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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8:18:45

재상지종

1. 개요2. 권문세족과의 관계3. 재상지종 15가문4. 가문별 형성배경 및 주요인물
4.1. 기존 문벌귀족 가문4.2. 무신으로 등장한 가문4.3. 관인 가문4.4. 대원관계에서 성장한 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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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려시대 간섭기인 1308년(충선왕 복위년) 충선왕이 동성금혼령[1]을 선포하고 복위 교서에서 종친과 혼인할 수 있는 15가문을 정했는데, 이들 가문을 재상지종(宰相之宗)이라고 한다.#

2. 권문세족과의 관계

재상지종은 충선왕 복위 교서 당시 유력했던 가문들이므로 이후 권문세족(權門勢族)으로서 세력을 이어간 경우가 많았지만 원 간섭기를 거치면서 쇠락하는 경우도 발생하였다. 또한 안동 권씨[2], 경주 이씨[3]처럼 원 간섭기를 거치면서 부상한 신흥세력들이 왕실과 통혼하는 경우도 발생하므로, 재상지종은 고정불변의 것이 아닌 충선왕 대에 이르러 파악한 당대의 귀족가문의 결산 평가 같은 것이다. 요컨대 재상지종은 권문세족과 어느 정도 상관관계가 있지만 반드시 일치하는 개념은 아니다.

3. 재상지종 15가문

파일:고려 의장기 문양.svg 충선왕 제정 재상지종 15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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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후 가문
경주 김씨
순경태후
정안 임씨
공예태후
경원 이씨
인예태후
안산 김씨
원성태후
당성 홍씨
명덕태후
재상 가문
언양 김씨
김취려
철원 최씨
최유청
해주 최씨
최충
공암 허씨
허재
평강 채씨
채송년
청주 이씨
이자림
황려 민씨
민영모
횡천 조씨
조영인
파평 윤씨
윤관
평양 조씨
조인규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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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몇 집안은 조선시대까지 그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해당 가문들을 성씨별로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4. 가문별 형성배경 및 주요인물

이들 재상지종 15가문은 형성 배경에 따라 기존 문벌귀족 가문, 무신으로 등장한 가문, 관인 가문, 대원관계에서 성장한 가문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4.1. 기존 문벌귀족 가문

4.2. 무신으로 등장한 가문

4.3. 관인 가문

4.4. 대원관계에서 성장한 가문


[1] 同姓禁婚令. 같은 성씨끼리의 결혼을 금지하는 법. 당연히 동성혼(同性婚)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2] 수비 권씨(충숙왕의 제5비)를 배출하였다. 당시에는 무조건 원나라 공주가 고려 국왕의 정비(正妃)가 되었다. 또한 원나라 권황후(기황후의 아들 원나라 소종의 제1황후)를 배출하기도 하였다.[3] 혜비 이씨(공민왕의 제2비)를 배출하였다. 당시에는 무조건 원나라 공주가 고려 국왕의 정비(正妃)가 되었다. 제1비인 노국대장공주(선안왕태후)가 사망한 이후 내명부에서 가장 높은 위치가 되었다.[4] 조선의 왕가인 전주 이씨의 시조는 이한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이한의 증손으로 되어 있는 이광희가 원래 시조였으며 조선 건국 이후 이광희 위로 이한, 이자연, 이천상의 3대가 추가되었다는 의혹이 있다. 학자들은 경원(인천) 이씨의 2세 이한, 3세 이자연, 이자상 부자의 이름을 도용한 것으로 본다. 이자상의 이름만 비슷한 이천상으로 바꾸고 같은 벼슬을 지낸 것으로 조작하여 전주 이씨 족보에 등재하였다는 것이다.[5] 원래 임연의 사위였으나 1270년 거사 이후 재혼한 듯하다.[6] 총 329명(당홍계 206명, 토홍계 123명)을 배출했는데, 이는 전주 이씨, 안동 권씨, 파평 윤씨에 이어 네 번째로 많은 숫자이다.[7] 첫 번째 남편인 평량공 왕현(王眩)과의 사이에서 낳은 4녀 경녕옹주(慶寧翁主)가 노책에게 출가하였다. 노책은 첨의정승, 우정승까지 지냈으나 병신정변(1356)으로 처형된다.[8] 현종의 후궁인 원질귀비와 덕종의 제2비인 경목현비이다.[9] 강감찬, 최사위, 최항과 함께 배향되었다.[10] 경원(인천) 이씨와 더불어 고려시대에 많이 왕비를 배출 한 집안이다. 원성태후, 원혜태후, 원평왕후가 안산 김씨 가문이다.[11] 경원(인천) 이씨 시조 이허겸의 사위. 훗날 그의 아내의 조카인 경원(인천) 이씨의 이자연이 김은부의 정략결혼을 그대로 벤치마킹한다.[12]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말로 유명한 그 최영 맞다. 하지만 실은 이 말은 최영 장군이 말한 것이 아니라 최영 장군의 아버지의 유언이다.[13] 경원(인천) 이씨의 이자겸의 처가이며, 최온의 후손인 최사추의 딸이 인천 이씨 집안으로 출가하여, 문경태후를 낳기도 하였다. 문경태후는 후에 인종을 낳게 된다. 인천 이씨와 더불어 역사 교과서에 항상 실리는 문헌공 최충의 가문이다[14] 조선시대 왕비를 가장 많이 배출 한 가문. 모두 윤관의 직계후손들이다. 고려시대 당시 타 가문들과 달리 자주적 정신을 지향했다고 한다. 조동일, '한국문학통사1', 지식산업사, 2005, pp. 391-392[15] 김취려 장군과 함께 거란 유종을 강동성 일원에서 무찌른 장군이다.[16] 조영인의 손자이자 조충의 아들이다.[17] 조인규의 딸로, 고려의 제26대 왕 충선왕의 제4비[18] 조인규의 증손자, 권문세족 출신이나 급진적 성향을 많이 띠는 정도전, 남은 등의 신진 사대부와 교류하였고 조선의 1등 개국공신 겸 태조, 정종, 태종의 재상으로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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