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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1-20 13:25:34

원경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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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석 (의안대군) 이방과 (정종)
현빈 유씨
현빈 심씨
덕빈 김씨
(정안왕후)
이방원 (태종) 이제 (양녕대군) 이도 (세종)
정빈 민씨
(원경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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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성부부인 김씨)
경빈 심씨
(소헌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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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빈 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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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덕왕후)
이장 (덕종) 이황 (예종) 이융 (연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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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혜왕후)
장순빈 한씨
(장순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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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군부인)
이호 (인종) 이부 (순회세자) 이혼 (광해군)
빈궁 박씨
(인성왕후)
덕빈 윤씨
(공회빈)
빈궁 유씨
(문성군부인)
이지 이왕 (소현세자) 이호 (효종)
빈궁 박씨
민회빈 강씨 빈궁 장씨
(인선왕후)
이연 (현종) 이순 (숙종) 이윤 (경종)
빈궁 김씨
(명성왕후)
빈궁 김씨
(인경왕후)
단의빈 심씨
(단의왕후)
이윤 (경종) 이금 (영조) 이행 (진종)
빈궁 어씨
(선의왕후)
왕세제빈

빈궁 서씨
(정성왕후)
현빈 조씨
(효순왕후)
이선 (장조) 이산 (정조) 이영 (문조)
혜빈 홍씨
(혜경궁 홍씨)
왕세손빈

빈궁 김씨
(효의왕후)
빈궁 조씨
(신정왕후)
이척 (순종)
순명비 민씨
(순명효황후)
비궁 윤씨
(순정효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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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조 세종조 세조조 예종조
순덕왕태비 후덕왕태비 의덕왕대비 자성왕대비
<rowcolor=#ffd400> 성종조 연산군 - 중종조 인종조 명종 - 선조조
인수왕대비
인혜왕대비
자순왕대비 왕대비 윤씨 공의왕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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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열왕대비 혜순왕대비 경순왕대비 예순왕대비
순조조 헌종조 헌종 - 철종조 철종 - 고종조
왕대비 김씨 명경왕대비 효유왕대비 명헌왕대비
추존
신의왕태후 원경왕태후
<colbgcolor=#94153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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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정왕후의 성렬 존호는 대왕대비 시절에 바쳐진 것이므로 왕대비 틀에서는 표기하지 않음.
2. 인성왕후는 인순왕후와 동서지간이었기에 선조조에도 대왕대비가 되지 못하고 왕대비로 재위함.
3. 효의왕후는 생전에 존호를 사양하였으므로 별도로 표기하지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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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조선 태종의 왕비
원경왕후 | 元敬王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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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존호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조선 세종조 왕태비
후덕왕태비 | 厚德王太妃
조선 세종조 왕태후
원경왕태후 | 元敬王太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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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태종헌릉.jpg
헌릉 능침. 오른쪽 봉분이 원경왕후의 능이다.
출생 1365년 8월 6일(음력 7월 11일)
고려 개경 철동 사저
(現 북한 개성시 수창동)
사망 1420년 8월 27일(음력 7월 10일)
(향년 55세)
조선 한성부 수강궁 별전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 185)
능묘 헌릉(獻陵)
재위기간 조선 왕세자빈
1400년 4월 7일 ~ 1401년 2월 2일
조선 왕비
1401년 2월 2일 ~ 1418년 9월 18일
조선 왕태비
1418년 9월 18일 ~ 1420년 8월 27일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본관 여흥 민씨
부모 부친 여흥부원군 민제
(驪興府院君 閔霽, 1339 ~ 1408)
모친 삼한국대부인 여산 송씨
(三韓國大夫人 礪山 宋氏, 1342 ~ 1424)
형제자매
4남 4녀 중 3녀 [ 펼치기 · 접기 ]
큰언니 - 조박(趙璞)의 처(1355~?)
작은언니 - 삼한국대부인 민씨(1357~?)[1]
여동생 - 교하 노씨 노한(盧閈)의 처[2]
남동생 - 민무구(閔無咎, ?~1410)
남동생 - 민무질(閔無疾, ?~1410)
남동생 - 민무휼(閔無恤, ?~1416)
남동생 - 민무회(閔無悔, ?~1416)
배우자 태종 (1382년 혼인)
자녀 4남 4녀 (8남 4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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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3명 (요절)[3]
장녀 - 정순공주(貞順公主, 1385~1460)
차녀 - 경정공주(慶貞公主, 1387~1455)
3녀 - 경안공주(慶安公主, 1393~1415)
4남 - 양녕대군(讓寧大君, 1394~1462)
5남 - 효령대군(孝寧大君, 1396~1486)
6남 - 세종(世宗, 1397~1450)[4]
4녀 - 정선공주(貞善公主, 1404~1424)
7남 - 성녕대군(誠寧大君, 1405~1418)
8남 - 대군(1412~1412) 요절
종교 불교
봉작 정녕옹주(靖寧翁主)
→ 정빈(貞嬪) → 정비(靜妃)
→ 후덕왕태비(厚德王太妃)
→ 왕태후(王太后)
전호 광효전(廣孝殿)
존호 후덕(厚德)
휘호 창덕소열(彰德昭烈)
시호 원경왕태후(元敬王太后)
원경왕후(元敬王后)
}}}}}}}}} ||
1. 개요2. 생애
2.1. 어린 시절2.2. 이방원과의 혼인2.3.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도록 돕다2.4. 조선의 왕비가 되다2.5. 남편과의 갈등
2.5.1. 남동생 4형제 숙청2.5.2. 후궁 간택으로 갈등2.5.3. 태종이 한 폐비 언급의 무리성2.5.4. 원경왕후는 투기가 심했는가?
2.6. 양녕대군의 세자 폐위와 자식들의 죽음2.7. 세종 즉위 이후 왕대비가 되다2.8. 사망과 무덤
3. 가계4. 평가5. 대중매체에서6.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조선의 제3대 국왕인 태종왕비로, 제4대 국왕이자 명군이었던 세종의 모후였다.

2. 생애

2.1. 어린 시절

1365년(공민왕 14년), 권문세족을 대표하는 고려 최고의 명문가였던 여흥 민씨 가문의 수장이었던 여흥부원군 민제(閔霽)와 삼한국대부인 송씨의 2녀로 수도 개성에서 태어났다.[5] 재색을 겸비했던지, 변계량의《헌릉지》(獻陵誌)에, 민씨는 '맑고 아름다우며 총명하고 지혜롭다'라는 그녀에 대한 극진한 찬사가 있을 정도였다.

아버지 민제는 성균관에서 사성을 지내며 제자들을 양성했는데, 그 중에는 민씨보다 두 살 연하였던 훗날의 태종 이방원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방원은 16세였던 1382년(우왕 8년)에 진사시를 통과해 성균관에 거의 수석으로 입학했고, 민제는 그를 사윗감으로 눈여겨 봤다. 물론 가문의 급을 비교하자면 이방원은 일개 변방(동북면) 무사 집안의 아들로 권문세족의 영애였던 민씨와 혼인하기엔 다소 뒤떨어졌지만, 당시 전주 이씨가 구국의 영웅으로 칭송받고 있었던 이성계를 배출한 신흥 무인 가문으로 떠오르고 있었기 때문에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2.2. 이방원과의 혼인

그렇게 1382년(우왕 8년), 민씨는 18세의 나이로 16세의 이방원과 혼례를 올리게 되었다. 민씨의 친정에서 신혼생활을 보내며 처가살이를 시작하게 된 이방원은 아름답고 지적이며 성숙한 민씨를 매우 사랑했으며, 민씨 역시 남편이 나이가 어리고 가문의 급이 낮다는 이유로 무시하지 않고 존중했기 때문에 부부금슬이 정말 좋았다고 한다. 혼인 이듬해인 1383년(우왕 9년)에는 이방원이 드디어 과거에 급제했고, 두 사람 사이의 첫 아이였던 정순공주까지 태어났다. 이렇듯 장인어른과 아내(원경왕후)로부터 극진한 사랑을 받은 이방원은 훗날
"내가 어렸을 때, 민씨에게 자라서 은혜와 사랑을 많이 받았다."
라고 회고했을 정도였다.

다만 아픔도 있었는데 이때 여러 남매를 낳았으나 딸들만 살아남고, 아들들은 모두 요절했다.

2.3.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도록 돕다

1392년(태조 즉위년)에 시아버지 이성계조선건국하고 남편인 이방원이 정안군으로 봉해지자 정녕옹주(靖寧翁主)에 봉해졌다.[6] 뒤이어 남동생인 민무구, 민무질 등 4형제가 모두 남편의 심복이 되어 활약하고 정도전 등이 왕자들의 사병을 혁파하려 하자 원경왕후는 오히려 집 으슥한 곳에 무기를 숨겨놓아 훗날을 도모했다고 한다.

이렇듯 성격이 담대해서 제1차 왕자의 난 직전 이방원과 왕자들이 궁에 무방비 상태로 들어간 상태에서 수상한 낌새를 느끼자 배가 아프다는 핑계[7]를 만들어 무사히 집으로 돌아오게 했고, 이방원은 이를 빌미로 1398년 8월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 1400년 1월 제2차 왕자의 난 때는 사가에서 돌보던 말이 홀로 집으로 돌아오자[8] 남편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줄 알고 걱정되어 본인이 직접 창을 든채 말을 타고 나가려는 걸 시녀들[9]이 한사코 말려 저지한 일도 있었다.정종 2년 1월 28일

양녕대군(1394년 출생), 효령대군(1396년 출생), 충녕대군(1397년 출생)들로 유명한 3형제가 바로 이 정녕옹주 시기에 낳은 아들들이었다.

2.4. 조선의 왕비가 되다

아주버님인 정종의 즉위 이후, 세자[10]가 된 남편 이방원과 함께 세자빈이 되었고, 결국 이방원이 태종으로 즉위하여, 마침내 왕비가 되면서 고생 끝 행복 시작일 줄 알았지만 여기서부터 인생이 하향 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2.5. 남편과의 갈등

2.5.1. 남동생 4형제 숙청

"부부(夫婦)는 사람의 대륜(大倫)인데, 지금 정비(靜妃)가 민무구(閔無咎) 등의 일 때문에 속으로 불평을 품고 여러 번 불손한 말을 했다. 지난날에 가 창병(瘡病)이 몹시 크게 났을 때 민무구(閔無咎) 등이 가만히 여시(女侍)와 결탁하여 병세를 엿보고, 드디어 이무(李茂)와 더불어 불궤(不軌)를 음모(陰謀)했으니, 이것이 실로 민씨의 죄였다. 정비(靜妃)가 이것을 돌아보지 않고 사사로운 분한(忿恨)을 품으니, 내가 폐출(廢黜)하여서 후세를 경계하고자 하나, 조강지처(粗糠之妻)임을 생각하여 차마 갑자기 버리지 못하겠다."
태종실록》 태종 11년(1411년) 9월 4일, 민무구, 민무질 형제가 사사된 후, 여러 차례 부부싸움이 있었음을 암시하는 기록이다.
왕이 된 남편 태종은 공신들을 매우 경계했는데 특히 정계군부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민무구민무질[11]을 심하게 경계했다. 더군다나 민무구와 민무질 형제는 세자였던 양녕대군과도[12] 친했기에 세자가 왕위에 오르면 외척이 되어 권세를 휘두를 것이라 생각한 태종은 이들을 가차없이 유배보내고 사약까지 내렸다.

뒤이어 그들의 아랫동생들인 민무휼, 민무회 형제도 역시 세자의 외숙[13]으로 정사를 농단할 것이라는 이유를 들며, 유배를 보낸 뒤 교수형에 처했다. 태종의 손에 죽지는 않았지만 원경왕후의 부모(민제 부부)가 맞이한 운명도 불행하기 그지없어서 아버지 민제는 자식들이 귀양을 가고 집안이 쇠락해가는 와중에 병으로 사망했다. 다만 어머니 송씨는 아예 아들 넷이 모두 사위 손에 결단나고, 딸 원경왕후까지 죽는 걸 본 것도 모자라 밉살스럽고도 무서웠을 사위 태종 이방원보다도 오래 살아서 1424년(세종 6년)에 세상을 떠났다.[14][15][16]

2.5.2. 후궁 간택으로 갈등

성균 악정(成均樂正) 권홍(權弘)의 딸을 별궁(別宮)으로 맞아들였다. 처음에 대부인(大夫人) 송씨(宋氏)가 정비(靜妃)에게 말하기를,

"궁빈(宮嬪)이 너무 많아서 그것이 점점 두렵다."

라고 했는데, 정비(靜妃)의 투기가 더욱 더 심해만 갔다. 임금권씨(權氏)가 현행(賢行)이 있다 하여 예(禮)를 갖추어 맞아들이려고 하니, 임금의 옷을 붙잡고 말하기를,

"상감께서는 어찌하여 예전의 뜻을 잊으셨습니까? 제가 상감과 더불어 함께 어려움을 지키고 같이 화란(禍亂)을 겪어 국가를 차지하였사온데, 이제 나를 잊음이 어찌 여기에 이르셨습니까?"

하며, 울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음식도 들지 아니하므로 임금이 가례색(嘉禮色)을 파하도록 명하고, 환관(宦官)과 시녀(侍女) 각각 몇 사람만으로 권씨를 별궁(別宮)에 맞아들였다. 정비(靜妃)는 마음에 병을 얻었고, 임금은 수일 동안 정사를 듣지 아니했다.
태종실록》 태종 2년(1402년) 3월 7일 성균 악정 권홍의 딸을 별궁으로 맞아들이다.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는 여자 문제로 다투지 않는 날이 없었는데, 태종은 외척에 강한 경계심을 갖고 있었던데다가, 개인적으로도 놀이와 여자를 좋아하여 원경왕후의 투기에 질색하며 다투는 날이 많았고, 원경왕후는 태종의 여색을 그냥 넘어가는 일이 없었다. 사실 태종이 들인 후궁의 절반이 원경왕후를 모셨던 몸종이나 궁녀 출신이라 원경왕후의 입지가 떨어지지는 않았으나 나중에 들어온 후궁들은 문•무 양반 유력가의 여식을 후궁으로 들였다. 또한 자식을 많이 낳는 것은 왕의 중요한 의무인데다가 수명이 짧고 영아 사망률도 높은 시기였기에 왕실의 일원이라면 많은 자식을 낳을 필요가 있었다.

다만 원경왕후도 참작할만한 사정은 있었다. 본인과 태종 둘 다 관계를 꺼리는 사이가 아니었던 데다가 실제로 조선 왕조에서 가장 많은 자식들을 낳은 것은 물론, 아들까지도 많이 낳아서 높은 영아 사망률을 감안해도 충분한 적자녀를 슬하에 두었다. 그렇기에 후궁까지 들이는 걸 더욱 탐탁치 않아한 것이다.

원경왕후와 다툼이 심해지자 태종은 원경왕후를 모시던 상궁들과 나인들을 모두 궁 밖으로 내치고 원경왕후를 중궁전에 유폐시켰다. 더 나아가 원경왕후를 폐비할 생각까지 했으나 신하들의 만류와 상왕인 정종의 충고를 듣고 취소했다. 사실 태종도 진심으로 원경왕후를 폐위하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같이 살아온 정이 있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왕비를 새로 들이면 다시 외척이 생겨나 재차 숙청해야 한다. 이미 자신이 숙청한 원경왕후의 여흥 민씨 가문도 결과적으로는 무고한 사람을 숙청한 일이 되는데다가 원경왕후를 폐비시키면 이미 태어난 원경왕후와 태종의 자식들은 폐비의 자식이 되고, 그 와중에 새로운 왕비가 자식을 낳으면 세자를 비롯한 폐비의 자식들은 입지가 추락하여 조정이 분열될 가능성이 높았다.[17] 태종이 간택 절차를 거쳐서 정식으로 후궁인 숙의를 뽑으려고 하자, 원경왕후는 식음을 전폐하고 앉아서 오열했다.

태종과 원경왕후의 갈등에 조정이 어수선해지자 태종의 행보에 일절 관여하지 않았던 상왕이자 형인 정종까지 나서서
""왕은 어찌하여 다시 장가들려고 하시오? 내 비록 아들이 없어도, 소시(少時)의 정(情)으로 인하여 차마 다시 장가들지 못하는데, 하물며 왕은 아들이 많으니 말해 무엇하겠소?""
라며 질타했다. 결국 태종은 형의 충고에 따라 거창한 가례색을 행하지 않고 조용하게 후궁을 들이는 정도로 마무리했다. 동생에게 양위한 이후 정사에 간섭하지 않은 정종이었지만, 왕과 왕비의 갈등은 왕실의 큰 어른으로서 방관할 수 없었던 것이다. 형의 충고를 듣고 태종은 원경왕후와의 갈등을 일시적으로 봉합했다.

2.5.3. 태종이 한 폐비 언급의 무리성

계모와 이복형제들에 의해 왕위 계승 논의에서 밀려나자 그들을 죽이고 왕위를 쟁취했으며, 지독한 아들 바보였던 태종이 후계 구도를 꼬아 정통성을 훼손해 자식들에게 위해를 가할 수 있는 폐비라는 선택을 할리가 있겠냐며 중전에 대한 일종의 강짜로 보는 시선도 존재한다.[18][19]

따라서 태종이 원경왕후의 폐비를 논한 것은 단순히 정치적인 견제 차원이었거나, 잦은 부부싸움으로 욱해서 내뱉은 말이라 상왕으로 있었던 형 정종에게까지 한소리를 듣고 물러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복형들을 제치고 세자가 된 이방석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왕의 자식이라는 점은 왕의 혈통이므로 당연한 것이었고, 사실상 제일 중요한 정통성은 후궁이 아닌 왕비의 자식이라는 점이었다.[20] 태종과 원경왕후의 사이가 원만하지 못했단 것 역시 반론의 여지가 있는게 원경왕후는 나이 40세를 넘긴 이후로도 태종과의 사이에서 자식을 3명이나 더 낳았다. 정선공주(1404년생), 아들 성녕대군(1405년생), 언급으로 있는 요절한 왕녀[21](1412년생)[22] 등이 그 주인공들이었다.

2.5.4. 원경왕후는 투기가 심했는가?

나아가 살펴봐야 할 부분은 태종 이방원과 원경왕후 민씨는 이후의 조선 왕과 왕비들처럼 일방적인 간택을 통해 만들어진 인연이 아니라, 애초에 서로 동등한 관계[23]였다는 점이다.

원경왕후의 집안인 여흥 민씨고려 후기에 급부상한 권문세족 중에서도 손꼽히는 가문으로, 재상지종으로 분류된 15개 가문 중 하나였다.

공민왕 대에야 고려에 귀부한 전주 이씨보다 훨씬 고려의 권력 중심에 가까웠고, 이때문에 이성계가 넷째와 다섯째를 여흥 민씨 집안의 여식과 혼인시킨 것도 혼맥을 정계 안착에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이성계의 사돈이자 이방원의 처가로서 여흥 민씨는 가문의 운명을 모조리 걸고, 막대한 지원 사격을 퍼부었으며, 원경왕후 민씨 개인적으로도 어지간한 공신들에게 꿀리지 않을 정도로 남편 이방원의 권력 획득에 있어 큰 공훈을 세운 여걸이었다. 원경왕후가 대신들 앞에서 태종 이방원에게 대드는 등의 행태도 이런 강력한 근거들이 있어서 가능했던 것이다. 처남 4명을 모조리 도륙하는 등 인간적으로 너무했다 싶을 정도로 처가를 박살내고 원경왕후를 찍어 누른 태종의 극단적인 행보도 원경왕후의 이러한 막강한 이, 고착화된 권력으로 뿌리내려 왕권을 깎아 먹는 것을 예견한 행동이었다고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다시 말하면 이런 극약 처방이 아니면 도저히 건드리기 힘들 정도로 강력한 힘을 가진 존재가 원경왕후 민씨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원경왕후의 투기는 명분이었고, 실제론 외척 견제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다만, 그럼에도 감안 해야할 것은 그들이 태어나 청년기를 보낸 고려시대 까지만해도 여성이 재산 상속을 받거나 및 상주가 되어 직접 제사를 지내기도 했고, 중세시대 치고는 여성의 지위가 보장되는게 어느 정도는 사회적으로도 받아들여지던 시대였다.[24] 여성의 지위가 보장되다 보니, 결혼관은 근현대와 비슷해서 후계를 반드시 이어야 할 국왕이 아니고서야 중혼이 받아들여지지 않던 시대였다. 다만 고려 말기의 세력가들은 은근슬쩍 중혼을 했는데, 당장 시아버지경처향처 문제로 골치를 겪은 당사자인 원경왕후는 이 부분에 대해서는 더욱 진절머리가 났을 것이다.

성리학을 기틀로 하여 조선을 건국한 것은 맞지만, 건국되지 얼마되지 않았던 신흥국가 시절이었음을 생각해야한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다들 고려인이었기에 이 문제는 정치적으로만 볼게 아니라 남녀간의 인식이 전환되는 시기에 겪는 문화충격의 일종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2.6. 양녕대군의 세자 폐위와 자식들의 죽음

1418년(태종 18년)에 세자 양녕대군폐위되고, 명망이 있으며 왕의 재목이 있는 3남 충녕대군이 세자가 되자, 원경왕후는 매우 슬퍼했다. 폐세자가 된 맏아들이 어떤 형태로든 죽음을 맞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기 때문이다. 원경왕후는 장자 상속제를 들어 양녕대군의 아들인 원손을 후계자로 책봉하라고 했으나 조정의 반대가 극심했고, 양녕대군을 멀리 내치려 하자 원경왕후가 눈물을 흘리며 가까운 곳에 보내라고 간청해서 결국은 경기도 광주목으로 보내졌다. 2개월 후 세자 충녕대군이 주상으로 즉위했으나 맏아들의 운명에 대한 걱정으로 원경왕후는 눈물로 세종의 즉위를 맞이했다. 그리고 주상이 된 셋째 아들에게 폐세자가 된 큰 형의 목숨만은 제발 부지시켜 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사실 원경왕후는 남편 태종만큼 맏아들 양녕대군[25]을 매우 사랑했던 어머니였다. 원경왕후에게 있어 양녕대군은 자신이 18살에 결혼해서 10여 년 동안 낳은 6명의 자식들(3남 3녀) 중 아들만 셋 다 죽는 고통을 겪다가, 30살 때 낳고 살아남은 거의 유일한 아들이었다. 양녕대군 이후 3년 내로 낳은 아들들인 효령대군충녕대군 역시 예뻐하며 길렀다고는 하지만, 양녕대군을 향한 개인적인 애정과는 같을 수 없었을 것이다.[26]

딸인 경안공주가 1415년에 죽고, 경안공주의 남편까지 죽어 손자들이 고아가 되는 것을 봤는데,[27] 1418년에 잇따라 양녕대군이 폐세자가 된 이후 성녕대군까지 요절하자 태종과 원경왕후는 크게 상심하여 고기 반찬을 끊으며 슬퍼했다고 한다.

2.7. 세종 즉위 이후 왕대비가 되다

왕세자 이도가 즉위하여 임금(세종)이 되자 물러나 왕대비가 되었다. 조선에서 왕의 친어머니로 왕대비가 된 최초의 사례이면서, 얼마 안되는 사례다. 또한 정종의 비와 더불어 남편이 상왕으로 살아있을때 대비가 된 얼마 안되는 사례다. 이후 조선 역사에서는 적자가 왕이 되더라도 그 적자의 어머니인 왕비가 대부분 단명했기 때문에 친어머니+적모 두 가지 조건을 모두 갖춘 왕대비는 별로 없었다.[28]

2.8. 사망과 무덤

왕대비로 등극한지 2년 후인 1420년(세종 2년), 수강궁(창경궁)에서 56세에 학질(瘧疾)[29]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 상왕 태종은 절차를 간소화하자며 주상인 세종에게 상복을 12일만 입으라고 권유했는데[30] 세종은 다른건 상왕의 뜻을 따라도 이건 그렇게 못하겠다며 후덕대비(원경왕후)를 헌릉(獻陵)에 안장할 때까지 쭉 상복을 입었다.

이후 대비의 능이 외로워 보인다는 이유로 근처에 능을 수호할 사찰을 지으려고 했는데, 나중에 같이 묻힐 태종불교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길길이 날뛸 인물이었다는 걸 생각하면,[31] 어머니에게 가혹했던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반발로 보는 시각이 있다. 결국 사찰을 짓는 건 태종이 격렬하게 반대해서 없던 일이 되었다.

2년 후인 1422년(세종 4년), 태종도 승하하여[32] 오늘날 서울특별시 서초구 내곡동헌릉에 함께 '쌍릉'으로 묻혀 있다. 글자 그대로 애증의 관계였을 부부였지만 결국 죽어서는 아들에 의해 함께 묻혔다. 특히 조선왕릉 중 쌍릉 형태의 봉분 중에서 병풍석과 난간석이 붙어 있는 능은 헌릉이 유일한데, 이것은 부모가 저승에서는 화해하여 화목하게 지내시기를 바란 세종의 지극한 효심이 반영된 것이라고 한다.

후에 며느리 소헌왕후 심씨의 아버지인 심온 또한 태종의 외척 숙청 리스트에 올라 며느리의 친정마저 박살나면서, 원경왕후 자신이 겪었던 비극이 그대로 재현되었다. 심지어 남편이 이복동생과 왕위 쟁탈전을 벌인 것처럼 둘째 손자인 세조에 의해 골육상쟁의 피바람이 훨씬 최악의 상태로 재현되었다.

3. 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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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평가

원경왕후는 조선의 왕비들 중 가장 긍정적인 영향을 준 여걸로 평가받는다. 남편 이방원을 왕위에 올린 킹메이커였고, 무엇보다 세종대왕의 어머니란 점이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성격 또한 굉장히 호쾌하고 괄괄했다.

자칫 친정까지 해를 입을 수 있는 상황에서 기꺼이 모든 걸 걸고 남편 이방원을 지원해 결국 만인지상의 자리에 올리는 데 크게 기여했으나 남편에 의해 수족이 잘리고, 집안이 몰락하는 드라마틱한 인생사로 명성황후, 인현왕후와 함께 가장 유명한 조선의 왕비라 할 수 있다.[36]

원경왕후의 친정 집안인 여흥 민씨고려 중기부터 대대로 과거 급제자를 배출한 가문이었고, 아버지 민제의 경우 기록에 따르면 어렸을 때부터 총명했기 때문에 원경왕후 본인도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당시 문인이었던 변계량의 기록에 따르면 원경왕후는
"어려서부터 아름다웠으며 총명했고, 지혜롭기도 했다"
고 한다. 그녀의 아들 성녕대군이 얼굴이 달라 태종이 기뻐했다는 기록을 보면 외탁으로 인해 다른 형제들의 듬직한 얼굴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있어 원경왕후의 미모가 상당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녀가 정말 똑똑했기에 아들 세종대왕이 어머니와 아버지[37]의 영향으로 더 총명했을 가능성이 높다.

정작 원경왕후는 태종 이방원의 왕비로만 기억될 뿐 세종의 어머니로는 잘 기억되지 않는다. 태종의 아내다운 괄괄한 성격에, 남편을 옥좌에 올리기 위해 모든 것을 걸었다가 바로 남편에 의해 형제들을 모두 잃고, 가문이 몰락하는 장면이 워낙 드라마틱하기 때문이다.[38] 자세한 가족관계는 태종(조선)/가족 관계 참고.

후대의 현종명성왕후 김씨와 함께 역대 조선 왕비 중에서도 손꼽히는 괄괄한 여장부였다. 흔히 여장부로 평가받는 문정왕후 윤씨나 정순왕후 김씨는 적어도 개인적인 성품은 차분하고 신중한 편이었다.

또한 원경왕후는 상당히 뛰어난 미모를 가졌던 왕비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태종이 왕이 되자마자 일차적으로 그녀의 가족을 개박살냈기에 이들 부부의 사이가 마냥 좋았다고 볼 순 없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녀는 조선 왕실의 역사에서 봤을때 왕과의 사이에서 가장 많은 자식을 낳은 왕비였다. 태종이 정안군 시절 일찍 요절한 세 명의 아들과 1412년에 태어나서 요절한 막내 아들까지 포함하면 총 12명의 자식을 낳았다.[39]

마지막 아이가 태어난 해는 1412년(태종 12년)이었는데, 동생 민무구민무질이 죽은 지 2년여 뒤인 47세때였다.[40] 즉 지지고 볶고 물고 뜯고 하는 와중에도 금슬은 유지되었다. 불같은 성격의 태종도 아들인 양녕대군과 성녕대군을 끔찍이 아껴서 이들의 문제에 대해서는 아내인 원경왕후와 의견이 일치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를 볼 때 마냥 으르렁거리기만 한 것 같지는 않다. 사실 처음 만났을 때 서로 첫눈에 반했고, 제2차 왕자의 난까지 생사고락을 같이 하는 등 금술좋은 천생연분의 모습이 더 강했다.

즉, 이들 부부의 관계는 전형적인 애증이었다.[41] 사적으로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었으나 왕족이라는 신분, 그리고 왕권을 확립해야 하는 건국 초반기라는 시대적인 배경 때문에 공적으로는 권력의 위계상 충돌할 수밖에 없었던 사이였던 것이다.

정선공주를 토대로 하여 신사임당 모자의 모계 혈연이 된다.[42][43]

5. 대중매체에서

보통 세종대왕의 어머니보단 남편 태종의 킹메이커로서 부각되는 경우가 대다수다. 그래서 태종과의 사이에서 많은 자식을 둔 점은 대다수의 작품에서 생략된다.

6. 관련 문서


[1] 이천우(李天祐)의 정부인.[2] 노사신의 할머니.[3] 태종이 정안군이었던 시절, 양녕대군 위로 3명의 아들이 있었으나 모두 요절했다.[4] 봉호는 충녕대군(忠寧大君).[5] 원경왕후의 언니는 평양 조씨 출신 문하부 참찬 조박, 여동생은 교하 노씨 노한과 혼인하는 등 가문의 혼맥도 대단했다. 여동생의 자녀들 중 노물재의 부인은 청송 심씨로, 심온의 딸이자 소헌왕후 심씨의 여동생이었다. 이는 노사신의 문서에서도 설명되어 있다. 원경왕후의 아버지 민제의 외조부인 문정공 허백은 송빈(분)의 외손이었고, 원경왕후의 어머니 송씨 부인의 증조부인 송염은 송빈(분)과 형제 사이였으므로, 민제와 대부인 송씨 부부는 서로 9촌이 되었고 항렬도 부인이 하나 위였다[6] 왕의 딸도 아닌데 옹주로 봉해진 것은 아직 조선이 내명부와 외명부의 등급 및 호칭이 제대로 정비되지 않았기 때문으로, 당시는 왕의 후궁과 종친, 신하의 아내들까지 전부 옹주 작위를 주었다. 훗날 등급 및 호칭이 제대로 정해진 후로 따지면 대군의 부인이니, 부부인(府夫人)으로 불린다.[7] 당시 그녀는 충녕대군, 즉 세종을 임신 중이었다.[8] 이 말을 타고 있었던 사람은 훗날 조대림 사건을 일으키는 목인해였다. 이때 목인해는 전투 중에 얼굴에 화살을 맞았는데, 낙마를 했는지 여하간 알 수 없는 이유로 홀로 된 말이 제 집의 마굿간을 찾아 돌아온 것이었다.[9] 이중 한 명이 효빈 김씨다.[10] 정안군은 정종의 왕세제가 아닌 왕세자가 되어 왕위를 물려받았다. 명목상 왕위 계승을 위해 형의 양자가 된 것이었다.[11] 민무구민무질은 태종 이방원의 처남들이자, 태종 비 원경왕후 민씨의 바로 밑 동복동생들이었다. 이 둘은 태종이 정안군이었을 시절, 정치적으로 위기에 몰렸거나 위험에 처했을 때 아버지 민제와 함께 적극 도와주었다. 그러나 정안군이 태종으로 즉위할 때는 왕권 강화에 방해되고, 추후 여흥 민씨 집안인 민제의 집에서 어릴 때부터 자란 어린 세자가 나중에 국왕이 되었을 때 권력을 남용하여 왕권을 위협할까 봐 태종이 미리 그 낌새를 알고 처남들의 싹을 아예 자른 것이었다.[12] 양녕대군은 어릴 때 외가인 여흥 민씨의 집안에서 자랐다. 하지만 그 외가가 멸문될 때 태종의 처가에 대한 의심병을 돋구면서 외가의 멸문을 거들게 된다. 훗날의 문정왕후 윤씨와 외척 파평 윤씨의 국정 농단을 예견한 듯 싶다.[13] 세종이나 양녕대군이나 정순공주 등과 같은 자식들에게는 외가가 되는 여흥 민씨 집안을 설명하자면, 원경왕후 민씨의 위로는 조박이천우에게 시집을 간 언니 2명이 있었고, 남자 형제들로 민무구, 민무질, 민무휼, 민무회가 있었으며, 노한(盧閈)[51]에게 시집간 여동생 1명이 있었다.[14] 훗날 태종은 충녕대군에게 선위한 후 본인의 바깥사돈이자 국구인 심온명나라에 사은사로 보냈다가 의주에서 병력을 왕명없이 함부로 움직였다는 것을 구실삼아 사약을 내렸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세종 내외의 끈질긴 설득으로 소헌왕후 심씨의 어머니와 가족들은 천민으로 계급을 강등시키는 데에 그쳤고, 이들은 태종 사후 신분을 되찾을 수 있었다. 이러한 숙청은 결과적으로 세종의 치세때 외척의 간섭이 없는 결과를 만들었고, 세종 이후 한동안의 국왕들은 수렴청정의 경우를 빼고는 비교적 권력을 자유롭게 휘두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왕의 친위 세력이 되어줄 외척이 없는 상태에서 세종은 신하들을 견제하기 위해 자신의 아들들에게 힘을 실어주었고, 이는 결국 불행한 결말을 만들어내고 말았다.[15] 하지만 세종으로서는 최선의 방법이었을 수도 있다. 당장 외척이나 신하들보다는 아들들이 가장 안전한데다가 설마 건강했던 큰 아들 문종이 일찍 죽을 걸 생각지도 못했을 테고, 둘째 아들이 자신의 조카를 때려잡고 왕이 될 것은 더 더욱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다만 어찌 됐든 이러한 사태들은 왕실 일가 내에 벌어진 권력 싸움이었지, 외척에게 휘둘린 건 아니긴 했다.[16] 당시 왕실에는 수양대군을 견제할 어른이 사실상 없다시피한 게 문제였는데, 사실 소헌왕후의 3년상이 끝나는대로 세종이나 세자인 문종이 재혼했으면 없었을 일이었으나 앞서 언급했듯이 외척 경계의 성향 때문인지 그러지를 않았다. 문제는 조선의 왕비라는 자리는 외척이기 이전에 내명부의 수장이라는 중요한 자리이기도 했기에 어지간해서는 정식으로 채웠어야 하는데, 소헌왕후가 사망했을 당시 문종에게 대리청정을 시키고 있었던 세종 본인은 새 왕비가 문종에게 위협이 될 수도 있어서 재혼하지 않고 후궁에게 권한 대행을 시켰다고 치더라도, 세자인 문종은 왕이 될 때를 생각해서라도 재혼시켰어야 했는데 그러지 않았다. 문종은 더 심각한데, 그가 왕이 되었을 당시 그에게 아들은 하나밖에 없었고 그 아들에게는 어머니가 없는 상황이라서 만약을 위해서라도 재혼을 하는 게 나았을 텐데도 아버지처럼 후궁에게 권한 대행을 시키는 식으로 사실상 방치했다. 이때문에 소헌왕후의 사망 이후 통제에서 벗어난 내명부의 후궁들과 그 자식들인 왕자와 옹주들은 혜빈 양씨와 그 아들인 한남군 같은 일부를 제외하고 상당수가 세종과 문종 사망 이후 수양대군의 친위세력이 되어서 계유정난 때 적극적으로 세조의 편에 붙어, 이미 죽은 세종과 문종, 소헌왕후의 뒤통수를 치는 패륜과 배반을 저질렀다.[17] 당장 1차 왕자의 난이 이를 보여준다. 그리고 이 난을 일으킨 장본인이 누구인지 생각해보면 원경왕후가 실제로 폐출될 확률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18] 비슷한 사례로 서진의 시조였던 사마의 역시 정실이 역사상 기가 세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웠던 장춘화였는데 백부인을 비롯한 첩을 들이는 문제로 부부싸움을 하다가, 장춘화에게 '늙다리'라고 욕을 했고 이에 장춘화는 자신의 아들들과 함께 식음을 전폐하며 사마의에게 시위를 한 적이 있었다. 결국 사마의는 사과하기는 했는데 이후 무안했는지 '내가 뭐하러 늙다리 따위를 신경쓰겠냐. 다만 내 금쪽같은 아들들의 몸이 걱정돼서 그랬을 뿐이다.'라고 말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처럼 아무리 부부간에 갈등이 있어도 적자를 잔뜩 낳은 정실부인을 내치는 일은 가주가 제정신이라면 동아시아 역사에 거의 없었다.[19] 심지어 정실부인의 권한이 상대적으로 약했던 서양에서도 그 꼬장꼬장하기로 유명한 헨리 8세가 정실부인이자 왕비인 아라곤의 캐서린과의 사이에서 딸 하나 밖에 못 낳은 것을 구실삼아(공식적이자 대외적인 이유는 따로 있었지만, 당시에도 딸 하나 밖에 못낳은 것이 이유라는 것은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다들 알고 있었다.) 이혼을 하려고 했다. 이는 동아시아의 왕들이나 가주들이 은근 써먹는 래퍼토리였지만 딸 하나 밖에 못 낳았다는 이유 외에 결격사유가 외국인이라는 점 밖에 없고, 어찌됐건 딸 하나라도 건재하게 낳아 기르고 관계하던 정실 왕비와 이혼한다는게 당시 기준으로도 쉴드치기가 어려운 억지이다보니 잉글랜드 내의 신하들도 격렬하게 반대했다. 결국 헨리 8세는 특유의 꼬장꼬장함으로 신하들을 무시하고, 성공회까지 만들어가며 억지로 캐서린과 이혼하고 쫓아냈다. 만약 캐서린이 아들까지 낳았거나, 애초에 메리 공주가 딸이 아닌 아들이었거나 하다못해 딸들뿐이라도 적녀를 무수히 낳았다면 천하의 꼬장꼬장한 헨리 8세라도 캐서린을 쫓아내기는 더더욱 힘들었을 것이다. 서양조차도 이 정도였으니 정실부인이나 왕비의 영향력 및 권위가 막강했던 동아시아는 더욱 말이 필요없었을 것이다.[20] 정실에게서 낳은 자식은 적통이다. 숙종연산군 모두 정실부인에서 태어난 적통 원자(숙종은 아예 다른 적통이 될 수 있는 남동생이 없었고, 연산군은 중종의 적자 중 첫째였다.)였기에 정통성을 기반으로 막강한 왕권을 휘둘렀다.[21]태종실록》에 보면 1414년(태종 14년)에 3살 난 왕녀가 사망했다는 기사가 있는데 이 아이인 것으로 추정된다.[22] 1412년 6월생으로 만 47세에 출산했다. 이 아이는 원경왕후의 두 동생인 민무구민무질이 처형된 후에 태어났다. 당시 태종은 "중궁이 난산을 자주 하여 걱정했는데 의원들이 약을 잘 써 무사히 해산하여 기쁘다."면서, 의원들에게 각각 쌀 10석, 쌀 5석을 내려주었다. 또한 "점쟁이(卜者)가 올해 낳은 아이의 (수명에) 한도가 있다고 하니 마땅히 딴 곳에서 양육하여야겠다."라며 최종적으로 성비(성비 원씨)전에 맡기기로 했다.# 이 요절한 공주는 태종과 원경왕후의 맏이인 정순공주와 무려 27살의 차이가 났다. 당시 혼인 적령기가 15살쯤이었으니 27살 차이면 할머니랑 손녀 나이 차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복자매도 아닌 친자매가 그만큼의 나이 차이가 난 것이다.[23] 사가(私家) 시절에 맺어진 인연이었다.[24] 당장 원경왕후의 아버지인 민제 역시 원경왕후에 대한 교육을 아끼지 않은데다, 대담한 기질을 인정하여 대업의 주역으로 가문의 역량을 총동원하여 뒷바침 해주었으며 동생들인 민무구,민무질 역시 그런 누나를 적극적으로 도우며 따랐다.[25] 사실은 4남이었는데 3명의 형이 어릴 때 다 죽었고, 그때는 조선이 생기기 전 고려 시절이라《조선왕조실록》 자체에 자식으로 기록도 되어 있지 않다. 단지《조선왕조실록》에는 태종이 왕이 되고 나서 양녕대군 이전에 죽었던 아들 3명에 대해 회고한 기록이 있을 뿐이다. 장자 계승의 압박이 있었던 태종이 양녕대군의 장자됨을 강조하려고 일부러 이전에 죽은 아들들을 정식으로 기록하지 않은 것이라는 설도 있다. 물론 양녕대군의 누나 3명은 양녕대군이 태어날 때도 살아 있었다.[26] 먼저 태어난 세 아들이 모두 죽는 바람에 다른 곳에서 키우면 낫지 않을까 하고 외가에 각각 맡긴 적이 있었다. 때문에 외숙들과 사이가 좋았을 것이고 이는 여흥 민씨 4형제 숙청의 한 이유가 되었다.[27] 그래서 손자와 손녀들을 궁에서 길렀다고 한다.[28] 친어머니이면서 왕대비로 가장 오래 재위한 인물은 효종의 왕비였던 효숙대비였다.[29] 학질(瘧疾)로 불리는 말라리아다. 지금이야 주로 최빈국에서 번지는 전염병이고 치료제도 많지만 그 시절에는 치료제도 없었다. 1979년에 한국에서 박멸되었으나 북한에는 잔존하여 1994년부터 경기도 북부 지역에서 다시 환자가 발생하고 있다. 현재까지도 강원도 철원이나 연천에서 복무하는 병사들은 말라리아 예방약을 복용하는데 그에 대한 부작용으로 설사를 달고 산다고 한다.[30] 아주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어서 아버지가 생존한 상황에서의 모친상은 3년상을 치르지 않고, 12개월 동안 입을 상복의 경우, 1개월을 하루로 계산한 '역월지제'에 따른 논리였다.(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세종도 능묘에 모실 때까지만 입겠다고 타협을 봤다. 그리고 이후의 국왕들도 보통 졸곡이나 능묘에 모실 때까지 입었다.) 사실 태종은 이보다 1년 전, 노상왕이었던 정종이 사망했을 때 아들 세종고기를 먹지 않자 식겁해서 "내가 죽었을 때는 주상이 고기를 먹을 수 있도록 하라"는 말을 했을 정도였다.[31] 다만 딱 한 번 재위기간 중에 대비가 위중한 병에 걸리자 회암사의 승려들을 불러놓아 불사를 벌이게 하면서 "니들 도에 효험이 있는지 보여라, 없기만 하면 나라에서 불교를 싹 뽑아버릴테다." 라는 협박을 했고, 이에 승려들은 이마와 팔을 지져대며 필사적으로 기도했다. 이후 병세가 어느정도 회복되자 태종은 양주의 회암사에 상으로 땅과 곡식을 내려주었다고 한다.[32] 태종은 후덕대비와 같은 나이(56세)에 승하했다.[33] 족보에 없고 태종이나 원경왕후의 언급만 있다.[34] 명장 남이의 할머니다. 즉, 남편인 의산군 남휘가 남이의 친조부였고, 태종 이방원은 남이의 외증조부였다.[35] 실록 1412년 6월 23일 기사에 원경왕후의 출산 기록이 나온다. 무려 만 47세의 나이였다. 다만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영아기 때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실록의 기록을 보면, 태종이 "점쟁이에게 물었더니 아들의 수명이 짧다고 하여 마땅히 다른 곳에 맡겨 기르고자 한다"고 이야기하는데, 점쟁이의 예언대로 아이는 일찍 사망했던 듯 하다.[36] 공교롭게도 셋 다 여흥 민씨다.[37] 아버지 이방원은 무신 가문을 무시하는 권문세족들 틈에서 최연소(17세)로 과거를 급제한 전주 이씨의 자랑이었다.[38] 당시 태종 이방원으로서는 장차 강해질지도 모를 외척 세력으로 인해 이씨의 왕권이 쇠약해질 것을 고려하여 내린 결단이었지만 원경왕후의 입장에서는 힘들 때 누구보다 정말 많이 도와줬는데 돌아온 것은 남동생들인 민무구, 민무질, 민무휼, 민무회의 죽음이었으니 뒤통수를 맞아도 너무 심하게 맞은 것이었다.[39] 세종 2년에 원경왕후가 사망한 직후 변계량이 지어 올린 글을 보면, '태후께서는 4남 4녀를 낳으셨고, 우리 주상 전하는 셋째시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원경왕후 사망 시점에 살아있는 자녀가 4남 4녀로써 총 8명이었던 것을 의미하며, 또한 실질적인 탄생 순서로는 세종은 여섯째 아들이었지만, 앞선 세 아들과 막내 아들은 어린 나이에 일찍 사망하였으므로 형제로 언급되지 않았던 것이다.[40] 역대 조선시대의 왕비들 중 최고령 출산 기록이다. 산모의 평균 연령이 높아지고 노산이 많아진 현대 기준으로도 40대 후반에 출산하는 사례가 흔치 않은 것을 보면 상당히 이례적이라고 할 수 있다. 심지어 조선 중기에 이보다 약간 적은 나이지만 역시 40대에 막내 아들을 낳았던 인열왕후 한씨가 원경왕후 민씨와는 달리 사산을 한 것은 물론 본인마저 산욕열로 사망한 걸 생각하면 사산도 하지 않고 무사히 건강하게 낳았으며, 몇 년을 더 살아 왕대비가 되고, 세종의 즉위와 초반 치세까지 지켜본 원경왕후가 여러모로 대단한 셈이다.[41] 세종이 후덕대비 사후에 근처에다가 절을 지으려고 했을 때, 태종이 "거긴 내가 죽으면 묻힐 곳인데 내가 불교 싫어하는 거 알면서 절을 짓냐?"라면서 반대했다. 일단 태종의 의견대로 절이 세워지진 않았지만 세종은 드물게도 "어머니 무덤이 쓸쓸해보여 절이라도 짓고자 한 겁니다."라며 맞대응하기도 했다. 세종도 아버지 태종의 외척 정리를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그렇다고 섭섭하지 않은 건 아니다 보니 절을 지으려는 것을 통해 일종의 시위를 했다는 해석도 존재한다. 어쨌든 죽어서도 같이 있기 싫을 정도로 원경왕후를 증오했던 건 아니었다는 의미다.[42] 정선공주 - 남씨 - 신자승 - 신숙권 - 신명화 - 신사임당 - 율곡이이 - 이경림, 이경정[43] 공교롭게도 딸 정선공주의 모계 후손들인 신사임당, 율곡이이와 셋째 아들인 세종대왕이 모두 대한민국 화폐의 주인공들이다. 신사임당은 오만원권, 율곡이이는 오천원권, 세종대왕은 만원권의 주인공이다.[44] 1996년 KBS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는 이방원과 원경왕후 때문에 말년에 비참한 신세가 된 신덕왕후 역.[45] 〈역사의 라이벌〉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일들을 단막극 형식으로 재연하는 다큐라서 출연자들이 기억되지 않는 편이지만, 지금 보면 그 캐스팅들이 상당히 후덜덜하다. 참고로 이 편에서 이성계는 배우 김성겸, 이방원은 배우 임영규, 정도전은 배우 변희봉이 연기했다.[46] 2차 왕자의 난 때는 남장을 하고 남편이 있는 곳까지 말을 타고 찾아간다.[47] 출산 경험이 있는 주부 시청자들은 최명길의 만삭을 눈치채고 너무 무리해서 연기하는거 아니냐는 말을 했다. 최명길은 이 때 29화 출연 분량을 9일만에 찍고 한꺼번에 찍은 분량만큼 출연료를 받은 후 출산을 준비했는데 출산 예정일 일주일 전까지 촬영하는 강행군을 했다고 한다. 물론 한복의 특성상 품이 넉넉하기 때문에 눈치채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다.[48] 최명길이 혼신의 연기를 펼친 것도 있지만 만삭인 임산부가 밥상을 뒤엎고 성인 남성의 옷자락을 붙잡고 매달리다가 내동댕이쳐지는 등 큰 위험을 감수한 액션을 촬영하다보니 같이 연기하는 유동근이나 보조하는 스태프들이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촬영이었다.[49] 원경왕후 역을 두 번이나 맡게 된 최명길은 "자신이 원경왕후와 무슨 연이 있는 것이 아닐까"라고 소회를 남기기도 했다.[50] 고나은이라는 예명으로 활동했으나, 2017년 4월, 소속사를 옮기면서 본명으로 활동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