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ichsparteitag (독일어) Nuremberg Rally (영어) |
1. 개요
1923년 이후 독일국 바이에른의 뉘른베르크에서 매년 열린 나치당의 전당대회. 1933년 히틀러가 수상 자리에 오른 이후로는 한층 더 거대하게 규모가 성장해서 나치즘의 거대한 선전의 장으로 탈바꿈했다. 이 곳에서 행해진 각종 선전 행위와 히틀러를 비롯한 나치 수뇌부의 연설 및 대중들의 맹목적인 열광은 오늘날까지도 파시즘 연구의 주된 관심거리이기도 하다.[1]이렇게 나치 최대의 축제장이었던 뉘른베르크는 나치가 패망한 이후, 나치 전범을 심판하는 무대가 되었다.
2. 역사
뉘른베르크에서는 1927년부터 열리기 시작해서[2] 1938년의 당 대회를 마지막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해서 중단된다.[3] 중간에 몇차례 당대회가 열리지 않는 경우도 있는데 1924년부터 1925년까지는 맥주홀 폭동으로 나치가 활동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열리지 못했고, 1930년부터 1932년까지는 전 세계를 강타한 대공황으로 인해 취소됐다.3. 왜 뉘른베르크에서 개최했는가?
최초의 나치당 전당대회는 1923년 뮌헨에서 열렸다. 하지만 1923년 11월에 맥주홀 폭동으로 인해 나치당 수뇌부가 투옥되고 나치당이 해산되면서 한동안 열리지 못하다가 1926년 나치당의 재건을 기념하기 위한 전당대회가 바이마르에서 열리게 된다. 이후 다음해인 1927년부터 나치 독일이 멸망할 때까지 전당대회는 계속해서 뉘른베르크에서 열리기 시작한다. 뮌헨과 바이마르를 오가던 행사가 뉘른베르크에서 고정적으로 개최되기 시작한 점에는 여러가지 요인이 존재했다. 크게 네 가지 정도로 볼 수 있는데 다음과 같다.- 뉘른베르크를 비롯한 바이에른 일대는 신성 로마 제국 시기 선제후들의 모임, 속칭 제국의회(Diet)가 열리던 개최지[4]였기에 신성 로마 제국을 계승한 제3제국을 자처하던 나치 독일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역사적 정통성을 강조하는 효과를 누릴 수가 있었다.
- 이 일대는 골수 나치당원인 율리우스 슈트라이허가 주지사[5]로 재임중이었기 때문에 각종 공권력 지원 및 나치에 우호적인 대중들을 동원하는 것이 상대적으로 쉬웠다.
- 뉘른베르크 일대에는 대규모의 도로들이 잘 정비되어서 각종 퍼레이드를 진행하기가 쉬웠다.
전당대회의 주 행사는 체펠린 비행장에서 열렸다. 이후 전당대회를 전문적으로 개최하는 대회장(Kongresshalle)을 건설하였다. 설계는 알베르트 슈페어가 맡았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공사가 지연되다가 나치가 패망하면서 미완성으로 끝났다. 전쟁 이후에는 나치의 만행을 고발하는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체펠린 비행장은 공터로 방치하고 있다.
4. 선전의 장
각종 행진과 상징들이 난무하고, 대규모 군중들이 운집하여 그들의 지도자들에게 열렬한 성원을 보내는 거대한 쇼를 선전의 달인 괴벨스가 놓칠리 없었다. 이미 뉘른베르크에서 처음으로 당대회가 개최되던 1927년부터 괴벨스는 전당대회를 촬영하여 홍보 영상을 만들었으며 아예 1933년 자신들이 집권한 이후에는 영화 감독들을 초빙하기 시작한다.[6] 이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은 바로 레니 리펜슈탈. 레니 리펜슈탈은 1933년과 1935년 두 차례의 전당대회를 각각 촬영하여 홍보 영화를 만든다. 1933년에 촬영한 작품의 이름은 신념의 승리(Der Sieg des Glaubens)[7]이며, 1935년 작품의 이름은 의지의 승리(Triumph des Willens).이 두 작품은 오늘날까지도 선전 영화의 걸작으로 인정받고 있다.[8][1] 영국의 저명한 마르크스 주의 사학자 에릭 홉스봄은 이 전당대회를 영국 노동자 사회의 축구와 비교하기도 했다.[2] 아래 항목에도 나와있지만 처음엔 뮌헨과 바이마르에서 당대회를 개최했다.[3] 1939년의 경우 당대회 개최를 하루 앞두고 독일이 전격적으로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갑작스러운 취소 결정. 한가지 아이러니한 것은, 이 해 전당대회의 공식적인 명칭이 '평화를 위한 집회'였다는 것(...)[4] 늘 뉘른베르크에서 열린 것은 아니었고, 아우크스부르크, 레겐스부르크 등의 바이에른 내 기타 도시에서도 개최가 됐다.[5] 이 시기 나치가 조직한 행정 단위는 가우(Gau)라는 것이었는데, 바이에른 북부지방을 바이에른에서 분리해서 프랑켄 주(Franken Gau)로 재편했다.[6] 이 당시, 독일 영화계는 할리우드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규모를 자랑하는 시장이었으니 괴벨스로서는 최고의 홍보수단을 선택한 셈이다.[7] 다만 이 작품의 경우, 에른스트 룀을 비롯한 돌격대 수장들이 커다란 비중을 영화 내에서 차지해서 이들이 1934년 장검의 밤을 거치면서 숙청된 이후로는 독일 내에서 상영이 금지됐다. 오늘날에도 이 영화의 필름은 독일 내에 남아있는 것이 없다. 죄다 당시 상영을 위해 영국으로 건너간 필름들 뿐.[8] 하필이면 촬영 대상이 나치인지라 오히려 영화 자체의 예술성이 심각히 저평가받고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 "이 영화의 뛰어난 예술적 기교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하지만 비평가들은 영화 자체보다 파시즘에 매혹되었다고 오해받을까 봐 이 영화에 대한 찬사를 오랫동안 억눌러왔다."라는 의견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