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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레오 갈릴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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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 RAI 2에서 이탈리아인들을 대상으로 투표한 ‘가장 위대한 이탈리아인’ 명단이다. 고대 로마 제국 시기의 인물들이 완전히 배제되고 투표율도 6%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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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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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Galileo Galilei (갈릴레오 갈릴레이)[1]
국적 토스카나 대공국파일:Tuscany.png
출생 1564년 2월 15일, 피렌체 공화국 피사
사망 1642년 1월 8일 (향년 77세), 토스카나 대공국 아르체피니
학력 Vallombrosa Abbey[2] (졸업) (1575-1578년)
피사 대학교 (의학 / 중퇴) (1580-1585년)
직업 수학자, 물리학자, 천문학자
종교 로마 가톨릭
서명 파일:300px-Galileo_Galilei_Signature_2.svg.png

1. 개요2. 생애3. 가톨릭교회와의 관계4. 업적5. 명언?6. 성격7. 에피소드8. 케플러와의 관계9. 남동생 미켈란젤로 갈릴레이10. 이름의 표기법11. 여담12. 저서13. 창작물에서

[clearfix]

1. 개요

이탈리아의 철학자, 물리학자, 천문학자이다. 망원경, 지동설 등으로 인류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과학자로 평가받는다.

2. 생애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1564년 2월 15일, 피사의 몰락 귀족인 피레네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빈첸초 갈릴레이(Vincenzo Galilei, 1520~1591)는 의류 교역업자이자 음악이론가이기도 했는데[3], 호전적인 기질을 가진 사람으로 종종 지적 권위에 대한 불신을 강하게 표현했다. 이런 성격은 아들 갈릴레오에게 여러모로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갈릴레오의 집안은 귀족 집안이었지만, 그가 태어났던 때에는 가세가 기울고 생활이 극히 어려운 형편이었다. 갈릴레오는 10살 때 가족과 함께 피렌체로 이사했고, 베네딕토회 수도원에서 3년 동안 생활했다. 그는 수도자가 되기를 원했지만, 아버지는 집안의 재정난을 극복하기 위해 갈릴레오가 보수가 많은 직업인 의사가 되기를 원했고, 의학 공부를 시키기 위해 피사대학으로 보냈다. 여기서 갈릴레오는 의학보다 수학에 흥미를 느끼고 본격적으로 수학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갈릴레오는 경제적 궁핍함으로 인해, 4학년 때 대학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그는 1585년 피렌체로 돌아가 개인적으로 연구를 계속하면서 학생들에게 수학을 가르쳐 생활비를 벌어야만 했다. 갈릴레오는 교수 자리를 얻기 위해 몇몇 대학에 편지를 보냈고 결국 피사의 모교에서 수학 교수직을 제안받았다. 대신 보수는 형편없었다.[4]

피사 대학에서의 교수 계약이 끝나자, 갈릴레오는 다시 심각한 재정 곤란에 빠졌다. 1591년 그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 장남인 그에게는 가족들을 부양할 경제적 책임이 주어졌다. 여동생들이 결혼하여 출가하자, 갈릴레오는 자신이 몇 년 동안 모아둔 월급을 탈탈 털어서 혼수를 준비해줘야 했다.

1592년 갈릴레오는 파도바 대학의 수학 교수가 되었다. 그는 여기서 18년 동안 재직하며 기하학, 천문학, 군사기술 등을 가르치며 자신의 연구를 계속했다. 그러나 부양할 가족들이 갈수록 늘어났기 때문에 그의 경제적 궁핍은 해결되지 않았다. 그는 추가 수입을 얻기 위해 유럽 전역의 귀족 자제들을 가르쳤고 개인지도를 해주기도 했는데, 그중에는 피렌체의 지도자 페르디난트 대공의 아들인 코시모 데 메디치도 있었다.

1609년 갈릴레오는 당시 막 개발되었던 망원경을 접하게 되었다. 그는 곧바로 망원경의 개량에 착수했고, 1609년 후반부터 1610년 초에 걸쳐 밤하늘을 관찰하면서 우연히 발견한 몇 가지 주장을 공표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건 목성의 위성을 발견한 것이었다.
목성의 위성을 통해 우리는, 지구가 1년 주기로 태양 주위를 회전하고 있으며, 다시 그 지구 주위를 달이 돌고 있다는 사실을 너무나 두려워한 나머지 코페르니쿠스 체계를 거부하고 우주의 이러한 체계마저 거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의심을 잠재울 수있는 강력하면서 우아한 주장을 갖는다. 그리고 이제 우리의 눈앞에는 지구 주위를 도는 달처럼 목성의 주위를 배회하는, 그리고 그들 모두 12년의 공간을 태양 주위로 대회전하는 궤적을 밟는 4개의 별이 펼쳐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 갈릴레오의 저서 <시데리우스 눈치우스 Sidereus Nuncius> 中

이 발견은 모든 천체는 지구를 중심으로 회전한다는 기존 관념을 깨부수는 것이었다. 이 책은 쉽게 구성되었고 이탈리아어로 쓰였기 때문에[5], 대중들에게 인기를 얻었고 550판까지 인쇄되었다. 갈릴레오는 이 책을 피렌체에서 메디치 왕가의 점유자이자 토스카나의 4번째 대공인 코시모 2세에게 헌정했는데, 그 과정에서 그는 목성의 4개 위성을 메디치 가문에 전해오는 상징과 결합시켜 '메디치 성'이라고 명명했다. 이는 당연히 토스카나 궁정의 막강한 후원을 얻기 위한 계산적인 아부 행동이었다. 메디치 가문의 수석 수학자이자 철학자라는 새로운 지위를 얻게 되면서, 드디어 갈릴레오는 진저리나는 대학 체제에서 벗어나 엄청난 수입과 사회적 지위를 손에 쥐었다.

1611년, 로마에 도착한 갈릴레오는 교황 바오로 5세를 접견했다. 교황청은 이 저명한 학자를 환영했고 그에 걸맞은 대접을 하였다. 교황을 접견하는 이는 누구라도 교황 앞에 무릎을 꿇어야 했지만, 교황은 그 전통을 깨고 갈릴레오를 무릎 꿇게 하지 않았다. 당시 교황청의 주도 세력이었던 예수회 또한 갈릴레오의 주장을 지지했다. 갈릴레오는 로마에 머무르는 동안 여러 곳에서 강연하지 않았다.

하지만 반대세력도 당연히 존재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관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갈릴레오에게 끊임없이 태클을 걸었다. 개중에 토마소 카치니라는 도미니코회수도자는 종교재판소에 갈릴레오를 이단 혐의로 고발하기까지 했다. 종교재판소는 조사에 착수했지만 카치니의 주장이 근거 없다고 판결하고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단, 코페르니쿠스주의에 대한 공식적인 견해를 갈릴레오에게 요청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을 제시했다.

갈릴레오도 이런 분위기를 알았다. <크리스티나 대공 부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코페르니쿠스 가설의 정당성을 옹호하며, 아우구스티누스의 발언을 인용하면서 성경을 올바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주의적 철학자들을 피상적이며 불성실한 종교적 열성을 가진 천박하고 저속한 저자로 공격했다.

토마소 카치니가 갈릴레오를 공격하고 1년 뒤, 갈릴레오는 다시 로마로 향했다. 자신을 방어하고, 코페르니쿠스에 대한 그들의 의견이 잘못되었음을 개인적으로 로마 당국에 설득하기 위해서였다. 문제는 이 당시 로마의 분위기가 갈릴레오의 1차 방문 때와는 달리 호의적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종교개혁의 여파로 인해 교황청은 '새로운 것'에 민감한 상태였고, 갈릴레오의 주장이 물리학과 수학의 한계를 넘어 성경을 해석하는 신학자의 영역까지 침범하려 든다고 여겨 그를 만나기를 꺼렸다.

갈릴레오는 침묵하지 않고 이곳저곳에서 논쟁을 하며 분위기를 바꿔보려 했으나 소용없었다. 교황청은 모든 성서 해석에, 그리고 어떠한 방법으로도 교황청의 권위에 문제를 제기하는 행동에 매우 민감했다. 개인이 그들 고유의 방식으로 성서를 해석할 수 있다는 개신교 개혁론자들의 주장과, 성서는 코페르니쿠스의 가설과 일치할 수 있도록 재해석해야 한다는 갈릴레오의 주장은 교황청이 보기에는 별 차이가 없어 보였다. 저명한 신학자이자 천문학자였던 벨라르민 추기경은 그에게 코페르니쿠스적 우주관을 설파하려는 시도를 멈추라고 권했고 갈릴레오는 그것을 받아들여 그만두었다.

1613년 <<흑점에 관한 편지들>>이라는 저서를 냈는데 이후 그 내용을 높게 평가하지만 지구가 움직인다는 것만은 성서에 반하므로 믿을 수 없다는 이의를 피사 대학으로부터 받자 이렇게 답했다.
성서에는 거짓이 없으며 성서는 잘못될 수 없습니다. 단지 성서를 해석하는 사람이 간혹 잘못하는 것입니다. 성서는 진리를 가르치는 것이며 과학을 가르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편지 때문에 성직자들이 그를 적으로 여기고 종교 재판소에 회부할 꼬투리를 잡으려고 눈이 벌개졌으며, 재판소에서도 편지를 조사했지만 무혐의로 판정했다. 그러고 나서도 흑점에 관한 편지들이 성서에 반한다는 이유로 누군가에 의해 재판소에 고발이 들어갔고, 재판소는 1616년 2월 24일 해당 도서에 대해 유죄 판결을 내렸으나 판결문에 피고인과 도서의 이름을 적지 않고 대신 스스로 조심하라는 경고장을 갈릴레오에게 보낸다.

갈릴레오는 수년 동안 코페르니쿠스의 가설을 공공연히 가르치고 옹호하는 것을 자제했다. 이윽고 1624년 봄, 새로운 교황인 우르바노 8세의 즉위 축하식에 참여하기 위해 갈릴레오는 다시 로마로 출발했다. 우르바노 8세는 예전부터 갈릴레오와 절친한 사이였다. 새 교황과 갈릴레오 사이에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 기록은 남아있지 않지만, 갈릴레오가 환대를 받은 것은 분명하다. 그는 메달 2개와 그림, 그리고 아들 빈센초를 위한 교회 장려금을 포함한 많은 선물을 교황에게 받고 로마를 떠났다.

<<천문 대화>> 를 저술했으나[6] 6개월 만에 발행을 금지당했고 끝내 1632년 9월 23일, 종교재판소에 출두하라는 편지가 온다.

갈릴레오는 베네치아 공화국으로의 망명도 고려했으나 결국 출석을 결심하고 1633년 2월 로마에 도착, 최종 판결을 6월에 받았다. 그는 혐의를 인정하면서 그때껏 연구한 것과 정반대로 지동설을 비난했고, 교황청은 그를 완전히 믿지 못해 감금령을 내렸지만 건강이 나쁘고 고령이라는 점을 감안해서[7] 곧 가택연금으로 감형을 받았다. 금고형으로 3년을 지냈는데, 한 번은 위에서 언급된 토스카나 대공의 저택에서 지내다가, 후에 시에나의 대주교의 자택에서 손님으로 지내다가 다음엔 피렌체 근처의 아르체트리라는 작은 시골에서 국가 연금을 받으면서 평온하게 연구에 전념하며 살았다.

늘그막에는 노환으로 실명이 되었는데 1642년 1월 8일 찾아온 두 제자와 이야기를 하던 도중 갑자기 쓰러져 영원히 눈을 감았다. 이때 제자들은 그가 마지막으로 남길 말이 있지 않나 하여 귀를 기울였지만 아무런 말도 없이 그대로 숨을 거둬서 유언이 제자들과 나누던 평범한 대화가 되어버렸다고 한다. 토스카나 대공은 갈릴레오를 기리기 위해 산타크로체 성당 본당에 묻고 성대한 기념비를 세워주려 했지만, 교황청은 갈릴레오를 평범한 시민으로 부속 성당에 묻을 것이며, 아무런 허례나 예식을 갖추지 말고, 비석도 세우지 말라 했다. 교황청이 아예 장례식을 하지 못하게 했다는 것은 잘못된 이야기이긴 하지만, 그의 죽음이 주변에 알려지지 않도록 성대한 장례식을 치르지 못하게 한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3. 가톨릭교회와의 관계

길랄리오에 대한 흔한 인식은 그가 '종교적 반지성과 싸운 과학의 순교자'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 천동설은 가톨릭의 교리가 아니었고,
  2. 당시 종교재판은 '지동설이 맞는가, 틀리는가'가 아니라 '갈릴레오가 지동설을 주장함으로써 야기된 사태들'이 관심 대상이었다.

조금 더 상세히 설명하자면 이러하다. 우선 천동설을 당시 교회가 가르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믿어야 할 교리'로 천동설을 가르쳤다는 것은 아니다. 이는 자연철학자(훗날의 과학자)들의 영역이었지 종교의 영역은 아니였고, 당시 유럽 사람들도 당연히 성직자의 능력 밖임을 알았다. 교회가 천동설을 가르친 것은, 어디까지나 중세의 교회가 교육, 복지 등등을 모조리 담당하는 공공기관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즉 교회가 천동설을 가르쳤다는 것은, 중세의 교과서에 천동설이 사실로 나왔다는 것일 뿐이다. 물론 천동설이 신학적으로 어떠한 의미가 있는지는 성직자들과 수도자들에게 나름의 사유대상이 될 수 있었고, 따라서 천동설과 지동설 둘 중에 그들 개개인의 호오는 있을 수 있겠으나 딱 여기까지다.[8] 심지어 갈릴레오 이전에 지동설을 주장했던 코페르니쿠스는 성직자 신분이으며, 평생 가톨릭 교회로부터 아무런 박해도 받지 않았다.

다만 고려해야할 점은 코페르니쿠스가 가톨릭의 박해를 두려워하여 자신의 연구를 숨겼으며 그의 지동설에 관한 책,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는 죽기 직전에 공개하였고 1616년에 금서로 지정되었다는 것이다. Galileo's Non-Trial (1616), Pre-Trial (1632–1633), and Trial (May 10, 1633): A Review of Procedure, Featuring Routine Violations of the Forum of Conscience 또한 해당 학술지의 해석에선 코페르니쿠스의 저서의 내용을 정정하고서도 여전히 금서로 지정되어야 한다고 여겨졌으며[9] 주교들이 태양중심설, 즉 당시기준 지동설과 같은 내용을 이단이라고 선고한 내용또한 있다.[10]

교황 우르바노 8세가 그를 종교재판으로 몰아세운 것은 당시에 유럽을 뒤흔들었던 시대적 배경인 종교개혁과 연결해서 생각하여야 한다. 가톨릭 내부의 보수와 진보의 대립 문제에 갈릴레오가 연루되고, 여기에다가 그의 저서들이 교회를 풍자한다는 소문까지 도는 등, 여러 가지 상황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종교재판의 주제는 '지동설이 맞느냐 틀렸느냐'가 아니었고, 성직자들은 당연히 이것을 판단할 권한도 능력도 책무도 관심도 없었다. 재판의 관심은 어디까지나 '지동설을 주장하면서 초래한 여러 상황들'이었다.

사실 우르바노 8세는 갈릴레오와 절친한 사이로, 교황이 되기 전 있었던 논쟁에서 갈릴레오를 변호한 적이 있다. 그 외에 지동설과 관련하여 교황청이 주관하는 공개 토론회를 열었다고. 당시 가톨릭 내부에선 '지동설이 합리적인 근거가 있다면 지동설을 인정해야 하지 않나.' 하는 분위기가 있었다.[11] 갈릴레오가 책을 출판하기로 한 것은 자신에게 우호적인 그가 교황이 되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괜찮다고 판단한 것과, 당시 가톨릭 내부의 분위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일각에선 갈릴레오가 가톨릭의 근본교리인 성체성사의 실체변화(성변화)를 부정한 탓이라고 지적하기도 한다. 당시든 지금이든 개신교는 가톨릭의 성변화(聖變化) 교리를 거부하기 때문에, 이것은 매우 민감한 문제였다.

가톨릭과 갈릴레오의 관계에 대해서는 갈릴레오의 저서 Dialogo dei due massimi sistemi del mondo(두 우주 체계에 대한 대화)에 나오는 다음 내용이 좋은 참고가 될 것이다.
<존경하는 독자들에게>
몇 년 전에 로마 교황청은 지구가 움직인다고 주장하는 피타고라스 학파의 의견을 금하는 칙령을 내렸다. 이것은 우리 시대에 유행하는 위험한 사조를 막기 위한 온당한 조치였다. 이 칙령이 분별 있는 심리에 의해서 나온 것이 아니라 맹목적인 격정에 의해서 잘못 내려진 것이라고 주장하는 경솔한 사람들이 있다. 천문학 관측에 대해 아는 게 전혀 없는 성직자들이 성급하게 금령을 내려서 지성적인 사색을 방해하고 있다는 불평이 있다.

이런 오만하고 무례한 불평을 듣고, 나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 현명한 결정에 대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나는 이 세상 넓은 무대에 나서서 진실을 증언하기로 결심했다. 당시에 나는 로마에 있었다. 재판정에서 가장 높은 고위 성직자가 나를 반겨 주었으며, 그들은 나를 칭찬해 주었다. 그들은 그 칙령을 미리 내게 알려준 다음에 공표했다.

나는 이 책을 통해서 우리 이탈리아, 특히 로마에서도 이 문제애 대해 외국 못지않게 잘 알고 있음을 밝히겠다. 알프스 너머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잘 알고 있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에 대한 모든 사항을 다루겠다. 이 모든 것들은 로마의 검열을 거쳤음을 밝힌다. 우리도 지적 즐거움을 마음껏 추구할 수 있으며, 매우 교묘한 이론을 발견하고 연구할 수 있는 환경 속에 살고 있다.

이것을 보이기 위해서 나는 이 책에서 코페르니쿠스 편인 것처럼 꾸몄다. 순수한 수학 이론으로서 지동설이 지구가 움직이지 않는다는 이론에 비해 더 낫다는 점을 조목조목 밝혔다. 그러나 그게 꼭 그렇다는 말은 아니고, 일부 소요학파 철학자들의 주장에 비해 낫다는 말이다. 사실 이 사람들은 걷지도 않으니 소요학파라는 이름을 붙일 값어치조차 없다. 그들은 그늘을 숭배하며, 정당한 자료들을 바탕으로 사색을 하지 않고 몇몇 그릇되게 이해한 원리들을 바탕으로 철학을 전개한다.

(중략. 이후로는 지동설의 근거를 다룸.)

실제로 갈릴레오는 한때 수도자가 되겠다는 생각을 했을 정도로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저작에서 '성서와 자연은 모두 성스러운 말씀에서 생겨났습니다. 전자는 성령의 말씀을 받아 적은 것이고, 후자는 하느님의 명령을 충실하게 집행한 결과물입니다.' 하는 내용이 발견되기도 한다.

로베르토 벨라르미노 추기경가르멜 수도회 신부인 포스카리니(Foscarini)에게 보낸 1615년 4월 12일 자 서한에서 코페르니쿠스 학설이 제기하는 다음 2가지 명제를 이미 언급한 바 있다. '코페르니쿠스 천문학은 설제적이고 입증할 수 있는 증거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는 점에서 옳은가 아니면 그 학설은 단지 추측과 가정에 근거한 것인가?', '코페르니쿠스 이론(태양중심설)은 성서의 내용과 양립할 수 있는가?'

로베르토 벨라르미노 추기경에 의하면,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돈다는 증거가 없는 한, 지구의 부동설(不動說)을 단언하는 성서의 구절들을 '매우 신중하게 해석'해야만 했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일단 지동설이 확증된다면 신학자들은 코페르니쿠스의 새로운 이론과 명백히 대립되는 성서 구절들의 '해석을 재검토'해야만 하며, 지금까지 옳다고 생각했던 견해들이 오류라고 밝혀지면 그 오류들을 더 이상 고집하지 말아야 할 것이라는 것이다.
태양이 우주의 중심에 있고 지구는 3번째 하늘(궤도)에 있다는 것이 옳다고 입증된다면, 또한 태양이 지구 둘레를 도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태양 둘레를 도는 것이 실제로 입증된다면 이러한 주장에 반대되는 듯이 보이는 성서의 설명을 상당히 신중하게 다루어야 할 것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증명된 것이 거짓이라고 단언하기보다는 차라리 우리는 모른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벨라르미노 추기경이 가르멜 수도회 포르크가리니(Foscarini) 신부에게 보낸 1615년 4월 12일자 서한. "… Dico che quando ci fusse vera demostratione che il sole stia nel centro del mondo e la terra nel 3cielo, e che il sole non circonda la terra, ma la terra circonda il soIe, allhora bisogneria andar con molta consideratione in esplicare le Scritture che paiono contarie, e pitosto dire che non l’ intendiamo, che dire che sia faIso quello che si dimostra" Opere di Galileo, op.cit., vol.XII, p.172.

1741년, 지구가 태양의 둘레를 돈다는 지동설에 대한 역학적 증거 앞에서 베네딕토 14세는 검사성성으로 하여금 「갈릴레오 전집」의 초판에 교회인가(imprimatur)를 내리게 했다. 1633년 판결을 명백히 파기했음은 검사성성의 교령에서 명백해졌는데, 이 교령은 금서목록의 1757년 판에서 지동설을 옹호하는 저서들을 삭제했다. 실상은 이 교령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해석을 받아들이기를 주저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1820년, 로마의 라 사피엔차(La Sapienza) 대학 교수이며 참사원이었던 세텔레(Settele)는 「광학과 천문학의 기본 원리」라는 자신의 저서를 출판할 채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성청의 출판 검열관이었던 안포시(Anfossi) 신부의 반대에 부닥쳤다. 그는 세텔레에게 그 책에 교회인가를 내어주기를 거부했다.

이러한 사건은 1633년 판결은 취소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파기되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있었다는 인상을 주었다. 부당하게 출판 금지 조치를 당한 저자는 교황 비오 7세에게 호소를 해서 교황으로부터 1822년 호의적인 판결을 얻어냈다. 이러한 결정이 내려지자, 도미니코 수도회의 전임 총장이며 검사성성 위원인 올리비에리(Olivieri) 신부는 코페르니쿠스의 천문학을 단지 하나의 가정[12]으로서가 아니라 이론으로 제시했던 저서들에 대한 교회 인가에 호의적인 보고서를 작성했다. 교황청의 결정은 1846년 햇빛을 보게 된 새 금서목록 출판 때 실질적으로 실현되었다. 보게 된다.[13]

1979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교회와 갈릴레오의 불편한 관계를 언급하면서 갈릴레오 사건에 대해 여러 분야에 걸친 학문적 연구가 이루어지기를 바라였다. 그에 따라 요한 바오로 2세는 1981년 7월 3일, '갈릴레오 사건이 속한 16-17세기 천동설-태양중심설 논쟁의 연구를 위한 교황청 위원회'를 설립하였고, 위원회는 1992년 "갈릴레오에게 많은 고통을 주었던" 재판관들의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하였다.
현세 사물의 정당한 자율성

36. 그러나 많은 현대인은 인간 활동과 종교의 더욱 밀접한 결합으로 인간이나 사회나 학문의 자율성이 침해당하지나 않을까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인다.

현세 사물의 자율성을, 피조물과 사회 자체가 고유의 법칙과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인간이 점차 이를 분별하고 이용하고 안배한다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그와 같은 자율성을 요구하는 것은 전적으로 타당하다. 그것은 현대인이 요구하는 것일 뿐 아니라 창조주의 뜻에도 부합하는 것이다. 사실, 만물은 창조의 조건 자체에서 고유의 안정성과 진리와 선, 또 고유의 법칙과 질서를 갖추고 있으므로 인간은 이를 존중하여야 하고, 학문이나 기술의 각기 고유한 방법을 인정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모든 분야의 방법론적 탐구가 참으로 과학적인 방법으로 도덕 규범에 따라 이루어진다면 결코 신앙과 참으로 대립할 수 없을 것이다. 세속 사물이나 신앙의 실재는 다 똑같은 하느님에게서 그 기원을 이끌어 내기 때문이다.[14] 오히려 겸허하고 항구한 마음으로 사물의 비밀을 탐색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의식하지는 못하더라도, 만물을 보존하시고, 있는 그대로 존재하게 하시는 하느님의 손에 인도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학문의 정당한 자율성을 충분히 깨닫지 못하고, 어떤 때에는 바로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도 없지 않았지만, 거기에서 논쟁과 갈등을 일으켜 많은 사람이 신앙과 과학을 서로 배치되는 것으로 여기도록 만들었던 정신 자세를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15]

그러나 만일 ‘현세 사물의 자율성’이란 말이, 피조물들이 하느님께 의존하지 않는다거나 인간이 피조물을 창조주께 돌려 드리지 않고 멋대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으로 이해된다면, 하느님을 인정하는 사람은 누구나 이러한 생각이 몹시 그릇된 것이라고 여기지 않을 수 없다. 창조주가 없으면 피조물도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어떠한 종교이든 모든 신앙인은 언제나 피조물들의 언어 안에서 창조주의 현현과 목소리를 들어 왔다. 더욱이 하느님을 잊어버리면 피조물 자체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현대 세계의 교회에 관한 사목 헌장 「기쁨과 희망」(Gaudium et Spes), 36항,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2018년 9월, 살바토레 리차르도(Salvatore Ricciardo)가 갈릴레오의 새로운 편지를 발견하여 네이쳐지에 기고하고, 동료 교수들과 같은 주제로 영국학술지 Notes and Records (SCI-E급)에 논문을 올렸다.(The reappearance of Galileo's original Letter to Benedetto Castelli(2019))
Galileo wrote the 1613 letter to Benedetto Castelli, a mathematician at the University of Pisa in Italy. In it, Galileo set out for the first time his arguments that scientific research should be free from theological doctrine.
He argued that the scant references in the Bible to astronomical events should not be taken literally, because scribes had simplified these descriptions so that they could be understood by common people. Religious authorities who argued otherwise, he wrote, didn’t have the competence to judge. Most crucially, he reasoned that the heliocentric model of Earth orbiting the Sun, proposed by Polish astronomer Nicolaus Copernicus 70 years earlier, is not actually incompatible with the Bible.

갈릴레오는 이태리 피사 대학의 수학자 베네데토 카스텔리에게 1613년 편지를 썼습니다. 여기서 갈릴레오는 처음으로 과학적 연구가 신학적 교리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천문학적 사건에 관해서 성서의 부족한 근거는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왜냐하면 서기관들은 일반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이러한 설명을 단순화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다고 주장한 종교 당국은 (그것을) 판단할 능력이 없다고 그는 썼습니다. 가장 결정적으로 그는 70년 전에 폴란드 천문학자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가 제안한 태양을 도는 지구의 태양중심모델(지동설)이 실제로 성경과 양립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습니다.
Nature지 #

사건의 전말을 이야기하자면, 1613년 갈릴레오는 친구 베네데토 카스텔리(Benedetto Castelli)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이 새로 만든 망원경을 이용한 발견을 통해 「코페르니쿠스 모델」에 대한 증거를 제시하며, 로마 가톨릭교회의 천문학에 관한 교리를 반박했다. 이후 그 편지의 사본은 이탈리아 도처에 유포되었다. 1615년에 도미니코회 수도자 니콜로 로리니(Niccolò Lorini)는 편지의 사본 중 하나(로리니 버전)를 보고 격분하여 로마 종교재판소에 전달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갈릴레오는 자신의 친구 피에로 디니(로마의 성직자)에게 '로리니가 종교 재판소에 전달한 버전은 변조된 듯하다'는 뜻의 편지를 보냈다. 갈릴레오는 그 편지의 '완곡한 버전'을 동봉하며 "이게 진본(디니 버전)이니 바티칸의 신학자들에게 전해 달라"고 당부했다. 갈릴레오는 디니에게 보낸 편지에서 적(敵)들의 사악함과 무지를 호소하며, 종교재판소가 (열성과 관용을 가장한) 사기꾼들에게 기만되었을지 모른다는 우려를 표명했다고 한다. 이렇듯 2가지 버전이 존재하다보니, 학자들 사이에서는 '둘 중 어느 것이 갈릴레오의 진의(眞意)였는지'를 둘러싼 혼란이 야기되었다.

학자들은 그 동안 디니 버전을 갈릴레오의 본 뜻으로 파악해서 '갈릴레오는 적어도 성경가톨릭교회를 존중하고 그 안에서 과학의 뜻을 펼치려고 했다'고 이해했으나, 2018년 9월, 살바토레 리차르도가 로리니 버젼에서 디니 버전으로 수정한 원본 편지를 발견하면서, 갈릴레오의 본 뜻은 '갈릴레오가 가짜라고 주장한 로리니 버전'이었다는 것이 밝혀지게 되었다. 즉, 갈릴레오가 자신이 쓴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 '로리니의 편지'가 실제로는 진짜 갈릴레오가 쓴 편지였지만, 갈릴레오가 종교재판을 두려워한 나머지, 편지 내용을 고쳐서 다시 쓴 후 교황청에 보낸 것이다. 갈릴레오는 이단재판을 피하기 위해 자신의 주장이 성경과 서로 다르지 않다고 조작했을 따름이며 사실 실제 편지내용에서는 갈릴레오가 과학과 신학을 분리해서 봤다는 것이 명백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갈릴레오는 이 원본 편지에서 "과학적 연구가 신학적 교리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갈릴레오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성경과 양립할 수 없다.'고 말한 부분에서는, '그리스도교적 맥락'과 자신이 주장한 과학적 이론(지동설)을 분리했음을 알 수 있다. # 이 논문의 공동저자인 Franco Giudice 교수는 "갈릴레오가 카스텔리에게 보낸 편지는 '과학의 자유'에 대한 최초의 세속적 성명서(secular manifesto) 중 하나다." 라고 말하였다. [16]

4. 업적

아이작 뉴턴이 말하길, "내가 남들보다 멀리 볼 수 있었던 것은 거인의 어깨 위에서 봤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는데, 여기에 나오는 그 거인 중에서 영향력이 가능 큰 사람이 바로 갈릴레오 갈릴레이이다. 우연히도 갈릴레오는 뉴턴이 태어나기 바로 전 해에 사망했다.

근대 물리학의 기초를 닦은 물리학자이며, 천문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그렇지만 물리학자로 보는 건 아이작 뉴턴에 의해 고전물리학이 성립된 이후의 사후적 평가이다. 당대에는 저명한 수학자였으며, 직업면에서도 수학자로 커리어를 쌓았다. 당시에 수학자는 천상이자 논리의 학문인 천문학보다 한 수 아래로 취급되었고, 이에 갈릴레오의 업적은 직업면에서는 평가하자면 이런 경향에 반대하여 수학적으로 천문학의 원리를 재구성하려고 시도했다고 볼 수 있다.(피터 디어, 2011. <과학혁명>, 뿌리와이파리)[17]

천동설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저서 두 우주 체계에 대한 대화을 통해 지동설을 주장한 인물이다. 이 때문에 오늘날에는 종교 권력에 대항한 과학의 순교자 정도로 인식하곤 하는데, 여기에는 어느 정도 과장이 있다. 자세한 건 천동설 문서로.

갈릴레오는 지동설을 증명할 확고한 증거를 발견하진 못했다.[18] 당시 지동설이 완전히 인정받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지구가 정말 움직인다면 사람들이 왜 그 움직임을 느끼지 못 하는가?' 라는 질문에 답을 할 수가 없어서였다. 갈릴레오도 여기에는 대답하지 못했고, 저서에서는 그저 천동설 지지자를 바보 얼간이라는 식으로 조롱하는 것으로 일관했다. 또한 '지구가 움직인다면 우리가 제자리에서 점프하면 왜곡된 궤도로 움직일 것'이라는[19] 비판에 대해서도 '너는 움직이는 함선에서 점프하면 다른 곳에 착지하냐?'는 정도의 말만 하였을 뿐 과학적으로 이를 설명하진 못했다. 갈릴레오는 '멀리 떨어진 거리에서 가해지는 신비한 힘'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었기 때문에, 밀물/썰물이 달의 인력 때문임을 인정하지 못하고 그 원인에 대해서 매우 황당하게 적어놓기도 했다.

갈릴레오가 저지른 오류들은 후대에 아이작 뉴턴이 고전 물리학을 정립해서야 해결되었다. 그리고 우주에서는 어떤 물체가 움직이는지 확신하기 어렵기 때문에 지동설의 증거는 연주시차가 될 수 밖에 없는데 당시 관측 장비로는 이 미세한 차이를 잡아낼 수 없었을 것이다. 더욱이 당시의 지동설도 천체의 움직임을 완벽하게 설명하진 못 했는데, 이는 행성들이 원 궤도가 아닌 '타원' 궤도를 돌기 때문이다. 이 오류는 결국 나중에 케플러가 해결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왜 망원경으로 천체를 관찰함이 합당한가'에 대해서도 이렇다할 합리적 설명을 하지 못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아리스토텔레스적 우주관에 의거하여, 천체는 에테르라는 지상의 것과는 전혀 다른 물질로 이루어졌다고 보았고, 지상계와는 전혀 다른 논리체계를 적용하여서 해석하였다. 그런데 갈릴레오는 '망원경을 통해서 지상계의 먼 곳을 관찰해보니, 실제로 일어난 사건과 흡사했습니다. 아마도 천상계 역시도 망원경으로 관찰할 수 있을거라 생각합니다'라고 하였을 뿐, 어째서 망원경으로 관찰한 것이 실제로 일어난 일과 흡사한지 논리적으로는 입증할 수 없었다.[20] 다만 이러한 사례가 갈릴레오의 의미를 절하하는 수단이 될 수는 없다.

유명한 일화로 피사의 사탑에서 낙하실험을 했다고 전해진다. '무거운 물체는 가벼운 물체보다 더 빨리 떨어진다.'는 통념[21]을 깨기 위한 것으로, 피사의 사탑에서 무게가 무거운 추와 가벼운 추를 동시에 낙하시켜서 두 추가 동시에 지면에 떨어지는 것으로 증명했다고 하는데, 이 일화는 사실이 아니다. 갈릴레오가 한 실험은 위와 같은 것이 아니라 고도의 사고실험이었다.
만약 무거운 물체가 먼저 땅에 떨어진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면, 무거운 물체와 가벼운 물체를 서로 연결해서 떨어뜨리는 경우를 고려해 본다면, 무거운 물체는 빨리 떨어지려 하고 가벼운 물체는 그보다 늦게 떨어지려 할 것이므로, 그 결과는 처음의 무거운 물체 하나만인 경우보다는 늦고, 가벼운 물체 하나만인 경우보다는 빨리 떨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두 물체가 연결되어 있으므로 전체 무게는 더욱 무거워져서 더욱 빨리 떨어져야 옳다는 결론도 나온다. 하나의 가정에서 이처럼 상반된 두 결론이 나왔으므로, 그것은 애초의 가정이 틀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무거운 물체나 가벼운 물체나 동시에 떨어져야 옳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 《새로운 두 과학에 관한 수학적 증명 中》

즉 갈릴레오는 실험 과학자라고는 할 수 없다. 이런 거짓 소문이 퍼지게 된 것은 아마도 갈릴레오의 제자 비비아니가 이야기를 지어내었기 때문인 듯하다. 그보다 3년 빠른 1587년에 시몬 스테빈이 해당 일화와 비슷한 실험을 했는데 이걸 갈릴레오가 책에서 한 말과 섞어서 만들어낸 일화라는 소리. (물론 스테빈도 피사의 사탑에서 저 실험을 한 건 아니다.)

갈릴레오가 실험을 아주 안 한 것은 아니고 길다란 판자에 홈을 만들어 놋쇠의 철구를 굴려 낙하에 필요한 시간을 측정하여 이론을 세웠다. 그러나 과학사학자 버너드 코헨은 "이 실험은 갈릴레이가 실험 결과를 사전에 얼마나 확고하게 결론을 내리고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실험에 불과하다." 하고 말했다. 뭣보다 시간 측정을 자기 맥박으로 했다.

어찌됐건 갈릴레오의 이론은 아이작 뉴턴이 후일 이론적으로 증명하고, 미래에 아폴로 15호의 승무원들이 달에서 실험하여 이를 입증했다.
당시 실험 영상. 한손에 망치를 들고 다른 한손에 깃털을 들어 동시에 떨어지는 것을 확인하였다.

이후 BBC에서 NASA의 세계 최대 규모의 진공 실험실을 방문해서 실험한 영상 (2분 45초부터)

스스로 망원경을 만들어서 천체를 관찰했으며 목성위성 4개를 비롯한 수많은 위성과, 토성 고리의 발견자이기도 하다.[22] 또한 금성의 위상 변화도 관측하였다. 당시 파도바 지방의 수학교수이던 갈릴레오는 목성의 4개 위성을 메디치가에 전해오는 상징과 결합시켜[23] 궁정의 후원을 얻었다. 참고로 당시 갈릴레오의 연봉은 토스카나 대공국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것이었다. 당시 (이탈리아) 학계에는 신학/철학/수학으로 나눠지는 일종의 위계질서가 있었다. 이중 수학자는 카스트 수준의 하위층(?)으로, 단적으로 말해서 수학 교수는 다른 교수들과 봉급이 8배까지 차이 났다. 갈릴레오는 수학 교수였고, 이 때문에 갈릴레오가 발표하는 천문학 주장들은 다른 학자들에게 무시 당하기 일쑤였다고 한다. 더욱이 천문학은 신학/철학과 깊은 관계가 있다고 생각해서 오직 신학자나 철학자만이 다룰 수 있는 학문이라는 고정관념까지 있었다. 이 때문에 갈릴레오는 메디치 가문의 후원을 얻으려 했고, 결국 "토스카나 대공의 수학자 겸 철학자"가 되었다.

그와 관련하여 유명한 건 지동설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지동설을 주장함으로써 야기된 여러 상황들 탓에 종교재판에 회부되기도 했으며 어쩔 수 없이 지동설을 주장하는 것을 중단하기도 했다.

관성을 말한 것도 이 사람이다. 이는 대부분 사람들이 지동설을 반박할 때 '만약에 지구가 움직인다면 항상 강한 바람이 불어야 하는데 그런 현상이 일어나지 않는다.'[24]고 하거나 '물체를 떨어트리면 대각선으로 떨어져야 하는데 직선으로 떨어진다.'고 말할 때, 갈릴레오는 공기와 낙하하는 물체 역시 (움직이는 배에 탑승한 사람처럼) 지구에 종속되기 때문에 항상 강한 바람이 없는 게 당연하다면서 이런 반박을 재반박하기 위해 관성이라는 개념을 창안했다. 관련 내용 또한 갈릴레오는 진공에서 움직이는 물체에 힘을 주지 않으면 물체가 스스로 원운동을 한다고 주장했다.

그 외에도 최초로 온도계를 개발한 것으로 유명하다. 다만 기압 때문에 정확한 온도는 측정하지 못하여 유용하지는 않았다.

잘 알려진 건 아니지만 요새 건축 능력이 당대 최고 수준이었다.

5. 명언?

갈릴레오가 재판장에서 나가면서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는 말을 했다는 것이 유명하다.

그러나 그가 정말 이 말을 했다는 증거는 없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에 따르면 그가 이런 말을 남들이 들어서 후세에 남기도록 했을 가능성은 낮고, 후대의 창작으로 보인다. 자세한 것은 그래도 지구는 돈다 문서로.

6. 성격

당시 대단한 독설가로도 유명했다. 일생 내내 삐딱한 태도를 유지하고 논쟁을 즐기며 문제를 일으키는 타입이었다. 그의 편지에서는 '내 말을 이해 못 하는 무식한 것들 때문에 짜증나 죽겠다.'는 식의 불평이 여러 번 발견된다. 대표적인 일화 몇 가지를 소개해 보자면

7. 에피소드

파도바에서 생활하던 무렵 갈릴레오는 마리나 감비나라는 여인을 만나 1남 2녀를 낳았다. 그런데 갈릴레오는 집을 구해주고 가족의 뒷바라지를 해주었을 뿐 정식으로 결혼하지는 않았다.[25] 결국 1610년 갈릴레오가 피렌체로 떠날 때 그들의 관계는 끝났고, 두 딸은 피렌체 근처의 수녀원으로 보내졌다. 그곳은 살아서는 떠날 수 없는[26] 봉쇄수녀원이었다.[27] 아들인 빈센초는 그나마 처지가 나았다. 갈릴레오는 빈센초의 교육비를 부담하고 결혼 후 신혼집을 구하는 데 도움을 주는 등 경제적 의무는 다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큰딸 버지니아는 수녀원 생활에 잘 적응했지만, 작은딸 리비아는 심리적으로 고통을 받았고 종종 정신적 & 육체적인 발작을 보이곤 했다. 이에 대해 버지니아와 갈릴레오가 주고받은 편지 여러 통이 지금까지 보존되었고, 이를 토대로 연구한 <갈릴레오의 딸>이라는 서적이 나오기도 했다.

망원경을 접한 갈릴레오는 파도바로 돌아오자마자 3배율의 망원경을 만들었고. 곧 그것을 개량하여 8배율 망원경으로 진척시켰다. 그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원로원을 초대하여 망원경의 효율을 설명했고 감동한 원로원은 많은 선물과 함께 갈릴레오의 교수 연봉을 2배 인상했다. 하지만 이미 망원경은 몇몇 유럽 국가에서 활용되는 상황이었다. 원로원은 나중에 이를 알고는 인상된 월급을 지급하지 않았고 갈릴레오의 월급이 앞으로도 영원히 오르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명문화했다. 임금동결

늘그막인 1638년에는 당시 30살 젊은이였고 훗날 실락원을 쓴 영국의 시인 존 밀턴이 그를 찾아 방문하기도 했다.

8. 케플러와의 관계

갈릴레오와 동시대 인물이자 똑같이 지동설을 지지했던 요하네스 케플러는 당대의 가장 유명한 천문학자이며 갈릴레오의 강력한 지지자였다. 그는 갈릴레오의 학술을 지지하는 논문과 저서를 여러 개 발표했고 자신의 모든 출판물을 보내며 논평을 부탁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지극정성에도 불구하고, 갈릴레오는 케플러의 요구를 깔끔하게 무시했다.

갈릴레오가 대체 왜 그랬는지는 과학사의 커다란 수수께끼 중 하나이다. 자신과 경쟁 상태에 있는 다른 천문학자의 생각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은 갈릴레오의 오만함 때문이거나, 가장 우아하며 가장 아름다운 대칭을 보여주는 ''에 집착하느라[28] 일부러 무시했다는 추측도 있다. 갈릴레오는 '모든 자연운동은 원형'이라고 강하게 믿었다.

아니면 정말로 단순하게도 갈릴레오가 케플러의 출판물 내용을 이해하지 못 할 정도로 어려워서일 수도 있다. 실제로 케플러의 책들은 뛰어난 수학자나 과학자 아니면 알아볼 수 없었다. 그리고 타원형 궤도로 정확한 행성의 궤도를 알아냈지만 행성들이 태양 근처에 갔을 때 왜 빨리 움직여 공전궤도가 타원형이 되는지 설명하지 못했다. 이 부분은 뉴턴이 중력의 법칙을 알아낼 때까지 해결하지 못했다.

9. 남동생 미켈란젤로 갈릴레이

갈릴레오에게는 남동생이 있었는데, 이름은 미켈란젤로 갈릴레이(Michelangelo Galilei, 1575-1631)다. 약 100년 전에 태어난 유명 예술가인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와는 다른 인물이다. 형 갈릴레오와 11살 차이가 나는 어린 동생으로, 당시 유명한 작곡가이자 음악 이론가였던 아버지 빈첸초의 뒤를 따라 작곡가가 되었다. 이탈리아 출신이었지만 주 활동 지역은 신성로마제국바이에른폴란드였다.

그는 20대 초반에 폴란드로 가서 그곳의 한 재력있는 귀족 집안에 고용되어 일했다. 한편 그는 고향 피렌체를 다스리던 메디치 가문의 궁정 음악가에 지원했지만 여러 번 고배를 마시면서 그냥 쌩까고 취업난은 역사가 깊다 일터가 있던 폴란드에서 한동안 일하다가 뮌헨의 한 공작에게 고용되어 그곳으로 일터를 옮겼다. 그 후 그는 8명의 아이를 낳았다고 한다.

그의 음악은 힘차고 웅장한 음률이 특징이며, 즉흥적이고 빠른 음색이 특징인 토카타(toccata) 형식이 주를 이룬다. 미국의 음악가 폴 베이어(Paul Beier)가 미켈란젤로가 1620년 펴낸 악보집인 'Il primo libro d'intavolatura di liuto'를 음반으로 제작했다.

쾌활하고 진취적인 그의 음악성과는 달리 그의 형 갈릴레오와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미켈란젤로가 갈릴레오에게 너무 많은 돈을 빌렸기 때문이었다. 그가 갈릴레오와 주고 받은 편지들에 따르면, 그는 그의 아들[29]의 사정이 어려움을 들어 형에게 자주 돈을 빌리기를 요청했다고 한다.

10. 이름의 표기법

한국에서 과거에는 그의 이름을 갈릴레오로 표기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근래에는 갈릴레이로 표기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이는 영어의 영향이다.

갈릴레오의 이름을 포함한 많은 이탈리아식 이름은 -o가 남자의 이름이고[30] -i가 성인 조합이 많다. 간단한 예를 들자면 Silvio Berlusconi, Benito Mussolini. Leonardo Bonucci 이는 이름은 단수형이고 성은 복수형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즉 갈릴레오는 이름이고, 갈릴레이는 성이다. 유럽에서는 일반적으로 개인적인 호칭이 아닌 공식적인 호칭에서는 성을 지칭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갈릴레이가 옳은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탈리아에서는 성이 아닌 이름으로 표기하는 것은 존경의 의미를 담기도 한다. 예컨대 유명한 예술가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는 일반적으로 '미켈란젤로'라고 부르지 '부오나로티'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이 때문에 이탈리아에서는 갈릴레오라고 부르며, 일본한국에서도 갈릴레오라고 표기했다. 그러나 영어권에서는 '갈릴레이'라고 성으로 표기하는 경우가 많다. 단 위키피디아나 NASA 목성 탐사선처럼 Galileo라고 표기하는 경우도 있다. 근래에 대한민국에서도 '갈릴레이'라고 성으로 표기하는 경우가 많아지는 것은 영어 자료의 영향이다.

11. 여담

12. 저서

13. 창작물에서

*뮤지컬 시데레우스는 갈릴레오, 요하네스 케플러, 갈릴레오의 딸 비르지니아의 이야기를 다룬 극이다. 시데레우스는 신념과 이념의 대립에 초점을 맞추었다고 할 수 있으며, 위에서 언급한 최후진술처럼 메디치 가문, 브루노가 언급되긴 하지만, 말 그래도 스쳐지나가듯 언급된다.


[1] 원래 갈릴레오의 집안 성씨는 보나이우티(Bonaiuti)였으나, 피렌체의 의사였던 갈릴레오 보나이우티(Galileo Bonaiuti)를 존경하는 뜻에서 14세기 후반에 갈릴레이(Galilei)로 성씨를 바꿨다고 한다. 즉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갈릴레오 보나이우티의 이름을 받은 것이라 볼 수 있다.[2] 피렌체에 있는 신학교.[3] 이 사람이 주도적인 역할을 한 피렌체의 예술가 모임인 카메라타(camerata)는 오페라가 탄생한 모임으로 유명하다[4] 당시 의학 교수는 1년에 2천 스쿠디를 받았지만, 갈릴레오는 60스쿠디에 불과했다. 이는 당시 대학에서 수학의 지위가 낮았기 때문이다.[5] 당시의 교양 서적은 전부 라틴어로 쓰였다.[6] 서적 검사 관리이던 제자가 초본의 내용을 보고 너무 위험하다면서 출판을 허락하지 않았고 제자와 갈릴레오를 지지하는 성직자가 상당 부분을 고친 끝에 겨우 낼 수 있었다.[7] 종교재판소에서 특별히 의자를 마련해 앉아서 재판을 받게 해 줄 정도였다.[8] 실제로 성경의 내용을 근거 삼아서 천동설을 주장한 쪽은 루터교성공회의 고교회파였다. 특히 갈릴레오 이전의 인물인 마르틴 루터"야훼께서 기드온을 위해 멈추라고 한 건, 태양이지 지구가 아니었다." 하며 일방적으로 지동설이 틀렸다고 개소리를 시전했다. 오늘날의 인식과는 달리, 당대의 가톨릭칼뱅파는 이런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에게 이뭐병한 태도로 일관했다.[9] "This seems to indicate that the cardinal inquisitors considered Copernicus's book to be still prohibited, even though the required corrections had been issued in 1620." Galileo's non-trial of 1616 파트의 4번째 문단[10] "This pronouncement shows that the cardinal inquisitors accepted the determination of the consultors that heliocentrism was a heresy." The Sentence and abjuration 파트의 12번째 문단[11] "지동설이 '참된 논증'을 통해 입증된다면, 성경에 근거하여 지동설이 틀렸다고 단정해서는 안 되며 성경을 신중히 재해석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벨라르미노 추기경의 발언이라고 한다. 또한 교황청은 천체의 움직임을 계산하는데 지동설이 매우 유용함을 인정하여 하나의 가설로는(계산할 때는 쓰려고) 인정했다는 얘기도 있다.[12] P. Maurizio Benedetto Olivieri, o.p., Di Copernico e di Galileo, scritto postumo, Bologne, 1872에 나온다.[13] 교황청 과학원, Copernico, Galilei et la Chiesa. Fine della controversia(1820). Gli atti del Sant’ Uffizio, a cura di W. Brandm ller e E.J. Greipl, Leo Olschki ed., Firenze, 1992년에 나온다.[14] 제1차 바티칸 공의회, 가톨릭 신앙에 관한 교의 헌장 「하느님의 아드님」, 제3장, Dz 1785-1786(3004-3005) 참조.[15] 피오 파스키니,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생애와 저술』, 제2권, 교황청 과학원, 바티칸, 1964 참조.[16] “Galileo’s letter to Castelli is one of the first secular manifestos about the freedom of science — it’s the first time in my life I have been involved in such a thrilling discovery,” says Giudice. 〈Nature 561, 441-442 (2018)〉 #[17] 하지만 수학적으로 천문학을 재구성하려고 한 동시대의 인물로는 케플러도 있으며 케플러는 케플러의 법칙을 만들어서 이름을 남긴 반면, 갈릴레오의 법칙 같은 건 없다. 지동설 또한 갈릴레오의 오리지날은 아니다. 종교재판에서 유죄를 받고서 당대의 많은 지식인들에게 영감과 투쟁심을 안겼지만, 그것 역시 자기가 하고 싶어서 한 일은 아니다. 어쩌면 갈릴레오를 이토록 유명하게 만든 최대의 공로자는 우르바노 8세 교황일지도 모른다.[18] 비록 BBC의 다큐멘터리 '코스모스'에서는 갈릴레오가 지동설을 증명했다고 잘못 언급했지만 말이다.[19] 사실이다. 실제로 지구의 자전으로 생긴 전향력 때문에 우리가 점프하면 제자리에서 착지하지 못한다. 다만 이는 우리가 느낄 수 없을 만큼 미세한 변화에 불과해서, 군대에서 포탄을 쏠 때 계산에 감안할 뿐이다.[20] 이것을 입증하려면 '광학' 이론을 빌려와야 하는데, 이건 갈릴레오보다 훨씬 후대의 물리학이다.[21] 사실 작용-반작용의 원리 때문에 실제로 무거운 것이 아주 조금은 빨리 떨어진다. 무거울 수록 지구를 중력으로 더 많이 당겨오기 때문. 갈릴레오의 설명이 맞기 위해선 지구가 고정되어 있음을 가정해야 한다.[22] 발견 당시 그는 토성에는 팔(또는 귀)이 달린 것이라 생각했다.[23] 당시 세속 군주이던 코시모 2세의 아버지 코시모 1세는 제우스에 비유되었으며 그의 아들은 4명이었다. 갈릴레오는 당시의 신화적 의미와 발견을 결합시켜 코스모 2세에게 헌정하였다.[24] 실제로는 지구가 자전하기 때문에 무역풍이 북/남동쪽에서 서쪽을 향해 분다.[25] 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추측이 있다. 갈릴레오가 전통적인 결혼 및 가족 제도에 대해 큰 저항을 느꼈다거나, 혹은 자신의 앞길에 방해가 될까 봐 최소한의 지원만 해주고 버린거나 다름없다는 등이다.[26] 오늘날도 봉쇄수도원은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외출이 불가능하다. 물론 수도자를 그만두고 퇴회하는 것은 자유다.[27] 갈릴레오의 딸들은 수녀원에 보내질 당시 12세, 13세였는데 이는 수녀원에 들어가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였다. (오늘날은 대개 만 18세 이상에 고등학교 졸업 이상) 하지만 갈릴레오는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이용해서 규칙을 무시하고 들여보냈다. 역시 옛날이나 지금이나 빽이 중요한 거다[28] 행성의 궤도에 관한 문제에서 갈릴레오는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수용하여 궤도가 완전한 원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케플러는 타원형이라 주장했다. 원형이라는 고정관념을 벗어나자 코페르니쿠스가 해결하지 못한 모든 복잡한 문제를 다 풀어냈다.[29] 이름이 빈첸초(Vincenzo)로 갈릴레오의 아들과 이름이 같다. 헷갈리지 말길.[30] 여자의 경우는 -a. 다만 Andrea는 남자 이름이다.[31] 일부 학습만화가 그런 경우가 있다.[32] 천왕성을 처음 눈으로 본 사람은 알 수 없다. 맨눈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반면 해왕성은 맨눈으로 절대 볼 수 없고, 쌍안경 정도는 있어야 겨우 볼 수 있다.[33] 외부와의 접촉을 제한 및 감시하고 외출을 허락하지 않지만, 일정한 장소 내에서는 신체의 자유를 허락하는 감금형벌에 해당한다.[34] Alan Chalmers의 논문 - The Galileo that Feyerabend Missed: An Improved Case Against Method, 동일인물의 책 'What is this thing called science?',open university press,1999,챕터 10-11[35]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는 의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