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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19-05-28 12:32:58

남영호 침몰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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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서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사고의 자세한 내용과 설명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특정 사건사고 문서는 유머성 서술과 비하적인 표현이 제한되며, 사실관계를 작성할 때에는 출처를 반드시 표시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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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상사고 요약도
발생일 1970년 12월 15일
발생시각 새벽 1시 15분
유형 운항 중 침몰
발생 위치 대한민국 전라남도 여수시 남동쪽 35km 지점의 해상
탑승인원 338명
사망 326명
구조 12명
기종 연안 여객선
1. 개요2. 사고 원인3. 후일담4. 관련 자료

1. 개요

남영호 침몰사고는 1970년 12월 14일 17시경 제주도 남제주군 서귀읍(현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서귀항에서 출항한 부산~제주를 잇는 정기 페리인 남영호가 다음날인 12월 15일 침몰해 326명의 사망자를 낸 사고로 대한민국의 해상 참사 사망자 수 1위, 육해공 통틀어서는 사망자 수가 두 번째로 많은 참사다. 비교적 최근에 일어난 대형 사망 사고인 세월호 사고보다 더 많은 사망자가 났지만 시간이 오래 흐르다 보니 사람들에게서 거의 잊힌 사고이다.

긴급구조신호(SOS)를 타전했으나 해상 부근의 어느 무선국에서도 포착하지 못했고, 이를 유일하게 수신한 일본 해상보안청 순시선 구시카키 호가 보내 준 전문을 해양경찰이 무시하는 등 사고 후 대처에 무능한 모습을 보였으며 정해진 적재량을 크게 초과하는 안전부주의와 이를 단속해야 할 경찰과 해운당국의 감독 소홀 등으로 인한 전형적인 인재였다.
파일:attachment/남영호 침몰사고/mv_namyoung_newspaper.png
경향신문에 실린 남영호 사진.[1]
신문기사 1 신문기사 2
남영호(南榮號)는 중량 362톤, 길이 43m, 폭 7.2m, 시속 15노트, 최대 정원이 321명, 최대 화물 적재량이 130톤인 철선으로 남영상사(대표 서몽득)가 경남조선에서 건조하였다. 1968년 3월 5일 서귀포~성산포~부산간 노선을 첫 취항하였고 매달 10회씩 정기적으로 왕복 운항하던 정기 여객선이었다.

여객선이 대형화·현대화되기 전까지 기상 조건이 나쁜 제주와 타 지역 육지간 해역에서의 사고가 잇달아 발생했다. 이에 1952년에 교통부는 해난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1953년 1월 전체 여객선을 대상으로 일체 임시 선박검사를 실시하고 같은 해 3월 15일부터는 야간 운항을 금지시키는 한편 제주항에 선박 임검소를 설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귀포 관련 항로에서 크고 작은 해상 사고가 발생하게 되는데 1966년 11월 13일 서귀포~부산 간 부정기 여객선 해연호의 침몰사고, 1975년 2월 6일 한성해운 소속 서귀포~부산 간 정기 여객선 덕남호의 침몰사고, 그리고 1970년 12월 15일에 발생한 대형 해상사고로서 서귀포~부산 간 정기여객선 남영호 침몰 사건을 들 수 있다. 참고문헌.

2. 사고 원인

1970년 12월 14일 오후 5시경, 제주 서귀항에서 승객과 선원 210명과 함께 연말 성수기 판매를 위한 감귤을 싣고 출항한 남영호는 제주 성산항에 들러 승객 128명과 화물을 추가로 싣고 14일 밤 8시 10분경 부산항을 향해 출항했다.

선박회사 측은 3개의 화물창고가 모두 감귤 상자로 채워지자 선적이 금지된 앞 화물창고 덮개 위에 감귤 400여 상자를 더 쌓았고 중간 갑판 위에도 감귤 500여 상자를 더 실어 서귀항을 출항할 때부터 이미 선체의 중심이 15도쯤 기울어있던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풍랑으로 인해 한동안 배의 운항이 중지됐다가 풀린 상황이었기 때문에 선적이 밀린 화물이 쌓여 있어 이걸 무리하게 실은 것이었다. 이 시기의 감귤 상자는 지금의 골판지 상자가 아니라 나무 궤짝이었기 때문에 생존자들 가운데 몇몇은 이 감귤 상자를 붙잡고 떠 있다가 구조될 수가 있었다. 이런 상태임에도 성산항에 도착해서 다시 승객과 화물을 더 실었다. 당시 남영호는 정원이 321명(물론 선원까지 포함해서) 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승객 318명과 선원 20명 등 338명을 태워 정원을 초과한 상태였다. 거기에다 화물은 무려 540톤이나 실어서 적재 허용량을 4배 이상 초과한 상태였다.

이후 남영호는 성산항을 떠난 지 5시간 25분이 지난 15일 새벽 1시 15분, 전남 여수에서 동남쪽으로 28마일(약 52km) 떨어진 해상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심한 바람이 남영호의 우현 선체에 몰아치더니 갑판 위에 쌓아놓은 감귤 상자가 좌현 방향으로 쏟아졌다. 이 순간에 중심을 잃은 선체가 좌현으로 넘어가며 침몰하기 시작했다.

조난 신호를 받고 달려 온 구시카키가 일본 어선과 함께 생존자를 구조하였으며, 동시에 큐슈의 해상보안청을 통해 한국 해경에게 사고 소식을 알렸으나 무시당했다. 한국 해경이 현장에 도착한 것은 오후 1시 50분경이었다. 총 12명이 구조되었으며 가라앉은 선체는 당시 기술로는 인양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대신 정부는 사고 유가족들에게 보상금을 주어 회유하려 했지만, 보상금 지급을 전제로 소송취하서에 서명을 해야 했기 때문에 유족들이 반발했다. 이들은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부산과 제주에서 가두시위를 벌이며 부산동부경찰서 초량3파출소와 해운국에까지 몰려갔고, 서귀국민학교에서 열린 정부 주최 희생자 위령제를 파괴하기도 했다. 이에 정부는 '사이비 유족' 의혹까지 제기해가며 유가족들 입을 막고자 했다. 위와 같이 들끓는 여론에 대해 국회에서 특별진상조사위원회까지 꾸려졌지만 흐지부지되었다. 당시엔 군사정권 시절이라 더 이상의 투쟁은 불가능했고, 세월이 흘러 수차례 정권이 바뀌었음에도 이에 대한 공식 사과조차 없었다.

게다가 사고 가해자들에게 내려진 벌은 가벼웠다. 사고 후 검찰은 관련 수사에서 선주-해운국-검찰 간 커넥션 의혹을 무시한 채 선장, 선주, 하역업체 직원 등 총 12명을 잡아들였고, 1972년 대법원 재판 결과 선장에겐 2년 6개월의 금고형이, 선주에겐 금고 6개월 및 벌금 3만 원의 형이 확정되었다. 그러나 하역업체 직원과 관련 공무원들은 무죄를 선고받았다.

사건 당시 중앙일보와 인터뷰한 남영호 전 선장인 강삼정은 이 사고는 예견된 사고였다며 "적당히 정량을 초과해 짐을 많이 실으면 어떠냐"는 안전도를 무시한 선주의 압력에 견디지 못해 자리에서 물러난 것으로 알려졌다. 기사

한동안 잊혀졌다가 세월호 참사 이후 시사in에서 남영호 침몰 사고와 세월호 참사를 비교하는 특집 기사를 실었다. 기사

2002년 세네갈에서 터진 르 줄라호 침몰사고로 이 사건이랑 화물 과적으로 인한 원인을 생각하면 똑같다.

3. 후일담

사고 후 1971년에 서귀포항에 위령탑이 세워졌지만, 1982년 서귀포항 임항도로 건설로 인적 없는 돈내코 중산간으로 옮겨져 방치되고 있다. 대신 2014년에 새 위령비가 서귀포항에 세워졌다.

남영호 사고 이후 현재까지 서귀포여객선터미널은 여객선 운항이 중단된 채 방치되고 있다.

4. 관련 자료


[1] 남영호에 대한 자료가 많지 않아 제대로 된 사진은 과거 신문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