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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톨트 브레히트

<colbgcolor=#000><colcolor=#fff> 베르톨트 브레히트
Bertolt Brecht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ertolt-Brecht.jpg
본명 오이겐 베르톨트 프리드리히 브레히트
Eugen Berthold Friedrich Brecht
출생 1898년 2월 10일
독일 제국 바이에른 왕국 아우크스부르크
사망 1956년 8월 14일 (향년 58세)
독일민주공화국 동베를린
직업 극작가, 연극연출가, 시인
학력 뮌헨 대학교 (의학부 / 비졸업, 1917년 입학)
정당

[[무소속(정치)|
무소속
]][1]
배우자 마리안 초프 (1922년 ~ 1927년, 이혼)
헬렌 바이겔 (1930년 결혼)
자녀 4명
사상 마르크스주의, 공산주의[2]
종교 무종교(무신론)
서명 파일:베르톨트 브레히트 서명.svg

1. 개요2. 생애3. 작품 세계
3.1. 철학적 영향력
4. 애증의 대상 동독5. 작품
5.1. 픽션5.2. 연극5.3. 시5.4. 노래(가사)5.5. 이론서
6. 여담7.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독일극작가연극연출가, 시인. 독일문학계에서는 절대 빠질 수 없는 이름이며 독일문학을 넘어 그야말로 세계 연극계에 한 획을 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사람이다. 그가 남긴 무수한 작품들은 그가 떠난 지금도 여전히 연구대상이며 무대에 올려지고 있으며 그의 극작론은 연극계를 넘어 다른 학문분야에까지 영향을 미칠 정도이다.

2. 생애

독일 바이에른 왕국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출생했다. 1차대전에 징집되지 않으려고 뮌헨 대학교에서 의학을 전공했지만 결국 제1차 세계 대전 말기에 병원에서 의무병으로 1달간 근무하였다. 1922년 <밤의 북소리>로 클라이스트 상을 수상하였으며 1928년 연극 <서푼짜리 오페라>로 명성을 얻기 시작하였다.

그는 일찍이 정치적으로 좌파 성향을 띄고 있었는데 초기에는 무정부주의적 경향을 보였으나, 1920년대 후반부터는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여 자신의 사상을 작품에 이입하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그의 작품 중에는 실질적으로는 그의 동료들과 공동으로 집필한 작품이 굉장히 많다. 그 예로 <서푼짜리 오페라>의 각본은 거의 대부분 그의 여비서였던 엘리자베스 하우프트만이 영국인 존 게이의 <거지 오페라>를 번역한 것을 메인 텍스트로 삼은 것이어서 후에 하우프트만이 공동 저자로 인정되었다.[3]

1933년 나치스가 독일의 정권을 장악하고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을 구실로 대대적인 정치적 탄압을 전개하자 덴마크로 망명하여 정치적 의식을 드러내는 시를 쓰는 한편 연극 <제3제국의 공포와 빈곤>,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 등을 썼다.

1941년 핀란드를 거쳐[4] 미국으로 망명해 로스앤젤레스에 거주하며 할리우드 영화 시나리오를 썼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에는 미국의 매카시즘 때문에 스위스로 떠나 <안티고네>와 <파리 코뮌의 나날>을 쓰고 연극론에 대한 개설서 <소사고 원리>를 집필하기도 했다.

말년에는 동독의 동베를린으로 가 자신의 작품들을 연출하면서 후배 연극인을 양성하였다. 모스크바에서 스탈린 평화상을 수상하였으며 동독에서도 여전히 체제를 풍자하고 비판하는 작품을 남겼다.

그는 사회주의를 연극 작품에 접목시킨 좌파 극작가로도 유명하지만 시인으로도 유명하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 <1492년> 등이 유명하다. 휴머니즘 속에서 현실의 폭력성을 비판하고 전쟁을 고발하는 내용이 많다.

3. 작품 세계

'소격효과(Verfremdungseffekt)'라는 기법으로 극작계에 큰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소격효과는 '생소화 효과', '낯설게하기 효과'로도 알려져 있다. Verfremdung이라는 단어의 철학 번역어가 그 유명한 소외다. 인간소외 현상의 소외. 이런 입장을 따르면 그의 연극이나 시에 관객이 감정이입을 하게 되면 독자는 작가의 의도를 잘못 해석한 셈이다. 읽는 내내, 그리고 읽고 나서도 껄끄러운 불편함이 남아서 현실비판하기 시작해야 한다.

서사극은 아리스토텔레스에서부터 내려온 기존 극작기법에 반기를 들고 나온 것이다. 브레히트는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연극을 감상할 때의 보통의 태도(연극 무대에 대한 공감, 주인공에 대한 동화, 대리만족 등)들을 부정한다. 대신 연극에서 벌어지는 모든 상황을 '낯설게' '관찰하는' 연극을 보여준다. 때문에 관객들 입장에서는 극의 진행을 예상할 수 없어 굉장히 충격적으로 다가올 수도 있으며 감성적인 관람보다는 이성적이며 생각하고 판단하는 관람을 작가가 주문한다. 예술은 자본주의가 현실에서 주체를 소외시키는 것에 대항해야 한다. 즉, 현실을 위한하게 만드는 이데올로기에 감정이입을 하지 못하게 만들어서 현실을 이성적으로 직시하게 만들어야 한다. 연극은 관객을 몰입시키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모순을 드러냄으로써 관객을 불편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관객이 현실을 다시 생각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너를 속이는 현실에 감정이입하지 말아야 한다 이렇게 연극을 통해 관객이 현실에서 소외되어 있으며 자신이 현실에 소외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하기 위해 연극이 관객을 몰입시키지 않고 소외시키도록 한다. 관객은 현실에 소외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연극을 통해 감정이입에 실패하고 소외당하면서 깨닫게 된다.

아래는 소격효과를 반영하는 예들이다.때문에 그가 30년대 '망명문학(Exileliteratur)'의 기수로서 다분히 사회비판적인 작품을 내놓을 수 있던 것은 그의 연극이론에서부터 이미 보이고 있었다. 후술할 그의 말은 그가 연극을 통해 무엇을 추구했으며, 그가 만든 결과물들이 의미하는 것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희곡작가이다. 나는 내가 본 것을 알리고자 한다. 인간시장에서 나는 보았다. 인신매매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나는, 희곡작가인 나는 그런 것을 알리고자 한다."

생소화 효과는 연극계 뿐만 아니라 관련 인문학에서도 종종 인용된다. 심지어는 연극학하고는 전혀 관련이 없을 것 같은 역사교육이론에서도 역사 해석과 역사적 사고 증진 등의 방법으로 논의될 정도이니 이 정도면 한 획을 그었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나무위키에서도 자주 나오는 용어인 제4의 벽도 그가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이다. 다만 최초는 아니다.

이러한 그의 작품세계의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독일어권 작가는 '막스 프리슈(Max Frisch)'나 이른바 '희비극'으로 알려진 '프리드리히 뒤렌마트(Friedrich Duerrenmatt)' 등을 꼽을 수 있는데 브레히트 바로 다음 세대 독일어권 연극계를 잡았던 작가들이다. 참고로 이 두 사람은 모두 스위스인이다.

3.1. 철학적 영향력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저에게 무한한 충격을 주었던 것은 바로 브레히트가 연극에서 일으킨 혁명과 맑스가 철학에서 일으킨 혁명 사이의 일종의 유사성입니다. 사람들은 브레히트는 철학자가 아니었다고 말할 것이고, 철학교수들은 브레히트에게서 철학적 가르침들을 찾지 않을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왜냐하면 그는 철학책을 쓰지 않았고, 그는 하나의 철학적 체계를 주조하지도 않았으며, 철학적·이론적 담론들을 취하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브레히트는 스스로 말하기를 자신은 철학에 대해 순진(naïf) 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철학교수들은 틀렸습니다. 왜냐하면 브레히트는 맑스가 이룩한 철학적 혁명의 본질적인 것을 매우 잘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 본질을 실천적으로, 그러니까 이론적 담론이 아니라 제가 그의 연극적 실천이라고 부를 것 안에서 이해했습니다. 브레히트는 결코 연극적 실천에 대해 말하지 않고, 언제나 연극적 기술(technique) 안의 변화들에 대해 말합니다. 그는 마치 오직 기술에 대해서만 말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벌거벗은 기술 그 자체란 없습니다. 하나의 기술은 언제나 하나의 실천에 삽입되어 있고, 언제나 어떤 하나의(une) 실천의 기술입니다. 브레히트가 연극적 기술에서 이룩한 혁명"들"은 연극적 실천에서 이룩한 어떤 혁명의 효과들로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브레히트의 텍스트들 속에서 매우 분명합니다. 그가 도입한 연극적 기술의 개혁들은 언제나 전체적인 연출(mise en scène) 개념에 연결되어 있고, 이 연출이라는 개념은 주체(sujet)라는 개념에 연결되어 있고, 이 주체라는 개념은 무대-관객, 배우-관객의 관계라는 개념에 연결되어 있고, 이 무대-관객, 배우-관객의 관계라는 개념은 연극-역사의 관계라는 개념에 연결되어 있고, 이 연극-역사의 관계라는 개념은 어떤 철학적 개념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모든 용어들은 브레히트의 기술적 개혁들이 연극적 실천에서 일어난 혁명의 효과들로서 고려되어야 한다는 점을 밝히고 있습니다.
루이 알튀세르,「브레히트와 맑스에 대하여」(1968, 서종현 옮김) 中

4. 애증의 대상 동독

전술했듯 그는 망명 생활을 청산하는 과정에서 서독과 동독, 두 개의 독일 중 사회주의 진영에 있던 동독(독일민주공화국)을 선택했다. 브레히트 외에도 아나 제거스[5] 등 다수의 문인들과 예술가들이 독일 땅에 세워진 새로운 '사회주의' 국가로써 독일민주공화국을 선택했다. 20세기 초중반부터 자유주의 우파 국가들은 공산주의를 배제시키기 위해 당시에는 제3의 물결이란 이름으로 떠오르던 파시즘을 공공연히 용인하거나 밀어주기도 했는데 파블로 피카소와 같은 예술계 지식인들이 앞장서서 이러한 기조에 반대해 사회주의 노선의 조직들을 택했다. 그도 나치 집권 이전부터 독일 공산당 등 좌파 정치 운동을 지지하고 이에 관여해 온 급진적 좌파였던 만큼 '사회주의' 국가를 표방한 독일민주공화국을 선택했다.

독일민주공화국은 동독을 선택한 그에게 연극계 스타로써 그에 걸맞은 대접을 해 주었다.

그에게는 당시 베를린의 최고 극장 중 하나인 '베를린 앙상블'이 주어지는 등 작품활동을 위한 환경에 있어 독일민주공화국 당국의 전폭적 지원이 이루어졌음에도 동독 당국의 문학계와 예술계에 대한 검열을 냉소하고 조롱했다. 그는 독일민주공화국 체제와 더 나아가 소련 스탈린 체제에 대해서 그 문제점을 공공연히 풍자했다. 특히 1953년 동독 봉기의 진압을 지지했지만 정부에도 실망하여 공공연히 정부를 비판했고 조롱했는데 정부가 보기에 인민이 못마땅하다면 정부가 인민을 해산해야 하지 않겠느냐며 조롱조로 공공연히 정부를 비판했다.[6]

하지만 독일민주공화국과 그 후원자인 소련에 대한 비판적 시각에도 불구하고 죽을 때까지 반공주의자로 전향하거나 독일연방공화국을 지지하진 않았다. 어쨌든 자유주의 세력들에 의해 파시스트 세력들이 자라나고 그 결과가 제2차 세계 대전이라고 생각했던 그에겐 독일민주공화국과 그 후원자인 소련이 서방보다 더 낫다고 생각했으며 독일연방공화국과 그 후원국들의 자본주의도 문제가 많다고 생각했다. 당시 독일연방공화국은 68 운동 이전으로써 아직 나치에 대한 완전한 청산에 미온적이었기 때문에 독일연방공화국도 곱게 봤을 리가 없다.

여기다 그가 품고 있던 스탈린주의-소련 중심 관리 체제에 대한 불만은 68 운동과 프라하의 봄에서 본격적으로 대두되기 때문에 그 이전에 사망한 그가 체제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하기는 어려웠다. 심지어 1956년 헝가리 혁명조차 그의 사후, 서유럽 공산당들이 소련 공산주의와 노선을 달리하기 전에 일어났다.

5. 작품

그가 지은 작품에는 큰 특징이 있는데 작품의 무대가 대부분 독일 밖이라는 것이다.

5.1. 픽션

5.2. 연극

그의 연극에 입문하고자 하는 사람은 임한순 교수의 <브레히트 희곡선집 1, 2권>을 추천한다. 작품 해설도 붙어 있고 과거 판본에 비해 번역도 깔끔하다. 단, 학술서로 분류돼서인지 가격은 좀 세다. 많은 작품이 유명하지만 당대에 가장 인기 있었고 현재에도 가장 인기 있는 작품은 '서 푼짜리 오페라', '억척 어멈과 그 자식들', '갈릴레이의 생애', 사천의 선인이다.

한국에 대본이 번역되어 있거나 잘 알려진 작품은 굵은 글씨로 표시한다.

5.3.

희곡이 서사극인 것처럼 시도 서사시이기 때문에 서정적인 것이 매우 드물다.

5.4. 노래(가사)

초기에는 쿠르트 바일(Kurt Weil)과 합작하여 곡을 만들었으나 바일과 결별한 후에는 한스 아이슬러와 합작하였다. 그가 만든 대부분의 노래는 연극의 삽입곡이나 민중가요, 노동 운동가로 쓰였다.

5.5. 이론서

6. 여담

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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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국 거주 시기에 반미국위원회의 조사를 받았는데 이때 공산당에 가입한 적이 없다고 증언했다. 실제로도 가입하지 않았지만 공산주의를 지지했다.[2] 마르크스-레닌주의, 현실사회주의를 비판했으나 동시에 프랑크푸르트 학파 등 수정주의적 신마르크스주의 운동에도 비판적인 레닌주의자였다.[3] 당시 브레히트는 영어를 할 줄 몰랐다.[4] 그런데 이 인간, 겨울전쟁 때는 핀란드는 망해도 싸다 그랬다. 비단 브레히트뿐만 아니라 스페인 내전 국제여단 참전용사 등 당대 핀란드 밖의 좌파들이 대개 그랬다.[5] 독일의 대표적인 사회주의 소설가, '일곱번째 십자가'로 알려져있다.[6] '해결 방법'의 내용[7] 그의 최고작. 유명한 노래 '칼잡이 맥'이 포함된 유명한 연극이다.[8] 정확히는 극중 갈릴레이가 권력에 굴복(?)하자 제자가 실망하여 '영웅이 없는 나라는 불행하다'고 이야기하고 이에 갈릴레이가 '영웅을 필요로 하는 나라가 불행한 것이다'이라고 답하는 장면이 있다.[9] 참고로 후기 판본에서는 그냥 "아르투로 우이의 상승"으로만 표기하기도 한다. 이유는 간단한데 아르투로 우이의 상승은 결국 못 막았으니까.[10] Brecht, Bertold Gesammelte Werke Band 9, Frankfurt am Main : Suhrkamp, 1967, page 546에 수록되었다.[11] 이른바 "16세의 봉제공 엠마 리스가 체르노비츠에서 예심판사 앞에 섰을 때 그녀는 요구 받았다. 왜 혁명을 선동하는 삐라를 뿌렸냐(고) (그 이유를 대라고). 이에 답하기 위해(대답하고 나서) 그녀는 (일어서더니)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에) (예심)판사가 손을 내저으며 저지하자 (혹은 제지하려고하자) 그녀는 목소리를(혹은 그녀의 목소리는) 더욱더 (큰 소리로) 매섭게 매섭게 외쳤다. 기립하시오. 기립하시오.(혹은 당신도 일어서서 부르시오 혹은 기립하시오 당신도) 이것이 바로(혹은 이것은) 인터내셔널이오."로 구전된 내용이다. 한국 운동권에서 인터내셔널가를 선창하기 전에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12] 정작 독일에는 별로 알려지지 않은 시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