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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3 07:56:12

중국국제항공 129편 추락 사고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이 문서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사고의 자세한 내용과 설명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항공 사건 사고 요약표
발생일 2002년 4월 15일
유형 CFIT, 조종사 과실
발생 위치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경상남도 김해시 지내동 돗대산
기종 Boeing 767-2J6/ER
운영사 중국국제항공
기체 등록번호 B-2552
출발지
[[중국|]][[틀:국기|]][[틀:국기|]] 베이징 서우두 국제공항
도착지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부산광역시 김해국제공항
탑승인원 승객: 155명[1]
승무원: 11명
사망자[2] 승객: 122명
승무원: 8명
생존자 승객: 33명
승무원: 3명[3]
파일:attachment/중국국제항공 129편 추락 사고/AirChina.jpg
사고 한 달 전, 베이징 서우두 국제공항에서 찍힌 사진.
파일:attachment/1299235958_129_02.jpg
사고 현장 사진.
1. 개요2. 사고의 개요와 원인3. 구조 구급활동4. 사고 이후
4.1. 수습4.2.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 문제4.3. 중국국제항공 내부의 대응
5. 이후 처리6. 사고 이후 신공항 논란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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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 중국국제항공 129편 추락 사고 (中国国际航空129号班机空难 四一五空难 釜山空难)
영어: Air China Flight 129

1. 개요



사고 당일 MBC 뉴스데스크 보도#

2002년 4월 15일 오전 11시 45분경 중국국제항공(Air China) 소속 CCA129편 보잉 767-200ER 여객기[4]김해국제공항에서 4.6km 떨어진 경상남도 김해시 지내동 동원아파트 뒤편의 돗대산(해발 380m) 기슭에 추락한 사고. 이 곳은 남해고속도로 김해 시내 구간에서 김해 시내 쪽에 보이는 약간 낮은 산이며 김해JC북부산TG 사이에 있다.[5] 그래서 사고 이후 잔해가 치워지기까지 남해고속도로에서 여객기 잔해가 보였다는 얘기가 있다.

사고기에는 한국인 136명과 중국인이 대부분인 외국인 19명 등 승객 155명과 승무원 12명 총 167명이 탑승하고 있었으며 이 가운데 129명이 사망하였다. 한국인이 많은 이유는 IATA 규정에는 무조건 자국민에게 비싼 값에 자국 국적기 티켓을 팔아야 되는 규정이 있으며 부산 출발을 통해 베이징 서우두 국제공항을 통한 전세계 환승 연계편까지 제공되기 때문이다.[6] 그래서 동일 노선을 운항하는 대한항공 비행기의 경우 중국 승객이 많다. 같은 이유로 2013년 7월 아시아나항공사고 당시에는 중국인이 많았다. 에어 프랑스 264편의 러시아 비상 착륙 때 승객 대부분이 한국인이었으니 맞는 말이다.

이 사고는 현재까지 대한민국 영토에서 일어난 항공사고 중 최악의 항공사고[7]이며 1993년 7월 26일에 전라남도 해남군 화원면 마산리에서 추락한 아시아나항공 733편 추락사고보다 인명피해가 많이 났던 사고이다. 더불어 김해공항의 안전문제가 도마 위에 올라 김해공항 이전 논란의 시발점이 되었으며 대한민국 영토에서의 마지막 여객기 사망사고다.

2. 사고의 개요와 원인

건설교통부[8]는 사고 직후 건설교통부 항공사고 조사위원회를 사고 현장에 급파했다. 이 사고는 김해국제공항의 관제당국인 한국, 보잉767의 제조국인 미국, 그리고 에어차이나의 소속국인 중국 3개국이 복잡하게 얽힌 사고였다. 특히 한국의 경우 군기지이기도 한 김해국제공항의 특성상 관제당국이 한국공항공사가 아닌 대한민국 공군이었기 때문에 더 민감한 사안이었다. 사고 발생 수 시간만에 중국의 민항총국 조사관들이 한국에 도착했고 이후 FAA와 NTSB, 보잉 관계자들도 한국으로 급파되었다.

수색과정에서 블랙박스 2기를 모두 발견하는 데 성공하였으나 FDR은 심하게 훼손되어 블랙박스 제조사인 허니웰에 요청해 수리한 후 한국-미국-중국 3국이 합동으로 자료추출을 하기로 합의하였다. 이후 블랙박스 자료가 확보되고 조종사와 탑승자들의 진술을 바탕으로 항공사고조사위원회를 중심으로 사고 조사가 시작되었다.

사고 여객기의 기장 우신루(吴新禄, Wu Xinlu)는 30세로 보잉 767기 기장으로서의 비행 경력이 289시간이었다. 제1부기장 가오리제(高立杰, Gao Lijie)는 29세로 보잉 767 1부기장 자격을 취득한 지 겨우 3개월째였다. 2부조종사 후샹닝(侯向宁, Hou Xiangning)은 27세로 9개월전 2부기장 자격을 취득했다. 3명 모두 보잉 767을 운항한 경험이 적거나 면장을 취득한 지도 얼마 안된 초보 조종사들이었다. 이로 인해 조종사간 업무분담이 사고 이전부터 제대로 되지 않고 있었고 이외에도 최종접근절차에 대한 브리핑이 소홀했다.

사고 여객기는 사고일인 4월 15일 오전 8시 40분(대한민국 시간으로는 9시 40분) 베이징을 출발하여 오전 11시 35분에 김해국제공항에 도착할 예정이었으나 이 날 김해국제공항 상공은 짙은 안개가 끼고 비가 오락가락 내리는 상황에 바람마저 강하게 불어 오전 8시 30분부터 정원 150명 이상의 항공기는 이착륙이 중단된 상태였다.

이에 사고 여객기는 회항을 위해 대체공항인 인천국제공항 쪽으로 기수를 돌렸으나 곧 김해국제공항의 기상 상태가 완화되어 착륙이 가능하다는 통보를 받아 오전 11시 20분 김해국제공항의 관제를 담당하는 공군 제5전술공수비행단에 착륙 허가를 요청했다. 공군은 당시 기상상태가 ICAO의 착륙 제한치를 충족하는 시정(가시거리) 3.2km, 운고 500m, 풍속 10km/h임을 확인하고 착륙을 승인했다.

항공기 착륙 시 뒷바람이 강하면 착륙거리가 길어진다. 제한치를 넘을 경우 바람의 방향에 따라 같은 활주로라도 착륙하는 방향이 바뀌곤 한다. 이 때는 바람이 바다에서 육지 쪽으로 남풍이 불었다. 바닷가 지역은 바다와 육지의 비열 차로 인해 낮에는 육지 쪽으로 해풍이 불고 밤에는 바다 쪽으로 육풍이 불곤 하는데 김해국제공항의 경우 바로 뒷편에 산지가 있고 남해 바다 쪽으로는 난류가 흘러서 날씨가 더워지는 시기에는 유난히 해풍이 강하게 분다.
파일:attachment/1299235848_129_01.jpg파일:external/aviation-safety.net/20020415-0-G-2.jpg
보통은 바다 쪽에서 드넓은 김해평야를 바라보며 ILS유도를 따라 여유있게 접근하기 때문에 착륙에 별 어려움이 없지만 남풍이 강하게 불면 바다 쪽에서 접근을 하다 활주로를 끼고 시계 방향으로 빙 돌아서 활주로 북쪽에서 남쪽으로 접근을 해야 한다.[9] 이걸 '써클링 어프로치'라고 부른다. 다른 공항 같으면 남풍이 강하게 불 때 처음부터 북쪽에서 접근하면 되는데 김해국제공항의 경우 활주로 북쪽에 바로 산이 있어서 이렇게 접근해야 한다. RWY36활주로는 남쪽에서 접근하면 ILS의 도움으로 정밀 계기접근을 할 수 있지만 반대쪽인 RWY18활주로는 시각접근으로 착륙해야 한다.(PAPI가 있음) 심지어 공항 바로 북쪽에 김해 시가지와 산(+고속도로)까지 있어서 몇 초만 도는 타이밍이 늦으면 바로 위험해진다. 비행기는 어느 착륙이든 몇 초만 실수하면 바로 사고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이 때문에 김해국제공항에서는 배풍이 불 때의 착륙 기준이 다른 공항에 비해 약간 완화되어 있다.

사고 당시 김해국제공항에는 17노트의 남풍이 강하게 불고 있어 ILS가 설치된 중대형여객기용 36L 활주로로 착륙을 할 수 없었다. 이러한 풍향 조건으로 인해 사고 여객기는 관제사로부터 Circling approach를 지시받고 활주로 서쪽으로 선회를 시작하였다. 항공사고조사위원회 최종조사보고서에 의한 김해공항의 정상 서클링 절차는 먼저 36L활주로의 ILS를 따라 최저한계고도까지 하강한 뒤 이후 자동조종장치를 나침방위모드로 설정하거나 아예 자동조종장치를 해제하고 수동으로 변경해 45도 좌선회를 20초 동안 하고 다시 45도 우선회를 하여 활주로와 평행하게 비행함과 동시에 육안식별을 진행하고 이어서 활주로가 끝나는 지점에서 활주로를 바라보며 180도 우선회를 하여 최종적으로 착륙한다.

그런데 김해국제공항에 서클링으로 착륙하는 게 처음이었던 조종사들은 첫 좌선회시 20초보다 적은 시간 동안만 좌선회를 해 활주로와의 평행거리를 제대로 확보하지 못했다. 게다가 악천후에 안개, 돗대산에 낮게 깔린 구름까지 심해 서클링 착륙이 처음이었던 조종사들이 더 큰 어려움을 겪게 만들었다. 180도 우선회시 선회반경을 걱정하던 조종사는 규정된 접근절차보다 더 좌선회를 한뒤 늦게 180도 우선회를 진행하였는데 이때 해풍이 180도로 우선회를 하는 비행기를 더 좌측으로 밀어냈다. 또한 전술한 업무분담 문제로 인해 기장이 관제탑과의 무전까지 해야 했던 탓에 안그래도 초보인 기장의 주의가 더 산만해졌다. 11시 21분, 겨우 안개와 구름을 빠져나온 129편의 앞에 돗대산이 나타났다. 조종사들은 복행을 시도했으나 비행기는 관성을 이기지 못하고 2초만에 공항으로부터 북쪽으로 4.6km 떨어진 최종 선회 지점인 돗대산의 표고 204m 지점에 충돌했다.

Circling approach 진행 중에 활주로가 육안으로 보이지 않으면 복행해야 하는 기본적인 규칙을 기장, 부기장 모두 지키지 않으면서 발생한 전형적인 조종사 과실 사고였다. 또한 조종사들은 18번 활주로 서클링 랜딩을 지시하자 굉장히 당황한 눈치를 보였다. 조종사들은 김해국제공항에 운항한 적이 있긴 했지만 전부 ILS유도가 되는 중대형기용 활주로인 36L 활주로로만 착륙을 해 왔다. 편리한 ILS 계기접근만 선호하고 실제 눈으로 보며 활주로에 접근하는 방법에 익숙하지 않은 신참 비행사들이 이런 종류의 위험한 실수에 노출된다. 또한 항공사고조사위원회의 명령에 따라 중국민항총국이 에어차이나 본사를 조사한 결과 에어차이나는 김해국제공항에 운항하는 조종사들에 대해 수동계기착륙 절차에 대한 교육을 소홀히 했다.

최대 이륙 중량이 115t에 이르는 여객기가 255km/h의 속도로 산에 정면 충돌하게 되자 여객기는 세 동강으로 분해되었고, 150m를 끌려가다가 주익의 연료 탱크로부터 항공유가 분출되며 폭발하여 화재가 발생하였다. 동체는 폭발을 하고도 50m나 더 끌려가다 겨우 멈췄다. 이 사고가 터지고 나리타발 부산행 일본항공JL957편 DC-10 항공기를 필두로 일본발 항공편들은 대구국제공항으로 회항했고 중국, 홍콩, 마카오, 대만발 항공편들은 인천국제공항, 김포국제공항 으로회항했다.

이것은 1988년 처음으로 운항을 시작한 중국국제항공의 최초의 항공기 추락 사고로 기록되었고 한국 땅에서 발생한 항공사고 중 가장 희생자가 많은 사고로 지금까지도 기록되고 있다.

한국 측도 일부 과실이 있었다. 김해국제공항에는 세계 여느 공항처럼 MSAW가 설치되어 있다. MSAW는 원래는 항공기가 정상고도 이하로 지상에 접근할 때 추락 위험을 경고함으로써 사고를 예방해 주는 안전장치로 공항 관제소 레이더에 설치해 두고 만약 항공기가 접근하는 도중 과하게 하강하면 관제사와 조종사들에게 경고를 해주는 시스템이다. 그러나 김해국제공항의 MSAW는 주변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오작동 빈도가 굉장히 높았다. 또 ICAO 규정에 따르면 시각과 청각으로 경고해야 하는데 시각으로만 경고하게 되어 있었으며 레이더 화면이 아닌 별도의 오퍼레이터 화면에 경고를 띄우는 방식이라 관제사가 이를 보지 못했다.

또 해당 기체는 구형 GPWS를 장착한 탓에 기어를 내리고 돗대산을 향해 하강하는 것을 정상적인 착륙 자세로 인식하면서 지형레이더가 이를 감지했음에도 조종사들에게 경고하지 않았다. 만약 전자지도를 복합적으로 사용하는 EGPWS가 장착되어 있었다면 사고를 피했을 거라고 분석했다.

NTSB와 FAA는 항공사고조사위원회의 조사 결과를 받아들였다. 중국 민항총국은 조종사 과실과 에어차이나의 부적절한 접근훈련 등을 대부분 인정하였지만 MSAW와 관련한 과실 등 일부 사항에 대해 합의에 실패했다. 한국 측은 MSAW에 대한 부분과실을 인정하긴 했지만 주 요인은 조종사들의 과실이라 주장했고, 중국의 주장은 조종사들이 실수를 했더라도 김해국제공항 측이 MSAW경고를 보고 복행을 지시했으면 사고가 나지 않았을거라는 것이었다. 이는 중국 측이 몽니를 부렸다기보다는 한국과 중국 양국의 주장 모두 타당한 주장이다. 중국뿐만 아니라 다른 국가도, 심지어 항공사와 같은 국가에서도 사고가 발생하면 이와 같은 사고 책임 공방은 매우 흔하다.[10] 이로 인해 최종조사보고서의 부록에는 중국민항총국이 발행한 한국의 MSAW 과실 관련 내용이 있다.

3. 구조 구급활동

파일:external/news.bbc.co.uk/_1931524_korea_plane_crash2_300inf.gif
사고 직후 부산광역시경상남도 소방본부 소속 119 구조대 1,000여 명과 경찰관 500명이 출동했다. 이후 울산 지역 소방 구조대와 군 병력[11]까지 총 2천여 명이 사고 현장에 긴급투입되어 생존자 구조 작업 등에 나섰으나 험한 지형에다 악천후로 인해 헬리콥터와 소방차, 구조차량의 접근이 불가능해 어려움을 겪었다. 게다가 도착 직후에는 1차, 2차에 잇따른 화재와 폭발로 기체 내 생존자 구조작업은 진행되지 못했다. 심지어 구조대원들의 진입도 폭발 위험으로 통제되었다. 여자고등학교를 지나는 산으로 통하는 도로가 사고 현장까지 제대로 이어져 있지 못해서 화재가 잦아든 후에도 차량 접근이 불가능하여 구조대원들은 생존자를 발견하면 들것에 태우거나 등에 업고 산 아래까지 이송했다. 체온 유지가 힘들던 생존자들은 바닥의 나뭇가지들도 물기에 젖어서 지갑 속에 지폐를 태워서 온기를 만들어 몸을 녹였다고 한다. 당시 구조대원뿐만 아니라 인근 고등학교 학생[12]과 주민들도 구조대를 도와 생존자를 후송하고 시신을 수습했다. 부산시 소방본부 관계자는 '여객기가 추락한 대형사고에서 그나마 생존자가 40명 가까이 된 것은 시민들의 적극적인 봉사활동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다'고 말했다. 날이 어두워진 뒤에는 사고 현장에 조명등을 설치하고 동체를 해체하는 한편 인명 구조견까지 투입해 생존자를 찾기 위한 철야수색작업을 벌여 16일 새벽 3구의 시신을 찾아냈다.

대형 사고인 데다 지형적 요인으로 인한 접근성의 불리, 폭발과 화재로 인해 구조작업이 늦어진 감이 없지 않았지만 구조대와 시민들의 노력으로 총 169명의 탑승 인원 중 40명의 생존자를 구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승객들을 구조하는 과정에서 사고 현장이 지나치게 훼손되어 사고의 원인을 규명하는데 큰 문제가 되지 않겠냐는 경찰 측의 우려에 '구조 활동을 하지 말라는 것이냐'는 구조 관계자들의 항의가 있기도 하였다. 해당 사고는 사고를 일으킨 항공사의 소속국인 중국과 사고가 발생하고 대부분의 사상자가 난 한국, 마지막으로 항공기를 제작한 미국. 이 세 나라 사이에 사고의 책임에 대한 이해관계가 얽힌 매우 민감한 사안이었다. 현장 검증을 위해 사고 현장을 보존하느냐, 아니면 신속한 구조를 위해 현장을 훼손하느냐의 문제는 항공기 사고 발생 시 언제나 충돌하는 문제다.

4. 사고 이후

4.1. 수습

사고 발생 이후, 중국국제항공과 협력 관계[13]를 맺고 있던 아시아나항공이 사고조사와 수습 지원을 위해 다양한 지원 방안을 마련했다.관련 기사

4.2.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 문제

사고 직후 생존자는 40명이었으나 구조 바로 다음날 새벽 3시경 승객 하모 씨가 부산 백병원에서, 5월 2일 서울 한강성심병원에서 화상 치료 중이던 승객 박모 씨가 사망하여 인명피해는 총 167명 중 사망 129명(2명의 실종 포함)에 부상 37명으로 집계되었다. 한편 추락 이후 화재가 발생했기 때문에 불에 타 버려서 신원 확인이 불가능한 시신들도 많았으며 그 후 한국과 중국 양국이 DNA 검사를 통해 대부분 신원을 확인했다. 하지만 2명의 시신은 끝내 신원 확인에 실패했다.

이후 중국국제항공은 유족들에 대해 보험사를 통해 8만 위안(한화 약 2억 원)의 보상을 지급하기로 하였으나 유족들이 사고에 대한 중국국제항공의 책임을 물어 항공사의 직접 보상을 요구했는데 이에 중국국제항공은 이를 재판에 넘겼으나 법원에서는 유족들의 손을 들어 주었다. 이 보상 문제 때문에 유족들은 시신을 바로 안치하지 못하고 경상남도 창원시 성산구의 한 병원에 무려 10년 간 보관하고 있었다고 한다. 결국 유골 보관 비용을 중국국제항공에서 부담하기로 최종 합의되어 사고가 일어난 후 10년도 좀 지난 2012년 10월 27일 경상남도 김해시 상동면 묵방리의 추모공원 인근 봉안 시설인 경남영묘원에 안치됐다.

이 와중에 중국인 승무원들은 대한민국 법원에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2010다18355 국제재판관할권이 있다고 대법원이 판시했다. 이유는 돈. 중국은 항공 사고의 배상 금액이 1인당 7,000만원 정도로 매우 낮은 국가이기 때문이다. 관련 기사

4.3. 중국국제항공 내부의 대응

이 사고기를 조종한 기장 우신루(吴新禄, Wu Xinlu)는 보잉 767기의 조종시간이 6,000시간이고 5번 부산에 갔다 온 적이 있었는데 사고 조사를 받은 후 파면은커녕 여전히 이 회사에서 기장직을 유지하고 있다. 심지어 중국 동영상 사이트에 본인이 직접 비행기를 조종하는 방법이나, 비행 시뮬레이터로 김해공항을 비행하며 사고 당시를 회고하는 영상을 업로드하고 있다.#[14] 중국국제항공 부산지점이 보내온 1차 자료에서는 기장이 치신성(Qi Xin Sheng, 32), 사고본부가 명단이 일치하지 않는 것을 발견하고 재요청하자 보내온 2차 자료에서는 기장이 우닝(Wu Ning, 31)으로 되어 있다. 이후 중국 정부가 부산 영사관에 기장이 우신루라는 것을 알려 주었다. #

인명 사고가 난 항공편의 편명은 희생자들을 애도하고 경각심 고취 차원에서 영구결번 처리되고 아예 단항되거나 몇 년간 운항을 중단하는 것이 정석이다. 시민 불편을 이유로 불가피하게 계속해서 운항해야 하는 경우에는 최소한 편명이라도 바꾼다.[15] 그러나 중국국제항공은 이 사고 이후로도 취항 중지는커녕 항공편 번호도 바꾸지 않아 중국국제항공의 베이징부산 항공편은 오랜 기간동안 CA129편을 써오다가 2023년 11월이 되어서야 CA729편으로 변경되었다. 중국국제항공의 B767은 모두 퇴역했기 때문에 2023년 12월 현재 기준으로 B737-800이 들어가고 있다.

파일:attachment/중국국제항공 129편 추락 사고/E3452.jpg

이 사고 때문이었는지 모르지만 지금도 중국 국적 항공사 기장들은 김해국제공항에 착륙할 때마다 생명 수당이 추가로 붙는다고 한다.

5. 이후 처리

6. 사고 이후 신공항 논란

결국 이 사건으로 인해 국제선 여객기가 이착륙할 수 있는 허브 공항으로써 김해국제공항의 치명적 문제점을 개선할 방법으로 아예 새로 공항을 건설해야 한다는 의견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 시작으로 동남권 신공항부산광역시에서 추진하기에 이르렀다.

원인은 결국 김해국제공항 부근에 산이 엄청 많아서 착륙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김해국제공항이 위와 같은 좋지 않은 입지에도 유지되는 이유는 1천만에 달하는 부울경 배후수요를 그대로 가지고 있는 데다 국내선 수요도 거의 포화상태에 이르렀고, 근본적으로 김해국제공항의 정체성인 군 공항이라는 점 때문인데 군사 전략적 요충지로써 활주로 북쪽에 가깝게 있는 돗대산과 신어산을 방패막이로 삼아 북한의 포격으로부터 비행장을 지키기 위해서이다. 공군 제5공중기동비행단이 설사 민간공항이 신공항으로 분리해 나간다 해도 현 김해국제공항 위치를 고수하겠다고 하는 큰 이유이다. 그래서 언제까지나 민간 공항과 군 공항을 겸해서 쓰기엔 너무 열악하고 한계에 다다른 것이 사실이기 때문.

하지만 그럼에도 이 논의가 지지부진했던 것은 부울경에 더해 대구경북까지 뛰어들어 각자의 이해관계를 일방적으로 주장한 핌피현상 때문이었다. 거의 이 때부터 동남권 신공항 추진을 위해 부산에서는 열을 올리기 시작했지만 대구광역시 쪽에서는 대구에서 비교적 가까운 경상남도 밀양시를 미는 등 강한 신경전이 터지며 엎치락뒤치락했다. 하지만 2011년 3월 25일, 결국 동남권 신공항 입지 선정은 전면 백지화되고 말았다.

박근혜 대통령이 동남권 신공항을 재추진하기로 하며 파리공항엔지니어링 관계자의 공항부지선정 용역에 따라 부지가 확정되는것으로 합의를 봤다. 그러나 2016년 6월 동남권 신공항은 다시 무효로 돌아가고 김해공항을 확장하는 방향으로 결정되었다. 물론 이 결정이 났을 때 상당수는 이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2020년 11월 17일 정부는 다시 김해신공항 확장안 백지화로 가닥을 잡았다. 그동안 가덕도를 반대하던 대구경북 측이 자체적으로 대구경북 통합신공항을 추진하면서 동남권 신공항에 개입할 명분이 줄어들었기 때문에 가덕도 신공항안이 가장 유력한 상황이 되었다.

2021년 2월 26일에 마침내 가덕신공항특별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면서 동남권 신공항의 위치는 가덕도로 결정되어 동남권 신공항 건설 논란이 이 사고로부터 19년만에 종지부를 찍었다.

7. 둘러보기


역대 대한민국의 대형 사고 및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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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 이태원 압사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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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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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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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3월 26일
46 천안함 피격 사건
[ 2000년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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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월 7일
40 이천 냉동창고 화재 사고
2003년 2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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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4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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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9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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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7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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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10월 27일
22 장수 88올림픽고속도로 추돌 참사

[ 1990년대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사망사건명
1999년 10월 30일
56 인천 인현동 호프집 화재 참사
1999년 6월 30일
23 씨랜드 청소년수련원 화재 사고
1998년 10월 29일
27 부산 범창콜드프라자 화재
1997년 8월 6일 228 대한항공 801편 추락 사고
1996년 7월 26일
20 철원 군부대 산사태
1996년 4월 4일
21 양평 버스 추락 사고
1995년 8월 21일
37 경기여자기술학원 화재
1995년 6월 29일
502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1995년 4월 28일
101
1994년 10월 24일
29 충주 제5호 화재사고
1994년 10월 21일
32 성수대교 붕괴 사고
1993년 10월 10일
292 서해훼리호 침몰 사고
1993년 7월 26일
68 아시아나항공 733편 추락 사고
1993년 6월 10일
20 연천 예비군 훈련장 폭발 사고
1993년 4월 19일
34 논산 정신병원 화재
1993년 3월 28일
78
1993년 1월 7일
28 우암 상가아파트 붕괴사고
1991년 11월 3일
22 인제 버스 추락 사고
1990년 11월 4일
21 소양호 버스 추락 사고
1990년 9월 1일
25 영동고속도로 섬강교 버스추락사고
[ 1980년대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사망사건명
1989년 9월 17일
24 전북 모래재 버스 추락 사고
1989년 7월 27일
79 대한항공 803편 추락 사고
1987년 11월 29일
115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
1987년 8월 29일
32 오대양 집단자살 사건
1987년 6월 16일
29 극동호 유람선 화재 사건
1986년 7월 30일
21 고창 거룻배 전복 사고
1985년 1월 11일
38 양강교 버스 추락사고
1984년 1월 14일
38 부산 대아호텔 화재 사건
1983년 10월 9일
25 아웅 산 묘소 폭탄 테러 사건
1983년 9월 1일
269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
1983년 4월 18일
25 대구 초원의집 화재
1982년 6월 1일 53 청계산 C-123 추락사고
1982년 4월 26일
62 우순경 사건
1982년 2월 5일 53 제주 C-123 추락사고
1981년 11월 22일
33 부산 금정산 버스 추락사고
1981년 5월 14일
55 경산 열차 추돌사고
1980년 6월 5일
23 광주 지하살롱 화재 사고
[ 1970년대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사망사건명
1979년 10월 27일
26 은성탄광 화재
1979년 4월 14일
44 함백 탄광 폭발사고
1978년 7월 23일
33 한강대교 버스 추락 사고
1977년 11월 11일
59 이리역 폭발사고
1976년 10월 28일
34 동해 어선 조난 사고
1976년 5월 18일
23 답곡리 버스 추락사고
1976년 2월 28일
32 화천 버스 추락사고
1974년 11월 3일
88 대왕코너 화재사고
1974년 2월 22일
159 YTL30호 침몰 사건
1973년 8월 12일
32 영동역 유조열차 폭발 사고
1973년 5월 16일
22 영일 건널목 열차 추돌사고
1972년 12월 2일
53 서울시민회관 화재 사고
1972년 8월 1일
26 의암호 버스 추락 사고
1971년 12월 25일
166 대연각호텔 화재
1971년 10월 13일
20 남원역 열차 추돌사고
1971년 5월 10일
80 청평호 버스 추락 사고
1971년 5월 10일
31 질자호 침몰 사고
1970년 12월 15일
326 남영호 침몰사고
1970년 11월 5일
31 의암호 선박 전복 사고
1970년 10월 14일
46 모산 수학여행 참사
1970년 8월 21일
25 추풍령 고속버스 추락 참사
1970년 4월 8일
33 와우 시민아파트 붕괴사고

[ 1960년대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사망사건명
1969년 9월 17일
37 창녕 기관선 - 남지교 충돌 사고
1969년 1월 31일
41 천안 열차 추돌사고
1968년 10월 30일
48 산청 버스 추락사고
1968년 1월 8일
41 함양 버스 추락사고
1967년 10월 16일
42 금릉 버스 추락 사고
1967년 9월 15일
29 삼양수산 원양어선 침몰 사고
1967년 4월 8일
80 서울 청구동 C-46 추락사고
1967년 1월 14일
93 한일호-충남함 충돌 사고
1967년 1월 1일
41 서문시장 화재
1966년 1월 18일
22 중구 남산동 판자 아파트 화재
1964년 7월 29일
95+ 서해 어선단 실종 사고
1963년 10월 23일
49 여주 조포 나룻배 침몰 사고
1963년 6월 25일
70 거제 장승포 산사태
1963년 1월 18일
140 연호 침몰 사건
1962년 9월 7일
36 한남동 나룻배 침몰 사고
1960년 3월 2일
62 부산 국제고무공장 화재
1960년 1월 26일
31 서울역 압사 사고
[ 1950년대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사망 사건명
1959년 7월 17일
67 부산 공설운동장 압사 사고
1956년 1월 12일
66 태신호 화재
1955년 3월 2일
42 부산역 열차 화재
1953년 11월 27일
29 부산역전 대화재
1953년 1월 31일
56 오산 건널목 추돌 사고
1953년 1월 25일
66 행운환 침몰사고
1953년 1월 9일
330 창경호 침몰 사고
1951년 7월 11일
94 제5편리호 침몰 사고
1951년 7월 11일
30+ 제13호 침몰 사고
[ 1940년대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사망사건명
1949년 10월 5일
71 평해호 침몰 사고
1949년 8월 18일
51 대강 터널 질식 사고
1947년 8월 19일
23 태양환호 침몰 사고
1946년 11월 13일
42 영등포역 열차 충돌 사고
1946년 10월 22일
59 어청도 기뢰 폭발 참사
1945년 9월 29일
73 대구역 열차 추돌사고
1945년 8월 24일
549​~� 이상
우키시마호 사건
}}} ||


[1] 이 영상에 따르면 승객들 중 한국인 탑승객은 136명이라고 한다.[2] 사고 당시 129명이 사망하였고(이들 중 1부기장, 2부기장도 포함) 1명은 이 사고 이후 사망하였다.[3] 기장과 승무원 2명도 포함[4] 사고기는 1985년 10월 9일 제작되어 동년 10월 29일 중국민항으로 인도되었으며 1988년 7월 1일 중국국제항공으로 이관되었다. 엔진은 P&W JT9D-7R4E4[5] 사고 이후 이 근처에 부산김해경전철 지내역이 자리하고 있다.[6] 이를 통해 부산에서 가장 멀리 갈 수 있는 곳이 브라질 상파울루다.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기착한 뒤 대서양을 건너서 간다.[7] '한국에서 일어난'이 아닌 한국이 겪은 사고로 범위를 넓히면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이다.[8] 현재의 국토교통부[9] 지금은 없어진 홍콩 카이탁 국제공항은 엄청난 난이도의 착륙으로 악명이 높았다.[10] 2001년에 발생한 아메리칸 항공 587편 추락 사고아메리칸 항공은 '에어버스 A300의 설계 결함'이라는 주장을, 에어버스는 '아메리칸 항공의 조종사 교육 문제이며, A300의 방향타가 민감한 것은 기체 특성일 뿐이다'라는 주장을 하며 사고 후 2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법적 소송을 진행하고 있다. 이 사례 역시 둘 다 타당한 주장이다. A300의 방향타가 비슷한 동급 여객기들보다 민감한 것도 사실이고 1972년 A300이 비행을 시작한 이후로 방향타를 과격하게 조작하다 추락한 것도 587편이 유일한 사례인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에어 프랑스 4590편 추락 사고의 경우 에어 프랑스와 사고원인의 일부 책임이 있는 컨티넨탈 항공이 수 년 동안 법적다툼을 벌였고 심지어 이는 컨티넨탈 항공이 유나이티드 항공합병 이후에도 유나이티드 항공이 이를 이어서 소송하다가 결국 유나이티드 항공이 패소했고 에어프랑스에 손해배상을 컨티넨탈 항공 대신 해야 했다.[11] 사고 부대인 제5공중기동비행단 (당시 제5전술공수비행단) 병력은 당연히 갔고, 공군 병력만으로는 인원이 모자란지 39사단, 53사단 등 인근 육군부대까지 지원 나갔다고 한다.[12] 다만 고등학생 투입은 훗날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그나마 전교생들을 강제 동원한 것은 아니고 학생회장 등 학생회 간부들이 자원한 형태라고.[13] 훗날 아시아나항공과 중국국제항공이 스타얼라이언스에 가입하면서 이 둘은 같은 항공 동맹에서 활동하게 된다.[14] 해당 영상들 댓글창에도 중국 네티즌들이 추락사고에 대하여 물어보거나 우신루 기장을 비꼬는 댓글들도 있다.[15] 저먼윙스 9525편 추락 사고 당시 그 다음날부터 동일 항공편이 4U 9440 / 9441편으로 변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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