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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19-12-01 18:00:20

남영호 침몰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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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그랜드호 광안대교 추돌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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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상사고 요약도
발생일 1970년 12월 15일
발생시각 새벽 1시 15분
유형 운항 중 침몰
발생 위치 대한민국 전라남도 여수시 남동쪽 35km 지점의 해상
탑승인원 338명
사망 326명
구조 12명
기종 연안 여객선
1. 개요2. 전개 과정3. 후속 대처4. 추모 사업5. 후일담6. 유사 사례7. 관련 자료

1. 개요

남영호 침몰사고는 1970년 12월 14일 17시경 제주도 남제주군 서귀읍(현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서귀항에서 출항한 부산~제주를 잇는 정기 페리인 남영호가 다음날인 12월 15일 침몰해 326명의 사망자를 낸 사고로 대한민국의 해상 참사 사망자 수 1위, 육해공 통틀어서는 사망자 수가 두 번째로 많은 참사다. 비교적 최근에 일어난 대형 사망 사고인 세월호 사고보다 더 많은 사망자가 났지만, 시간이 오래 흐르다 보니 사람들에게서 거의 잊힌 사고이다.

긴급구조신호(SOS)를 타전했으나 해상 부근의 어느 무선국에서도 포착하지 못했고, 이를 유일하게 수신한 일본 해상보안청 순시선 구시카키 호가 보내 준 전문을 해양경찰이 무시하는 등 사고 후 대처에 무능한 모습을 보였으며 정해진 적재량을 크게 초과하는 안전부주의와 이를 단속해야 할 경찰과 해운당국의 감독 소홀 등으로 인한 전형적인 인재이며, 1982년 제주 C-123 추락사고처럼 군사정권의 횡포 때문에 현재까지도 제대로 진상규명이 안 되고 있다.
파일:attachment/남영호 침몰사고/mv_namyoung_newspaper.png
경향신문에 실린 남영호 사진.[1]
신문기사 1 신문기사 2
남영호(南榮號)는 중량 362톤, 길이 43m, 폭 7.2m, 시속 15노트, 최대 정원이 321명, 최대 화물 적재량이 130톤인 철선으로 남영상사(대표 서몽득)가 경남조선에서 건조하였다. 1968년 3월 5일 서귀포~성산포~부산간 노선을 첫 취항하였고 매달 10회씩 정기적으로 왕복 운항하던 정기 여객선이며, 소속은 남양상선이었다.

여객선이 대형화·현대화되기 전까지 기상 조건이 나쁜 제주와 타 지역 육지간 해역에서의 사고가 잇달아 발생했다. 이에 1952년에 교통부는 해난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1953년 1월 전체 여객선을 대상으로 일체 임시 선박검사를 실시하고 같은 해 3월 15일부터는 야간 운항을 금지시키는 한편 제주항에 선박 임검소를 설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귀포 관련 항로에서 크고 작은 해상 사고가 발생하게 되는데 1966년 11월 13일 서귀포~부산 간 부정기 여객선 해연호의 침몰사고, 1975년 2월 6일 한성해운 소속 서귀포~부산 간 정기 여객선 덕남호의 침몰사고, 그리고 1970년 12월 15일에 발생한 대형 해상사고로서 서귀포~부산 간 정기여객선 남영호 침몰 사건을 들 수 있다. 참고문헌.

2. 전개 과정

1970년 12월 14일 오후 5시경, 제주 서귀항에서 승객과 선원 210명과 함께 연말 성수기 판매를 위한 감귤을 싣고 출항한 남영호는 제주 성산항에 들러 승객 128명과 화물을 추가로 싣고 14일 밤 8시 10분경 부산항을 향해 출항했다.

선박회사 측은 3개의 화물창고가 모두 감귤 상자로 채워지자 선적이 금지된 앞 화물창고 덮개 위에 감귤 400여 상자를 더 쌓았고 중간 갑판 위에도 감귤 500여 상자를 더 실어 서귀항을 출항할 때부터 이미 선체의 중심이 15도쯤 기울어있던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풍랑으로 인해 한동안 배의 운항이 중지됐다가 풀린 상황이었기 때문에 선적이 밀린 화물이 쌓여 있어 이걸 무리하게 실은 것이었다. 이 시기의 감귤 상자는 지금의 골판지 상자가 아니라 나무 궤짝이었기 때문에 생존자들 가운데 몇몇은 이 감귤 상자를 붙잡고 떠 있다가 구조될 수가 있었다. 이런 상태임에도 성산항에 도착해서 다시 승객과 화물을 더 실었다. 당시 남영호는 정원이 321명(물론 선원까지 포함해서) 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승객 318명과 선원 20명 등 338명을 태워 정원을 초과한 상태였다. 거기에다 화물은 무려 540톤이나 실어서 적재 허용량을 4배 이상 초과한 상태였다.

이후 남영호는 성산항을 떠난 지 5시간 25분이 지난 15일 새벽 1시 15분, 전남 여수에서 동남쪽으로 28마일(약 52km) 떨어진 해상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심한 바람이 남영호의 우현 선체에 몰아치더니 갑판 위에 쌓아놓은 감귤 상자가 좌현 방향으로 쏟아졌다. 이 순간에 중심을 잃은 선체가 좌현으로 넘어가며 침몰하기 시작했다.

조난 신호를 받고 달려 온 구시카키가 일본 어선과 함께 생존자를 구조하였으며, 동시에 큐슈의 해상보안청을 통해 한국 해경에게 사고 소식을 알렸으나 무시당했다. 한국 해경이 현장에 도착한 것은 오후 1시 50분경이었으며 12명만 구조됐고, 해경측은 고작 3명만 구출했다.

다만 정부측의 무마 시도는 의외로 빨랐는데, 사고발생 40시간 만에 탑승자들이 추위로 생존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결론짓고 이틀째엔 시신 수색을 중지했으며, 1주일 지난 시점에선 정부측은 가라앉은 선체는 당시 기술로는 인양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에 따라 시신은 최소 18구에서 최다 40구까지만 인양되었으며 나머지 300구는 찾지 못했다.

3. 후속 대처

사고 후 박경원 내무부장관과 백선엽 교통부장관이 사의를 표명했고, 교통부 측도 정원초과 및 화물 과다적재 금지, 승객 명부 작성, 선장 권한 강화 등 '여객선 안전운항 수칙'을 시달했다. 그러나 두 장관의 사표는 반려된 채 사고 한달 후인 1971년 1월 질자호 사고, 1972년 흥안호 사고, 1973년 한성호 사고 등이 잇따라 발생해 인명피해가 나자 구조적 대책 마련의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이에 따라 1973년 12월 들어서야 '여객선 운항관리 제도'를 실시해 모든 선박마다 운항관리자를 두도록 했다.

정부는 사고 유가족들에게 1인당 40만 원씩 보상금을 주어 회유하려 했지만, 보상금 지급을 전제로 소송취하서에 서명을 해야 했기 때문에 유족들이 반발했다. 이들은 시신 인양 및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부산과 제주에서 가두시위를 벌였고, 부산동부경찰서 초량3파출소와 해운국에까지 몰려갔다. 심지어 서귀국민학교에서 열린 정부 주최 희생자 위령제를 파괴하기도 했다. 이에 정부는 '사이비 유족' 의혹까지 제기해가며 유가족들 입을 막고자 했다. 위와 같이 들끓는 여론에 대해 국회에서 특별진상조사위원회까지 꾸려졌지만 흐지부지되었다. 당시엔 군사정권 시절인 데다 당장 먹고 살기 급급했기에[2] 더 이상의 투쟁은 불가능했고, 세월이 흘러 수차례 정권이 바뀌었음에도 이에 대한 공식 사과나 재조사조차 없다.

게다가 사고 가해자들에 대한 수사 및 사법처리도 부실했다. 사고 후 검찰은 관련 수사에서 선주-해운국-검찰 간 커넥션 의혹을 무시한 채 선장, 선주, 하역업체 직원 등 총 12명만 최종 기소했고, 1972년 대법원 재판 결과 선장에겐 2년 6개월의 금고형이, 선주에겐 금고 6개월 및 벌금 3만 원의 형이 확정되었다. 그러나 하역업체 직원과 관련 공무원들은 무죄를 선고받았으며, 선주 집안이나 당시 정부 관련자들도 제대로 책임지지 않고 여러 관직에 오르거나 부를 누리며 떵떵거려왔다.

사건 당시 중앙일보와 인터뷰한 남영호 전 선장인 강삼정은 이 사고는 예견된 사고였다며 "적당히 정량을 초과해 짐을 많이 실으면 어떠냐"는 안전도를 무시한 선주의 압력에 견디지 못해 자리에서 물러난 것으로 알려졌다. 기사

세월이 지나며 유족들과 대중들의 뇌리에서 남영호 참사는 점차 잊혀졌고, 설사 기억하더라도 선주의 욕심만 탓하는 게 전부였다. 2014년 세월호 참사 이후 시사in에서 남영호 침몰 사고와 세월호 참사를 비교하는 특집 기사를 실었다. 기사

4. 추모 사업

사고 후 1971년 3월 서귀포항에 위령탑이 세워졌지만, 1982년 서귀포항 임항도로 건설과 미관상 문제 등으로 상효동 돈내코 중산간으로 옮겨졌고, 지자체 당국조차 한동안 관리에 손을 놓아 수풀만 무성해져 알아보기 힘들었다. 설상가상으로 2003년 이후 유족 단위 위령제가 중단되고 2006년부터 근처에 골프장이 조성되면서 추모비나 조난자 묘역 등지는 골프공 범벅이 되기도 했다. (관련 기사)

그러나 1993년경 조인석 당시 <한라불교신문> 편집국장이 해당 사실을 최초로 보도했고, 2008년 <제주불교신문>에 수필을 싣고 난 후 도내에 파장이 일었다. 이 사실이 제주도 고위관료들의 귀에 들어가면서 위령탑 방치 문제가 재조명되기 시작했다. 이에 제주특별자치도 측은 민관합동위원회를 구성하고 위령탑 이전 및 합동위령제 개최를 추진했고, 유족들의 연락처 등 명단 작성에 착수했다. 2013년 유족들을 중심으로 '남영호유족회'가 결성되어 12월에 처음으로 민관합동위령제를 지냈고, 2014년 동홍동 정방폭포에 신축 이전됐다.

5. 후일담

박명규 해양대 교수에 의하면, 가수 은방울자매가 부른 <밤 항구 연락선>이 해당 참사를 다룬 노래였으나 '국가 위신 훼손'을 이유로 금지곡이 됐다.

남영호 사고 이후 서귀포항은 여전히 운항해 오다가 2000년 제주훼리 카훼리3호를 끝으로 여객선 운항이 중단된 채 방치되고 있다.

6. 유사 사례

7. 관련 자료


[1] 남영호에 대한 자료가 많지 않아 제대로 된 사진은 과거 신문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2] 참사 당시 가족을 잃은 학생 155명 중 41명은 학업 중단 위기에 처했고, 유족들 중 57세대(296명)이 극빈자라 긴급구호 상태였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