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본관 | 평산 신씨 |
출생 | 1899년 4월 13일 |
경기도 안성군 (현 안성시) | |
사망 | 1955년 4월 4일 |
경기도 수원군 | |
묘소 | 국립서울현충원 제1충혼당 3층-320실-74호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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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사진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신낙균은 1899년 4월 13일 경기도 안성군(현 안성시)의 무반 가문에서 아버지 신택희(申宅熙, 1859 ~ ?)와 어머니 전의 이씨 이교필(李敎弼)의 딸 사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신택희는 1877년(고종 14) 무과에 급제하고 한성부 우윤(右尹:종2품)에 올랐으나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 안성으로 낙향했던 인물이며, 조부 신빈(申彬, 1819 ~ ?) 또한 1847년(헌종 13) 무과에 급제하고 이듬해인 1848년 선전관(宣傳官)을 시작으로 병조 참판(參判:종2품)에 오른 무관이었다.그는 7살 때 안성보통학교에 입학하여 서양식 교육을 받았으며, 1912년 안성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인천공립상업학교에 진학하여 2년간 상업에 관한 실무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중도에 그만두고 낙향한 그는 1916년 18살의 나이로 부인 오숙근(吳淑根)과 결혼하여 3남 2녀를 두었다.
이후 상경하여 경성부 팔판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팔판동)에 거주하던 그는 경성관립공업학교 염직과(染織科)에 전학했고 1918년 졸업했다. 이 시절 그는 화학을 처음으로 공부했고, 이는 후에 그가 사진 인화 등의 연구에 집중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졸업 후 안성으로 낙향한 그는 형 신석균(申錫均)이 운영하는 지물포 관리를 도우며 소일했다. 그러던 중 1919년 3.1 운동이 발발하자, 그는 고향에서 시위에 가담해 독립선언문 복사와 태극기 제작을 맡았다. 이후 일제 경찰의 수배를 받고 서울로 도주해 매부의 집에 은신하면서 8개월간 도피 생활을 했다. 당시 그의 친구였던 이건춘(李建春)은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3월 29일 안성군 원곡면 만세시위에 가담했는데, 이를 앞두고 비밀리에 만세운동에 참가할 군중들에게 나누어줄 선언문을 복사하고 태극기를 만드는 등 사전 거사준비를 하게 되었다. 선생을 비롯한 우리 친구 몇 사람이 주동자와 함께 사랑방에서 시위에 필요한 물건들을 밤을 새워 만들고, 이것을 장터까지 들고 나가 군중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만세운동에 참가했다. 그후 친구 신낙균은 이 사건 때문에 도피생활을 해야 했는데, 밤에 변장을 하고 안성을 빠져나가 서울에 피신해, 매부 집에 은신해 8개월 동안을 숨어 살았다. 그리고 이 도피 생활이랄까 이런 생활 속에서 아마추어 사진가이던 매부로부터 사진술을 접할 수 있었고, 이런 저런 사정으로 해서 사진과 연관을 맺을 수 있는 결정적인 사건으로 이어졌을 것이라.
최인진, <신낙균>, 2005.
최인진, <신낙균>, 2005.
신낙균의 매부 정욱진은 은행가로, 아마추어 사진가였다. 그는 카메라를 몇 대 가지고 있었고 사진에 대해서 상당히 해박한 지식을 갖추고 있었다. 신낙균이 사진가가 된 데에는 그의 영향이 매우 컸을 것으로 보인다. 이후 신낙균은 1922년 부산을 경유해서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처음에는 도쿄의 영어전문기관인 세이소쿠(正則) 영어학교에 입학하여 1년간 영어를 전공했으며, 이후엔 도쿄 토요대학 문화학과에 입학하여 2년간 문화사와 이론 전반을 연구했다.
1924년, 신낙균은 토요대학을 중퇴하고 본격적으로 사진을 전공하기 위해 동경사진전문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이 학교에서 3년간 수업을 받고 제2회 졸업식에서 학위를 받고 졸업했다.[1] 당시 이 학교에서 신낙균이 공부했던 과목은 색채학, 미술사, 공예사, 사진공예, 사진광학, 광화학, 사진론, 화학, 채광, 촬영실습, 인화, 수정, 재료약품, 법제도, 경제학, 물리학, 수학, 도안, 영어, 화학실험 등이었으며, 이는 사진의 역사와 이론에서부터 사진이 만들어지는 전 과정을 포괄하는 것이었다.
동경사진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귀국한 그는 중앙기독교청년회학교에 초빙되어 사진과 교수로 취임했다. 이후 그는 경성사진사협회에 가입한 뒤 영업 사진가들을 중심으로 한 조선 예술사진 운동과 사진 교육을 이끌었으며, 경성사진사협회의 주축 회원인 박필호, 현일영, 김광배 등과 동지로 맺어졌다. 1929년, 신낙균은 경성사진사협회의 3대 회장으로 부임했다. 그리고 1930년에는 4대 회장으로 취임하여 사진 인화법 등의 강연회를 통해 한국 사진의 기술적 능력 향상을 위해 노력했다. 한편 그는 사진과의 교육이 제대로 되기 위해서는 올바른 사진학 교재가 필요하다고 보고 일반적인 사진의 이론에서부터 구체적인 실기 내용을 포괄하는 <사진학 강의> 등 여러 편의 책을 집필하여 출간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진과는 일반인들의 사진에 대한 이해 부족과 이에 따른 경영난, 그리고 일제의 간섭과 탄압을 견디지 못하고 폐과가 되어버렸다. 이에 그는 경성사진사협회 회원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교육기관을 세우기로 하고, '경성사진학강습원'을 설립했다. 그는 이 강습원의 초대 원장으로 취임하여 사진 교육을 지속했다. 그는 1934년 강습원의 교재로 사용하고자 <사진요람>을 출간했다. 이 책은 앞서 발간된 사진에 관한 책들의 내용을 요약, 정리한 것이었다. 그러나 일제는 강습원 인가를 내주지 않았고, 결국 강습원은 경영난에 시달리다 문을 닫았다.
1934년 7월 신낙균은 동아일보사의 초빙을 수락하고 신문 사진 편집자를 맡았다. 그는 동아일보 제2대 사진과장을 맡아 150원의 급료를 받으면서 신문 사질의 질을 높이기 위해 세련된 편집기술을 동원했다. 또한 그는 동아일보 지면의 칼럼을 통해 당시 사진의 최신 흐름과 기술적 동향 등을 소개함으로서 일반인들의 사진에 대한 관심을 이끌어내려 노력했다. 그러던 1936년 8월 손기정이 1936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 출전해 금메달을 획득했다. 이때 그는 시상식에서 금메달을 걸고 있는 손기정 선수의 가슴에 박혀 있던 일장기를 고의로 지웠다. 이른바 일장기 말소사건이었다.
신낙균은 일장기의 말소를 사진기자 서영호에게 직접 지시했고, 사진재판을 하는 과정에서 동판에 청산가리를 뿌려 일장기를 완전 삭제하게 했다. 이 일이 발각되면서 편집자 장용서, 사회부장 현진건, 체육부 기자 이길용, 조사부원이자 화백 이상범 등과 함께 체포된 그는 33일간 모진 고문을 받고 '이후 언론기관에 일절 참여하지 않겠다'는 서약서에 강제로 서명한 뒤에야 석방되었다.#
이후 다시는 사진계나 언론계에는 발을 붙이지 못하고 경기도 여주에 있던 팔보금산의 금광 회사에 취직하여 몇 개월간 일을 하기도 했고, 진남포에 있는 대성 식산회사에 1년간 재직하기도 했고, 이후에는 수원에서 조용히 지냈다.
8.15 광복 후 다시 인천으로 옮겨 작은 제유공장을 운영하기도 했다. 그러나 6.25 전쟁이 발발하자 공장 운영을 포기하고 수원으로 돌아와 칩거했다. 1953년 전쟁이 종결되자 수원북중학교 화학과 공민교사에 부임했다. 그러다 1955년 4월 4일 학생들을 가르치던 중 뇌일혈로 쓰러져 사망했다. 향년 56세.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신낙균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17년 4월 7일 그의 유해를 국립서울현충원 제1충혼당 3층 320실 74호에 이장했다.
2009년 '사단법인 사진가 신낙균 선생 기념사업회'가 설립되었다.
[1] 동경사진전문학교 제2회 졸업식 단체사진 앨범에는 졸업생들의 서명을 한 곳에 모아 게재한 서명판이 있다. 이때 신낙균은 그의 서명을 한글로 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