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공 사건 사고 요약표 | |
발생일 | 1978년 4월 20일 |
유형 | 항법사 과실 또는 항법장치 고장, 민항기 격추 |
발생 위치 | [[소련| ]][[틀:국기| ]][[틀:국기| ]] 러시아 SFSR, 카렐리야 ASSR 로우히 마을 부근 호수 |
기종 | Boeing 707-321B |
운영사 | 대한항공 |
기체 등록번호 | HL7429 |
출발지 | [[프랑스| ]][[틀:국기| ]][[틀:국기| ]] 파리 오를리 공항 |
경유지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알래스카 앵커리지 국제공항 |
도착지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김포국제공항 |
탑승인원 | 승객: 97명 |
승무원: 12명 | |
사망자 | 승객: 2명 |
부상자 | 13명 |
생존자 | 승객: 95명 |
승무원 12명 전원 생존 |
<colbgcolor=#ddd,#191919> 영어 | Korean Air Lines Flight 902 |
러시아어 | Катастрофа Boeing 707 в Карелии |
일본어 | 大韓航空機銃撃事件(だいかんこうくうきじゅうげきじけん) |
사고 8개월 전, 오사카에서 찍힌 사진 |
얼음 호수 위에 불시착한 대한항공 902편의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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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78년 4월 20일 파리를 출발하여 알래스카 앵커리지를 경유한 뒤 서울로 도착할 예정이었던 대한항공 902편 보잉 707 여객기가 항법 상의 실수로 소련 영공을 침범한 후, 소련 전투기에 의해 카렐리야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상공에서 미사일로 격추당하였으나 기적적으로 불시착한 사건. 이 사고로 탑승 인원 109명 중 2명이 사망하였다. 나머지 생존한 승객들은 조사를 마친 후 핀란드 헬싱키를 통해 귀국했다.
2. 사건
프랑스 파리 오를리 공항을 이륙해 앵커리지를 거쳐 서울로 향하던 대한항공 902편은 북극 상공에서 갑자기 방향을 크게 꺾어 소련의 무르만스크 방향으로 비행하기 시작했다. 조종사와 항법사는 지금의 항로가 맞는지를 두고 다투었으나 기체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파악하지 못했고, 시속 900킬로미터로 비행하는 보잉 707 기체는 순식간에 소련 영공으로 진입하고 만다.대한항공 902편의 비행 경로. 자북극 근처에서 경로를 크게 벗어나기 시작하는 것을 알 수 있다. [1] |
902편이 진입한 지역은 방공기지가 밀집된 소련 해군 북방함대의 모항인 무르만스크 상공이었고 소련 방공군은 20시 54분에 레이더로 영공 400㎞ 밖에서 자신들을 향해 전속력으로 날아오는 대형 항공기를 발견한다. 소련 방공군은 이 미확인 기체에 25분간 무전으로 접촉을 시도했으나 별다른 반응 없이 그대로 영공을 넘어오자 21시 11분에 Su-15 요격기를 긴급 발진시켰다. 이후 미사일에 피격되기까지의 과정은 902편 탑승자들의 증언과 소련의 공식 발표가 다르다.
소련의 발표에 따르면 제431방공군의 아프리칸다(Африканда, Afrikanda) 군공항에서 긴급 발진한 알렉산드르 보소프(Александр Босов) 대위의 Su-15TM이 영공 침범 5분만에 대한항공 902편 조종석에 가까이 접근하여 기체를 좌우로 롤링하는 등 따라오라는 신호를 보냈으나 902편은 이를 무시하고 핀란드 쪽으로 급격히 기수를 선회해 달아나려 했다. 이를 보고받은 21 방공군의 지휘관 블라디미르 차르코프는 곧바로 10 방공군의 블라디미르 드미트리예프 장군에게 허가를 받은 뒤 격추를 명령했고[2] 보소프는 민항기임을 주장하며 몇분간 격추를 거부하다가[3] 결국 21시 42분에 명령에 따라 미사일을 발사한다.
당시 카렐리야의 주요 군공항 위치 및 KAL 902편의 비행경로. 아프리칸다(제431방공군)와 포두제미예(제265방공군) 기지의 요격기들이 출동하였다. | 당시 아프리칸다 기지(제431방공군)의 Su-15TM |
대한항공 902편 기장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보소프의 Su-15TM를 발견하고 기체 외부의 항법등을 모두 켜고 속도를 줄여서 지시를 따르겠다는 신호를 보냈고 국제 공용 비상주파수 121.5MHz로 계속 접촉을 시도했으나[4] Su-15TM은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다가 갑자기 미사일을 발사했다. 나중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Su-15TM에는 UHF(300~3,000MHz) 대역 무전기만 설치되어 있어서 902편이 보낸 주파수를 수신하지 못했을 것이고 보소프는 영어를 못했기에 대응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일본인 승객 오오타니 기시오[5]가 대한항공 902편 기내에서 촬영한 알렉산드르 보소프의 Su-15TM. | 미사일 파편에 손상된 동체 내외부의 모습 |
승객의 입장에서는 일본인 승객 시오자키 세이코[6]가 Su-15TM의 출현부터 비상착륙까지 1시간 42분 동안 발생한 모든 일을 시간대별로 자세히 기록했다. 이에 따르면 소련 전투기가 나타나 902편의 오른쪽에 바짝 붙어 항공기를 훑어보듯이 기수부터 후미까지 오가며 비행하기 시작했고 바로 항공기 외부의 등이 전부 켜졌다.[7] 그 근처에 앉았던 프랑스 승객 쟝-샤를 포리는 승객들이 소련 전투기의 출현을 무서워하지 않았고 다들 밝은 달빛 아래에서 소련 전투기를 구경하고 사진 찍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보소프도 여객기 창문의 커튼들이 열리고 불이 켜진 객실 안의 사람들이 자신을 구경하며 손을 흔들고 사진을 찍었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Su-15TM이 곧 시야에서 사라지더니 폭발이 있었고 시오자키 세이코의 네 좌석 뒤 왼쪽 동체에 멜론 크기의 구멍이 생겼다. 장-샤를 포리는 폭발이 있은 후 앞좌석에 걸어둔 자신의 재킷에 동전 크기의 구멍이 세 개 생겼다고 말했다.
보소프가 발사한 R-60 빔펠 열추적 미사일은 첫 발은 빗나갔으나 두번째 발이 왼쪽 날개 끝을 맞춰 4m 가량이 떨어져나가고 파편에 의해 동체에 구멍이 다수 생겼다. 이 때 미사일 파편에 머리를 맞은 한국인 승객[8]은 현장에서 사망했고 어깨와 오른팔에 중상을 입은 일본인 승객 스가노 요시타카(31)[9]는 불시착 후 소련군의 구조 중에 과다출혈로 사망한다.[10] 이외에 그의 형 스가노 야스오(33)[11]와 처남 후쿠이 타카마사(25)[12] 등 13명이 부상을 당했다.[13]
피격 직후 동체에 생긴 구멍으로 인해 객실 감압 경보가 뜨자 기장은 즉시 기수를 내리고 분당 5,500피트(1,676.4m)로 급강하하여 고도를 35,000피트(약 10,000m)에서 3,500피트(약 1,000m)로 낮췄다.[14] 이때 소련군의 방공 레이더에서도 사라지고 구름을 뚫고 강하하면서 보소프의 시야에서도 사라진다. 그는 대한항공 902편이 추락한 것으로 생각했으나 지상에 아무런 화재나 충돌 흔적이 없어 어떻게 됐는지 확인하지 못했고, 5분이 넘는 급강하 동안 승객들도 추락 중이고 곧 죽는 것으로 생각했다. 시오자키 세이코의 노트에는 "우리는 이제 다 죽을 것 같다. 우리는 추락하고 있다."라고 적혀 있다.
이 시점에서 교대를 위해 제265방공군의 포두제미예 기지에서 유리 노보질로프(Юрий Новожилов), 아나톨리 케레포프(Анатолий Керефов), 세르게이 슬로보드치코프(Сергей Слободчиков), 알렉산드르 겐베르그(Александр Генберг)가 탑승한 네 대의 Su-15TM이 발진했다. 이 때 미사일에 떨어져 나간 KAL 902의 왼쪽 날개 파편이 레이더에 잡히자[15] 차르코프는 순항미사일이나 버려진 스파이 장비로 판단했고 세르게이 슬로보드치코프가 R-98MR 레이더 추적 미사일을 발사해 공중에서 파괴한다.
코르피야르비 호수. 마치 활주로처럼 긴 모양을 가지고 있다. |
착륙지점 접근방향쪽 도로와 철로의 위치. 기장은 원래 도로에 착륙을 시도하려 했으나 기차가 나타나 기수를 올렸다. |
22시 45분 아나톨리 케레포프 대위의 Su-15TM이 2600피트(약 800미터) 고도에서 저속으로 날고 있는 대한항공 902편을 발견했고 12분 후에는 알렉산드르 겐베르그 소령의 Su-15TM도 따라붙었다. 이들은 대한항공 902편을 아프리칸다 군공항으로 유도하던 중 얼어붙은 코르피야르비 호수를 발견하고 강제 착륙시켰다. 케레포프의 증언에 따르면 미사일 피격 후 약 1시간 20분간 유도해 가다가[16] 얼어붙은 호수 등 착륙할만한 지형을 발견하고 대한항공 902편의 날개를 자신이 탑승한 Su-15TM의 날개로 계속 눌러서 착륙하라는 의사를 전달했다고 한다. 김창규 기장과 이근식 항법사의 증언에 따르면 처음에는 큰 도로에 착륙하려 했으나 기차가 나타나 급히 기수를 올렸고, 눈쌓인 긴 얼음호수를 발견하고 착륙을 시도했다고 한다.
제265 방공군 파일럿 아나톨리 케레포프(Анатолий Керефов)와 알렉산드르 고랴노이(Александр Горяной) |
그리고 김창규 기장은 모든 악조건을 뚫고 비상착륙에 성공한다. 승객을 가득 태워 무거운 대형 여객기로 미사일에 맞아 한쪽 날개 끝이 잘린 상태에서 마찰력이 거의 없는 얼음호수 위에[17], 그것도 무려 야간에 비상착륙을 시도하여 부상자 하나 없이 성공한 것은 기적과도 같은 일인데, 이는 순전히 김창규 기장의 뛰어난 조종 실력 덕분이었다. 역대 전세계 민항기 추락 사고 중에서 인명 피해 없이[18] 불시착에 성공한 극히 드문 케이스다. 소련군도 민항기 조종사의 환상적인 기동[19]에 대해 특기할 만한 사례로 분석했다고 한다.
소련 측은 김창규 기장이 대한항공 입사 전에 공군 파일럿이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고 한다. 러시아, 우크라이나 등 당시 소련 측이었던 국가의 매체 기사나 당시 인물들의 인터뷰에는 그가 베트남전에도 참전해 소련 전투기들과 싸웠다는 표현이 등장하는 등, 군 조종사 경력을 가지고 김창규 기장에 대한 의혹을 제기하지만 베트남 전쟁에서 한국 공군은 수송기인 C-54D로 후방 수송을 담당한 은마부대만 참전했으며, 김창규 기장이 은마부대에서 복무했는지 여부 역시 확인이 불가능하다. 또한 공군 파일럿이 전역 후 민항기 조종사로 취업하는 것은 전 세계 어느 나라에서든 너무나 일반적인 일이므로 그가 공군 파일럿이었다는 점을 문제삼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비상착륙 다음날의 모습. 김창규 기장의 증언에 따르면 착륙 후 얼음이 깨지는 등의 이유로 비행기가 호수에 가라앉을 위험이 있으므로 착륙 마지막에 의도적으로 기수를 틀어 땅에 비행기를 올렸다. 착륙 경로가 잘 보이는 거의 유일한 사진.[20] | 헬리콥터에서 촬영한 모습 |
고정 표적이나 다름없는 대형 민항기에 발사된 두 발의 고기동 미사일이 아예 빗나가거나 날개 끝에만 맞아 계속 비행이 가능했던 점 등 운이 굉장히 좋았을 뿐더러, 소련 방공군 측에서 지대공 미사일을 발사하지 않아 대부분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여기서 고기동 단거리 미사일인 R-60이 한발은 아예 빗나가고 한발은 열원인 엔진이 아니라 날개 끝에 맞았다는 점이 상당히 의아한데, 이는 자기가 요격하는 항공기의 정체가 민항기임을 확실히 확인하고 격추 지시를 한동안 거부했던 알렉산드르 보소프가 의도적으로 날개 끝에 맞췄을 가능성이 있다. R-60은 락온 없이 tactical drop으로 발사하면 근접신관이 작동하는 상태로 무유도 직선비행을 한다.
당시 인접 부대의 지휘관이었던 제5방공군 예브게니 그로보프스키 대령이나 제10방공군의 블라디미르 드미트리예프 장군 등의 증언에 따르면 대한항공 902편을 레이더로 발견한 순간부터 인접 부대 지휘관들 간에 지대공 미사일을 발사해 즉각 가루로 만들어버려야 한다는 격렬한 논쟁이 있었는데[21] 결국 규정대로 요격기를 접근시켜 착륙을 유도하는 방향으로 진행했다고 한다. 그 결과 탄두가 작은 공대공 미사일이 발사되었고 대한항공 902편이 큰 피해를 보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22] 말레이시아 항공 17편 격추 사건에서 알 수 있듯이 지대공 미사일은 무게 및 크기 제한이 있는 공대공 미사일보다 훨씬 큰 탄두를 탑재하기 때문에[23] 피격되면 살아남는 것이 불가능하다. 또한 당시 Su-15는 탄두중량 40kg의 대형 중거리 미사일인 R-98도 장착하고 있었으나, 작약량이 적은 R-60을 사용한 점 역시 운이 따라주었다.[24]
비상착륙한 902편에 접근해 감시하는 소련 병사들의 모습. 비행기에 올라온 소련 병사들은 승객들의 카메라부터 압수했으나 오오타니 기시오(당시 50세, 사진가)는 필름을 빼서 숨겼고 미도 히데카즈(당시 26세, 사진과 대학생)는 카메라를 몰래 숨겨 가지고 있으면서 귀중한 사진들을 남겼다. |
비상착륙 후 승객들은 불빛 하나 없는 얼어붙은 호수 위에 착륙한 불 꺼진 비행기 안에서 2시간 동안 떨며 앉아 있었으며[25], 이후 군인들이 나타나자 미군인가 하다가 소련군인 것을 알고는 공포에 빠졌다고 한다. 다행히 소련군은 승객들을 최선을 다해 잘 대해주었는데, 하마터면 민항기를 격추시켜 민간인들을 대량으로 죽이는 대형사고를 낼 뻔했으니 일을 더 키우지 않으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우선 비행기에 올라 승객들의 여권을 걷은 뒤 3대의 대형 헬리콥터를 동원해 켐(Кемь / Kem)이라는 지역의 군사도시[26]로 부상자, 여자, 아이들부터 이동시켰고[27] 따뜻한 장교 클럽에 남녀로 나누어 재우고 잘 먹였다.[28]
식사를 제공받는 승객들의 모습. 카메라를 몰래 가지고 있던 미도 히데카즈의 사진 | 승객들이 머물렀던 장교클럽의 2018년 모습 |
한밤중에 군인들이 동원되어 장교 클럽의 내부 집기류가 치워지고 충분한 양의 침대와 담요가 설치됐으며 지역 주민들은 조리 도구와 관을 만들었다. 승객의 대부분인 한국인과 일본인들을 위해 쌀을 구해다 밥을 지어주었고 유럽인 승객들에겐 햄버거 패티와 곡물, 삶은 감자가 제공되었다. 이들의 통역과 인솔을 담당했던 스베틀라나 파시우코바에 따르면[29] 한 프랑스인이 오이와 바나나를 요구하자 얼어붙은 카렐리아의 산속 군사기지에서 한밤중에 어디선가 오이와 바나나가[30]나타났고, 영유아를 동반한 가족 승객들(한국인 11명)은 근처의 그나마 시설이 좋은 군 병원[31]의 병실을 제공받았는데 당시 그들을 담당했던 의사 루드밀라 미니나에 따르면 그들은 쌀밥 외에는 주는 음식을 모두 거절하고 직접 요리를 하려 했으며 레닌그라드에서 온 당 간부들이 이들이 요구하는 것은 뭐든 구해주라고 하여 고생했다고 한다.[32]
당시 승객들이 머물렀던 포두제미예 기지 주변 지역의 2020년 모습(구글어스) |
당시 승객들이 머물렀던 포두제미예 기지의 1970년대 모습. 앞서 등장했던 제265방공군 소속 조종사 유리 노보질로프 촬영 |
포두제미예 기지의 현재 모습. 70년대 모습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
이렇게 첫날 밤이 지나고 둘째 날에는 승무원과 승객들이 KGB에게 조사를 받았다. 조종사를 제외한 탑승자들에 대한 조사는 통상적인 수준 이었다. 김창규 기장의 심문에 배석했던 제5방공군의 블라디미르 폴리오친 대령[33]은 김창규 기장은 자신은 소련 국경을 넘는 줄 몰랐으며 전투기가 접근해 동체의 붉은 별을 보여줄 때 알았다고 대답했으나 KGB는 받아들이지 않고 심문과 진술서 작성을 5회 이상 반복했다고 증언했다. 최종적으로는 민항기에 첩보 설비를 설치해 승객의 목숨을 담보로 정보 공작을 벌이려 했으며 소련 방공군이 빠른 긴급 발진과 미사일 공격을 통해 정보 공작을 성공적으로 차단했다는 결론의 보고서가 작성되었다.
폴리오친 대령에 따르면 KGB의 항공기 수색에서 대한항공 902편 조종석 아래에 숨겨진 강력한 무전 설비가 발견됐고 권총이 포함된 파일럿 생존 키트가 발견됐다고 한다. 그는 착륙 후 소련군이 접근할 때까지의 빈 시간에 정찰 장비는 숲에 버리고 정찰한 정보를 모두 무선으로 송신했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당시 Su-15TM을 긴급 발진시켰던[34] 265항공연대에서 참모장이었던 발레리 볼리닉은 자살 시도가 아닌 이상 그런 식의 정찰을 할 이유가 없고 민간인 승객까지 가득 태우고 그럴 이유는 더더욱 없다고 이를 부정하고 정찰 장비 같은 것은 발견된 적이 없다고 증언했다. 인근 57항공연대의 지휘관이었던 비탈리 다이모프도 "발견됐다는 무전 장비는 아마 백업용 통신 장비였을 것이다"고 말하고 승객을 태우고 그런 일을 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는 자북극 근처에서 측정 장치가 오류를 일으켜 오토파일럿이 오작동했다 생각한다고 증언했다. 종합해 볼 때 KGB의 보고서는 민항기에 미사일을 발사한 일에 대한 명분을 만들고 체제 경쟁에서 이용하기 위해 적당히 만들어낸 주장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아침, 승객들은 스파이 혐의가 없다고 판단되어 모두 돌려보내진다. 당시 대한민국과 소련 사이에는 국교가 수립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미국이 중재했고[35] , 승객들과 객실 승무원들은 팬암의 보잉 727에 타고 우선 중립국인 핀란드의 수도 헬싱키로 이동한 후, 대한항공이 헬싱키로 보낸 또 다른 707에 타고 김포국제공항을 통해 귀국했다. 김창규 기장과 이근식 항법사는 추가 조사를 받은 후 역시 핀란드를 통해 귀국할 수 있었다. 참고로 이때 헬싱키로 투입된 비행기는 9년 후, 폭파 사건의 희생양이 된다. 하지만 707 기체는 반환받지 못했으며, 러시아 언론의 보도에 따르면 소련은 이 기체를 철저히 조사하여 자신들의 여객기를 개량하는 데 활용했다고 한다. 이 러시아 언론은 음모론을 제기하며 김창규 기장이 사실을 밝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기사는 2008년 기사이고 김창규 기장은 2009년 3월 4일 미국에서 세상을 떠났다.
김창규 기장의 장례식 모습 |
3. 원인
3.1. 당시 대한항공의 안전불감증
당시 대한항공은 이 사건인 1978년 902편 격추사건 외에도 1976년 대한항공 642편 추락 사고(화물기 탑승인원 전원 사망), 1980년 대한항공 015편 착륙 사고(착륙 실수로 747 전소 및 기장, 부기장, 항공기관사 포함 17명 사망), 1981년 대한항공 903편 활주로 이탈 사고(747 대파 및 40명 부상), 1983년 007편 격추사건(소련 영공 침범으로 269명 전원 사망) 및 084편 충돌사고(관제와 다른 활주로로 이륙해 경비행기와 충돌) 등 대형사고를 계속해서 일으키고 있었다.더구나 택싱 실수로 활주로 폐쇄, INS 좌표 입력 실수로 인한 회항과 항로이탈 강행[36][37], 최대이륙중량 초과로 이륙중 추락 위기[38], 항공기 고장을 무시하고 비행을 강행하는 등 따로 기록이 남지 않은 자잘한 사고들이 끊임없이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었다.[39] 조갑제의 월간조선 1984년 4월호 기사에서는 대한항공의 계속된 사고와 그 원인인 대한항공의 우격다짐식 운영을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다.
항공운송 사고는 반드시 큰 인명·재산피해로 직결되므로 항공운송에서는 안전절차를 3중, 4중으로 구축하고 안전을 최우선시하도록 되어 있으나, 당시 대한항공의 문화는 안전을 최우선시해야 할 항공사라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역기능적(dysfunctional) 상태였다.
항공기 운항이 동네 용달회사 운영하듯 이루어져 최대이륙중량을 초과하는 과적이 반복되었으며[40], 이로 인한 추락 위기에 대해 수많은 조종사들의 증언이 있다. 공항의 대한항공 소속 운송직원이 기록도 없이 대충 과적 후 괜찮다는 식으로 넘겨도 조종사들은 별 수 없이 비행기를 운항해야 했다.
전세화물기 등 부정기편은 영공 통과 허가도 받지 않은 채 일단 항공기를 출발시키는 일도 흔했다. 회사에서는 일단 이륙해라, 가는 중에 허가 받아놓겠다고 했는데 영공에 접근해보면 허가를 받지 못한 상태인 일이 많았다고 한다. 영공 통과시간이 짧으면 그냥 무시하고 지나가버리거나 아무 허가번호나 대충 대고 확인되기 전에 지나가버리는 식이었다. 조종사들은 그러다 강제착륙 명령을 받고 홀딩 중에 관제소에 사정사정하여 겨우 지나가는 일도 있었다고 증언한다.
조종실 계기가 고장난 항공기를 그냥 비행하는 정도는 비일비재했고, 심지어 고장이 심해 비행을 하면 안되는 항공기도 수리비를 줄이기 위해 한국으로 몰고올 것을 요구받았다. 예를 들어 70년대 말 방콕에서 김포로 이륙하려던 707 화물기에서 엔진오일 누유가 발견되자 대한항공은 비행기를 몰고 와서 한국에서 수리하라고 통보했다. 미국인 항공기관사는 이를 거부하고 비행기에서 내렸으나 한국인 기장이 항공기관사도 없는 상태에서 고장난 비행기를 몰고 김포로 돌아왔고 심지어 회사 표창을 받기까지 했다.
당시 대한항공은 비용 절감에 집착했다. 대한항공 기장들은 전세계 항공사 중 가장 긴 비행시간과 비행횟수를 부여받았고, 기체고장이나 기상악화에도 항공편 결항이나 회항은 불가했고 어떻게든 이착륙을 해서 스케쥴을 완료해야만 했다. 30시간 이상 잠도 자지 못하고 항공편을 바꿔가며 연속 근무를 한 객실 사무장도 있었다. 연료를 아끼기 위해 전체 항로의 순항고도를 높였으며 착륙시에는 플랩 각도를 제한하고 랜딩기어도 최대한 마지막 순간에 내리도록 하고 착륙전 선회거리를 줄이기 위해 시계접근을 하도록 했다.
이외에도 승무원 지정 호텔에 비용을 잘 지불하지 않아 대한항공 조종사, 승무원들은 해외 호텔에서 박대를 당했으며 해외 체류비도 너무 조금 지급하여 밥도 제대로 사먹기 힘들었다. 밥 사먹을 돈이 없어 호텔에서 라면을 끓여먹다가 쫓겨난 대한항공 조종사의 이야기가 유명해지자 대한항공에서 책자까지 만들어 호텔방에서 음식 만들어 먹지 말라고 교육을 할 정도였다.
이런 모습은 경영상 어려움 때문에 그랬던 것으로 보일 수도 있으나 당시 대한항공은 창사 15년만에 국제선 기준 세계 10위권 항공사로 집계될 정도로 상당히 성공적으로 운영되는 중이었다. 이렇게 아낀 비용으로 가격 경쟁력을 확보한 것이 성공적 운영에 많은 부분 기여했으나[41] 사실 이렇게까지 비용 절감에 매달렸던 주된 이유는 대한항공이 몸집을 불리는 과정에서 거대한 규모의 차입금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규모의 경제가 적용되는 항공산업에서 레버리지를 활용하는 것은 경영상 충분히 합리적인 판단이지만 이자 등 금융비용을 상쇄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항공운임의 가격경쟁력을 확보하는 것 이상으로 비용 절감이 필요했던 것이며 그 정도가 지나쳤던 것으로 볼 수 있다.
항공사가 비용 절감에 집착해 안전이나 규정은 무시했고 조종사는 본인포함 수백명의 목숨을 손에 쥐고도 회사가 까라면 까야 했던 모습만 보면, 마치 안전문제로 유럽 취항을 금지당한 짐바브웨나 잠비아, 콩고 같은 3세계 국가의 항공사 같지만 놀랍게도 이것은 70-80년대 대한항공이었다.[42]
그렇다면 왜 조종사들은 회사의 부당한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었는가?
대한민국 공군 조종사들이 퇴역 후 조종사로서 일할 수 있는 곳이 대한항공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조종사는 매년 배출되는 반면 대한항공의 기장 자리는 그만큼 늘어나지 않아 조종사 취직은 하늘의 별따기였으며, 해외 항공사에서 한국 조종사들을 채용하려하자 교통부가 1976년 12월 1일에 조종사의 해외취업을 금지해 버리기도 했다. 대한항공이 절대갑이 되면서 조종사들은 회사의 부당한 명령도 무조건 따를 수밖에 없었으며 그 과정에서 사고가 발생할 경우 조종사가 모든 책임을 지고 강등되거나 해고되었다.
대한항공 902편을 얼음호수 위에 완벽하게 착륙시켜 소련군에게도 깊은 인상을 준[43] 김창규 기장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대한항공 조종사들은 조종실력 면에서 세계 최고수준으로 인정받고 있었다.[44] 대한항공의 무리한 운영은 많은 부분 조종사들의 실력으로 커버되고 있었으나 그들은 대한항공으로부터 그에 걸맞은 대우를 받지 못했다.
또한 기수 순서대로 전직 공군 조종사들로만 구성된 철저한 위계질서 때문에 조종사들은 자기 의견을 피력할 수가 없었다. 국영 항공사로 최초 출범한 대한민국의 플래그 캐리어인 만큼 교통부는 관리감독 책임을 떠나 회사를 보호하려고만 했고, 정부에서 회사를 통제할 전문성도 없었다. 사회전반에 수직적인 군사문화가 만연했던데다 규정위반이나 편법은 신경쓰지 않고 경제성장만이 지상과제였던 당시 사회 분위기도 한몫했다.
902편의 항법사였던 이근식씨는 사건 31년 후인 2009년, 902편은 "자이로콤파스가 고장난 상태였으며 비행시간을 지키기 위해 안전을 무시한 비행을 했다", "안전을 위해 회항을 했어야 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문예춘추 1983년 11월호에는 일본인 승객 '오오야'씨가 비상착륙 후 김창규 기장에게 물었을때 "항법사쪽의 계기는 당초부터 고장이 나 있었다"는 대답을 들었다는 내용이 있다. 당시 조종사들의 수많은 증언들까지 고려하면 이는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즉, 사고의 원인이 된 902편의 급격한 항로변경은 결항이나 지연을 피하기 위해 항법장치가 고장난 항공기를 수리하지 않고 무리하게 운항했기 때문으로, 당시 대한항공의 "규정이고 뭐고 까라면 까라"는 식의 막무가내 운영이 이 사고의 주 원인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탑승자 269명 전원이 사망했던 1983년 대한항공 007편의 경우, 기장이 멀쩡한 INS를 전혀 쓰지 않은채 나침반으로 계기비행을 하다 소련 영공을 깊숙이 침범해 격추되었다. INS 좌표 입력에는 20분 정도가 걸리는데, 이륙 직전 INS 좌표 입력이 잘못된 것이 발견되자[45] 이륙 지연을 피하기 위해 재입력 대신 계기비행을 결정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이륙이 지연될 경우 사유서를 쓰고 징계를 받는데다, 조종실력이 뛰어난 기장이 그동안 수없이 비행하며 익숙하던 항로라서 계기비행에 자신이 있었을 수 있다.
이후에도 대한항공은 1989년 803편 추락사고(악천후 착륙강행 실패로 79명 사망), 1991년 376편 동체착륙사고(시끄럽다고 경고장치를 꺼놓고 비행하다 랜딩기어 전개를 누락), 1994년 2033편 오버런사고(악천후 착륙강행 중 부기장의 복행요청 무시 및 기체 동시조작, A300 전소), 1997년 801편 추락사고(악천후 착륙강행 중 기장의 착각, 228명 사망, 747 대파), 1998년 8702편 오버런사고(기장의 역추진장치 작동 실수, 747 전손), 1999년 8509편 추락 사고(기장석 계기고장 후 부기장의 회항요구 및 조종권 전달요구 무시) 등 대형사고가 계속되며 위험한 항공사로 악명을 떨쳤다.
이후 대한항공은 위와 같은 기형적 사내문화를 고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 2000년부터는 사망사고가 발생한 적이 없으며 현재는 가장 안전한 항공사 중 하나로 인정받고 있다.
3.2. 극지 항법의 어려움
이때는 위성 신호를 기반으로 위치를 측정하는 GPS가 개발되기 전이었고, 자이로스코프로 가속도를 적분해 스스로의 위치를 추적하는 관성항법장치는 민간 항공기에는 흔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사고기인 보잉 707을 포함한 당시의 항공기들은 LORAN이라는 지상 기반 삼각측량 시스템을 이용해 자신의 위치를 확인했다. GPS가 위성의 신호를 이용하는 것처럼 LORAN은 지상의 기지국이 발신한 신호를 이용해 자신의 위치를 측정하는 방식이다. 지상의 기지국이 고장 등으로 작동을 멈출 경우 LORAN이 작동하지 않으므로 각 항공기에 탑승한 항법사가 자이로컴퍼스, 나침반, 육분의, 태양의 방위 등 고전적인 방법으로 스스로의 위치를 파악해야 했다.소련에서 석방된 후 코펜하겐 공항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이근식 항법사는 비행 당시 LORAN이 작동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비행 경로상 아이슬란드와 그린란드에 LORAN 스테이션이 있어 항로를 정확히 잡아주었어야 하지만, 당시 두 스테이션이 모두 작동하지 않아 LORAN이 먹통이었다는 것이다. 이근식 항법사는 다른 계기를 이용해 항로를 지시했으며 이상함을 느낀 기장과 논쟁이 생기자 항법사는 주변의 LORAN 스테이션에 직접 교신을 시도했지만 이 역시 응답을 받지 못했다.
그 다음 옵션인 자이로컴퍼스는 고위도로 갈수록 지구 자전 반경이 감소함에 따라 동쪽으로 틸트와 드리프트가 생겨 측정값의 신뢰도가 감소하여 LORAN보다 부정확하다. 게다가 항법사의 증언과 판결 기록에 의하면 당시 902편의 자이로컴퍼스는 애초에 고장난 상태였다. 판결 기록에서는 항법사가 이 고장난 자이로컴퍼스의 지시값을 사용했기 때문에 이러한 문제가 발생했다고 명시하고 있다.
마지막 옵션인 나침반은 당시 902편이 지나던 북극항로가 자북극 근처를 통과하므로 편각이 너무 커져 올바른 방향을 알기 어렵다. 902편의 비행 궤적이 자북극 근처에서 크게 틀어지는 것을 보면, 고장난 자이로컴퍼스 대신 나침반을 이용해 방향을 잡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대한항공 902편의 비행 경로. 자북극 근처에서 경로를 크게 벗어난다. | 사고 당시의 지자기 지도와 비행경로를 겹쳐보면 어떻게 이렇게 큰 경로 오류가 가능했는지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다. |
측정장비를 신뢰하기 어려웠다면 육분의를 사용해 방위를 직접 관측할 수도 있었으나 구름이 많아 사용하지 못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하지만 해가 떠있는 위치가 반대가 된 것은 특별한 지식이 없는 탑승객들도 창밖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했으며 기장도 항로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싸웠다는 것을 보면 이를 모르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태양의 방향이 반대가 되었더라도 북극권 극점 근처에서는 방위의 특성이 일반적인 중~저위도 지역과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방향에 이상이 있다는 것은 알아도 정확히 어떤 방향인지 알아채는 것은 계기 없이는, 특히 아음속으로 고속비행하는 항공기에서는 매우 어렵다.
3.3. 승무원의 과실
3.3.1. 조종실 포커설(신빙성 낮음)
사고 직후 승무원들의 과실에 대하여 많은 논란이 있었다. 1978년 4월 29일 동아일보 기사에 따르면 유엔주재 소련 대사 "유리 포킨"은 승무원의 업무 태만을 원인으로 지목했다.그는 KAL기가 소련의 민감한 영공에서 2시간이나 비행한 것은 전례없는 일이라고 말하고 KAL기장은 조종실 뒷좌석에서 카드놀이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소련 요격기들의 신호를 보지 못하고 항로를 이탈케 했던게 틀림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당시 논란이 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1983년 11월호 문예춘추 기사 속 일본 승객의 증언 중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동생이 죽은 직후라 한국 승무원에게 엄하게 다그쳤다. 어느 승무원이 더듬더듬하는 일본어로 『용서하십시오. 카드를 하고 있었습니다』고 말하는 것을 확실히 들었다
이에 대해 민병권 당시 교통부 장관은 국회 간담회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1978년 7월 14일자 동아일보 기사에 언급되어 있다.
항간의 포커 설에 대해 언급, 좌석이 좁아 포커를 하려고 해도 할 수 없는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보잉 707 조종석의 모습. 항공엔지니어 왼쪽(뒤쪽)의 빈 자리가 항법사 자리이다. |
보잉 707의 조종석이 실제로 비좁다는 점이나, 당시 이근식 항법사가 전달한 변침 방향을 두고 김창규 기장, 차순도 부기장이 이상하다고 항법사와 다퉜다는 증언, 조종석 상황을 알 방법이 없는 객실 승무원이 서투른 일본어로 말한 것을 탑승한 비행기가 미사일에 맞은 위급상황에서 방금 동생이 죽어 흥분한 승객이 들었다는 내용인 점(즉 잘못 들었을 가능성이 높다) 등을 종합하면 실제로 카드놀이를 했기 때문에 문제가 생겼다고 보기는 어렵다. 소련측이 이 얘기를 꺼낸 것 역시 딱히 증거가 있어서라기 보다는 비상착륙 후 일본인 승객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나온 증언이 자신들에게 유리했으므로 얘기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3.3.2. 항법사의 업무상 과실
한국 정부의 사고조사결과는 지금도 비공개 상태이나 고 방태환씨의 유족이 대한항공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청구소송 과정에서 그 요지가 공개되었다. 결론적으로 이근식 항법사의 과실이라는 것이다. 서울지법과 고등법원 재판부는 정부의 사고조사결과를 근거로 대한항공 과실로 방태환씨가 사망한 것을 인정하였으나[46] 소 제기 시점이 바르샤바 항공운송협약상 항공사고 손해배상 청구기한인 2년이 지났으므로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47] 1983년 3월 29일 서울고등법원 판결문에는 다음과 같이 언급된다.그린랜드 동남방 메스터빅을 통과한 후 북극 항로에서 비행방향의 설정 기준이 되는 방향 자이로에 내부 결함이 생겨 과도한 내부 오차가 발생했다. 북극 항로는 8시간 이상 되는 난코스로서 INS가 설치되지 아니한 위 여객기에 항법사로서 탑승한 이근식은 지상 항법 보조 시설, 천체 관측, 육안에 의한 지점 확인 등으로 운항 위치를 확인, 수시로 방향 자이로가 극지에서 일으키는 오차를 수정하여야 했었다. 이근식은 이 주의의무를 태만히 하였다. 불량한 자이로가 지시하는 인공 자오선 항로를 따라 운항하도록 방치했다. 여러 가지 보조 항법을 통한 위치 확인 및 항로 수정작업도 하지 않았다. 여러 과실이 경합되어 이 사고가 발생한 사실을 인정할 수 있고 달리 반증이 없다
즉, 항공기의 자이로컴퍼스가 고장나서 방향을 잃은 것이 근본 원인이나, 이를 수시로 체크하여 바로잡았어야 할 항법사가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아 이러한 대형 사고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같은 재판에서 김창규 기장은 증인으로 출석하여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기장석 뒷자리에 앉은 이근식씨에게 항법 장치의 이상 유무를 물었으나 정상이란 대답을 들었다. (중략) 항법사의 잘못으로 소련 영공에 들어간 것으로 추정된다.
사건 후 김창규 기장과 차순도 부기장의 언론 인터뷰 내용도 이러한 내용으로 일관되며, 이근식 항법사가 기자회견 등에서 보여준 모습 등까지 고려하면 항법사의 과실로 이해하는 것이 맞는 것으로 생각된다. 아래는 중앙일보 1978년 5월 1일 기사이다.
코펜하겐 공항[48]에서의 두 승무원의 기자회견을 통해서도 KAL기 항로이탈에 얽힌 궁금증은 풀리지 않았다. (중략) 김 기장과 같은 노련한 북극항로 조종사가 어떻게 상식적으로 납득이 안 되는 이상할 정도의 항로이탈을 하게 되었는가 (중략) 김 기장과 이 항법사는 어떻게 항로이탈을 그렇게 많이 하게 되었느냐는 질문에 대답을 회피하는 인상을 주었다. (중략) 회견을 하는 동안 이 항법사는 줄곧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2009년 2월에 사건 발생 30년이 경과해 비밀이 해제된 당시의 정부 비밀 외교문서에도 항법사의 과실로 설명하고 있다. 이 내용이 공개되자 2009년 당시 78세였던 이근식씨 본인은 "사실과 다르며 상당 부분 날조됐다"면서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려 하였다. 아래는 2009년 2월 27일 동아일보 기사이다.
이씨는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항로 이탈은 항법사의 판단 착오가 아니라 조종사의 과실이었다"고 했다. 이 항법사는 "당시 대한항공 707기는 자이로콤파스가 고장이었으며 비행시간을 지키기 위해 안전을 무시한 비행을 했다"며 "승객들의 안전을 위해 회항을 했어야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씨와 동승했던 차순도 부기장 역시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이씨가) 항법을 잘못한 것"이라고 밝혔다. 김창규 당시 기장도 차 부기장과 같은 주장을 하고 있다.
이씨는 또 "기장의 말과 달리 당시 항로에는 구름이 잔뜩 끼어 항로 설정에 어려움이 있었다"며 "그런데도 기장은 구름 띠를 따라 1시간 이상 북으로 조종하는 바람에 항로를 이탈했다"고 주장했다. 이 과정에서 이씨와 기장은 '서로 자기가 주장하는 항로가 맞다'며 논쟁을 벌였다고 한다.
이씨는 또 "기장의 말과 달리 당시 항로에는 구름이 잔뜩 끼어 항로 설정에 어려움이 있었다"며 "그런데도 기장은 구름 띠를 따라 1시간 이상 북으로 조종하는 바람에 항로를 이탈했다"고 주장했다. 이 과정에서 이씨와 기장은 '서로 자기가 주장하는 항로가 맞다'며 논쟁을 벌였다고 한다.
1978년 5월 1일 귀국 중간 경유지인 스톡홀름 공항의 김창규 기장(가운데)와 이근식 항법사(왼쪽) | 1978년 5월 3일 김포공항에 도착한 김창규 기장(가운데)와 이근식 항법사(왼쪽) |
그렇지만 이러한 논란 속에서 김창규 기장의 조종사 자격은 취소되었고 책임을 느낀 김 기장은 대한항공에 사표를 제출했지만, 이는 수리되지 않고 대신 지상 근무를 했다. 그러나 그는 9개월 만인 다음해 1월에 다시 조종사 자격에 응시, 합격했으며 곧바로 동형기인 707기 기장으로 복직했다. 5월에는 대한항공 최고 영예인 창공금상을 받고 7월에는 외국인으로서는 최초로 미국에서 AVG-CNAC 항공인상을 수여받는 등 책임을 덮어씌우기는커녕 뛰어난 조종 실력으로 비상착륙에 성공시켜 대참사를 막은 공로를 인정받아 그 공로에 맞는 명예로운 대우를 받았다. 부기장과 기관사, 항법사 역시 김창규 기장과 함께 사표를 제출했으나 항법사 이근식만 사표가 수리되어 떠났고, 부기장과 기관사는 조사가 끝난 뒤 전원 복권, 복직되었다. #
당시 상대측이었던 소련도 후일 비슷한 사고를 저지르게 되는데, 장거리 폭격 훈련 중이던 Tu-22 폭격기가 항법사의 실수로 원래 정해진 비행코스를 정확히 180도 반대로 비행하여 이란의 수도 테헤란 상공까지 침범한 사고가 있었다.#
3.4. 냉전기 미-소 대립과 첩보전
잘못된 항로로 날아가던 대한항공 902편은 미군 전진기지 및 나토의 소련 방공 감시망이 있는 노르웨이 방공망 일부를 지났는데, 시간이 흐른 뒤 93년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 의하면 김창규 기장은 나토 방공망 주파수로 전진기지와 2차례 무전 타진을 했지만, 노르웨이 기지에서 왜인지 모르지만 계속 진행하라는 답변을 들었다고 했다. 이 인터뷰에서 그는 '귀국 후 만난 미 정보요원이 당시 소련 공군 상황에 대한 매우 자세한 얘기를 했다.'고 주장하며, 이런 미군이 이 상황을 몰랐을 리 없고 그들이 소련 방공망을 테스트하기 위해 902편을 희생양으로 삼지 않았나 하는 의혹을 제기했다.냉전기 미군 항공기들은 고의적으로 소련 영공을 건드리고는 반응을 보는 작전을 수행해왔다. 예를 들어 NSA의 RC-135는 소련과 그 위성국들의 영공을 따라 비행하며 전자정보를 수집했는데, 그러다가 갑자기 영공을 침범한 다음 그에 대한 반응을 살피는 작전도 주기적으로 수행했다. 이 과정에서 얻은 정보로 방공전술 뿐 아니라 방공망의 약점과 결함을 분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주기적·고의적으로 적국의 영공 혹은 방공식별구역을 조금씩 침범하여 방공망의 반응 속도, 감지 능력, 대응 전술 등을 파악하는 것은 지금도 공군의 주요 업무 중 하나이다. 중국, 러시아 공군기들이 우리나라 영공이나 방공식별구역을 주기적으로 침범해 종종 뉴스에까지 나는 것도 이러한 목적이고, 그 유명한 오시라크 원자로 공습에서도 이스라엘 공군기들은 이란 공군이 그동안 고의적인 영공 침범으로 파악한 이라크 방공전술의 헛점을 전달받아 성공적으로 침투할 수 있었다.
902편 격추 사건에서는 다행히 사망자가 2명에 그쳤으나 4년 후 수백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까지 연이어 발생하자 이에 대한 의혹이 쏟아져 나왔다. 민항기가 소련 영공을 깊게 침범하도록 유도하여 소련의 반응을 본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소련측에서 의심하듯이 기체에 스파이 장비를 달고 조종사가 직접적으로 직접적인 스파이 행위를 하도록 시킨 것 아니냐는 의심이 먼저 나왔으나, 그렇게 할 이유가 도저히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판단이었다. 그렇게 했다면 조종사, 항공사, 정보기관 및 정부 등 연관된 사람과 기관이 너무 많아져서 사실이 새어나갈 가능성이 높고, 그 경우 부정이 불가능하게 직접 연관되므로 정보기관이나 정부에게 정치적 외교적으로 확실한 자살행위이기 때문이다. 이 모든 리스크를 감당했다고 쳤을때 얻는 것은 신호정보인데 이것은 굳이 민간인 수백명의 목숨을 걸지 않아도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
"CIA 등 미 정부 기관이 다른 방법으로도 쉽게 얻을 수 있는 정보를 위해 무고한 269명의 민간인의 희생을 감수한다는 것은 믿기 어렵다."
"to believe that an agency of the American government . . . the CIA . . . would put the lives of 269 innocent civilians at risk to obtain information and intelligence readily available by other means."
"위성이나 SR-71을 두고 굳이 민항기를 보내서 사진을 찍는다고 해서 뭘 얻을 수 있는가?"
"What would be gained by sending a civilian airliner to take photographs, when the job was already being done by a satellite or, for that matter, by the SR-71 Blackbird...?"
Richard Rohmer (1984), "Massacre 747".
"to believe that an agency of the American government . . . the CIA . . . would put the lives of 269 innocent civilians at risk to obtain information and intelligence readily available by other means."
"위성이나 SR-71을 두고 굳이 민항기를 보내서 사진을 찍는다고 해서 뭘 얻을 수 있는가?"
"What would be gained by sending a civilian airliner to take photographs, when the job was already being done by a satellite or, for that matter, by the SR-71 Blackbird...?"
Richard Rohmer (1984), "Massacre 747".
"왜 이런 위험한 임무에 민항기를 개조해 보내겠는가? 우리는 리스크 없이 정찰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들을 육상, 해상, 공중, 우주 모두에 이미 가지고 있다. 애초에 그런 주장을 진지하게 하는 사람들은 없다. 그 주장을 부정하는 정부 관료들만 즐거운 것으로 보인다."
"why send a civilian airliner on a high-risk mission carrying photo- or electronic-reconnaissance gear when we already have a wide variety of no-risk eavesdroping and photo-taking facilities on land, at sea, in the air and in space? Why, indeed! The truth is, no one was making such an allegation with any seriousness; and yet govemment officials seemed to derive much satisfaction from denying it."
Sugwon Kang (1985), "Flight 007: Was there foul play?" Bulletin of Concerned Asian Scholars, 17:2, 30-48.
"why send a civilian airliner on a high-risk mission carrying photo- or electronic-reconnaissance gear when we already have a wide variety of no-risk eavesdroping and photo-taking facilities on land, at sea, in the air and in space? Why, indeed! The truth is, no one was making such an allegation with any seriousness; and yet govemment officials seemed to derive much satisfaction from denying it."
Sugwon Kang (1985), "Flight 007: Was there foul play?" Bulletin of Concerned Asian Scholars, 17:2, 30-48.
그보다 더 합리적인 의심은 민항기를 단지 벌집을 들쑤셔놓는 역할("a stick jammed into a beehive")로 당사자들 모르게 사용했다는 것이다. 상대 방공망을 더 많이 들쑤셔 놓을수록 더 많은 반응을 하므로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는데, 군용기로는 그런 수준의 도발 행위를 하기가 어렵다. 영공 침입 자체는 어렵지 않지만, 만에 하나 그런 행위를 하다 격추될 경우 정치적 외교적 리스크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하지만 군용기 대신 제 3국의 민항기가 "실수"로 소련 영공으로 깊숙히 들어간다면, 정보기관 입장에서는 리스크 없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상황이 된다.
(이런 작전을 계획하려면) "처음에는 군용기처럼 보이지만 나중에는 분명히 민항기로 식별될 기체를 제공해야 할 것이다"
(the planners of such a mission) "would need to offer an aircraft of initially apparently military character, which would turn out later to be apparently civilian."
P.Q. Mann (pseudonym), "Reassessing the Sakhalin Incident," Defence Attache, June, 1984, p. 48.
(the planners of such a mission) "would need to offer an aircraft of initially apparently military character, which would turn out later to be apparently civilian."
P.Q. Mann (pseudonym), "Reassessing the Sakhalin Incident," Defence Attache, June, 1984, p. 48.
전자전기, 조기경보기, 공중급유기 등 여러 군용기들은 여객기를 베이스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민항기는 영공 침입 초반에 군용기와 구분이 되지 않는다. 따라서 영공 침입시 군용기와 마찬가지로 상대 방공망의 반응을 최대한 이끌어낼 수 있으며 (영공 밖의) 전자전기나 광학정찰기, 위성 등이 수집할 수 있는 정보를 충분히 제공한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민항기라는 것이 식별되면 대한항공 902편의 경우와 같이 그 과정이 어떻든 결과적으로는 민항기는 무사히 빠져나올 가능성이 높다. 또한 민항기이므로 상대국이 군사적 의도를 증명하기 어려워 정보기관이나 정부가 지는 리스크도 거의 없으며(plausible deniability), 만일 상대국이 민항기를 격추할 경우 되려 막대한 정치적 외교적 리스크를 뒤집어씌울 수 있다.
실제로 레이건 대통령은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 직후부터 대한항공 902편 사건까지 언급하며 소련을 맹렬히 비난하였고[49] 막대한 정치적 승리를 거뒀다. 미국 언론은 일제히 소련에 대한 비난을 쏟아냈고, 민항기를 격추해 269명의 무고한 민간인을 죽인 소련은 국제정치에서 입지가 크게 약화되었다. 그동안 레이건의 대소련 강경정책은 미 의회의 반대가 심했으나 미국 내에서 강렬한 반소여론이 형성되자 미 의회는 그동안 반대하던 거의 모든 것을 통과시켰다. 여기에는 핵무기 감축 중지, 영국·독일·이탈리아 핵미사일 배치, LGM-118A 피스키퍼 개발, 레이저 무기·화학 무기 개발, 레바논 파병 등이 포함된다.
(대한항공 007편은) "CIA에 의해 세밀하게 설계된 첩보 도박이며, 이런 도박은 과거에도 수십번 있었다."
(007 was part of) "an intricately designed intelligence gamble set up by the CIA, a gamble it has taken dozens of times in the past."
Ralph W. McGehee[50], Morning Star (London), June 24, 1984.
(007 was part of) "an intricately designed intelligence gamble set up by the CIA, a gamble it has taken dozens of times in the past."
Ralph W. McGehee[50], Morning Star (London), June 24, 1984.
대한항공은 소련 영공을 따라 비행하는 유럽/미주 노선을 상시 운항하고 있었으며, 상술한 바와 같이 안전규정을 잘 지키지 않아 대형 사고가 계속 일어나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으므로, 실수를 기다리거나 혹은 실수를 고의로 유도하기에 적절했을 수 있다.
2번의 연속된 격추 사건 후 제기된 주요한 의문은, 미국이 대한항공 902편이나 007편의 항로 이탈을 정말로 몰랐느냐는 의문이다.[51] 미국 정부나 미국 연방항공청의 공식입장은 소련 항공기만 감시하고 있었고 대한항공 여객기는 격추될 때까지 전혀 몰랐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고 지역의 지상, 해상 레이더 밀도를 보면 이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주장이다. 이 문서의 902편이 지나간 북극해·무르만스크 지역이나 4년후 007편이 지나간 알래스카·사할린 지역은 소련의 주요 군사기지 근접지역으로 군사적으로 매우 민감하며 수많은 지상 레이더 기지와 해상 레이더, 방공함, 초계기 등이 존재해 24시간 공역 감시를 수행하고 있었다.
이 문서에서 다루는 1978년 대한항공 902편의 경우 그린란드에 있는 미 공군의 툴레 공군기지[52] 위를 지나 그 근처에서 급격히 항로를 변경했고, 이어 노르웨이 최북단 수레이싸(Sørreisa) 나토 방공기지의 호닝스바그(Honningsvåg) 레이더 기지[53]를 지나쳐 소련 영공으로 직행했다. 더구나 무르만스크에서 소련군이 군사훈련을 진행중이었으므로 이 해역에는 나토 방공함들이, 공역에는 나토 조기경보기와 전자정보수집기 등이 24시간 초계중이었을 것이다. 보잉 707 같은 대형 항공기가 이런 감시망에서 몇시간 동안이나 발견되지 않고 소련 영공으로 직행했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1983년 대한항공 007편 역시 항로상에 다수의 RC-135와 최소 1대의 P-3 오라이언이 있었고, 격추장소인 사할린 근처 동해상에는 녹스급 프리깃 USS 배저와 코브라 쥬디 레이더를 탑재한 USS Observation Island가 있었다. 또한 007편은 캄차카 반도 앞 쉠야 섬(Shemya island)의 코브라 데인 및 코브라 탈론 레이더를 지나갔는데 이때 이미 항로를 크게 벗어난 상태로 캄차카 반도의 소련 영공을 깊이 가로지르고 있었다. 코브라 탈론 레이더의 감시반경은 2,070마일로 007편이 이륙한 알래스카 앵커리지 공항부터 격추된 사할린 상공까지를 모두 포함한다. 코브라 탈론 레이더는 1968년 시애틀에서 일본으로 향하다 쿠릴 열도의 소련 영공을 침범해 강제착륙당했던 시보드 월드 항공 253A편을 이륙부터 요격, 강제착륙까지 전 과정을 보고 있었던 것으로 이미 유명했다.
또한 007편의 항로는 일본 홋카이도 와카나이의 미군 위상배열 레이더 기지나 아시아 최대의 NSA 거점인 미군 미사와 공군기지의 감시범위이기도 했다. 007편 격추가 공식 발표된 후 AP통신 기자가 미사와 공군기지의 시설에 대해 질문하자 미국 국방성 관리는 "사할린을 지나거나 사할린에서 이륙하거나 사할린 근처를 비행하는 물체 중 우리가 감시하지 않는 것은 없다"고 말했다. 기지의 위치나 규모, 장비를 생각하면 당연한 얘기이기도 하다.
007편 격추 이틀 후 미국 UN 대표 찰스 리첸스타인은 UN 안보리 회의에서 "007편의 항로를 추적하고 있었느냐"는 소련측 질문에 "당신들이 007편을 추적하는 것을 추적하고 있었다"[54]라고 대답했다. 이는 "소련 항공기만 추적했다"는 공식 입장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이미 상황을 알고 있었다는 의미 또는 007편도 추적이 되고 있었다는 의미가 되기도 한다. 이후 배포된 보도자료에서 이 발언은 삭제되었고 기자가 미국 정부 관리에게 이 발언의 의미에 대해 묻자 "민감한 정보와 연관된 것은 설명한 적 없다. 의미라면 소련이 무엇을 봤는지 우리에게 정보가 있다는 것이다."라고 에둘러 대답을 피했다.
대형 여객기를 당연히 발견했어야만 하는 수많은 고성능 감시 레이더와 함선, 항공기들 중 그 누구도, 아무도, 902편 및 007편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주장은 너무나 비현실적이다. 이는 902편 및 007편이 레이더에서 확인되고 있었음을 숨기려 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902편 및 007편이 레이더 상에서 추적, 감시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007편 격추 후 대한항공과 보잉, 리톤 인더스트리[55]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는 앵커리지 공군기지에서 실제로 레이더로 007편을 추적하고 있었다는 증언이 나왔다. 격추 이전의 비행경로가, 최소 그 일부라도 추적되어 테이프에 저장되었으나 사건 직후(soon after the diaster) 공군이 갑자기 이 데이터를 삭제했다는 것이다. 변호사는 원래 항적기록 테이프는 15일마다 포맷해 재사용하기에 주기적으로 삭제되며, 이 데이터를 보존하지 않고 15일보다 더 짧은 기간 후 삭제한 것은 이 테이프에 그 항적기록이 있는줄 몰랐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필요가 없는 데이터이기 때문에 공군이 굳이 나서서 먼저 지워버렸다는 말은 납득하기 어렵다.
이런 모습들을 종합하면, 당시에 발견해놓고 나중에 상황상 곤란하니 못봤다고 하는 정도가 아니라, 더 나아가서 감시시설들이 길잃은 민항기(stray airliner)에 개입하지 않고 (영공을 침범할 때까지) 조용히 추적만 하며 내버려두는 것이 사전에 조율되어있는 임무였을 수 있다.[56]
당시 미국 정부는 사고기를 추적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격추를 막기 위해 소련 및 항공기에 직접 개입할 방법이 충분히 있었음에도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았다는 주장[57]이나, 사고가 나도록 고의로 방치한 것은 책임을 회피하려는 방법일 뿐 미국 정부에게 책임이 있다는 주장[58]도 제기되었지만, 상기한 바와 같이 이와 같은 "민항기의 사고"에서 제 3자의 의도성을 증명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나 사고 당시의 정황들과 증언들을 살펴보면 최소한 미군이 902편 및 007편의 항로 이탈을 알았다는 것이나 이를 바로잡지 않고 그냥 두고 지켜봤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4. 사고 이후
5년 후인 1983년 9월 1일 대한항공의 KE007편 보잉 747-200이 소련 방공군의 공격으로 사할린 상공에서 추락하여 승무원과 승객들이 전원 사망한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 이후 영구결번 된 것과 달리[59], 파리발 인천행인 KE902편은 2018년까지 쓴 후 KE910편으로 바뀌었다가, 2019년 4월부터 다시 KE902편으로 바뀐다.[60] 중국국제항공 129편 추락 사고가 일어난 중국국제항공 CA129편 역시 유사한 사례.이후 한국과 소련이 수교하면서 대한항공은 1990년에 소련 영공 통과 승인을 받았다. 김창규 기장이 모스크바(셰레메티예보)로 가는 보잉 747의 기장을 맡았으며[61], 1991년 인터뷰에서는 소련 영공에 들어갈 땐 지금도 아찔하다면서 소련 정부가 902편, 007편 격추에 사과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지만 소련 정부는 사과하지 않았고 소련은 그해 12월에 붕괴했다. 러시아 정부도 사과는 하지 않았다.[62] 김창규 기장은 이후 미국 샌디에이고로 이민을 갔고 2009년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
대한항공은 시베리아 영공의 통과 승인을 받아 운항 당시 에어버스 A380-861으로 모스크바 상공을 관통하면서 파리에 취항 중이다.[63] 프랑크푸르트 암마인 국제공항으로 가는 아시아나항공의 A380도 마찬가지. 보잉 747-200 시절에는 한때 모스크바를 경유하기도 했다.[64] 현재 모스크바 행은 아에로플로트에서 777-300ER과 A330-300을 번갈아 가며 일 1회 투입중이고 대한항공은 보잉 787로 역시 일 1회 운항 중이다.[코로나19이전] 물론 우크라이나 상공은 말레이시아 항공 17편 격추 사건이나 시베리아 항공 1812편 격추 사건이 일어나기 전부터 우회해서 운행하고 있다.
2015년에는 같은 편명의 비행기 기내에서 가수 김장훈이 흡연을 하다가 적발되기도 했다. 약식기소되어 벌금 100만원 처분을 받았다.
2018년, 당시 사고기에 탑승했던 일본인 승객 중 한 명이었던 작가 오카베 치즈코는 불시착부터 일본으로 돌아오기까지의 과정을 담은 책, 「もうすぐだから」을 냈다. 그녀는 이 책으로 제35회 프레스토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의 영향으로 2022년 3월부터 한국 국적기들이 러시아 영공진입을 중단하면서, 2023년 현재의 대한항공 901/902편은 중국-카자흐스탄-튀르키예 방면으로 우회 운항 중이다. 남측으로 우회하는 경로 대신 제트기류를 타고 동쪽으로 우회하는 길이 더 효율이 좋은 일본 출발 서유럽행 항공편들은 일본 출발편에 한해 냉전 당시처럼 앵커리지 방면으로 우회운항하나 중간 경유는 하지 않는다.
2021년 5월 16일,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응답하라 KE902"라는 제목으로 방송했다.
2024년 1월 18일,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에 방영되었다.#
이 사건은 1987년 1월 1일 박완일(당시 동국대학교 교수)의 강의[66]에서도 언급되었다.
[1] 그리고 저 초록색 항로는 지도에서 왜곡되어 휘어 보이는 것이고 실제로는 직선인데, 지구는 구체이기 때문이다. 냉전 시기 소련의 영공을 침범하지 않는 선에서 최적의 경로인 것이지 실제 구면상에서 최단거리가 아님은 감안하자.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여파로 유사한 형태로 돌아가는 항로가 다시 재현된 바 있다.#[2] 차르코프의 증언으로는 당시 핀란드 국경과 80km 거리였기 때문에 당시 902편의 900km 속도면 6분 안에 소련 영공을 벗어난다. 아직 항공기의 정체가 확실하지 않아 적국의 군용기일 가능성이 있고 이 경우 절대 놓치면 안 되므로 격추를 명령했다고 한다. 나중에 그는 이 결정에 대해 훈장을 받았다.[3] 1983년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 4일 후 레이건 대통령이 소련을 비난하는 과정에서 이를 언급하기도 했었다. "그 사건(902편 격추) 때는 소련 요격기 파일럿은 분명히 민항기 표식을 식별하고 어쨌든 격추하라는 명령에 계속 항의했었다."In that instance, the Soviet interceptor pilot clearly identified the civilian markings on the side of the aircraft, repeatedly questioned the order to fire on a civilian airliner and was ordered to shoot it down anyway."[4] 핀란드 로바니에미 항공 관제소에 모두 기록됨. 2000년에 공개된 교신 기록에 따르면 미사일에 맞기 전까지 김창규 기장은 대한항공 902편이라는 것을 세번 분명히 전달하였다.[5] 당시 50세[6] 좌석번호 19A[7] 이는 상술된 김창규 기장의 항법등을 모두 켰다는 진술과 일치하는 부분이다.[8] 방태환, 36세 대우건설 리비아 건설본부 차장, 좌석번호 24E.[9] 좌석번호 23A[10] 부상이 심각해 피격 직후 이미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영국인 승객 윌리엄 하워드는 러시아인들의 의료지원이 느리고 부적절해 그가 죽은 것이라고 주장했다.[11] 좌석번호 23B, 허벅지와 종아리에 파편상[12] 좌석번호 23C, 발에 파편상[13] 당시 대한항공 902편이 일본행 노선이 아님에도 일본인이 많이 탑승해 있었던 이유는 보잉 707의 항속거리 특성상 테크니컬 랜딩이 필요했는데, 그 위치가 일본이었다. 또한, 당시 대한항공의 비행기 티켓 가격은 그 당시 일본항공의 3분의 1 수준으로 싼 편이라, 일본인들이 많이 탑승하였다. 이는 IATA 규정상 자국민에게는 외상사보다 싸게 팔수 없기 때문인데 중국국제항공 129편 추락 사고의 경우에도, 중국인들보다 한국인들이 더 많이 탑승해 있었다.[14] 고고도는 기압이 낮아서 감압 상태가 5~10분가량 지속되면 전원 질식사하게 되므로 가능한 빨리 고도를 낮춰야 한다.[15] 속이 비어있고 면적이 넓어 느리게 떨어지고 있었다.[16]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미사일 피격 후 바로 비상착륙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상시 무선 감청 및 항공기 추적을 하던 소련 정보기관에서 항공기의 정체(편명, 항로, 기종, 항공사, 승객 수, 승무원 수)를 확인하고 방공부대 지휘관들에게 전달하여 민항기임이 확정된다.[17] 김창규 기장은 깊게 쌓인 눈이 적절한 저항력을 제공하여 정상적으로 정지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18] 미사일 피격에 의한 피해 제외[19] "Фантастический маневр гражданского летчика"[20] 출처: Корейский Боинг в Карелии (2018), Юрий Викторович Шлейкин[21] 당시 무르만스크에서 소련군의 군사 훈련이 진행 중이었다. 드미트리예프 대령은 지금도 고의적인 도발로 생각한다고 한다.[22] 대한항공 902편으로 정체가 확인된 후 소련군 지휘관들도 격추되지 않은 것에 안도했다.[23] 예를 들면 이때 발사된 공대공 미사일인 R-60의 탄두 무게는 3kg이지만 당시 소련 방공군이 사용하던 SA-2 지대공 미사일의 탄두 무게는 200kg이다.[24] 유명한 AIM-9 사이드와인더의 탄두가 9.4kg, AMRAAM의 탄두가 18kg이다. 그리고 R-60은 공대공 미사일 중에서도 가장 작은 편에 속하며, 탄두 중량이 3kg에 불과하다.[25] 주변 군부대 병력이 출동하여 일대를 수색해 비상착륙한 항공기를 찾는데 2시간이 걸렸다[26] 호수 바로 앞의 Louhi는 이런 많은 인원을 수용할 시설이 없었다[27] 4월이라 다들 복장이 가벼운 봄옷과 샌들, 슬리퍼 등이었다.[28] 앞서 말한 시오자키 세이코의 기록[29] 이 지역 공산당 선전부의 영어교사였고 한밤중에 갑자기 불려나와 뜬금없는 백명의 외국인들을 보고 황당했다고 한다.[30] 오이는 러시아인들도 즐겨먹으니 쉽게 찾을 수 있었겠지만 당시 소련에서 바나나는 수입량이 적어 비싸고 귀한 과일인데다가 깡촌에서 찾기는 더더욱 힘들었을것이다.[31] October Railway Hospital, 1979년 해체됨[32] 예를 들어 이들이 셀러리를 요구했는데 셀러리라는 말을 생전 처음 들었다고 한다.[33] 김창규 기장이 심문 내내 굉장히 침착했고 말보로 담배를 피우면서 대답했다고 한다. 위의 제10방공군 지휘관과 마찬가지로 지금도 첩보 작전이었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한다.[34] 아나톨리 케레포프와 세르게이 블로보드치코프[35] 일본인 승객들의 경우, 이미 소련과 일본이 사건 발생 한참 전인 1956년에 수교한 터라 소련과의 수교 관계가 없던 한국 승객들보다는 사정이 나았지만, 수교만 했지 냉전 시절인 만큼 체제가 다른 양국의 관계는 그다지 좋지 못해, 사건 당시 일본 정부로부터 큰 도움을 받지는 못했다.[36] 미주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던 중 이륙 후 좌표가 잘못 입력된 것을 뒤늦게 발견했고, 근처에 비행하던 JAL기를 따라 일본 상공까지 간 뒤 한국으로 나침반 비행을 해 겨우 도착한 사례도 있다.[37] 항공기 INS는 좌표 입력시 조종승무원 세명이 3대의 INS에 각자 입력하며 매번 크로스체크 되도록 규정되어 있다. 하지만 대한항공은 시간을 아끼기 위해 다른 승무원들이 각자 다른 일을 하는 동안 부기장이 혼자 다 입력해놓으면 나중에 기장이 확인하는 식이었다. 이마저도 대개 시간이 없어 기장이 입력된 숫자 500여개를 일일이 체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38] 이를 경험하지 않은 대한항공 조종사가 없을 지경이었다. 다만 최대이륙중량 초과의 경우 대체로 카고 관리팀에서 자기 주머니 채우기 위해 뻔뻔하게 이륙중량보다 더 실어놓고, 이륙불가라고 하면 칵핏에 배째라하는 경우가 많았다. 카고관리팀 하면 (떼어먹은 돈으로)매년 아파트 한 채씩 더 산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으니...[39] 대한항공 내부 기록에 따르면 회사에 보고된 사고가 1982년까지 16년간 307건이었다. 1976년 30건, 1978년 30건, 1979년 37건, 1980년 39건으로 회사에 보고될 정도의 경미하지 않은 사고가 한달에 2~3번씩은 꾸준히 발생한 것이다.[40] 시골 경운기도 아니고 사람이 수백명 탄 대형항공기이다.[41] 주로 일본 경유 노선을 통해 일본의 미주/유럽 항공수요를 많은 부분 차지했다. 902편도 일본 하네다 경유 노선이다.[42] 참고로, 정도만 달랐지 안전불감증은 과거 항공업계의 전세계적 트렌드와도 같을 정도로 만연돼 있었다. 특히, 60년대 초중반 항공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자, 전세계의 항공사들이 양적 성장에 매진할 수밖에 없었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항공사고와 병크가 터지고 말았던 것이다. 실제로 치명적이며 주요한 항공 사고들 상당수가 60-70년대에 집중돼 있으며, 80년대 들어서야 질적 성장과 안전에 대한 조치가 강화되며 중대 항공사고가 줄어들고 있는 편이다.[43] 당시 소련측 관계자들을 인터뷰한 기사들에는 기장의 뛰어난 조종실력에 대한 이야기가 꼭 나온다. 902편이 착륙할때까지 에스코트한 조종사 아나톨리 케레포프나 5방공군 지휘관 블라디미르 폴리힌 중령 등[44] 일본인 승객들도 터치다운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의 소프트랜딩을 항상 하던 대한항공을 선호했다.[45] 이것도 대한항공이 시간을 아끼려고 안전규정과 다른 내규를 만들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위에도 각주로 설명되어 있듯이, 애초에 INS는 이런 상황을 피하기 위해 입력시 여러명이 동시에 입력하며 서로 크로스체크 하도록 되어 있다. 대한항공이 시간을 아끼기 위해 부기장이 혼자 다 입력하고 기장이 나중에 이륙전에 체크하도록 했기 때문에 이런 상황이 생긴 것이다.[46] 1심에서는 대한항공이 3900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47] 고 방태환씨의 유족에 따르면 대한항공측이 배상금을 주고 합의할 것처럼 시간을 계속 끌다가 2년이 지나자 갑자기 소송하라며 협의를 중단해버렸으며, 유족들은 대한민국 민법상 제소기한인 3년이 되기 전에 서둘러 소를 제기하였으나 바르샤바 협약상 기한이 2년이라는 것은 중에 재판 중에야 알게 되었다고 한다.[48] 기장과 항법사는 둘만 따로 더 억류되어 있다가 5월 1일 풀려났고 덴마크를 경유해 귀국했다.[49] 하지만 이 때 어디까지 알고있었는지 너무 상세한 정보를 다 공개하여 감시능력을 노출하는 바람에 즈비그니에프 브레진스키 등 참모들의 걱정을 샀다.[50] CIA 25년 근무[51] 예: Washington Post, "FAA Can Warn Soviets of Stray Planes, Court Told". February 24, 1985[52] 북극 공역의 항공기와 탄도탄을 감시하는 미국 전략사령부 소속 공군기지로 이 곳의 레이더는 NORAD와 직접 연결되어 있음.[53] 이곳이 김창규 기장이 마지막으로 교신을 시도해서 계속 진행하라는 응답을 받은 그 나토 레이더 기지일 것이다.[54] "we followed you following the flight"[55] 007편 항법장치 제조사[56] "The very appearance of paralysis in the entire intelligence-monitoring apparatus in the region would seem to suggest that there may have been a massive coordinated effort to track the flight in total silence." Sugwon Kang (1985), "Flight 007: Was there foul play?" Bulletin of Concerned Asian Scholars, 17:2, 30-48.[57] Tom Bernard and T. Edward Eskelson, "U.S. Spy Plane Capable of Interceding in Attack on Korean Jet," Denver Post, September 13, 1983[58] John Keppel, "The Case of Korean Airlines Flight 007 and Constitutional Government: Notes for Southport Speech," revised January 29, 1985[59] 무르만스크에서 대한항공 902편에 미사일을 발사했던 알렉산더 보소프는 놀랍게도 이때는 사할린에 배치되어 있었다. 그러나 사건에 연관되지는 않았다.[60] 인천발 파리행은 KE901편이다. 인천행처럼 마찬가지로 2018년 경 KE909로 바뀌었다가 2019년 4월부터 다시 KE901로 되돌린다.[61] 그것도 902편으로 같았으나 앵커리지 대신 모스크바 경유 파리행이었다.[62] 다만, 보리스 옐친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하며 유감을 표하긴 했다.[63] 당연히 에어프랑스에서도 AF5092편으로 걸려 있다.[64] 심지어 모스크바 공항 첫 착륙 항공편이 902편이었다. 당시 1988년에 B747-200으로 정기 취항이 아닌 한소 외교체육 패키지 회담 때문에 앵커리지 대신 임시로 모스크바 경유로 갔었다. 물론 보잉 747-400의 추가 도입 과정에서 이 노선과 런던, 프랑크푸르트 행 항공편이 직항으로 전환되고, 이후에도 모스크바 경유로 유지되던 암스테르담-취리히, 비엔나, 로마, 마드리드 편도 90년대 중후반 이후 직항으로 대체된다. 물론 한국-러시아 간 직항은 아주 잘 다닌다. 아니 아예 극동 쪽은 항공 자유화로 여러 저가항공까지 가세하고 있다.[코로나19이전] [66] 대전에서 한 강의로 제목은 영원한 것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