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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05 20:58:36

미셸 드 몽테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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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미셸 드 몽테뉴
Michel de Montaigne
파일:Portrait_of_Michel_de_Montaigne,_circa_unknown.jpg
본명 미셸 에켐 드 몽테뉴[1]
Michel Eyquem de Montaigne
출생 1533년 2월 28일
프랑스 왕국 기엔 몽테뉴성
사망 1592년 9월 13일 (향년 59세)
프랑스 왕국 기엔 몽테뉴성
국적
[[프랑스 왕국|]][[틀:국기|]][[틀:국기|]]
직업 철학자, 법관, 정치인[2], 외교관
학파 르네상스 회의주의[3]
학력 콜레주 드 기엔
서명 파일:미셸 드 몽테뉴 서명.svg

1. 개요2. 생애
2.1. 유년시절2.2. 법관과 『에세』 집필2.3. 여행과 보르도 시장2.4. 말년
3. 사상
3.1. 『에세』
3.1.1. 내용
4. 영향력과 평가5. 어록6. 저서7. 관련 도서8. 여담

[clearfix]

1. 개요

Que sçay-je?[4]
나는 무엇을 아는가?
《에세 Essais》 제2권 제12장 레몽 스봉의 변호
프랑스의 철학자, 법관, 작가. 『에세』[5]의 저자이다. 몽테뉴는 『에세』를 통해, 에세이라는 장르를 탄생시켰으며, 유럽에 고대 회의주의[6] 사상을 부활시켰다.

2. 생애

2.1. 유년시절

미셀 드 몽테뉴는 1533년 2월 28일, 보르도 시장인 아버지 피에르 몽테뉴와 유대인 혈통의 어머니 앙투아네트 드 루프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몽테뉴의 증조부 라몽은 훈제 생선과 포도주를 팔던 일개 무역상[7]이었으나, 말년에 부유한 상속녀와 혼인을 하면서 몽테뉴 성을 사들였다. 할아버지 그리몽은 욕심이 없었으나 아버지 피에르는 가업을 그만두고 젊은 시절에 군인으로서 프랑수아 1세와 함께 이탈리아 원정을 다녀와 마침내 귀족 칭호을 얻었다. 아버지는 승승장구하여 보르도의 배석판사, 부시장을 거쳐 시장으로 선출되었는데, 그는 자신의 후계자가 될 아들 몽테뉴의 교육에도 관심이 많았다. 아버지는 몽테뉴가 태어나자마자, 그를 몽테뉴 성에서 멀리 떨어진 촌락의 가난한 벌목꾼에게 2년간 양육을 맡겼다.[8] 이후 집으로 돌아온 몽테뉴는 상당한 비용을 들어 라틴어 가정 교습을 받았는데, 아버지는 자신의 성에서 라틴어 이외의 다른 말로는 몽테뉴와 얘기를 절대 하지 못하게끔 명령했다. 덕분에 몽테뉴는 불과 6살만에 프랑스 단어는 하나도 모른 채 라틴어를 깨우쳤다.

6살부터 13살까지는 보르도의 학교에 들어가 스콜라학자들에게 엄격한 주입식 수업을 받았다. 몽테뉴는 그런 주입식 수업들을 싫어했으나 문학과 연극만은 좋아했다. 이후 2년간의 공백기를 가지다가 15살 무렵 대학교[9]를 들어가 법학을 전공했다.

2.2. 법관과 『에세』 집필

21살부터 3년간 페리괴 조세 재판소 법관을 수행했고, 24살에는 보르도 고등법원 법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여기서 평생의 친구라 보에시와 만나게 되는데, 라 보에시는 당시 가혹한 정치를 거리낌 없이 비난하여 몽테뉴의 존경을 얻었다. 하지만 몽테뉴가 30살이 되던 해에 라 보에시는 페스트에 걸려 사망했고, 35살에는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연이어 1년 뒤에 남동생 아르노가 테니스 공에 머리를 맞고 뇌출혈로 사망하고, 본인도 낙마 사고로 인해 죽을 고비를 넘기자, 몽테뉴는 1570년 37살의 나이에 은퇴를 선언한다. 그는 유산으로 물려받은 몽테뉴 성의 탑 건물을 서재로 꾸미고 여기에 라 보에시에게서 받은 책과 자신의 책 1,000권을 정리해 넣었다. 그리고 벽면 곳곳에 54개의 라틴어 격언을 새겨넣었는데, 그 중 마지막만이 프랑스어로 이렇게 적혀 있다. "나는 무엇을 아는가?"

몽테뉴는 성에 은거하면서 『에세』를 집필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어떤 철학적 체계를 세우려는 작업이 아니라 '나 자신을 연구'하는 일이었다. 자신을 뽐내기 위해서 자신을 탐색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서 자신을 탐색했다. 그는 "나는 무엇을 아는가?"라는 자신의 물음을 결코 "너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라는 명령문으로 바꾸지 않았다. 그는 경직된 주장을 하는 대신에,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려는 수많은 시도들을 즐겼다.

몽테뉴의 사색은 1580년에 끝났다. 그 결실로 『에세』 초판이 발간되었다.

2.3. 여행과 보르도 시장

『에세』를 발간하고 난 후, 47세의 몽테뉴는 비로소 자발적인 은둔생활을 벗어나 여행을 결심한다. 여행은 다른 사람들의 다양한 삶, 욕망, 관습을 지속적으로 관찰하고 느낌으로써, 살아가는 데 본받을만한 것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이었다. 몽테뉴는 로마를 목적지로 삼았지만, 매번 샛길로 빠지면서 새로운 고장에서의 고유한 풍습과 음식 등을 즐겼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낯선 사람과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로마에 도착해서도 프랑스 사람들이 본국에서 하던 방식대로 행동하는 것을 보고 화를 내기도 했다. 그는 현지 관습에 따라 행동하고, 어디서나 그 나라 방식대로 접대받았다.

로마에서 교황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몽테뉴는 신장결석을 치료하기 위해 이탈리아 온천을 찾았다. 신장결석은 그의 아버지도 말년까지 고생했던 병으로, 가문에 유전되는 병이었다. 그는 불규칙하게 찾아오는 고통에 시달리면서 수많은 의료책을 읽으면서 해답을 찾았다. 그는 그 해답이 온천에 있다고 생각했지만 온천은 말그대로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도중에 보르도 시장으로 임명됐다. 프랑스가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의 내전으로 혼란한 상황이라서, 몽테뉴는 굳이 그 직책을 맡고 싶진 않았지만 앙리 3세의 명령이었기 때문에 그는 그 임무를 4년간 수행했다. 하지만 임기가 끝나는 1585년, 도시에 페스트가 덮쳤다. 몽테뉴도 살기 위해 몽테뉴 성을 버리고 가솔들과 여섯 달 동안 정처없이 떠돌아 다녔다. 페스트가 발생한 도시에서 도망친 사람들을 아무도 받아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은 우울한 피난길이었다. 그 사이에 보르도 시에서는 주민의 절반인 1만 7천 명이 죽었고 그의 임기는 끝났다.

하지만 그의 정치적 역할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앙리 3세는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차기 왕위는 사위인 앙리 드 나바르가 계승하게 되었는데, 문제는 앙리 3세는 가톨릭이었고, 앙리 드 나바르는 개신교였다는 점이었다. 그 둘 사이에서 벌어진 내전을 중재하는 역할을 바로 몽테뉴가 맡았다. 힘든 임무였지만 그는 타고난 솔직함으로 둘 다의 신뢰를 얻을 수 있었다. 결국 내전의 승리자는 앙리 드 나바르였고 그는 프랑스 왕 앙리 4세가 되었다. 앙리 4세는 몽테뉴에게 높은 관직을 내렸지만 몽테뉴는 정중하게 사양했다.

2.4. 말년

몽테뉴는 『에세』에 내용을 계속해서 추가하여 5판까지 개정했다. 그의 책은 프랑스의 지식인들 사이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유럽사회에 고대 회의주의를 부활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후에 출현하는 데카르트프랜시스 베이컨의 업적도, 당시 대세였던 몽테뉴의 회의주의를 넘어서기 위한 철학적 작업에서 비롯된 것이다.

심지어 귀족가문 출신의 젊은 아가씨 마리 드 구르네는 『에세』를 읽고 감동하여, 말년의 몽테뉴를 추종하며 따라 다녔다. 몽테뉴는 그녀를 양녀로 삼고 그녀에게 그가 죽은 후에 나올 자신의 『에세』의 발행을 맡겼다.

몽테뉴는 마지막까지 『에세』를 다듬었고, 건강이 점점 나빠져 1592년 9월 13일 후두염을 앓다가 자택에서 숨을 거뒀다.

3. 사상

3.1. 『에세』

몽테뉴는 자신의 삶을 철학적 사유의 대상으로 삼은 최초의 철학자라 할 수 있다. 그는 일상생활에서 실제로 얻은 사소한 경험에도 모든 주의를 기울였다. 몽테뉴 이전에도 자신의 인생에 대해 쓴 사람들은 있었지만, 스스로의 삶에서 도덕적인 교훈을 얻을 수 있고 그 속에서 누구나 계속 살아갈 만한 이유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 사람은 몽테뉴 이전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모든 인간에게 저마다 세계를 바라보는 독특한 방법이 있다는 것, 사람은 각자 자기 자신을 주된 본보기로 삼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그 대표적인 사례라고 생각했다.[10]

자신에 대한 지식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까닭은 우리에게서 가장 가까운 것이 바로 우리 자신의 몸과 영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철학의 진정한 과제는 견고한 개념을 쌓거나 형이상학적 세계로 진입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미 서 있는 자리를 우리 자신에게 솔직히 보여주는 일일테다. 그러나 그것은 확신을 가지고 우리가 나아가야 할 흔들리지 않는 방향을 찾기 위해서는 아니다. 그것은 상황에 따라 흔들리는 것이 우리의 삶임을 인정하고, 삶은 그 속에서 매번 "자신이 무엇을 아는가"를 찾아가는 과정 중에 있다는 것을 깨닫기 위해서이다. 그렇기에 몽테뉴는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시험'에 빠뜨리고자 했다. 이러한 '시도'를 통해서야 비로소 그는 자기 자신에게 가장 가까이 접근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보통 '에세'는 '시험', '실험', 또는 '시도' 등 지적 활동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몽테뉴 시대의 '에세essais'라는 말은 단순히 '맛보다' 또는 '시음하다'라는 일상적인 뜻으로도 자주 사용되었다. 즉, 그의 책은 '미셸 드 몽테뉴의 맛보기'라고 해석할 수 있다. 동시에 그것은 '미셸 드 몽테뉴를 맛보기'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의 책을 읽는 독자가 직접 그의 작품을 맛보거나 시음해본다는 뜻으로 해석이 가능하다.[11]

따라서 그것은 수많은 시도를 통해, 각각의 시도에서 뿜어져 나오는 '인생의 맛'들을 음미하는 것과 같다. 즉, 시도 자체를 즐기는 것이 바로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스스로에게 스스로를 더 자세히 알려주는 일이 된다. 그래서 몽테뉴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삶을 올바르게 즐기는 법을 아는 것, 그것이 절대적으로 완벽하고 실질적으로 신성한 삶의 경지이다. 자기 자신의 용도를 모르기 때문에 다른 환경을 찾아 헤메고, 자신의 내면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기 때문에 자아 밖에서 떠도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 자신을 알아가는 일은 우리만의 탁월한 미각을 찾아가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지식을 채우거나 정확한 답을 맞춤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 미각은, 자신만의 '취향'을 찾아가는 도정을 말하는 것이기에, 항상 스스로에게 솔직해야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열린 마음으로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시험할 것을 요구한다. 물론 그것은 남이 해줄 수 있는 일이 아니며, 스스로가 몸소 체험해봄으로써 매번 자신의 취향을 직접 확인해볼 수밖에 없는 일이다.

3.1.1. 내용

※ 『에세』는 죽음, 우정, 동물, 전쟁, 여행, 섹스, 취향 등등 여러가지 주제를 가진 1백 편이 넘는 단편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단편들의 특징은, 특정 주제에 관련하여 자기자신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솔직하게 써내려간다는 점이다. 이를 '에세이'라고 부르는데, 이 에세이(essay) 양식을 제일 처음 쓴 사람이 바로 몽테뉴다.

4. 영향력과 평가

『에세』는 당시대에 수많은 모방작이 나왔을 정도로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 프랑스에서는 꾸준히 개정판이 나오면서 그가 죽은지 70년이 지난 1660~1670년대까지도 2, 3년마다 재판을 찍었고, 게다가 1603년에는 영국에서 번역판이 출간되었다. 이때 식인종에 대한 몽테뉴의 서술을 읽고서 셰익스피어가 『템페스트』를 썼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일이다. 이후 영국에서도 『에세』를 모방한 작품들이 많이 나왔다. 아예 제목까지 그대로 따른 프랜시스 베이컨의 『에세이』도 그 중 하나이다.

하지만 17세기 말이 되자 종교적 신념을 가진 사람들이 몽테뉴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파스칼이 대표적이었다. 그는 『팡세』에서 몽테뉴가 말한 '어리석은 시도'나 '죽음에 대한 신앙 없는 태도'를 보여준 『에세』를 '혼란스럽다'고 비판했다. 파스칼 뿐만이 아니라 다른 여러 종교인들이 몽테뉴를 탄핵했다. 그 결과 『에세』는 1640년 스페인에서 금서 목록에, 이어 1676년에는 로마 가톨릭의 금서 목록에 올랐다.

18세기에 몽테뉴는 재발견되고 재해석되었다. 반세기 동안 프랑스에서 출판되지 못한 『에세』는 1724년 영국에서 출판되어 프랑스로 들어왔다. 특히 계몽주의 철학자들이 이를 반겼다. 디드로는 파스칼이 비난한 몽테뉴 문장의 무질서를 자연발생적인 것이라는 이유로 그를 찬양했다. 볼테르 역시 자신의 서양중심주의에 대한 싸움의 우군으로 몽테뉴를 찬양했다. 이제 몽테뉴는 계몽주의의 선구자인 철학자라는 대접을 받게 되었다. 이어 1789년 이후에는 프랑스혁명의 선구자로도 받들어졌다. 프랑스만이 아니었다. 독일의 헤르더는 몽테뉴를 민요를 제대로 이해하고 자연 회귀를 주장한 사람으로 높이 평가했다.

19세기에 와서 영국의 비평가이자 수필가인 헤즐리트는 인간으로서 느낀 점을 솔직하게 쓴 용기를 가진 최초의 인간으로 그를 숭상했다. 독일의 니체는 몽테뉴의 문화상대주의와 '간결하고 발랄한 회의주의'를 찬양했고, 프랑스의 빌레는 몽테뉴를 콩트 실증주의의 선구자로 평가했다.

20세기의 레비스트로스는 그의 저서 『야생의 사고』에서 몽테뉴가 쓴 식인종에 대한 글을 언급하며 '인류학자 몽테뉴'에게 경의를 표했다. 미국의 영화감독 오슨 웰스는 몽테뉴를 "어느 시대, 어느 곳을 막론하고 가장 위대한 작가"라고 칭송했다.

현대의 문학사가들은 몽테뉴를 근대 개인주의 문학 형식의 창시자로 인정한다. 또한 몽테뉴 문학의 완벽한 본보기는 셰익스피어의 『햄릿』에 나오는 고뇌에 찬 인간의 불안정 상태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확실함을 강조하는 르네 데카르트와 대척되는 지점에서 몽테뉴의 회의주의가 그 빛을 발한다고 보고 있다.

5. 어록

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옥좌에 오르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자신의 엉덩이로 앉아 있을 뿐이다.
순박함과 진실한 태도는 시대를 초월해 통용된다. [13]
나는 존재를 그리지 않는다. 내가 그리는 것은 과정이다. [14]
인생은 그 자체로 목적이고 목표여야 한다.
우리는 키케로가 이렇게 말했다거나, 플라톤의 <도덕론>이 어떻다거나, 이게 바로 아리스토텔레스가 한 말이다라거나 하는 식의 이야기는 잘한다. 그러나 우리 자신은? 우리는 무슨 말을 하나? 우리가 내리는 판단은 무엇인가? 그리고 우리가 행하는 것은 무엇인가? 남의 말이야 앵무새라도 곧잘 할 테니 말이다. [15]
(•••) 누구나 자기가 아는 것을 자기가 아는 만큼만 쓰면 좋겠다. 이 문제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주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사람이 강이나 우물의 특성에 관해서는 특별한 학식이나 경험이 있을 수 있지만 다른 것에 대해서는 보통 사람이 아는 정도밖에 모르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 한 줌밖에 안 되는 지식을 내세워 보려고 물리학 전체에 대해 저술하려 든다. 이 악덕으로부터 심대한 과오가 적잖이 생겨난다. [16]
나는 사람들이 흔히 하듯 나를 기준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잘못은 범하지 않는다. 그 사람에게는 나와 다른 점들이 있으리라 쉽게 이해하는 것이다. 내 삶이 어떤 틀에 속해 있다고 느낀다고 해서, 남들이 다 그러는 것처럼 세상에 그것을 강요할 마음이 없으며, 살아가는 데는 서로 다른 수많은 방식이 있다고 생각하고 또 이해한다. 그리고 너나없이 모두가 하는 것과는 달리, 우리 사이의 닮은 점보다는 다른 점을 더 쉽게 받아들인다. 사람들이 원하면 원하는 대로, 내 의향이나 내 원칙으로 남을 구속하지 않으며, 그 사람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그 자신으로 바라보고, 그 사람 고유의 모습에 맞게 옷을 입히는 정도인 것이다. [17]
단호한 결심으로 모욕에 대한 복수를 꾀하여 무엇에도 비할 수 없는 승리의 기쁨을 맛보고도 우리는 눈물을 흘린다. 복수한 것이 슬퍼서 우는 게 아니다. 아무것도 달라진 것은 없다. 하지만 우리 영혼이 그 일을 다른 눈으로 보고, 그 일의 다른 면을 떠올리는 것이다. 모든 것은 여러 각, 여러 면을 지니기 때문이다. 인척 관계, 오랜 친분, 우정은 우리의 상상력을 사로잡아 상황에 따라 일순간 휘저어 놓는다. 하지만 그런 감회는 어찌나 빨리 바뀌는지, 의식하기도 어려울 지경이다. [18]
출항하는 상인들은 한 배에 탈 사람 중에 방탕하거나 불경하거나 혹은 사악한 사람이 있는지 살펴본다. 그런 사람이 있으면 불길하다고 여겨서인데, 틀린 생각이 아니다. [19]
그렇지만 나이와 병 때문에 기운이 꺾인 데다 허약해서 건강도 잃고 사람들과 교제할 기회도 없는 아비가 엄청난 재산을 쓸데 없이 혼자 알을 품듯 품고 있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나 가족에게 할 짓이 아닙니다. 그가 현명하다면 이젠 충분히 잠자리에 들기 위해 옷을 벗고 싶어 해야 할 처지가 된 것입니다. 내복까지 벗을 것은 없지만 너무 두꺼운 저녁용 가운은 벗어야 합니다. 자기가 더 이상 누릴 수도 없는 나머지 호사는 자연의 질서에 따라 그것을 차지할 권리가 있는 사람들에게 기꺼이 양도해야 합니다. 자연이 그에게서 사용권을 앗아 가니, 그들이 사용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옳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필경 악의와 시기 때문입니다. [20]
피로스 왕이 이탈리아로 원정을 떠날 계획을 세울 때, 그의 현명한 조언자 키네아스는 그 야심의 부질없음을 느끼게 해주고자 그에게 물었다. "아, 그렇습니까, 전하! 무슨 목적으로 그런 거창한 계획을 세우셨습니까? 왕은 즉각 대답했다. "이탈리아의 주인이 되려고지" "그럼 그다음에는요?" "골 지방으로, 또 에스파냐로 가야지." "그다음에는요?" “아프리카를 정복하러 갈 거야. 그리고 마침내 전 세계를 정복하고 나면 쉬면서 즐겁게 편안히 살아야지" 그러자 키네아스가 응수했다. " 하느님 맙소사, 전하, 소원이 그러하다면 무엇 때문에 지금 당장 그렇게 살지 않으시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왜 소원이라는 그 상태를 바로 이 순간부터 누리고, 그동안에 겪을 그 많은 수고와 위험을 덜려 하지 않으십니까?" [21]
나는 책에서 소박한 재미를 느끼며 즐겁게 몰두하는 것 이상을 바라지 않는다. 또는 책을 통해 무슨 공부를 한다쳐도, 거기서 구하는 것이라고는 나 자신을 알게 해주는 지식, 내게 잘 죽고 잘 사는 방법을 가르쳐 줄 지식뿐이다. [22]
나는 사는 동안 대학 총장들보다 더 현명하고 더 행복한 장인들, 농부들을 수백 명이나 보았으니, 차라리 나는 그들을 닮고 싶다. 학문이란 영광, 가문, 위엄처럼, 아니면 기껏해야 미모, 부유함, 또는 그 비슷한 자질들처럼, 사실상 삶에 기여하기는 하지만 현실과 멀리 떨어져, 본래적이라기보다는 좀 공상적으로 삶에 필요한 것들 중에 끼어 있을 뿐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23]
그들(민중) 마음에 들려고 하다가는 아무 일도 되지 않는다. 그것은 형체도 없고 쥐어볼 꼬투리도 없는 대상이다. [24]
이처럼 심히 타락한 시대에 태어난 것도 좋은 일이다.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헐값에 덕망 있는 사람으로 평가되기 때문이다. 친족 살해범이나 신성 모독자쯤은 우리 시대엔 착하고 젊잖은 사람이다. [25]
낡은 관습을 경멸하도록 민중을 선동하는 것은 쉽다. 그것을 시도해서 끝장을 내지 못한 자는 하나도 없다. 하지만 파괴해 버린 것의 자리에 더 나은 질서를 수립하는 것, 그것을 시도한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은 지쳐 낙담에 빠지고 말았다. [26]
사람들은 언제나 서로를 바라본다. 나, 나는 내 눈을 내 안으로 돌려, 거기에 시선을 못박고 거기에 전념하게 한다. 모두들 자기 앞만 바라본다. 나는 내 속을 들여다본다. 나는 나 자신만 상대하며, 끊임없이 나를 고찰하고, 나를 점검하며, 나를 음미한다. 스스로 잘 생각해 보면 알 터인데, 다른 자들은 늘 다른 곳으로 가고 있다. 그들은 늘 앞으로 간다. [27]
풍속이 부패할 때 그 첫 번째 양상은 진실의 추방이다. 판다로스가 말했듯이 진실한 것이야말로 큰 덕의 시작이요, 플라톤이 자기 공화국의 통치자에게 요구한 첫 번째 사항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의 진실이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 아니라, 남이 잘 믿어 주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합법적인 화폐뿐 아니라 시중에 돌아다니는 가짜 화폐까지 ‘돈’이라고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우리나라가 이 악덕 때문에 비난받은 지 오래이다. (•••) 우리의 교류는 오직 말을 통해 이루어지는데, 그것을 왜곡하는 자는 공공 사회를 배반하는 것이다. 말은 우리 의향과 생각을 소통하는 유일한 수단이요, 우리 영혼의 중개인이다. 말이 없으면 우리는 서로 의지할 수 없고 서로를 알 수도 없다. 말이 우리를 속이면, 말로 인해 우리 사이의 모든 교류가 끊어지고, 우리 사이의 모든 관계가 와해된다. [28]
고상하고 세련된 철학의 견해들은 실생활에는 부적합하다. 뾰족하고 욱하는 마음이나 조급하고 재빠른 달변은 우리의 교섭을 방해한다. 인간사는 좀 거칠게, 건성으로 다루어서 많은 부분을 운수 소관으로 남겨 둬야 한다. 일들을 너무 깊이 까다롭게 살필 필요가 없다. 상반되는 국면과 다양한 형태를 다 고려 하다가는 길을 잃고 만다. [29]
나는 어떤 작가도, 특히 덕성이나 의무에 대해 다룬 작가들은 그가 어떤 인간이었는지 세심히 탐구하지 않고서는 결코 읽지 않는다. [30]
자기 기질이나 성향에 너무 강하게 붙들려 있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주요한 능력은 다양한 일에 적응할 줄 아는 것이다. 별 수 없이 오직 한 가지 생활 방식에만 매달린 채 지내는 것은 존재하고 있는 것일 뿐 사는 것이 아니다. 가장 고매한 영혼은 가장 많은 다양성과 유연성을 지닌 영혼이다. [31]
나는 내 아들이 말솜씨를 가르치는 학교가 아니라 차라리 선술집에서 말하기를 배웠으면 좋겠다. 교양 과목 선생을 모시고서 그와 이야기를 나눠 보라. 그는 왜 우리에게 갈고 닦은 기예의 탁월성을 느끼게 해 주지 않는 것을까, 왜 그는 우리 같은 무지랭이나 여성들로 하여금 그의 추론의 확고함과 조리 정연함를 찬탄하여 넋이 나가게 하지 않을 것일까? 왜 자기 뜻대로 우리를 지배하고 설복시키지 않는 것일까? 이야기 소재나 전개 방법을 두고 그토록 유리한 자가 왜 자기 검술에 욕설과 무절제와 격노를 뒤섞는 것일까? 그가 쓰고 있는 교수님네 두건이며 가운, 라틴어를 벗어 놓게 해 보라. 그가 원문 그대로인 날 것의 아리스토텔레스로 우리 귀를 두드리지 못하게 해 보라. 당신은 그가 그저 우리 중 한 사람이라고 혹은 그보다 못한 사람이라고 여기게 될 것이다. 그는 저 얼크러지고 설크러지게 엮은 언어로 우리를 밀어붙이지만 내 보기에 그것은 야바위꾼이 하는 짓과 다를 바 없는 수작이다. 그들의 유연함은 우리 감각을 공격하고 압도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확신을 조금도 흔들지 못한다. 이 야바위짓 말고는 그들이 하는 일 중 평범하고 비루하지 않은 것은 없다. 배운 것이 더 많다고 해서 그들이 덜 어리석은 것은 아니다. [32]
생각으로가 아니라 진실로, 뛰어난 최선의 정치 체제는 어느 나라에나 지금 그 나라를 지탱하고 있는 체제이다. 그 모습과 본질적 이점은 관습에 달려 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현재의 상태를 못마땅해한다. 그러나 민주 국가에서 소수의 지배를 혹은 왕정 체제에서 다른 종류의 정부를 계속 희구한다는 것은 오류이고 얼빠진 생각이다. [33]
누구든 자기를 괴롭히는 것을 그저 치워 버리려고만 하는 사람은 생각이 짧은 것이다. 왜냐하면 악의 다음에 꼭 선이 오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 뒤로 또 다른 악이 따라올 수 있으며, 혹은 더 나쁜 악이 올 수도 있으니 카이사르를 살해한 이들에게 닥친 경우가 그러했다. 그들은 나라를 너무 힘든 상태에 빠뜨린 나머지 그 일에 가담한 것을 후회하게 되었다. 그 뒤로 우리 시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같은 일이 일어났다. 내 동시대인인 프랑스인들은 그 점에 대해 뭔가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 모든 거대한 변동은 국가를 뒤흔들어 무질서에 빠뜨린다. [34]
아무도 자기 돈을 남에게 나눠 주지는 않지만 누구나 자기 시간과 삶은 나누어 준다. 이런 것에 대해서만큼 우리가 후하게 구는 것도 없지만, 이런 것을 인색하게 아끼는 일이야말로 우리에게 유익하고 또 칭찬할 만한 태도일 것이다. [35]
이런 박학의 노력을 통해 우리 자신을 거칠게 몰아가서 우리는 무엇을하자는 것일까? 땅 위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저 가난한 이들을 보라.머리 숙인 채 땀 흘려 일하는 그들은 아리스토텔레스도 카토도 본보기도 교훈도 모른다. 대자연이 지어 준 대로 그들은 매일, 우리가 학교에서 그토록 공들여 배우던 것보다 훨씬 더 온전하고 굳센 꿋꿋함과 인내의 실행을 이어 가는 것이다. 내가 늘상 만나는 얼마나 많은 이들이 가난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인가! 얼마나 많은 이들이 죽음을 오히려 열망하며, 혹은 겁에 질리지도 고통스러워하지도 않으면서 죽음을 통과하는 것인가! 내 뜰을 갈고 있는 저 사람은 오늘 아침 자기 아버지나 아들을 묻고 온 길이다. 그들이 병을 두고 부르는 이름마저 그 격렬함을 순하게 하고 부드럽게 하는 것들이다. 폐병은 그들에게 기침이다. 이질은 배탈이고, 늑막염은 오한이다. 이렇게 부드럽게 부르면서 그들은 병을 더 잘 견뎌 낸다. 평소 하던 일을 못하게 되면 병이 꽤 중한 셈이다. 그들은 오직 죽게 되어서야 침대에 눕는 것이다. [36]
오직 식자들만이 더 없이 건강한 상태에서도 죽음을 생각하느라 밥맛을 잃고 이맛살을 찌푸린다. 평범한 사람들은 닥칠 때 말고는 치료도 위로도 필요로 하지 않으며 정확히 자기가 느끼는 만큼만 거기에 대해 생각하는데 말이다. 속인들의 아둔함과 이해력 결핍이 그들로 하여금 닥쳐온 불행을 견디게 하고 피치 못할 숙명에 대해 무덤덤하게 만든다는 이야기가 바로 그것을 뜻하는 것 아닌가? 그들의 영혼은 거칠고 둔탁해 침투하기도 동요시키기도 어렵다고 말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제발이지 앞으로는 단순 소박함을 가르치는 학파를 우리가 찾아가게 할 일이다. 여러 철학 학파가 힘든 노력 끝에 얻는 최고의 결실로서 우리에게 약속하는 것을, 이 학파는 자기 학생들이 손쉽게 가닿도록 이끌어 준다. [37]
각 개인의 내면을 규율하는 개별적 의무로서의 도덕률도,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그토록 확립하기 어려운데, 그 많은 사람들을 다스리는 법을 정초하기는 더욱 어렵다 해도 놀랄 일이 아니다. 우리 사회를 다스리는 재판의 모습이 어떤지를 보라. 그야말로 인간의 어리석음에 대한 진정한 증거가 거기 있다. 그만큼 모순과 오류로 그득하다. 재판에서 봐주기식 판결이나 지나치게 가혹한 판결로 생각되는 경우가 너무 많아서 둘 사이의 중도라고 할 만한 경우도 그쯤 되는지 알 수 없을 정도인데, 이것은 사법의 정신과 몸체에 자라고 있는 부패하고 병든 부분이다. [38]
나는 키케로를 이해하기보다 나 자신을 더 잘 이해하고 싶다. 내가 좋은 학생이라면 나 자신의 체험만 가지고도 나를 지혜롭게 만들기에 충분한 재료를 이미 가진 셈이다. 자기가 지나치게 화를 낸 것을 기억하고 그 열기가 어디까지 자기를 끌고 갈 수 있었는지를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아리스토텔레스의 글에서 보다 더 분명하게 이 같은 정념이 얼마나 추한 것인지를 깨닫고 그것을 당연히 혐오할 것이다. 자기가 겪은 불행을 기억하고 자기가 겪을 뻔한 불행이나 자기 처지를 이리저리 바꾸어 놓은 사소한 기회들을 기억하는 사람은 그것을 통해 미래에 다가올 변화를 대비하고 자기 처지가 어떤지를 깨닫게 된다. 우리 자신의 삶보다 카이사르의 생애가 우리에게 더 본보기가 되는 것은 아니다. 황제의 삶이든 평민의 삶이든 그것은 늘 같은 삶으로서 인간사의 온갖 요소가 관여한다. 그저 거기 귀를 기울이기만 해 보라. 우리가 기본적으로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이야기해 주고 있으니 말이다. [39]
자신의 판단력에 대해 여러 차례 불만족스러웠던 기억을 가진 사람이 다시는 자신을 신뢰하지 말아야겠다 마음먹지 않는다면, 그런 사람은 바보 아니겠는가?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서야 내 생각이 틀렸음을 알 경우 그 사람이 말해 준 새로운 내용이나 나 자신이 모르고 있었던 점이 무엇인지를 배우는 것보다 (그 정도 소득은 별 것 아니다.), 일반적으로 나 자신이 아둔하며 내 이해력이 나를 오도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결국 생각 전체를 바로잡게 되는 것이다. 다른 오류를 저질렀을 때도 마찬가지로 하는데, 나는 이 규칙이 내 삶에 대단히 유익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40]
아프건 건강하건 나는 늘 내게 밀려오는 욕구를 기꺼이 따라 갔다. 내 안에서 이는 욕망과 내가 가진 성향을 나는 적잖이 존중한다. 나는 고통을 고통으로 치유하고 싶지 않다. 병보다 더 힘들게하는 치료법을 나는 싫어한다. 내가 결석을 앓고 있는 까닭에 굴을 먹는 즐거움을 포기해야 한다면 한 가지 말고 두 가지 고통을 갖게 되는 셈이다. 한편에서 병이 괴롭히는데, 다른 편에서는 처방이 괴롭힌다. 우리가 잘못 판단할 위험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이상 기왕이면 즐거운 쪽으로 내기를 걸어 보자. 세상은 반대로 한다. 고통을 주지 않는 것은 어떤 것도 유익하게 여기지 않으며, 손 쉬운 것은 의심쩍어 한다. 이것저것을 좋아하던 내 식욕은 다행히 저절로 조절이 되어 내 위가 건강할 수 있게 자리 잡았다. 젊었을 때는 자극적이고 양념이 많이 들어간 음식을 즐겼다. 그러나 점차 내 위가 잘 견디지를 못하자 입맛도 곧 변하는 것이었다. 포도주는 병자에게 해롭다. 내 입에 당기지 않게 된 첫 번째가 포도주였는데, 견딜 수 없게 싫어졌다. 내가 억지로 먹으려 드는 것은 무엇이나 내 건강을 해친다. 그리고 내가 허기를 느끼며 맛있게 먹는 것은 무엇이나 몸에도 좋다. 내가 기분 좋게 느끼며 한 일 때문에 나중에 곤란을 겪게 된 경우는 없다. 그래서 나는 대체로 어떤 의사의 처방보다 내 즐거움을 더 앞세웠다. [41]
우리는 대단한 바보들이다. "그는 평생을 하는 일 없이 지냈다."라고 우리는 이야기한다. 또는 "나는 오늘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라고. 아니, 당신이 살지 않았단 말인가? 사는 것이야말로 당신이 하는 일 중에서 가장 근본적일 뿐만 아니라 가장 빛나는 일이기도 하다. "내게 큰 일을 할 수 있게 맡겨만 주었다면 나도 내 역량을 보여 줬을 텐데.” 당신은 당신 삶을 관조하고 다스릴 줄 알았는가? 그렇다면 만사 중 가장 필요한 일을 한 것이다. 자신을 드러내 보이고 자기 역량을 발휘하기 위해 자연은 운수의 힘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것은 어떤 단계에서나, 막 없이도 그렇듯 막 뒤에서도 자신을 드러낸다. 우리의 품행을 어떻게 할 것인가가 우리의 일이지 책을 쓰는 것이 우리 일인 것은 아니며, 어느 전투에 이기고 어느 지방을 점령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처신을 질서 있고 평정하게 만드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다. [42]

6. 저서

제목 발간 연도
<colbgcolor=#fff,#1f2023> 에세
Essais
<colbgcolor=#fff,#1f2023> 1580년[43]

책이름은 원래 프랑스어로 『에세』이나, 이 책을 처음으로 한글 번역한 사람(손우성)이 일본어 번역판을 중역[44]해서 한국에 들여왔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에세』가 일본어번역 단어인 『수상록(隨想錄)』이라는 제목으로 불리고 있다. 단 학술논문에서는 『수상록』보다는 『에세』라는 명칭이 더 자주 쓰인다.

손우성은 일본 호세이대학 불문과(프랑스문학과) 출신으로, 프랑스 문학을 일본어로 배운 인물이다. 손우성은 일본어 번역본 수상록을 한국어로 중역하여 1965년에 발간했는데, 실제 프랑스어 원문과 비교해보면 오역이 많다.[45] 심각한 것은 그의 1965년 중역본#이 아직까지 초판과 내용은 거의 바뀌지 않은채 출판사를 바꿔가며 재출간되고 있다는 점이다. 출판사를 바꾸면 초판 발행년도도 바꿀 수 있는데, 이런 식의 수법을 사용하여 마치 최신판인 척 행세를 하고 있는 것.

이후 몇 개의 한글 번역본이 나왔으나 대부분이 부분 발췌 편집본이거나 영어중역이다. 그나마 프랑스 유학파 출신에 다수의 프랑스어 작품을 번역한 민희식의 『몽테뉴 수상록』이 나와 있으나, 이것도 전체 내용을 다 번역한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2022년 6월, 민음사에서 드디어 원문 완역본이 나왔다. 총 1,988페이지에 달하는 어마무시한 내용을 3권으로 나누어 출간했으며, 두 명의 번역자[46]가 10여년 동안 번역했다고 한다. #

7. 관련 도서

8. 여담



[1] 몽테뉴는 '미셸 에켐 드 몽테뉴'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하지만 조상 대대로 사용하던 성(姓)인 '에켐'은 훗날 자기 이름에서 빼버린다. 여기서 '몽테뉴'는 그가 태어난 성(城)의 이름이다.[2] 보르도의 시장을 역임했다.[3] 초기에는 스토아주의적 관점을 보이며, 후기에 쓴 에세이에서는 에피쿠로스주의적 관점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사상을 하나로 정한다면 그건 '회의주의(피론주의)'이다.[4] 몽테뉴가 집필했던 당시에 쓰인 중세 프랑스어. 현대 프랑스어로는 "Que sais-je?"(크세주).[5] 국내에서는『수상록』이라는 제목으로도 알려져 있다.[6] 정확히는 피론주의.[7] 선박중계업과 생선 장사를 동시에 했다.[8] 이는 당시 고위 귀족의 관습이었다.[9] 학자들도 툴르즈 대학이나 파리 대학으로 추측할 뿐 확실하지는 않다.[10] 『내가 고양이를 데리고 노는 것일까, 고양이가 나를 데리고 노는 것일까?』 책읽는 수요일. 2012. 김유신 옮김.[11] 『내가 고양이를 데리고 노는 것일까, 고양이가 나를 데리고 노는 것일까?』 책읽는 수요일. 2012. 김유신 옮김. p.281[12] 레이몽 스봉(Raymond Sebond; 1385 ~ 1436년): 스페인 출신의 스콜라학자. 프랑스 툴루즈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가르쳤던 흠정 교수. "세상은 신이 우리에게 준 거대한 책"이라는 『자연신학』이 사후에 출간(1484년)되어, 이후의 많은 자연철학자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후대의 갈릴레오도 "철학은 우리가 끊임없이 주목하는 이 거대한 책인 우주 속에 쓰여 있다. 그러나 그 책은 먼저 언어를 파악하고 그 언어를 구성하고 있는 문자를 독해하는 법을 배우지 않고는 이해될 수 없다. 그 책은 수학적 언어로 쓰여 있으며, 그 문자는 삼각형, 원 및 그 외 기하학적 도형들이다."라는 비슷한 얘기를 했을 정도이니, 그 영향력을 대략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13] 『에세』 제3권 1장[14] 『에세』 제3권 2장[15] 『에세』 제1권 25장[16] 『에세』 제1권 31장[17] 『에세』 제1권 37장[18] 『에세』 제1권 38장[19] 『에세』 제1권 39장[20] 『에세』 제2권 8장[21] 『에세』 제1권 42장[22] 『에세』 제2권 10장[23] 『에세』 제2권 12장[24] 『에세』 제2권 16장[25] 『에세』 제2권 17장[26] 『에세』 제2권 17장[27] 『에세』 제2권 17장[28] 『에세』 제2권 18장[29] 『에세』 제2권 20장[30] 『에세』 제2권 31장[31] 『에세』 제3권 3장[32] 『에세』 제3권 8장[33] 『에세』 제3권 9장[34] 『에세』 제3권 9장[35] 『에세』 제3권 10장[36] 『에세』 제3권 12장[37] 『에세』 제3권 12장[38] 『에세』 제3권 13장[39] 『에세』 제3권 13장[40] 『에세』 제3권 13장[41] 『에세』 제3권 13장[42] 『에세』 제3권 13장[43] 1580년 3월 1일에 『에세』 초판 출간. 이후 내용을 계속 추가하여 5판(1588년)까지 출간함.[44] 원문을 바로 번역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언어로 번역된 것을 다시 번역하는 것. 두 번 번역되기 때문에 의역이 많아지고 원문의 뜻이 훼손되는 경우가 많다.[45] 박홍규는 그의 책 『몽테뉴의 숲에서 거닐다』에서 이런 현실을 비판하고 있다. "1965년 손우성에 의해 『에세』가 번역된 이래 여러 부분 번역본이 나왔지만, 홋타 요시에의 『몽테뉴』를 번역한 김석희의 말처럼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16세기 책이니 당연히 저작권 문제도 없는데 왜 제대로 완역되지 못하는 것일까?" (p.38)[46] 1권과 2권은 심민화의 번역, 3권은 최권행의 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