리를 세습하며 황실 가문의 위치를 공고화하기 시작한 이래로, 황제군은 곧 합스부르크, 오스트리아의 군대를 의미하는 단어가 되었다. 가령 상술한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당시에도 공식적인 황제군은 바이에른군이었으나, 기존 합스부르크 왕조의 황제군은 헝가리-크로아티아 여왕[3] 마리아 테레지아와 합스부르크 가문에 그대로 충성했다. 군기 또한 상술한 신성 로마 황제의 어기를 한동안 그대로 썼을 정도다.[4] 곧이어 합스부르크가 다시 제위를 탈환하자 기존의 황제군도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의 군대에서 신성 로마 황제의 군대로 복귀했다.

민족주의와 국민 주권에 기반한 국가들 속에서 살고 있는 현대인들은 이해하기 힘들지만, 사실 전근대의 유산인 군주제 하의 군대들은 대부분이 국가나 국민의 군대가 아닌 군주의 군대이다. 이들은 사병이라는 속성을 강하게 띄고 있다. 왕립(Royal) 또는 황립(Imperial)이라는 수식어나 형용사가 바로 그 흔적이다. 근대 대한제국에서 황제가 대원수로서 원수부(元帥府)를 기반으로 군대를 통수하거나, 일본 제국에서 자국 군대인 일본군을 두고 천황의 군대를 의미하는 '황군(皇軍)'이라 부르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심지어 현대 영국군조차도 명목상으로는 영국 국민들이 선출한 영국 정부가 아닌 세습 군주인 영국 국왕의 군대이다. 오늘날 영국군의 공식 명칭 역시 황제군과 비슷한 '국왕 폐하의 군대(His Majesty's Armed Forces)'다.

그러나 보통 1~2개의 국가를 영지로 지배하는 다른 군주 가문들과 달리, 황제군의 주인인 합스부르크 가문은 수십 개의 개별적인 국가들[5]을 영지들로서 다스렸다는 특징이 있다. 이 '합스부르크 제국'은 영국을 지칭하는 연합왕국이나 근대의 독일 제국 같이 하위 구성국들을 전부 포괄하여 아우르는 상위 정치체가 아니라, 난립하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지들을 뭉뚱그려 표현하는 비공식 단어일 뿐이다. 이들은 제일 극단적인 형태의 동군연합이다. 생물학적으로 거칠게 비유하면 단일 개체가 아닌 군체인 셈이다.

일반적으로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정치적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오스트리아의 군대라는 명칭이 쓰였으나, 엄밀히 따지자면 오스트리아는 왕국이나 선제후국도 아닌 일개 대공국으로 합스부르크 제국의 한 부속품일 뿐이었으므로 비공식 용어로서 편의상 부를 수는 있어도 공식적인 명칭이 될 수는 없었다. 오스트리아군이라는 명칭이 공식 용어로 지정된 것은 1804년 오스트리아 제국이라는 하나의 정치체가 등장하고 나서였다.

때문에 타 국가 군주들의 군대는 해당 국가의 군대라고도 할 수 있던 반면, 황제군은 이 모든 영지들의 공통 지배자인 합스부르크 가문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소유라는 것 외에는 설명할 방법이 없다. '황제군'이라는 일반명사스러운 명칭이 이들을 지칭하는 데 널리 쓰이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이마저도 당대 기준으로는 모호하지도 않았는데, 당시 유럽 내에서는 '보편 제국'인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만이 유일한 황제였기 때문에[6] '황제군'이라 하면 곧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군대를 지칭했다.

3.1. 신성 로마 제국군?

황제군은 신성 로마 제국 자체의 군대가 아니다. 상술한 대로 황실군은 황제, 합스부르크 가문의 경우 일명 합스부르크 제국이라고도 불리는 동군연합 영지에 기반할 뿐이다. 한국사로 치면, 이성계의 개인 영지에 기반한 가별초와 고려 정부의 정규군인 고려군 정도의 관계인 셈이다. 또한 제국군은 회의의 결의를 통해 공동의 적에 맞서 구성되는 일종의 연합군이라는 점에서는 차라리 유엔군사령부에 더 가깝다.

황제 개인의 군대인 황제군과는 별개로 신성 로마 제국군(라틴어: Exercitus Imperii, 독일어: Reichsarmee)이 존재했다. 황제군은 황제 개인에게 책임지는 사병이고, 제국군은 공적 법제에 근거하는 국군이었다. 이들에 대한 설명은 제국군(신성 로마 제국) 문서에서 서술한다.

독일어라틴어, 그리고 한국어에서는 '황제의(Kaiserlich-)'와 '제국의(Reichs-)'가 구분되기에 번역에 별 문제가 없지만, 영어에서는 둘 모두 Imperial인 탓에 혼동할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영어권에서는 황제군을 지칭할 때만 Imperial Army라고 쓰며, 제국군을 지칭할 때는 전치사 of를 써서 '신성 로마 제국 군대'(Army of Holy Roman Empire)라고 쓴다.

4. 상세

파일:신성 로마 제국 국기(후광 포함).svg 신성 로마 제국의 대외 전쟁·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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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스트리아의 대외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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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황립 및 왕립 육군

파일:6hphgol4bvo41.jpg
▲ 1697년, 대튀르크 전쟁의 젠타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군을 격파하는 사부아 공자 외젠의 황제군. 중앙의 기수가 황제의 깃발을 휘날리며 돌격하고 있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황제군이 본격적으로 창설된 것은 30년 전쟁 당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제국 전역이 신교와 구교로 갈라져 내전을 벌이면서 제국전쟁(Reicheskrieg)이나 제국집행(Reichsexekution)을[7] 선포할 제국의회는 마비되었고, 그 때문에 황제는 제국군을 불러모을 수 없었다. 당대 유럽에는 상비군이라는 개념이 사실상 없었기 때문에, 원래라면 제국전쟁을 선포하고 란츠크네히트같은 용병들을 고용하거나[8] 휘하 제후국들의 군대를 불러모아 제국원수의 지휘 하에 편성하여 전장에 내보내야 했으나 그게 불가능해진 것이다. 때문에 페르디난트 2세는 제국군이 아닌 황제 자신의 군대를 모아 싸우는 수밖에 없었다. 이때 갑자기 등장하여 황제군의 주축이 된 것이 바로 군인 겸 사업가인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이 불러모은 군대였다.

전력을 보강한 황제군은 구스타브 2세 아돌프스웨덴군이 중심이 된 신교군과 싸우며 점차 확장되었다. 다만 당시의 황제군은 구조적으로 자립적이지 못했다. 구교 제후 연맹과 발렌슈타인의 지지로 구성되었으며, 이 점에 있어서는 제국군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거기다 이마저도 오랜 전쟁과 발렌슈타인의 암살로 인해 시간이 지남에 따라 거의 다 소모되었다. 때문에 전쟁 말기 황제측의 주력군은 또 다른 합스부르크가가 왕으로 있는 스페인군테르시오였다. 이들은 스페인의 네덜란드 총독인 페르난도 데 아우스트리아의 지휘를 받았다.

결국 30년 전쟁이 종식되고 스페인군도 돌아가자, 남아 있는 황제군의 상황은 말이 아니었다. 합스부르크가에 있어 이는 매우 좋지 못한 현상이었는데,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제후국들이 사실상 독립 국가가 되고 신성 로마 제국이 국가연합으로 재편되면서 합스부르크가의 권력이 수직 하락했기 때문이다. 설상가상으로 서쪽에서 루이 14세프랑스 왕국이 공공연히 독일 진출을 노리기 시작했다. 거기다 아직 건재했던 오스만 제국은 코앞에 놓인 빈을 위협했고, 1683년에는 아예 다시 군대를 몰아 제2차 빈 공방전을 벌인다.

합스부르크가는 자체적인 군사력을 갖춰야 할 필요성을 절감했다. 황제 레오폴트 1세는 이탈리아 모데나 공국 출신의 라이몬도 몬테쿠콜리[9]를 책임자로 앉혀 상비군 건설에 나섰다. 몬테쿠콜리는 착실하게 개혁을 추진하여 수 만의 병력을 모았으며, 황제군을 오스트리아 최초의 상비군으로 재탄생시킨다. 그리고 이 시기에 두각을 나타냈던 또다른 인물이 바로 합스부르크가 최고의 명장인 사부아 공자 외젠이었다. 그는 몬테쿠콜리가 길러낸 군대로 대튀르크 전쟁에서 벌어진 젠타 전투에서 무스타파 2세가 친정한 오스만 제국군을 완전히 박살내었고 헝가리에서 몰아내어 합스부르크 제국의 영토를 두 배 가까이 늘렸다. 그리고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서는 연합군과 함께 루이 14세프랑스군을 밀어붙였다. 뛰어난 군사행정가이기도 했던 외젠은 비효율적이었던 황제군의 군 체계를 개선하기도 했다.

이렇게 황제군 또한 점차 체계적인 상비군이 되어갔다. 18세기가 되어서는 상설화된 연대들이 등장했다. 1751년에는 다운 백작 레오폴트 요제프 원수의 주도로 비너노이슈타트테레지아 육군사관학교(Theresianische Militärakademie)가 수립되었는데 이는 타 국가들에 비해 매우 빠른 것이었다. 1771년에는 본토인 오스트리아와 보헤미아에서 징병제가 도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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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세기 말의 황제군 보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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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 전쟁막센 전투 당시의 합스부르크 황제군(오스트리아군).

그렇게 성장한 18세기의 황제군은 합스부르크 황실에 대한 높은 충성심으로 뭉친 강한 군대였다. 훗날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제국군에 엄청난 악영향을 끼치는 언어와 민족 문제는 당시에도 골칫거리이긴 했으나, 민족주의가 등장하기 이전이었던데다 봉건 질서가 건재한 당시의 시대 상황, 그리고 병들에게 극한의 수동성과 인내를 요구하는 전열보병이라는 당대 보병전술의 특성 상 그렇게까지 치명적인 문제는 아니었다. 다만 어디까지나 상대적이라는 거지, 언어 문제는 의사소통의 어려움과 더불어 전술적인 경직성을 불러왔다. 프랑스군과 같은 자율적이고 유기적인 움직임을 오스트리아군은 보여줄 수 없었다. 추가적으로, 낙하산으로 꽂힌 황실군의 귀족 장성들은 고리타분한 전술과 보수성으로 황제군의 발전을 가로막았다.

그럼에도 황제군은 다양한 피지배민족들의 군사전통을 이용하고 일부 유능한 장성들이 강력하게 개혁을 밀어붙이면서 강한 군대를 유지할 수 있었다. 다양한 적들, 특히 18세기 중반 프로이센군이라는 강력한 라이벌의 등장은 황제군으로 하여금 개혁을 하게끔 강요했다. 장비에 있어서는 우선 황제군 포병대가 개혁되었으며, 엽병대는 혁신적인 연발총인 지란도니 공기총으로 무장했다.[10] 또한 고리타분한 장성들이라는 문제는 사실 프랑스 혁명군과 그 후신인 프랑스 대육군을 제외하면 다 겪었던 문제이기도 하다. 프로이센군의 경우 프리드리히 대왕 시절의 승리에 도취되어 개혁을 게을리하다가 나폴레옹에게 나라가 사실상 한 번 망했고, 러시아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프랑스마저도 혁명 전에는 똑같았으며 영국군의 경우는 아예 매관매직으로 인사제도를 굴려댔다.

전열보병대의 중심이 된 독일인들과 체코인들로 구성된 보병대는 황제에 대한 충성심으로 뭉친 강인한 병사들로 평가받았다. 헝가리인들도 그들만큼은 아니었으나 꽤나 믿을 만했다. 그 외 합스부르크령 각지에서 모집된 병사들도 출신지의 독특한 군사 문화를 바탕으로 좋은 활약을 펼쳤다. 특히 험준한 디나르알프스 산맥크로아티아인들은 당대 합스부르크 제국의 귀중한 병력 공급처 중 하나이자 현대까지 이어지는 경보병 병과의 시초가 되었다. 훗날 슬라보니아 왕국이 되는 군정국경지대(Militärgrenze)에서 거주하던 크로아티아인 판두르(Pandur) 보병들은 소규모 기동 약탈전의 명수들이었으며, 평시에는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 비정규전을 수행하다가 전쟁 발발 시에는 수만 명이 징집되어 그렌처(Grenzer. 변경인) 연대들을 구성했다. 이들은 척후 임무에서 특히 두각을 보이면서 경직되어 있었던 황제군의 결여된 부분을 채워주었다.

한편 황제군 기병대는 폴란드-리투아니아후사리아를 제외하면 유럽 최강의 기병대로 이름을 날렸다. 특히 그렌처와 마찬가지로 발칸의 비정규병에서 기원한 헝가리 후사르 기병대는, 헝가리 평원에서 나는 양질의 말들과 본래 유목민이었던 헝가리인들의 오랜 기마 전통에 힘입어 뛰어난 기량을 선보였다. 이들은 훗날 유럽 기병의 사실상의 표준이 되었으며, 20세기 중반까지 각국의 기병 병과로 살아남았다.

마지막으로 제국원수 요제프 벤첼 1세가 길러낸 황제군 포병대는 프리드리히 대왕의 프로이센과 나폴레옹의 프랑스마저도 인정한 강력한 부대였다. 그들은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까지 사실상 유럽 세계의 표준이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잘 써먹는 프랑스군의 그리보발 시스템 포병대 또한 원래 요제프 벤첼 1세의 포병 개혁을 도입한 것이었다. 이들은 1757년 콜린 전투에서 프리드리히 대왕에게 패배를 안겨주고, 1805년 아스페른-에슬링 전투에서는 프랑스군 수만 명과 장 란 원수를 전사시켰다.

이렇듯 오스만과 프랑스의 침략, 그리고 18세기 다극 체제에서도 합스부르크가 오랜 기간 유럽의 맹주로 남을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근친혼으로 대표되는 결혼 정책뿐만은 아니었으며, 황제군이라는 강력한 군사 조직을 바탕으로 자신들의 영지를 지켜냈기 때문이었다. 18세기 말이 되면 황제군은 신성 로마 제국과 중앙유럽 내에서 가장 거대한 군대로 성장하였다. 후대에 각인될 만한 군사적인 화려함은 딱히 없었으나 서쪽으로는 프랑스 왕국을 막아내고 북쪽으로는 프로이센의 확장에 두 차례에 걸쳐 제동을 걸었으며, 남쪽으로는 오스만을 밀어냈다.

4.2. 황립 및 왕립 해군

한편 황립 해군의 경우, 18세기까지 제대로 수립된 적이 없었다. 해안과 내륙을 가로막는 디나르알프스 산맥이라는 지형적 악조건 때문이었는데, 이 때문에 합스부르크는 다뉴브강엘베강 일대에 소규모 전대를 운용하는 정도에 그쳤다. 18세기 전반에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당시 프랑스 해군이 트리에스테를 포격한 사건은 해안 방어를 위한 해군의 필요성을 느끼게 해주었다.

전쟁 결과 합스부르크 가문이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11]를 얻게 되자 카를 6세 황제는 해로를 통해 과 벨기에를 연결할 목적으로 트리에스테라이바흐, 빈을 잇는 도로를 정비했으며 동시에 해안 방위 함대를 처음으로 창설했으나, 이 함대는 필요성과 효과에 비해 과도한 유지비를 퍼먹는다는 이유로 이내 곧 폐지되었다.

18세기 말이 되어서야 요제프 2세 황제의 명으로 신성 로마 제국의 오스트리아 관구를 기반으로 하는 황립 및 왕립 해군(Kaiserlische-königliche Marine), 통칭 오스트리아 해군이 본격적으로 재창설되었다. 그러나 당대에는 사실상 아무것도 없었다. 황립 해군은 1797년 캄포포르미오 조약으로 베네치아 공화국을 합병한 후, 남아 있는 베네치아의 해군 인프라를 기반으로 하여 성장한다. 베네치아인 장교들 역시 황립 해군에 흡수되었고, 황립 및 왕립 해군사관학교 역시 1802년에 베네치아에 세워진다. 이 때문에 훗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군이 되어서도 이탈리아계는 매우 높은 위치에 있었다.

5. 재편성

그러던 18세기 말 프랑스 혁명 전쟁이 벌어지자, 제국군(Reichsarmee)과 그 주축이 되는 황제군(Kaiserliche Truppen, K.k Armee)은 프랑스군에 맞섰다. 제1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당시에는 제국전쟁이 선포되어 제국군이 소집되었으며, 프랑스에 맹렬한 공격을 가했다.

그러나 발미 전투 얼마 후인 1795년에 프로이센이 이탈하면서 세력이 급격히 약화되었으며, 제국군은 사실상 유명무실한 존재가 된다. 이어진 제2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당시에도 제국전쟁[12]이 선포되었으나 다수의 영방국들이 중립을 선언하여 사실상 황제군만이 전쟁에 참전했다. 제3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에서는 프랑스가 신성 로마 제국의 구조를 자국에 유리하게 개편하여 아예 제국전쟁이 선포조차 되지 않았기에, 황제군만이 전쟁에 참여했다. 하지만 민족주의와 나폴레옹의 군사적 천재성으로 무장한 프랑스군을 막아내는 것은 역부족이었으며, 신성 로마 제국 체제는 바람 앞의 등불이 되었다.

그러던 1804년, 위기감을 느낀 프란츠 2세는 동군연합인 합스부르크 제국을 하나의 완전한 국가로 재편하며 오스트리아 제국을 창설했다. 황실군 육군과 해군은 자동적으로 신제국의 군대를 겸하게 되었다. 그리고 1806년 신성 로마 제국이 해체됨에 따라 황제군은 확실한 오스트리아의 군대로 거듭났다. 이후의 역사는 오스트리아 제국군 참고.

6. 주요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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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합스부르크 가문의 경우 오스트리아 대공국. 신성 로마 제국에 속하지 않은 국외 영지인 헝가리 왕국크로아티아 왕국의 병력을 소집하기 위해서는 해당 국가의 귀족들에게 따로 동의를 받아야 했으며, 신성 로마 제국에 속하나 기본적으로는 선거군주제였고 왕권이 약했던 보헤미아 왕국에서도 별개의 승인을 받아야했다.[2] 이는 별개였던 신성 로마 제국합스부르크 제국의 관계, 동군연합을 확실하게 알아야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다. 기본적으로 30년 전쟁 이전까지 합스부르크 가문독일어권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고 제위를 확보하려는 노력도 그 일환 중 하나였다. 그렇기 때문에 신성 로마 제국이 존속하던 시절에는 외국이더라도 같은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 군주만 모실 뿐 완전히 별개였던 헝가리-크로아티아 왕국보다는 신성 로마 제국 구성국이면서도 선제후 자격으로 황제선거에서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는 보헤미아 왕국이 더 중요시되었다. 게다가 합스부르크 제국은 느슨한 의미의 동군연합이었으므로 합스부르크 가문 군주들은 오스트리아에서는 오스트리아 대공으로, 보헤미아 왕국에서는 보헤미아 국왕으로, 헝가리 왕국에서는 헝가리 국왕으로, 크로아티아에서는 크로아티아 국왕으로 따로 통치했으며 각국의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서는 프라하, 프레스부르크로 가서 현지 귀족들과 논의해야 했기 때문에 각 나라별로 어느 정도의 자율성이 있었다. 그러나 나폴레옹 전쟁으로 신성 로마 제국이 사실상 무력화되자 30년 전쟁 이후 합스부르크 가문의 노선인 합스부르크 제국 내부 집중을 강화하기 위해 오스트리아 중심의 오스트리아 제국이 등장하면서 산하 국가들이 사실상 구성국화되고 신성 로마 제국의 해체로 선제후의 의미가 없어지자 보헤미아 왕국의 정치적인 중요성은 사라졌다. 거기에다가 보헤미아 왕국 자체가 마리아 테레지아 이후 점점 천대받고 보헤미아인도 점차 독일화되면서 친오스트리아 성향이 뚜렷해진 반면, 헝가리 왕국은 1848년 헝가리 혁명까지 계속 분리 독립을 시도하면서 합스부르크 가문의 골치를 아프게 했는데 대타협으로 헝가리 왕국이 외교와 국방을 제외한 전 분야에서 주권국가가 되면서 오스트리아 제국의 구성국에 불과한 위치로 남은 보헤미아 왕국을 확실하게 넘어섰다.[3] 비텔스바흐 가문의 카를에게 뺏긴 신성 로마 제위와 보헤미아 왕위를 제외하면 합스부르크 제국 내에서 가장 권위있는 직위였다. 물론 헝가리와 크로아티아는 신성 로마 제국의 구성국이 아니었다. 1804년 오스트리아 제국이 설립된 이후에도 헝가리와 크로아티아에서 합스부르크 가문 군주들은 신성 로마 황제, 오스트리아 황제와 별개로 독립된 헝가리 왕국과 크로아티아 왕국의 국왕이었다. 그래서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서는 주변국들이 마리아 테레지아의 신성 로마 제국 승계를 인정하지 않아도 헝가리-크로아티아 의회에서 군대 소집을 요구할 수 있었다.[4] 다만 1743년부터는 헝가리 왕국군기로 바꾸었다.[5] 합스부르크 가문의 가장 중요한 세습 영토인 오스트리아 대공국조차 슈타이어마르크 공국, 케른텐 공국 등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19세기 전까지는 각 지역의 신분제 의회에서 개별적인 승인을 거쳐야 군주권 행사가 가능했다.[6] 러시아 제국도 황제를 주장했으나 사실상 외왕내제였고 1721년 이전까지는 황제 칭호를 인정받지 못했다. 그리고 오스만 제국의 경우 당대 유럽인들이 칼리파 칭호 때문에 교황과 같은 지위로 인정했을 뿐 보편 황제로 인정하지는 않았다.[7] 제국전쟁은 외적을, 제국집행은 국내의 반란 세력에 대항해 선포된다. 선포 권한은 제국의회에 있었다. 이 중 제국집행은 신성 로마 제국 멸망 이후에도 독일 연방독일 제국, 그리고 바이마르 공화국에 계승된다.[8] 특히 란츠크네히트는 막시밀리안 1세 황제가 정책적으로 양성한 용병대였기에 합스부르크 가문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9] 20세기 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군의 현대화를 밀어붙였던 루돌프 몬테쿠콜리 제독의 직계조상이다.[10] 다만 기술적인 한계 또한 명확했기에 오래 쓰이지는 못했다. 또한 일반 보병대는 전열보병이라는 특성 상 지란도니 소총이 아닌 기존 머스킷을 그대로 썼다.[11] 현재의 벨기에룩셈부르크. 벨기에는 대서양 무역과 산업의 알짜였다. 비록 합스부르크 제국령과 유리되어 있다는 문제가 있었지만, 합스부르크는 벨기에를 기반으로 오스텐드 사와 동인도 회사를 수립하고 국제 무역에 뛰어들 수 있었다.[12] 신성 로마 제국 역사상 마지막으로 선포된 제국전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