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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12-23 18:32:01

파나이 호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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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536349> 연표 사건
193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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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년 전황·추세 등 상세한 내용은 연표 해당 연도 참고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USS_Panay_sinking_after_Japanese_air_attack.jpg

침몰 중인 USS 파나이함.

USS Panay incident
パナイ号事件 (パネー号事件)
レディバード号事件

1. 개요2. 배경3. 전개4. 후폭풍과 수습5. 여담6. 매체에서7. 관련 문서

1. 개요

1937년 12월 12일 난징 전투 도중 일본 제국 해군 항공대가 당시 난징 조계지에서 거류민 퇴출작전 지원 중이었던 미국 해군 함정 리버급 연안포함(River Class River Gunboat) USS 파나이(USS Panay, PR-5) 함과 영국 해군 함정 인섹트급 연안포함 (Insect Class River Gunboat) 레이디버드(HMS Ladybird)함을 공격하여 파나이함을 격침시키고 레이디버드함에 손상을 준 사건. 시기를 통해 당시 미국과 영국, 일본 제국은 교전관계가 아닌 상호중립관계였음을 알 수 있다.

2. 배경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상하이를 함락한 일본군은 당시 중화민국의 수도였던 난징으로 진격하고 있었다. 11월 중순이 되면 중화민국 정부와 군도 수도 난징의 사수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충칭으로 정부를 옮겼지만 10만 명 정도의 병력을 남겨 최후의 방어전을 준비하고 있었고 난징에 있는 각국 외교공관에게 철수를 권고했다.

철수권고를 받은 각국 공관들은 난징 소재 자국민을 급히 소개시키면서 철수를 시작했다. 그리고 난징 함락 직전까지 남아서 마지막 업무를 보고 있던 미국과 영국의 공관직원들은 최후까지 잔류한 소수 민간인들과 함께 마지막으로 철수를 시작했다. 미 해군 아시아함대 소속 양쯔강 초계전대 소속이었던 연안포함(River Gunboat) PR-5 USS 파나이는 같은 임무를 띈 영국 해군 연안포함 HMS 레이디버드(HMS Ladybird)와 HMS 비(HMS Bee)와 동행하여 난징에서 최후의 탈출작전을 시작했다.

3. 전개

12월 11일 탈출을 시작하여 양쯔강을 따라 내려오던 미영 연합 탈출함대를 제일 먼저 확인한 것은 일본 육군이었다. 양쯔강변을 점령하고 포대를 구축하고 있던 일본군은 12월 12일 새벽에 미식별 함대가 예고도 없이 강을 따라 남하해 오는 것을 확인하고 포격을 개시했다. 굳이 미식별예고도 없이를 강조하는 이유는 후술한다.

이들의 포격은 HMS 레이디버드와 비에 약간의 손상을 입혔으나 큰 피해는 주지 못했고 탈출함대는 순식간에 포대의 사정권을 벗어나 이탈했다.

여기서 그쳤으면 그나마 다행이었겠지만 일본군 지휘관은 상부에 다수의 적군이 승선한 함대가 강을 따라 이동 중이라고 상부에 보고했고 상부는 즉시 해군에게 협조 요청을 했다. 평소에 원수처럼 여기며 싸우던 놈들이 하필 이때는 웬일로 죽이 잘 맞아서 해군은 육군의 협조요청을 즉각 수용하여 해군항공대에 출격 명령을 내렸고 96식 함상공격기들이 즉각 폭장하고 이륙했다.

한편 큼지막한 성조기를 걸어 교전국이 아님을 표시한 탈출함대는 잠시 정박해 느긋이 밥도 먹고 양쯔강 경치도 구경(…)하면서 느린 포함들과 민간 유조선 3척의 이동 속도에 맞춰 천천히 이동하고 있었다. 이들은 새벽의 포격 사건을 교전지역에서 자주 일어나는 불상사 정도로 치부하고 있었다.

12월 12일 13시 30분, 이들 함대를 발견한 일본 해군항공대는 즉시 급강하폭격에 돌입했다. 이들은 파나이를 목표로 집중폭격을 퍼부어 총 2발을 명중시켰고 안 그래도 작은 연안용 포함에 불과했던 파나이는 얼마 버티지 못하고 격침당했다. 하지만 이 선단에는 기자들이 곳곳에 동승중이었고 덕분에 일본군의 공격에 침몰하는 파나이의 모습이 고스란히 찍혔다.

4. 후폭풍과 수습

당연히 두 말 할 것도 없이 미국은 노발대발했다. 일본군은 아무런 항해 예고도 없었다고 항변했으나 미국은 일찌감치 주일 대사관을 통해 탈출함대의 항해일정을 정식 통보한 상태였다. 더군다나 이들 함정은 명백히 성조기와 유니언잭을 게양한 채 항해 중이었고 주간이었기 때문에 이들을 식별하지 못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새벽의 포사격이야 안개로 인해 식별이 어려운 점을 인정하더라도 주간의 공습은 명백히 변명의 여지가 없는 의도적 공습이라고 미국은 판단한 것이다.

이미 사건 당일 미국은 파나이와 정기적으로 주고받는 통신이 이루어지지 않자 즉각 무슨 일이 생겼음을 직감하고 대응에 나섰으며 상해 일대를 담당하던 일본 해군 3함대에 연락장교를 파견하여 강력히 항의했다. 미국도 14일에 주미 일본 대사를 통해 강력히 항의하고 국무부에서 정식 항의성명을 발표했으며 미 해군 조사위원회가 파나이 호 격침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다.

이에 아직까진 미국과 전쟁할 생각이 없었던 일본[1] 즉각 저자세로 나섰다. 사건 다음날인 13일에 3함대 사령관과 참모장이 미 아시아함대를 방문해 사과하였고 본국에서는 해군성 차관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사과성명을 발표하며 모든 책임을 지겠다고 약속했다.

이후 일본 제국은 실비로 221만 4,007달러 36센트의 배상금을 1938년 4월에 지불하고 공격에 나선 항공대의 사령관을 경질시키며 미국을 무마하며 양국은 사건을 종식시켰다.[2] 미국도 당장 일본 제국과 전쟁을 벌일 마음도 없었고 그럴 여건도 아니었기 때문에[3] 이 정도 선에서 사건을 수습했다.

5. 여담

6. 매체에서

영화 욘 라베에서 라베의 아내 도라가 미군의 배에 탑승했다가 일본군의 공격으로 배가 침몰하는 바람에 실종되는 사건이 묘사되는데 파나이 호 사건을 모티브로 하였거나 파나이 호 사건을 영상화한 것으로 보인다.

Hearts of Iron IV에서는 시원하게 무시당했으나 1.6 아이언클래드 패치와 Man the Gun DLC가 나온 후 이벤트로 추가되었다. 미국은 이를 통해 일본에게 사과를 요구하거나 곧바로 전쟁을 선포할 수 있다. 사과를 선택하면 일본은 정치력 100을 미국에게 넘겨주게 된다.

7. 관련 문서



[1] 일본이 미국과 전쟁을 결심하게 된 것은 유럽에서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유럽 열강이 자신들의 세력확장에 태클을 걸지 못한다는 점이 충족되고 동시에 중일전쟁의 장기화로 인한 전략자원의 부족 상황 속에 ABCD포위망에 의한 석유 금수조치가 단행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양국은 서로를 1920년대부터 가상적국으로 취급하긴 했지만.[2] 경질된 사령관은 나중에 더 좋은 자리로 영전했다. 즉, 미국 눈치보기용이었다는 것.[3] 대공황에서 이제 겨우 벗어날랑말랑 하며 회복을 시작하고 있었고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에 묶여있던 해군력 증강도 이제 막 시작된 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