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0px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letter-spacing: -0.9px; word-break: keep-all" {{{#000,#999 | <colbgcolor=#536349> 연표 | 사건 |
1936년 | 3월 라인란트 재무장 | 7월 스페인 내전 발발 | 12월 방공 협정 | |
1937년 | 7월 중일전쟁 발발(루거우차오 사건) · 제2차 국공합작 | 8월 상하이 전투 | 12월 난징 전투(난징 대학살) · 파나이 호 사건 | |
1938년 | 3월 오스트리아 병합 | 6월 1938년 황허 홍수 | 7월 하산 호 전투 | 9월 뮌헨 협정 | |
1939년 | 4월 스페인 내전 종결 | 5월 할힌골 전투 | 8월 독소 불가침조약 | 9월 폴란드 침공(제2차 세계 대전 발발) · 가짜 전쟁 | 11월 겨울전쟁 | |
1940년 | 4월 노르웨이 침공 | 5월 프랑스 침공 · 됭케르크 철수작전 | 7월 영국 본토 항공전 | 9월 삼국 동맹 조약 | 10월 그리스 침공 | |
1941년 | 5월 비스마르크 추격전 | 6월 바르바로사 작전(독소전쟁 발발) · 계속전쟁 | 9월 레닌그라드 공방전 | 10월 모스크바 공방전 | 12월 진주만 공습(태평양 전쟁 발발) · 말레이 해전 · 남방작전 | |
1942년 | 4월 둘리틀 특공대 | 6월 청색 작전 · 미드웨이 해전 | 7월 엘 알라메인 전투 | 8월 스탈린그라드 전투 · 과달카날 전역 | 11월 과달카날 해전 · 횃불 작전 · 노르웨이 중수 사건 | |
1943년 | 1월 카사블랑카 회담 | 2월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 | 4월 바르샤바 게토 봉기 | 7월 쿠르스크 전투 · 연합군의 시칠리아 침공 | 9월 이탈리아 왕국의 항복(이탈리아 내전 발발) | 11월 카이로 회담 · 테헤란 회담 | |
1944년 | 4월 대륙타통작전 | 6월 바그라티온 작전 · 노르망디 상륙 작전 · 필리핀해 해전 · 사이판 전투 | 7월 브레턴우즈 회의 ·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 8월 바르샤바 봉기 | 9월 마켓 가든 작전 | 10월 레이테 만 해전 | 12월 벌지 전투 | |
1945년 | 2월 얄타 회담 · 드레스덴 폭격 · 이오지마 전투 | 3월 연합군의 일본 본토 공습(도쿄 대공습) · 연합군의 독일 본토 침공 | 4월 베를린 공방전 · 오키나와 전투 | 5월 나치 독일의 항복 | 7월 포츠담 회담 | 8월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 만주 전략 공세 작전 · 일본 제국의 항복(옥음방송) | 9월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 |
※ 매년 전황·추세 등 상세한 내용은 연표 해당 연도 참고 | }}}}}}}}}}}} |
9월 2일 USS 미주리에서 항복하기 위해 도열한 일본 정부 사절단. |
9월 2일 USS 미주리에서 항복 문서에 서명 중인 일본 외무대신 시게미츠 마모루[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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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항복(Surrender of Japan, 日本の降伏)은 일본 제국이 1945년 8월 14일에 연합국에 통보하고 하루 지난 8월 15일에 쇼와 덴노가 연합국이 내민 포츠담 선언의 수용을 발표한 사건이다. 이로써 제2차 세계 대전은 완전히 종결되고 연합군의 일본 진주로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관리체제가 시작되었다.2. 옥음방송
자세한 내용은 옥음방송 문서 참고하십시오.내셔널 지오그래픽 영상 |
3. Victory over Japan
USS 미주리에 새겨진 동판. 항복을 기념하고자 만든 것이다.[번역] |
위의 사진 다음으로 유명한 시드니의 춤추는 남자. |
미국이 일본 제국에게 무조건 항복을 받아낸 날. V-J Day라는 표기도 자주 보인다. 또 태평양 전쟁의 종결이라는 의미에서 V-P Day (Victory in the Pacific Day)라고 하기도 한다. 이로서 제2차 세계 대전은 완전히 끝났다. 이후 투항을 거부하는 패잔병들에 의한 산발적인 교전은 있었지만 영향력은 없었다.
베트남 제국 사이공에서 영국 해군에 항복하며 일본 군도를 반납하는 일본 제국 해군 장교. |
1945년 9월 9일 난징에서 중국 육군 총사령관 허잉친에게 항복 문서를 전달하는 일본 지나파견군 총참모장 고바야시 아사사부로 |
아시아에 넓게 전개된 일본군은 항복 선언 이후 명령에 따라 현지 연합군에게 항복했다.
공식적인 항복 조인식은 1945년 9월 2일 도쿄 만에 정박한 아이오와급 전함 미주리 호의 선상에서 진행되었다.
[5] |
일본의 공식 항복 문서 및 서명. |
이날 항복 조인식에 참석한 각국 대표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 일본 제국 대표 시게미츠 마모루 외무대신, 우메즈 요시지로 육군참모총장
- 연합군 최고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 미국 대표 체스터 니미츠 (미 해군 태평양함대 사령관)
- 중화민국 대표 쉬융창 (중화민국 군사위원회 군령부장)
- 영국 대표 브루스 프레이저(Bruce Fraser) 제독 (영국 태평양함대 사령관)
- 소련 대표 쿠즈마 데레뱐코 (Кузьма́ Никола́евич Деревя́нко) 육군 중장
- 호주 대표 토마스 블레이미(Thomas Blamey)
- 캐나다 대표 로렌스 무어 코즈그레이브(Lawrence Moore Cosgrave)
- 프랑스 대표 필리프 르클레르
- 네덜란드 대표 C.E.L. 헬프리흐(Conrad Emil Lambert Helfrich)
- 뉴질랜드 대표 레너드 이시트(Leonard M. Isitt)
이를 기념하는 날은 나라마다 다른데 8월 15일이 V-J데이인 나라는 영국, 네덜란드, 호주, 뉴질랜드이며 미국은 9월 2일, 중화권은 9월 3일이다.
일본에서는 패전 자체를 기뻐하는 건 아니지만 '종전기념일'로써 8월 15일에 기념한다.
조인식 당시 사용한 만년필은 파커사에서 생산한 파카 듀오폴드 빅레드이다. 종전 50주년인 1995년에 이를 기념하기 위해 파카사에서 1945개 한정판을 생산했다. 아쉽게도 조인식 때 사용한 맥아더의 만년필은 관리 소홀로 인해 없어졌다.
4. 포츠담 선언을 수용한 이유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일본 제국은 전쟁 말기에 들어서 국력 이상의 무리한 전선의 확장과 연이은 패배[6]로 인해 군대가 거의 궤멸에 가까운 상황이였다. 이에 연합군은 포츠담 선언 등을 발표하며 일본에게 전쟁을 끝낼 기회를 주었으나 군부의 지배하에 있던 일본 제국이 이를 묵살하고 결사 항전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오지마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일본군의 결사 항전에 의해 큰 피해를 입은 미국은 일본의 전쟁 의지를 꺾고 더 이상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도쿄 대공습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7] 설상가상으로 불가침조약으로 중립 관계였던 소련이 선전포고를 한 후 만주 전략 공세 작전으로 관동지역에 주둔한 75만 명가량의 관동군을 짧은 시간 내에 궤멸시키자 결국 버틸 수 없게 되었다. 그때까지도 항전을 주장하는 장교들이 많았고[8] 무력으로 항복을 막으려는 시도(궁성사건 등)도 있었으나 항복파 장교들과 쇼와 천황의 강한 의지로 결국엔 제압되었고 일본은 연합국이 내민 포츠담 선언을 수용하여 전쟁을 마무리지었다.5. 기타
- 이 이후 일본은 전쟁특수로 반전의 계기를 맞이할 6.25 전쟁 직전까지 최빈국 수준으로 굴러떨어졌다. 패전 후인 1940년대 후반 당시 일본의 경제 수준은 연합국은 물론이고 추축국 중에서도 독보적으로 최악이었다.[10]
- USS 미주리를 비롯해서 항복 조인식 당시 참석한 함선들의 명단은 다음 링크를 참고할 것. 출처는 해군역사문화사령부(NHHC) 사이트.
- 1945년 8월 14일 미국의 소리에서 일본이 포츠담 선언 조건을 완전히 접수하여 무조건 항복한 것과 일본의 항복 메시지, 해리 S. 트루먼의 성명문 그리고 연합군 점령하 일본의 최고 사령관으로 더글러스 맥아더가 임명되었다는 내용의 방송을 세계에 송출하였다. 한국어, 일본어, 중국어(표준중국어·광동어·오어·민남어), 독일어, 프랑스어, 베트남어, 말레이시아어, 태국어로 방송한 이후 각 국의 국가를 송출하였는데 1942년 로스앤젤레스에서 재미한족연합위원회가 1절부터 2절까지 제창한 애국가 음원을 송출하였고 그 음질이 상당히 좋은 편이다. 한국어 방송은 7분 27초, 애국가 음원은 8분 44초부터 들을 수 있다. Surrender Broadcast
- 일본이 항복한 직후 미국은 이를 상징하는 의미에서 일본의 첫 성조기 게양에 큰 상징성을 담으려 했다. 본래는 주일 미국 대사관 건물에 진주만 공습 날짜인 12월 7일에 맞춰 더글러스 맥아더가 게양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공식 항복 다음날인 1945년 9월 3일 한 장교가 선수를 쳤다. 버나드 스테이플턴 중위(Bernard “Bud” J. Stapleton)는 이 날 도쿄의 닛폰 뉴스 빌딩 건물에 처음으로 성조기를 게양하였다. 당연히 맥아더는 크게 분노했지만 이미 해당 모습을 찍은 사진은 언론을 통해 미국 전역으로 퍼진 뒤였다. 괘씸죄 말고는 딱히 처벌할 혐의도 없어서 이 일은 유야무야 넘어갔고 스테이플턴은 곧 무사히 전역해서 고향의 지역 라디오 방송국에서 일하다가 1999년 사망했다.
[1] 그는 다리를 절뚝거리면서 나타났는데 훙커우 공원 의거로 오른쪽 다리를 잃었기 때문이다. 이는 일본의 항복을 보도하는 1945년 당시의 미국 뉴스에서도 시게미츠의 등장 장면에서 "몇 년 전 상하이에서 한국인 애국자에 의해 부상을 입고 의족을 달았다"고 직접 언급된다. 1분 49초경[번역] 1945년 9월 2일, 이 자리에서 일본이 연합국에 대한 공식적인 항복 문서에 서명하였다. 이에 제2차 세계 대전의 종전이 이루어졌으며, 당시 본함은 도쿄 항에 정박하여 있었다.[3] 로맨틱한 장면으로 알려져 있으나, 사진사의 증언에 따르면 해당 수병은 광장에 있는 여자면 할머니든 소녀든 상관않고 죄다 키스를 퍼부었다고 하며 그러다가 한 간호사를 낚아챈 순간을 포착해 찍었다고 한다. 승리의 기쁨으로 키스를 퍼붓는 사람이 워낙 많았고 간호사는 상대 남성의 얼굴도 못 봤다고. 이 둘은 이 장면 직후 서로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기억 못한채로 헤어졌으며, 둘이 다시 만난 것은 저 사진의 주인공을 찾기 위해 매체들이 추적한 수십 년 뒤였다. 한때 간호사의 이름이 '에디스 셰인'이라는 설이 대중적이었으나 나중에 그레타 짐머 프리드먼이라는 이름의 치위생사인 것으로 밝혀졌다. 본인의 말로는 그 수병과는 처음 보는 사이였다고 하며 그 키스는 첫 키스였다고 한다. 그 수병이 자신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3명이나 있었다. 그녀에게 키스한 수병은 조지 멘돈사로, 이 키스가 로멘틱한 이벤트가 아니라 그저 주위의 누군가와 종전을 축하했을 뿐이라고 인터뷰했다.[4] 좀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기사를 참조하면 된다.[5] 해당 영상은 일본 대표들이 미국 USS 미주리 전함에서 항복문서에 서명하는 모습이 담긴 실제 뉴스 영상이다.[6] 미드웨이 해전, 레이테 만 해전, 사이판 전투, 만주 전략 공세 작전, 임팔 작전 등[7] 이래도 항복하지 않았다면 몰락 작전이 개시되어 더 큰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8] 표면적으로는 중국과 동남아에 점령지가 상당 부분 남아 있어서 항복 당시의 독일·이탈리아보다 상황이 나아 보였다. 자원부족 등 심각한 문제 때문에 실제로는 그다지 아니었지만[9] 실제로 일본의 항복을 받아낼 당시의 미주리 호에는 페리 제독이 달고 갔던 성조기가 전시되어 있었다. 단, 사족으로 개항 협상은 전함 위에서 진행되지는 않았고 페리 제독이 요코하마에 상륙해 진행했다.[10] 당시 일본의 도시들은 아예 소멸되거나, 혼란으로 마비 상태가 되었다. 원자폭탄으로 도시 하나가 통째로 날아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는 말할 것도 없고, 원폭 투하를 피한 오사카, 나고야, 고베 등의 도시들도 기아와 고아들이 들끓었으며, 도쿄 역시 원자폭탄 투하는 당하지 않았지만 이미 도쿄 대공습으로 도시 기능을 전혀 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