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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녕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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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묘 배향 18현을 겸하는 6인(동배향)
: 문묘 배향 18현을 겸하는 6인(서배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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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전주 이씨 종문.svg 전주 이씨 양녕대군파의 역대 종주
양녕대군파 역사 시작 1대 양녕대군 이제 2대 함양군 이포[1] }}}
<colbgcolor=#1b0e64><colcolor=#ffd400>
조선 태종조 폐세자
양녕대군 | 讓寧大君
파일:양녕대군묘.jpg
양녕대군묘 전경
출생 1394년(태조 3년)
한성부 정안군 사저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망 1462년 10월 8일[2] (향년 68세)
(음력 세조 8년 9월 7일)
한성부
(現 서울특별시)
능묘 양녕대군묘(讓寧大君墓)
(서울특별시 동작구 상도동)
재위기간 조선 왕세자
1404년 9월 19일[3] ~ 1418년 7월 15일[4]
(음력 태종 4년 8월 6일 ~ 태종 18년 6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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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b0e64><colcolor=#ffd400> 본관 전주 이씨
제(禔)
부모 부왕 태종
모후 원경왕후
형제자매 12남 17녀 중 장남
배우자 수성부부인 광산 김씨
자녀 10남 17녀
종교 유교 (성리학)
후백(厚伯)
봉호 양녕대군(讓寧大君)
시호 강정(剛靖) }}}}}}}}}

1. 개요2. 생애3. 평가4. 여담5. 대중매체6. 가족 관계
6.1. 역대 종주(宗主)

[clearfix]

1. 개요

조선 전기의 왕족이자 정치인, 화가, 시인. 태종원경왕후 민씨의 장남이자 세종의 큰형. 엄밀히 따지면 태종과 원경왕후 부부의 4남이다. 태종은 양녕대군 위로 아들 3명을 더 두었지만 모두 어린 시절[5]요절했기 때문이다.

선대왕 태조와 부왕 태종의 호색 및 냉혈 성향만 물려받은 인물로, 술과 사냥, 여자 등 당대의 노는 것이라면 사족을 못써 안팎으로 온갖 사고를 쳐 점점 부왕과 조정의 눈밖에 나더니 어리와의 간통 사건을 기점으로 왕가의 여론이 악화됨과 동시에 폐세자가 되어 세자의 지위를 잃고 대군으로 격하된 본인뿐만 아니라 왕세자비였던 자기 아내와 자녀들의 미래까지 대군의 아내와 자식으로 강등됨으로서 완전히 망쳐버렸다.[6] 이후 동생 세종과 첫째 조카 문종이 병사한 뒤부터는 둘째 조카가 일으킨 계유정난에 적극적으로 찬동하는 만행까지 벌였다.[7] 그러나 조선 후기부터 미화되기 시작하였다.[8]

이러한 원인으로는 딸 셋을 제외한 아들 셋을 낳자마자 잃었던 이방원과 원경왕후 내외에게 양녕대군은 단순한 장남을 넘어선 특별한 아들이었기 때문에 너무 오냐오냐를 통한 자식 양육 방식에 문제가 있었을 가능성이 주로 제기되며, 사도세자처럼 태종이 왕권강화책으로 써먹은 양위 쑈에 못 버티고 멘탈이 터져서 양아치가 된 거 아니냐는 썰도 있다. 어쩌면 둘 다일수도 있는 일. 양녕대군의 도를 넘는 악행에 아버지 태종은 결국 그를 폐위할 때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2. 생애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양녕대군/생애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3. 평가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양녕대군/평가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4. 여담

처음에 효령대군(孝寧大君)이 회암사(檜岩寺)에서 불사(佛事)를 짓는데, 양녕대군(讓寧大君)이 역시 들에 가서 사냥하여 잡은 새와 짐승을 안에서 구웠다. 효령이 말하기를,

“지금 불공(佛供)을 하는데 이렇게 하면 안 되지 않소.”

하니, 양녕이 말하기를,

“부처가 만일 영험이 있다면 자네의 오뉴월 이엄(耳掩)은 왜 벗기지 못하는가.[24] 나는 살아서는 국왕의 형이 되어 부귀(富貴)를 누리고, 죽어서는 또한 불자(佛者)의 형이 되어 보리(菩提)에 오를 터이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하매, 효령이 대답할 말이 없었다.
세종 28년(1446 병인) 4월 23일(경신) 3번째 기사

5. 대중매체

5.1. 소설

5.2. 드라마

5.3. 게임

5.4. 영화

5.5. 만화

6. 가족 관계

본부인 수성부부인 광산 김씨에게서 3남 5녀, 첩실에게서 7남 12녀 등 총 10남 17녀를 두었다.

6.1. 역대 종주(宗主)

양녕대군의 종가는 차남 함양군 이포의 가계로 이어진다. 장남 순성군 이개양녕대군보다 먼저 사망하였기 때문이다. 예법대로라면, 순성군이 일찍 세상을 뜬 경우, 그의 장남(오천군)이 종가를 물려받는 것이 맞다. 그러나 몇 가지 사정이 있었다. 양녕대군이 순성군보다 불과 5일 뒤에 세상을 떠나면서, 오천군의 입장에서는 조부-부친상을 한꺼번에 치러야 했는데 이는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또한 함양군이 순성군 대신 양녕대군을 모시고 살았는데, 부양한 아들이 상주가 되는 것이 당시에는 용인되었다. 따라서 자연스레 종가도 함양군의 후손들이 물려받았다.[A]

성종 대를 거치며 성리학적 예법이 완전히 자리잡자, 순성군의 후손들은 자신들이 장자 계통이니 종손 자격을 회복시켜줄 것을 연산군에게 건의하였다. 그러나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후 9대손 이형까지 종가 직계가 내려오다가, 이형이 후사가 없어 양녕대군의 3남 서산군 이혜의 8대손인 이인망이 봉사손으로 입적되었다. 그런데 이형과 항렬이 같아 문제가 되었고, 이때 순성군의 후손으로 다시 종통을 세우자는 논의가 등장하였다. 그러나 당시 임금이었던 숙종은 이인망을 파양하되, 이인망의 아들 이한보를 이형의 양자로 입적하게 하여 항렬 문제를 정리하였고, 이후 이한보의 후손들로 지금까지 종가 직계가 이어진다.[A] 따라서 현재 양녕대군의 종가는 혈통상으로 서산군의 후손들이다.


[1] 양녕대군의 차남이나, 봉사손으로 임명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후술.[2] 율리우스력 9월 29일.[3] 율리우스력 9월 10일.[4] 율리우스력 7월 6일.[5] 다들 조선 건국 이전에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조선 왕조 공식 기록에는 그 3명이 없고 오직 태종의 언급만 있다. 태종이 양녕대군의 장자 정통성을 강화하려고 일부러 기록하게 하지 않았으리라고 보는 시선도 있지만, 태종의 일거수일투족을 쫓아다니다 못해 실록에 쓰지 말라는 일을 쓰지 말라고 했다는 사실까지 쓴 것으로 유명한 그 민인생이 끼어 있었을 당시 사관(史官)의 꼬장꼬장함을 감안하면 "주상께서 일찍 보내신 아들 3명은 기록하지 말라고 하셨다"고 기록했으면 했지 쓰지 말란다고 안 썼을 가능성은 적다.[6] 자신의 남편과 아버지가 태종이 사망할때까지 절치부심을 잘했다면 왕후나 왕자, 공주의 자리에까지 오를 가능성도 없진 않았다.[7] 다만 일각에서는 단종 즉위 시점에 소헌왕후나 현덕왕후가 살아서 수렴청정을 했다면 양녕대군도 실제 역사에서처럼 수양대군을 지지하지 못하고 왕대비가 된 제수와 조카며느리를 인정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8] 조선 후기부터 이러한 미화가 나타난다. 사실 이러한 미화는 민간에서 자발적인 움직임도 있지만 세자가 양아치라 폐위되었다는 치부를 덮기 위해 조선 왕조 시절부터 벌인 역사깊은 위서 행위에 지나지 않았다.[9] 특히 세종은 자기 아버지 태종처럼 장자가 뒤를 이어야 한다는 원칙을 깬 인물이었다. 아버지 태종은 자신이 왕자의 난에 승리하여 쟁취한 만큼 정통성은 약했지만 그것을 메꿀 카리스마와 지도력이 있었다. 왕자의 난을 예방할 겸 자신의 후임자는 자신과 달리 정통성이 충분한 장자 양녕대군으로 삼은 것도 그 이유였다.[10] 우왕이 폐위된 후 우선은 당시까지 왕씨로 인정되던 아들 창왕이 옹립되었으나, 왕우는 여전히 상왕이라는 지위를 바탕으로 이성계에 대한 암살을 모의하며 두고두고 골칫거리가 되어 결국 우창비왕설에 근거한 폐가입진이라는 극약처방을 내리게 되었다.[11] 스캔들이 있었던 기생 어리의 딸도 포함한다.[12] 양녕대군의 5번째 서자 장평도정(長平都正)의 5대손.[13] 장평도정(長平都正)의 장남 부림령(富林令) 이순(李順)의 14대손이고, 임진왜란 때에 활약한 무의공 이순신의 방계 10대손이다.[14] 양녕대군 본인은 후대의 미화가 풀리면서 세자 시절 연산군이 아무렇지도 않게 보일 정도로 장점이라곤 없이 망나니나 다름 없는 인물이였다는 사실이 발굴되었지만, 그의 16대손인 이승만은 재위 시절 문제점과 별개로 한반도의 개혁과 대한독립운동,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기반을 다진 인물인 것으로 평가 받은 것과 반대로 효령대군은 현재까지도 대중들의 평가는 나쁜 편은 아니더라도, 그의 18대손 이기붕은 동정의 여지조차 없는 대한민국 현대사의 최악의 인물이라고 두고두고 비난 받으니 아이러니한 셈.[15] 왕자만이 아니라, 공작 등 고위귀족도 포함되는 개념[16] 실제로 민영익보빙사로 미국에 갔을때 프린스 민으로 소개됐었다.[17] 흥선대원군의 측근이었다가 임오군란에 연루되어 처형된 이회정의 증손이었다.[18] 이 입양의 문제는 무려 3가지나 있었다. 첫 번째, 장자는 집안을 이어야 하기 때문에 다른 집에 양자로 들어갈 수 없다는 법을 어긴 입양이었다. 두 번째, 입양 당시에 파가 다르면 고려 대상에서 일단 제외했는데 이를 무시했다. 세 번째, 파가 달라도 항렬이 맞으면 모르겠는데, 이강석은 이승만의 손자뻘 항렬이다.(이승만과 이기붕 일가의 마지막 공통조상인 태종 이방원을 기준으로, 이승만이 이방원의 17대손이고 이강석이 19대손이다.) 즉, 여러 모로 꼬인 입양이었다. 두 사람의 나이 차이 역시 아들뻘이라기 보다는 손자뻘에 더 가까웠다.[19] 전주 이씨 양녕대군 16세손, 시조 39세손 '善'자 항렬이다.[20] 전주 이씨 양녕대군 16세손, 시조 39세손 '善'자 항렬이다.[21] 전주 이씨 양녕대군 20세손, 시조 43세손 '基'자 항렬이다.[22] 전주 이씨 양녕대군 17세손, 시조 40세손 '承'자 항렬이다.[23] 전주 이씨 양녕대군 18세손, 시조 41세손 '秀'자 항렬이다.[24] 이엄이란 귀를 가리는 방한구로, 지금의 귀마개 같은 물건. 남바위를 이엄이라고도 한다. 효령대군은 귓병을 앓고 있어서, 양녕대군 말대로 초여름(6~7월)에도 이엄을 쓰고 다니고 있었다. 고로 '부처님이 그렇게 잘났다면, 왜 니 귓병은 못 고쳐주냐?' 라는 뜻이다. 이 뒤의 이어질 말과 합쳐서 양녕대군의 호쾌한 성격이 그대로 드러나는 기록.[25] 참고로 당시 연기했을 때 MBC 드라마 〈수사반장〉 범인 역의 이미지가 너무 강해 전주 이씨 종친회에서 방송국으로 찾아와 항의할 정도였다.[26] 1996년 KBS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는 무학대사 역.[27] 이민우의 명연기 때문에 본의 아니게 많은 사람들에게 양녕대군의 왜곡된 이미지를 심어놓은 캐릭터이기도 하다. 그나마 남의 을 빼앗거나 에서 고기를 구워 먹는 등의 미친 짓도 충분히 묘사되기는 한 것이 다행인 부분. 하지만 "경복궁 경회루의 현판을 직접 적어놓다."는 내레이션의 해설 장면이 등장하며, 이에 태종이 칭찬하여 자랑을 늘어놓는 모습을 보였다. 맨 마지막 화에 일부러 놀아제끼는 일을 그만두고 자신만의 길을 찾으려는 깨달음을 얻는 장면이 있는데 이 길을 찾다 보니 본작에 나오는 캐릭터가 되었다고 보면 충분히 이해될 만하다. 1995년 나온 실록 CD롬을 참고해가며 쓴 사극이기 때문에 이전에 나온 사극과는 비교할 수 없이 고증이 잘된 본작에서 사료 대비 가장 미화된 인물로 이 작품의 대표적인 옥의 티로 꼽힌다.[48][28] 어릴 때 조사의의 난 때는 할아버지가 그 배후에 있음을 알 정도로 영특해서 아버지를 말리려고까지 했지만, 아버지가 칼까지 꺼내들며 충격을 줬으니 어릴 때부터 그 영향을 받아 변해왔다는 것으로 묘사된다.[29] 직접 권력 투쟁의 마당에 뛰어들기 싫다는 것이었지 그 필요성 자체는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30] 2000년 KBS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는 왕건의 아버지인 왕륭 역할을 맡았는데 왕륭이 아들 왕건으로부터 추존받은 묘호가 바로 세조이다.[31] 이 작품은 국왕 이외의 인물들은 쥐도 새도 모르게 퇴장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권람의 죽음을 지켜본 신숙주(이정길 분)도 한명회(최종원 분)의 대사로 "범옹이 죽었을 때 나도 같이 가야 했다"라고 언급될 뿐이며 효령대군(김인태 분)이나 월산대군(송호섭 분) 등의 왕족들, 한명회처럼 이름이 알려진 인물조차 예외가 아니다.[32] 을 잘 쏘았다는 묘사 정도는 있는데 이나마도 정신 수양의 일환으로 무관은 물론 문관들에게까지 널리 인기가 있었으니 양녕대군이 특별히 무술에 능했다고 볼 근거는 되지 못한다.[33] 이때 황희(김갑수 분)에게 여전히 "저하"라는 명칭으로 불리는데 작가의 실수인 듯하다.[34] 하지만 어이없는 대사인 것이 문종은 세자 때부터 대리청정을 하면서 재능을 입증한데다가 세자 시절의 양녕대군은 효도라도 잘 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35] 혜빈 양씨를 대놓고 멸시하는 부분은 정희왕후에게 옮겨졌다.[36] 그래도 나름 "주상이 나이 어리다고 얕보지 마시게. 조금이라도 힘이 생기면 자네 목을 내놓으라고 하게 되어 있어. 김종서가 관 뚜껑을 열고 나오게 된다" 라고 제법 그럴 듯하게 말한다.[37] 흥미로운 건, 양녕대군 역의 박웅이 1994년 KBS 드라마 〈한명회〉에서는 바로 한확 역으로 출연했다는 것. 옛날에 한확 역을 맡았던 배우가 늙어서 과거에 자신이 맡았던 배역의 뺨을 친다는 상당한 수준의 배우개그이다.[38] 기생들과 어울리며 찍은 사진을 태종이 보고 말았다.[39] 아버지인 배우 백윤식은 양녕대군을 옹호하다 파직된 황희 역을 맡았다.[40] 선원계보에는 밀산(密山)부정으로 쓰여 있으나, 실록에는 돌산(突山)부정으로 기록됨[41] 정순공주의 남편[42] 인수대비의 사촌오빠[A] 출처: 〈양녕대군가, 지덕사 600년 종통 잇는 봉사손의 50가지 인생 풀 스토리〉, 《세종대왕신문》 2023.02.13.[A] [45] 양녕대군의 3남 서산군의 9대손으로, 10대 종주 이형과는 혈연상 19촌 숙질간이다.[46] 고종 시기 경복궁 영건도감 제조와 이조판서를 역임하였다.[47] 사간원 대사간을 역임하였으며, 이승만이 유년 시절에 수학했던 도동서당의 주인이었다. 다만, 항렬은 이승만보다 한 항렬 낮아서, 33촌 조카 뻘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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