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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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인 손기정 선수의 가슴에 붙어 있던 일장기를 동아일보가 덧칠하여 지워 버린 후 보도하자 조선총독부가 동아일보의 발간을 정지시키는 정간(停刊) 조치를 단행하고 관계자들을 체포하여 고문하는 등의 탄압을 가한 사건이다. 위 이미지에서 오른쪽 사진이 원본이고 왼쪽 사진이 편집 후 보도된 문제의 그 사진이다.
이 사건에 참여한 기자들은 항일 민족 정신을 고취시킨 공로를 인정받아 독립유공자로 임명 및 추서되었다. 따라서 이 사건은 독립운동에 해당한다.
2. 사건 전개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당시 일본 선수단의 일원으로 참가하였던 마라톤 선수인 손기정은 동료 선수인 남승룡과 함께 '올림픽의 꽃'으로 불렸던 마라톤 경기에 참가하여 손기정 선수가 올림픽 신기록을 달성하며 1위를, 남승룡 선수는 그 뒤를 이어 3위를 차지하여 각각 금메달과 동메달을 획득하였다.그러나 시상대에서는 한국 이름인 손기정, 남승룡이라는 이름이 아닌 일본 이름[1]으로 호명되었고 국기도 태극기가 아닌 일본 국기인 일장기가 게양되었으며 국가도 애국가가 아닌 일본 국가 기미가요가 대신 연주되자 두 사람의 표정은 기쁨이 아닌 슬픔으로 숙연해졌다. 나라를 잃고 한국인이 아닌 일본인으로서 시상대에 올라야 하는 가슴 아픈 사연을 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시상식 때 손기정 선수는 1위 기념으로 받은 월계수 묘목[2]을 일부러 가슴에 끌어안아서 일장기를 최대한 가렸고 남승룡 선수도 최대한 바지를 끌어올려 일장기를 가리려 시도했다.[3] 그리고 3위를 기록한 남승룡 선수는 '(손기정 선수가) 금메달을 딴 것보다 묘목으로 일장기를 가릴 수 있다는 게 더 부러웠다'고 회고한 바 있다.
이 소식은 조선에서도 신문을 통해서 전해졌는데 조선중앙일보는 8월 13일, 동아일보는 8월 13일자 지방판에서 원래 사진의 손기정 선수의 가슴에 있던 일장기 부분을 덧칠해서 지워 버리고 보도했다.
2.1. 조선총독부의 탄압과 동아일보의 정간
8월 13일에 처음 보도했을 때는 인쇄 불량으로 여겨져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동아일보가 8월 25일자 신문에서 다시 한 번 일장기를 지우고 보도하자 총독부는 동아일보 관계자 10여명을 체포하였다.당시 동아일보 사장이었던 송진우[4]를 비롯하여 이 사건을 직접 주도했다는 동아일보 체육부 기자인 이길용, 사회부장이자 주필이었던 현진건[5], 사진부장 신낙균, 백운선, 서영호를 비롯해 이길용 기자의 지시에 따라 일장기 사진의 빨간 부분을 하얀색으로 덧칠해서 지웠던 사진부 화가 이상범[6] 등을 체포, 조사하여 40일간의 구류 처분을 내리게 했다. 당시 조선총독부는 이 사건을 법률로 다스릴 수 있는 처벌조항을 찾아봤지만 처벌조항이 없었기 때문에 이들은 형법에 따른 처벌은 받지 않았으나 대신 모진 고문을 당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총독부에 의해 송진우는 동아일보 사장직을 사임하게 되었으며 주필 김준연, 편집국장 설의식 등도 잇따라 사임하였고 이길용, 현진건, 신낙균, 서영호, 최승만도 언론 활동을 더 이상 하지 않는다는 서약서를 썼다. 조선총독부는 이 사건을 계기로 동아일보를 8월 29일 자로 무기한 정간조치하고 자매지 신동아 역시 폐간하였다.
이길용 기자가 작성한 회고록이 발굴되기도 했다.
세상이 알기는 백림(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의 일장기 말살사건이 이길용의 짓으로 꾸며진 것만 알고 있다. 그러나 사내의 사시(社是)라고 할까. 전통이라고 할까. 방침이 일장기를 되도록은 아니 실었다. 우리는 도무지 싣지 않을 속셈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총독부에서 일본 본토를 가리킬 때 쓰도록 강요한) 내지(內地)라는 글을 쓰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
이길용 기자는 1950년 6.25 전쟁 때 납북되었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그의 이름을 딴 '이길용 체육기자상'을 제정하여 1989년부터 스포츠 취재 기자에게 수여하고 있다. 사건으로부터 81년이 지난 2017년 손기정기념공원에 그의 흉상이 세워졌다.
3. 오해
주로 한겨레, 미디어오늘과 운동권을 비롯한 극좌/진보 진영에서 제기되는 음모론들이다.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보수 언론을 공격하고 좌익 계열 독립운동가의 상징이었던 여운형을 띄우기 위해서이나 실상은 아래와 같다.3.1. 조선중앙일보가 먼저다?
여운형 기념사업회, 한겨레, 민족문제연구소 등 진보성향 단체에서는 일장기 말소사건의 원조는 동아일보가 아닌 조선중앙일보라고 주장하며 동아일보는 총독부에게 선처를 빌어 다시 복간되었지만 조선중앙일보는 총독부의 친일 성향 사장 제안을 거부하고 폐간을 선택하여 조선중앙일보가 민족정신이 있었다고 주장하였다.1936년 8월 13일자 조선중앙일보(좌), 동아일보(우)의 지방판 기사다.
그러나 1936년 8월 13일자 동아일보의 지방판 기사가 발굴되면서 조선중앙일보 원조설은 논파되었다.
채백 부산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의 저서 <사라진 일장기의 진실>(커뮤니케이션북스 펴냄)을 통해 조선중앙일보가 가장 먼저 손기정의 우승 사진에서 일장기를 말소했다는 주장이 학계에서 널리 알려졌지만 동아일보도 조선중앙일보와 같은 날 이 사진을 보도했다고 말했다. "8월 13일자 동아일보 조간 지방판에 조선중앙일보(서울판)가 게재한 사진과 똑같은 사진을 실었는데 서울판이 당일 새벽에 인쇄하던 반면 지방판 조간은 그 전날 인쇄하던 관행에 비춰, 손기정의 우승 사진은 동아일보가 먼저였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고 말했다.일장기 말소 사건의 진실은?
3.2. 조선중앙일보는 총독부에 항거해 자진 폐간을 선택했다?
여운형의 조선중앙일보가 조선총독부의 친일 성향 사장 제안을 거부하고 장렬하게 폐간을 선택했다는 주장도 허위다. 총독부의 극비문서와 삼천리 1938년 1월1일 신년호에서 잘 나타나있는데, 내용은 아래와 같다. 결론은 조선중앙일보는 일제가 강제로 처분을 하기도 전에 스스로 휴간했으며 얼마 뒤 다시 속간하려고 하다가 내부분열로 스스로 무너져서 문 닫았다.“쇼와11년(1936년) 8월 13일자 지상에 ‘머리에 빛나는 월계관, 손에 굳게 잡힌 견묘목, 올림픽 최고 영예의 표창 받은 우리 손 선수’라는 제목 아래 사진을 게재했다. 그러나 전기 동아일보와 같은 모양의 손기정의 가슴에 새겨있는 일장기 마크는 물론, 손 선수 자체의 용모조차 잘 판명되지 않는 까닭에 당국으로서는 당초 졸렬한 인쇄 기술에 의한 것이라 판단했으나 일단 관할 경찰 당국을 시켜 조사한 결과 동아일보처럼 손기정의 가슴에 새겨져 있는 일장기 마크를 손으로 공들여 말소시킨 사실이 판명되었다. 그렇지만 동사(同社) 사장 여운형 이하 간부는 전연 그 사실을 부인하다가 사실이 밝혀지자 하는 수 없이 근신의 의미로 같은 달(9월) 4일에 이르러 당국의 처분에 앞서 ‘근신의 뜻을 표하고 당국의 처분이 있을 때까지 휴간한다’ 운운의 사고(社告)를 게재함과 동시에 휴간 수속을 이행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 조선총독부 경무국 도서과, ‘극비문서 <조선출판경찰개요> 1936년 119~120쪽
쇼와 11년(1936년) 9월5일, 동업 동아일보가 같은 사건으로 경무국으로부터 발행정지의 처분을 받자, 중앙일보는 자진휴간의 거조(擧措)에 출(出)하야 1개년간이나 경무 당국의 속간 내락을 얻기에 진력을 하였으나 사태 불순하야 한갓 헛되이 일자를 끌어오다가, 만 1년을 지나 또 제 9조에 의한 2개월간의 기한까지 지나자 11월5일에 저절로 낙명(落命)하게 된 것이다. 같은 사건으로 처분을 받았던 동아일보는 그래도 그 제명(題名)을 살려 다시 속간함에 이르렀는데, 어찌하야 당국의 정간 처분도 아니오 자진 휴간한 말하자면 경미한 중앙일보만 낙명하게 되었느냐 함에는 여기에 여러 가지 복잡한 사정이 잠재하여 있었던 것이다. (중략) 휴간 중에 현 사장(呂運亨) 지지파와 신 사장(成元慶) 지립파(持立派)의 알력이 있어 호상 대립이 되어 중역회에서나, 주주총회에서나 분쟁이 늘 끊이지 않아(不絶)왔으며 거기다가 8만원 공(空) 불입 같은 것이 튀어나와 주식회사 결성 중에 큰 의혹을 남긴 오점까지 끼쳐놓았음이 후계 간부가 사무국을 이해시킬만 한 공작을 1년 내내 끌어오면서도 이루지 못한 등 여러 가지의 실수가 원인이 되어 파란 많은 역사를 남기고 끝내 무성무취(無聲無臭)하게 마지막 운명을 짓고 말았다. -『오호, 중앙일보 逐 폐간, 이십여년의 언론활약사를 남기고』, 삼천리, 1938년 1월 1일 신년호
3.3. 동아일보의 일장기 말소는 기자 개인의 애국심이었다?
이 사건은 동아일보 이길용 기자 개인의 행동이었을 뿐 동아일보와 상관이 없다고 비하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정작 이길용은 1948년 발행된 수기[7]에서 자기 개인의 행동이 아니라 이러한 일들은 동아일보의 일종의 전통이었으며 일장기를 지우고 보도하는 일이 이전에도 부지기수였다고 말했다.일장기 말살이란 항다반(차 마시는 일 처럼 흔한 일)으로 부지기수다. 세상이 알기는 백림(베를린)올림픽 마라톤의 일장기 말살 사건이 이길용의 짓으로 꾸미어진 것만 알고 있다. 무리도 아니다. 사내(社內)의 사시(社是)라고 할까, 전통이라고 할까, 방침이 일장기를 되도록은 아니 실었다. 우리는 도무지 실지 않을 속심이었던 것이다. 내지라는 글을 쓰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지방이건 서울이건 경향 간에 신문지에 게재해야 할 무슨 건물의 낙성식이니, 무슨 공사의 준공식이니, 얼른 말하자면 지방면으로는 면소니 군청이니 또는 주재소니 등등의 사진에는 반드시 일장기를 정면에 교차해 다는데 이것을 지우고 실리기는 부지기수다.#
3.4. 동아일보가 한 것이라곤 관련자들을 해직시킨 게 전부다?
이 사건 때 동아일보가 한 것이라곤 관련자들을 해고하는 것이었으며 이후 복직되지도 못했다는 주장이다.이 사건으로 동아일보 10여명이 총독부에 의해 연행되었다. 일제는 현진건, 이길용, 신낙균, 서영호, 최승만에게 앞으로 언론기관에는 일절 참여하지 않는다는 서약서를 쓰게 하고 동아일보에서 쫓아냈다. 사장 송진우를 비롯하여 부사장 장덕수, 주필 김준연, 편집국장 설의식도 모두 쫓겨났다. 인촌 김성수는 갖고 있던 동아일보 주식을 모두 내놓아야 했다. 총독부 기록[8]에 의하면 "동아일보의 실권을 김성수와 송진우 일파의 수중에서 완전히 절리시켰다."고 나온다. 즉, 동아일보의 누가 누굴 해직시킨 게 아니라 경영진부터 말단 기자까지 일제에 의해 쫓겨난 것일 뿐이다.
그리고 동아일보는 1945년 12월 복간된 후 이 때 쫓겨난 직원들 중 희망자들을 전원 복직시켰다.[9]
4. 기타
- 원 사진의 출처에도 논란이 있었는데 관련자들의 인터뷰에서 '오사카 아사히 신문'[10]의 사진을 따다 수정해 실은 것이라고 하였는데 후대에 아무리 찾아도 같은 사진이 없었기 때문이다. 정답은 반만 맞은 것으로 오사카 아사히 신문의 지역판인 서북판[11] 및 남선판[12]에 실린 사진에는 일장기가 그려진 원본 사진이 포함되어 발간되었음이 확인되었다.
- 일제강점기의 대표적인 언론 탄압 사례 중 하나이고 무기한 정간이라는 강력한 제재 수단이 쓰인 사건이라 한국사 교과서 등지에 심심찮게 등장하는 편이다. 비중 있게 다루지는 않지만 가히 필수요소 수준.
5. 창작물
5.1. 야인시대
야인시대의 작중 사건 사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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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중 15화 후반쯤에 진영이와 개코가 호빵 집에서 김두한과 이야기를 하다가 나온다.
최동열의 직장인 조선중앙일보에서 일장기가 눈에 거슬린다며 태극기가 있어야 좋은데... 라며 어떤 직원이 일장기를 삭제하자고 건의를 하였다. 그렇게 되어 동아일보에 전달이 되어 신문을 발행하게 되어 16화에서 이 사건이 다루어진다. 그렇게 길지는 않지만 한국 역사 교과서에는 이 내용이 실려 있다. 역사대로 일장기 말소사건을 다루면서 이전에 알려지지 않았던 조선중앙일보[13]의 이야기도 역사적으로 조명하였다.
그리고 우미관패와 쌍칼패의 결투 신청 이야기가 오고 나서 무옥과 영철이 우미관 밖에서 일본 경찰들이 부리나케 지나가는 것을 보고 심상치 않게 여긴다. 바로 앞에 미와 경부가 문달영, 김태서 등등 데리고 가서 동아일보 편집자들과 부장을 대거 체포한다. 1부 의사양반이 신문을 가져와서 카페 비너스의 사장이자 친구인 김이수에게 보여주며 말을 하는데 서로 신난다. 그와중에 역사의 산증인인 최동열이 그 자리에서 보며 잡혀가는 조선 사람들을 보며 탄식을 하고 있다.
이후 일본 야쿠자의 하야시는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 한다고 하지 않나, 장인어른인 고노에는 "비극적이고 안타깝다. 바보같고 그냥 넘어가주는 것이 상책이다. 그런 건 소인배들의 행동이다"라고 답변하며 딸들 사야코, 나미코도 아버지 옆에서 맞장구를 친다.
5.2. 각시탈
드라마 각시탈에서는 이 사건을 모티브로 해서 상황을 조금 바꾸었다. 그리고 동진이라는 가상인물을 만들어 여운형의 조선중앙일보가 주도한 것으로 묘사했다.조선인으로 권투 세계챔피언이 된 선수가 귀국하자 일제가 내선일체를 선전한다면서 대대적인 환영식을 치르는데 조선중앙일보의 전 사장인 동진이 만든 비밀 독립단체 동진결사대가 은밀히 태극기를 나누어주어 만세시위를 일으켰고 일장기를 가슴에 달고 부끄러워하던 이 권투선수는 스스로 일장기를 뜯어 버린다.
[1] 둘 다 창씨개명은 하지 않았기에 한자 음독 그대로 '손키테이(Son Kitei)', '난쇼류(Nan Shōryū)'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창씨개명이 본격적으로 시행된 것은 1938년의 일이다.[2] 월계수라고 줬지만 사실은 미국참나무다.[3] 이 묘목은 당시 손기정이 재학 중이던 양정고등보통학교 야외에 심어졌다. 이곳은 현재 손기정 기념관이 들어선 장소이기도 하다.[4] 이 사람은 손기정의 메이지대학 선배다.[5] 설렁탕을 사 왔는데 왜 먹지를 못하니라는 마지막이 클라이맥스인 소설 운수 좋은 날의 바로 그 소설가다. 사실 언론인으로도 많은 활동을 했다.[6] 청전(靑田)이라는 호로 유명한 그 화가다. 20년 뒤 동아일보에 벌물(냉수를 네다섯 빠께쓰를 먹었다는 것)도 켜고, 격검대로 맞기도 하고, 그놈들이 타고 올라 앉아서 짓누르는 것도 당하고, 이놈 저놈의 발길에 죽게 채이기도 하고 따귀맞기, 귀붓잡고 매미돌리기 등 갖은 악형을 당하였다고 회고했다. 결국 고문 이후 친일파가 되었다.[7] "신문기자 수첩", 1948년, 모던출판사[8] 朝保秘 제1100호 동아일보 발행정지처분의 해제에 이르는 경과에 관한 건(1937년 6월 11일)[9] 이길용, 백운선, 설의식, 장덕수, 김준연, 임병철. 현진건은 1937년 6월 속간 때 복직했으며 해방 전에 타계했다.[10] 현 아사히신문. 당시 동부의 도쿄아사히신문과 서부의 오사카아사히신문으로 나눠 발행하다가 통합되었다.[11] 서울이북 및 만주판[12] 서울 이남[13] 안티조선일보 같은 커뮤니티 사이트조차 조중동의 조선일보, 중앙일보로 아는 경우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