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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종(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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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24대 국왕
헌종 | 憲宗
대한제국 추존 황제
헌종 성황제 | 憲宗 成皇帝
파일:헌종추정어진.jpg
헌종 추정 어진[1]
출생 1827년 9월 8일
(음력 순조 27년 7월 18일)
한성부 창경궁 경춘전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 185)
즉위 1834년 12월 18일 (7세)
(음력 순조 34년 11월 18일)
한성부 경희궁 숭정문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새문안로 45)
사망 1849년 7월 25일 (향년 21세)[2]
(음력 헌종 15년 6월 6일)
한성부 창덕궁 중희당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
능묘 경릉(景陵)
재위기간 조선 왕세손
1830년 10월 31일 ~ 1834년 12월 18일
(음력 순조 30년 9월 15일 ~ 순조 34년 11월 18일)
조선 제24대 국왕
1834년 12월 18일 ~ 1849년 7월 25일
(음력 헌종 즉위년 11월 18일 ~ 헌종 15년 6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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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본관 전주 이씨
환(烉)
부모 부왕 문조 익황제
모후 신정익황후
형제자매 외아들[3]
배우자 효현성황후 (1837년 혼인 / 1843년 사망)
효정성황후 (1844년 혼인)
후궁 경빈 김씨, 정빈 윤씨, 숙의 김씨
자녀 1녀 - 옹주(1848, 조졸)
종교 유교 (성리학)
문응(文應)
원헌(元軒)
전호 효정전(孝定殿)
묘호 헌종(憲宗)
존호 체건계극중정광대지성광덕홍운장화
(體健繼極中正光大至聖廣德弘運章化)
시호 조선: 경문위무명인철효대왕
(經文緯武明仁哲孝大王)
대한제국: 경문위무명인철효성황제
(經文緯武明仁哲孝成皇帝)
: 장숙(莊肅)[4]
}}}}}}}}}

1. 개요2. 생애
2.1. 효명세자아들2.2. 왕대비의 수렴청정병오박해2.3. 짧은 친정2.4. 요절2.5. 능묘
3. 가계4. 어진5. 여담6. 대중매체7. 관련 문서8.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조선 제24대 임금이자 대한제국추존 황제. 묘호는 '헌종(憲宗)', 시호는 '경문위무명인철효성황제(經文緯武明仁哲孝成皇帝)', 는 '환(烉)',[5] 는 '문응(文應)'.

순조의 유일한 친손자이자 효명세자의 하나뿐인 외아들[6]로 아버지인 효명세자가 20세의 나이로 갑작스럽게 요절하고, 할아버지 순조마저 건강 악화로 일찍 세상을 떠나자 왕세손(王世孫)의 신분으로 7세의 어린 나이에 국왕이 되었는데 조선 왕으로서는 최연소로서, 10세에 즉위한 할아버지 순조와 단종보다도 어린 나이에 즉위했다.[7][8]

영조-정조에 이어서 2번째로 조부에서 손자로 권좌가 이어지는 조손(할아버지 → 손자) 계승의 절차를 밟았다.

2. 생애

2.1. 효명세자아들

1827년(순조 27년) 7월 18일 창경궁 경춘전에서 효명세자세자빈 조씨의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세자빈이 원손을 낳았다 대신들이 하례 하다
세자빈이 원손(元孫)을 낳았다. 하교하기를,
"오늘 신시(申時)[9]에 세자빈이 원손을 낳았으니, 모든 행사는 관례대로 거행하라."
하고, 시임 대신과 원임 대신, 대각의 신하, 약원의 세 제조를 함인정(涵仁亭)에서 불러 보았다.
영중추부사 한용귀(韓用龜) 등이 아뢰기를,
"하늘과 조종들께서 묵묵히 도우시어 빈궁께서 원손을 순산하셨으니, 이는 실로 억만 년 종묘 사직의 무궁한 기쁨입니다.
처음으로 손자를 보시는 경사를 맞았으니, 전하의 마음이 더욱 기쁘시겠습니다만 신들도 즐거운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 순조실록》 29권, 순조 27년(1827년, 청 도광(道光) 7년) 7월 18일 (신유) 2번째기사.[10]

《헌종대왕 행장》에 이르면 태몽이 꽤나 비범했다고 하며 출생일에 학들이 떼거지로 날아서 왕비의 품 안으로 들어갔다는 것인데 이걸 궁궐에서는 기이하다고 했다. 《행장》에 의하면 준수한 외모에 큰 목소리가 금석같다고 하며 100일 전에도 벌떡 일어섰다고 한다.[11]

왕세손 책봉을 불과 4개월 앞두고, 아버지 효명세자가 1830년(순조 30년), 세는나이 22세에 갑작스레 사망하면서 헌종은 고작 세는나이 4세의 매우 어린 나이에 동궁(東宮)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할아버지 순조 역시 1834년(순조 34년), 44세에 죽고[12] 헌종이 세는나이 8세에 왕위를 이어받게 된다. 현재로 따지면 초등학교 1학년인 너무 어린 나이에 즉위했기 때문에 순조의 정비이자 할머니인 왕대비 순원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실시했다.
임금이 숭정문에서 즉위하고 왕대비 수렴 청정의 예를 행하다
임금이 숭정문(崇政門)에서 즉위하였다.
왕대비(王大妃)를 받들어 수렴 청정(垂簾聽政)의 예(禮)를 흥정당(興政堂)에서 행하고,
조하(朝賀)를 받은 다음 교서(敎書)를 반포(頒布)하고 대사(大赦)[13]를 베풀었다.
- 헌종실록》 1권, 헌종 즉위년(1834년, 청 도광(道光) 14년) 11월 18일 (기묘) 1번째기사.[14]

한편 어머니 신정왕후는 안동 김씨 세도가에 이어 힘은 세지만 발톱을 숨기고 권력을 움켜쥐려는 풍양 조씨 집안 출신이다. 첫 왕비는 안동 김씨로 김좌근의 딸인 효현왕후 김씨였으나, 결혼 2년만인 헌종 9년인 1843년에 16세의 나이로 일찍 사망했고 이후 효정왕후 홍씨를 계비로 맞았다. 외가와 처가에서 알 수 있듯이 헌종의 치세는 실로 풍양 조씨와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로 조선이 파탄 직전까지 가고 있던 시절이었다.

2.2. 왕대비의 수렴청정병오박해

순원왕후의 수렴청정 시기에는 '척사윤음'(斥邪綸音)이 반포되었고 천주교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가 발생했다. 1839년(헌종 5년), 기해박해 때는 프랑스인 앵베르 범 라우렌시오[15] 주교, 모방 나 베드로 신부, 샤스탕 정 야고보 신부, 조선인 평신도 정하상 바오로 등이 순교했다. 1846년(헌종 12년) 병오박해 때는 한국 최초의 천주교 신부인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순교했다.[16]

더욱 극심해진 삼정의 문란으로 백성들의 민생은 파탄의 직전까지 내몰리고 있었지만 이에 대한 대책[17]은 딱히 세우지도 못했고 외부에서는 서양 선박들이 나타나 통상을 요구하는 이양선 출몰 사건이 잇달아 일어나 민심은 동요했다.

왕권도 헌종 초기에는 매우 떨어지는 편이었다. 즉위 2년인 1836년(헌종 2년) 남응중이, 1844년(헌종 10년)에는 민진용[18]과 이원덕 등이 사도세자의 서출이자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언군의 손자 회평군을 왕위에 올리려고 했으나 실패했다.[19] 이 역모의 특징은 정치적 기반이 전무한 몰락한 양반들의 계획이었다는 점으로, 이만큼 왕의 위신이 떨어졌다.
남응중·남경중을 국문하여 사형에 처하다
남응중(南膺中)·남경중(南慶中)을 국문(鞫問)하여 사형(死刑)에 처하고, 고변인(告變人) 천기영(千璣英)은 상을 내려 오위 장(五衞將)으로 삼았다. 남응중의 족당은 모두 좋은 문벌(門閥)이었는데, 성품이 간교하여 남의 재물을 편취(騙取)하기 좋아하고 역모(逆謀)를 꾸며 경외(京外)에 출몰하면서 속임수만 써왔다. 일이 발각되자 면하지 못할 줄 알고, 동래(東萊)의 왜관(倭館)으로 도망해 들어가서 극도로 흉악하고도 부도(不道)한 말을 지어내어 투서(投書)하여 두 나라의 틈을 부추겼으나, 왜인들도 믿지 않고 그를 잡아서 우리 나라에 넘겨주었다. 이때에 이르러 국문하니, 남경중과 함께 승복하였다. 남공언은 그들의 도당이었는데 국정(鞫庭)에서의 난언(亂言)이 더욱 흉악하여 아울러 노륙(孥戮)하였다. 남응중의 수급(首級)은 왜관에 매달아 보이도록 명하고, 따로 서계(書契)[20]를 지어 관수왜(館守倭)에게 전하여 약조(約條)를 중히 여기고 교호(交好)를 돈독히 한 뜻을 보이었다.
---
- 헌종실록》 3권, 헌종 2년(1836년, 청 도광(道光) 16년) 12월 23일 (임신) 1번째기사.[21]
결안에 민진용의 죄가 부대시 능지 처사에 해당한다고 하다
죄인 민진용(閔晋鏞)의 결안(結案)에 이르기를,
"그는 미천한 무부(武夫)로서 감히 불궤(不軌)한 흉계를 품고 효경(梟獍)[22]의 마음으로 귀신처럼 물여우처럼 역당(逆黨)과 체결하고 흉언(凶言)을 난만(爛慢)[23]하게 하였습니다. 강사(江舍)에서 밤에 모여 세 사람이 주무(綢繆)한 것이 모두 지극히 흉악하고 지극히 참혹하였는데, ‘이곽(伊霍)[24] 두 글자가 어찌 신하로서 감히 들을 수 있는 것이고 감히 말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마는 방자하게 입에다 내었습니다. 모반(謀反)하고 대역(大逆)하여 부도(不道)한 것이 확실하다고 지만(遲晩)[25]하였으니, 죄가 부대시 능지 처사(不待時凌遲處死)[26]에 해당합니다."
하였다.
- 헌종실록》 11권, 헌종 10년(1844년, 청 도광(道光) 24년) 8월 21일 (을묘) 1번째기사.[27]

2.3. 짧은 친정

안동 김씨의 세력이 큰 견제가 없이 무럭무럭 커가는 시기 헌종은 할머니 순원왕후로부터 수렴청정을 거둔 뒤로 친정이 시작된 이후에 20세가 될 무렵부터 척신들을 견제하기 시작했다. 수렴청정이 15세 때에 끝나고, 첫 왕비인 효현왕후가 죽으면서 할머니 순원왕후의 의중에 따라 남양 홍씨 홍재룡(洪在龍)의 딸인 효정왕후를 계비로 맞은 것. 이때 주부(主簿) 김재청(金在淸)의 딸을 후궁으로 삼기도 했다. 그래서 안동 김씨의 세도는 풍양 조씨의 부상과 함께 다시 조금이나마 흔들리기 시작했다.

다만, 야사에서는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의 경쟁 시기 정도로 비추어진다. 일례로 한 야사에서는 조병구가 권세를 휘두르자 "외삼촌의 목에는 칼이 안 들어가는가?"라고 말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이는 김좌근의 일화로도 알려져 있다.[28][29] 헌종의 이 말에 조병구는 듣고 놀라서 황급히 물러나와 퇴궐하다가 가마가 뒤집혀서 머리가 깨져 죽었다고도 하고 이게 신정왕후 조씨 앞이었는데도 헌종의 책망을 듣자 음독 자살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실제 조병구는 오히려 죽기 전 해까지도 한성 판윤, 예조판서, 이조판서, 공조판서를 한창 지내다가 대간들의 탄핵에 몰려 쫓겨나 1845년(헌종 11년) 사망했다. 이는 어디까지나 안동 김씨의 편인 대간들의 견제에 따른 것으로 사망 시기 자체가 헌종이 친정을 시작한 시기보다 이르다. 무엇보다도 조병구가 헌종이 그렇게 말할 정도로 권세를 휘둘렀다면 졸기에 좋은 내용이 실릴리 없다.[30]

대사간 서상교가 안동 김씨의 실세인 김흥근이 탐오하고 왕대비의 비위를 맞추어(= 궁위를 엿보아) 정치하는 것을 보고하며 처벌을 주장해 헌종은 김흥근을 탄핵하고 귀양보내기도 했다. 또한 안동 김씨의 수장인 김좌근 등을 유배를 보내는 등 반(反) 안동 김씨 행보를 밟았다. 대구 서씨 서희순을 이조판서 겸 총위대장으로 내세우기도 했고 안동 김씨에게 밉보인 김정희, 조병헌은 헌종 14년(1848년)에 유배에서 풀렸으며 박규수를 조정으로 불러 중용할 뜻을 내비췄다. 반면 영의정 정원용은 안동 김씨에게 아부하다가 파직당하는데 오군영의 훈련대장을 외척이 아닌 사람들로 채워넣고 병조판서를 독자적으로 임명한건 대표적이었다. 이렇게 군권을 장악하고 정조장용영처럼 친위대인 총위영(총융청)까지 구성하는 등 아주 활발한 왕권 강화 정책을 펼쳤다. 아편전쟁의 전말을 보고 들으면서 국방력 강화와 척신 척결이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수령의 장죄(뇌물) 문제를 전면으로 들고 나와서 법 개정을 주도한 적도 있었는데 수령의 뇌물이 어디로 가는가를 생각해보면 세도 가문들을 타깃으로 노린 것이 확실하지만 비변사의 비협조로 법 개정은 무산되었다.

그런가하면 암행어사도 활발하게 전국으로 파견했고, 안동 김씨의 조병헌 사사 요구를 매우 강력하게 거부하면서 역으로 안동 김씨의 조종을 받던 삼사를 모조리 파직하기도 했다. 조병헌은 결국 귀양을 갔다가 헌종 말에 풀려나지만 철종 초에 사사된다.

재위 말에는 《국조보감》의 증수를 위해 정조·순조·익종에 대한 《삼조보감》(三朝寶鑑)을 1848년(헌종 14년)에 찬집했고, 《열성지장》, 《동국사략》, 《문원보불》, 《동국문헌비고》 등이 편찬됐으며 각 도의 제방과 저수지를 정비하는 등 치적을 세우기도 했다.

2.4. 요절

세도가 안동 김씨를 견제하며 왕권을 힘겹게 잡아가는 시도 중에 1849년(헌종 15년) 7월 25일[31], 향년 21세의 이른 나이로 창덕궁 중희당에서 승하했다. 헌종은 어느 순간부터 피를 토하며 소화불량 증세를 자주 보였고 설사가 심해지며 얼굴에 갈수록 심한 부종 증상이 나타나 의원을 통해 약을 조제하고 치료하면서 상태가 좋아졌다 나빠졌다를 매번 반복하다가 사망하였다고 전해진다.
오시에 창덕궁의 중희당에서 승하하다
오시(午時)[32]에 임금이 창덕궁(昌德宮)중희당(重熙堂)에서 승하하였다.
- 헌종실록》 16권, 헌종 15년(1849년, 청 도광(道光) 29년) 6월 6일 (임신) 9번째기사.[33]

이는 현대 의학적 관점으로 보았을 때 평소 정력에 좋다는 음식을 많이 복용하였다는 일화로 미루어 급성 간염이나 간경변의 합병증으로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성기능 장애를 극복하려고 녹용과 인삼을 꾸준히 복용한 것으로 보아 신부전증을 앓다가 심장질환이 발생해 심장마비로 사망했을 가능성도 높다. 죽기 직전 다급히 의원을 불렀으나 결국 병을 다스리지 못하고 젊은 나이에 후사를 보지 못하며 세상을 떠났는데, 생전에 후사를 보지 못하고 요절한 탓에 정조의 마지막 남자 직계 후손이기도 하다.

아버지 효명세자도 헌종과 비슷한 나이에 각혈하며 쓰러졌고, 이후 요절한 것을 보면 아버지와 비슷하게 체질적인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2.5. 능묘

헌종의 능은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내의 경릉(景陵). 왕비인 효현왕후, 효정왕후와 나란히 묻힌 삼연릉(三連陵)으로 삼연릉 형식은 조선 왕릉 중 유일하다. '우왕좌비[34]'의 원칙에 따라 맨 왼쪽에 헌종 능이 있고 가운데에 효현왕후 김씨, 오른쪽에 효정왕후 홍씨가 묻혀 있다.[35]

3. 가계

3.1. 친가(전주 이씨)

3.2. 외가(풍양 조씨)

3.3. 처가(안동 김씨, 남양 홍씨)

3.3.1. 안동 김씨

3.3.2. 남양 홍씨

3.4. 배우자 / 자녀


슬하에 아들은 없었으며, 궁녀 출신 숙의 김씨에게서 딸 하나를 두었는데 요절했다. 헌종이 후사 없이 23세란 젊은 나이에 사망함에 따라 결국 정조로부터 이어진 정조계 왕통[42]은 단절되었다. 이는 결국 대왕대비순원왕후와 안동 김씨 세도가 그나마 제일 가까운 왕실 종친 중에 강화도를 뒤져 사도세자의 서자 은언군의 서손자인 강화도령 이원범을 순조의 양자로 입적하여 옹립한 요인이 되었다.

4. 어진

파일:헌종추정어진.jpg
파일:R6NuURZ.jpg
<colbgcolor=#bf1400> 위키백과가 추정한 헌종 어진 <colbgcolor=#bf1400> 《선원보감》에 실린 헌종 초상화
헌종의 정식 어진1954년 12월 26일부산광역시 용두산에 발생한 화재로 완전히 소실되었다. 다만, 조선 국왕들의 간략화된 어진을 실어놓은 《선원보감》에서 헌종의 초상화를 찾을 수 있다.[43] 별개로 위키백과에서는 신원 미상의 어진을 헌종의 어진으로 소개했는데, 익선관이 조선 후기의 긴 모양인 것과 흥선대원군의 복식 간소화 이전의 복식, 어린 외모로 묘사한 것을 보면 꽤 그럴 듯 해보이지만 정확히 헌종의 어진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 다만 추정 어진 속에 남은 귀 윗부분의 크기나 눈매가 선원보감과 비슷한 것을 보면 헌종의 초상화일 가능성이 유력하다.

5. 여담

헌종 대왕 행장(行狀)
왕은 용청(龍睛)에 서각(犀角)이고 외모가 준수하고 명랑하며,
큰 목소리가 마치 금석(金石)에서 나오는 것 같으며 백일이 되기 전에 능히 일어서셨다.
- 헌종실록》 1권, 헌종대왕 행장 中[44]

* 4세의 어린 나이에 아버지인 효명세자를 여의고 항상 효명세자를 그리워하였다. 효명세자의 외모를 기억하지 못하는 걸 안타깝게 여겨서 신하들에게 효명세자의 외모에 대해서 질문하니 "진전에 모신 수용이 오히려 매우 닮으신 전하의 용안에 미치지 못합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자신의 외모가 효명세자와 비슷하다는 대답을 들은 헌종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하염없이 슬퍼하였다.

6. 대중매체

조선 역대 국왕들 중에서 사극과 가장 인연이 늦은 왕. 첫 등장이 2018년인데 그 전까지는 하다 못해 죽는 장면으로라도 나온 적이 없었다. 조선 왕들 중에서 인지도가 낮은 왕들은 여럿 있지만 예종남이의 옥사, 인종문정왕후의 치세라는 극적 사건이 있어 사극에 여러 번 얼굴을 비추기라도 했고, 이렇다 할만한 화제성[53]도 없는 현종조차도 첫 사극 출연이 2002년으로 헌종보다 16년 더 빨랐다. 심지어 아내 효정왕후2001년 KBS 드라마 《명성황후》에서 출연했으니 마누라보다도 더 등장이 늦은 경우이다. 이때 효정왕후를 연기한 사람은 배우 김정하[54]이다.파일:DVhe5r8UQAEYEmg.jpg}}}||
<colbgcolor=#bf1400> 흥부》의 헌종
파일:명당헌종.jpg}}}||
<colbgcolor=#bf1400> 명당》의 헌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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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 〈빅토리아 3〉의 헌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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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제 혈통이 아닌 족보를 기준으로 작성되었으며, 실선은 친자, 점선은 양자 관계임
※ 왕족 / 황족으로서 정식 봉호가 있는 사람만 기재함
※ 은신군은 영조의 동생 연령군의 후사를 이었으나 당시에는 장조 의황제의 아들로 간주하여 그 후손들에게 황족 작호를 수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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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54년 부산 용두산 대화재로 훼손되어 정확한 용모를 알 수 없으나 헌종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정된다.# 국립고궁박물관순종의 황태자 시절 예진으로 추정하고 있다.[2] 단종, 예종 다음으로 요절한 왕이다.[3] 사후 모후 신정왕후가 고종을 양자로 들여 장자가 된다.[4] 1908년(융희 2년), 황제 추존과 동시에 폐지.[5] 명종도 휘가 '환'이지만, 명종은 '큰 산 환()'이고 헌종은 '불꽃 환()'이다. 장조의 현손 항렬 대에서는 이름에 '어진사람 인(儿)'이 들어간 글자를 공유한다. 정조의 증손인 헌종은 '환()'으로 안에 포함되어있다. 그리고 고종은 '형()'으로 좌우로 밖에 나뉘어 있으며, 초명 '재황(載)'에는 '황(晃)'의 밑에 발의 형태로 들어가있다. 은언군의 증손인 덕안군은 '재덕(載)', 청안군은 '재순(載)'으로 파자하지 않으면 잘 알아보기 어려운 형태이다. 은신군은전군의 증손으로 완림군은 '재원(載)', 완순군은 '재완(載)', 완영군은 '재긍(載)', 흥친왕은 '재면(載)', 완은군은 '재선(載)', 인양군은 '재근(載)', 의양군은 '재각(載)', 예양정은 '재규(載)'로, 고종의 초명과 마찬가지로 발의 형태로 온전히 들어가있다. 완평군의 둘째 아들 '재현(載)'은 본가의 양자로 들어가 황실 종친 자격을 잃었지만 이름자에 '儿'은 그대로 있다. 유일하게 경은군 '재성(載星)'이 규칙을 적용받지 않았는데, 서자인데다 작호를 받은 게 굉장히 늦은 시기다. 재미있는 사실은 저 중 헌종을 제외하고 장조의 실제 혈통을 물려받은 사람은 유일하게 저 규칙을 사용하지 않은 이재성 뿐이라는 것이다.(나머지는 전부 입양을 통해 족보상 후손이 된 경우이다.)[6] 효명세자도 사실상 순조의 외아들이었고(둘째 아들은 봉군되기도 전에 요절), 순조도 문효세자가 어려서 죽은 후 정조의 유일한 아들이었기 때문에 헌종은 드물게도 왕인데 3대 독자 포지션.[7] 이와 대조되게 가장 최고령으로 즉위한 군주는 태조 이성계로 즉위 당시 나이가 56세였다. 물론 이쪽은 개국 군주지 세습 군주가 아니므로 입장이 다르다. 오히려 20대가 개국 군주인게 더 이상하다. 개국 군주로 유명한 한고조 유방도 나이 40대 혹은 50대(사료상 나이 기록에 논란이 있지만 아무리 젊게 봐도 40대 중반이다.)에 통일왕조의 황제가 되었다.[8] 비슷한 경우로는 고려 시대충목왕이 있으며, 충목왕은 즉위 당시 6세이자 최연소였다.[9] 오후 3시~5시.[10] #.[11] 물론 한 나라의 얼굴이자 지도자인 왕을 띄워주려는 의도가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12] 조선 왕의 평균 재위 기간은 19년, 평균 수명은 46세여서 순조가 빨리 죽었다고 할 수는 없다. 재위 기간이 30년이 넘은 것을 생각하면 더 그렇고. 그러나 상술했듯 4년 전 순조의 유일한 아들이자 헌종의 아버지인 효명세자가 젊은 나이에 요절한 탓에 결국 8살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헌종이 왕위에 올라야만 했다.[13] 일반 죄에 대한 왕의 사면을 이름.[14] #.[15]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2대 교구장[16] 이들은 훗날 가톨릭 교황의 공인을 받은 진짜 가톨릭 성인이 된다. 특히 정하상 바오로 성인의 경우는 지금도 세계 가톨릭 신학자들이 연구를 하고, 정하상의 이름을 본뜬 가톨릭 교회가 미국이나 남미 등 해외에 여럿 있을만큼 전세계적으로 중요한 가톨릭 성인이다. 그가 생명을 걸고 청나라 천주교회로 수없이 건너갔던 일이나, 마카오를 통해 바티칸 교황에게 편지를 보낸 사건이 가톨릭 학계에서 현재뿐만 아니라 19세기 당시에도 매우 유명했으며, 당시 교황 그레고리오 16세가 동양에 있다는 조선이라는 나라의 신자가 사제 한명을 구하기 위해 자기 생명을 걸고 편지를 보냈다는 사실에 기뻐 눈물을 흘렸다는 증언 기록도 남아있으며, 지금도 교황청에는 19세기 성인 정하상의 편지가 보관되어 있다. 정하상 바오로 성인의 삼촌이 다산 정약용이며, 부친은 정약용의 형인 가톨릭 복자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이다.[17] 1834년(헌종 즉위년) 11월 20일 1번째 기사 '기호 지방에 제수의 복정을 특별히 늦추게 하다'와 동년 11월 28일 1번째기사에는 '한성부의 하속들이 주구하고 징색하는 폐단을 범하지 않도록 신칙하다'라는 기사가 있기는 하나 실제로는 별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다.《헌종실록》 1권, 헌종 즉위년(1834년, 청 도광(道光) 14년) 11월 20일 (신사) 1번째기사 #, 《헌종실록》 1권, 헌종 즉위년(1834년, 청 도광(道光) 14년) 11월 28일 (기축) 1번째기사 #.[18] 집안은 몰락한 노론이어서 신분은 중인이었다고 한다.[19] 이 역모로 인해 회평군은 사약을 받아 처형당했고, 그의 이복동생들인 철종영평군강화도로 유배된다.[20] 서계는 주로 일본과의 교린 관계(交隣關係)에 대한 문서를 말하는데, 일본 사행(使行)의 임무 내용, 사절(使節)과 상왜(商倭)의 구별, 왜구(倭寇) 여부의 식별 등 다양한 역할을 했다. 이의 발신인은 조선의 경우 국왕을 비롯하여 예조 판서·참판·참의와 동래 부사 등이 막부장군(幕府將軍)·대마 도주·거추(巨酋) 등에게 보내는 것으로 대별되고, 일본의 경우는 막부장군 등 국가에서 보내 오는 공신(公信)으로의 서계와 거추 등이 보내 오는 사신(私信)으로서의 서계로 대별된다.[21] #.[22] 악인(惡人)의 비유한다. 효(梟)는 어미새를 잡아먹는 올빼미, 경(獍)은 아비 짐승을 잡아먹는 짐승을 비유해 말한다.[23] 차서 넘치는 모양을 말함.[24] 은(殷)나라의 현상(賢相) 이윤(伊尹)과 전한(前漢)의 명신 곽광(霍光). 이윤은 처음에 농부(農夫)였는데, 탕왕(湯王)이 세 번이나 초빙(招聘)하여 마침내 출사(出仕)하였음. 탕왕을 도와 하(夏)의 걸왕(桀王)을 정복하고 천하를 통일하였다. 탕왕이 죽은 뒤에 그 손자 태갑(太甲)이 무도(無道)하게 행동하므로 이를 3년 동안 동궁(桐宮)에 추방하였다가, 태갑이 다시 회개하자 맞아들였다. 곽광은 무제(武帝)의 유조(遺詔)를 받들어 대사마 대장군(大司馬大將軍)으로서 소제(昭帝)를 도왔으며, 다음 창읍왕(昌邑王)이 음란하므로 그를 폐위시키고 선제(宣帝)를 세웠다. 전후 20년 동안 나라의 정권을 잡았는데, 그의 딸은 선제의 황후가 되어 온 집안이 부귀를 누렸으나, 이로써 그의 사후(死後)에 선제는 곽씨(霍氏)의 병권(兵權)을 거두고, 모반(謀反)하려 하였다고 해서 친족(親族)을 멸하였음을 의미한다.[25] 죄인이 스스로 자백할 때 ‘너무 오래 속여서 미안하다’는 뜻으로 자기의 잘못을 고백하던 말을 의미한다.[26] 사형을 할 때 가을철 추분(秋分)까지 기다리는 것이 원칙이나, 십악 대죄(十惡大罪) 등 중죄(重罪)를 범한 죄인은 이에 구애되지 않고 사형을 집행하는데, 이를 부대시라고 함. 능지 처사(凌遲處死)는 가장 참혹한 형벌(刑罰)의 하나로, 먼저 팔·다리의 사지(四肢)를 절단하고 그 다음에 머리를 베는 것. 수(隋)·당(唐) 이래로 없어졌으나 원(元)나라 때 다시 부활되었고, 조선에서는 거열(車裂)로써 이를 대신하였다.[27] #.[28] 이야기의 출처는 김택영의 《한사경》인데 헌종 앞에서 애체(안경)를 썼다고 한 소리 들은 것. 한 소리만 듣고 끝나서 다행인게 당대 예법에서 분명 어긋나는 것이었다. 안경을 쓸 정도로 공부를 많이 했으니 웃어른 앞에서 자신의 학식을 뽐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29] 훗날 서재필고종 앞에서 안경을 썼다가 욕을 먹기도 했고, 순종도 지독한 근시였지만 아버지 고종 앞에서는 예를 지키기 위해 안경을 안 썼다고 한다.[30] 조병구의 《졸기》에는 '숙성한 재주를 지녔다. 다만 각박한게 흠이었다'고 되어 있다.[31] 음력 6월 6일.[32] 오전 11시~오후 1시.[33] #.[34] 오른쪽에 왕을 장사하고 왼쪽에 왕비를 장사함.[35]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의 작가 박시백은 이 능에 대해 "안동 김씨효현왕후를 헌종과 효정왕후가 모시는 듯한 인상을 준다"고 촌평하기도 했다.[36] 친증조모는 정조의 간택후궁인 현목수비 박씨이다.[37] 생몰기간 : 1828년 4월 27일 ~ 1843년 10월 18일. 혼인을 불과 10살 때인 1837년에 하였다. 1살 많은 남편 헌종은 11살.[38] 생몰기간 : 1831년 3월 6일 ~ 1904년 1월 2일.[39] 생몰기간 : 1832년 9월 21일 ~ 1907년 6월 1일.[40] 생몰기간 : 1814년 ~ 1895년 11월 12일.[41] 헌종의 유일한 혈육이자 자녀였다. 1848년(헌종 14년)에 태어났지만, 태어난 당일에 사망(조졸)했다.[42] 정조 - 순조 - 익종 - 헌종 순.[43] 신뢰하기 어려운 것이 23살에 요절한 헌종의 초상화라고 보기에는 참고만 하도록 하자. 비슷한 나이대인 연잉군의 초상화와 비교해도 상당히 노안이다.[44] #.[45] 헌종실록》 1권, 헌종 즉위년(1834년, 청 도광(道光) 14년) 12월 16일 (병오) 1번째기사. #.[46] 다만 저 추측이 사실이더라도, 안동 김씨인 첫 왕비가 일찍 죽고 계비가 홍씨인 상태에서는 사실 계비를 통해 대를 잇는게 오히려 유리했을 것이므로 왕비를 피했다는 건 이치에 맞지 않는다.[47] (헌종이 죽기 며칠 전) '왕을 몰아내지 않으려고', '내 집의 패악한 자식', (헌종 사후) '나도 거리길 거시 업서 싀훤해' 등[48] 변원림의 해석(<순원왕후 독재와 19세기 한국 사회의 동요>, 2012년) 참조. 다만, <순원왕후의 한글 편지>를 편집한 이승희 교수는 이를 '안동 김씨 일가의 패악한 이'로 해석한다. 《대비, 왕 위의 여자》의 김수지의 종합에 따르면 순원왕후는 대체로 친정 김씨 가문을 '우리 집'이라고 하고 왕가를 '내 집'이라고 했는데, 순원왕후는 '내 집'을 거론했으므로 '내 집의 패악한 자식'이라고 언급할 만큼 손자 헌종을 못마땅하게 여겼다고 본다.[49] 안동 김씨 김흥근이 유배를 가게 되었을 때 그것을 막지 않은 순원왕후에게 질타가 쏟아지자 같은 편지에서 "김흥근이 떳떳하다면 (유배는) 금방 지나갈 액운이며, 우리 가문이 흥하는 것은 오히려 하늘의 경계이니라. 더욱 조심해야 할 것이다."라고 밝혔다. 또한, 철종의 왕비를 간택할 때 안동 김씨 문중을 배제하도록 조언하거나 김흥근의 아들이 요직에 오르지 못하게 하는 등 가문과 일정거리를 두었음을 알 수 있다.[50] '逆敵之子 不爲君王(역적지자 불위군왕). 역적의 아들은 왕이 될 수 없다.'는 기지로 정조에게는 끊임없이 불안정한 왕위 계승에 대한 의심과 눈초리로 내내 꼬리표를 달았고, 이 때문에 암살 위협도 수차례 받았었다.[51] 정조를 사도세자(장조)의 아들로 볼 경우.[52] 정조를 효장세자(진종)의 양자로 볼 경우.[53] 예송논쟁이 있기는 하나 사극으로 만들기에는 썩 좋은 소재가 아니다.[54] 막돼먹은 영애씨에서 주인공 영애씨의 엄마로 오랜기간 연기한 배우가 이 사람이다.[55] 이름은 효명세자와 같은 '이영' 그대로인데 한자를 바꾸어 음만 같은 동명이인이 되었다. 그렇지만 다들 효명세자로 잘못 알려져 동구릉을 찾는 이가 많아졌다고 한단다.[56] 헌종의 즉위는 1834년으로 빅토리아 여왕보다 2년 앞섰다.[57] 물론 헌종은 6년 간 명경대왕대비의 수렴청정을 받았으니 서양인들의 시각에선 순원왕후를 실질적인 군주로 간주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