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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괴링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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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c0000><colcolor=#fff> 독일 국방군 공군 초대 최고사령관 | |||
나치 독일 제2대 부총리 헤르만 빌헬름 괴링 Hermann Wilhelm Göring | |||
출생 | 1893년 1월 12일 | ||
독일 제국 바이에른 왕국 로젠하임 (現 독일 바이에른주 오버바이에른현 로젠하임) | |||
사망 | 1946년 10월 15일 (향년 53세) | ||
연합군 점령하 독일 바이에른 뉘른베르크 | |||
묘소 | 없음[1] | ||
재임기간 | 제2대 부총리 | ||
1933년 4월 11일 ~ 1945년 4월 23일 | |||
초대 공군최고사령관 | |||
1935년 3월 1일 ~ 1945년 4월 24일 | |||
서명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cc0000><colcolor=#ffffff> 부모 | 아버지 하인리히 에른스트 괴링[2] 어머니 프란치스카 티펜브룬 | |
형제자매 | 누나 올가 테레제 조피 괴링, 누나 파울라 엘리자베트 로자 괴링, 남동생 알베르트 괴링 | ||
배우자 | 카린 괴링(1923 ~ 1931; 사별)[3] 에미 괴링(1935 ~ 1946)[4] | ||
자녀 | 에다 괴링(1938 ~ 2018)[5] | ||
학력 | 뮌헨 대학교 (경제학·사학 / 학사) | ||
종교 | 개신교 (루터회) → 무종교[6] | ||
신체 | 178cm / 118kg / IQ 138 (웩슬러 벨뷰 지능검사) | ||
소속 정당 | |||
복무 | 독일 제국 육군 | ||
1912년 ~ 1915년 | |||
독일 제국 육군 항공대 | |||
1915년 ~ 1918년 | |||
독일 국가방위군 육군 | |||
1918년 ~ 1920년 | |||
돌격대 | |||
1922년 ~ 1945년 | |||
독일 국방군 공군 | |||
1935년 ~ 1945년 | |||
최종 계급 | 상급집단지도자 (돌격대)[7] 제국원수 (독일 국방군 공군)[8] | ||
주요 참전 |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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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는 언제나 마지막 르네상스인이다.
헤르만 괴링
독일의 군인으로 최종 계급은 제국원수(Reichsmarschall)[9]이며, 직책은 공군총사령관(Oberbefehlshaber der Luftwaffe). 민간 관직으로는 국가의회 의원, 16대 국가의회 의장[10], 프로이센주(州) 총리[11] 겸[12] 내무장관, 4개년 경제계획장관, 산림청장, 항공장관,[13] 돌격대 대장을 겸했다. 마지막으로 아돌프 히틀러가 직접 임명하고, 법령으로 선포한 나치 독일의 공식적인 2인자.헤르만 괴링
2. 약력
- 1914.1.20. 소위(Leutnant) 임관
- 1914.8.20 ~ 1914.10.12: 바덴 112보병연대 대대 부관
- 1914.9.15. 1914년 제정 2급 철십자 훈장 수훈
- 1914.10.13 ~ 1914.10.27: 제3비행보충대대 수습과정
- 1914.10.28 ~ 1915.6.29: 제25야전비행대대 연수
- 1915.3.22. 1914년 제정 1급 철십자 훈장 수훈
- 1915.6.30 ~ 1915.9.14: 프라이부르크 비행학교에서 조종사 교육 이수
- 1915.9.15 ~ 1916.7.8: 제25야전비행대대 조종사
- 1916.7.9 ~ 1916.8.4: 제203포병비행대대 조종사
- 1916.8.5 ~ 1916.9.5: 제25야전비행대대 조종사
- 1916.9.6 ~ 1916.9.27: 메츠 전투비행대 배속
- 1916.9.28 ~ 1916.10.19: 제7전투비행대 조종사
- 1916.10.20 ~ 1916.10.21: 제5전투비행대 조종사
- 1916.10.22 ~ 1917.2.14: 제10비행보충대대 훈련과정
- 1917.2.15 ~ 1917.5.16: 제26전투비행대 조종사
- 1917.5.17 ~ 1918.7.16: 제27전투비행대장
- 1917.8.18: 중위(Oberleutnant) 진급
- 1917.10.20. 호엔촐레른 가문 검 기사 십자훈장 수훈
- 1918.6.2. 푸르 르 메리트 훈장 수훈
- 1918.7.17 ~ 1919.7.30: 제1전투비행단장
- 시기 미상. 1918년 제정 전상장 흑장 수훈
- 1919.7.31 ~ 1920.3.11: 제112보병연대 귀대 후 퇴역 자유대기
- 1920.1.8: 대위(Charakter als[14] Hauptmann) 진급
- 1920.3.11: 퇴역
- 1919 ~ 1920: 덴마크 항공업계 시험비행사
- 1920 ~ 1921: 스웨덴 항공회사 항공부문 책임자
- 1922.12.10 ~ 1945.4.23: 돌격대 상급지도자
- 1923.11.9 ~ 1927: 맥주홀 폭동에서 낭심 및 왼쪽 허벅지에 중상, 오스트리아 티롤 지역으로 도주 후 이탈리아 로마, 스웨덴 스톡홀름으로 이동
- 1927: 독일 귀환
- 1928.5.15 ~ 1945.4.23: 민족사회주의 독일노동자당 소속 국가 국회의원
- 1932.8.30 ~ 1945.4.23: 제16대 국회의장
- 1933.1.30 ~ 1933.5.5: 무임소장관
- 1933.2.2 ~ 1933.5.5: 국가 항공위원
- 1933.4.11 ~ 1945.4.23: 프로이센주 총리
- 1933.4.21 ~ 1934.5.1: 프로이센주 내무장관
- 1933.4.27 ~ 1935.2.28: 독일 공군 조직 재무장에 관여
- 1933.5.5 ~ 1945.4.23: 국가 항공장관
- 1933.7.8 ~ 1945.4.23: 국가 산림부 장관 겸 수렵어업청장
- 1933.8.31. 보병대장(Charakter als General der Infanterie) 진급
- 1935.1.30 ~ 1945.4.23: 프로이센 주지사
- 1935.3.1. 항공대장(General der Flieger) 진급
- 1935.3.1 ~ 1935.5.31: 국가 공군 사령관
- 1935.6.1 ~ 1945.4.23: 공군 총사령관
- 1936.4.20. 상급대장(Generaloberst) 진급
- 1936.10.18 ~ 1945.4.23: 4개년 경제계획부 장관
- 1937.11.8. 일본제국 훈일등욱일대수장 수훈
- 1938.2.4. 원수(Generalfeldmarschall) 진급
- 1939.8.30 ~ 1945.4.23: 국가 국방위원장
- 1939.9 : 1939년 제정 2급 철십자 훈장 보장
- 1939.9 : 1939년 제정 1급 철십자 훈장 보장
- 1939.9.30. 기사 철십자 훈장 수훈
- 1940.7.19. 제국원수(Reichsmarschall) 진급
- 1940.7.19. 대 철십자 훈장[15] 수훈
- 1942.9.26. 일본제국 훈일등욱일동화대수장 수훈
- 1945.4.23: 반역 혐의로 모든 공직에서 해임 및 수배
- 1945.5.8 ~ 1946.10.1: 미군에 신병 인도, 수감
3. 생애 및 평가
자세한 내용은 헤르만 괴링/생애 문서 참고하십시오.4. 소속 정당
소속 | 기간 | 비고 |
| 1922 - 1923 | 정계 입문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 1923 - 1927 | 해외 도피 |
| 1927 - 1945 | 복당 출당 및 제명[16] |
5. 선거 이력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28 | 바이마르 공화국 총선 | 비례대표 (포츠담 제1번 비례선거구)[17] | | 810,127 (2.6%) | 당선 (9위) | 초선 |
1930 | 바이마르 공화국 총선 | 6,379,672 (18.25%) | 당선 (2위) | 재선 | ||
1932.7 | 바이마르 공화국 총선 | 13,745,680 (37.27%) | 3선[의장] | |||
1932.11 | 바이마르 공화국 총선 | 11,737,395 (33.09%) | 당선 (1위) | 4선[의장] | ||
1933.3 | 바이마르 공화국 총선 | 17,277,180 (43.91%) | 5선[의장] | |||
1933.11 | 나치 독일 총선 | 39,655,244 (92.11%) | 6선[의장] | |||
1936 | 44,462,458 (98.8%) | 7선[의장] | ||||
1939 | 48,751,587 (98.93%) | 8선[의장][24] |
6. 기타
- 러시아에서는 "게르만 게린크"(Герман Геринг)라고 불린다. 독일어의 'H'가 러시아어에서 'Х'(kh)가 아닌 'Г'(g)로 전사된 것은 러시아어 특유의 오래된 관행 때문이지만[25], 독일어 ö가 러시아어 ё가 아닌 단순히 е로 전사된 것은 특이한 부분이다.[26]
- 괴링은 워낙 마약에 찌들어 있어서 항상 제정신이 아니었고, 이로 인해 수많은 나치 독일의 인사들과 척을 진 상태였다. 특히 요제프 괴벨스의 일기를 보면 괴링을 언급하는 대목마다 거의 반드시 한 문장에 한번씩 별의별 욕이 다 튀어나오는 진풍경을 볼 수 있다. 또한 알베르트 슈페어나 카를 되니츠, 에리히 레더 등 대다수와도 사이가 나빴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사이가 나빴던 사람은 바로 마르틴 보어만이였다. 마르틴 보어만과 괴링은 거진 원수 관계여서 서로 죽이지 못해서 안달 난 사이였다. 괴링은 "보어만은 내 불구대천치 원수다. 보어만은 나를 죽이려고 목 빠지게 고대하고 있다."고 말할 정도였고,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장에서도 "내가 총통이 되었다면 보어만을 죽여버렸을 것이다."라고 말했을 정도였다.[27] 그나마 사이가 가장 좋은 상대는 하인리히 힘러였다.[28][29]괴링이 왔다. 늙어 처먹은 놈. 그는 장군이 되려고 한다. 왜, 원수가 되려 하지 않고. 괴링은 터무니없는 야망을 가지고 있다. 그는 과대망상증에 사로잡혀 모든 사람들을 매정하게 대한다. 이 쓸모없는 뚱보가 빨리 떠나기를 바란다.- 파울 요제프 괴벨스, 1933년 일기 중에서
- 나치 핵심 인사긴 하지만, 다른 핵심 인물들과는 달리 유대인들에게 비교적 호의적이었으며,[30] 그의 대부인 에펜슈타인 백작이 유대계이기도 해서 유대계 지인들이 많았다. 그리고 대부분의 국방군 장성들과는 달리 신사적인 면도 있었는데, 휘하 지상부대에게는 잔혹행위를 엄격히 금지시키기도 했다.[31] 이는 독일 군대가 소련을 침략하면서 정책적으로 엄청난 잔혹행위를 한 것과 꽤 대조적인데, 실제 독일군에게 학살당한 소련 민간인은 2,000만 명이 넘는다. 이것은 후일 소련군이 독일령으로 진주하면서 민간인들을 가혹하게 대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된다.[32] 또한 젊은 시절부터 사교계의 총아였음에도 불구하고 키작은 단신에다 말라깽이에 절름발이인 괴벨스조차 여러 여자들과 바람을 피운 데 반해 단 한 번의 여성 스캔들도 없이 가족에게 매우 충실한 면모도 보이는 등 사생활적인 면에서만큼은 신사적인 인물이기도 했다.[33] 그래서 가히 나치스의 아이돌로서 정권의 인기도에 크게 기여했다. 군 내부에서도 병사들이 그를 친근하게 '헤르만'이라고만 부르면서 히틀러가 괴링을 더 신뢰했으면 전쟁에서 이겼을 것이라고 아쉬워하는 등 악마적 인물, 썩어빠진 심복이라고 씹히던 힘러, 라이, 보어만 등과 달리 상당한 인기를 누렸다. 뉘른베르크에서도 연합군 장교들과도 친해질 정도의 사교성을 보였다.
- 스스로도 최후의 르네상스인이라고 주장했고, 죽기 전 마지막 순간에도 "50년 혹은 60년 뒤면 독일 전역에 나의 동상이 있을 것이다!"이라고 예언했다가 약간 머뭇거린 뒤, "아마 동상은 없을지 모르나, 내 초상화는 집집마다 걸려있을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대리석 석관에 우리의 뼈를 담아줄 거다."란 정신 못 차린 말도 지껄였다.[34] 현재도 독일에서 나치의 상징이나 히틀러나 나치 고관들의 사진을 걸어놓으면 법적으로 처벌된다. 그래도 그의 초상화는 그의 말대로 60여년이 지난 후 이 문서를 비롯해 인터넷 곳곳에 걸리는데 성공했다. 나치의 못난 2인자로서. 실제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 시기의 괴링은 홀로코스트에 관한 한 자신은 전혀 몰랐으며 책임이 없고, 기껏해야 유태인을 해외 추방하는 정도로만 알았다고 강변했다.[35][36] 그러나 나중에 소위 유태인에 대한 최종해결(절멸 계획)로 유명해진 "반제 회의(The Wannsee Conference)"의 의장이자 게토와 수용소의 최고 책임자인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를 그 직위에 임명한 이가 바로 괴링이었다. 사실 비단 괴링 뿐만 아니라 재판정에 선 많은 많은 나치 고관들은 대부분 본인들은 유대인 학살을 몰랐다고 주장했고, 이를 모두 SS나 그 총수인 힘러에게 책임전가했다. 정작 힘러 또한 살아생전 "나는 유대인들을 다 죽일 생각이 없었는데 괴벨스 그 인간이 과격해서 그랬다."고 궁시렁거리고 다녔었다고 한다. [37]
-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전우였던 유태인을 가족과 함께 스위스로 탈출시켜 주거나 유태계 귀족이나 사교계 지인들을 보호해주긴 했지만, 대신에 그들은 가진 재산을 거지반 다 괴링에게 바치고 맨주먹만 남은 채로 독일을 등져야 했다.
- 연합군에 체포될 당시 호신용 권총을 갖고 있었는데, 그 권총이 전쟁 나기 전에 산 미국제 S&W 밀리터리 앤 폴리스 리볼버였다고 한다.
2016년 8월, 괴링의 금도금 권총이 일리노이 주의 락 아일랜드 경매 회사에 의해 경매에 부쳐졌다. 가격은 25만 달러에서 최대 40만 달러까지 예상된다고 한다.
- 미국 시민권자인 조카로 알려졌던 베르너 괴링은 2차 대전 중 미군에 입대해 폭격기를 몰고 독일을 폭격했다. 미군 측에서는 괴링이 혹시나 독일로 넘어가지 않을까 우려해 만약 베르너 괴링이 독일로 넘어가려고 하면 곧바로 사살하라는 명령까지 내렸다고 한다. 하지만 우려와 달리 베르너 괴링은 할머니가 살던 쾰른을 폭격할 때 잠시 망설인 것을 빼면 매우 열심히 작전을 수행했다고 한다. 이후 2012년 사망. 근데 2010년에 조사한 결과 헤르만 괴링과는 성씨만 똑같을 뿐 혈연관계는 아니었다고 한다. 미국으로 이민 온 부친 카를 괴링[38]이 자기가 헤르만 괴링과 형제라고 거짓 허풍을 떤 게 와전되었다는 듯.
- 후처와의 딸 에다 괴링은 병원 실험실에서 일하다가 우익단체에서 정치 활동을 했고 1970년대에 5년 동안 슈테른 잡지 저널리스트 게르트 하이데만과 동행했다. 몇 년 동안 에다는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냈고, 나치 기념관에 참석했으며, 정치적 행사에 참여했지만, 나중에 그녀는 더 멀리하게 되었다. 구드룬 부르비츠와 알베르트 슈페어 유니오어와 같은 다른 고위 나치의 아이들과는 달리, 그녀는 제3제국이나 홀로코스트에서 그녀의 아버지의 역할에 대해 공개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1990년대에 그녀는 인터뷰에서 그녀의 아버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는 그를 매우 사랑했고, 그가 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는 명백했습니다. 그에 대한 나의 유일한 기억은 너무나 사랑스러운 것들이고, 나는 그를 다른 방법으로 볼 수 없습니다. 저는 사실 미국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버지를 좋게 생각할 것이라고 예상합니다. 그는 나에게 좋은 아버지였습니다." 2015년에는 아버지의 유산 수용과 관련된 보상을 바이에른의 주의회에 청원했지만 실패했다. 위원회는 만장일치로 그녀의 요청을 거부했다고 한다. 이후 2018년 12월 21일 뮌헨 발트프리트호프에서 사망하였다.
미니어처 모형 만들기가 취미였는데, 본인 실력도 꽤 괜찮았던 데다 풍부한 재력을 활용할 수 있었기에, 사진처럼 홀 하나를 가득 채우는 규모의 기차역 재현 등 스케일 큰 디오라마 등을 만들며 노는 것을 즐겼다. 주로 철도와 항공기 관련 모형을 좋아했던 것으로 보인다.
- 푸르 르 메리트 훈장을 서훈으로 받았다. 복무 기간으로는 독일 제국군(1912년 ~ 1918년), 바이마르 공화국군(1918년 ~ 1933년), 독일 국방군(1933년 ~ 1945년). 최종 계급은 공군 제국원수(Reichsmarschall)로, 이 계급을 받은 유일한 인물이다. 서방군의 대원수에 대응되지만, 외국에선 물론 국방군 내에서도 그냥 원수들 중 의전 서열상의 최선임자 정도로만 여겼으며, 되려 비웃음거리로 삼기도 했다. 역시 대원수로 추대된 이오시프 스탈린도 나중에는 그냥 원수로 했어야 했다며 대원수 계급을 내켜하지 않았다. 괴링 본인도 찔리긴 했는지, 굳이 다른 원수들 특히 빌헬름 카이텔이나 에리히 레더, 카를 되니츠 등 타군의 최선임자들 앞에서 선임 행세를 하진 않았다고 한다.[39]
7. 대중매체
자세한 내용은 헤르만 괴링/대중매체 문서 참고하십시오.8. 어록
베르사유 조약은 우리에게 이 무기의 사용을 금지시켰다. 퓌러인 아돌프 히틀러와 많은 사람들은 이 무기의 힘을 예상 못했다. 이 무기만 있다면, 승리자는 라이히가 될 것이며 폴란드는 물론, 영국과 프랑스와의 전쟁에서도 승리하게 될 것이다.
괴링의 육성 기록26분 48초 부터
괴링의 육성 기록26분 48초 부터
퓌러가 결정한다면 나는 한다.
"퓌러의 말은 모두 진실이다. 퓌러께서 2+2=5라면 그런 것이다!"[40]
나는 독일국에서 독보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던 퓌러 다음 가는 사람이었다. 국민들은 퓌러를 사랑했으나 그는 대중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래서 나를 따른 것이다.
- 뉘른베르크 재판에서[41]
- 뉘른베르크 재판에서[41]
“물론 국민들은 전쟁을 원치 않는다. 러시아 국민들도 전쟁을 원치 않고, 영국 국민들도 전쟁을 원치 않고, 심지어 독일 국민들도 전쟁을 원치 않는다. 그건 누구나 다 아는 얘기다. 하지만 정책은 국가의 지도자가 정하는 것이고, 국민들을 따라오게 만드는 것은 간단한 일이다. 민주주의 국가든, 파시스트 독재 국가든, 의회 민주주의 국가든, 공산주의 독재 국가든, 다 마찬가지다.”
“국민이 목소리를 내든 말든, 지도자는 언제든 국민을 따라오게 만들 수 있다. 그건 쉬운 일이다. 지금 국가가 외부로부터 공격을 받고 있다고 국민들에게 얘기하고, 평화를 부르짖는 자들은 애국심이 없고 국가를 위험한 지경에 빠트리고 있는 자들이라고 매도하기만 하면 된다. 어느 나라에서든 이 전략은 통하게 되어 있다.”
9.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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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신이 유족에게 인계되지 않고 소련의 요구대로 다음날 교수형에 처해진 핵심 전범 11명과 함께 입관되어 뮌헨 근교의 화장장에서 화장되었고, 유골 역시 소련의 요구에 따라 극우파들에 의한 우상화를 막기 위해서 이자르 강의 지류인 콘벤츠 강에 뿌려졌다. 정확한 위치는 나치 잔당들의 성지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비공개로 처리됐다.[2] 괴링의 아버지인 하인리히가 헤레로족과 나마족 학살의 주범이라는 소문이 떠돌고 있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며 진범은 로타르 폰 트로타. 물론 헤레로족 반란 진압 책임자로 트로타를 임명한 빌헬름 2세 역시 책임을 피할 수 없다.[3] 스웨덴 출신으로 남편이 있을 때 괴링을 만나서 재혼했으며, 결혼 후 결핵으로 병사했다.[4] 원래 이름은 에미 존네만. 영화배우로 1935년 괴링과 결혼하고 히틀러가 싱글인 관계로 파울 요제프 괴벨스의 아내인 '마그다 괴벨스'와 함께 제 3제국의 퍼스트 레이디 역할을 했다고 한다. 의외로 마그다와 사이는 친했다고 전해진다.[5] 괴링과 후처 에미 괴링 사이에서의 딸.[6] Leon Goldensohn, The Nuremberg Interviews: An American Psychiatrist's Conversations with the Defendants and Witnesses, p. 132[7] 1945년 4월 23일 반역 혐의로 계급 박탈.[8] 1945년 4월 29일부로 군적 박탈.[9] Reich의 번역 명은 제국보다는 국가가 더 맞긴 하지만 국가원수(國家元帥)라고 번역하면 국가원수(國家元首)와 발음이 같아 헷갈리니 제국원수로 번역한다.[10] 마지막 의장이자 공화국 역대 최장기 의장으로 12년 236일간 재임했다.[11] 그리고 프로이센 역사상 마지막 수반이기도 하다.[12] 헌법상으로는 지방자치제 였으나, 바이마르 말기 초법적인 대통령 비상대권으로 수도 베를린을 포함한 인구 및 영토의 60%를 차지하는 프로이센 주를 중앙정부에서 직할 통치했다.[13] 초기에는 무임소 장관 이었다가 항공부가 신설되며 장관이 되었다.[14] 권한이나 봉급은 중위와 같다. 실질적으로 명예직.[15] 서훈자는 독일국방군 전군에서 괴링 1명뿐이다.[16] 모든 직책에서 해임된 것은 23일이었지만, 당적 자체는 유지하고 있었다. 괴링이 당에서도 완번히 출당된 것은 히틀러가 자살하기 하루 전인 29일에 남긴 유언으로 괴링과 힘러를 반역자로 선언하고 출당시킬 것을 명령하면서 부터다.[17] 제4선거구[의장] 바이마르 공화국 국회의장 역임[의장] 바이마르 공화국 국회의장 역임[의장] 바이마르 공화국 국회의장 역임[의장] 바이마르 공화국 국회의장 역임[의장] 바이마르 공화국 국회의장 역임[의장] 바이마르 공화국 국회의장 역임[24] 1945.04.23 국회의장 및 의원직 사임[25] 원래 러시아어에는 [h\] 발음이 없다. 흔히 'ㅎ'으로 전사되는 글자는 Х로 이 글자의 발음은 [x\]이다. 한국인 입장에서 [h\] 발음은 [g\] 보다는 [x\]에 가깝게 들리지만, 전통적으로 슬라브어 화자들은 [h\]를 Х보다는 Г에 가까운 발음이라고 인식해 왔기에 [h\]는 러시아어에서 'Г'로 정착되었다. 그래서 이름 한니발(Hannibal)은 러시아에서 간니발(Ганнибал)이 되었고 그리스어 헤로스(ἥρως)는 라틴어 헤로스(hērōs)를 거쳐 러시아어에서 게로이(герой)가 되었다. 현재는 어지간해서는 Х로 전사하는 관행이 자리잡긴 했는데, 여전히 독일계 고유명사의 경우 Г를 고집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26] 독일어 ö는 [ø\]로 발음하는데 이 발음 또한 러시아어에는 없다. 러시아에서는 일반적으로 이 글자를 [jo\]로 발음하는 ё로 음차한다. (예: 쾨니히스베르크(Königsberg > 쿄니크스베르크(Кёнигсберг) 그런데 소련 초기 및 스탈린 시절은 ё를 사용하는 것이 반쯤 강제되던 시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괴링의 경우는 교린그(Гёринг)가 아닌 게린그(Геринг)라는 표기로 정착되었고, 파울 요제프 괴벨스 또한 교벨스가 아닌 게벨스(Пауль Йозеф Геббельс)로 자리잡았다.[27] 사실 마르틴 보어만은 히틀러가 그저 끄덕끄덕이거나 좋아라고 말만 했다 하면 그걸 본인이 수십 장의 문서로 만들고, 그러면서 정적의 행적을 히틀러의 망상에 맞추어 해석, 가공 및 예전 행적을 양념 쳐서 파묻어버리는 것 때문에 나치당 인사들은 물론이고 국방군과 행정부처의 모두가 증오했다. 국방군 여러 수뇌부는 물론이요 저 유명한 에르빈 롬멜도 보어만과 매우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롬멜이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과 관련하여 의심을 받을 때 롬멜이 히틀러에게 보낸 여러 편지들을 모두 보어만이 낚아채 히틀러에게 전달된 편지는 단 한개도 없었다고 한다. 결국 이러한 보어만의 행동은 히틀러가 롬멜에게 자살을 명령하는 계기 중 하나로 작동하게 된다. 거기에 히틀러 집무실의 여비서들을 시도 때도 없이 성적으로 건드려서 모든 이들이 역겨워했다.[28] 힘러는 사교적이지 못했으나 자신을 건드리지 않는 이들은 깍듯이 대했다. 힘러는 특히 사석에서 괴링을 선배님이라고 칭하며 예의를 지켰고(아마 괴링이 스스로 조직한 게슈타포를 장검의 밤 직전에 힘러에게 넘겼고, 바로 그 게슈타포가 힘러의 영향력 증가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고마워하는 감정이 있었던 모양이다.), 괴링 또한 힘러 편을 들어주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말기에 보어만이 힘러의 군사적 재능 부재를 비난했을 때도 괴링은 '당신이라면 그 정도는 했겠느냐.'고 보어만에게 일갈했다.[29] 실제로 보어만은 제1차 세계 대전 말기에 입대한 인물인데다가 그나마도 전투병이 아닌 장교 당변병이라 전투에는 한 번도 참여하지 못하고 종전을 맞았다. 전투에 직접 참가하지 못했다는 사정은 힘러도 다를 게 없었으나, 최소한 힘러는 사관후보생으로 고급 지식 및 지휘 과정 교육을 받았으니 재능이라면 모를까 확실히 군사적 지식에 있어서 보어만보다 더하면 더하지 못하진 않았다. 괴링이야 1차 대전기에 이미 장교였고 전투조종사로 활약해서 붉은 남작 다음가는 위상의 에이스였으니 급이 다른 사람이었고.[30] 물론 살려주는 대가로 전재산을 조공으로 탈탈 털어가기는 했다. 1차 대전 전우였던 프리츠 베크하르트의 경우도 자신이 직접 게슈타포와 친위대를 갈궈서 수용소에서 빼냈다.[31] 그 외에도 갈란트와의 대화에서 "탈출한 적 조종사를 사살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고 묻고 갈란트가 "내 모든 권한을 이용해서 그 명령을 정지시키겠습니다."고 답하자 괴링이 "그것이 바로 내가 듣고 싶던 대답이었다."라고 말했다는 이야기도 있다.[32] 물론 종전 후 소련은 자국의 점령 정책에 방해가 되기 때문에 이런 병사들의 일탈 행위를 금지시켰고, 이를 어기다 적발되면 엄격히 처벌했으니 감히 나치 따위와는 비교할래야 비교할 수가 없다. 소련은 최소한 제네바 협약을 지키는 척이라도는 했다.[33] 자살하기 직전에 동생 알베르트 괴링과 단 한번 면회 할 수 있었는데, 이때 동생에게 남긴 말이 가족을 부탁한다는 말이었다.[34] 자살 후의 사체는 혹시라도 나치 추종자의 성지가 될까 우려되어 다른 인물들과 섞여서 독일 내 모처에서 화장하고 이자르 강의 콘벤츠 지류에 뿌려졌다.[35] 자기가 사인한 구체적인 문서나 연합국 측의 비디오 자료 제출로 데꿀멍하기 전에 "500만 이상의 인원을 죽이는 건 기술적으로 불가능하다."라고 주장했다.[36] 수정주의 역사가 데이빗 어빙은 이 설을 강력하게 주장한다. 게다가 해외에서 독일로 못 돌아온 유대계 독일인들도 해외추방으로 볼 수 있다.[37] 실제로 수정의 밤 사건 당시 힘러는 "유대인을 겨냥한 공격 명령은 선전부가 내렸다. 오래 전부터 권력의 야욕에 사로잡혀 있던 돌대가리 괴벨스가 외교적으로 매우 중차대한 이 시점에 일을 벌인 것 같다. 내가 총통에게 물어보았지만, 그는 이 일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는 것으로 보인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출처 : 라울 힐베르크, 홀로코스트: 유럽유대인의 파괴 1권 85페이지[38] 이 사람은 유타 주 솔트레이크 시티에서 몰몬교회 정원사를 하던 사람인데, 상술하다시피 괴링 가문은 귀족만 아닐 뿐 명망 있는 가문이었다. 그런 집안의 아들이 미국에 이민 와서 고작 정원사나 할 리가…[39] 되니츠 원수의 회고에 의하면, 1943년 초 연합국 공군의 연안 공습으로 항구에 정박중이던 슈넬보트 몇 척이 큰 손상을 입었는데, 히틀러도 참석한 큰 회의 석상에서 괴링이 이를 헐뜯은 일이 있었다. 분산과 위장을 태만히 하였으므로 해군은 비난받아야 마땅하다고 말하는 괴링에게 되니츠는 "원수! 해군 비난 발언을 도저히 참고 들을 수 없소! 당신은 당신이 신경 써야 할 일이 산적한 공군이나 잘 건사하십시오!"(괴링이 해군을 헐뜯은 이유도 자신들, 즉 공군이 원래 막아야 되는 폭격기(당시 해군은 괴링의 꼬장 때문에 따로 항공대를 조직하지 못했다. 그래서 비행기가 필요하면 공군에서 파견을 보내는 형식으로 이용하거나 심지어는 공군에 허락을 맡고 사용해야하는 대단히 비효율적인 구조를 가졌다.)를 못막아서 적 비행기가 정박한 해군 함정을 공격한 것인데 이게 공군탓이라 욕먹으면 쪽팔리니까 일부러 해군탓으로 돌리려고 하는 것이다.) 라 일갈하였고, 히틀러는 이 발언을 문제삼기는커녕 회의 후 괴링을 악수로 전송하고는 되니츠와 조찬을 함께하였다. 이후 괴링은 화려하게 장식된 공군 기념품을 되니츠에게 보내 화해를 청했다고 한다.[40] 조지 오웰의 "1984" 에서도 많이 등장하는 예이다. 대중들에게 절대권력에 복종하라는 말. 2+2=5라는 표현은 괴링이나 1984 이전에도 많이 사용된 표현이다.[41] 재밌는건 헤르만 괴링은 공식적 2인자 자리와 그에 맞는 선전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지만 실질적으로 대중과 가장 밀접했던 존재는 국가선전장관 요제프 괴벨스였으며 정치적 영향력이 가장 강력했던 이는 괴벨스와 히틀러의 비서실장이었던 보어만 그리고 친위대 대장이었던 힘러였다.[42] 알다시피 정작 헤르만 괴링 본인부터가 심각한 비만이었으며 패전 전까지는 고치려 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한 화가가 가족들이 식탁에 모여 앉아 접시에 놓인 쇠붙이를 식사로 먹는 풍자화를 그려 대놓고 깠다.[43] 자신이 틀리면 성을 갈 정도로 호언장담한다는 의미이다.[44] 그러나 영국 공군의 아브로 랭커스터에 루르의 주요 공업 지대와 산업 기반 시설들이 초토화되어 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