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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검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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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이름3. 배경4. 전개5. 숙청된 인물6. 결과7. 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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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Nacht der langen Messer[1] / Night of the Long Knives

1934년 6월 30일부터 7월 2일까지 나치 독일아돌프 히틀러돌격대독일 국방군 내 반항 세력, 그 밖의 반(反) 나치 세력을 3일에 걸쳐 숙청친위 쿠데타. 히틀러뿐 아니라 친위대가 돌격대를 제치고 새로운 권력으로 떠오르는 계기가 되었다.

이 숙청은 사법적 절차를 전혀 거치지 않고 조폭마냥 다짜고짜 숙청 대상을 습격하여 억류한 후 살해하는 매우 야만적인 방식으로 실행되었다. 수권법을 만들 때부터 히틀러를 경계한 유럽 각계의 시선들이 있었고 장검의 밤 이후에는 '이제 히틀러가 정권을 노골적으로 잡겠다고 야만적인 공개 폭력까지 쓰는구나' 하고 공포에 떨며 머지 않은 세월의 유럽 내 전쟁까지 예측한 세력들도 있었다. 하지만 영국, 프랑스 등 유럽 주류는 '설마 독일이 또? '라고 생각했다. 이 사건으로 히틀러가 절대 권력을 얻게 되어 제2차 세계 대전의 단초를 제공했다.

당시 이역만리 식민지 조선의 신문에서도 장검의 밤을 헤드라인으로 장식했을 정도로 세계적으로 엄청난 화제였다. 1934년 7월 2일자 동아일보[2]

2. 이름

이름인 '장검의 밤'은 '긴 칼의 밤'[3]이라고도 불린다.

이름의 유래는 5세기영국 솔즈베리(Salisbury) 평원에서 앵글로색슨족(게르만족의 일파) 족장연합과 브리튼인(켈트족의 일파) 족장연합의 평화회담 중 앵글로색슨족 측이 미리 짜고 브리튼인 족장들을 사로잡아 학살했다는 전설인 '장검의 배신(The Treason of the Long Knives)'에서 연원한다. 오늘날 학계에서는 이 전설을 역사적 사실로 보지 않지만 영국에서는 널리 알려져 있는 전설이고 독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최소한의 법적 절차도 없이 정적을 학살한 데 대해 영국 언론 측에서 비판하기 위해 이 사건을 '장검의 배신' 전설에 빗댄 것이다. 하지만 히틀러와 나치는 이 사건에 대해 "독일 민족에게 위협이 되는 자에게는 초법적인 처단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면서 정당화하였고, 영국 언론에서 붙인 '장검의 배신'이란 호칭은 오히려 자랑으로 여겨[4] 스스로 사건을 선전하고자 '장검의 밤'이라 칭했다. 당시 나치 선전가요 중에서는 "긴 칼을 뾰족히 하라" 같은 제목의 노래도 있었다.

오늘날 독일에선 의 반란(Röhm-Putsch)으로도 부르는데, 히틀러가 숙청의 근거로 룀이 반란을 획책했다고 주장한 데서 유래했다. 사건을 주도한 히틀러 측에서는 '벌새 작전(Unternehmen Kolibri)'이라고도 했다.

3. 배경

1930년 총선에서 나치당이 100여석 이상의 정당 득표를 기록하면서 아돌프 히틀러는 우파 자유주의 진영에게 공산당의 체제 전복을 노린 무력 폭동과 달리 나치당은 바이마르 체제에 대한 합법 투쟁을 한다고 여러 차례 공언했다. 하지만 그레고어 슈트라서파울 요제프 괴벨스 같은 당 내 노동자 중심 좌파 세력은 제2제국 기득권 세력의 청산을 공언했고 괴벨스의 베를린 돌격대들은 "우리가 정권을 잡게 되면 자유주의자 귀족 자본가 유대인들의 머리통이 모래 위를 굴러다니게 될 것이다"라고 노래를 부르고 다녔다. 이에 대해 주류 언론들은 히틀러에게 "머리통이 모래 위를 굴러다니는 것과 합법 투쟁이 어떻게 양립하는가?"는 의문을 제기했고 히틀러는 "우리가 정권을 잡게 되면 그게 머리통이 모래 위를 굴러다니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정치인식 발언으로 계속 무마하면서 넘어갔다.

하지만 히틀러가 유화적인 태도를 보이던 동안에도 돌격대와 나치당 내 좌파는 여전히 자본 몰수, 국유화, 무상 분배 따위의 구호를 부르짖으며 제2혁명을 관철하고 있었다. 실제로 나치당이 1933년 1월에 정권을 획득하자 독일 보수 주류 세력이던 군부와 과거 토지 귀족들은 물론, 신흥 자본가 집단까지 히틀러에게 돌격대와 나치당 좌파 문제의 해결을 강력하게 촉구했다. 이와중에 히틀러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총리가 되자 나치당 이외의 모든 정당들을 해산시켰고 자신의 반대 세력들을 탄압하면서 독재 권력을 구축하고 있었다. 그러나 히틀러는 제1차 세계 대전의 영웅이었던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의 권한으로 임명된 총리[5]로서 힌덴부르크와 그 주요 지지 세력의 요구를 무시할 수 없는 처지였다. 그리고 군은 아직까지도 바이마르 공화국 내에서 상당한 영향력이 있었고 히틀러는 그들로부터 지지를 받지 못하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히틀러의 권력 기반은 아직 불안정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에른스트 룀이 이끌던 SA가 집권까지의 공적을 내세우며 마음대로 날뛴 것은 히틀러에게 가장 부담되는 일이었다. 1933년 여러 보수 자본가 세력의 도움으로 히틀러가 집권하면서 SA는 법적으로 경찰에 준하는 지위에 올랐고 나치가 힘을 얻은 만큼 SA도 기고만장해져 지방 관청에 들이닥쳐 행정권을 나치에게 넘길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룀과 돌격대는 이제까지 해 오던 대로 독일을 더 크게 변화시킬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히틀러는 룀의 생각대로 독일을 바꿀 생각이 없었을 뿐더러 돌격대를 쓸데없어진 사냥개 취급했다. 그 이유는 룀의 사상에 있었는데 룀은 나치당의 사회주의 분파 중 가장 두드러진 인물이었으며 사회주의적인(Sozialistische), 노동자(Arbeiter) 등 사회주의적인 단어를 자주 사용했다. 이 분파의 성향은 대체로 유대인 자본가들이 지배하는 자본주의를 반대하고, 산업의 국유화와 노동자 지배를 선호했다. 특히 제2제국 시대부터 내려오는 귀족들의 자산을 몰수하여 재분배하기 원했고 룀은 반동 세력에 맞선 제2의 혁명을 주구장창 부르짖었다.

히틀러의 집권을 도운 자본가 세력은 이를 큰 위협으로 여겼다. 히틀러는 자본가들에게 "제2의 혁명은 없다"고 말하며 안심시키려고 했지만 돌격대의 출신 성분조차 바꿀 수는 없었다. 이들은 상당수가 노동 계급 출신인 데다 전직 공산주의자가 득실거리는 상황이었는데 비유하자면 레어 스테이크처럼 겉보기에는 나치당 제복의 색깔처럼 갈색이었지만 그 속은 공산주의자들처럼 붉었다는 의미였다. 집권한 히틀러가 사회주의적 정책을 시행하지 않고 자신의 집권에 지대한 공헌을 한 SA에 보답하지 않자 이들은 매우 실망하였다. 심지어 룀은 돌격대 지도자 모임에서 공개적으로 히틀러의 정책을 비난하기도 했으며 이때 룀이 히틀러를 공개 비판했다고 알려준 빅토어 루체는 장검의 밤 이후 돌격대 참모장이 되는 것으로 보답받았다.

더더욱 위험한 것은 독일 국군(Reichswehr)을 바라보는 300만 SA의 시선이었다. 룀과 SA 수뇌부는 구 프로이센 왕국 귀족들이 주름잡는 독일 국군을 아주 싫어했으며 이들을 혁명 정신이 떨어지고 시대에 뒤떨어진 구닥다리 취급했다. 때문에 룀은 군대를 SA에 합병하여 진짜 인민군을 창설하려고 했다.[6] 당시 돌격대는 군단에 해당되는 5개의 돌격대 상급 집단과 사단에 해당되는 18개의 돌격대 집단으로 구성되어 독일 정규군의 5배에 달했고 지휘관들도 전직 군인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하려고 하면 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룀의 이러한 의중은 프리드리히 대왕 이래의 깊은 역사를 가진 군 수뇌부를 발칵 뒤집어 놓았으며 이들도 역시 거리에서 쌈박질이나 하며 수뇌부라는 작자들은 동성애나 저지르는 오합지졸들로 구성된 집단 따위에게 국군을 바칠 의사 또한 전혀 없었다. 때문에 군과 SA의 갈등은 깊어져 갔으며 히틀러 역시 융커들로 구성되어 있는 전통적인 군부에 대해서 적의를 가지고 있었지만 권력의 안정화를 위해서는 군부를 끌어들일 필요성을 느꼈기에 룀의 노선과는 갈라서게 되었다. 또 돌격대에서 히틀러 개인숭배 대신 룀의 개인숭배가 강해지고 있었다는 것도 나치당과 히틀러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룀과 돌격대가 군권까지 장악한다면 군대가 국가의 위에 있던 독일의 전통에 따라 룀이 히틀러를 꼭두각시로 만들 가능성이 농후했다.

게다가 히틀러와 협력하여 그를 총리로 만든 독일 보수파는 돌격대와 나치당의 대립이 격화되자 돌격대를 이용하여 히틀러를 격하하여 정국을 바꾸려 하였다. 이러한 독일 보수파의 생각이 드러난 행동이 '마르부르크 대학교 연설'이다. 1934년 6월 17일, 프란츠 폰 파펜기독교를 들먹이며 마르부르크 대학교에서 나치당의 정책에 반대하는 연설을 했다.
역사 앞에 바로 서기를 원하는 어떤 민족도 아래쪽으로부터의 영원한 봉기를 견뎌낼 수는 없습니다. 언젠가는 당 운동이 끝나야 합니다. 언젠가는 영향받지 않는 사법기관과 논란의 여지가 없는 국권에 뒷받침된 확고한 사회적 구조가 생겨나야 합니다. 영원한 역동성만으로는 아무것도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독일은 허공으로 가는 행렬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정부는 도이치 혁명이라는 구실 아래 사리사욕, 나약함, 진실하지 못함, 기사적이지 못함, 불손함 따위를 퍼뜨리고 있는 실체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정부는 독일 국민이 선물해준 믿음이라는 풍성한 보물이 위협받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습니다. 국민에게 가깝고 국민과 결합되기를 바란다면 국민의 지혜를 모자란 것으로 평가해서는 안 되겠지요. 그 믿음을 키우면서 끝없이 후견인 노릇을 하려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특히 젊은이를 자극하거나, 어찌할 바 모르는 국민의 엘리트를 위협해서가 아니라, 오직 국민과의 믿음에 찬 토의를 통해서만 자신감과 일하는 즐거움이 생겨날 수 있는 것이지요.... 비판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악의에서 나온 것이라 해석되지 않고 약한 소리를 하는 애국자들이 나라의 적이라고 낙인찍히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요아힘 C. 페스트, 히틀러 평전 2권 829P
이 연설은 일반에 공개되지 않았는데도 큰 영향을 일으켰다. 괴벨스가 황급히 이 연설이 해외로 유출되는 것을 막으려고 했지만 이미 여러 해외 방송에 알려진 후였다. 결국 이 연설 후 히틀러는 파펜과 만나 파펜의 연설 내용을 정책에 반영할 것이고 특히 돌격대 문제를 해결할 것이며 괴벨스가 행한 파펜의 연설의 언론 보도 금지를 해제하겠다고 약속했다.

파펜에게 굴욕적일 정도로 양보해야 했을 만큼 히틀러는 좋지 못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당시 독일 대통령이었던 86세 고령의 육군 원수 힌덴부르크를 히틀러가 계승하기 위해서는 군부를 휘어잡을 필요가 있었고 때문에 어떻게든 SA의 영향력을 줄여야 했다. 이 때문에 룀은 히틀러에게 강하게 항의했고 막무가내로 SA의 무력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공교롭게도 이는 반란 기도처럼 보일 소지가 충분했으며 SA의 군부에 대한 타협 시도도 계속 결렬되고 있었다.

1934년 4월 11일 나치와 군부는 힌덴부르크 사망 이후의 방안을 논의하였다. 히틀러는 SA 축소와 룀의 영향력 억제, 군의 지위 보장과 군비 확장을 대가로 차기 대통령직 승계에 대한 지지를 요구했다. 그러나 군부과 자본가들은 여전히 SA를 싫어했다. 다른 유럽의 국가들도 돌격대베르사유 조약에 따른 군비 제한을 피해서 군대가 아닌 돌격대를 키우는 방법으로 돌격대가 독일 군대가 되는 것 아니냐는 의심이 생기기 시작했으며 돌격대의 막무가내식 폭력 행위로 독일 내에 있는 자국민들에게까지 공격과 폭력을 휘두르는 것을 강하게 문제삼았고 이것은 커다란 외교 문제로까지 번질 가능성이 높았다. 게다가 6월 21일 나이가 많이 들어 계속 건강이 악화되어 대통령 관저 대신 노이데크 성에서 요양 중이던 힌덴부르크는 국방장관 베르너 폰 블롬베르크 상급대장을 통해 히틀러에게 SA와 군부 간의 갈등이 지속될 경우 계엄령을 선포할 가능성을 알리면서 군대가 정권을 이끌게 될 수도 있다는 최후 통첩까지 했다. 히틀러는 한낱 아첨꾼에 불과해 보이던 블롬베르크까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보고 크게 놀랐다고 하며 힌덴부르크마저 이 경고를 확실히 밝히자 히틀러는 결국 룀의 처단을 결심했다.

루돌프 헤스는 6월 25일 라디오 연설에서 "혁명 게임을 하는 자들에게, 위대한 혁명의 전략가인 아돌프 히틀러를 잘못 판단하지 말라"고 경고했고 충성심을 버리는 자는 화를 입을 것이라면서 공개적으로 돌격대가 주장하는 제2의 혁명은 배신이라며 비난했다. 그 사이 하인리히 힘러와 친위대는 군부에게 친위대의 규모를 설명하면서 "이 정도 규모밖에 안 되는 친위대는 돌격대와는 달리 군부에 위협이 못 된다."고 주장하며 군부를 설득하였고 군부는 이를 수락하여 친위대에게 무기와 차량을 지원해서 돌격대를 없애버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한편 힘러가 군부와 협상하던 시각에 히틀러는 블롬베르크와 만난 자리에서 돌격대의 핵심 지도자들을 한 방에 체포할 것이라고 말하며 구체적인 계획을 알려주었고 이에 블롬베르크와 군부는 협조할 것을 약속했다. 그리고 6월 27일 친위대 대원인 요제프 디트리히는 군부로부터 돌격대를 제압하는 데 필요한 지원을 받기로 약속받았다.

4. 전개

히틀러는 룀을 처단하는 것을 매우 주저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돌격대를 기반으로 당 내 2인자로 급부상한 룀을 견제하기 원했던 괴링, 힘러, 괴벨스 등은 룀의 처단을 벼르고 있었다. 괴링은 게슈타포를 힘러 휘하로 전속시켜 SA의 반역 혐의를 입증할 증거를 캐내게 했고 힘러의 SS와 그 휘하의 보안국(SD) 국장인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는 룀이 프랑스로부터 2000만 마르크를 받아 6월 24일에 SA를 동원하여 히틀러 정권을 전복시키려 했다는 거짓 증거를 만들어내 히틀러에게 제시했다. 그리고 이를 받아든 히틀러는 결국 룀을 처단하기로 결심했다. 괴링, 힘러, 하이드리히 등은 그동안 계속 살생부를 작성하였고 SS에 동원 명령을 내렸다. 이런 상황이 벌어지는 동안 룀과 동료들은 바트비제로 휴가를 떠나 있었다.

1934년 6월 28일, 히틀러는 룀에게 전화를 걸어서 회의를 위해 필요하니 6월 30일까지 모든 SA 지휘관을 뮌헨의 바트비제 온천에 소집할 것을 요구했고 룀은 별다른 의심 없이 이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운명의 30일이 밝자 히틀러는 직접 바트비제에 도착하여 힘러 휘하의 SS를 동원해 룀과 SA 지휘관들을 일망타진하였다. 요제프 디트리히는 친위대 2개 중대를 이끌고 뮌헨에 도착했고 뒤이어 히틀러도 합류했다. 직후 히틀러는 마중나온 뮌헨 돌격대 지휘관 2명을 보고 계급장을 떼 버리더니 "이놈들부터 일단 총살시켜!"라고 소리쳤고 그 2명은 영문도 모른 채 체포되어 끌려간 후 다음 날 총살당했다. 이유는 6월 29일 뮌헨에서 수천 명의 돌격대가 가두시위를 벌이면서 돌격대를 버렸다며 히틀러를 공개적으로 비난한 일이 있었던 것에 대해 책임을 묻는 것이었다. 그 뒤 히틀러는 직접 친위대 및 경찰 병력을 대동하고 바트비제 온천의 인근 돌격대가 투숙하고 있던 호텔을 급습해 아직도 자고 있었던 룀을 비롯한 돌격대 지도부를 전원 체포했고 이들을 뮌헨의 교도소에 몰아넣었다.

그리고 같은 날 정오 히틀러는 뮌헨의 나치 당사에서 긴급회의를 소집하여 룀이 쿠데타를 하려 했다고 폭로했고 룀과 그 동조자들을 처단하겠다고 선포했다. 이 선포로 인해 돌격대 지휘부는 완전히 와해되었다. 그리고 룀이 쿠데타를 하려 했다는 선포와 함께 베를린에서 나치 친위대와 독일 경찰들이 숙청 작업을 개시하여 돌격대뿐만 아니라 독일 내의 반나치 세력들도 숙청했다. 괴링이 주도한 이 숙청은 베를린만이 아니라 뮌헨 등 독일의 주요 도시들부터 시작되었다. 돌격대뿐만 아니라 히틀러에게 도전하던 쿠르트 폰 슐라이허 등의 보수파 인사들, 그리고 히틀러의 정적들이 모두 숙청 대상이었으며 이 정적들에게는 룀의 쿠데타 기도에 가세했다는 누명을 뒤집어씌웠다.

룀에 대해서는 히틀러가 마지막 자비를 베풀어 처형이 아니라 자결할 기회를 주라고 지시했으며 룀이 자살을 거부할 때만 처형하라고 했다. 하지만 룀은 자결하라는 의미로 감방에 권총이 들어왔음에도 자결을 거부하다가 친위대 장교이자 미래에 다하우 강제수용소 소장이 되는 테오도어 아이케에게 7월 1일, 체포된지 하루만에 뮌헨 교도소에서 사살당했다. SA 숙청의 표면적인 이유로는 반란음모 혐의가 씌워졌고 이는 숙청 며칠 후 일반에 공개되었다. 6월 30일에 일어난 이 일련의 사건으로 나치당 내의 좌익 계열은 일소되었으며 이를 장검의 밤(Nacht der langen Messer)이라고 부른다.

5. 숙청된 인물

나치당 내 히틀러의 권력을 조금이라도 반대하거나 위협이 되던 사람들이 주로 숙청되었다. 소속을 떠나 그냥 반 히틀러 세력, 혹은 장차 히틀러의 절대 권력에 위협이 될 것이라 예상되는 돌격대 임원들은 다 죽였다고 봐도 되는 수준이다.

그 밖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살해되었는데 이 숫자가 약 500명이 넘는다는 보고도 있다. 뮌헨 폭동 당시 도와주지 않고 내뺐던 사람들, 그리고 옛날에 돌격대에게 두들겨 맞은 후 히틀러를 고소해서 히틀러가 처음으로 감옥에 가게 만들었던 사람들 역시 살해되었다.

6. 결과

파일:ZETFgCa.jpg
이제는 두손들어 하일 히틀러!
영국의 만화가 데이비드 로우의 만평.
해외에서는 이 전대미문의 불법 숙청에 경악을 금치 못했고 "이건 조직폭력배나 할 일이지 총리가 할 짓은 아니다."라고 반응했다. 또한 "이 사건은 명백히 히틀러가 반대파를 무력으로 숙청한 친위 쿠데타이며 법적인 절차도 없이 이루어진 불법행위였다."며 히틀러를 맹렬히 비난했다.

이러한 비판이 흘러나올 수밖에 없던 이유는 장검의 밤 사태가 보여준 비정상적인 즉결성에 있었다. 당시 독일은 엄연한 법치주의 국가였으며 제대로된 법이 굴러가는 그 어떤 나라도 쿠데타 수괴 혐의를 받는 피의자를 이렇게 마구잡이로 처리하진 않았다. 근현대 뿐만 아니라 하다 못해 전근대 절대왕권을 자랑하던 국가들도 최소한 앞뒤 사정을 들어보고 몇차례의 대질심문과 세밀한 검토를 진행한 끝에 '절차대로 처벌'을 진행했지 이렇게 초법적으로 하루 만에 감옥에서 쏴죽이진 않았다. 바꿔 말하면 그만큼 히틀러 입장에선 빠르게 죽이지 않으면 안될 이유가 있었다는 뜻이다. 특히나 룀은 현직 장관(무임소)이었기 때문에 고위직을 처벌하는 절차치곤 너무나도 날림이었으며 위에서 보듯 조직폭력배나 할 일이라는 비판은 전혀 틀리지 않았다.[8]

나치당원 사이에서조차 히틀러에 대한 불만이 있었으며 좌파 사회주의 성향의 나치당 내부 파벌에서조차 에른스트 룀의 말도 안되는 날림 '총살형'에 안타까워하는 시각도 있었다. 그러자 히틀러는 이를 무마하기 위해 1934년 7월 13일 의회에서 연설을 하여 불만을 가라앉혔다.
인간은 영원히 똑같은 강철의 법칙에 따라 반역을 파괴합니다. 누군가 어째서 정상적인 재판을 열어서 판결을 내리지 않았느냐고 우리를 비난한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이 순간에 나는 도이치 국민의 운명에 대해서 책임을 지고 있었고, 따라서 도이치 민족의 최고 재판관이었노라고 말입니다!..... 나는 이 반역죄의 주동자들을 사살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며 우리 내면의 우물을 오염시킨 종양을 빨간 살이 보일 때까지 잘라내고 소독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아무도 국민의 존재를 - 이것은 내면의 질서와 안전을 통해서만 확보되는 것입니다 - 위태롭게 만들고도 벌을 받지 않는 일은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합니다! 누구라도 국가를 향하여 한방 먹이려고 손을 쳐들었다가는 더욱 확실한 죽음이 자신의 운명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요아힘 C. 페스트, 히틀러 평전 2권 845P
히틀러가 내세운 논리는 에른스트 룀을 비롯한 '돌격대'들이 반란을 일으키려고 했기에 전시에나 준하는 급박한 사안이라 즉각 진압하여 현장 사살했다는 변명이었고, 만약 이들이 폭동을 일으키면 내전이 벌어지기 때문에 이러한 조치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항변이었다. 이 연설이 끝난 직후 국회에서는 히틀러에게 박수갈채가 쏟아졌으며 시민들도 기뻐했다고 한다. 돌격대의 계속된 폭력 행위에 지긋지긋했던 시민들은 단호하고 과감한 결단으로 돌격대를 제거한 아돌프 히틀러의 결단을 좋아했다고 한다.

그리고 선전장관 괴벨스가 에른스트 룀이 쿠데타를 기도했으며 국가를 뒤엎으려고 한 반역자였으며, 돌격대를 자신의 수족처럼 부리고 있었기 때문에 룀을 빠르게 숙청한 것은 정당한 행위였다고 선전을 하자 독일 내의 불만은 잠잠해졌다. 나치에 반대하던 보수파는 한때 총리까지 지냈던 슐라이허와 파펜의 측근들까지 무자비하게 사살된 것을 보자 자신들도 언제든지 제거될 수 있음을 깨닫고 겁을 잔뜩 집어먹었고 자신의 측근들이 제거당한 파펜 본인조차도 겁을 잔뜩 집어먹고 히틀러에게 불만을 제기하지 못했다.

계엄령을 선포하겠다며 히틀러를 위협했던 대통령 힌덴부르크는 장검의 밤 사건 당시 자신의 충복이었던 슐라이허 장군까지 참살됐는데도 히틀러에게 감사를 표하면서 "단호한 행동과 용감한 개인적 개입으로 반역의 씨를 미연에 제거하고 독일 국민을 커다란 위험으로부터 구하였다"며 히틀러를 칭송할 정도였다. 다만 실제로는 이런 성명을 대통령 비서실장 마이스너가 쓴 것이고 나중에 히틀러에게 "마음에 들었냐?" 하고 아부까지 해줬다.

룀과 돌격대의 숙청 과정 중에서 합법적인 수단이 아무것도 없었다는 것에 문제를 독일에서 제기하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독일 공법학회 권위자집단 학자들도 "총통은 최고의 인민재판관으로 실정법에 구애받지 않는다!!"라는 실드를 쳤을 정도였다. 사실 불만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문제를 제대로 지적하기 어려울 정도로 폭압적인 상황이었기 때문에 문제를 제기할 수 없었다.

이후 아돌프 히틀러의 권력은 날이 갈수록 강해졌고 뒤이어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사망하자 히틀러의 지위는 이제 독일에서는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지경에 오르기에 이른다. 그리고 돌격대 숙청의 1등 공신이었던 친위대는 돌격대가 이루지 못한 '진정한 인민군'의 꿈을 무장친위대라는 형태로 실현했다. 룀이 가지고 있었던 돌격대 참모장 지위는 빅토어 루체가 계승했다. 히틀러는 공식적으로 돌격대 최상급 지도자의 위치를 죽을 때까지 유지했다.

장검의 밤 사건에도 불구하고 SA는 해체되지 않았으나 사건의 여파로 그 정치적 영향력이 크게 떨어졌다. 400만에 달하는 조직을 갑자기 해체하기도 어렵고 이용하지 않는 것도 아까웠기 때문에 SA 조직 자체는 계속 유지하기로 결정되었는데 이후 나치당에 가입하지 못하는 기회주의자들이 대거 SA에 가입하면서 돌격대 조직은 개나 소나 가입하는 보편적인 나치 조직이 되었으며, 나치당 입당 전에 돌격대에 가입해 거기서 공을 인정받아서 나치당에 정식 입당하는 테크로 활용되었다.

그러나 정치깡패 노릇만 했던 이전과는 달리 새 돌격대는 비교적 어린 나치당 유망주들을 발굴해서 학생들에게 주말이나 방학마다 기초 군사 훈련을 하고 2차 대전때에는 국방군 공군과 육군 부대로 전속시켜 싸우게 하였다. 이는 룀의 뒤를 이어서 돌격대 참모장이 된 빅토어 루체가 장검의 밤 이후 땅에 떨어져버린 SA의 지위를 회복하기 위해 들인 노력의 산물이었다.

그러나 장검의 밤 이전의 지위를 되찾기 위한 이런 노력은 1943년 빅토어 루체가 휴가 도중 아우토반에서 교통사고로 죽자 물거품이 되었다. 이후 돌격대는 1934년의 숙청 때처럼 서서히 몰락하여 친위대의 지원 조직이나 예식용 부대로 치부될 정도로 전락했다. 즉, SS에 사실상 흡수되어 버린 것. 하지만 펠트헤른할레 자체는 1945년 부다페스트에서 종전을 맞기 직전 와해될 때까지 활동했다.

장검의 밤은 독일의 동성애자들에게는 헬게이트가 열리는 계기가 되었다. 룀의 동성애 성향을 알고 있었던 언론이 이를 이유로 갈궈댈 때에는 다른 이도 아닌 히틀러 본인이 1930년 룀의 동성애 비판에 대해 "돌격대는 군대지, 도덕집단이 아니다.", "개인의 사생활에는 관심없다."는 시대를 앞서간 동성애 옹호 발언(?)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동성애자들의 보호막이었던 에른스트 룀이 제거되자 그걸로 끝이었고 이후 동성애자들은 대거 다하우 수용소로 잡혀 들어갔다.

장검의 밤은 히틀러와 SS의 완벽한 승리로 끝났지만 한동안 독일의 길거리에는 긴장감이 맴돌게 되었다. 비록 상층부는 손쓰지도 못하고 모두 목이 날아가 버렸지만 여전히 하급 돌격대원들은 대다수 건재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후 본 사건에 불만을 품은 일부 돌격대원들에 의해서 친위대원들이 뒷골목 등에서 살해당하거나 린치를 당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저항들은 대세를 뒤집을 정도로 파급력이 크거나 조직적이지도 못하였으며 룀의 사망 직후부터 나치 제2인자 자리를 둘러싼 지도부의 내부 투쟁이 심했다. 히틀러의 공언도 있고 해서 흔히 헤르만 괴링이 제국의 2인자였다는 인식이 있는데 실제로 어느 정도 맞는 말이긴 하지만 생각보다 괴링의 입지는 힘러, 괴벨스 등 경쟁자들보다 압도적이지는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집권부터 종전에 이르기까지 나치 독일의 핵심세력들은 끊임없이 내부 투쟁으로 홍역을 앓게 되었다. 때문에 당이 바쁘기도 해서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했다.

한편 얼마 후 소련에선 세르게이 키로프 암살 사건이 발생하면서 스탈린이 히틀러를 벤치마킹해서 대숙청을 시작한 것이라는 인식이 생겨나기도 했으나[9] 근래의 연구는 키로프 암살 배후가 스탈린이라는 주장을 배격하고 있으며 대숙청이 스탈린이 주도면밀하게 계획한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도 회의적이다. 대숙청의 전개 양상이 노상 정치 테러였던 장검의 밤과는 크게 달랐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

7. 어록

"룀 사건 이후 대통령과 법무장관, 장성들로 대표되는 우파가 히틀러 지지로 돌아선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반유대주의를 경멸했던 그들은 히틀러가 주장하는 과격한 반유대주의를 거의 신경조차 쓰지도 않았다. 즉 당시의 독일 보수주의는 인종주의라는 망상과는 아무런 교집합도 없었다. 1934년 6월 30일의 피의 숙청 이후, 돌격대가 이끄는 나치당 내부의 강력한 좌파들이 제거되었다. 이들 좌파들은 혁명의 성과들에서 소외되고 있다고 느끼고 있었다. 물론 거기에도 이유가 있었다. 1933년 혁명 이전에 양성된 돌격대원 대다수는 히틀러의 이른바 사회주의적 프로그램을 적극적으로 실천했다. 이들은 당의 가장 밑바닥에서 나치 운동을 위해 헌신했다. 하지만 그들에게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자, 분노와 불만들이 형성되었다."
알베르트 슈페어 출처
"독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들었나? 대단한 친구야! 정말 멋지게 해냈군! 정적은 이렇게 다뤄야 하는거야!"
이오시프 스탈린, 아나스타스 미코얀에게 장검의 밤을 평가하길. 이 발언은 미코얀으로부터 대화 내용을 전달받은 독일어 통역 발렌틴 베레지코프의 회고록에 수록되어 여러 연구들에 재인용되었다.

[1] 나흐트 데어 랑엔 메서. 구사자의 발음에 따라서 랑엔 또는 랑겐으로 불린다.[2] 기사에서 말하는 백림은 베를린의 음차다.[3] 독일어 단어 Messer의 뜻은 단검이며 langen Messer는 메서를 확대시킨 것처럼 생긴 장검이다.[4] 참고로 잉글랜드인의 직계 조상인 앵글로색슨족독일인과 마찬가지로 게르만족에 속한다.[5] 히틀러는 의회에서 신임을 얻어 총리로 임명된 게 아니라 바이마르 헌법에 규정된 대통령의 비상 대권으로 임명된 총리였다. 따라서 힌덴부르크의 눈 밖에 나면 총리직에서 잘리는 신세였다.[6] 이러한 군 조직 관념은 19세기 독일 내 진보 진영이 이상시하던 민병대의 관념을 받아들인 것이며 무장친위대도 이러한 사상적 영향 아래에서 형성될 수 있었다. 실제로 나치 독일 중기 이후에는 일정 정도 친위대 국가로의 이행을 보여주기도 하였다.[7] 다만 다른 두 사람인 로소프와 자이서는 아무 해도 입지 않았다.[8] 룀 뿐만 아니라 슐라이허, 슈트라서 등 다른 인물들 역시 무차별적으로 '즉결처분'해버렸다. 심지어 슐라이허는 감옥에 데려오지도 않고 그냥 가택에서 쏴죽였는데, 말이 좋아 '쿠데타 모의범 처벌'이지 그냥 암살에 가까웠다.[9] 후술하는 베레지코프도 키로프가 죽었단 소식에 스탈린이 룀의 죽음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