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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8 13:33:45

요한 고틀리프 피히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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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피히테
Fichte
파일:Johann_Gottlieb_Fichte_1.jpg
본명 요한 고틀리프 피히테
Johann Gottlieb Fichte
출생 1762년 5월 19일
신성 로마 제국 작센주 라메나우
사망 1814년 1월 27일 (향년 51세)
프로이센 왕국 베를린[1]
국적 [[신성 로마 제국|
파일:신성 로마 제국 국기(후광 포함).svg
]] 신성 로마 제국
모교 슐포르타 공립학교
예나 대학 (1780)
라이프니츠 대학 (1781~1784)
경력 예나 대학 교수
에를랑겐 대학 교수
베를린 대학 총장
직업 철학자
사인 파일:요한 고틀리프 피히테 서명.svg

1. 개요2. 생애3. 사상
3.1. 칸트 철학의 문제점3.2. 자아
3.2.1. 절대적 자아3.2.2. 지적 직관과 사행3.2.3. 학문론의 세 가지 원칙3.2.4. 충동
3.3. 타인에 대한 승인3.4. 후기 철학
4. 《독일 국민에게 고함》5. 저서6. 여담

[clearfix]

1. 개요

독일의 주관적 관념론 철학자. 피히테는 개인의 자유로운 자아를 강조하면서, 우리 자신을 비자아와 대립시키고 주위 환경과 맞서 있는 것으로 규정한다. 자유의 법칙은 자아가 그를 둘러싸고 있는 외부 세계와의 대립을 전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편, 피히테는 이렇게 개인의 자유로운 자아를 강조하면서도 사회적으로는 당시 프랑스의 독일 점령에 맞서 각 자아는 민족의 관점에서 강도 높은 문화·도덕적 결속을 다져야 된다고 주장했다.

피헤테는 모든 개인이 국가에 종속되는 나폴레옹식 국가 내셔널리즘에 반대하면서, 문화로서 민족이 규합되어야 한다는 문화국가적 민족주의를 주장하였다.# 오늘날의 인식과 달리, 당대 독일의 민족주의는 프랑스 침략자에 대한 저항 담론으로 퍼져나갔다.[2]

2. 생애

피히테는 1762년 프로이센의 작은 마을 라메나우에서 리본을 만드는 직공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아버지를 도와 농촌일을 맡았으나 9살 때 목사의 말을 그대로 암기하는 피히테의 천재성을 눈여겨 봤던 부유한 지주 밀티츠 남작이 그를 교육시키기로 결심한다. 12살에 남작의 도움을 받아 마이센의 라틴어학교를 잠시 다닌 후, 니움부어크에 있는 포르타(Pforta) 학교에 입학했다. 18살에 예나 대학에서 신학 및 법학공부를 시작했지만 22살이 되는 1784년에 후원자가 죽었고 이후 피히테는 가정교사를 하면서 근근히 살아갔다.

1790년 가정교사를 하기위해 취리히에 갔다가 취리히의 명망있는 상인의 딸 '마리 요한나 란'과 약혼했다. 이 무렵 과외를 받는 학생에게 당시 유행했던 칸트철학을 가르쳐주기 위해 칸트를 한동안 연구했었는데, 이를 계기로 피히테는 칸트의 영향을 크게 받게 된다. "실천이성비판을 읽은 이후로 나는 새로운 세계에 살고 있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이러는 중 부유했던 장인이 파산해서 약혼이 취소되기도 하고, 그로 인해 홀린듯이 바르샤바로 가서 플라텐 백작 아들의 가정교사가 되기도 했다. 바르샤바에 있는 동안, 잠시 칸트가 살고 있던 쾨니히스베르크에 4주간 머물면서 《모든 계시의 비판》이라는 글을 써서 그 원고를 칸트에게 보냈는데, 원고를 받아본 칸트는 피히테에게 출판사를 소개시켜준다.

1792년, 30살에 피히테의 책이 라이프치히와 쾨니히스베르크에서 익명으로 출간되었다. 이 책은 칸트의 학문적 지지자들이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칸트의 새로운 종교저술로 오해를 받아 많이 팔리게 된다. 이런 오해에 대해 칸트는 흔쾌히 피히테가 그 책의 저자임을 공식적으로 밝혔는데, 이 사건을 계기로 피히테는 갑자기 유명인사로 떠올랐다.

다음해, 인세수입이 생기고 여유가 있어지자 약혼자였던 요한나 란과 다시 만나 취리히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그는 신혼여행 후 얼마간의 휴식에서, 그의 평생의 철학적 주제가 될 '자유의 자아'(Freiheits Ich)라는 획기적인 생각을 떠올리게 된다. 얼마되지 않아 라인홀트의 후임으로 마침내 예나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그는 횔더린으로부터 "이제 피히테는 예나의 혼이다"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예나 대학에서의 교수생활을 매우 정력적으로 임했으며 이 기간 동안 많은 논문과 책들을 발표한다. 그러나 그는 수업시간을 너무나 정직하고 완고하게 지켰고, 심지어 수업을 더 하기 위해 개설한 일요 강연은 본의 아니게 예배 시간과 겹치면서 많은 사람들의 적대감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학생들이 만든 비밀결사 조직이 피히테 집의 유리창을 깨는 사건이 벌어지자 피히테는 여름학기 동안 오스만슈테트로 집을 옮기게 된다.

하지만 사정은 점점 더 악화되었다. 1798년 그의 제자 포르베르크가 쓴 『종교 개념의 전개』에 피히테는 서론을 작성했는데, 이 글로 인해 피히테는 무신론자라는 비방을 받았다. 자신의 철학은 무신론이 아니라는 《대중들을 향한 호소》를 작성했으나 그가 원했던 완전한 이해를 얻지 못했다. 그는 결국 예나대학을 떠날 수 밖에 없었다. 괴테는 이에 대해 "우리가 피히테를 잃어버려야만 한다는 것, 그리고 그의 어리석은 월권행위로 인해 그가 생활토대를 잃어버리게 된 것은 유감이다"라고 말했다. 피히테는 예나를 떠나 베를린에 있는 친구 슐레겔을 찾아갔고, 베를린 학술원의 복도와 자신의 집에서 사적인 강의를 진행하면서 낭만주의 철학자 슐라이어마허 등과 친교를 맺었다.

1805년(43세)에는 에를랑겐 대학의 초빙을 받고 한 학기를 가르쳤다. 하지만 그 학기가 지나자마자 1806년 나폴레옹의 프랑스가 프러시아를 점령했고, 피히테는 프로이센 정부 및 패한 군주와 함께 쾨니히스베르크로 도피할 수밖에 없었다. 피히테는 쾨니히스베르크에서도 학생들을 가르쳤으나, 1807년 러시아가 쾨니히스베르크를 점령하자 다시 나폴레옹이 점령하고 있던 베를린으로 돌아왔고, 그는 죽을 각오를 하고 베를린 학술원 건물에서 독일 민족의 단합을 외친 《독일 국민에게 고함 (Reden an die Deutsche Nation)》을 연설했다. 1810년 베를린대학이 창립되었을 때, 그는 초대 선출 총장이 되었다.

1812년 프랑스로부터 독립하기 위한 독일의 독립전쟁이 한창이었다. 피히테는 50세가 되었고 지병이 악화되어 팔다리가 점차 마비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예비군 교육에 참가한 다음, 완전군장 차림으로 학교에 와서 강의를 했다고 한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가 이 때 그의 강의를 들었다. 52세, 독립전쟁을 지원하기 위해 간호사가 된 부인에게서 옮은 티푸스에 감염되어 숨을 거뒀다.

3. 사상

3.1. 칸트 철학의 문제점

칸트는 자신의 철학을 두가지 관점으로 나누어 설명했다.[3] 순수이성과 실천이성이 바로 그것이다. 외부의 대상을 인식하는 역할을 하는 순수이성을 피히테는 '이론이성'이라고 부른다. 예를 들면, 눈을 뜨고 있으면 보고 싶지 않아도 외부의 사물들이 인식된다. 나무가 보이고 거리가 보이고 건물이 보이는 것은 눈을 뜨고 있는 이상 어쩔 수 없이 봐야만 하는 것이다. 이는 외부 대상인 자연에 의해 의식이 결정된다는 결정론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론이성(순수이성)은 자연의 인과 법칙에 종속된다고 볼 수 있다.

반면에 실천이성은 인간 스스로가 인과의 시작이 되는 이성을 말한다. 인간은 '자연의 인과 법칙'에 따라서만 살아가지 않는다. 예를 들어, 인간이 본능에 따라 배고파서 밥을 먹는 것은 자연의 인과법칙에 속하지만, 어떤 인간은 그러한 자연의 법칙을 거슬러서 자신의 배고픔을 참으며 옆사람에게 밥을 양보하기도 한다. 이렇게 자연의 인과법칙을 어기고 '스스로가 정한 도덕 법칙'을 따르는 것을 두고, 칸트는 (자연의 인과법칙으로부터) '자유롭다'고 정의내린다. 따라서 '자유로운' 판단을 할 수 있는 실천이성은 스스로가 그 자신의 행동에 대한 인과의 출발점이 된다.

이렇게 칸트에게 있어서 이성은 서로 다른 두가지 이성으로 파악된다. 이론이성은 자연의 인과 법칙에 종속되지만, 실천이성은 자연의 인과 법칙을 깨부수고 자신의 법칙을 만들어 나간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점이 드러난다. 사실 두 이성은 하나가 아닌가? 우리는 자연적 욕망에 사로잡히면서도 동시에 도덕적인 행동도 하는 인간이 아닌가? 이로써 피히테는 상반된 두 이성을 하나로 합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한다.

3.2. 자아

3.2.1. 절대적 자아

상반된 두 이성을 어떻게 하나로 합칠 수 있을까? 피히테는 그 해답을 칸트에게서 찾는다. 칸트는 순수이성(이론이성)의 작용 중에서, 표상을 하나로 모아 통일하는 능력인 '순수 통각'에 대해 얘기하며 " '나는 생각한다'라는 표상은 '자발성'을 지닌 작용이다. 즉 이것은 감성(자연의 인과법칙)에 속한 것으로 간주될 수 없다." 라고 말한 바 있다. 여기서 표상을 통일하는 능력인 '순수 통각'은, 외부 대상의 경험과 상관없이 '자기의식 내에서만 벌어지는 순수한 자아의식'이므로[4] 이 사유는 자연의 인과법칙에서 자유롭다. 게다가 이 능력은 스스로가 인과법칙이 되는 실천이성과도, '자유롭다'는 점에서 서로 의미가 통한다. 따라서 피히테는 두 이성을 포괄할 수 있는 '순수 통각'에, '자유를 가진 자기의식'의 의미를 부여하고자 한다.[5]

이러한 순수 통각의 자기의식은, 모든 표상을 통합하면서도 스스로를 끊임없이 또다른 표상으로 만들어 분열하는 의식이라는 특징이 있다. 그리고 그 분열된 표상은 스스로에게 다시 통합된다.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피히테가 학생들에게 한 이야기를 살펴보자.
"여러분, 저 벽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이어서 "여러분, 그 벽을 생각하고 있는 사람을 생각해 보십시오."
분명 우리는 이런 식으로 한없이 계속할 수 있다.
"여러분, 그 벽을 생각하고 있는 사람을 생각하고 있는 사람을 생각해 보십시오." 등등.

달리 말하자면, 자기를 아무리 대상화하더라도, 곧, 자기를 비록 아무리 의식의 대상으로 바꾼다 하더라도, 거기에는 언제나, 어떤 대상화도 초월한 자아가, 그리고 그 자신이 모든 이 대상화를 가능하게 하는 제약이며, 또 의식의 통일의 제약이기도 한 자아가 남는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철학의 제1원리인 순수자아 또는 초월론적 자아인 것이다.
《18·19세기 독일 철학》 p.80
'자아를 제약하는 자아'는 '자아를 제약하는 자아를 제약하는 자아', '자아를 제약하는 자아를 제약하는 자아를 제약하는 자아' 등등으로 무한히 적용될 수 있다는 점에서 '무제약적 자아'이다. 하지만 무제약적 자아는 다시 '순수 통각'의 작용에 의해서 하나로 통일된다.[6] 그러므로 이 의식은 항상 자기가 자기의 원인이자 결과인 '자기 원인'(causa sui)이 된다. 즉 스스로가 인과의 시작이 되므로, 이 의식은 실천이성과 동일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피히테는 이런 무제약적 순수 통각의 자기의식을 절대적 자아라고 부른다.[7][8]

3.2.2. 지적 직관과 사행

앞에서 봤듯이, 이론이성의 모든 체계는 자연의 인과 법칙에 종속되어 있지만 여기서 모든 표상을 종합하는 자기 의식인 '순수 통각'만큼은 자연의 인과에서 벗어나 있다. 즉 '순수 통각'의 자기 의식은 무제약적이고 자유롭다. 이에 따라 우리는 드디어 이론이성과 실천이성을 합칠 수 있게 되었다. 둘 다 자유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순수 통각의 자기 의식과 실천이성의 도덕적 자아[9]는 결국 모든 자아가 나의 자아임을 직관하는 '지적 직관(Intellektuelle Anschauung)'을 통해 하나의 자아를 정립한다.

이렇게 무제약적으로 분열되는 자아를 끊임없이 하나로 정립한다는 점에서 자아는 분열과 통합을 동시에 수행해 내는 '활동(Tätigkeit)으로서의 자아'이기도 하다. 사실 피히테가 생각하는 자아의 본질은 '자기의식'의 자유로운 '활동'에 있다. 피히테는 심지어 (엄밀한 의미에서) '활동하는 자아'라고 말해선 안된다고 주장한다.[10] 자아가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활동함으로서 자아가 되기 때문이다. 즉, 활동 그 자체가 바로 자아이다. 피히테에게 있어서, 활동하지 않는 자아는 더 이상 자아라고 할 수 없다. 따라서 피히테의 자아는 하나의 고착화된 상태가 아니라, 끊임없이 자신을 드러내서 외부의 경험을 흡수하고 그걸 자신에게 다시 통합하는 역동적인 행위[11]가 된다. 이를 사행[12](Tathandlung)이라 한다.

3.2.3. 학문론의 세 가지 원칙

이제 피히테는 '지적 직관을 통해 정립된 절대적 자아가 무제약적으로 스스로를 산출하고 다시 통합하는 역동적인 활동'(Tathandlung)을 모든 학문의 기초로 두고자 한다. 활동은 도식 상으로 3가지 원칙을 따른다. 우선 동일한 하나의 절대적 자아를 정립한다. 이와 동시에 그 외부 대상인 비아(전체 자연) 역시 정립된다. 그리고 '절대적 자아'와 '비아(전체 자연)'의 사이에서, 경험하는 자아(경험적 자아)와 경험당하는 자연(일부 자연)이 정립한다. 따라서 절대적 자아에서 경험적 자아가 도출되는, 학문론의 3가지 원칙은 이렇게 정립된다.
Ⅰ. 자아는 근원적이고 전적으로 자기 자신의 존재를 정립한다. ( Das Ich setzt ursprünglich schlechthin sein singenes Seyn.)

Ⅱ. 자아에 대하여 비아가 전적으로 반정립된다. ( ... wird dem Ich schlechthin entgegengesetzt ein Nicht-Ich.)

Ⅲ. 나는 내 속에, 가분적 자아에 대립해서 가분적 비아를 정립한다. ( Ich setze im Ich dem teilbaren Ich ein teilbares Nicht-Ich entgegen.)
ⅰ. 자아는 자기 자신을, 비아에 의해 제한된 것으로 정립한다. ( ... das Ich setzt sich selbst, als beschränkt durch das Nicht-Ich.)
ⅱ. 자아는 비아를, 자아에 의해 제한된 것으로 정립한다. ( Das Ich setzt das Nicht-Ich, als beschränkt durch das Ich.)

《전 학문론의 기초 (Grundlage der gesamten Wissenschaftslehre)》
지식학을 가능케 하는 근본적인 도구로서의 세가지 원칙은, 자아가 사행(Tathandlung)할 때 그 사행의 변증법으로 이해될 수 있다.

첫째, 자아는 스스로를 정립한다. 이는 'A=A'는 옳은 명제라는 동일률에 근거하고 있다. 여기서 자아는 절대적 자아를 가르킨다. 여기서 절대적 자아는 한 개인의 자아가 스스로를 자아로 규정함에 있어서 절대적인 것이지, 결코 자아가 절대적인 신이라거나 초개인적인 보편자라는 것은 아니다.[13] 자아가 스스로를 자아로 규정한다는 것은, 절대적 자아가 자기동일성을 유지하는 것을 자기의 본질로 삼는다는 것을 말하며, 이제 절대적 자아는 외부 자연의 인과 법칙에서 독립해서 자아 스스로가 스스로의 인과법칙의 시작이 된다는 것을 말한다. 즉 절대적 자아는 자연의 인과 법칙에서 벗어나 자기자신이 자유롭게 생각하고 움직일 수 있는 그러한 독립된 개인의 의지가 생겼음을 규정한 것이다.[14]

둘째, 자아에 대하여 비아가 정립된다. 이는 A≠A는 틀린 명제라는 모순율의 근거하고 있다. 독립된 자아는 자신과 다른 것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자신과 다른 대상이란 자신이 (상대로) 인식하는 대상, 곧 자연을 말한다. 이는 경험하지 않아도 직관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이다.[15]

셋째, 자아는 가분적 자아로 가분적 비아를 정립한다. 이는 근거율에 근거하고 있으며 '제한'(Limitation)을 의미한다. 자아의 정립과 비아의 정립은 그 사이 연결고리(매개)를 정립한다. 우리는 독립된 자아가 규정되는 순간, 그 자아가 외부 세계에 대해 욕망과 충동을 가진 자아임을 알게 된다. 따라서 자아의 외부에 세계가 있다는 규정으로, 인간은 그 외부의 자연을 의욕하는 자, 추구하는 자로서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바로 여기서 '경험'하는 자아, 즉 '경험적 자아'가 발견된다. 앞서 외부의 세계를 의욕하는 '자아'는 외부 세계이자 자연인 '비아'에서의 '경험'을 추구하게 되는 것이다. 절대적 자아는 머릿 속에서만 구성되는 선험적 자아이지만, 경험적 자아는 현실 세계에서 실제로 경험을 하는 자아를 의미한다. 경험하는 자아는 산책하는 자아, 공부하는 자아, 게임하는 자아 등등으로 사건에 따라 나누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가분적 자아'라고 불리기도 한다. 여기서 경험적 자아인 자신은, 자신이 경험했던 기억들로 규정되고 제한된다. 경험은 '외부 세계(자연)에 대한 경험'이므로, 경험적 자아는 (자신에게 경험되어진) 비아에 의해 제한된다. 또한 비아인 자연은 나의 관념적 활동의 산출물(지식)로 구성된다는 점에서 나에 의해 제한되는 것이다. 이를 합치면, 경험을 통해 자아와 자연(비아) 사이의 상호 제한이 이루어진다.

더이상 '지식'은 칸트가 말했던 것처럼, 자연의 인과 법칙에 종속되어 인간의 의식에 저절로 주어지는 것[16]이 아니다. 피히테에 이르러선 거꾸로, 자연은 자아의 활동을 통해서 끊임없이 자아의 의식으로 재산출되는 지식으로 바뀐다.[17] 그러므로 지식은 자아라는 활동에 의해 적극적으로 찾고 만들어 가는 것이다.

3.2.4. 충동

칸트는 인간의 이성을, 자연의 인과법칙에 종속되는 순수이성(이론이성[18])과 그 자연의 인과에서 벗어나 스스로가 인과의 시작이 되는 실천이성으로 나누었다. 스스로가 인과의 시작이라는 것은 자연 법칙에서 벗어나 도덕적 행위를 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이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이며, 이러한 도덕적 행위는 인간이 자율적으로 행해야 이루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인간의 '자유'에 속한다. 따라서 이론이성(순수이성) 보다 실천이성이 우위에 있어야만 한다. 이것이 칸트의 윤리학이며, 여기까지는 피히테도 동의하는 바이다. 하지만 피히테에게 있어서 자아는 하나의 자아가 되어야 한다. 이론이성과 실천이성이 구분되어서는 안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도입된 것이 '절대적 자아'이다.

독립된 '절대적 자아'가 정립되자마자 직관적으로 그 자아 밖의 '자연'(비아) 역시 절대적으로 규정(정립)되고, 이후 이 사이를 매개하는 '경험적 자아'와 '경험당하는 비아'가 정립된다. 이제, 모든 문제는 이성의 문제가 아니라 자아의 문제로 바뀌게 된다. 즉, '자아가 어떤 활동을 하는가?' '자아의 활동을 움직이는 것은 무엇인가?'의 문제로 되어버린 것이다. 피히테는 자아의 활동, 그 내면에 '의지', '욕망' 등이 있음을 파악한다. 그것을 피히테는 '추구'(Streben)라고 한다. 자아는 자연을 대상으로 경험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활동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자연은 자아의 추구작용에 대해 반대추구 내지는 저지로서 작용하기 때문에, 자아의 '추구'는 종종 세상(자연)에 의해 '저지'(Anstoß)당한다. 즉, 이제 자아는 그 자아를 저지하는 세상(자연)을 변화시키기를 욕망하는 자아가 되는 것이다.

피히테에 따르면, 세상을 변화시키거나 아니면 세상에 안주하기를 원하는 여러가지 '추구'들은 그 내면의 '충동'(Trieb)들에 의해서 작동되어진다. 충동에는 여러가지가 있다. 자연충동은 물질적인 것을 목표로 오직 즐기고 누리기 위한 충동인데 비하여, 순수충동은 '절대자에로의 절대적인 경향' 내지 '그 자신을 위한 독립적인 활동을 향한 충동'을 말한다.[19] 이 두 가지 충동 형식은 인간에게 있어서 하나의 '혼합된 충동'으로 나타나는데, 이 '혼합된 충동'이 의무적 의식으로서의 '양심'(Gewissen)[20]을 통해 도덕적 실천으로 드러나는 과정이 피히테의 윤리학이 된다. 칸트의 《실천이성비판》이 단지 실천이성에만 기초한 경직된 윤리학이었다면, 피히테의 윤리학은 순수충동과 자연충동을 통합하므로써 그 갈등 속에서 양심을 지키고자 하는 자아로서의 윤리학이라는 점에서, 칸트의 윤리학 보다 더 훨씬 유연하고 현실적인 윤리학이라고 할 수 있다.

3.3. 타인에 대한 승인

피히테는 우리 외부의 비아가 이제 하나의 '자연 사물'이 아니라 또다른 하나의 자아, 즉 '타인'일 경우에 이러한 비아로부터의 저지는 부정되고 무화시켜야 할 그런 것이 아니라고 한다. 타인에 의한 저지는 이 때, 자아를 향한 하나의 '요구'(Aufforderung)로 나타난다. 타인 역시 나와 같이 자유를 가진 존재자이기 때문에, 자아는 타인의 이러한 '요구'에 부응하여 서로가 서로를 자유로운 자로 승인하는 상호승인의 관계에 들어서야 한다. 이로부터 마침내 기초적인 "법의 명제"가 발생한다. "너 이외의 다른 모든 사람들도 자유로울 수 있도록 너의 자유를 제한하라"[21]

타아는 자아에 의하여 부정되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 함께 윤리적인 사회를 건설해 나가야 할 협력자라는 점을 피히테는 강조한다. 이러한 승인은 결코, 일자에 의한 타자의 일방적인 승인이 되어서는 안된다. 일방적인 승인은 무의미한 것이다. 이렇게 상호승인이 실현되는 상황은 일찍이 칸트가 말한 '목적들의 왕국'에 대응한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피히테의 상호승인론은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으로 유명한 헤겔의 승인론을 선취하는 성과이지만 학계나 심지어 전공자에까지도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3.4. 후기 철학

피히테의 전기 철학은 칸트의 선험적 통각(순수 통각)을 순수한 자아의식으로 이해했다는 데에 의심이 있을 수 없다.[22] 그리고 피히테는 선험적 영역에서의 순수한 통각을 '절대적 자아'라고 인식했다. 하지만 후기 철학의 시작으로 간주되는 1800년 경부터 피히테의 사유에 변화가 생긴다. 그는 학문론의 후기 원고에서, 자아와 비아의 분열을 넘어서 (신적인) 절대자 속에 있는 통일의 원리에 이르고자 한다. 이 때의 절대적 자아는 곧 절대자, 신을 뜻하기도 한다. 즉, 피히테는 학문론에서처럼 모든 경험적 의식의 근저에 있으면서 경험을 가능케 하는 선험적 의식으로서의 절대적 자아를 이야기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절대자, 신이라는 의미로 절대적 자아를 사용하고 있다. 왜냐하면, 절대적 자아는 유한한 자아(경험적 자아)에게 있어서 하나의 이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나는 나"라고 하는 절대적인 통일에 이를 수 있는 것은 오직 신적인 경지에서만 가능한 것이고, 유한한 인간에게 있어서 그것은 도달할 수 없는 하나의 이상에 불과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유한자인 인간의 자아에 있어서 비아는 궁극적으로는 부정될 수 없는 한계로서 남게 된다. 그러므로 그 자연을 이해하려는 절대적 자아는 엄밀한 의미에서 '신의 자아'일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피히테는 '비아의 절멸을 향한 무한한 추구'라는 초기의 입장에서 돌아서서, 자신의 후기 철학으로 갈수록 추구의 방향을 '절대자와의 합일'이라는 것으로 입장을 바꾼다. "불변자와 하나가 되고자 하고 융해되고자 하는 이 충동은 모든 유한한 현존재자의 가장 내밀한 뿌리다."[23] 이러한 절대자와의 합일에 의하여 복된 삶(seliges Leben)을 얻을 수 있다고 그는 말한다.

일찍이 피히테는 『신의 세계통치에 대한 우리들의 믿음에 대하여 (1798)』라는 글에서, 신을 도덕질서와 동일시함으로써 이른바 '무신론 논쟁'에 휘말리게 되어 마침내 예나 대학 교수직을 사임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제 그는 신을, 우리의 '지의 추구'에 있어서 우리가 향해야 하는 절대자로 파악하게 된다.

4. 《독일 국민에게 고함》

저서로는 프로이센 학사원에서 행한 연설을 책으로 묶은 《독일 국민에게 고함(Reden an die deutsche Nation)》이 단연 유명하다. 민족주의의 시작은 피히테가 1807~08년에 나폴레옹 치하의 베를린에서 행한 강연인 《독일 국민에게 고함》에 사상적 기원을 두고 있다고 말하기도 할 정도로 근현대 민족주의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피히테는 이 연설을 통해 독일 민족을 정의하고, 독일 민족이 처한 현재의 상황, 즉 분열되고, 외세에 의해 정복되어 있는 상황에 대한 원인을 분석하며, 극복 방안을 제시하였다. 피히테에 따르면 독일인을 다른 게르만 민족들과 구분지어주고, 독일인이 가진 우월함의 기반이 되는 것은 바로 "언어(독일어)"이다. 민족은 고유의 언어를 통해 만들어지고, 이러한 언어는 민족의 발전을 통해 같이 성장한다.

또한 그는 이 책에서 그는 독일이 나폴레옹 전쟁에서 프랑스에게 패배한 근본적인 원인은 이기심이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국민 교육'이 중요하다고 주장하였다. 다만 이 저서만 지나치게 유명한 탓에 피히테의 관념론자, 철학자로서의 면모는 잘 기억하지 못하고 그저 극렬한 국가주의자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 함정(...)

5. 저서

대표작은 《전 학문론의 기초》이며, 대중적으로는 《독일국민에게 고함》이 유명하다. 평생에 걸쳐 '학문론[24](Wissenschaftslehre)'에 대해서 글을 쓰고 강의를 했는데 대부분의 책이 학문론과 관계되어 있다. 데카르트로부터 칸트에 이르기까지 경험에 대한 '인식론'이 학문의 주된 방향이었으나, 피히테에 이르러 '지식(Wissen)' 그 자체에 집중하는 학문론(Wissenschaftslehre)이 학문의 주된 흐름이 된다. '지식'에 집중하는 이러한 경향을 '관념론'이라고 하며, 이후 셸링헤겔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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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발간 연도
<colbgcolor=#fff,#1f2023> 《두 편의 설교》
Zwei Predigten
<colbgcolor=#fff,#1f2023> 1791년~1792년
《모든 계시의 비판의 시도》
Versuch einer Kritik aller Offenbarung
《지금까지 그들을 억압한 유럽의 군주들로부터 사상의 자유의 반환을 청구함》
Zurückforderung der Denkfreiheit von den Fürsten Europas, die sie bisher unterdrückt haben
1793년
《프랑스 혁명에 대한 대중의 판단을 바로잡기 위한 기고》
Beitrag zur Berichtigung der Urteile des Publikums über die französiche Revolution
《기초 철학에 대한 몇 개의 성찰》
Eigne Meditationen über Elementarphilosophie
《전 학문론의 기초》[25]
Grundlage der gesamten Wissenschaftslehre
1794년~1795년
《학자의 의미에 관하여》
Von den Pflichten des Gelehrten
《언어능력 및 언어의 기원에 관하여》
Von der Sprachfähigkeit und dem Ursprung der Sprache
1795년
《학문론의 특징의 개요》
Grundriß des Eigentümlichen der Wissenschaftslehre
《진리에 대한 순수한 관심의 고취 및 고양》
Über Belebung und Erhöhung des reinen Interesses für Wahrheit
《도덕에 관한 강의》
Vorlesung über die Moral
1796년
《자연법의 기초》
Grundlage des Naturrechts
1796년~1797년
《새로운 방법에 의한 학문론》
Wissenschaftslehrenova methodo
1796년~1799년
《학문론의 첫번째 서론》
Erste Einleitung in die Wissenschaftslehre
《학문론의 두 번째 서론》
Zweite Einleitung in die Wissenschaftslehre
《학문론의 새로운 서술의 시도》
Versuch einer neuen Darstellung der Wissenschaftslehre
《윤리학의 체계》
Das System der Sittenlehre
1798년
《신의 세계통치에 대한 우리의 믿음에 대하여》[26]
Über den Grund unseres Glaubens an eine göttliche Weltregierung
《대중을 향한 호소》[27]
Appellation an das Publikum
1799년
《인간의 사명》
Die Bestimmung des Menschen
1800년
《폐쇄적 상업국가》
Der geschlossene Handelsstaat
《어음법 이론》
Theorie des Wechsel-Rechts
《학문론의 개작》
Neue Bearbeitung der Wissenschaftslehre
《동물의 본질을 설명하기 위한 명제들》
Sätze zur Erläuterung des Wesens der Tiere
《해처럼 밝은 보고》
Sonnenklarer Bericht
1801년
《학문론의 서술》
Darstellung der Wissenschaftslehre
1801년~1802년
《프리메이슨 운동의 철학》
Philosophie der Maurerei
1802년~1803년
《학문론 강연 (Ⅰ)》
Vortrag der Wissenschaftslehre(Ⅰ)
1804년
《학문론 강연 (Ⅱ)》
Vortrag der Wissenschaftslehre(Ⅱ)
《학문론 강연 (Ⅲ)》
Vortrag der Wissenschaftslehre(Ⅲ)
《현대의 특징들》
Die Grundzüge des gegenwärtigen Zeitalters
1804년~1805년
《신론, 윤리학, 그리고 법론의 원리들》
Die Prinzipien der Gottes, Sitten und Rechtslehre
1805년
《학자의 본질에 대하여》
Über das Wesen des Gelehrten
《학문론 강연》
Vortrag der Wissenschaftslehre
《복된 삶을 위한 안내》
Die Anweisung zum seligen Leben
1806년
《애국심과 그의 반대》
Der Patriotismus und sein Gegenteil
1806년~1807년
《학문론 강연》
Vortrag der Wissenschaftslehre
1807년
《마키아벨리에 대하여》
Über Machiavell
《독일국민에게 고함》
Reden an die Deutsche Nation
1807년~1808년
《학문론 강연》
Vortrag der Wissenschaftslehre
1809년~1810년
《학문론의 일반개요》
Die Wissenschaftslehre
1810년
《학문론 강연》
Vortrag der Wissenschaftslehre
1810년~1811년
《의식의 사실들》
Die Tatsachen des Bewußtseins
《학자의 사명에 대한 다섯 번의 강의》
Fünf Vorlesungen über die Bestimmung des Gelehrten
18년
《법론》
Rechtslehre
1811년~1812년
《학문론의 서론 강의》
Einleitungsvorlesungen in die Wissenschaftslehre
1811년~1813년
《학문론 강연》
Vortrag der Wissenschaftslehre
1812년
《선험적 논리학(Ⅰ)》
Transzendentale Logik(Ⅰ)
《선험적 논리학(Ⅱ)》
Transzendentale Logik(Ⅱ)
《윤리학》
Sittenlehre
《의식의 사실들》
Die Tatsachen des Bewußtseins
1813년
《학문론 강의》
Vortrag der Wissenschaftslehre
《다양한 내용의 응용철학에 대한 강연들 (국가론)》
Vorträge verschiedenen Inhalts aus der angewendeten Philosophie (Staatslehre)
《동물의 자기에 대한 일기》
Tagebuch über animalischen Magnetismus
《학문론 강연》
Vortrag der Wissenschaftslehre
1814년 }}}}}}}}}

6. 여담


[1] 신성 로마 제국이 1806년 해체되고 독일 연방이 1815년에 비엔나회의에서 창설되는데, 피히테는 그 사이인 1814년에 사망했다.[2] 때문에 오늘날에도 프랑스의 극우 국수주의는 민족적 차이를 무시하고 국가에 대한 맹목적 충성을 요구한다면, 독일의 극우 민족주의는 반대로 (탈민족적인)국가보다 원초적 민족의 우수성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B.R. 마이어스 등 해외학자들은 한국 내셔널리즘 전통이 프랑스보다 독일에 가깝다고 분석한다.#[3] 《판단력 비판》은 1790년에 나왔고, 피히테 시대(《전 학문론의 기초, 1794》)까지만 하더라도 아직 《순수이성비판》과 《실천이성비판》에 대해서만 논의가 진행되고 있었다. (이후 피히테를 비판하기 위해서 낭만주의 철학자들이 칸트의 《판단력 비판》을 검토하는 것은 좀 더 이후의 일이다.)[4] 칸트식으로 말하면 예지계(intelligible Welt)에 해당한다. 쉽게 말하자면, (경험과 상관없이) 순수 이성의 작용에서만 만들어지는 '플라톤의 이데아계'와 비슷한 개념이다.[5] 프랑스 혁명의 영향을 받은 피히테에게 있어서, 두 이성을 합치는 것은 반드시 '자유'를 가져야 한다고 보았다.[6] 피히테는 이 작용을 '지적 직관'이라고 따로 명명한다.[7] 피히테는 『학문론의 제 2서론』에서, 절대적 자아 혹은 순수자아는 칸트의 선험적 통각과 같은 것이라고 논하고 있다. ㅡ 《피히테의 자아론》 백훈승 저 p.144[8] "자아의식 속에서 자아는 오직 자기 자신을 통해 규정될 뿐이다. 그러므로 절대적으로 규정되는 것이다." (das Ich in ihm ist lediglich durch sich selbst bestimmt, undist absolut bestimmt.)[9] 칸트에 따르면 자유란 자연의 인과법칙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자연의 인과법칙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인간 스스로가 인과의 시작이 되는 것이다. 즉 인간만이 할 수 있는 도덕적 행위를 하는 것으로 자연의 법칙에서 벗어나는 것이, 칸트가 말하는 '자유'이다.[10] "관념론에 있어서 지성은 하나의 행동이며, 그 이상의 것이 전혀 아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성을 활동하는 것이라고 불러서도 결코 안된다. 왜냐하면 이러한 표현을 통하여, 그러한 활동이 머물러 있는 어떤 존립자가 지시될 수 있기 때문이다." ㅡ《학문론의 첫번째 서론 (1796)》[11] 여기서 행위나 활동은 생각하는 활동(관념적)도 포함되고 몸을 움직이는 활동(실재적)도 포함된다. 적어도 피히테의 의도는 그렇다.(피히테와 셸링 간의 편지에서 확인)[12] 《피히테의 자아론》을 지은 백훈승 교수는 국내 학계에서 Tathandlung을 '사행'(事行)이라고 번역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한다. 사행은 '사실행위'(事實行爲)의 준말이다. 사실(Tat)과 행위(Handlung)가 동일하다는 뜻인데, 여기서 백훈승 교수는 Tat은 '사실'이라고 번역해서는 안되고 '행위의 산물'로 번역해야 된다고 주장한다. 즉, 행위의 산물(Tat)과 행위(Handlung)는 동일하다는 뜻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아는 행위하는 자인 동시에 행위의 산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를 합쳐서 백훈승 교수는 Tathandlung을 '실행'(實行)이라고 번역한다. 요약하자면, 행위로서의 자아는 '사실'로서 고정되지 않기 때문에 '사실'을 함축하는 단어인 '사행'은 잘못된 번역이라는 것.[13] 다만 피히테의 후기 철학에서는 절대적 자아를 신으로 해석한다.[14] 다만 절대적 자아는 하나의 이상일 뿐, 결코 현실에서 성취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das unerreichbare Ideal) 자아는 자기 자신과의 전적인 통일의 상태에 이르지는 못하고 다만 그것에 근접할 수 있을 뿐이다.[15] 비아의 정립은 절대적 자아와 관계하고 있다는 근거에 한해서만 절대적으로 규정된다.[16] 소여(所與; given)라고 말하기도 한다.[17] 물론 피히테는 외부에 실재로 자연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진 않는다. 그러나 이때 자연이란 단지 기계론적 법칙성을 통한 실재적 전체일 뿐이다. 그러므로 피히테에게 있어서, 자연은 자아의 활동 장소이자 사유의 대상에 불과하며, 그의 전적인 관심사는 (자연이 아니라) '자아'의 자유로운 활동(사유+행위)에 있는 것이다.[18] 피히테는 칸트의 순수이성을 '이론이성'이라고 불렀다.[19] 자연충동의 대표적인 예는 성충동이다.(다만 피히테에게 있어서 자연충동은 '악'이 아니다. 성충동과 결혼충동 등을 긍정적인 관점에서 파악한다. 다만 이런 자연충동들은 저차원적인 충동이라는 것이다. '악'의 문제는 셸링에 이르러서야 구체적으로 제기된다.) 순수충동의 대표적인 예는 '자아는 자유로워야 한다'는 자기 규정의 충동이거나 또는 절대자에 대한 믿음충동을 말한다. 피히테는 자연충동과 순수충동을 자아의 가장 근원적인 충동이라고 보아 근원충동이라 한다.[20] 피히테는 양심 또한 충동의 일종으로 본다. 피히테의 '양심'은 "항상 너의 도덕적 사명을 완수하라"는 것으로서 칸트의 '실천이성'의 정언명법과 비슷하지만, 다른점은 양심은 '윤리적 충동'으로서 다른 충동들과 함께 우리 내면 속에서 다툰다는 점이다.[21] "beschränke deine Freiheit so, daß der Andere neben dir auch frei sein könne." GN. GA 1/3, 387; SW Ⅲ, 89 /《피히테의 자아론》 p.226[22] 《피히테의 자아론》 p.146[23] "Dieser Trieb, mit dem Unvergänglichen vereinigt zu werden, undzu verschmelzen, ist die inniste Wurzel alles endlichen Daseins, (...)" ㅡ 《복된 삶을 위한 안내 (Anweisung zum seligen Leben; 1806)》, 1. Vorlesung. SW V, 407.[24] 지식론으로 번역하기도 한다. Wissen은 '지식', schaft는 '체계'이므로, Wissenschaft는 '지식의 체계'를 말한다. 즉, 피히테는 '지식의 체계가 무엇을 기준으로 하여야 하느냐'를 고민했으며, 그것은 바로 '자아'라는 것이다. 셸링은 그것을 '자연'이라고 보았고, 헤겔은 '의식에 현상될 수 있는 역사적 과정 전체'라고 보았다.[25] 피히테 전기 철학의 대표작이다.[26] 여기서 도덕질서가 신이라는 주장을 펼쳐 무신론 논쟁에 휘말렸다. 이로인해 예나 대학에서 짤린다.[27] 자신은 무신론자가 아니라는 호소의 글. 하지만 철학적 언어를 읽지 못한 대중들에게 그가 무신론자가 아니라는 것을 이해시켜주지 못했다.[28] 칸트는 피히테가 자신의 철학을 완전히 오인하고 있다고 했으며, 피히테의 학설은 기분나쁜 '자아 작용'의 반복이라고 평하였다[29] 셸링 역시 원래는 피히테주의자였으나 나중에는 이를 극복한다. 또한 헤겔에 대해서는 그는 자신의 사상을 훔친 가짜라면서 비난하는 태도를 보인다[30] 피히테는 '개인의 자유'라는 관점에서 프랑스 혁명을 격렬히 옹호했다.[31] 그가 국가주의와 심지어는 민주주의(다수에 의한 지배)까지 비판하긴 했으나 그의 정치관은 일면적으로 해석하긴 힘든 부분이 많다. 그는 정부를 견제하는 '최고관리위원회'를 두자고 말하기도 했고, 헌법과 정부의 교체에 관한 국민의 뜻을 확인하기 위해서 경우에 따라선 국민투표를 수단으로 사용하자고 말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