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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려시대 원간섭기인 1308년(충선왕 복위년) 충선왕이 동성금혼령[1]을 선포하고 복위 교서에서 종친과 혼인할 수 있는 15가문을 정했는데, 이들 가문을 재상지종(宰相之宗)이라고 한다.#2. 권문세족과의 관계
재상지종은 충선왕 복위 교서 당시 유력했던 가문들이므로 이후 권문세족(權門勢族)으로서 세력을 이어간 경우가 많았지만 원 간섭기를 거치면서 쇠락하는 경우도 발생하였다. 또한 안동 권씨[2], 경주 이씨[3]처럼 원 간섭기를 거치면서 부상한 신흥세력들이 왕실과 통혼하는 경우도 발생하므로, 재상지종은 고정불변의 것이 아닌 충선왕 대에 이르러 파악한 당대의 귀족가문의 결산 평가 같은 것이다. 요컨대 재상지종은 권문세족과 어느 정도 상관관계가 있지만 반드시 일치하는 개념은 아니다.3. 재상지종 15가문
충선왕 제정 재상지종 15가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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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김씨 순경태후家 | 정안 임씨 공예태후家 | 경원 이씨 인예태후家 | 안산 김씨 원성태후家 | 당성 홍씨 명덕태후家 | |
재상 가문 | |||||
언양 김씨 김취려家 | 철원 최씨 최유청家 | 해주 최씨 최충家 | 공암 허씨 허재家 | 평강 채씨 채송년家 | |
청주 이씨 이자림家 | 황려 민씨 민영모家 | 횡천 조씨 조영인家 | 파평 윤씨 윤관家 | 평양 조씨 조인규家 |
몇몇 집안은 조선시대까지 그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해당 가문들을 성씨별로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 경주 김씨(전주 김씨): 경주 김씨는 신라의 국성인 왕족 가문으로 김봉모, 김태서 부자의 대에 이르러 이들 집안이 전주 김씨로 분적하였다. 문하시랑평장사 김봉모의 손자이자 문하시랑평장사 김태서의 장남인 추밀원부사 김약선은 무신집권자 최우의 사위로서 그 딸이 원종의 제1왕후 순경태후이다. 김태서의 3남 추밀원부사 김경손의 아들이 도첨의중찬 김혼이다.
- 경원(인천) 이씨: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문벌귀족 가문이다. 권신 이자겸이 이 가문 출신이다. 고려 문종 이래 100여 년간 권력을 전횡한 권세 가문. 고려시대에 가장 많은 왕비를 배출한 가문이기도 하다. 조선의 국성이었던 전주 이씨 가문에서 조선 왕가로 일어선 뒤에 격을 더 높이기 위해 당대의 명문가였던 경원(인천) 이씨 가문의 가계를 일부 도용하기도 하였다.[4] 일본 역사학자 후지타 료사쿠(藤田亮策)가 심도 있게 연구한 가문이기도 하다. 세조의 장인 파평 윤씨 윤번의 장인인 공도공 이문화가 경원(인천) 이씨 가문이다. 따라서 조선 예종 이후의 왕들은 경원(인천) 이씨 가문과 혈연관계가 있다.
- 안산 김씨: 고려 현종의 장인인 김은부의 가문이지만, 이후 그 위상이 김은부의 처가인 경원(인천) 이씨 가문으로 바톤 터치 되면서 다소 사그라들었다. 경원(인천) 이씨와 더불어 고려시대에 많이 왕비를 배출 한 집안이다. 원성태후, 원혜태후, 원평왕후가 안산 김씨 가문이다.
- 당성(남양) 홍씨: 중시조 홍유(홍은열)은 개국공신이며, 이후 무신정변 이후 100년에 걸친 무신정권을 종식시킨 홍규(홍문계)[5]가 이 집안이다. 여몽전쟁 시기 대를 이어 반역을 한 홍복원과 충혜왕과 공민왕의 생모인 명덕태후가 이 집안이며, 조선시대에도 같은 본관을 쓰는 '토홍계'와 함께 300명이 넘는 문과 급제자[6]를 배출하는 등 명문가를 형성했다.
- 언양 김씨: 아름답고 긴 수염으로 유명한 '고려판 관운장'인 위열공 김취려의 후손들로 시조인 김선은 신라 경순왕의 7남인 동시에 고려 태조 왕건의 외손인 관계로 정계 진출이 원활했고, 김취려 이후 크게 번창했으며, 고려 말의 충신인 도은 이숭인의 외가이기도 하다.
- 철원(동주) 최씨: 고려 전기부터 이미 문벌귀족의 가문으로 의종 때 중서시랑평장사를 지낸 최유청의 출세로 급부상했다. 이후 고려 말까지 영향을 끼쳤고, 특히 고려 말의 무인인 무민공 최영 장군이 배출되었다. 유명한 문학가이자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변절한 최남선도 이 집안이다.
- 해주 최씨: 경원(인천) 이씨의 이자겸의 처가이며, 최온의 후손인 최사추의 딸이 경원(인천) 이씨와 결혼해 인종의 어머니인 문경태후를 낳기도 하였다. '해동공자' 문헌공 최충의 가문이기도 하다.
- 평강 채씨: 무신정권 때 무인 채송년이 시조로 한다. 채홍철이 충숙왕 때 찬성사를 지냈고, 채하중이 충혜왕, 충목왕, 공민왕 대를 거치면서 정승, 문하시중을 지냈다. 조선 정조 대의 명재상 채제공도 이 가문 출신이다.
- 청주 이씨: 고려 개국공신인 이능희를 시조로 고려 현종과 덕종의 왕비[8]를 배출했다. 이들 왕비의 아버지인 이자림은 김훈·최질의 난을 진압하고 이후 개경 외곽의 내성을 축조하는 등의 공으로 고려의 국성인 왕(王)씨를 하사받고, 현종의 묘정에 배향[9]된 배향공신이다. 이 집안은 고려 말 조선 초기에도 태조와 태종의 사돈이 될 정도로 영향력을 행사했다.
- 황려(여흥) 민씨: 무신정권 때 문하시랑평장사를 지낸 민영모의 가문으로 이후 고려, 조선 양조에 걸쳐 번성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왕비나 후궁을 배출하지 못하였으나, 조선시대에는 원경왕후를 시작으로 인현왕후, 명성황후, 순명효황후에 이르기까지 4명의 왕비를 배출하였다.
- 횡천(횡성) 조씨: 무신정권 때의 인물인 조영인-조충의 가문으로 두 사람 모두 배향공신이다. 조충은 김취려 장군과 함께 고려를 침공한 거란의 유민들을 몽골과 함께 강동성 일원에서 무찌른 문무겸비의 인물이나 사후 그의 아들인 조숙창이 후에 몽골의 1차 침입 당시 항복했고, 이후 반란에 연루되어 참형을 당했다. 그래도 조숙창의 형인 조계순(조충의 장남)은 연루되지 않은 채 이후 추밀원 부사 등 여러 요직을 지냈다.
- 파평 윤씨: 고려의 개국공신 윤신달의 가문으로서, 고려 전기 문숙공 윤관 장군 이래 많은 인물들이 배출된 명문 가문이다. 충혜왕의 제2비이자 충정왕의 생모인 희비가 파평 윤씨이다. 조선시대에도 정희왕후를 비롯해 제헌왕후, 정현왕후, 장경왕후, 문정왕후 등 조선 초기에서 중기까지 5명의 왕후를 배출했다.
- 평양 조씨: 몽골어에 능숙하여 출세한 조인규의 가문으로 그의 딸이 충선왕의 제4비 조비이나 원의 모략으로 부녀가 고초를 겪었다. 후에 조선 개국공신이 되면서 태종과 사돈을 맺은 조준이 조인규의 증손자이다.
4. 가문별 형성배경 및 주요인물
이들 재상지종 15가문은 형성 배경에 따라 기존 문벌귀족 가문, 무신으로 등장한 가문, 관인 가문, 대원관계에서 성장한 가문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4.1. 기존 문벌귀족 가문
- 경주 김씨: 김부식, 김돈중, 김원충, 신성태후, 김봉모, 김태서, 김약선, 김경손, 순경태후, 김혼
- 정안(장흥) 임씨: 임의, 임원후(원애), 공예태후, 성평왕후
- 경원(인천) 이씨: 이자연, 이자겸, 이자량, 이정, 이자인, 이자의, 원신궁주, 이호, 이자현, 이자덕, 인예태후, 사숙태후, 문경태후, 연덕궁주, 복창원주
- 안산 김씨[10]: 김은부[11], 원성태후, 원혜태후, 원평왕후, 김원상
- 당성(남양) 홍씨: 홍유, 명덕태후, 홍복원, 홍다구, 홍륜
- 철원(동주) 최씨: 최유청, 최준옹, 최영[12]
- 해주 최씨[13]: 최온, 최충, 최유선, 최사추, 최윤의, 조선국대부인
- 공암(양천) 허씨: 허선문, 허현, 허원, 허정, 허재, 허순, 허공, 순비 허씨
- 청주 이씨: 이공승, 이자림(왕가도)
- 파평 윤씨[14]: 윤신달, 윤관, 윤언이, 윤인첨, 윤보, 윤선좌, 희비
4.2. 무신으로 등장한 가문
4.3. 관인 가문
4.4. 대원관계에서 성장한 가문
[1] 同姓禁婚令. 같은 성씨끼리의 결혼을 금지하는 법. 당연히 동성혼(同性婚)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2] 수비 권씨(충숙왕의 제5비)를 배출하였다. 당시에는 무조건 원나라 공주가 고려 국왕의 정비(正妃)가 되었다. 또한 원나라 권황후(기황후의 아들 원나라 소종의 제1황후)를 배출하기도 하였다.[3] 혜비 이씨(공민왕의 제2비)를 배출하였다. 당시에는 무조건 원나라 공주가 고려 국왕의 정비(正妃)가 되었다. 제1비인 노국대장공주(선안왕태후)가 사망한 이후 내명부에서 가장 높은 위치가 되었다.[4] 조선의 왕가인 전주 이씨의 시조는 이한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이한의 증손으로 되어 있는 이광희가 원래 시조였으며 조선 건국 이후 이광희 위로 이한, 이자연, 이천상의 3대가 추가되었다는 의혹이 있다. 학자들은 경원(인천) 이씨의 2세 이한, 3세 이자연, 이자상 부자의 이름을 도용한 것으로 본다. 이자상의 이름만 비슷한 이천상으로 바꾸고 같은 벼슬을 지낸 것으로 조작하여 전주 이씨 족보에 등재하였다는 것이다.[5] 원래 임연의 사위였으나 1270년 거사 이후 재혼한 듯하다.[6] 총 329명(당홍계 206명, 토홍계 123명)을 배출했는데, 이는 전주 이씨, 안동 권씨, 파평 윤씨에 이어 네 번째로 많은 숫자이다.[7] 첫 번째 남편인 평량공 왕현(王眩)과의 사이에서 낳은 4녀 경녕옹주(慶寧翁主)가 노책에게 출가하였다. 노책은 첨의정승, 우정승까지 지냈으나 병신정변(1356)으로 처형된다.[8] 현종의 후궁인 원질귀비와 덕종의 제2비인 경목현비이다.[9] 강감찬, 최사위, 최항과 함께 배향되었다.[10] 경원(인천) 이씨와 더불어 고려시대에 많이 왕비를 배출 한 집안이다. 원성태후, 원혜태후, 원평왕후가 안산 김씨 가문이다.[11] 경원(인천) 이씨 시조 이허겸의 사위. 훗날 그의 아내의 조카인 경원(인천) 이씨의 이자연이 김은부의 정략결혼을 그대로 벤치마킹한다.[12]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말로 유명한 그 최영 맞다. 하지만 실은 이 말은 최영 장군이 말한 것이 아니라 최영 장군의 아버지의 유언이다.[13] 경원(인천) 이씨의 이자겸의 처가이며, 최온의 후손인 최사추의 딸이 인천 이씨 집안으로 출가하여, 문경태후를 낳기도 하였다. 문경태후는 후에 인종을 낳게 된다. 인천 이씨와 더불어 역사 교과서에 항상 실리는 문헌공 최충의 가문이다[14] 조선시대 왕비를 가장 많이 배출 한 가문. 모두 윤관의 직계후손들이다. 고려시대 당시 타 가문들과 달리 자주적 정신을 지향했다고 한다. 조동일, '한국문학통사1', 지식산업사, 2005, pp. 391-392[15] 김취려 장군과 함께 거란 유종을 강동성 일원에서 무찌른 장군이다.[16] 조영인의 손자이자 조충의 아들이다.[17] 조인규의 딸로, 고려의 제26대 왕 충선왕의 제4비[18] 조인규의 증손자, 권문세족 출신이나 급진적 성향을 많이 띠는 정도전, 남은 등의 신진 사대부와 교류하였고 조선의 1등 개국공신 겸 태조, 정종, 태종의 재상으로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