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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板門店도끼蠻行事件 Korean Axe Murder incident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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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일시 | 1976년 8월 18일 오전 10시 | |||
장소 | 경기도 파주군 진서면 선적리 산99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 |||
원인 | • 유엔군의 미루나무 벌목 시도 • 조선인민군의 벌목 반대 및 유엔군 살해 | |||
결과 | • 미국의 폴 버니언 작전 발동 • 북한에 대한 보복 • 미루나무 벌목 성공 | |||
영향 | • 조선인민군 초소 4개 파괴 • 공동경비구역 경비 강화[4] | |||
인명 피해 | 사망 | 2명 (유엔군 2명[5]) | ||
부상 | 8명 (유엔군, 한국군 각 4명) | |||
영향 국가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북한| ]][[틀:국기| ]][[틀:국기|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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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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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당시 사진[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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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당시 영상[7] (35분 56초 ~ 36분 28초) |
2. 사건 경위
2.1. 실제 경위
1976년 당시 공동경비구역 지도 |
이에 8월 6일 한국인 노무자 4명과 유엔군 병사 4명이 미루나무 절단을 시도했는데, 북한군이 다가와 이의를 제기하면서 돌아가라며 작업을 중단시키자 유엔군은 일단 후퇴하였다. 이후 경비대는 8월 18일 절단이 아닌 시야 확보를 위한 가지치기만 하는 것으로 작업을 결정하고 오전 10시 30분에 한국인 노무자 5명을 동원하여 가지치기 작업에 들어갔으며, 경비대 중대장 아서 보니파스 대위, 소대장 마크 배럿 중위 등 유엔군 장교 2명 및 병사 4명, 국군 장교 1명 및 병사 4명 등 총 11명의 병사들이 작업 감독에 나섰다. 그러자 북한군 군관 2명과 하전사 8명이 나타나 재차 항의했으나 유엔군은 베는 것이 아니라 가지치기 작업을 하는 중이라고 설명했고, 이에 현장에 있던 북한군도 상부에 연락을 한 뒤 답이 오자 가지치기 정도면 OK라고 수긍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가지치기 작업은 순조로웠고 북한군은 오히려 한국인 노무자들에게 가지를 잘 치는 법에 대해 조언하기도 할 정도로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조선인민군 박철 중위 |
그만두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
고 재차 위협을 가했으나 보니파스 대위는 무시했다.이윽고 박철 중위가 소매를 걷고 차고 있던 손목시계를 호주머니에 넣으며 신호를 보내자 북한군들은 일제히 소매를 걷었고, 박철 중위가 "죽여!"라고 소리지르자 북한군들은 트럭에 싣고 온 둔기와 한국인 노무자들이 사용하던 도끼를 이용해 기습적으로 집단 폭행을 가했다. 보니파스 대위가 북한군의 구타에 가장 먼저 쓰러졌고, 북한군 5명이 쓰러진 그에게 달려들어 도끼로 머리를 찍어서 무참하게 살해했다. 마크 배럿 중위는 구타당한 채 방치되었으며, 발견 당시에는 살아있었지만 이송 중 사망하였다. 나머지 병사들도 유엔군 병사 1명을 제외한 전원이 부상을 당했다.
아서 조지 보니파스 Arthur George Bonifas 소령[사후추서](1943년 4월 22일생) | 마크 톰 배럿 Mark Thomas Barret 대위[사후추서](1951년 6월 9일생) |
박병엽 전 조선로동당 대외조사부 부부장[12]의 증언록에 의하면 이 사건은 당시 북한 주석인 김일성이 아니라 후계자 수업을 듣던 김정일의 지시였다고 한다. 당시 북한은 김정일이 후계 체제를 구축해 나가는 과정이었기 때문에 김정일은 전국에서 일어나는 모든 상황을 통제하고 있었다. 김정일은 당시 유엔군이 판문점에서 미루나무 가지치기를 한다는 보고를 받고 "조선 사람의 본때를 보여주라. 단, 남조선 노무자들은 건드리거나 총을 쓰지 말고 미제 놈들에게 본때를 보여줘라."라고 지시했다고 한다.[13]
2.2. 북한의 거짓 주장
북한은 이 사건의 경위가 "미군 측이 나무를 자르는 것을 보고 (북한 측) 경비병들이 제지하러 나섰는데, 갑자기 미군이 자신들에게 도끼를 던졌다"고 주장했다. 미군 장교를 살해한 경위에 대해서는 "우리 하전사들이 날아오는 도끼를 손으로 잡아 미군들에게 다시 던졌다."라는 그야말로 무협지나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정신줄 놓은 개소리를 공식 발표로 내놓았다. 심지어 이런 말도 안 되는 변명을 하고서는 뻔뻔하게 미군 쪽에게 먼저 도발했다며 미국의 사죄를 요구했다. 타국의 군인을 살해한 것은 명백한 정전협정 위반 행위임에도 사과는 전혀 없고 경비장교 회의 선에서 적반하장으로 미국의 사과를 받는 식으로 덮으려고 했다.이러한 북한의 말 같지도 않은 행위에 대하여 전 세계의 공산주의 국가들[14], 심지어 소련의 위성국들이나 다름없던 동유럽 사회주의 공화국들조차도 '북한 수정주의자 놈들이 드디어 미친 게 틀림없다'며 어처구니 없어 했고 설령 미군이 진짜로 도발했다고 쳐도 비무장 상태인 미군 장교를 도끼로 찍어 죽이는 미친 놈들이 어딨냐고 조선로동당 측에 상황 설명을 제대로 하라며 마구 닦달을 해댔다.[15]
하지만 북한은 여기에 대해 당시 북한 방문이 예정되어 있던 사회주의 국가 대표단의 방북을 일방적으로 취소하는 것으로 대답했고 쿠바 공산당 대표단에서 방북 취소를 거부하고 입국을 시도하자 상륙도 불허하고 비행기째로 되돌려 보내는 똥배짱을 보여서 사회주의권에서도 북한에 대한 어그로와 분노 게이지는 엄청나게 상승했다. 결국 아들 김정일이 저지른 문제로 아버지인 김일성이 직접 사건 이후에 방문했던 동독 군사대표단장 하인츠 호프만[16]에게 비록 미제와 남조선 괴뢰의 선제 도발이라는 전제를 여전히 고수했으나 소란 떨어서 미안하다고 사과까지 해야 했다.[17] 이렇게 북한의 거대한 어그로로 인해 전쟁이 일어날 뻔한 일촉즉발에 가까운 상황이 되었을 때도 소련과 중국도 북한을 지원하기를 꺼리거나 '니들이 알아서 해결해라'라는 식으로 버릴 준비로 가득했다.[18] 왜냐하면 북한이 유엔군 관할지에 있는 미루나무 벌목을 핑계로 먼저 비무장 미국 군인을 공격해 살해한 일에 참전할 명분이 없었기 때문이다.
우린 이 사건이 우리 사회주의 우호국들을 우려하게 했던 것에 대해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미국인들이 이 도발을 책동했으니만큼 이건 우리의 잘못이 아니었습니다. 이제 모든 것이 다 진정되었습니다. 포드는 재선되기 위해서 이 도발을 책동한 것입니다. 미국인들은 항상 도발을 책동합니다. 미국 대통령들은 모두 그랬습니다. 1968년에는 존슨이 푸에블로 사건을 책동했습니다. 닉슨은 EC-121 간첩기 사건을 책동했습니다. 이젠 포드가 1976년에 판문점에서 작은 나무 하나를 가지고 온 세상을 뒤흔들려 하는 것입니다.
1976년 10월 2일, 인민무력부장 오진우의 초청으로 방북한 동독 군사대표단장인 국방장관 하인츠 호프만에게 김일성이 한 발언
1976년 10월 2일, 인민무력부장 오진우의 초청으로 방북한 동독 군사대표단장인 국방장관 하인츠 호프만에게 김일성이 한 발언
3. 사건 이후
3.1. 본격적인 준전시 태세
이 사건에서 살해당한 미군 장교는 미합중국 육군의 장교임과 동시에 유엔군사령부 소속의 장교들이었다. 이것의 의미는 단순히 미국과 북한의 문제를 넘어 이 사건이 유엔에 무력 도발을 한 국제적인 대도발 사건이 되었다는 의미다. 정당한 이유가 있었더라도 문제가 되었을 사건이 말도 안 되는 명분으로 말도 안 되는 과정을 거쳐서 터졌으니 사건이 유하게 해결될 리 없었다.당연히 이 사태의 최대 피해자인 미국은 매우 분노했고 아예 9.11 테러 당시 미국 행정부처럼 북한을 지도상에서 지워버리리라 마음먹었다. 사병도 아닌 장교를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명분 없이 참혹하게 살해했고, 미국은 이를 좌시할 생각이 없었다. 당시 유엔군사령관 리처드 G. 스틸웰 육군 대장은 휴가차 일본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사건의 보고가 자신에게 올라오자마자 바로 전투기 후방석에 탑승하여 급히 대한민국으로 입국했다. 한국에 입국한 스틸웰 장군은 즉시 회의를 소집한 뒤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 데프콘 3[19]를 발동시키자는 합의를 내렸다.
한국에 주둔 중인 유엔군과 미군뿐만 아니라 보고를 받은 미국 본국의 중앙정부도 좌시하지 않고 강경하게 대처하기로 결의해 이례적으로 지상 전력으로 육군 약 12,000명과 해병대 1,800명을 증파했고 해군 제7함대와 공군 B-52 전략 폭격기 3대까지 추가 배치될 정도로 당시 미국 정계는 좌우나 정당 및 파벌을 가리지 않고 '더 이상 아시아의 공산주의자들에게 미국의 위신이 깎여서는 안 된다'는 확고한 인식이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베트남 전쟁에서 패배하면서 이전까지 전쟁에서 절대 패하지 않는다는 미군의 자존심이 바닥을 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통령 경선을 준비하고 있던 제럴드 포드 미국 대통령은 가뜩이나 공산주의자들에게 약하게 군다는 비판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비판을 불식시킬 필요가 있었다. 인도적인 입장을 떠나 정치적인 측면에서도 미국이 빨갱이들에게 언제든 본때를 보여줄 준비가 되었다는 걸 증명하기엔 최적의 때였다는 것이다.
포드는 즉각 북한을 비판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미국 시간으로 8월 18일 오후 3시 헨리 키신저 국무장관의 주재로 도널드 럼스펠드 국방장관의 대리인 국방차관 윌리엄 클레멘츠, 해군참모총장인 미 해군 대장 제임스 핼러웨이 제독, 대통령 안보 부보좌관 윌리엄 하이랜드 등이 참여한 워싱턴 특별대책단 회의가 소집되었다. 회의에서 키신저는 현장 사진을 보고 극도로 분노했고 사진에서 북한군의 시체가 보이지 않는다며 북한군을 권총으로 쏴죽였어야 했다고 분통을 터트렸다. CIA에서는 이 도발이 계획된 것이 틀림없다고 주장했고 이에 참석자들도 동의했다. 키신저는 북한이 미국인 2명을 때려죽인 대가를 반드시 치러야 할 것이라고 소리쳤고 회의장을 나오면서 "빨갱이들의 피를 반드시 보고야 말겠다"고 말하는 등 미국의 분노가 극에 달했다는 걸 보여주었다.
8월 19일 미국은 군사정전위원회 개최를 요구했으나 북한 측은 여전히 경비장교회의를 운운하며 미국의 사과를 받는 적반하장인 태도로 사건을 덮으려고 했다. 결국 군사정전위원회와 경비장교회의가 동시에 열렸다. 이 자리에서 유엔군은 김일성에게 보내는 유엔군 사령관의 메시지를 통해 군사정전위원회 본회의에 당장 나오라는 강경한 최후 통보와 사과 및 배상을 요구했으나 북한은 아직도 사태 파악을 못 했는지 여전히 억지 주장을 계속하며 되려 사건 가담 주모자들을 처벌하라는 뻔뻔하기 그지없는 태도를 유지했다.
당연히 협상은 결렬되었고 스틸웰은 그날 바로 워싱턴 국가안보회의에 데프콘 3를 발동하겠다고 보고했다. 마침내 한국에서 처음으로 데프콘 3가 발령되었다. 이로 인해 6.25 전쟁 이후 최초로 유엔군과 대한민국 국군이 준전시 체제에 돌입했으며 북한군도 이에 맞서 북풍 1호(준전시 체제)를 발동해 전군 완전 무장을 지시했다.
3.2. 폴 버니언 작전
당시 작전 정보를 담은 미공군 문서이 사건으로 미&남 vs 북한 구도로 대치하던 가운데 폴 버니언[20] 작전(Operation Paul Bunyan)이 세워졌는데 미군과 한국 제1공수여단 지원병력 감시 하에 미루나무를 벌목한다는 작전이었다.
1976년 8월 21일, 마침내 미국 본토와 대한민국의 주변국에 주둔한 미군 기지에서 병력을 편성했는데 단순히 벌목을 위한 병력이라고 보기에는 힘든 규모였다.
- 함재기 65대를 탑재한 미 해군 제7함대[22], 미드웨이급 항공모함과 호위함 5척이 서해안에 대기.
- 165mm M135 파괴포를 갖춘 미군 M728 전투공병전차가 자유의 다리 조준, 그리고 미 육군 공병부대가 임진강에 도하 준비를 위해 다리 설치.
이런 어마어마한 규모는 전술했듯이 북한에 대한 전면적 공격보다는 만약 북한이 미루나무 벌목 중 총격을 가하면 휴전선의 고질적인 문제였던 서해안 부분 정리, 개성 및 연백평야로의 진격, 옛 38선 이남 대한민국 영토의 수복 등을 고려한 증원 병력이었다. 공산권 측에 명분을 주지 않기 위해 북한이 추가 도발 없이 침묵한다면 무력 시위로 끝낼 계획이었지만 유사시에 북한이 추가 도발을 하면 바로 반격할 생각이었다. 일단 미군의 계획은 작전 시 교전 사태가 발생하면 포병 부대는 개성의 인민군 육군 막사에 포격을 개시해 개성 위쪽 시변까지 포격해서 인민군 육군 포병 전력을 싸그리 없앤다는 것이었으며 북한 육군 전차 부대의 남하 시 전술핵 사용 같은 구체적인 전시 상황 계획까지 완벽하게 수립했다.
미 해군은 동아시아를 작전 지역으로 삼고 있는 제7함대의 가용 전력을 총동원하고 미 공군 역시 한국과 일본 주둔 병력 외에도 한반도를 작전 지역으로 삼고 있는 괌의 폭격기[24]를 동원했으며 미 육군도 12,000명의 증파 요청을 감안하면 최소 사단 단위의 병력의 증파를 계획하는 등 여러모로 미국도 당시 한반도에 동원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병력을 동원했다.
이 작전이 시행되기 전 군사분계선 부근에 데프콘 2[25]가 발령되었다.
당시 미드웨이급 항공모함에서 복무했던 당시 조종사의 경험담에 따르면 함재기에 MK.20 집속탄을 비롯한 지상 공격용 무장들이 탑재되었고, 유사시 북한 지상군들을 폭격할 계획이었다고 한다. 북한 측도 초계비행하는 미해군 함재기들에게 S-75 지대공 미사일의 레이더를 작동시키며 민감하게 반응했으며, 소련 해군의 군함까지 찾아와 사격 통제 레이더를 조준하며 도발하는 등 그야말로 일촉즉발이었다고 한다.#
판문점의 미루나무를 벌목하는 미육군 공병대 |
육군 항공대의 AH-1 공격헬기 7대와 다목적 헬리콥터 20대의 직접 엄호 및 도끼와 권총으로 무장한 30여 명의 미군 공동경비부대들이 돌아오지 않는 다리 같은 판문점 주변의 주요 시설들을 안전하게 확보했고 미 육군 공병 8명으로 이루어진 2개 팀이 전기톱으로 미루나무를 자르는 데 성공했다. 미군은 나무 한 그루를 쉽게 자를 수 있음에도 40분 동안 의도적으로 느리게 작업해서 북한에게 제대로 공포감을 심어주려고 했다. 북한 측은 맞대응으로 판문점에 자동소총과 기관총으로 무장한 200여 명의 병력을 배치했지만 미군에게 직접 대응할 엄두는 못 내고 있었다. 이에 따라 보복은 하지 않기로 결정하여 작전은 그대로 종결되었다.
3.3. 한국의 대응
당장 내 철모와 군화를 가져와라. 미친 개에는 몽둥이가 약이다.
박정희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를 통해 대한민국 육군 특수전사령부 제1공수특전여단 대원들로 이루어진 64명의 결사대[26]를 조직했다. 1공수특전여단의 지역대장이었던 김종헌 소령이 이 결사대의 지휘관을 맡았다. 이 결사대가 해당 작전 지역에 투입되어 미루나무를 절단하는 미 육군 공병들을 엄호하고 육군 제1보병사단 수색대는 그 일대에 매복하여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는 독수리 작전이라는 보복작전이 수행됐다.박정희
특전사 결사대원들은 카투사로 위장하고 권총과 수류탄은 전투복 속에 숨기고 크레모아, M79 유탄발사기 등은 삽, 곡괭이 등 작업도구 밑에 감추는 식으로 트럭에 탑승하여 공동경비구역에 들어가 도끼와 곡괭이자루를 가지고 북한군 초소 4개를 파괴하였다.[27] 대원들이 초소에 접근해 손에 도끼와 소총을 들고 활보하며[28] 초소를 난장판으로 만들자 북한군은 모조리 도망쳤다. 간간이 나타난 북한군은 독이 오른 특전사 대원들이[29] 위협을 하며 욕을 퍼붓자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당시 매복 작전을 수행 중이던 1사단 수색대원은 훗날 인터뷰에서 이러다 정말 일이 나는 것이 아닌가 할 정도로 살벌한 분위기였다고 했다.
특전사 결사대는 북한군이 특전사의 공격에 대해 무력 대응을 할 경우엔 북한군들을 과감히 사살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다만 '먼저 북한군을 사살하지는 말라'는 명령이 내려져 있었다. 즉, 북한군을 구타하고 깽판을 놓다가 북한군이 발포하면 바로 응사해서 사살하도록 되어 있었다. 따라서 북한군에게 선제공격을 당하는 대원들은 전사하게 될 것이므로 그야말로 죽음을 각오한 결사조로서의 투입이었다. 실제로 출동 직전에 유서와 손톱 등을 남겼다는 말도 있다. 그러나 북한군이 처음부터 저항 없이 무조건 도망가기만 해서 교전은 발생하지 않았다.
실제로 작전에 투입된 1공수 대원의 증언에 따르면 유서 작성, 손톱과 머리카락을 잘라서 남겼고 출동 전까지 외출 외박이 금지된 채 영내 대기를 하였다. 초소를 부술 때 북한군 초소 병력들은 도주했지만 곧이어 소총으로 무장한 병력들이 분계선을 따라 도열하여 대치하고 있었다. 하지만 발포 등의 공격은 없었고 모든 초소를 파괴하는 걸 구경만 하였다. 특전사 대원의 증언에 따르면 무표정한 북한군 무장 군인들의 표정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고 한다. 초소를 파괴하는 동안 나머지 특전사 대원들도 소총으로 무장하고 북한군 출동 병력과 서로 마주보고 있었다.[30]
미국은 어디까지나 나무를 벌목하기만 하고 북한의 반응을 볼 계획이었기 때문에 실제 전쟁을 수행할 전력을 동원했어도 무력 시위에만 그쳤으므로 한국 육군 특전사 대원들이 갑자기 북한 초소를 공격하는 급발진에 대경실색했다.[31] 미루나무를 자른 후에 특전사 대원들이 북한군에 욕설을 퍼붓고 인민군의 초소로 달려나가자 엄청 당황했다고 한다.[32] 미군이 전쟁 발발을 우려해 결사대를 제지하자 특전사 대원들은 북측 도로 차단기를 제거하기 위한 진격에 불응하는 미 육군 트럭 운전병을 권총으로 위협하기도 했다.[33]
3.4. 북한의 대응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동지께서, 인민군 전체 부대들과 로농적위대, 붉은 청년근위대 전체 대원들에게 전투태세에 들어갈 것에 대한 명령을 하달하였다.
1976년 8월 20일, 조선중앙통신 라디오 발표.
북한 입장에서는 미국이 이렇게까지 강하게 나설 줄은 상상도 못했다. 미국은 자국민이 외국인에 의해 살해당하는 것에 극도로 민감하게 반응하고[34][35], 이들에 대한 처벌로 전쟁도 불사하는 국가다.1976년 8월 20일, 조선중앙통신 라디오 발표.
애초에 미국 내부의 여론은 징병제를 실시하던 시절에도 군인에게 매우 우호적이며, 특히나 미국인들에게 악명 높은 IRS의 눈 밖에 나거나 살인마, 마약사범처럼 여론을 등질 범죄자가 아닌 엘리트 중의 엘리트로 예우받는 현역 장교를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죽였으니 당연히 뒤집어질 것을 북한이 예측하지 못했다는 건 그만큼 미국에 대해 제대로 파악도 못했다는 소리가 된다. 이는 자국민 보호라는 매우 당연한 수칙도 제대로 지키지 못할 경우 초강대국이라는 미국의 위상에 먹칠을 할 수 있다는 인식도 한몫한다.[36] 애초에 미국의 저런 태도가 한두 번 있는 일도 아니었다. 어찌저찌 넘어간 스티븐스 저격사건을 제외하면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원인 중 하나인 루시타니아호 침몰 사건, 제2차 세계 대전 참전의 직접적 원인인 진주만 공습, 베트남 전쟁의 발발 원인으로 삼았던 통킹만 사건, 판문점 사태 이후긴 하지만 아프가니스탄-이라크 전쟁을 비롯한 테러와의 전쟁의 직간접적 원인이던 9.11 테러 등 미국의 전쟁 발생 중 다수는 자국민의 희생이었다.
그나마 미국 측이 나무를 자르는 동안, 심지어 한국 특전사 대원들이 초소에 침입해 불을 지르고 온갖 난장판을 만들고 있을 때도 북한군은 대응은커녕 초소를 비우고 도망쳤다. 김정일 주도설을 제기했던 신경완의 증언에 의하면 김정일도 미군을 두들겨 패라고만 했지 설마 미군 장교를 죽일 정도로 박철 중위가 막나갈 것을 예상하지 못한 상태[37]에서 미군 장교를 둘이나 살해했다는 보고가 상부에 올라가자 김정일을 포함한 수뇌부에서도 난리가 났다고 한다.
김정일은 일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감지해 초소에서 즉각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미군 장교가 북한군에게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기절초풍한 김일성은 노발대발하면서 김정일에게 이런 짓을 왜 했느냐고 크게 질책했다. 이에 김정일은 "미군의 의식적인 도발이다. 저들이 전쟁을 일으키려고 도발했다."라는 뻔뻔한 거짓 보고를 올렸다. 당 비서들은 차마 김정일이 시켰다는 말은 못했고 인민무력부 놈들이 미쳐서 그랬다고 보고했고, 김일성은 이에 극대노하여 인민무력부장 최현을 불러서 쌍욕을 있는 대로 퍼부었고[38] 김정일의 죄를 뒤집어쓴 최현은 역시나 열받아서 작전국장을 불러서 조지고 책벌했다고 한다.
상기된 대로 미국의 보복 작전이 준비되자 김일성은 "사람이 죽었으니 유감을 표명하라. 푸에블로호 사건 때도 미국이 사과를 했지 않았는가?"라는 면피성 지시를 내렸다. 다만 북한은 이 사건을 좀 더 정치적으로 써먹고 싶었는지 몇 시간 뒤에 스리랑카 콜롬보에서 진행 중이었던 비동맹회의에서 "이 사건은 미국 놈들 탓이다."라며 한미 연합군을 질타하는 결의안을 제안했고 사실이 알려지기 전이라 몰랐던 참여 국가들의 찬성 하에 결국 승인되었다. 하지만 유고슬라비아의 강력한 반대로 인하여 남북 문제 자체가 주요 의제로 채택되지 않았으며, 자이르와 가봉 등은 북한의 제안에 매우 강한 반감을 드러내면서 콜롬보 회의는 북한의 외교적 참사로 끝났고 북한 측은 비동맹 국가들이 가장 믿을 수 없는 놈들이라고 길길이 날뛰었다.
상술했듯이 기자들이 찍은 사진들이 신문에 실리자마자 북한의 주장과는 달리 가해자는 북한, 피해자는 미국이라는 사실이 명백해졌다. 북한은 긴급하게 수석대표회의를 요청했고 결국 김일성이 직접 유감 성명을 표했다. 미국은 처음에 유감 성명은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면서 거부했다가 폴 버니언 작전이 끝난 시점이라 하루 지나서 결국 수락했다.[39] 북한은 미국이 쳐들어올까 봐 쫄아서 1년 동안이나 준전시 체제를 유지했고, 미군은 일단 폴 버니언 작전 병력들을 철수시켰지만 이후 남북한의 군사력 증강 대결이 일어났다.
미군이 동원한 전력인 고작 12,000명의 지상군 증파만으로는 북한 전역을 점령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북한의 주요 시설을 공중 폭격으로 손보고 휴전선이 조금 더 북쪽으로 올라갈 저력은 됐다. 이에 북한은 총동원령을 내려 대학생들을 군에 동원했으며 노농적위대, 교도대 등의 예비군들도 모조리 동원했다. 심지어 김평일은 이 사건 직후 김일성종합대학 학생들을 불러 모아놓은 자리에서 전 학생들의 군 입대를 독려했고, 자신이 제일 먼저 그 자리에서 인민군 육군에 입대함으로써 군부의 절대적 신임을 얻는 계기를 만들었다.
제대한 장교들도 60세 미만은 전부 다 군으로 복귀했고 생산 시설들을 후방에 옮길 준비가 착수되었다. 평양과 황해도, 강원도의 최전방지대 주민들의 소개 작업이 시작되었는데, 노약자와 성분 불량 계층을 함경도로 이주시키는 작업이었다. 이 때문에 평양을 비롯한 해당 지역은 완전히 난리통이었다고 한다.[40] 8~11월까지 석 달 동안은 모든 군인들이 군장을 싸놓고 잠을 잤다고 하며, 노동자들도 직장에서 나와 전투 위치로 배치되었고 대학생들도 건장한 사람들은 죄다 인민군에 끌려가서 사실상 휴학 상태에 들어갔다. 너무 급한 소개 작업 때문에 식량 문제가 심각했고 자살하는 사람들도 속출했다고 한다. 당시 평양은 등화관제에 들어가 밤만 되면 어둑어둑했으며 시민들 역시 사이렌이 울리면 지정된 지하벙커로 들어가 힘겹게 살아가야 했을 정도였다.
이한영의 저서 <대동강 로열패밀리 서울 잠행 14년>에 따르면 이 사건 발생 당시 미국의 강경 대응으로 김부자 일가들이 대거 모스크바로 피신했는데, 김정일의 장남 김정남, 누이 김경희 부부, 이복동생 김영일, 김경진 등 이른바 "로열 패밀리"의 여자와 자식들이 막대한 돈을 싸들고 모스크바로 가 두 달 가량 고급 호텔에 묵으면서 지냈다고 한다.
4. 결과
북한이 혼자 무슨 난리를 치든 미국은 나무가 벌목되는 동안 북한이 총알 한 발이라도 도발을 가하면 대대적인 반격을 가할 생각이었기 때문에[41] 사고 친 북한이 현명하게도(?) 침묵하자 결국 미루나무를 자르는 선에서 작전을 종결짓고 사태는 마무리되었다.판문점 경비초소에는 사건 이전과 같은 애매한 경계 대신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확실한 경계가 세워졌다. 경계 밖에 있던 양측 초소는 모두 철거되고 현재와 같은 상태가 되었다. 벌목된 미루나무의 일부는 JSA 안보견학관에 전시하여 방문객들에게 공개되고 있으며 미루나무는 완전히 사라지고 그 자리에 미루나무 둥치 둘레만큼의 둥근 시멘트 위에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비가 세워졌다. 판문점 관람 코스에 버스를 타고 추모비 앞을 지나는 것이 포함되어 있으며 버스 안에서 이 추모비를 볼 수 있다.
김일성은 미군의 대응 작전이 종료되었음에도 미국의 폭격을 진지하게 두려워하고 있었기 때문에 1년 뒤인 1977년까지도 준전시태세를 유지했다. 당연히 북한의 경제는 막대한 군사비 지출로 큰 타격을 입었고 병사들에게 지급할 식량도 부족해질 정도였으며 80년대의 경제 정책 실패로 이어졌고 급속도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이 사건 이전까지만 해도 양측 군인들 간에 개인적인 안부를 물을 정도였던 판문점은 지금처럼 완전히 갈라진 경색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42]
김일성종합대학의 질이 본격적으로 추락하던 시점이기도 했다. 황장엽의 증언에 의하면 1970년대만 해도 김일성대학 교수진의 절반은 남한에서 월북한 이들이었고 이들의 학문적 역량도 뛰어났다고 하지만 김정일이 전쟁 위기를 빌미로 남한 출신 교수진들을 몰아냈고 이 때를 기점으로 김일성종합대학의 학문적 수준이 악화되었다.
그나마 이 사건은 북한이 자신의 주제를 톡톡히 알게 해 주는 계기가 되었다. 북한은 이 사건 이후 신문이나 방송, 성명서, 대외 선전매체 등을 통해 '미국에 '정의의 핵대전'을 일으켜 미국을 지구에서 지워버리고 워싱턴 D.C.를 함락하겠다'는 등의 황당한 주장들로 정신승리를 해대며 미 제국주의자를 맹비난하고 있지만 말로만 미국을 도발할 뿐이지 미국을 향해 직접적인 무력도발을 하는 경우는 전혀 없게 되었다. 미국을 건드렸다가 진짜로 지도에서 나라가 지워질 뻔했던 경험은 북한이 자기 주제를 깨닫기에 충분했다. 시간이 흘러 미국 본토가 진짜로 공격당한 9.11 테러 때는 환영 성명이나 미국을 향한 비난 성명이 아니라 국제 테러리즘을 맹비난하면서 자기들이 주체가 아님을 보여주며 눈치를 살폈고[43] 보스턴 마라톤 폭탄 테러 때도 테러를 비난하면서 자신들의 무고함을 드러냈다.
북한에게 이 사건으로 인한 트라우마가 얼마나 큰지 한 예시만 보여준다면 해당 사건으로부터 44년이나 지난 2020년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 사건 이후 북한의 대남 도발 징후가 느껴지자 미군이 즉시 니미츠급 항공모함 두 척을 태평양[44]에 배치했는데 참 공교롭게도 김정은은 이를 보자마자 '칼을 빼들면 장검을 휘두르고 총을 내대면 대포를 내대기'는 커녕 조선로동당 중앙군사위원회까지 소집하며 대놓고 대남 도발을 보류한다고 언급하면서 꽁무니를 뺀 적이 있을 정도다. 당시 로동신문 기사에서도 이를 '조성된 최근정세를 평가하고' 내린 결정이라고 명약관화하게 언급했다. 원문
이렇듯 북한도 대외적으로는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린 것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대내적으로는 전혀 정신을 차리지 않았다. 북한 내부에서는 이 사건이 단순히 '판문점사건'이라고 축소되어 알려진 것은 물론 인민군의 영웅적 행위로 칭송되며 관련자들이 영웅 대접을 받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자신들의 잘못에 대해 사과하기는 커녕 오히려 2015년 4월 27일 동태관 정론 <태양은 조선에 있다>에서 대놓고 북한이 미국 본토에서 '정의의 핵대전'을 벌여 워싱턴 D.C.를 함락하고 지구에서 미국을 없애 버리겠다는 정신나간 소리를 하기도 했다.[45] #
5. 매체에서
- 한국에는 이 사건을 다룬 두 편의 영화가 있는데 하나는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판문점 미루나무 작전>이라는 영화이다. 두 편 다 이낙훈과 태현실이 주연을 맡았다.
- 북한에서는 1989년 영화 <내가 설 자리>를 만들었는데 홍길동으로 유명한 미남배우 리영호가 주인공 홍철 역을 맡았다. 이 사건에 분격하여[47] 김일성종합대학을 다니던 중 해군에 탄원해서 입대한다는 내용이다.
6. 여담
- 이 사건으로부터 1년 전에 이 사건의 전조라고 할 수 있는 헨더슨 소령 사건이 일어났다.
- 당시 북한군이 판문점에 들어가려면 돌아오지 않는 다리를 건너야만 했다. 이 사건 이후 돌아오지 않는 다리로 통행이 불가능해진[49] 북한군은 사건 발생 1주일 동안 북한 측 판문각 뒤로 우회하는 도로와 다리를 개설해야 했다고 한다.
- 외국인들에게는 관광 명소가 된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을 담당하는 미 육군 부대 주둔지 이름은 원래 '캠프 키티호크'였으나 이 사건으로 살해당한 아서 보니파스 대위의 이름을 따서 '캠프 보니파스'로 이름이 바뀌었다.
- 사건의 원흉인 박철 중위는[50] 처벌은 커녕 사건 이후에도 판문점에서 행패를 부렸다.[51] 다만 8년 후 판문점에서 소련 관광객이 남측으로 귀순하는 사건이 발생했을 때 경비병력 간의 총격전 뒤 다시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공식적인 증거는 없으나 당시 미군에게 사살된 북한군 중에 박철 중위가 있었다는 이야기도 나돌았는데 2018년 7월 8일자 이제 만나러 갑니다 방영분에서 사건 당시 근무 중이던 하사의 증언을 통해 박철 대위의 사살이 진실임이 확인되었다.
- 사건 40주기인 2016년 8월 18일 조선인민군 판문점대표부 대변인 담화를 통해 이 사건을 '남조선을 영구 강점하고 침략전쟁의 구실을 마련하기 위해 미제가 계획적으로 일으킨 사건'이라고 우겼고 "판문점 사건은 역사에 심각한 교훈을 남겼다. 그것은 침략자, 도발자들에게는 오직 수치와 죽음만이 차례진다는 것"[52]이라고 말하며 자기들이 미국에 완승했다는 황당한 역사 왜곡을 하고 있으며 "도끼를 들고 덤벼들면 도끼에 맞아 죽고 핵몽둥이를 휘두르면 미 본토가 핵참화 속에 잿가루가 되고 만다는 것[53], 이것이 판문점 사건과 이후 40년 역사가 보여준 교훈"이라고 현실인식을 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 그럼 미군이 판문점에서 나무를 찍은 것은?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을 격화시켜 새 전쟁을 도발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일으킨 거란다. 2023년에도 '조선인민군의 일당 백위력을 온 세상에 남김없이 떨친 판문점초병들'이라는 등 각종 궤변을 늘어놓으면서 역사 왜곡을 자행했다.
- 일부 종북주의자들은 사건 현장의 사진이 남았다는 것은 미국 측에서 자신들을 계획적으로 도발하고 음모를 꾸미기 위해 미리 기자들을 대기시킨 것이 아니냐고 주장하며 물의를 빚었는데 대표적으로 야후 코리아가 있던 시절 모 재미교포 블로거가 그런 시리즈물까지 올려가며 허황된 소리를 했던 사건이 있었다. 2024년 기준으로는 자작극이라기보다는 '미국의 선제도발'에 중점을 맞추어 설명하고 있다. #
[1] 대한민국 측이 과거에 사용하던 명칭. 현재는 거의 쓰이지 않는다.[2] 북한 측의 명칭이라고 알려지기도 했지만 사실이 아니며 오히려 한국의 일부 보도 자료에서 사용되었다. '만행'이라는 말이 감정이 개입되어 있고 두리뭉실한 표현이라는 이유로 한국어 위키백과에서도 한때 이 용어를 표제어로 사용한 적이 있다.[3] 북한 측 명칭. 조선대백과사전에 이 명칭으로 수록되어 있다. '8.18 사건'이라고도 한다.[4] 이전에는 5cm의 콘크리트 선이 없었지만 사건 이후 약 5cm의 콘크리트 선을 설치하여 남한과 북한의 경계선을 확실히 구분하였다.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이전에는 공동경비구역이란 이름에 걸맞게 대한민국 국군, 조선인민군, 그리고 유엔군사령부가 구역내에선 아무런 경계나 대척점 없이 공동으로 경비를 맡았다. 한국군과 북한군은 서로 형, 동생하며 지내며, 각측에서 생산된 담배도 서로 나눠피웠으며, 금지됐지만 사진까지도 몰래 찍고, 통일되면 만나자고 서로의 집 주소도 공유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때에도 북한군과 미군만 유독 갈등이 많았다고.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이후에서야 서로의 경비 구역을 명확히 지정하였고, 이 이후부터 우리가 흔히 아는 현재의 공동경비구역이 되었다.[5] 보니파스 대위, 배럿 중위(유엔군 장교)[6] 군인들이 길쭉한 몽둥이를 들고 있는 것이 보인다.[7] KBS가 미국 국립기록관리청에서 수집한 영상이다.[8] 한미연합군사령부는 2년 뒤인 1978년에 창설되어 유엔군사령관(주한미군사령관과 겸임)이 한미연합군사령관을 겸임하게 된다.[9] 본명은 홍성문으로, 평소 군화에 쇠징을 박고 다닐 정도로 괴짜였고 행실이 워낙 개차반이라서 한국군에서는 미친개, 미군에서는 BULLDOG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1년 전 헨더슨 소령 사건을 주도한 전력도 있었다.[사후추서] [사후추서] [12] 1922~1998. 10.26 사건 이후 동향인인 대만 대사 옥만호를 포섭하기 위해 대만으로 파견되었다가 대만 현지 당국에 체포되어 남한으로 송환된 후 전향하였으며 북한 정부의 보복을 피하기 위해 서용규, 신경완, 신평길 등의 가명과 필명을 썼다. 워낙 베일에 싸여 있는 인물이라 안기부가 만들어낸 가짜가 아니냐는 의혹을 받기도 했으나 엄연한 실존 인물이고 1970년에 체포된 공작원 김진계와의 대질 심문을 통해서 재확인되기도 했다. 다만 정체를 워낙 드러내길 꺼려서 돌아다니는 직함도 정무원 부부장, 선전선동부 부부장 등 중구난방이지만 대남 공작부서였던 대외조사부 부부장이 맞는 것으로 보인다. 중앙위원회 후보위원까지 올라갔다고 한다.[13] 실제로 현장에 한국인 노무자 5명이 있었지만 단 한 명도 부상당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신빙성이 높다.[14] 인도차이나는 베트남 전쟁으로 인해 지친 상태였으며 미국의 역린을 건드려 봤자 좋을 게 없었다. 특히 베트남은 북한이 한반도를 적화통일해야 하니 미군이 베트남에서 철수하지 말아야 한다는 소리를 하고 자빠졌으니 곱게 볼 리가 없었다.[15] 당시 소련의 서기장 레오니트 브레즈네프는 미국과의 데탕트 체제로 세계 평화를 이루고자 했고 그로써 냉전의 종식을 이끌어 서방 세계의 소련 봉쇄가 해체되기를 원하고 있었다. 중국도 미국과의 데탕트로 중국의 가장 큰 안보 위협이었던 소련을 견제하고자 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일어난 북한의 도발은 소련과 중국의 계획에 단단히 먹칠한 미친 짓이나 다름없었다.[16] Karl-Heinz Hoffmann. 사건 당시 기준 국가인민군 육군 대장으로 동독 국방장관이었으며 1985년 죽을 때까지 25년간 장관직을 지켰다. 범상치 않은 과거를 지닌 사람인데 나치당의 탄압을 피해 소련으로 망명한 후 스페인 내전과 독소전쟁에 참전한 거물 공산주의자였고, 동독에 공산정권이 수립되자 귀국했다. 그런데 함께 귀국한 대부분의 독일인 공산주의자들과 달리 관료 대신 직업군인의 길을 택해서 약간 괴짜 이미지가 박혔다고.[17] 당시 동독은 이 사건에 유독 민감하게 반응했는데 이는 서독과의 관계 개선을 진행 중인 와중에 북한이 일을 저질러서 초를 쳤기 때문이었다.[18] 당시 소련은 베트남 전쟁에서 북베트남을 지원하느라 바빴고 중국은 대약진 운동-문화대혁명이라는 연타석 자폭 정책 행진으로 인해 국부인 마오쩌둥이 내려오고 새로운 권력 투쟁이 이뤄지는 등 자국 내부의 상황이 나빴기 때문에 가뜩이나 바빠 죽겠는데 북한이 멋대로 미국은 물론 한국, 그리고 동구권 국가들도 지지해 주지 않는 대형 사고를 터뜨렸으니 북한을 감쌌다가는 더 큰일로 번질 게 뻔했던지라 북한의 병크에 대해 민감했다.[19] 훈련(연습) 용어로는 '라운드 하우스'라고 불리며 영내에 있는 모든 물자를 방치품/적재품/파기품으로 분류하고 "당장이라도 막사 뺄 준비하고 기다리는 것"을 말한다. 쉽게 말해 '싸울 준비를 미리 해놓고 대기해라.'라는 소리다. 현재까지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높은 단계의 데프콘 발동으로 이는 10.26 사건 이후의 서울의 봄과 아웅 산 묘소 폭탄 테러 사건과 더불어 단 세 번 뿐인 사례다.[20] 북미의 벌목꾼들 사이에 전해지는 설화에 등장하는 거인 나무꾼이다.[21] 이는 실제로 사건이 일어난 지 10년 뒤 리비아 공습에서 F-111은 소련식 방공망을 상대로 엄청난 저력을 과시하는 것으로 입증되었다.[22] 당시 제7함대는 세계 7위의 해군력으로 불리는 요즈음이나 제2차 세계 대전, 특히 태평양 전쟁기의 제7함대(당시에는 제7함대라는 이름 대신 태평양 함대로 불렸고 그 산하에 제7함대가 번호함대로 편성되는 형태였다.)와 달리 미국에서 약체라고 불렸다. 그럼에도 당시나 지금이나 7함대를 총동원하면 어지간한 국가 하나는 단독으로 갈아버릴 수 있을 수준이다.[23] 참고로 이 비행대는 이미 불과 몇 년 전의 베트남 전쟁에서 참전해 여러 대의 MiG-17, MiG-21 전투기들을 격추한 적이 있었다. 즉, 경험이 쌓일 대로 쌓인 베테랑 비행대였다.[24] 전술 폭격기 F-111 및 전략 폭격기 B-52.[25] 기지방호 용어로는 'Fast Pace(천막을 도는 속도를 높임)'라고 불린다. 부대 편제 인원이 100% 충원되며 실탄이 지급된다. 데프콘 2가 발령된 것은 이 때가 처음이다.[26] 5개 팀, 1개 지역대 규모이다.[27] M16 소총은 샌드백에 넣어 가져갔는데 이에 대해 미군이 질문하면 방호벽 등으로 둘러댔다고 한다.[28] 당시 특전사 지휘관의 인터뷰에 의하면 박정희 대통령이 북한군이 30m만 접근해도 발포하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후에 정병주 특전사령관이 이를 100m로 늘렸다고 한다.[29] 초소를 난장판으로 만들 때 초소 안의 김일성 초상화를 깨부수고 커튼 등을 약탈했으며 북쪽을 향해 오줌발까지 갈겼다고 한다.[30] 1공수 백모씨의 증언이다. 1987년 청취되었다.[31] 당시 미국은 베트남 전쟁 패전이라는 엄청난 후폭풍으로 반전여론이 가득했으며 제럴드 포드 대통령은 워터게이트로 사임한 닉슨을 급히 승계한 부통령 출신이라 정통성이 없어서 미 의회로부터 항상 견제를 당하던 신세였다. 즉, 단순 무력시위가 또 다른 전쟁으로 확전되는 것은 미국 입장에서 정치적인 부담이 매우 큰 상황이었기 때문에 미국은 한국의 보복행동을 결코 좋게 볼 수 없었다. 거기에다가 당시 헨리 키신저와 미국 외교 정책결정권자들은 중국과의 우호관계를 통해 소련을 견제하고자 했는데 만약 북한과 미국의 직접 무력충돌이 빚어지게 된다면 북한의 후견국인 중국은 당연히 위협을 느껴 소련과 냉랭했던 관계를 다시 청산하고자 할 것이고 대소련 봉쇄망 구축을 최우선순위로 삼았던 미국 입장에선 엄청난 손해다.[32] 한편 이 사건 이전까지 박정희 정권과 미국의 사이가 소원해져 주한미군 축소 움직임이 있었기 때문에 국지전을 발발시켜 주한미군을 붙들어놓기 위해 박정희 정권이 결사대 작전을 지시했다는 분석도 있다. 더불어 베트남 전쟁 이후 전반적인 반전 움직임과 더불어 미국이 묵인했던 독재 세력들을 차근차근 정리해나가는 시기이기도 했기 때문에 이는 박정희에게는 충분한 위협으로 받아들여져 무리수를 두었다는 평도 존재한다.[33] 이 일로 김종헌 소령은 군법회의에 회부되었으나 흐지부지되며 무죄 판결을 받았다.[34] 우방국이라도 외국인에 의해 숨진 게 아니라 우발적인 사태로 인해 숨질 경우 미국이 우방국에게 경고하거나 사건에 개입했을 정도다.[35] 예외적인 사례가 남미에서의 스캔들 정도나 해당된다.[36] 오늘날의 러시아도 우크라이나에서 철수하지 않는 이유는 옛 초강대국의 위신을 지키기 위함이라기보다는 완충 지대인 우크라이나가 NATO에 편입되면 수도 모스크바가 미사일 사격권 안에 들어가게 되고, 우크라이나라도 먹지 못한다면 블라디미르 푸틴이 노리는 러시아 제국주의는 물거품이 되기 때문이다.[37]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본때를 보여주되 총기는 일체 사용하지 말 것!"이라고 말한 것처럼 김정일은 사살이 아니라 단순히 미군을 도발해 어느 정도 구타한 뒤 어떻게든 미국의 사과를 받아내 자신의 권력 장악과 체제 선전에 이용하려고 했다. 이 사건으로부터 얼마 전에 일어났던 헨더슨 소령 사건이 대표적인 사례다. 푸에블로호 피랍사건처럼 미국이 국제 정세상 힘들 때 대충 북한을 인정해 주면서 타협하려고 하는 등의 모습도 보였으므로 김정일도 이 기회에 후계자 자리를 확고히 하고 당 내부에서는 지지도를 얻으며 크게는 체제 선전을 통해 정치 권력을 확고히 하려고 했을 것이다. 그런데 총기를 쓰지 말라니까 도끼로 저런 미친 짓을 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며, 실제로 김정일도 보고를 듣고 뒷목을 잡았고 끝내 아버지 김일성의 귀에까지 들어가 김정일은 김일성에게 불려가 엄청나게 깨졌다.[38] 상기한 대로 박병엽의 증언이다. 하지만 당시 인민무력부장은 3개월 전에 오진우로 교체된 후였다. 김일성이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으로 물러나 있던 최현을 불러내서 조진 것인데 직함에서 혼동한 것인지, 아니면 오진우를 불러내서 조진 것인데 최현으로 잘못 말한 것인지는 불명이다.[39] 이는 소련이 아직까지 건재한 상황에서 정말 끝까지 나간다면 제3차 세계 대전이 터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소련은 북한을 내다버린 자식 취급하고 있었지만 미국이 보기에는 엄연히 공산 국가를 자처하는 이상 소련이 공산 국가의 수장으로서 북한을 지원할 것이 뻔했고, 미국은 베트남 전쟁의 패배로 인해 아직까지 반전 여론이 강한 상황이었다. 만일 워터게이트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유감 성명을 받아들였던 제럴드 포드와 달리 닉슨 독트린을 깨버린 채 푸에블로호 사건의 복수를 천명하였을 테고 북한은 지구상에서 사라졌을 것이다.[40] 소개 작업은 김정일의 지시로 국가정치보위부가 주도했으며 평양에 주민소개 지도위원회가 설치되어 장성택이 모든 작업을 실질적으로 지휘했다고 한다. 8월 말부터 11월 중순에 걸쳐서 20만 명의 주민들이 이주되었고 황해도, 강원도에서 8천 세대의 성분 불량자와 노약자들이 솎아졌다. 작업은 은밀하고도 강압적이기 그지없었는데, 보위부원들이 소개장을 전달하며 정해진 시간까지 짐을 싸라고 지시한 후 옆집도 모르게 온 식구를 실어날라 버렸다고...[41] 계획에 의하면 연백평야를 점령할 생각이었다고 한다. 북한 전체가 타겟이 아닌 것은 당연히 소련과 중국 때문이다. 물론 이 사건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지 소련과 중국도 북한 자체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휴전선을 황해도 이북으로 올리는 정도로는 묵인하고 넘어갔을 것이다.[42] 당시 판문점에서 근무했던 군인들은 상층부에서 '저들은 엄연한 적국의 군인이니 쓸데없는 제스처나 말로 자극하지 마라.'라고 지시를 받았지만, 그래도 사는 곳의 이념만 다를 뿐 민족도, 언어도 같은 사람들이었기에 비공식적인 자리에선 서로 군생활의 고충을 토로하거나, 남북의 상황을 묻고, 심지어 기념 사진을 찍거나 물물교환을 하는 등 상당히 온건한 분위기를 유지했었다고 증언했다.[43] 9.11 테러가 일어나기 전에 김정일은 비동맹회의의 의미가 없어지자 미국과 일본 등 자유진영 상대로 저팔계 외교를 시행하였고 적들에게 바지를 벗어주는 행동을 일체하지 말 것을 지시하였다. 이는 현명한 행동이었는데 전 세계가 벌벌 떨 동안 세상물정 모르고 미국 보고 천벌을 받았다고 깝죽거리던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은 즉각 테러의 배후로 몰려 자신이 다스리던 나라와 집안 가족들은 풍비박산나고 본인은 교수대 위에서 비참히 죽어야 했다. 즉, 북한이 여기서 어그로를 끌었다면 즉각 테러지원국 또는 평화의 적으로 몰려 진작 사라졌을 수도 있었다.[44] 정확히는 제7함대 작전구역[45] 물론 진짜로 북한이 미국 본토에 핵을 쏜다면 미국 전역에는 진주만 공습과 9.11 테러를 합친 것과도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분노가 들끓고 이에 미군이 북한에 몰락 작전 실사판을 벌여(이것도 최소한으로 축소한 것이고 김정은은 그 즉시 폴 포트도 능가하는 인류 역사상 최악의 독재자로 규정되며 전 인류에게 북한은 지워져야만 하는 국가로 규정될 것이다) 북한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것은 물론 김정은은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무아마르 카다피 이상으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것이다. 조선인민군 역시 워싱턴을 함락하기는 커녕 미국 땅에 상륙하기도 전에 미 해군에 궤멸당할 것이다. 미군 vs 북한군 문서만 봐도 얼마나 정신나간 발언인지 짐작할 수 있다.[46] 석유 파동도 방영 계획에 있던 것이지만 예정보다 당겨지고 정인숙 사건 등의 다른 사건들로 에피소드를 편성하면서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의 방영은 무산되었다. #[47] 상술한 것처럼 북한에서는 이 사건을 미군의 도발로 왜곡하기 때문에 이런 묘사를 할 수 있다.[48] 다만 전체적인 전개만 따 왔을 뿐 과장이 대부분이다. 애초에 마지막에 나무를 무슨 전술핵으로 제거한 것마냥 묘사했다.[49] 양측 모두 군사분계선 통과가 불가능해지면서 다리를 건너려면 필연적으로 남측 땅을 밟을 수밖에 없는 돌아오지 않는 다리 루트가 막혔다.[50] 실제 이름은 홍성문. 후에 공화국 영웅 칭호까지 받았다.[51] 물론 전술했듯이 상관한테 쌍욕은 무진장 먹었을 것이다.[52] 그 '도발자'가 북한이라면 엄연한 사실이긴 하다.[53] 북한은 한미연합훈련이 열리면 이를 '북침핵전쟁 도발'이라고 박박 우기고 있는데 자기들 생각에는 미국이 먼저 '북침핵전쟁'을 일으키면 자신들이 '정당방위' 격으로 미국 본토에 핵을 날릴 거라는 것이다. 물론 미국은 북한을 향해 미사일을 날린 적이 전혀 없다. 오히려 북한이 한미훈련을 빌미로 미사일을 쏘며 한미를 도발하면 도발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