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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연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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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연방
Deutscher Bu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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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국장
파일:독일 연방.svg
1815년 ~ 1866년
성립 이전 붕괴 이후
오스트리아 제국 오스트리아 제국
프로이센 왕국 북독일 연방
라인 동맹
리히텐슈타인 공국[1]
헤센 대공국[2]
바이에른 왕국
바덴 대공국
뷔르템베르크 왕국
역사
1815년 설립
1866년 붕괴
지리
위치 오스트리아, 체코,
독일, 리히텐슈타인,
룩셈부르크
수도 프랑크푸르트
인문환경
인구 24,900,000명(1820년)
언어 독일어
민족 독일인, 오스트리아인, 체코인, 슬로베니아인, 이탈리아인, 폴란드인, 덴마크인
종교 가톨릭, 개신교
정치
정치체제 국가연합
국가원수 의장[3]
경제
통화 탈러(Thaler)

1. 개요2. 역사
2.1. 배경2.2. 탄생2.3. 1848년 혁명: 흔들림의 시작2.4. 붕괴
3. 구성국4. 정치
4.1. 연방 의회4.2. 역대 의장
5. 경제6. 사회7. 문화

[clearfix]

1. 개요

1815년 빈 회의를 통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 의해 붕괴된 신성 로마 제국을 대체하는 한편, 독일어권 국가들[4] 사이의 산업 문제를 조정하기 위해 새로 설립된 국가연합. 총 39개 국가들이 참여했으나, 연방을 주도하는 맹주는 오스트리아 제국프로이센 왕국이었다. 이후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사이의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이후 오스트리아가 이 연방에서 축출되고, 프로이센이 일부 국가들과 북독일 연방을 설립하면서 붕괴됐다. 독일 제국의 모태 역할을 했다고 볼 수도 있다.

독일 연방은 편의상 '연방'이라고 번역하고는 있으나, 사실은 연방 국가(federation)가 아니라 국가연합(confederation)이었다. 한국어에서 연방으로 번역되는 정치체(政治體, polity) 중에 실제로는 연방 국가가 아닌 경우가 꽤 많으니 주의할 필요가 있다. 이와는 별개로 독일어로는 연방과 국가연합을 둘다 분트(Bund)로 표현하기 때문에 어찌보면 번역 자체가 아예 틀린 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2. 역사

2.1. 배경

1803년부터 1815년까지 지속된 나폴레옹 전쟁에서 오스트리아군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게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참패하게 되어, 프란츠 2세가 퇴위하고 신성 로마 제국은 1,000년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리고 나폴레옹은 독일과 프랑스 사이에 완충지대를 위해 그 유명한 라인 동맹을 세웠다. 아이러니하게도 나폴레옹에게 깨져서 반강제로 이 라인 동맹에 가입한 독일의 여러 국가들이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 이후 다시금 프랑스에 대항하여 싸우기 위해 동맹을 맺은 것이 독일 연방의 모체가 된다.

2.2. 탄생

마침내 나폴레옹이 몰락하고 유럽의 구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벌어진 빈 회의를 통해 1815년 6월 8일 독일 연방이 공식적으로 출범했다. 프로이센 왕국의 모든 영역을 포함하고 오스트리아 제국의 모든 영역을 제외한 독일 연방의 인구는 24,900,000명으로 이미 인구가 많이 증가해서 영향력은 높았다.

2.3. 1848년 혁명: 흔들림의 시작

외교적 타협과 균형의 달인이었던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의 인생 최고의 걸작이었던 만큼 처음 30여 년 간은 그럭저럭 잘 돌아갔다. 하지만 자유주의민족주의는 빈 체제의 억압적인 상황에서도 점점 더 커지고 있었고, 1848년 2월 프랑스에서 혁명이 일어나자, 그 열기는 독일로까지 곧바로 옮겨왔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독일을 휩쓸던 혁명의 열기에 겁을 먹고 민주적인 의회와 새로운 헌법, 통일된 독일을 약속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하지만 이 성명을 바탕으로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서 열린 의회에서 각 독일의 대표들은 소독일주의대독일주의 문제로 입씨름만 하면서 6개월 넘는 금쪽 같은 시간을 낭비하고, 이 틈을 노린 보수 반동세력들의 반격이 시작됐다. 프로이센군은 여전히 프로이센 국왕에게만 충성을 맹세했고 사회의 다수를 차지하는 농민들은 별 관심없는 상황에서,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프랑크푸르트 의회가 준 통일 독일 황제의 자리를 거부하고[5] 자유주의자들을 무자비하게 때려잡는다.

자유주의자들을 때려잡는 데 성공한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자신감을 되찾고 왕과 귀족 세력에게 모든 권력을 집중시킨 새로운 헌법을 발표하면서 독일 연방을 해체하고 프로이센 위주의 북독일 연방을 세우려했지만 오스트리아와 러시아의 반대로 실패. 그리고 이 앙금이 결국 전쟁으로까지 이어졌다.

2.4. 붕괴

연방의 주도권을 놓고 사사건건 으르렁거리던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사이의 다툼은 결국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으로 이어지고, 패배한 오스트리아는 연방에서 축출되면서 연방은 북독일 연방과 남부 4개국[6]으로 재편된다.

이후 북독일 연방1870년 독일 제국으로 국명을 바꾸고 남부 4개국까지 가입시킨 다음, 황제로 프로이센 국왕인 빌헬름 1세를 추대했다. 그리고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을 승리로 장식한 직후인 1871년 1월 18일베르사유 궁전에서 빌헬름 1세는 공식적으로 통일 독일 제국의 출범을 선포했다.

3. 구성국

아래 구성국들 중에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은 독일 연방에 속하지 않은 영토도 많이 가지고 있었다.[7] 이들 지역 대부분이 과거 신성 로마 제국의 영역 밖에 있었던 지역들이어서 독일 연방에서도 제외된 것.[8] 그러나 두 나라의 영향력은 압도적이라서 군대만 하더라도 독일연방군 11개 군단(10개 상비군단+1개 예비군단) 가운데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이 각각 3개 군단씩을 가지고 있었다.

4. 정치

4.1. 연방 의회

독일 연방을 구성하는 나라가 많은 것에 비해 연방 의회의 의석은 17석뿐이었다. 규모가 크거나 외국 왕이 동군연합인 나라 11개는 한 표씩 행사했고, 베틴 가문의 에른스트 계열 국가가 1표, 메클렌부르크의 2개 대공국이 1표, 브라운슈바이크+나사우와 올덴부르크+안할트가 1표씩, 나머지 공령들이 전부 연합해서 1표, 자유도시 4개가 1표를 나눠가졌다.

4.2. 역대 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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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제국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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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수이름재위기간
1프란츠 1세1815~1835
2페르디난트 1세1835~1848
3프란츠 요제프 1세1850~1866

1848년부터 1850년까지는 프랑크푸르트 의회가 실권을 가졌다.

5. 경제

당연히 실제로는 경제적인 문제가 이렇게 단순하지는 않았지만, 독일 연방에서 연상되는 것이 관세동맹이라고 할 수는 있다.

1834년 연방의 단결을 증진시킨다는 명분으로 프로이센의 주도하에 관세동맹(Zollverein)이 이루어졌다. 관세동맹의 애당초 목적은 경제 문제라기보다는 정치적인 것으로, 프랑스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는 경향이 강했던 소국들을 연방 내의 경제권으로 편입시킴으로써 추후에 있을지 모를 프랑스의 이간질을 방지하고자 하는 것이 주된 목표였다.[16] 관세 동맹이 체결된 지 약 10년이 지난 1842년이 되면 거의 모든 연방 내 국가들이 관세 동맹에 가담하게 된다. 그리고 처음 도입할 때는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지만, 이런 경제 공동체의 형성은 민족주의자들의 통일운동을 자극하는 한편, 독일 연방 내 국가들 사이[17]의 관세 폐지 및 도량형 통일이라는 성과를 만들어내면서 독일 통일의 초석을 다지는 것으로 이어진다.

6. 사회

1820년에 독일 연방의 인구는 24,900,000명으로 상당히 많았지만 이후에도 서유럽의 다른 지역에 비해 인구가 조금 더 빠르게 성장했다.[18] 이러한 인구 증가에는 각종 농업 기술이 발전하면서 과거와 같은 영양실조 및 기근으로 인한 아사가 크게 줄었던 점을 가장 먼저 꼽을 수 있다. 또한 각종 의학 기술이 발달하면서 유아 사망률이 크게 낮아진 것이 한 몫 했다는 의견도 있다.[19] 다만 중상층 계급에서는 출산율이 낮아지는 움직임도 동시에 관찰된다.[20] 더불어 미국으로의 이민도 이 시기 증가해서 약 30년 동안에만 240만 명이 미국으로 이민을 간 것으로 추산된다.

이름 탓에 독일인들로만 이루어졌을 거 같지만 정말 엄청나게 복잡한 다민족국가였다. 물론 독일인들이 수적으로 압도적인 다수를 차지하기는 했다. 우선 홀슈타인 지역에는 덴마크인이 전통적으로 살고 있었으며, 룩셈부르크에는 프랑스어를 모어로 삼는 벨기에인, 오스트리아에는 체코인, 이탈리아인, 슬로베니아인이, 프로이센에는 폴란드인, 카슈브인, 소르브인이 살고 있었다. 게다가 1839년 이후에는 비록 게르만 사촌관계라지만 네덜란드도 연방에 포함됐으니.....

여러 왕실들과 더불어 프로이센 왕국의 주요 지방인 브란덴부르크, 포메른 등 대규모 농장을 운영하는 융커(Junker)로 대표되는 귀족들이 상류층을 형성했다.[21] 이 융커 계층은 토지 소유권을 바탕으로 지역사회를 장악했을 뿐만 아니라, 법정과 군대 내의 고위직까지 차지하고 있었다. 여기에 면세 혜택과[22] 금융지원, 경찰력 행사와 같은 여러 특권을 누린 융커 계층은 독일 제국의 등장 이후에도 그들의 사회적 위신을 지키는데 성공하며 공무원과 군인 사회를 지배한다. 심지어 군인사회에 대한 지배력은 제2차 세계 대전때까지도 이어졌다.[23] 한편 슐레지엔루르지방을 중심으로 급속한 산업화가 이루어지면서 거대한 자본을 바탕으로 하는 부르주아 중산계급도 등장한다. 이들은 표면적으로는 1789년의 프랑스 부르주아들과는 달리 자신들의 재산을 안정적으로 지키기 위해 귀족들과 결탁한다. 물론 나중에 가면 실질적으로는 별 차이가 없어지긴 한다.

사회 최하층의 주류를 구성한 사람들은 예상했듯이 소작농들이었다. 융커들의 토지에서 소작을 하면서 생계를 이어가던 이들은 융커들이 보낸 대리인마름.......?의 감시와 함께 이 시기까지도 잔재한 봉건적인 의무들에 시달려야 했고, 여기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 프로이센 당국이 징병제를 실시하면서 이제는 사병으로 병역의 의무까지 져야 하는 등 여러모로 불쌍한 존재였다. 또한 산업화가 이루어지면서 노동자 계층도 형성되기 시작했지만 독일 사회민주당으로 상징되는 마르크스주의와 노동운동은 아직 이 시기에는 크게 부각되지 않고 있었다.

7. 문화

독일 문화 역사상 최고의 리즈 시절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프랑스 혁명낭만주의의 영향을 받아 문학, 음악, 학문 곳곳에서 대가들이 등장한다. 긴 말이 필요없이 이 시기 활동한 인물들의 목록을 한 번 봐보자. 입이 안 다물어진다.

문학
음악
학문

[1] 독일 연방에서 탈퇴.[2] 남부지역 한정.[3] 오스트리아 제국황제가 독일 연방의 의장을 겸임했다.[4] 19세기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이 복잡한 지역을 설명하기 위해 독일어권 지역이라는 표현을 썼지, '독일'이라는 하나의 통일된 나라라는 개념은 유럽인들 사이에서 없었다. 심지어 독일인들 사이에서도!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이 시기 각종 사료에는 '독일'을 복수형으로 사용했으며('독일들'), 단수로서 '독일'이라는 표현은 등장하지 않는다. '독일어권' 이 아닌 통일된 국가로써의 '독일' 개념이 쓰이기 시작한 것은 1848년 혁명 때부터이다.[5]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왕권신수설을 진심으로 믿는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이 '폭도'들이 준 왕관을 받을 리가 없다.[6] 헤센다름슈타트 대공국(남부 지역만 북독일 연방에서 제외, 북부는 명목상 헤센의 영토이긴 했으나 연방에 가입되면서 실질적으로는 프로이센에서 관리를 임명하여 통치), 바덴 대공국, 바이에른 왕국, 뷔르템베르크 왕국.[7] 오스트리아 제국헝가리 왕국, 에르데이 대공국, 부코비나 공국,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왕국, 프로이센 왕국동프로이센서프로이센, 포젠.[8] 동프로이센서프로이센신성 로마 제국 시절에도 폴란드 왕국폴란드-리투아니아의 영토였다. 브란덴부르크 선제후였던 호엔촐레른 가문이 프로이센 국왕을 칭한 이유도 본토인 브란덴부르크는 신성 로마 제국 안에 있어 왕을 칭할 수 없었기 때문에 외지였던 프로이센의 이름을 따와서였다.[9] 1826년, 작센고타알텐부르크 공가의 대가 끊기면서 에른스트계 공국들간에 영지 교환 및 합병이 일어났고 이때 작센코부르크잘펠트 공국은 잘펠트 지역을 포기하는 대신 더 큰 지역이던 고타 지역을 합병하면서 작센코부르크고타 공국으로 국호가 바뀌었다.[10] 작센코부르크고타 공국과 마찬가지로 1826년, 작센고타알텐부르크 공가의 대가 끊겼을 때 힐트부르크하우젠 지역을 작센마이닝겐 공국에게 넘긴 대신 알텐부르크 지역을 합병, 작센알텐부르크 공국으로 국호를 바꿨다.[11] 1815년에 공국에서 대공국으로 승격했으나 올덴부르크 공작이 대공을 칭하게 된 것은 1829년부터이다. 당시 올덴부르크를 다스리던 이는 빌헬름 공작이었는데 그는 빈 회의 이전부터 올덴부르크를 다스리고 있었기 때문에 1815년, 올덴부르크가 대공국으로 승격한 이후에도 계속 공작을 칭했고 그가 사망한 1823년에 즉위한 빌헬름 공작의 후임, 페터 1세 역시 스스로를 올덴부르크 공작으로 칭했기 때문에 1829년, 페터 1세의 후계자인 아우구투스 대공이 즉위하기 전까지 올덴부르크는 대공국이면서 군주의 칭호는 공작인 상황이 발생했다.[12] 안할트-쾨텐 공국은 1847년에 안할트-베른부르크에, 안할트-베른부르크 공국은 1863년에 대가 단절되어 안할트-데사우에 통합되었다.[13] 둘 모두 1850년에 프로이센 왕국에 합병[14] 1820년에 가입하였으나 1866년 헤센 대공국에 통합되었다.[15] 모두 1820년에 가입하였다.[16] 또한 프로이센 입장에서는 이런 통 큰 모습을 보여주어서 연방 내 주도권을 놓고 다투고 있던 오스트리아를 견제하고자 하는 목적도 있었고.[17] 단 오스트리아는 제외[18] 오스트리아 제국은 제외한 통계이다.[19] 하층민 사이에서 유아 사망률은 높은 편이었다. 독일 연방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지 30년이 지나고 나서 나온 함부르크 시 통계를 보면 20~30%의 신생아가 1세를 못 넘기고 사망했다. 이 정도면 과거와 크게 다르지 않다.[20] 이 시기 산업화가 점진적으로 진행되면서 출생률과 사망률이 모두 낮아지며 인구 규모가 고착화되는 현상도 관찰된다.[21] 동프로이센의 융커 계층은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선제후 시절 대부분 정리되어 숫자가 많지 않았다. 그리고 동프로이센은 독일 연방에 속하지 않은 프로이센 왕국의 역외 영토였다.[22] 1861년에야 관련법규가 생겨 귀족들도 세금을 내기 시작했다.[23] 2차 대전 때 독일군 주요장성들의 출신성분을 보면 융커 출신이 아닌 사람을 찾는 게 더 빠르다. 예를 들면 사막의 여우라 불렸던 에르빈 롬멜이 있다.[24] 1794~1827. 후기 낭만파에 속하는 서정 시인으로 하인리히 하이네에게 큰 영향을 끼친 시인이다. 만 32세로 요절하여 만 31세로 죽은 프란츠 슈베르트와 비슷한 짧은 삶을 누렸다. 그래도, 살아생전에 자신이 쓴 시의 문학적인 가치를 인정받았고 아버지가 고위 관직에 있던, 데사우 명문 가문의 영애 아델하이트 바제도프와 결혼도 했으며 말년에는 학교 선생으로 그럭저럭 넉넉하게 살다가 갔다. 1817년 ~ 1818년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비교적 자유롭고 구속이 없는 이탈리아 민중의 모습을 본 후 빈 회의와 칼스바트 협약을 통해 독일이 구체제로 돌아간 것에 대해 실망감을 표시하며 시대 비판적이고 자유주의적인 민요풍의 시를 많이 남겼다. 나폴레옹에 동조한 괴테를 줏대없는 카멜레온이라며 비판하기도 했다. 그리스 독립 전쟁을 적극적으로 응호했기에 '그리스인 뮐러'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그의 아들 막스 뮐러는 동양학자ㆍ비교언어학자 및 <독일인의 사랑>이라는 소설의 저자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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