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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1 16:29:44

언싱커블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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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언싱커블 작전 지도.png
1945년 5월 10일의 연합군 군대 위치
1. 개요2. 목표3. 정치적 부담 4. 실행 시 예상 전개
4.1. 만일 소련이 파악했다면?
5. 소련의 간파와 대응6. 타당성7. 폐기8. 여담

1. 개요

Operation Unthinkable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 총리였던 윈스턴 처칠이 구상하고 영국군이 타당성을 연구했던 작전. 결과적으로 보면 영국판 러시아 원정, 바르바로사 작전이나 다름없다.

2. 목표

독일이 항복하자마자 바로 연합국이 독일과 손을 잡고 재무장시킨 후 공산국가인 소련을 중부유럽에서 몰아내고 더 나아가 소련을 멸망시키는 것까지 노리는 작전이었다.

소련에 호의적인 루스벨트와 달리 극렬한 반공주의자처칠은 내심 소련을 경계하고 있었던 만큼 나치 독일이 멸망하면 그 다음으로 소련이 서방의 가장 큰 적이 될 것이라고 예상해 적으로 발돋움하기 전에 미리 선수를 치는 작전을 구상하였는데 언싱커블 작전이 그 산물이다.

3. 정치적 부담

이 작전은 얼마 전까지 나치 독일을 상대로 같이 싸우던 동맹국을 선제공격하는 작전으로 사실상 정당한 명분 없이 새로운 전쟁을 시작하는 것이다. 그런데 수 년간의 전쟁으로 인해 전쟁에 대한 피로가 쌓일 대로 쌓인 서방의 국민과 군인들이 명분 없는 전쟁을 원했을 리가 만무하다. 여론이 반대하는 전쟁을 강행하는 것은 민주주의 국가인 미국영국 입장에서는 정권의 사활을 걸어야 하는 일이다. 이와 달리 소련 입장에서는 서방의 뒤통수로 시작되는 전쟁이기 때문에 2차 대조국전쟁으로 칭할 만한 명분이 주어지므로 앞선 독소전쟁에서 많은 피해를 입었더라도 국민과 군인들의 전쟁 수행 의지가 꺾이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미국 입장에서는 처칠의 제안에 찬동할 리가 없다는 점이 작전의 맹점이 된다. 아직 일본과 전쟁 중이던 미국으로서는 소련과 갑자기 사생결단 낼 이유를 특히 정치적인 부분에서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미국의 협조와 참여가 없다면 애초에 영국 혼자서 작전을 시작할 수 있을지조차 의심스럽다.

일례로 유럽 전선의 미군, 영국군은 독일의 항복을 받았기 때문에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났다고 여겼는데 아직 일본이 항복하지 않은 상황이었으므로 유럽 전선의 미군을 태평양으로 재배치하려고 하자 미군들 사이에서 "전쟁이 끝났는데 태평양에 왜 가야 하냐"는 반발이 나왔다. 게다가 아직 유럽전선이 끝나지도 않았던 1944년 후반에 민간의 반전 여론과 유권자들을 의식하던 정치인들의 반대 등으로 보충병이 제대로 오지 않았다. 엄연한 적국인 데다 특히 미국의 참전은 진주만 공습이 결정적인 계기였음에도 이러한 반응이었으니 동맹국이었던 소련과의 전쟁에 대한 반응은 어땠을지 쉽게 유추할 수 있다.

거기다 미국은 일본 본토 침공에 앞서 소련을 대일전에 함께 참전시키고자 편의를 제공하고 협조를 받는 상황이었다. 큰 인명손실을 예상한 만큼 어떻게든 미군이 받을 피해를 분산시키고 조금이라도 줄여야 했기 때문이었다. 국민들은 하루빨리 전쟁도 마무리되어 군인들이 집에 돌아오기만을 오매불망 기다리고 일본도 아직 정리 안 된 상황에서 갑자기 뜬금없이 대소전에 참전해서 피를 잔뜩 흘리자고 한다면 귓등으로도 안 들을 상황이다.

4. 실행 시 예상 전개

위 지도의 배치만 봐서는 소련군친소 공산주의 연합군(폴란드군+유고군+루마니아군+불가리아군)이 서부전선 연합군(미군+영국군+자유 프랑스군+캐나다군)을 압도하는 것 같다. 하지만 소련의 야전군은 영미의 군단급 규모를 가진 편제이므로 이를 감안하면 실제 병력차는 1:1.5 정도로 서방이 열세이기는 하나 그 차이가 심하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전쟁 발발 직후 소련군이 서방 연합군을 일방적으로 압도하는 모습은 나오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유럽 자체에 전개된 병력을 따지면 서방 연합국은 미군 280만여 명, 영국군 100만여 명으로 도합 380만여 명 정도이지만, 소련은 670만여 명[1]이 유럽에 배치되어 있었다. 전선으로 병력을 증원하기 위해서는 바다를 건너와야 하는 영미와 달리 소련군은 육로를 통해서 바로 증원하는 것이 가능하므로 중앙아시아, 극동 등 타 지역에 배치된 420만명 중 상당수도 즉각적으로 돌려질 공산이 크다. 그러므로 근소한 병력차도 잠시, 전쟁 초반 병력차는 1:2 이상으로 벌어질 것이다.[2]

이렇듯 육상에서는 서방이 열세이다. 그러나 해상과 공중에서는 정반대인데 해군은 말할 것도 없이 서방의 절대적인 우세이고, 공군도 압도적인 서방 공군의 우세이다.[3][4] 다만 당시 해공군의 기술적 한계[5], 대독전과 다른 대소전의 환경[6]을 고려하면 서방의 해공군 우세가 단기적인 지상전의 판세를 뒤집을 정도로 결정적인 요소는 되지 못하며 소련의 전쟁 수행 역량에도 큰 타격을 주지는 못할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 전략폭격은 그 효과가 미미하였기 때문이다.[7][8]

당대 나치 독일은 수백만의 병력과 장비들을 동원해 독소전을 벌였고, 연합군과 싸운 전력은 2선급에 불과하며 그마저도 50만에 불과했다. 그런데 천왕성 작전과 바그라티온으로 독일마저 박살낸 붉은 군대를 상대로 연합군이 우세를 취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종합해 보면 주전장이 지상이고 해공군은 보조적인 역할에 불과할 것이므로 지상군의 역할이 매우 중요한데 초반에 소련군이 지상군 전력에 있어 우월하므로 초반에는 소련이 극도로 우세하다. 단적으로 노르망디 이후 서부에 독일군 병력은 2선급 50만에 불과하며, 1선급을 포함한 수백만의 정예는 소련이랑 치고받고 있었다.

하지만 전쟁이 장기화될 경우 전체적인 산업 역량 면에서 서방이 우위이기 때문에 서방이 지상군 전력에서도 우위를 차지할 가능성이 있다.[9] 지상전에서의 역전은 서방의 우세한 해공군 전력이 발휘될 수 있는 범위를 넓힐 것이므로 장기화된다면 소련은 다시 우위를 잡을 기회가 없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므로 언싱커블 작전으로 인해 발발되는 전쟁에서 소련이 승리하기 위해서는 초반의 지상전에서 서방 연합군의 증원이 본국에서 도달하기 전에 빠르게 승부를 내는 것이 관건일 것이다. 반대로 서방은 본격적인 증원이 도달하기 전까지 소련군의 공세를 버텨내는 것이 관건일 것이다. 그러나 2차대전 이후 소련의 교리는 종심돌파-기동전을 중심으로 둔 걸 고려한다면 서방은 순식간에 유럽을 잃을 가능성이 높다.

서방이 장기적으로 우세를 차지하는 시나리오는 연합국의 주축인 미합중국과 대영제국이 분전해야지 가능하지만 한 가지 맹점이 존재한다.

미국은 수백만의 사상자를 감당할 정치적 역량이 없으며, 영국은 이미 바닥까지 여력을 쥐어짠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수백만 대군을 다시 유럽에 보내 죽으라고 한다면...

4.1. 만일 소련이 파악했다면?

확실히 밝혀진 건 없지만 소련은 언싱커블 작전에 대한 논의를 스파이망을 통해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10] 만일 실제로 파악했다면 작전 실행 전에 소련이 미리 대비를 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영미 연합군이 기습의 이점을 취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안 그래도 일본 때문에 빠져 있던 460만 명의 소련군이 아시아로 가다가 유럽으로 유턴할 가능성도 있으니 이 경우 언싱커블 작전을 했다간 역으로 소련이 나머지 독일은 물론 프랑스마저 적화시킬 가능성이 있다.

5. 소련의 간파와 대응

괴벨스는 최후의 순간까지도 서방 국가들이 소련에 대항하도록 선동하고, 그들이 유럽을 구하려면 지금이 행동을 취할 최적기임을 보여주려 했다. 괴벨스는 히틀러 생일 전날인 4월 19일 그가 전통적으로 행해 오던 라디오 연설에서, 대륙으로 밀려들어 오는 '볼셰비즘의 홍수'를 지극히 암담한 전망으로 표현하고, 히틀러를 문명 세계의 수호자로 칭송했다.
아돌프 히틀러가 없었다면 독일은 핀란드, 불가리아, 루마니아의 정부들과 유사한 정부에 의해 통치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미 오래전에 볼셰비즘에 희생되었을 것이다. 레닌은 언젠가 붉은 세계혁명의 길은 폴란드와 독일을 가로지른다고 말한 적이 있다. 영국과 미국이 아무리 미화하더라도 폴란드는 크렘린의 수중에 떨어졌다. 독일이 폴란드같이 되었거나 앞으로 그렇게 된다면, 우리 대륙의 나머지 지역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1945년 4월 19일 괴벨스의 라디오 연설
실제로 모스크바에서는 서양 열강들이 마지막 순간에 나치 독일과 개별적으로 휴전을 체결하거나, 심지어 반소동맹을 체결할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이러한 사태를 시사하는 수많은 징후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크렘린에서는 힘러와 베르나도테의 접촉, 이탈리아 전선에서 조속한 휴전을 위해 친위대 중장 카를 볼프와 미국 정보부장 앨런 덜레스 사이에 이루어진 협상(이를 통해 1945년 5월 2일 이탈리아 전선에서 휴전이 이루어졌다), 리벤트로프의 여러 시도를 인지하고 있었다. 소련의 코네프 원수는 회고록에서 "우리가 이와 관련한 수많은 정보들을 입수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갖가지 소문들이 우리 머리 속을 헤집고 다니는 상황에서 그 가능성들을 무시해버릴 권리는 없었다" 라고 적고 있다. 소련측이 얼마나 노심초사했는지는 빈의 전투 전황이 잘 보여준다. 스탈린은 4월 13일 오스트리아의 빈을 접수한 직후 진격을 중단하고 어떤 군사적 근거도 없이 계단식 참호를 깊이 파게 했다. "세계사 최대의 배반이 시작되고 있다. 그대들이 자본주의 국가들과 함께 우리에 맞서 계속 싸우기를 원치 않는다면 이리로 넘어오라"라는 내용의 소련측 확성기 선전이 독일 군 진지들 위로 울려 퍼졌다.
그래서 스탈린에게는 독일 수도를 신속히 점령하는 일이 결정적으로 중요했다.
랄프 게오르크 로이트, 괴벨스 대중 선동의 심리학, 896~898p

6. 타당성

예상 전개를 보면 서방의 해, 공군력 및 경제력이 확실히 우세하므로 걸어 볼 수도 있는 도박으로 보이지만 그렇게 결론내리는 것은 전술한 정치적 부담과 전쟁이 사회 전반에 끼치는 여파를 고려하지 않은 매우 근시안적인 시각이다.[11]

소련은 독소전쟁을 거치며 작전술 등 군사적 역량이 전쟁 전보다 비약적으로 향상되었으며 산업 역량도 서방에 비해 열세이기는 하여도 수년 단위의 장기간의 총력전을 뒷받침할 규모가 되었다. 즉, 더이상 러시아 제국과 같은 낙후된 국가가 아니게 되었다. 이는 서방이 승리하더라도 나치 독일과의 전쟁에서 입었던 출혈보다 훨씬 더한 출혈을 감내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막대한 출혈은 명분 없는 전쟁에 대한 서방 국민들의 반감에 기름을 부어 국가 내부의 혼란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그러므로 외면적인 몇 가지 우세점만 믿고 서방이 섣불리 소련과의 전쟁에 돌입했다면 최종적으로 소련을 꺾더라도 막대한 인적, 물적 손실과 내부 혼란에 직면하여 자신들도 국력에 큰 타격을 입었을 가능성이 높다.[12] 영미 연합국이 자신들의 부담을 덜기 위해 독일을 재무장시키는 선택을 하였다면 전후에 영미가 약화되었을 때 제대로 된 나치 청산 없이 재무장에 성공한 독일이 다시 복수의 칼을 가는 시나리오가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당장 68 운동이 일어나고 나치 시대 인물들이 퇴장하는 1970년대까지 서독의 주요 정계와 군대의 고위, 고급 인사들이 나치 시대의 고위 공무원이나 국방군 장교 출신이었다는 것, 그리고 여전히 친위대 출신 병사 및 장교들이 독일 정계의 비호를 받으며 무장친위대 상조협회에서 활동하며 세력을 유지했던 것을 감안한다면 제대로 된 청산이 없을 시 독일에서는 또다시 제3제국이 부활하거나 새로운 파시즘 독재 국가로 변해 대형 사고를 일으킬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런 상황이면 소련이 대일전에 참가하지도 않을 것이고 대일전에 투입될 미국과 영국의 물자와 병력이 유럽으로 돌려질 것이니 일본 제국도 수명을 연장하게 될 것이다.

만약 기습이 실패하고 소련군이 압도적인 물량으로 공세를 펼쳐 초반의 지상전에서 바로 서방 연합군이 궤멸당하는 사태가 발생한다면 승리는 커녕 굴욕적인 강화를 맺어 유럽은 유럽대로 소련에 내주고 내부는 준내전 상태에 빠지는 등의 최악의 결과가 발생할 것이다. 언싱커블 작전의 계획 중심은 영국과 처칠임을 감안해야 한다. 만약 언싱커블 작전이 이뤄진다고 해도 이는 영국과 미국의 합동 작전이 아니라 영국의 독단적인 작전으로 이뤄졌을 가능성이 높은 만큼 흔히 생각되는 미영 vs 소련이 아니라 영국 vs 소련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높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합동해서 나치 독일을 깨부수던 동맹국을 제멋대로 적으로 판단해 폭주한 영국을 미국이 가만히 둘 리가 없고 작게는 대영 지원을 끊어 버리거나 크게는 아예 미군이 소련군과 함께 영국군에게 총구를 돌리는 형태로 벌어질 확률이 높다. 때문에 위에서 말한 해공군의 압도적인 우세 역시 확실하지 않다.[13][14]

그러므로 이 작전은 성공하더라도 서방의 피로스의 승리로 끝날 가능성이 높으며 실패한다면 서방에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줄 것이 확실한 만큼 서방 수뇌부가 전쟁광이 아닌 이상 작전을 시행하지 않거나 시행했더라도 피해가 더 커지기 전에 중간에 소련과 적당히 강화하였을 것이다. 만약 강화하지 않고 끝까지 싸우는 방향으로 갈 경우 승리하든 패배하든 무모한 판단으로 오스만 제국을 무리하게 적으로 돌린 처칠의 또 다른 실패로 남았을 것이며 처칠을 모든 면에서 고립시켜서 클레멘트 애틀리의 뒤를 이어서 다시 수상이 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결과론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만약 이 작전이 실행되었을 경우 이는 냉전의 진행 과정에서 장기적으로 치명적인 불안요소로 이어졌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 상호확증파괴에 대한 공포가 전면적 핵전쟁에 의한 세계의 파멸을 겨우 막아주고 있던 냉전의 절정기에 동서 양 진영 수뇌부 사이의 신뢰는 이 균형의 유지를 위해 역설적이지만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내가 죽고 싶지 않은 만큼 상대 역시 죽고 싶지는 않을 것이고, 따라서 상대가 굳이 공멸의 길을 선택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최소한의 신뢰가 그 위험한 시대를 무사히 넘길 수 있게 한 핵심적인 기반 중 하나였다는 것이다[15]

그런데 만약 언싱커블 작전이 정말 실행되었다면? 아예 소련을 완전히, 또는 반파시키는 것에 실패하고 어설프게 강화만 맺고 끝난다면 장기적으로는 소련 그 자체를 심각한 위협요소로 만들게 된다. 방금 전까지의 동맹에게 제대로 뒤통수를 맞은 소련의 지도부들로써는 "자본주의의 돼지들은 절대 믿을 수 없다. 또 뒤통수를 맞기 전에 차라리 선제공격하는 것이 낫다"고 여길 근거가 생기게 되고, 이는 곧 열릴 상호 핵무장의 시대에 핵 선제공격을 감행할 유인이 되고도 남을 수 있다. 이에 더해 영미의 외교적 배신 행위에 영향을 받아 동서를 통틀어 유럽에서 서방 세력이 위축되고 친소 좌파의 영향력이 팽창하여 소련이 되려 외교적 이득을 볼 가능성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다.

결국 어떤 면에서 보면 처칠과 같은 인물이 언싱커블 작전과 같은 위험한 시도를 주장한 것은 일단 큰 맥락상으로는 '종전 이후 소련이 서방진영의 가장 큰 적이 될 것이다'라는 상황을 예측했지만 그 상황의 구체적인 흐름, 예를 들어 소련을 중심으로 한 동구진영이 세계를 양분할 규모로 성장할 것이라거나, 특히 핵무기라는 강력하고 위험한 무기에 의한 힘의 균형이 전후의 세계질서를 완전히 규정할 것임은 예측하지 못한 결과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이 작전의 타당성을 연구한 영국군 수뇌부도 극구 반대하였으며 영국 육군 원수였던 버나드 몽고메리는 "군사학의 제1법칙은 모스크바를 공격하지 않는 것이다."[16]라고 말하며 결사 반대했다.

7. 폐기

영국 단독으로 이 작전을 수행할 경우 승리 확률은 전무했으므로 작전 진행을 위해서는 반드시 미국의 협조가 있어야 했다. 하지만 당시 미국의 민간여론은 나치 독일의 패망 이후 전쟁의 신속하고 완전한 종결을 요구하고 있었다. 언싱커블 작전이 논의 중이던 시점에서 아직 극동의 대일전선이 진행 중이었다. 미국은 소련을 대일전에 가담시키기 위해 양해를 구하는 형편이었으니 소련과의 무력충돌을 감행할 입장이 전혀 아니었다.

영국 내부적으로도 상술했듯 군 수뇌부가 가능성을 부정적으로 보았으며 여론상으로도 영국 국민들이 종전 직후 처칠 대신 노동당클레멘트 애틀리를 총리로 선택했던 것을 고려하면 2차 대전 종전 직후 또 다른 전쟁을 수행하는 것이 지지받았을 것이라 기대하기도 어렵다. 전쟁으로 피폐하고 지쳐 있기는 영국도 마찬가지였다. 결과적으로 이 계획은 진지하게 논의되지 않고 폐기되었다.

8. 여담

소련 붕괴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1998년에 기밀 해제되어 세상에 공개되었다.

히틀러의 자살 이후 통치권을 이어받은 카를 되니츠는 서방과 소련의 충돌을 기대하며 시간을 질질 끌어 미국과 프랑스, 영국 등에 붙으려는 꼼수를 부리려고 했으나 아이젠하워에게 허튼 짓 하지 말고 항복에 서명하라는 소리를 듣고 결국 항복했다.[17]

냉전이 본격화된 1950년대6.25 전쟁으로 위기감을 느낀 나토 사령부에서 소련군이 나토에 선전포고를 했을 경우에 대비한 방어작전에 동일한 이름이 붙었다.

Hearts of Iron IV에서는 폴란드 침공이 역사대로 독소 양국에게 선전포고를 당할 경우 1939년에 언싱커블이 터지는 문제를 피하기 위해 소련은 폴란드에 선전포고를 하지 않고 대신 독일이 점령한 동부 폴란드를 소련이 받아가는 것으로 설정해놓았다. 반대로 소련이 폴란드를 항복시킨다면 독일이 서부 폴란드를 받아갈 수 있다. 다만 소련 AI가 후반에 가끔씩 급발진을 해서 연합국에 선전포고해 리버스 언싱커블이 터지기도 한다. 영국이 소련에 선전포고하는 상황은 별로 없는 편.


[1] 1945년 소련군 전체 병력 1,100만여명 중 예비 병력 43만여명, 극동 등 타 지역에 배치된 420만여 명을 제외한 병력[2] 나치 독일군 잔당과 자유 폴란드군, 자유 프랑스군 등을 긁어 모아 서방 연합군에 합세하도록 하더라도 이들 총병력이 100만여 명을 조금 넘는 정도인 데다 소련도 폴란드 동부군, 체코슬로바키아군 등 친소연합군을 동원할 것이 분명하므로 압도적인 열세를 극복하기에는 역부족이다.[3] 2차대전 당시 소련 공군독일 공군을 상대로 매우 고전하였고 후반에 가야 겨우 대등해지지만 서방 공군은 초기부터 대등하였고 후반에는 압도하였다.[4] 다만 2차대전 말기 소련 공군이 양적으로 상당한 규모를 회복했기 때문에 질적으로 서방 공군이 우세하더라도 단기간에 소련 공군을 제압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5] 동부전선에서 소련 육군이 독일에게 제공권을 장악당한 상태에서도 독일 육군을 분쇄하면서 진격한 것과 서부전선에서 독일 육군이 서방에게 제공권을 뺏기고 주력마저 동부전선에 묶여 있는 상황에서 서방 육군 상대로 대등한 교환비를 낸 것에서 볼 수 있듯 2차대전 당시 제공권 장악이 지상전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정도는 현대에 비하면 적다.[6] 독일의 주요 도시 및 공업지대 대부분은 영국 본토에서 발진하는 서방 공군의 전략 폭격 가능 범위 내에 있었으나 소련의 주요 도시 및 공업지대 대부분은 우랄 너머로 피신한 탓에 전략폭격기 운용범위 밖에 있다. 제해권이 영향을 주기에는 소련이 해양무역에 의존적인 나라가 아닌 데다 상륙작전을 벌이기에도 노르망디 작전 당시의 영국과 같은 가까운 교두보가 존재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소련에 상륙할 시 부동항 등을 먼저 점령햐여 할 텐데 그러면 차라리 튀르키예를 아군으로 끌어들이거나 일본 먼저 패고 블라디보스토크로 상륙해서 양면전선을 만들어야 한다.[7] 예를 들어 독소전쟁 내내 독일은 제공권을 잡고 막대한 양의 폭격을 퍼부었지만 소련의 산업역량은 지속적으로 증가했다.[8] 우월한 함대전력을 기반으로 레닌그라드 등 주요 거점에 상륙전을 시도해 볼 수도 있겠으나 상륙전이란 개념이 정립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시점이며 요새화된 도시에 상륙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걸 고려하면...[9] 소련은 독소전쟁으로 인해 3천만의 인명피해를 입었기 때문이다. 이와 별개로 미국은 영국과 프랑스와는 달리 피해가 미미한 점도 한몫한다. 두 곳 다 100개의 공장이 있을때 미국은 100개 다 돌아가지만 소련은 신규인력 보충 및 교육 때문에 3~50개는 못 돌아간다고 치면 생산량 수준에선 미국이 압도할 것이다.[10] 케임브리지 5인조의 사례를 볼 때 소련으로 새나갔을만한 명분과 개연성은 충분하다. 그 탓에 케임브리지 5인조 등을 통해서 슬쩍했다고 하면 대체역사물로 편입도 가능하다.[11] 무엇보다 전쟁을 하기 전에 정치가 민생과 자기네들의 이익 등을 고려하여 조정 후 실행한다는 점을 명시하자. 특히 민생을 무시하고 전쟁으로 간다면 (귀민의 의견을 무시한 격이랑 다를 바 없으니) 그건 정상적 민주주의 정부의 정치가 아니라 독재라는 걸 명심하자.[12] 아니라고 해도 전쟁에 지친 국민들이 파업과 시위를 하는 등 민란으로 나라가 망하거나 부랴부랴 종전 협정을 할 수도 있다.[13] 만약 미국이 소련의 편을 들어 영국을 적대했다면 영국은 매우 심각한 상황이 되었을 것이다. 잘 나가던 시절의 독일 공군과 해군의 통상파괴전도 영국에게는 부담이 되었던 판국에 그 독일 공군과 해군을 크게 압도하는 미국의 공군력과 해군력으로 영국을 압박했다면 영국은 꼼짝없이 당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을 것이다.[14] 게다가 영국 육군의 상황도 최악이 되었을 것이 분명했다. 미 육군이 중립을 선언하고 유럽에서 빠져나오거나 총구를 돌리면 전쟁 초중반 독일과 추축국의 공격으로 쑥대밭이 된 상황에서 피해 복구도 제대로 못 하고 이제는 그 독일군보다 훨씬 강해진 소련 육군을 상대해야 하는 입장이다. 독일군 전체의 80% 전력 및 기타 추축국들을 전부 받아치며 4년 넘게 메인 탱커 역할을 수행해낸 데다 이제는 베테랑 전차병들이 조종하는 수백~수천대의 T-34-85나 IS-2, IS-3 등이 동유럽 평원을 순식간에 주파한다면 수비가 가능할지도 의문이다.[15] 예를 들어 버트런드 러셀 같은 인물은 영미를 비롯한 서방진영의 대 동방(대 소련) 정책에 대해 '대외적으로는 소련의 권력자들이 극히 비이성적이고 신뢰할 수 없는 인물들이라고 선전하고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소련의 지도부가 이성적으로 조심스러운 판단을 통해 위기를 회피할 것이라는 전제 하에 입안됐다'고 평가한 바 있다.[16] 참고로 이 때 그 군사학의 제1법칙을 어긴 이도 있었다.나폴레옹은 130년 전 사람이니 패스[17] 히틀러의 자살 이전에도 나치 독일 일부 고위급들 사이에서 이런 아이디어가 오가긴 했다. 원래부터 공산주의를 고립시켰던 영국과 미국, 프랑스를 위시한 서방 세력이니 자연스럽게 서부전선의 미국, 영국에만 항복한 후에 이들의 지원 아래 동부전선의 소련과 계속 싸운다는 구상이었다. 문제는 이미 미국과 영국을 위시한 서방 연합군들은 아무리 공산주의가 싫어도 나치 독일을 더 시급한 적으로 판단했다는 것이다. 거기다 정작 나치는 연합국이 알아서 협상해 줄 거라는 망상만 펼쳤지 실제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물론 아예 안 한 건 아닌데 앞서 말했듯 히틀러가 자살한 후에나 시작했다. 이 때는 이미 독일은 베를린이 점령당하고 대부분의 병력이 증발해서 미영불에 붙어도 별 이득을 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