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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30 11:02:17

나치의 남미 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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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전개3. 남미로 간 이유4. 남미 이외의 나치 도피처5. 유사 사례들6. 목록
6.1. 남미로 도주한 잔당6.2. 기타 국가로 도주한 잔당
7. 대중문화8. 관련 문서

1. 개요

남아메리카도주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잔당들을 다루는 문서.

2. 전개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 넘어간 이들을 뺀 수많은 나치들공소시효 없이 영원히 쫓기는 신세가 되었지만 당연히 이들도 순순히 잡혀 줄 마음은 없었고 연합군의 추적을 피해서 신분을 세탁하고 각국으로 도주했는데 남미가 주된 도피처가 되었다.

비스와-오데르 대공세 당시 완전히 포위되어 바다를 통해 탈출한 독일인들 중 상당수가 독일 본토가 아닌 남미로 항로를 잡아서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은 이들도 있었다.

바티칸 시국알로이스 후달, 로베르트 라이버(Robert Leiber)와 같은 나치 동정주의자들은 일명 '쥐 통로(Ratline)'를 마련해서 수많은 나치 인사들을 도피시켜 주었는데 프란츠 슈탕글, 에리히 프리프케, 구스타프 바그너, 알로이스 브루너, 딘코 사키치 등 수많은 전직 독일 나치들과 이탈리아, 헝가리, 크로아티아 파시스트들이 이 통로를 통해 해외로 도피했다.

한편 크루노슬라프 드라가노비치(Krunoslav Draganović)와 같은 일부 전직 우스타샤 출신 신부들이 먼저 도망친 안테 파벨리치와 직접 통하는 산 지롤라모 랫라인(San Girolamo Ratline)을 구축하여 수많은 파시스트들을 탈출시켜 주었다. 산 지롤라모 말고도 일부 가톨릭 고위직들의 도움에 힘입어 수많은 랫라인들이 생겨 나치 전범들의 도피를 도왔다. 이외에도 오토 슈코르체니오데사구드룬 부르비츠침묵의 손길(Stille Hilfe), 한스 울리히 루델의 전우협회(Kameradenwerk) 등 나치와 연관된 여러 단체나 전후 세대들에 의해 새로 세워진 네오나치 단체들, 샤를 레스카, 오스왈드 모슬리, 페르 엥달 같은 여러 파시즘 동조자들이 전범들의 도피 및 생활을 도왔다.

아예 전직 전범 출신들이 직접 세운 단체들이 앞장서서 전범들의 처우 개선 및 생활 지원에 나서기도 했는데 오토 에른스트 레머독일 사회주의 국가당이나 로돌포 그라치아니 등의 이탈리아 사회운동이 대표적인 사례다. 로돌포 프로이데와 같이 전쟁 전부터 이미 현지에 자리잡은 독일계 이민자 출신의 유력자들이 도피를 돕기도 했다.

프리드쇼프 난센무국적 난민들을 구하기 위해 만든 난센 여권을 악용하는 사례도 많았다.

이렇게 남미로 도주한 나치 잔당들이 해당 국가에 정착해 현지인과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는 사례들도 왕왕 존재하는데 대표적인 사례가 칠레로 도주하여 정착한 독일군 장교 미하엘 카스트로, 이 사람의 아들인 호세 카스트는 칠레에서 정치인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2017년 대선 후보로도 출마하기도 했다.[1]

나치 독일 전범들만 도주한 것은 아니고 많은 수의 이탈리아 왕국, 헝가리 왕국 파시스트들과 크로아티아 독립국우스타샤, 독일 국방군 점령 시기 나치 독일군에게 협력하던 벨기에우크라이나, 발트 3국, 불가리아, 덴마크 등지의 유럽 점령지들의 매국노, 부역자들도 많이 따라갔다. 대규모 나치 전범의 탈출을 진두지휘하다시피 한 안테 파벨리치부터가 크로아티아 사람이고 시몬 비젠탈 센터의 도피 중인 나치 전범 목록을 보면 크로아티아, 우크라이나 등지의 부역자들도 꽤 많다.

3. 남미로 간 이유

남미가 주 도피처가 된 이유는 남미 국가들이 제2차 세계 대전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었고[2] 유럽, 소련의 영향력이 비교적 미미한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남미에서의 영향력은 결코 적지 않지만 미국 자신도 전범 처단에는 당사자인 유럽 국가들만큼 적극적이지는 않았다.

일부 남미 국가들은 나치 인사들의 송환에 비협조적이기도 했다. 당시 아르헨티나 대통령이었던 후안 페론[3]과 칠레의 대통령이었던 가브리엘 곤살레스, 볼리비아의 대통령 우고 반제르, 파라과이의 군부 독재자 알프레도 스트로에스네르[4]는 나치 인사들에게 보호비 명목으로 돈을 받고 숨겨 주거나 나치 전범과 부역자의 자국 망명을 묵인하기도 했다. 특히 아르헨티나의 경우, 후안 페론의 정치 고문으로써 당시 전범들의 남미행을 지휘했던 이가 다름아닌 전직 우스타샤 수장인 안테 파벨리치였다.[5] 덕분에 시몬 비젠탈 센터가 추적 중인 나치 목록에 독일인 다음으로 많이 등재돼 있는 사람들이 크로아티아 우스타샤들이며 구드룬 부르비츠, 오토 스코르체니, 한스 울리히 루델, 알로이스 후달, 오스왈드 모슬리, 샤를 레스카, 페르 엥달 등 친나치 인사이지만 전범은 아닌 이들의 지원과 더불어 수많은 전범들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아르헨티나는 19세기 중반부터 독일인 이민이 많았으며[6] 특히 제1차 세계 대전 패전 후 고국의 사정에 절망한 독일인과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소련군이 쳐들어온 동프로이센을 배를 이용해 탈출한 독일인들이 많이 이민을 간 데다 넓은 땅에 비해 인구수가 많지 않고 미개발지도 상당히 많은 편이어서 나치 인사들이 숨기에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아르헨티나는 남미에서도 유독 백인의 비율이 높아서 백인인 자신들이 숨어살 수 있었고 백인 우월주의에 찌든 인간들의 눈에 보기에는 당시로서는 미국과 유럽 다음 가는 문명세계이기도 했던 데다[7] 부유했기 때문에 주 도피처로 선택되어 수많은 나치 전범들이 도주했다. 특히 아르헨티나에 숨어 지내다가 붙잡힌 아돌프 아이히만의 사례가 매우 유명하다. 체 게바라가 의대생 시절 남미를 여행하던 중에 한 집에 하켄크로이츠 깃발이 걸려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곳에 살던 사람이 도망친 나치 인사였다고 한다.

그렇게 아르헨티나는 나치 관련 음모론에 자주 엮이게 되었고 남극 은신설이나 히틀러 또는 히틀러 자식의 은신설 등의 수많은 도시전설이 나올 정도였으니 말 다했다. 칠레도 이웃나라 아르헨티나 못지 않아서 나치 전범인 파울 섀퍼발터 라우프 등이 칠레로 도주했고 파울 섀퍼와 피노체트 군부독재 정권이 유착해서 일어난 콜로니아 사건이 있었다.

그렇다고 남미 국가들이 나치의 범죄를 무조건 묵인한 것은 아니다. 에리히 프리프케딘코 사키치처럼 너무 설치거나 전쟁범죄를 대놓고 부정하는 등 선을 넘었다고 판단하면 매장을 거부하거나 추방하기도 했다.

4. 남미 이외의 나치 도피처

남미 다음으로 나치 전범들이 애용한 곳은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지배하던 파시즘 국가 스페인국이었는데 지리상으로도 가깝고 무엇보다 유럽에 남은 최후의 파시즘 국가였기 때문이다. 비록 대전 말기에 히틀러의 뒤통수를 제대로 친 프랑코였지만 온갖 전범들이 자기 나라에 대놓고 들락거리는 마당에도 프랑코는 이들을 딱히 막지 않고 남미로 가는 루트를 주선해 주는 등 오히려 도움을 줬다. 이 탓에 스페인에 아예 정착해서 사는 전범들이 많았고 남미로 가는 중간 기착지로도 많이 쓰였다. 나치 전범에게만 온정적이었던 것은 아니었고 베니토 무솔리니와의 권력 투쟁에서 밀린 이탈리아 파시스트나 공산 혁명으로 나라를 잃고 쫓겨 온 동유럽 왕족들 등 온갖 인사들을 받아들여 자신에게 이득이 되도록 행동했다.[8] 그러나 이러한 행보는 미국 등 연합국에게는 결코 유쾌하게 보이지 않았고 결국 스페인은 전범을 숨겨주는 일과 정치범 처형 등 여러가지 밉보일 이유 때문에 연합국에 도움이 되었던 포르투갈과 달리 마셜 플랜에서 제안조차 받지 못한 채 철저하게 제외되어 이제 막 백인우월주의가 태동하던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함께 국제사회에서 고립되었다.[9] 전범 도피를 돕던 안테 파벨리치가 아르헨티나에서 도망치듯 나온 이후 최후로 선택한 곳도 스페인이었다.

또 다른 도피처는 아랍 국가들이었는데 전직 게슈타포 인원들이 이집트, 시리아, 레바논 등에 도주한 케이스가 있다. 아랍 국가들은 전후 벌어진 중동전쟁의 영향으로 반유대주의가 팽배했고 권력을 잡은 지 얼마 안 되어 국가 안정이 필요했던 하페즈 알 아사드, 가말 압델 나세르와 같은 독재자들도 남미와 비슷하게 나치의 여러 가지 정치적, 군사적 노하우, 특히 대이스라엘 첩보전을 수행하는 데 이들을 써먹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겉으로는 중립을 표방했던 남미 국가들과는 달리 이들은 어느 날 갑자기 도피한 인사들을 본국으로 송환할 가능성도 없었다. 유대인에 대한 범죄에 크게 관심이 없는 데다 고급 인재에 대한 수요까지 넘쳐나는 이들 지역은 갈 곳 없는 전직 나치 정보기관 인사들이 자리잡기 좋은 환경이었다. 그래서인지 이들 국가로 도망간 나치 전범들은 신분도 숨길 겸 대부분 이슬람으로 개종하여 현지 인원들과 동화되려고 노력했다. 이외에도 아민 알후세이니의 모병으로 이루어진 SS 사단인 한트샤르의 소속원들이 같은 종교를 믿는 이웃나라 튀르키예나 아랍 국가들로 도주하곤 했는데 알후세이니 본인도 레바논으로 도주했다.

미국캐나다, 호주와 같은 신대륙으로도 많이 도망간 편이다. 이들은 연합국이지만 애초에 이민자 위주의 국가들인지라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들어오기 쉬웠고 특히 독일, 이탈리아, 헝가리, 크로아티아계 이민자들은 19세기 유럽으로부터의 이민 붐 때문에 신대륙에 차고 넘치는 데다 어중간한 동유럽 출신 부역자들은 피난민으로 위장하기도 쉬웠다. 심지어 발레리안 트리파처럼 전후 자신이 반나치 활동가라고 대놓고 구라를 치면서 들어온 전범도 있었다. 미국에서는 페이퍼클립 작전으로 소련으로부터 인재 유출을 막고 대신 그들을 끌어모으기 위해 CIA와 같은 정부기관들이 앞장서서 과학자나 첩보 인원 위주로 전범들의 도피를 돕고 대공업무 및 신기술 개발에 이들을 써먹기도 했다. 베르너 폰 브라운이나 발터 도른베르거, 콘라트 섀퍼, 헤르만 베커 등이 이렇게 미국으로 건너왔다.

흔히 나치들에게 가혹하게 대했다고만 알려진 소련도 미국의 페이퍼클립 작전에 대응되는 오소아비아힘 작전을 통해 일부 나치 인사들을 가족들과 함께 자국으로 모셔가서 숨겨 줬다.[10] 심지어는 서독동독조차도 정보전을 위해 게슈타포 인원들을 스카웃해서 독일 연방정보국슈타지에 각각 박아 넣었고 모사드도 이런 나치 전범들을 이집트와 같은 아랍 국가들에 위장 투입시키는 등 이용하기 위해서 일부 나치 전범들을 정보원으로 써먹기도 했다.

1945년과 1946년 사이에는 스웨덴으로 도망쳐서 정신질환자인 척하고 정신병원에 입원하거나 난민 캠프에 들어가는 등의 방법으로 소련의 추적을 피하려던 독일군 및 발트 3국 출신 부역자 무리도 존재했지만 소련스웨덴에 지속적으로 압력을 넣었고 스웨덴 정부는 이들을 결국 소련으로 전부 송환했는데 이를 발트 추방(baltutlämningen)이라고 한다. 약 3,000명 가량이 추방되었고 이들 중 발트 3국 출신 부역자는 167명, 그 중 147명이 라트비아인이었다.

정반대로 외지, 특히 동유럽과 북유럽에서 전쟁범죄를 저지른 나치 부역자들이 오히려 자신들에 대해 잘 모르는 서독이나 프랑스 등지로 도피하여 살기도 했는데 스테판 반데라쇠렌 캄, 빅토르스 아라이스가 대표적인 사례다. 찬드라 보스는 영미권 연합국을 피하여 소련으로 도주하다가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였다.

5. 유사 사례들

6. 목록

6.1. 남미로 도주한 잔당

6.2. 기타 국가로 도주한 잔당


이외에도 도주한 수많은 나치 전범 및 부역자들이 시몬 비젠탈 센터에 쫓기고 있다.

7. 대중문화

8. 관련 문서


[1] 아버지가 나치 독일군 장교로 활동했던 만큼 반이민 정책을 주 골자로 정치공세를 펼쳐 극우 세력의 지지를 유도했다.[2] 정말 적극적으로 싸운 곳은 잠수함지상군까지 파견한 브라질밖에 없다. 나머지는 일부 국가가 참전을 선언하거나 파견하기는 했으나 생색내기 수준이었고 거의 다 1943년 이후에 참전했으며 특히 아르헨티나칠레는 1945년 전황이 회복 불가능해지자 어쩔 수 없이 연합군에 줄서기한 수준이다.[3] 아이러니하게도 후안 페론 본인은 백인과 아르헨티나 원주민 테우엘체 족의 혼혈인(1/4 원주민, 3/4 백인)이었기 때문에 집권하는 동안 아르헨티나 원주민들의 권익 향상에 신경을 쓴 인물이었다. 사실 브라질아르헨티나의 지도자였던 제툴리우 바르가스후안 페론이나 파시즘의 영향을 받은 건 똑같았기는 했지만 다른 사상도 같이 짬뽕되었던 덕택에 인종차별 색채가 옅어졌고 결과적으로 중도화되었다. 후안 페론 개인은 반유대주의 성향이 없어서 이스라엘과도 수교했고 장관들 중에도 유대계 이민자 출신이 있었다.[4] 이 사람은 아예 독일계다. 또한 이 사람 역시 대통령 권력을 휘두르며 아동 성범죄와 같은 중범죄를 여럿 저질렀다.[5] 물론 가명을 이용해 활동하던 탓에 가능한 일이었고, 유럽에서부터 그를 찾아 쫓아온 전직 체트니크 대원에게 암살 시도를 당하고 병원에 입원하면서 본래 신분이 만천하에 들통나자 1955년 있었던 쿠데타로 이미 페론을 쫓아내버린 로나르디와 아람부루의 군부 정권은 끝발이 다 떨어진 그를 유고슬라비아에 도로 넘기려고 했다. 파벨리치는 이를 눈치채고 병원을 뛰쳐나와 칠레를 거쳐 스페인으로 도망가 두 번 다시 아르헨티나로 돌아오지 못했다.[6] 체 게바라의 여행담을 다룬 모터사이클 다이어리에도 독일계 아르헨티나인들이 가끔씩 나온다. 가브리엘 에인세라는 아르헨티나 축구선수도 독일 이민자의 후손이다. 전 아르헨티나 대통령이자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데 키르치네르의 남편인 네스토르 키르치네르는 아버지가 독일계 스위스인 이민자의 후손이다. 안데스 산맥 건너편인 칠레의 상황도 비슷하다. 아르헨티나와 칠레 모두 스페인어의 발음이나 어휘 등에 과거부터 유입된 독일계 수도사 및 이민자들의 영향으로 독일어 흔적이 알게 모르게 남아 있다. 박주호의 아내 안나스위스 사람이지만 출생지는 아르헨티나라서 독일어 억양이 섞인 스페인어를 쓴다.[7]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아르헨티나는 매우 오랫동안 백인 우월주의가 강한 나라였다.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이후에는 국토를 넓히기 위해 군대를 동원해 남부 지역의 원주민들을 마구잡이로 학살하고 그들의 시체를 박물관에 전시하는 등의 만행을 저질렀다. 심지어 아르헨티나에 정착하여 국적을 얻은 중국계 이민자가 아르헨티나 배구 대표팀에 들어가고 싶다고 신청을 했는데, 백인이 아닌 아르헨티나인은 아르헨티나 국적이 있어도 국가 대표팀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여 거절당한 일도 있었다.[8] 이는 이웃나라 포르투갈의 독재자인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도 마찬가지였지만 살라자르는 프랑코만큼 대놓고 많은 수의 나치 전범을 받아들이지는 않았다.[9] 그래도 무기 금수와 국제 대회 출전 금지, 민항기 비행 거부를 당하면서도 핵무기를 개발하면서까지 세계를 등지는 한이 있더라도 아파르트헤이트를 어떻게든 유지하려 들었던 남아공과는 반대로 스페인은 냉전의 심화를 이용해 자국을 반공의 기수로 포장하여 어떻게든 서방 세계로 복귀하겠다는 프랑코의 몸부림으로 1950년대 후반부터 서방 한정으로 다시 관계를 개선하는 데 성공했다. 프랑코는 이러한 정책의 일환으로 6.25 전쟁에 참전의사를 보내기도 했다.[10] 소련과 독일이 서로 가깝다는 지리적 이점을 이용해서 소련-일본 전쟁에서 그랬던 것처럼 공업 시설을 통째로 뜯어다가 소련으로 이송하기도 했다.[11] 물론 그와 별개로 브라질 군사정권이 통치 방식에 있어서 파시즘의 영향을 받은 건 사실이다.[12] 실제로 브라질과 일본을 오가는 수요가 상당히 많아서 일본항공은 2010년 파산 선언하기 직전까지 도쿄 출발 로스앤젤레스뉴욕을 경유해서 상파울루까지 항공편을 띄웠을 정도였다. 다만 일본에서 브라질인이 가장 많이 사는 곳은 도쿄가 아니라 시즈오카현하마마츠시다. 브라질 총영사관도 여기에 있으며 지역에서 포르투갈어는 한국어나 중국어보다도 높은 중요도를 갖고 있다.[13] 이런 지역들은 대부분 전범이 아니라 이마무라 히토시처럼 기본적으로 민생을 신경썼던 이들이 책임자였거나 일찍이 이 지역에 영향력이 있던 독일 세력들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한 곳들이었다.[14] 오노다 히로오는 생환 후 일본의 정신이 썩었다면서 브라질에서 생활하다 말년에야 다시 일본으로 돌아왔는데 죽기 전까지 자신의 범행에 대해 반성하지 않았으며 필리핀 피델 라모스 대통령을 예방할 때도 사과 한마디 하지 않았다.[15] 라이베리아도 내전이 너무 오래 이어진 나머지 각 집마다 손목이 잘린 형과 강간당한 여동생, 그리고 마약 먹고 포로를 학살한 동생이 있는 등 전쟁범죄의 여파가 너무 만연해져서 누가 누구를 처벌할 처지가 되지 않는다. 찰스 테일러와 같이 너무 눈에 띈 이들이나 몇 명 헤이그 재판소로 끌려간 것 외에 프린스 존슨과 같은 다른 핵심 전범들은 기소조차 되지 않았다.[16] 카라지치는 베오그라드에서, 믈라디치는 베오그라드 근처에서 체포되었다.[17] 1960년 아르헨티나에서 영장을 발부했을 때 확정된 인원만 따져도 어린아이 800명을 포함해 3,000여 명이다.[18] 나치 추적자들에게는 애석하게도 정작 라우프는 에콰도르에 있던 시절 수 차례 모사드와 접촉해서 협력했다는 기록이 CIA 문서에 남아 있다. 링크1, 링크2 처음에는 단순히 시리아 정보기관 시절 정보들을 팔아넘겨 생존을 보장받는 정도였다면 이후에는 아예 중동 국가들에 그를 은밀히 투입시켜 고정 스파이로 써먹으려는 계획까지 있었다고 한다.[19] 성 비오 10세회 문서 참고.[20] 프리프케는 2차 대전이 끝난 후 아르헨티나 남부 관광명소인 바릴로체로 도망쳐 40년 이상 호텔 지배인으로 살다가 1995년 이탈리아로 송환돼서 재판을 받았다. 아르헨티나 정부에서 "인류의 존엄에 대한 모욕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이유로 거부했다.[21] UDBA의 소행이라는 설도 있고 당시 루부리치와 갈등을 빚던 우스타샤 대부 안테 파벨리치의 소행이라는 이야기도 있다.[22] 탄흔이 몸 이곳 저곳에 남아 있었고 두개골이 으깨져 있었다.[23] 흔히 로마 진군 하면 나오는 이 사진에서 무솔리니 바로 옆에 서 있는 대머리콧수염 달린 사람이 바로 데 베치다.[24] 당시 데 베치 휘하의 이탈리아 왕국군 병력은 이에 불복하여 피옴비노에 상륙하던 독일 국방군 병력을 상대로 용맹하게 응전해서 100명 이상 사상자를 내고 200명 가량을 포로로 잡았다. 그럼에도 데 베치는 그 포로들을 전부 풀어주고 국방군 측에 무기를 반납하고 항복할 것을 명했다.[25] 전쟁 전에는 프리츠 쿤이나 카와키타 토모야를 비롯하여 이런저런 나치 및 일제 관련 반역자들이 종종 추방당하기도 했다.[26] 쿠르트 발트하임이 사망했을 때 고인의 명복을 비는 의미로 화환을 보냈던 국가 중 하나다.[27] 손가락 몇 개를 잃고 애꾸눈이 되었다.[28] 이는 프랑스에 파이퍼의 별장이 있었기 때문이다.[29] 프랑스로 도망간 주제에 프랑스어 억양도 안 고치고 살고 있어 그 어눌한 발음 때문에 들통났다고 한다.[30] 화재 발생 전에 다수의 공격으로 신체가 훼손된 흔적이 있었는데 살해 후 화재로 위장하려고 한 것이다.[31] 게슈타포가 현상금을 걸었다.[32] 이때 다하우 수용소에 갇힌 경력을 이용하였다.[33] 본명은 엘프리데 후트(Elfriede Lina Huth, 1922~2018).[34] 나치 최대의 여성 강제 수용소로, 여성과 어린이 132,000명이 수감되었다.[35] 한 수감자는 여성 간수들이 남성 간수들보다 더 군견을 잔인하게 다뤘다고 언급했을 정도였다.[36] 물론 린켈은 본인은 나치 당원도 아니었고 단지 보수가 수용소의 다른 경비원보다 많아서 개 조련사로 일했을 뿐이며 자신이 개를 죄수들을 향한 무기로 쓰지도 않았고 항상 올바르게 행동했다고 주장했다.[37] 그 남성은 죽을 때까지 아내의 실체를 전혀 몰랐다고 한다.[38] 오치아이의 음모론들은 알게 모르게 한국의 UFO/음모론자 빅텐트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당시 한국 출판업계 특성상 미스테리 서적도 일본 서적의 해적판 형식으로 나오는 책들이 적지 않았을 것으로 사료되기 때문이다. 90년대에 나온 한국의 그쪽 계열 모 서적(내용 자체는 환뽕이 치사량에 달했다)에서조차 일본식 표현(유대 자본 배후를 유다야 신디케이트라고 표현했다. 일본어에서 유대인을 지칭할 때 ユダヤ라고 한다)이 간혹 보일 정도면....[39] 설정상 남미에 숨어 있는 것으로 나온다.[40] 당시(1981년)만 해도 마르틴 보르만은 전후 행적이 묘연했다.[41] 유대계 살인청부업자가 그를 죽이고 대신 폭약 운반에 동참한다.[42] 쌍제이의 인터뷰에 따르면 '나치 잔당들이 아르헨티나에서 재기에 성공했다면'을 가정한 것에서 모티브를 따 왔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