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3-29 21:42:37

테헤란 회담

{{{#!wiki style="margin:-0px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letter-spacing: -0.9px; word-break:keep-all"
{{{#000,#999
<colbgcolor=#536349> 연표 사건
1936년
3월
라인란트 재무장 |
7월
스페인 내전 발발 |
12월
방공 협정
1937년
7월
중일전쟁 발발(루거우차오 사건) · 제2차 국공합작 |
8월
상하이 전투 |
12월
난징 전투(난징 대학살) · 파나이 호 사건
1938년
3월
오스트리아 병합 |
6월
1938년 황허 홍수 |
7월
하산 호 전투 |
9월
뮌헨 협정
1939년
4월
스페인 내전 종결 |
5월
할힌골 전투 |
8월
독소 불가침조약 |
9월
폴란드 침공(제2차 세계 대전 발발) · 가짜 전쟁 |
11월
겨울전쟁
1940년
4월
노르웨이 침공 |
5월
프랑스 침공 · 됭케르크 철수작전 |
7월
영국 본토 항공전 |
9월
삼국 동맹 조약 |
10월
그리스 침공
1941년
5월
비스마르크 추격전 |
6월
바르바로사 작전(독소전쟁 발발) · 계속전쟁 |
9월
레닌그라드 공방전 |
10월
모스크바 공방전 |
12월
진주만 공습(태평양 전쟁 발발) · 말레이 해전 · 남방작전
1942년
4월
둘리틀 특공대 |
6월
청색 작전 · 미드웨이 해전 |
7월
엘 알라메인 전투 |
8월
스탈린그라드 전투 · 과달카날 전역 |
11월
과달카날 해전 · 횃불 작전 · 노르웨이 중수 사건
1943년
1월
카사블랑카 회담 |
2월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 |
4월
바르샤바 게토 봉기 |
7월
쿠르스크 전투 · 연합군의 시칠리아 침공 |
9월
이탈리아 왕국의 항복(이탈리아 내전 발발) |
11월
카이로 회담 · 테헤란 회담
1944년
4월
대륙타통작전 |
6월
바그라티온 작전 · 노르망디 상륙작전 · 필리핀 해 해전 · 사이판 전투 |
7월
브레턴우즈 회의 ·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
8월
바르샤바 봉기 |
9월
마켓 가든 작전 |
10월
레이테 만 해전 |
12월
벌지 전투
1945년
2월
얄타 회담 · 드레스덴 폭격 · 이오지마 전투 |
3월
도쿄 대공습 · 연합군의 독일 본토 침공 |
4월
베를린 공방전 · 오키나와 전투 |
5월
나치 독일의 항복 |
7월
포츠담 회담 |
8월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 만주 전략 공세 작전 · 일본 제국의 항복 |
9월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 매년 전황·추세 등 상세한 내용은 연표 해당 연도 참고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Tehran_Conference%2C_1943.jpg
파일:소련 국기(1936-1955).svg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파일:영국 국기.svg
소련 미국 영국
이오시프 스탈린
소련 공산당 서기장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
영어 Tehran Conference (Eureka)
러시아어 Тегеранская конфенция

1. 개요2. 진행
2.1. 배경2.2. 진행
3. 여담4.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1943년 11월 28일부터 12월 1일까지 미국의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 영국의 윈스턴 처칠 수상,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 공산당 서기장이 이란 제국의 수도 테헤란에 모여 연 회담이다.

제2차 세계 대전과 관련된 다른 회담과는 다르게 한국에 관련된 내용이 없어 한국사에선 별다른 비중이 없으나[1][2] 세계사적 관점으로 봤을 때 꽤나 큰 의의를 지닌 사건이다. 이 회담에서 가장 중요한 의제가 바로 항공전을 제외하면 유럽 대륙에서 혼자 독일 육군을 상대하는 소련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한 소위 제2전선을 서방 측이 마련하겠다는 것이었다. 스탈린은 북프랑스 상륙작전을, 처칠은 지중해 연안에서 상륙할 것을 주장하였는데, 논의 끝에 스탈린이 주장한 북프랑스 상륙작전을 감행하기로 결정되고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노르망디 상륙작전이다. 자세한 건 노르망디 상륙작전 문서 참고.

또한 이 회담에서 3국의 협력과 전쟁수행의 의지를 표명하고 이란의 독립과 주권·영토의 보전을 약속했다.[3]

2. 진행

2.1. 배경

1941년 봄까지만 하더라도 영국, 미국, 소련은 어떠한 군사적인 제휴관계도 맺지 않는 상태였으나 같은해 6월의 바르바로사 작전과 12월의 진주만 공습을 계기로 급작스럽게 한 배를 타게 된다. 이에 따라 전후 처리[4], 자원의 효율적인 배분[5], 큰 틀에서의 전쟁 구상[6] 등을 놓고 삼개국 사이에 의견을 조정할 필요가 점차 커지게 됐다. 이에 따라 각국 정상들 사이에 특사들이 오고가기 시작했지만 전쟁이 점차 격화됨에 따라 정상이 직접 만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이 빠르게 개진되었다.

이오시프 스탈린 본인은 독재자 특성상 비행기를 타거나 자국 국경 멀리로 나가는 것을 꺼렸기 때문에 자신의 홈그라운드인 모스크바에서 회담을 진행하기를 원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역시 장애인인데다 건강 자체도 그리 좋지 못했기 때문에 장거리 비행을 꺼렸다. 여행을 유일하게 즐긴 처칠[7] 처칠과 루스벨트는 장제스와 회담을 진행한 카이로에서 다시 한번 회담을 개최하기를 원했지만 스탈린은 이를 거부했고 중간지점으로 중동 지역이 거론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이라크바그다드, 바스라 등이 개최지로 거론되다가 최종적으로는 1943년 11월 테헤란에서 회담이 개최되는 것으로 결론이 난다.

2.2. 진행

1943년 11월 28일에 마침내 각국 정상들이 테헤란에 도착하면서 회담이 시작된다. 회담 초기 단계에서는 선결과제였던 대독일 전쟁이 우선적으로 거론된다. 각국 정상들은 '각국이 협력하여 최후(즉, 독일이 항복하거나 독일을 점령할 때까지)까지 독일과의 전쟁을 수행한다.'라는 대명제에 대해서는 쉽게 합의를 이루었다. 앞선 1918년 소련이 독일과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으로 협상국 전열에서 이탈한 덕에 독일 제국이 백일 공세를 펼쳤던 만큼 소련이나 서방 연합국이나 대독일 전쟁을 수행하는데 있어서 어느 한쪽도 단독 강화를 체결하지 못하게 제한하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제였다.[8] 다만 이를 위해서 서방 연합국은 대독일 전쟁의 지상전에서 가장 큰 역할을 맡고 있던 소련에게 많은 것을 양보해야만 했다. 소련이 발칸반도 일대를 자신의 세력권으로 만드는 것을 허용해주어야만 했으며, 폴란드와 소련 사이의 국경선을 전쟁 발발 직전보다 약 250km 가량 서쪽으로 옮기는 것에도 동의를 표해야만 했다. 물론 소련 역시 랜드리스를 제공받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여기서 더 나가진 않았다.

이후로 회담에서 논의된 사항은 바로 제2전선 문제였다. 1941년부터 스탈린은 처칠과 루즈벨트에게 제2전선을 유럽 어딘가에 형성해서 소련의 부담을 경감시켜줄 것을 줄기차게 요구하고 있었고 처칠과 루스벨트 역시 제2전선이라는 대전제 자체에는 동의를 표했다. 다만 세부적인 사항에서 양 측 사이의 의견 충돌이 존재했는데, 1943년 이내로 상륙작전을 시행할 것을 요구했던 스탈린에게 처칠과 루스벨트는 선박, 병력의 부족을 근거로 난색을 표했다. 또한 상술했듯이 스탈린이 프랑스 북부 해안에 상륙할 것을 요구했던 것과 달리 처칠은 지중해 일대에 상륙할 것을 원했던 것. 논의 끝에 절충이 이루어졌고 제2전선은 '1944년 5월 프랑스 북부해안에서 상륙작전을 실시하는 것'으로 결정지어진다.

각종 협의 사항이 전반적으로 소련에게 유리하게 결정된 것에서 보여지듯이 시종일관 회담장을 장악한 것은 스탈린이었다. 테헤란 회담이 이루어지는 시점에서 유럽 대륙에서 2년 넘게 독일군 주력을 상대한 것은 소련군이었기 때문에 애초에 스탈린의 발언권이 강했던 데다가, 쿠르스크 전투의 승리 이후 전세가 완전히 소련군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역전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9] 루스벨트는 장거리 여행 + 악화일로를 걷고있었던 건강 및 특유의 친소 유화 스탠스 때문에 별다른 활약을 보이지 못했으며 처칠이 어떻게든 스탈린과 협상을 해보려했지만 무용지물이었다.

이외에도 몇가지 세부사항들이 결정됐는데, 이란의 독립과 유고슬라비아파르티잔의 활동 지원 및 터키를 연합군 측으로 꼬시기[10] 등이 있었다.

3. 여담

4. 둘러보기

{{{#!wiki style="margin:-10px"<tablebordercolor=#0044C9><tablebgcolor=#0044C9> 파일:프랭클린루즈벨트 투명.svg프랭클린 D. 루스벨트
관련 문서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word-break: keep-all"
<colbgcolor=#f5f5f5,#2d2f34><colcolor=#0044C9> 일생 생애
가족 아내 엘리너 루스벨트 · 친척 시어도어 루스벨트
역대 선거 1932년 미국 대통령 선거 · 1936년 미국 대통령 선거 · 1940년 미국 대통령 선거 · 1944년 미국 대통령 선거
관련 정치인 아돌프 히틀러 · 이오시프 스탈린 · 윈스턴 처칠 · 해리 S. 트루먼 · 마오쩌둥 · 장제스 · 허버트 후버 ·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 존 낸스 가너 · 네빌 체임벌린
기타 구축함과 기지 협정 · 그 개새끼는 우리 개새끼 · 제2차 세계 대전 · 루스벨트 계획 · 루스벨트 가문
FDR 행정부
사상 뉴딜 자유주의
국내정책 뉴딜 정책 · 백악관 행정명령 9066호 · 금주법 폐지
대외정책 헐 노트 · 면맥차관 · 중미은협정 · 무기대여법
사건사고 대공황 · 뉴 런던 학교 폭발 사고 · 애디슨 카운티 살인사건 · 미국 유령 비행선 사건 · 클리블랜드 토르소 살인사건 · 파나이 호 사건 · 코코넛 그로브 나이트클럽 화재
전쟁 제2차 세계 대전 · 태평양 전쟁 (진주만 공습 · 로스앤젤레스 전투)
핵무기 계획 트리니티 실험 · 맨해튼 계획
파일:노란색 깃발.svg 자유주의 }}}}}}}}}

{{{#!wiki style="margin:-10px"<tablebordercolor=#00afef>파일:처칠-투명.svg 윈스턴 처칠
관련 문서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word-break: keep-all;"
<colbgcolor=#f5f5f5,#2d2f34><colcolor=#00afef>생애<colbgcolor=#fff,#1f2023>생애 및 정치 경력
가족 아버지 랜돌프 처칠 조상 존 처칠
정책 일국 보수주의 · 보수자유주의 · 경제적 자유주의(자유무역)
외교 구축함과 기지 협정 · 퍼센트 합의
전쟁 제2차 세계 대전
군사작전 갈리폴리 전투 · 됭케르크 철수작전 · 디에프 상륙작전 · 언싱커블 작전
역대 선거 제38회 영국 총선
평가 평가
연설 및 발언 우리는 해변에서 싸울 것입니다 · 역사는 승자의 기록 · 철의 장막
관련 정치인 아돌프 히틀러 · 네빌 체임벌린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해리 S. 트루먼 · 마오쩌둥 · 장제스 · 앤서니 이든 · 클레멘트 애틀리
기타 윈스턴 처칠 내각 · 그리스 내전 · 다키스트 아워 ·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 더 크라운 · 블레넘 궁전 · 보수당 · 베버리지 보고서
파일:파란색 깃발.svg 보수주의 · 파일:노란색 깃발.svg 자유주의 }}}}}}}}}

{{{#!wiki style="margin:-10px"<tablebordercolor=#CC0000> 파일:스탈린_투명.png이오시프 스탈린
관련 문서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word-break: keep-all;"
생애 · 평가 · 기타 창작물
스탈린주의
<colbgcolor=#f5f5f5,#2d2f34><colcolor=#CC0000>사상공산주의 · 스탈린주의,(반서방 · 반파시즘 · 공산주의 · 마르크스주의 · 레닌주의 · 군국주의 · 대러시아 · 소비에트 국가주의 · 일국사회주의 · 전체주의),
사건 · 사고 러시아 혁명 · 러시아 내전 · 소비에트-폴란드 전쟁 · 대숙청 · 봉소전쟁 · 라스쿨라치바니예 · 독소 불가침 조약 · 제2차 세계 대전(독소전쟁) · 6.25 전쟁
조직 및 국가 소련 공산당 · 몽골 인민당 · 독일 통일사회당 · 폴란드 통일노동당 ·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 헝가리 사회노동당 · 루마니아 공산당 · 불가리아 공산당· 알바니아 노동당 · 중국공산당 · 조선로동당 · 코민테른 · 코민포름
관련 인물
스탈린 가문 야코프 주가슈빌리 · 바실리 스탈린
외국 정상 아돌프 히틀러 · 윈스턴 처칠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해리 S. 트루먼 · 마오쩌둥 · 장제스 · 김일성
공산당 블라디미르 레닌 · 클리멘트 보로실로프 · 레프 트로츠키 · 미하일 투하쳅스키 · 뱌체슬라프 몰로토프 · 니콜라이 부하린 · 바실리 블류헤르 · 니키타 흐루쇼프 ·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기타
기타 스탈린 선 · 명령 제227호 · 각국 정상들과의 관계 · 스탈린 전차 · 스탈린그라드
파일:낫과 망치.svg 공산주의 · 파일:소련 국기(1936-1955).svg 소련 · 파일:스탈린_투명.png 스탈린주의 }}}}}}}}}



[1] 한국 독립 문제를 거론한 카이로 회담과 며칠 차이가 안 난다. 한국사에서는 사실상 카이로 회담의 연장선으로 보는 듯.[2] 전혀 없지는 않은게 루스벨트 대통령이 한국을 40년 정도 준비기간(신탁통치)을 주고 독립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스탈린이 그것에 동의했다.[3] 전간기 이란은 팔레비 왕조 치하하에서 당시 태국이 그러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영국과 러시아 사이의 완충지대로서 정권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독소전이 시작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랜드리스 항로였던 무르만스크 일대가 노르웨이에서 출동한 독일 잠수함대에 의해 위협받자 새로운 루트가 요구되었고 이러한 필요에 의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소련과 영국이 이란을 침공, 점령해버린 것. 이러한 이유로 안전한 후방이었던 이란에서 이 회담이 개최되었고, 이란에 대해 전후 독립을 확약하는 내용을 포함시킨 것이다.[4] 미국은 종전 후에도 대영제국을 유지하려 했던 처칠의 허황된 꿈에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또한 종전 후 소련이 동유럽 일대에 자신의 세력권을 다져놓을 것에 대해서도 미국 정계 내 우려의 목소리가 컸다. 그런데 그게 실제로 일어났습니다[5] 뭐 거창하게 효율적인 배분이라고는 써놓았지만 말이 좋아 효율적인 배분이지 현실은 그냥 천조국의 지원을 조금이라도 더 뜯어내기 위한 소련과 영국 사이의 다툼이었다. 여기에 미국은 미국 나름대로 태평양 전쟁도 진행해야 했으니...[6] 소련의 부담을 경감시켜주기 위한 제2전선이 대표적인 예.[7] 아닌게 아니라 처칠은 뻔질나게 북아프리카와 미국 본토를 들락날락했다. 1941년부터 1943년까지 햇수로 삼년 사이에 루스벨트와의 정상회담을 위해 미국만도 무려 5번 갔으며 북아프리카도 2번이나 갔다. 여기에 전선시찰은 덤이다.[8] 실제로 전쟁 초기에는 서방과 소련 모두 '저 놈이 일방적으로 독일이랑 강화 맺고 나 물먹이려는거 아니야?'하는 의심을 상대방에 대하여 품기도 했었다.[9] 물론 소련군의 승세 뒤에는 막대한 랜드리스가 있었으며 미국이 일방적으로 랜드리스를 끊거나 축소하면 전세가 재역전될 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소련이 절대갑이었던 것은 아니다.[10] 이 회담 직후 터키는 루즈벨트와 처칠의 꼬드김을 받고 대독 전선에 참가할 것을 약속한다. 다만 준비가 안됐다는 이유로 질질 시간을 끌다가 독일의 패배가 확실해진 1945년 2월에야 독일에게 선전포고를 한다. 그것도 군사적 행동은 거의 전무한 그냥 상징적인 선전포고.[11] 스탈린은 심한 고소공포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멀리 이동하는 길에도 비행기 탑승을 극도로 피해왔다.[12]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아들인 엘리엇 루스벨트의 회고에 따르면 이 시점에서 이미 술에 잔뜩 취해 퇴장한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13] 미국과 이란은 현재 단교 상태이기 때문에 주이란 미국 대사는 존재하지 않으므로 루스벨트의 자리는 공석으로 남겨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