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요하네스 케플러 Johannes Kepler | |
출생 | 1571년 12월 27일 |
신성 로마 제국 바일데어슈타트 제국자유도시 (現 독일 바덴뷔르템베르크주 바일데어슈타트) | |
사망 | 1630년 11월 15일 (향년 58세) |
신성 로마 제국 바이에른 선제후국 레겐스부르크 (現 독일 바이에른주 오버팔츠현 레겐스부르크) | |
국적 | [[신성 로마 제국|]] 신성 로마 제국 |
직업 | 학자, 점성술사 |
분야 | 수학, 물리학, 천문학 |
학력 | 튀빙겐 대학교 |
종교 | 개신교(루터회) → 결별[1] |
축일 | 5월 23일 (미국 성공회)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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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의 천문학자, 수학자, 음악학자. 갈릴레오 갈릴레이와 함께 과학혁명의 선구자이자 천체역학의 창시자.주요 업적으로는 행성 운동을 표현하는 케플러의 법칙이 있다.[3]
미국 성공회에서는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와 함께 성인으로 추대받고 있다. 축일은 5월 23일.
2. 생애
2.1. 초기
요하네스 케플러는 1571년 12월 27일에 신성 로마 제국의 뷔르템베르크 지역에 있던 자유도시 바일데어슈타트(Weil der Stadt)에서 칠삭둥이로 태어났다. 아버지 하인리히 케플러는 용병이었고, 어머니 카타리나는 선술집의 딸로 참견쟁이였다. 집안도 가난한 데다 칠삭둥이로 태어나 체격이 작고 병약했으며, 4살 때는 천연두를 앓는 바람에 후유증으로 근시에 복시까지 겹치면서 천문학자로는 치명적인 결점인 시력이 매우 좋지 않았다. 또한 내장 기관도 약했고, 손가락도 정상적이지 않았다.케플러는 6살 때 1577년 대혜성을 목격했고, 천문학을 알게 되었으며 수학적으로 엄청난 재능을 가졌다. 뛰어난 지적 능력 덕분에 뷔르템베르크 계몽정책의 장학금으로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케플러는 문법 학교, 라틴어 학교, 신학교(김나지움)를 차례로 졸업하고 1589년에 튀빙겐 대학교 신학부에 입학하여 그곳에서 신학, 철학과 더불어 미하엘 매스틀린 밑에서 천문학을 배웠다. 이 때 매스틀린을 통해 접하게 된 지동설은 케플러가 지동설주의자로 된 큰 계기가 되었다. 대학 시절 케플러는 수학과 점성술에 관한 재능으로 동료들에게 명성을 얻었다. 그는 루터교 목사가 되고자 했으나 교리에 반하는 믿음 때문에 서품을 거부당했다. 23살 때 대학을 졸업했다.
2.2. 그라츠 시절
대학교를 졸업한 직후 1594년 4월 그라츠의 개신교 학교의 수학, 천문학 교사로 추천되어 그곳에 부임했다. 그러나 강의할 때 그의 목소리는 웅얼거렸고, 번번이 강의 주제를 벗어나 옆길로 빠졌으며, 그라츠에서의 2번째 해에는 수강생이 1명도 없었을 정도로 지루했다고 한다.케플러는 플라톤의 정다면체들이 행성의 궤도에 꼭 들어맞을 것이라고 추측[4], 이것에 대한 이론과 지동설의 옹호를 섞어 《우주의 신비를 담은 우주 구조론의 선구자 : 기하학의 다섯 정다면체를 통해 고찰한 천구의 놀라운 비례와 천체의 숫자·크기·운동 주기의 자세한 원인에 대한 증명》[5]이라는 책을 썼다. 이 플라톤적 우주론은 틀렸지만,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와 지동설을 대놓고 옹호한 최초의 책이라는 점에서 의의를 갖는다.
자기 이론을 인정받고 싶었던 케플러는 유럽 각국의 천문학자들에게 책을 막무가내로 보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 티코 브라헤, 니콜라우스 라이머스 등이 저 책을 받았다. 케플러가 이런 식으로 막무가내로 보낸 책들을 보고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나도 코페르니쿠스를 지지하지만, 물리적인 증거가 없기 때문에 아직 논리의 타당성을 증명할 수 없다."고 편지를 보내왔다.
그러나 책을 받은 사람들 중 니콜라우스 라이머스(이하 우르소) 때문에 케플러는 신(新) 우주설 제창자 논쟁에 휘말리게 된다.
동시에 뷔르템베르크 공작에게 "은과 보석으로 모형을 만들어, 다른 사람들도 거룩한 기하학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게 하고 여차하면 공작의 잔으로도 쓸 수 있게 하겠다."면서 연구 후원을 신청했다. 그러나 신청서를 내자마자 "이걸 어디에 쓰냐? 돈낭비 그만하고 싸구려 종이로나 만들어!"라는 반응으로 단박에 퇴짜를 맞았다.
케플러가 구상한 우주 모형 |
천문학과 점성술이 분화되기 직전 시대를 살아갔던 케플러는 뛰어난 고전 점성술사이기도 했다. 케플러는 그라츠 시절 수학 강의 이외에 하나가 예언과 부합하도록 점성력(占星曆)을 고치는 것이었는데, 터키의 침공과 추운 겨울을 예견했던 게 맞아 떨어지면서 명성을 얻고, 나중에는 황제 루돌프 2세의 재정적 지원까지 얻게 됐다. 그는 동시대의 점성술을 비판하고 이를 개선하여 천문학, 날씨, 수학, 음악 등과 조화시키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이후 전문 천문학이 발전하면서 점성술의 입지는 크게 약화되었다. 나중에는 케플러 본인도 점성술에 다소 회의와 경멸을 표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는 만년까지 점성술의 개선을 포기하지 않았다.
2.3. 프라하 시절
이후 케플러는 티코 브라헤와 함께 일하게 된다. 시력이 좋지 않았던 케플러는 티코 브라헤의 컴퓨터[6]로 일하게 되었다. 시력이 뛰어난 티코 브라헤와 시력은 좋지 않지만 수학능력이 탁월한 케플러와의 업무적인 궁합은 좋았다고 알려져있다. 하지만 티코의 곁에는 이미 크리스티안 쇠렌센 롱고몬타누스, 프란츠 텡나겔, 요하네스 뮐러 등 여러 부하 천문학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케플러의 존재감은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신경질적이었던 케플러는 아버지뻘 되는 티코에게 버럭버럭 대들었고, 얼마 동안 같이 일하던 두 사람은 사이가 틀어져 케플러는 그라츠로 돌아가 버렸다.티코 브라헤가 죽은 후 브라헤의 유언 덕에 관측 자료를 넘겨받은[7] 케플러는 루돌프 2세의 보호 아래 황실 수학자가 되어 안정을 얻은 뒤 자료 분석에 몰두했다.
유명한 케플러의 법칙 발견자로, 케플러가 처음 구하고자 한 목표는 지구의 궤도였는데 브라헤의 자료에 의하면 조금은 일그러진 모습이었다. 피타고라스를 비롯한 수천 년 가까이 대부분의 천문학자들이 완전한 원이라고 믿어왔던 지구의 궤도가 완전한 원이 아니라는 것을 믿기 힘들었던 케플러는 일단 지구 궤도는 접어두고 화성 궤도 연구로 방향을 돌렸다.
화성의 궤도를 구하기 위해 8년 동안 복잡하고 지루한 계산을 70여 차례나 되풀이했다. 결국 케플러는 화성의 속도가 일정하지 않고 태양에 접근할 때 더 빨라지고 멀리 있을 때는 느려진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이는 케플러가 케플러의 제2법칙[8]을 만드는 것으로 이어진다.
화성의 궤도를 계산하는 과정에서 나온 수치가 브라헤의 관측 중 10회에서는 '2(분)의 차이로 일치했으나 다른 두 차례의 관측 자료에서 8의 오차'가 생겼기 때문에 고심을 거듭하다 결국 원형 궤도를 포기하고 타원 궤도 개념을 도입했고 이는 나머지 오차를 없애는 쾌거를 이뤘다.
1609년, 위의 두 법칙을 담은 《새로운 천문학(신천문학)》[9]을 출간했다.
이후 1618년 케플러는 '행성의 공전 주기의 제곱은 행성 궤도의 긴 반지름의 세제곱에 비례한다'는 내용의 제3법칙을 발표했고, 《우주의 조화》라는 제목으로 출간했다. 이에 대한 증명은 아이작 뉴턴이 했다.[10]
갈릴레오가 망원경을 이용해서 새로운 발견을 했다는 소식을 접한 케플러는 쾰른의 에른스트 공작에게서 빌린 망원경을 이용해 광학 망원경 연구를 시작했고, 접안렌즈가 오목렌즈인 갈릴레이식과는 달리, 접안렌즈가 볼록렌즈인 케플러식 망원경을 발명해냈다. 오늘날 천체 망원경 중 굴절 망원경은 대부분 갈릴레이식보다는 훨씬 넓은 영역을 볼 수 있는 케플러식이 선호되고 있다.
케플러는 갈릴레오가 망원경의 정확성을 의심받을 때 황실 수학자라는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갈릴레오를 보증해 주었고, 이것은 갈릴레오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갈릴레오는 자신에게도 망원경을 보내 달라는 케플러의 요구를 번번히 무시했다. 이것은 과거 갈릴레오와 티코가 혜성을 두고 논쟁을 했을 때, 갈릴레오는 혜성이 대기현상에 불과하다고 했고 티코는 혜성이 토성보다 멀리에서 오는 천체라고 주장했는데, 이때 케플러가 티코의 역성을 들었기 때문에 속좁은 갈릴레오가 케플러를 무시한 것이라고 추측되곤 한다.[11] 갈릴레오는 케플러를 무시했을 뿐 아니라 그의 행성운동법칙도 무시했다.
이후 행성 운행표를 출간하면서, 자신의 후원자였던 루돌프 2세를 기리는 뜻의 《루돌프 행성 운행표(루돌프표)》를 제목으로 붙였다. 이 표는 기존 코페르니쿠스의 것에 비해 행성의 위치를 30배나 더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게 해 주어 항해자들에게 큰 환영을 받았다.
그 외에 기하학에서 케플러의 추측을 내놓았는데, 스스로는 수학적으로 증명하지 못했으며 이는 400년 뒤인 1998년에 미국의 수학자인 토마스 헤일스가 전자식 컴퓨터를 통해 증명했다.
말년에 들어서면서 30년 전쟁의 와중에 모든 후원자들을 잃고 가난으로 고생했으며, 후원자들과 돈을 구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해야 했다. 결국 추운 계절에 밀린 급료를 받기 위해 길을 나섰다가 병을 얻게 되어 1630년 11월 15일에 5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성벽 밖 공동묘지에 묻힌 그의 무덤은 30년 전쟁 때 손실되고 말았다.
그가 사망한 날에 하늘에서 유성우가 떨어져 내렸다고 전해진다. 케플러가 죽은 날짜는 황소자리 유성우와 사자자리 유성우가 관측될 무렵이다.
묘비명은 “나는 천체들을 관측했고 이제는 지구의 그림자를 관측한다. 하늘에는 나의 정신이, 땅에는 나의 몸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고 한다. #
《꿈(Somnium)》이라는 초기 SF로 여겨지는 작품을 쓰기도 했다. 그런데 이 소설이 실제 케플러의 생애와 유사했는데 거기서 자신의 어머니가 마녀라는 내용이 있었고 그걸 진짜로 믿어버린 사람이 있었다. 여기에 케플러의 어머니 카타리나 케플러는 언쟁을 자주했는데 친구 우르술라 라인볼트(Ursula Reinbold)도 카타리나와 언쟁을 벌인 후 앙심을 품고 있었다[12]. 어느날 우르술라는 병에 걸리고 말았는데[13], 이발사[14]였던 동생이 약을 주었지만 낫질 않자 동생은 아무래도 마녀의 저주에 걸린 것 같다는 터무니없는 소리를 했다. 이때다 싶은 우르술라는 치료사이자 약재상이기도 한 카타리나가 준 약초물을 마신 기억을 떠올리며 관청에 카타리나가 마녀라고 고발했다.
카타리나는 1615년 첫 번째 재판에서 무혐의로 풀려났지만 다시 우르술라의 고발로 잡혀들어갔다. 이에 케플러는 어머니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법학자들에게 자문을 구하기도 했고 다행히 무죄 방면으로 카타리나는 또다시 풀려났다. 케플러는 어머니를 오스트리아 린츠로 피신시키지만 다시 어머니는 돌아왔고, 벼르고 있던 우르술라가 카타리나를 다시 고발하면서 체포되었다.
우르술라는 마녀 혐의에 명예훼손죄로 벌금을 청구까지 했고 증인들까지 불러모았다. 증인들은 "카타리나가 아이 두 명을 손으로 만졌는데 둘 다 죽었다.", "그녀가 부르가 할러(Bruga Haller)의 허벅지를 건드려 다치게 했다. 부르가 할러의 딸 역시 카타리나가 만진 뒤에 팔을 다쳤다.", "카타리나가 만진 소 한 마리와 돼지 두 마리가 모두 죽었다." 하는, 조금만 생각해도 이상하기 짝이 없는 소리로 카타리나를 몰아세웠다. 결국 카타리나는 14개월 동안 감옥생활을 하였다.[15] 겨우 1621년 10월에 카타리나는 자유의 몸이 되어 풀려났고 약 반 년 뒤 1622년 4월 13일에 숨을 거두었다. 이후 약 300년이 흐른 1937년 카타리나의 고향 레온베르크에서는 카타리나의 명예를 회복하고 기념하는 동상을 세워 기린다고 한다.
3. 매체에서
- 뮤지컬 시데레우스에서 갈릴레이와 함께 투톱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갈릴레이의 망원경과 저서 <시데레우스 눈치우스>가, 케플러의 <우주 구조의 신비>에서 영감을 얻어 서로 편지를 주고받으며 함께 연구한 결과물이라면?'이라는 상상으로 진행되는 내용. 실제 역사에서 각색이 꽤 많이 되었지만, 나이 지긋하고 조심성 많은 갈릴레이와 대비되는 조금 무모해도 열정적인 모습이 매력적으로 그려진다.
- 게임 대항해시대 시리즈에서 NPC와 항해사로 등장한다.
[1] 기독교 신앙을 버린 건 아니고, 교회일치운동이라 해서 개신교와 가톨릭을 화해시키려다 이단 혐의를 받고 무시를 받은 결과 자신의 신앙을 토대로 루터회와 결별하였다. 그러나 죽기 전까지 "나는 개신교와 가톨릭을 화해시키려고 했다"라고 유언한 것으로 보아, 믿음을 버린 것은 아닌 것 같다.[2] 고대인들은 이 세상이 신의 뜻에 따라 움직이고 있으며, 신은 천체의 움직임을 통해 자신의 뜻을 드러내므로, 천체의 움직임을 관측, 분석하면 신의 뜻을 알 수 있다고 생각했다. 즉 천문학은 원래 밤하늘의 별을 올려다보며 천체의 움직임을 분석해 신의 뜻을 이해하고, 미래를 예측하고자 하는 점성술에서 유래하였다. 당시까지도 천문학과 점성술은 명확히 구분되지 않은 상태로, 천문학자들에게 점성술은 일종의 생계수단이기도 했다. 케플러도 천체관측을 통한 미래 예언이 몇 번 맞아떨어지는 바람에 유명해지면서 황제의 후원까지 얻게 되었다.[3] 발표 당시에는 관측 자료를 바탕으로 하는 가설/추측 수준이었지만, 추후 아이작 뉴턴이 뉴턴의 운동법칙을 만들게 되면서 이것이 모두 옳다고 증명되어 '법칙'으로 확정되었다.[4] 예를 들자면, 수성의 궤도는 정사면체에 들어맞는다든지.[5] 통칭: 우주 구조의 신비.[6] 인간 컴퓨터는 기계식 컴퓨터 등장 이전 사용되던 직업으로 전자식 컴퓨터가 등장한 현대에는 군사 & 우주용 CPU 같은 일부 분야를 제외하면 비싼 인건비로 사용되지 않는다.[7] 아닐 수 있다. 독살로 읽는 세계사(엘리너 허먼 저, 현대지성) 208쪽 18~19번째 줄에 브라헤는 '자신의 자료와 장비를 케플러가 아니라 가족에게 물려주겠다고 유언했다'고 나온다.[8] 면적속도 일정의 법칙.[9] 책 이름에 nova가 들어간다고 '천문학 신성'이란 제목으로 자주 오역당하는데, 라틴어에서 nova는 그냥 '새롭다'는 뜻의 형용사다. 즉, 영어의 new와 같다.[10] 증명: 공전 궤도가 완벽한 원형이라고 가정했을 때, 장반지름을 a, 주기를 p라 하면 [math(F=GMm/r^2=mv^2/r)]이고 이는 [math(GM/r=v^2, r=a)]이라 가정했으니 [math(Gm/a=v^2, v=2\pi a/p)]이니 [math(Gm/a=4{\pi}^2a^2/p^2)], 이 때 [math(a^3=GMp^2/4{\pi}^2)]이므로 [math(a^3)]는 [math(p^2)]에 비례한다. 하지만 이 증명은 공전 궤도가 완벽한 원형이라고 가정했을 때이며, 태양계 행성의 공전궤도는 타원이라는 케플러의 제1법칙에 위배된다. 따라서 더욱 정확한 증명은 미적분을 활용해야하며, 이것은 대학교 수준의 수학과 물리학이 요구된다. 뉴턴이 증명에 성공한 것도 그 자신이 뉴턴식 미적분법을 만든 장본인이기 때문.[11] 실제로 갈릴레오는 케플러와 비교해서 인격적으로는 결함이 있는 편이었다. 내연녀와의 사이에서 사생아 딸을 둘이나 낳고 자기 앞길에 거슬릴까봐 여자와 결혼하지 않았고, 결국 두 딸은 애비없는 자식이라는 이유로 제대로 된 혼처도 못 구하고 수녀원에 들어가야 했다. 반면 케플러는 평생 가난과 고독으로 고통받았지만 가족을 저버린 적은 없었다. 천연두와 가난으로 아이들을 잃을 때마다 하늘이 무너지는듯 슬퍼했고, 어머니가 마녀로 몰렸을 때도 다른 일을 다 미뤄두고 어머니를 전투적으로 변호해서 마녀가 아님을 입증하여 풀려나게 만들었다.[12] 여기에 케플러의 동생 크리스토프와 금융적으로 분쟁 관계에 있었다고도 한다.[13] 임신한 아이를 지우기 위해 약물을 복용했다가 탈이 났다고도 한다.[14] 옛날 서양에서 이발사는 외과의사 역할도 겸했다.[15] 이때 고문까지 받았는데, 당시 연세가 70세가 넘은 고령이라 그런지 고문기구들을 보여주며 겁만 주는 방식으로 고문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케플러의 모친은 대가 세기로 유명한 사람이라 별 효과는 못 봤다.[16] 장착 시 함대 이속 증가[17] 장착 후 전투 시 전투력 증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