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재판에 출석한 피고인들 |
5.16 군사정변(당시엔 5.16 군사혁명으로 불렸다)의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실시된 재판으로 이승만의 비호 하에 온갖 패악을 저지르던 무리들을 숙청한 재판이다. 이 재판으로 인해 박정희의 인기는 치솟기 시작했다.
2. 내용
"반국가적 반민족적 반혁명적 범죄를 중점적으로 일벌백계주의로 엄정 신속히 처리함으로서 혁명정신 완수를 수행한다."는 기치 하에 이승만 정부 시절에 부정부패를 저질렀던 인물들과 정치깡패, 반혁명 사건의 관계자들이 재판을 받게 되었다. 이 재판은 국민방위군 사건과 함께 대한민국 헌정에서 일사부재리 원칙의 예외가 된 사례 중 하나로 군법을 기준으로 재판을 진행하였다.물론 단순히 구악을 일소하는 것뿐만 아니라 5.16 군사정변을 정당화하고, 군사정권에 방해되는 자들을 처리하기 위한 의도도 담고 있었다. 특히 민족일보 사장이었던 조용수와 사회대중당 관련자들, 6.25 전쟁 민간인학살 유족회 등 '특수범죄처벌법'이라는 법조항을 조급히 제정해 곧바로 소급적용한 행위는 있지도 않은 죄를 '북한에 이익을 주는 이적행위'라면서 뒤집어씌워 버리고 이들을 억울하게 형장의 이슬이 되어 버리게 만들었다. 결국 조용수를 비롯한 사회대중당 관련자들과 6.25 전쟁 유족회 간부들은 처형 및 처벌 이후 수십년이 지나고서야 재심 끝에 무죄를 선고받아 명예를 뒤늦게 회복했다.
반면 원래 사형 선고가 예정되었던 유지광은 죄에 비해 형이 과하다는 평을 받아[1]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고 그것마저 15년형으로 감형되었다가 5년 6개월 만에 석방되었다. 또 오랫동안 이정재의 행동대장으로 활동하던 김동진은 단성사 저격 사건 덕분에 체포 자체가 되지 않았다. 또 신성모도 한강 인도교 폭파 혐의로 혁명재판 대상이었으나 이승만 전 대통령이 하야 후 하와이로 떠날 때 사망하는 바람에 재판을 받진 않았다. 실제로도 신성모와 같이 이승만 정부의 장관이자 행적도 비슷했던 최인규는 사형에 처해졌다.
또 한때 중형에 처해졌던 자유당 인사들과 3.15 부정선거의 책임이 있는 정치인들과 관료들과 경찰들은 일부를 제외하면 박정희가 대통령으로 취임한 후 대부분 면책, 사면되었으며 이후에는 기업인이나 언론인, 정치자문을 담당하는 원로로 변신했다.
재판이 끝나자 처벌에 앞서 죄수들을 제1공수특전단[2] 대원들이 끌고 나가서 서울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시민들 앞에서 조리돌림을 시켰다. 형량 순으로 형량이 무거울수록 앞에 세웠는데 맨 선두에는 이정재를 세웠다. 관련된 저술 중 조갑제의 르포 '박정희'에 실려있는 대목을 소개한다.
21일 오후에는 자유당 시절의 정치깡패 두목 이정재를 비롯한 약 200명의 깡패들이 군경의 엄호 아래 덕수궁을 출발, 시내 중심가를 행진했다. 이들이 든 플래카드엔 "나는 깡패입니다. 국민의 심판을 받겠습니다.", "깡패 생활 청산하고 바른 생활을 하겠습니다.", "우리는 젊은 몸과 마음을 국가에 헌신하겠습니다."란 글이 씌어 있었다. '용갈파', '개고기', '까게', '돼지'란 이름표도 보였다.
다음날 한신 내무장관[3]은 '깡패 두목급들이 지하로 숨었는데 그들이 국내에 있는 한 반드시 잡아넣을 것이다'고 선언했다. 한 장관은 '형을 다 살고 나온 깡패들 가운데 개전의 정이 있는 사람들은 탄광이나 도로 공사장으로 보내 근로정신을 터득하도록 하겠다'고 다짐했다. 민주당 시절 군인들이 외출을 나왔다가 깡패들에게 맞고 들어오는 일이 있었다. 이 때문에 박정희는 깡패 소탕을 맨 먼저 지시했다. 이 조치는 깡패들로부터 시달리던 서민들의 지지를 받았다.
- 조갑제, 『박정희(朴正熙) 4권, 5·16의 24時』, 2007, 조갑제닷컴, p. 184
다음날 한신 내무장관[3]은 '깡패 두목급들이 지하로 숨었는데 그들이 국내에 있는 한 반드시 잡아넣을 것이다'고 선언했다. 한 장관은 '형을 다 살고 나온 깡패들 가운데 개전의 정이 있는 사람들은 탄광이나 도로 공사장으로 보내 근로정신을 터득하도록 하겠다'고 다짐했다. 민주당 시절 군인들이 외출을 나왔다가 깡패들에게 맞고 들어오는 일이 있었다. 이 때문에 박정희는 깡패 소탕을 맨 먼저 지시했다. 이 조치는 깡패들로부터 시달리던 서민들의 지지를 받았다.
- 조갑제, 『박정희(朴正熙) 4권, 5·16의 24時』, 2007, 조갑제닷컴, p. 184
3. 재판 결과
3.1. 사형
- 곽영주(1924 ~ 1961, 경무대 앞 발포사건)
- 신정식(1928 ~ 1961, 동양극장 앞 학생살해사건)[4]
유지광(1927 ~ 1988, 고려대학생습격사건)[5]- 이정재(1917 ~ 1961, 정치깡패사건)
- 임화수(1921 ~ 1961, 고려대학생습격사건)
- 조용수(1930 ~ 1961, 민족일보사건)
- 최백근(1914 ~ 1961, 사회당 반국가행위사건)[6]
- 최인규(1919 ~ 1961, 3.15 부정선거)
- 한필국(1925 ~ 1962, 특수밀수사건)[7]
홍진기(1917 ~ 1986, 경무대 앞 발포사건)[8]
3.2. 무기징역
- 한희석(자유당 기획위부정선거사건)
- 안신규(민족일보사건)
- 송지영(민족일보사건)
- 이갑영(30사단 반혁명사건)
- 이원식(경남북유족회사건)[9]
- 이강학(내무부 부정선거사건)
- 박용익(자유당기획위부정선거사건)
- 박종표(마산 발포사건)
- 김문심(대구2대법반대데모사건)
- 조열승(동대문시장 깡패사건)
3.3. 징역 20년
- 신도환(고려대학생습격사건ㆍ반공청년단장)
- 유충렬 (경무대 앞 발포사건)
4. 다른 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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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인시대에서는 122회~123회에서 중요하게 다루었다. 이정재, 유지광 등이 실제 상황처럼 조리돌림당하는 장면이 재현되었다. 김두한은 거리에서 조리돌림 당하는 이정재를 보고선 절규. 이후 이정재는 123회 초반에 사형당하고 유지광은 운 좋게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어 풀려난 후 이후의 생애가 짤막하게 나레이션되면서 퇴장했다.
5. 관련 문서
- 대한청소년개척단 - 역시 구악일소를 명목으로 시행된 정책인데 깡패들 중 젊은 조직원들도 이렇게 잡혀들어간 사람이 많은 듯하다. 깡패들도 끌려갔지만 억울하게 잡혀들어간 민간인 역시 제법 많았다. 여기서는 이렇게 끌려간 무고한 시민들이 혁명재판에서의 민중운동가, 좌익사범 위치라고 보면 된다.
[1] 당시 혁명재판부 판사인 최문기의 증언에 따르면 깡패 관련해서는 죄가 큰 일부만 표본으로 집행했다고 한다.[2] 현재의 특전사 제1공수특전여단[3] 현 행정안전부 장관[4] 경성전기공고 3학년 최기태를 각목으로 때려서 죽였다. 별명은 '돼지'로 야인시대에서도 돼지라는 이름으로 불린다.[5]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6] 광양 출신 혁신계 정치인으로 일제강점기에는 항일운동을, 해방 후에는 좌우합작운동을 하다가 1961년 혁신계 정당인 사회당을 조직하는데 앞장섰다. 그러나 5.16 군사정변으로 인해 사회당은 붕괴되고 그를 포함한 지도부는 구속되었다. #[7] 밀수왕으로 불리던 인물 중 하나로, 밀수 범죄를 엄격하게 다루기 위한 시범 케이스로 사형되었다. 이 인물의 대략적인 생애는 이 사이트를 참조.[8] 사면을 받고 풀려난 후 중앙일보, 보광그룹을 세우면서 삼성가문과는 사돈지간이 되었다.[9] 1950년 8월에 자신을 잡으러 온 경찰에 자신의 아내가 잡혀가 행방불명되었는데 이 일이 보도연맹 학살 사건과 관련되었다는 것을 알고 1960년 경북피학살자유족회를 결성했다. 이 단체는 6.25 전쟁 때 벌어진 학살에 대한 진상규명을 주장했고 결국 5.16 주도 세력에게 찍혀 분쇄되고 말았다. 이원식은 이때 10년 동안 감옥살이를 해야 했다. 그의 억울한 옥살이는 2010년에야 재심을 통해 무죄가 입증되어 부당한 처벌이었음이 드러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