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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반민족행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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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명칭 관련3. 법률상 정의4. 역사
4.1. 시초4.2. 통감통치기4.3. 일제강점기4.4. 해방 이후: 미군정과 이승만4.5. 6.25 전쟁과 몰락, 재기 시도
5. 해외의 친일반민족행위자
5.1. 미국의 친일반민족행위자5.2. 중국의 친일반민족행위자5.3. 타국의 과거사 청산과 비교해볼 점
6. 평가7.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8. 여담9. 관련 자료
9.1. 문헌9.2. 영상매체
10. 관련 단체11. 관련 연구가12.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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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이완용 초상화.jpg
친일반민족행위자의 대표적 인물인 이완용.
파일:친일파공신.png

/ pro-Japanese and anti-national collaborator

'친일반민족행위자'란 법률상으로 구한말일제강점기에 국가와 민족을 배반하고 일본 제국에 협력하던 자들을 말한다.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반민족규명법)제2조에서 정의한 친일반민족행위

2. 명칭 관련

친일반민족행위자는 단어가 길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짧게 친일파로 불린다. 하지만 원래 친일파는 '일본과 친하게 지내는 무리'라는 뜻을 가진 용어로 쓰였는데, 그런 의미가 아니라 "일본에게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매국노" 정도의 의미로 쓰인다. 그래서인지 친일반민족행위자에 대해 '친일파'가 아니라 '친일 반역자', '부일(附日, 일본에 부역함) 협력자' 등이라고 칭해야 된다는 의견도 있다. 친일반민족행위자는 일본 제국에 동조했었기 때문에 '친 '일제' 파'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못다한 과거청산만큼이나 한국 안팎에서 친일파라는 용어의 애매함 자체가 문제가 되는데, 친일파는 단순히 일본에 우호적인 사람을 일컫는 말이기 때문. 그래서 상대적으로 자주 쓰이지는 않지만 한자로는 왜인에게 붙은 자라는 뜻인 부왜인(附倭人)이라고도 부른다.

엄밀히 말하자면 현재 한국에서 쓰이는 "친일파"의 의미는 일본을 좋게 보는 사람이 아니라 비시 프랑스의 경우처럼 "식민 통치 당시 일본 제국에 협력한 반역자들", 즉 "침략자의 끄나풀들"을 뜻하는 말로 쓰이고 있다. 그래서 용어를 부일 협력자(附日協力者)로 바꾸자는 주장도 있다. 반면 일본에서는 물론 일본에 우호적인 사람을 가리키는 말 정도의 뜻밖에 없는데, 친일파라는 말이 하도 한국의 언론에서 많이 쓰이다 보니 "일본을 좋게 본다는 것만으로 까일 만큼 한국 사람들이 우리를 싫어하는 건가"라고 오해하거나, 나아가서 이 오해를 넷 우익의 반한 감정 선동에 이용하기도 한다. 중국어도 마찬가지로, 중국어 위키의 친일파 항목을 열람하면 분명하게 한국에서 쓰이는 친일파와 같은 의미인 한간(漢奸)과 친일파를 구분 짓는다. 다만 한간의 경우, 친일반민족행위자뿐만 아니라 적과 내통(內通)하는 자를 전부 이르는 말이다.

일각에서는 '친일파'나 '친일반민족행위자'라는 표현이 부적절하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단순히 일본에 우호적 감정을 갖거나, 친하게 지내려는 것 자체가 문제인 게 아니라 매국행위가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견해를 갖는 사람들은 단순히 민족 반역자라고만 불러야 한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다른 이들은 '친일파'나 '친일반민족행위자'라는 표현이 민족주의적 정서가 반영되어 있다며, 한민족을 배신했다는 것에 포커스를 맞출 게 아니라 식민주의에 부역하고, 파시즘에 가담했기 때문에 문제인 것이다고 반박하기도 한다. 또한 현대 일본은 (과거사 청산의 부족함 등으로 비판은 받지만) 과거 일본 제국과 다르다는 점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실제로 나치에 협력한 이들도 '나치 부역자'나 '나치 협력자'라고 하지 '친독반민족행위자'라고 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이러한 입장에서는 친일파, 친일반민족행위자 대신 일제 부역자 또는 일제 협력자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한다.

다만 '일제 부역자'라는 용어는 사용하는 집단에 따라 각기 다른 의미로 사용되는데, 가령 정치적 편향성 논란이 있는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운영하는 친일인명사전에서 '일제 부역'과 '친일반민족행위자'를 구분하기 때문에, 이러한 명칭 변화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일제 부역'은 서구에서의 '나치 부역'과 같은 의미로 사용하지 않고, 참작의 여지가 있는 부득이하게 협력한 경우까지 매우 폭넓게 사용한다. 다만 (민족문제연구소의 입장과 별개로) 범좌파 진영에서도 '일제 부역자'를 '친일반민족행위자' 또는 서구적 맥락에서 '나치 부역자' 같은 의미와 맥락에서 사용한 케이스가 있다.#

3. 법률상 정의

반민족행위처벌법
제1조 일본정부와 통모하여 한일합병에 적극협력한 자, 한국의 주권을 침해하는 조약 또는 문서에 조인한 자와 모의한 자는 사형 또는 무기징역에 처하고 그 재산과 유산의 전부 혹은 2분지 1이상을 몰수한다.

제2조 일본정부로부터 작을 수한 자 또는 일본제국의회의 의원이 되었던 자는 무기 또는 5년이상의 징역에 처하고 그 재산과 유산의 전부 혹은 2분지 1이상을 몰수한다.

제3조 일본치하독립운동자나 그 가족을 악의로 살상박해한 자 또는 이를 지휘한 자는 사형, 무기 또는 5년이상의 징역에 처하고 그 재산의 전부 혹은 일부를 몰수한다.

제4조 좌의 각호의 1에 해당하는 자는 10년이하의 징역에 처하거나 15년이하의 공민권을 정지하고 그 재산의 전부 혹은 일부를 몰수할 수 있다.
  1. 습작한 자
  2. 중추원부의장, 고문 또는 참의되었던 자
  3. 칙임관이상의 관리되었던 자
  4. 밀정행위로 독립운동을 방해한 자
  5. 독립을 방해할 목적으로 단체를 조직했거나 그 단체의 수뇌간부로 활동하였던 자
  6. 군, 경찰의 관리로서 악질적인 행위로 민족에게 해를 가한 자
  7. 비행기, 병기 또는 탄약등 군수공업을 책임경영한 자
  8. 도, 부의 자문 또는 결의기관의 의원이 되었던 자로서 일정에 아부하여 그 반민족적 죄적이 현저한 자
  9. 관공리되었던 자로서 그 직위를 악용하여 민족에게 해를 가한 악질적 죄적이 현저한 자
  10. 일본국책을 추진시킬 목적으로 설립된 각단체본부의 수뇌간부로서 악질적인 지도적 행동을 한 자
  11. 종교, 사회, 문화, 경제 기타 각부문에 있어서 민족적인 정신과 신념을 배반하고 일본침략주의와 그 시책을 수행하는데 협력하기 위하여 악질적인 반민족적 언론, 저작과 기타 방법으로써 지도한 자
  12. 개인으로서 악질적인 행위로 일제에 아부하여 민족에게 해를 가한 자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정의) 이 법에서 "친일반민족행위"라 함은 일본제국주의의 국권침탈이 시작된 러·일전쟁 개전시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 행한 다음 각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행위를 말한다.
  1. 국권을 지키기 위하여 일본제국주의와 싸우는 부대를 공격하거나 공격을 명령한 행위
  2. 국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투쟁하는 단체 또는 개인을 강제해산시키거나 감금·폭행하는 등의 방법으로 그 단체 또는 개인의 활동을 방해한 행위
  3. 독립운동 또는 항일운동에 참여한 자 및 그 가족을 살상·처형·학대 또는 체포하거나 이를 지시 또는 명령한 행위
  4. 독립운동을 방해할 목적으로 조직된 단체의 장 또는 간부로서 그 단체의 의사결정을 중심적으로 수행하거나 그 활동을 주도한 행위
  5. 밀정 행위로 독립운동이나 항일운동을 저해한 행위
  6. 을사조약·한일합병조약 등 국권을 침해한 조약을 체결 또는 조인하거나 이를 모의한 행위
  7. 일제로부터 작위를 받거나 이를 계승한 행위. 다만, 이에 해당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작위를 거부·반납하거나 후에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한 사람 등으로 제3조에 따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결정한 사람은 예외로 한다.
  8. 일본제국의회귀족원의원 또는 중의원으로 활동한 행위
  9.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고문 또는 참의로 활동한 행위
  10. 일본제국주의 군대의 소위(少尉) 이상의 장교로서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행위
  11. 학병·지원병·징병 또는 징용을 전국적 차원에서 주도적으로 선전(宣傳) 또는 선동하거나 강요한 행위
  12. 일본군을 위안할 목적으로 주도적으로 부녀자를 강제동원한 행위
  13. 사회·문화 기관이나 단체를 통하여 일본제국주의의 내선융화 또는 황민화운동을 적극 주도함으로써 일본제국주의의 식민통치 및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행위
  14. 일본제국주의의 전쟁수행을 돕기 위하여 군수품 제조업체를 운영하거나 대통령령이 정하는 규모 이상의 금품을 헌납한 행위
  15. 판사·검사 또는 사법관리로서 무고한 우리민족 구성원을 감금·고문·학대하는 등 탄압에 적극 앞장선 행위
  16. 고등문관 이상의 관리, 헌병 또는 경찰로서 무고한 우리 민족 구성원을 감금·고문·학대하는 등 탄압에 적극 앞장선 행위
  17. 일본제국주의의 통치기구의 주요 외곽단체의 장 또는 간부로서 일본제국주의의 식민통치 및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행위
  18. 동양척식회사 또는 식산은행 등의 중앙 및 지방조직 간부로서 우리민족의 재산을 수탈하기 위한 의사결정을 중심적으로 수행하거나 그 집행을 주도한 행위
  19. 일본제국주의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에 협력하여 포상 또는 훈공을 받은 자로서 일본제국주의에 현저히 협력한 행위
  20. 일본제국주의와 일본인에 의한 민족문화의 파괴·말살과 문화유산의 훼손·반출에 적극 협력한 행위

4. 역사

4.1. 시초

급진개화파인 갑신정변 사람들, 그리고 온건개화파인 김홍집 내각들(이완용, 박영효 등은 제외)을 가리킨다. 사실 여기까지만 해도 이들은 순수한 친일파에 가깝다. 애당초 그들은 나라를 팔아먹은 것이 아니라 그저 일본을 믿었을 뿐 '일본의 도움을 받아 조선을 근대화시켜야겠다' 라고 판단해서 그리한 것이니 민족반역자까지는 아니다. 물론 이들은 당대의 평범한 사람들에게조차 비판을 받았고[1] 박은식 역시 《한국통사》에서 일류 수재들이 이용당해 크나큰 착오를 저질렀다며 혀를 찬 바 있다. 이러한 개화파에 대한 긍정과 부정의 양면적 평가는 현대의 주류 사학계와 교과서의 평가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 시기에는 먼저 개화를 이룬 아시아 국가인 일본이 조선의 개화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파악하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까지만 해도 일본은 세력이 제국주의 열강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았으며, 수구 세력과 결탁하고 조선에 강압적인 지배력을 펼친 청나라에 비하면 신세력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당시 조선을 둘러싼 열강들인 미-영-러-청-일 중에서 가장 국력이 약해 보여서, 다른 열강에 의지하여 개화를 할 경우 그 나라에 종속되거나 그 그늘을 벗어나기 힘들 것 같았으나, 일본의 경우 후발 주자에다가 약해보여서, 비교적 대등한 관계에서 도움을 받고, 산업화를 완료하고 난 후에 그 그늘에서 벗어나기도 쉬울 것 같아 보였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조선을 집어삼키려는 일본의 본성을 헤아리지 못한 못했던 어리석은 판단이었으며, 이 중 많은 사람들은 일본의 실체가 드러나자 후회하고 반일 성향으로 변하기도 했다. 하지만 박영효와 같은 경우처럼 지일파가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된 경우도 있다.

매천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처음에는 단지 왜인(=일본인)이라고 묘사하더니 나중에는 왜놈이라고 묘사하고 있으며, 여운형도 젊은 시절 러일전쟁 중에 일본의 선전에 속은 것을 반성하고 항일운동가로 활동하게 된다.

친일 개화파였던 김옥균 역시, 지금은 일본의 힘을 빌려 개화를 추진하지만, 나중에라도 그들이 우리의 주권을 침탈하려고 하면 언제든지 맞서 싸울 것이라는 요지의 발언을 하기도 하였다.

일본을 이렇게까지 호의적인 시선으로 바라보았다는 것은 조선인들의 현실 인식의 한계로도 볼 수 있지만, 동시에 당시 조선인 지식인들의 사상이 현대 대한민국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고결(高潔)하고 순수하였다는 것도 알 수 있다.

급진은 물론이고 온건 개화파들도 나중에 일본을 등에 업게 되는것도 있고, 이 시기의 그런 개화파들은 일본의 힘으로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일본의 힘을 등에 업고 있던 김홍집 정권 하에서는 나라를 위한 근대 개혁들이 펼쳐졌으며 아관파천 이후 살아남았던 김홍집 정부 인사들도 일본이 나라를 먹는 것에는 정면으로 반대하였다. 참고로 조선 말고도 베트남이나 인도나 여러 나라에서 일본을 아시아 형제, 좋은 이웃 나라로 봤다가 지배 당하고 나서야 거짓임을 알아 버린 경우도 있다. 베트남의 독립운동가 판보이쩌우호찌민이 대표적으로 이들은 처음에 일본을 호의적으로 접근하다가 나중에 일본 제국주의 침략의 본질을 알게되면서 극반일로 돌아서 일본을 좋게 보던 이들을 꾸짖던 것도 유명한 일화다.

또한 반민족행위자는 개화파에서만 나온게 아니라 개화파와 사사건건 대립했던 왕실, 척족, 수구파 관료들 내에서도 많이 나왔다. 이완용 또한 대한제국 초기에 친러파로 활동했지만 이후에 친일파로 갈아탔다. 때문에 반민족행위자는 정파를 가리지 않고 골고루 출현했던 만큼 개화파와 수구파를 놓고 어느 한쪽이 반민족적이다 라고 논할 수 없다.

4.2. 통감통치기

일진회매국노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주로 대한제국의 지배층인 경우가 많으며, 일제에 주권을 팔아넘기는데 협조하여 부귀영화를 누린 경우다.

한편 고종과 순종 등 그나마 한일병합에 반대한 왕들을 제외한 조선왕족들도 나중에 일본에게서 은사금을 수여받았으므로 나라를 판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의친왕처럼 적극적으로 일본 제국에 맞섰던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의민태자(영친왕)처럼 아예 볼모로 끌려가 소극적이나마 일제 통치에 협력하기도 했고, 혹은 이재면, 이준용처럼 아예 친일민족반역자로 돌아선 사람도 있다. 이는 한국에서 대한제국 황실 복원론에 반대하는 이유 중 하나이며, 친일인명사전 발간 당시 조선 왕족이 포함되지 않자 형평성 논쟁이 나오게 된 이유이기도 했다. 이 부분은 사실 학계에서도 여러부분 논쟁이 오갔지만, 최종적 결론은 '황실도 역시 자유로울 수 없지만, 친일보다는 망국에 대한 정치적, 도의적 책임에 묻는 것이 낫다고 결론지었다.#

4.3. 일제강점기

일본에 의해 모든 것들이 심하게 제한된 상황에서 그 상황속에 스스로의 생존과 출세나 기타 여러가지 이유로 친일 반민족 행위를 한 사람들이 많다. 광복 이후에도 문제가 됐는데 3.1 운동 이후 일제가 한국인 포섭 대상을 이전처럼 기득권층에 한정하지 않고 일반 주민들 사이에서도 확보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현재 문제가 되는 것도 이완용, 송병준 같은 자들이 아니라 바로 이런 서민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이다.

다만 당시 상황이 어느 쪽으로 봐도 독립의 희망이 희미하고 없었던 때인 만큼, 단순히 목숨을 건사하기 위해 친일을 한 것만으로 매국노의 의미로서의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분류할 수 있냐는 반론도 있다.

특히 이런 점이 가장 크게 논란이 되는 시기가 바로 일제 강점기 말기. 즉, 전시 체제 시기다. 이 부분에 대해 학계에서는 '생계형으로 어쩔 수 없이 불명예를 남긴 경우도 고려해야 한다.'는 논란이 일고 있다.

그래서 이런 논리를 펼치는 많은 사람들은 이 논리를 과거사 부정이나 정당화에 악용하고 있다. 여기에 관해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 청산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던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는 친일문제는 민족적 차원에서의 문제가 아닌 사회 공동체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 자들로 정의하고 있다. 김동춘에 따르면, "친일문제는 민족적인 문제가 아니며, 자기 자신의 출세를 위해서 오버를 하는 행위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니깐 생계를 위해서 소극적이나마 할 수 밖에 없는 활동한 경우는 봐줄 수는 있어도 '이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될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자신의 실적과 출세를 위해 사회 공동체 전체에 부정적 영향을 끼치게 만든 자들을 대상으로 봐야한다"고 정의 내렸다.
한국 현대사에서 권위높은 학자인 서중석 교수에 따르면, 오늘날 대한민국에 있어서 가장 부정적 영향을 끼친 요인이 바로 일제강점기의 경찰 출신들과 일제강점기 말 내선일체 운동에 적극 가담한 지식인들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기존의 학계에서는 이러한 논란에 대해 크게 2가지 기준을 놓고 정하고 있다. 첫 번째는 '지속적, 반복적, 적극성' 등 여부를 놓고 보는데, 여기서 '생계형'에 대해 극명하게 나뉘게 된다. 여기서 '지속성', '적극성', '반복성'이 결여되어 생계형으로 제외된 대표적인 인물은 소설가 이효석과 시인 정지용이다. 2번째로 '선(先)항일 후(後)친일은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기록하되, 선(先) 친일 후(後) 항일은 다른 문제로 독립운동'으로 판단하고 결정하고 있다.#1#2

이 기준에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분류되는 인물의 경우를 예로 들자면 미당 서정주 춘원 이광수 등이[2]가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 시기의 친일반민족행위자에 관해 문제가 되는 것이 이른바 '자치론자'이다. 이광수가 특히 막나갔지만 당시 조선에 체류하는 적지 않은 실력양성론자들이 자치론의 성격을 나타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자치론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것이다. 자치론이란 기본적으로 일본의 현재 통치를 긍정하면서 그 안에서 자치를 하고 차츰 민족의 역량을 늘려나가자는 것인데 이 흐름에 있던 많은 이들 역시 최종적인 단계는 독립을 설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독립이 요원해보이는 상황에서 가능한 정도만이라도 민족의 힘을 기르자는 것인데 기본 전제의 특성상 어느정도 일본에 협력하는 체제가 될 수 밖에 없었다. 이를 수행한 많은 이들이 간단하게 친일반민족행위자로 통칭되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통찰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비슷한 예로 미국에서 아메리카 원주민의 권리 증진을 원했던 엘리 파커를 들 수 있다. 그는 인디언 출신으로 미국 정부의 관리로 일하면서 인디언이 정당한 권리를 가질 수 있게 하기 위해 노력했다. 당연히 이 과정에서 미국이라는 압제세력의 일원이 될 수밖에 없었는데 그를 두고 아메리카 원주민 배신자라 규정하지는 않는다. 다만 자치론에서 적극적인 친일 협력자를 구분하기 어렵다는 문제는 있다.

물론 일제로부터의 완전 독립을 주장하며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을 펼쳤던 입장에서 보자면 위의 주장들은 헛웃음 거리이며 자치론자들은 민족 반역자가 맞다. 자치론의 반대 대표주자인 안재홍은 일제는 장차 한반도를 홋카이도나 오키나와처럼 완전히 일본의 영토로 만들고, 더 나아가 한반도를 만주나 중국 대륙진출의 발판으로 삼으려 하고 있기 때문에 일제가 조선에 자치를 허용할 리 만무하다고 봤다. 더 나아가 안재홍은 총독부 측에서 한국인들의 민족운동 전선을 교란하기 위해 자치론자들을 부추기는 공작을 하고 있다고 보기까지 했다.[3]

더군다나 자치론자들의 주장이 무색한 이유는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독립이 안 될 줄 알았다며 후기로 갈수록 변절한 것에 대해 변명하는 이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말로 이들이 독립을 최종 목적으로 했는가에 대해서 논란이 많은 것이다. 독립을 최종 목적으로 해서 실력양성운동을 벌였다고 할 수 있는 인물은 개량주의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시기에는 단 한명도 없고, 근접한 시기에도 안창호 정도가 고작이기 때문이다.

독립을 최종목적으로 하였다는 이야기가 나온 것이 언제인가 하면, 당연히 독립된 이후에 자신의 행적을 변명한 것이다. 만일 독립이 최종 목적이었다는 부분이 논란이 되면 평가도 전혀 달라질 수 밖에 없다. 이들에 대한 평가가 독립은 어차피 요원해 보이니까 일본인에 동화되어서 잘 살아보자가 된다. 아메리카 원주민의 권리를 위해 노력한 엘리 파커 역시 "인디언이 언젠가 독립할 것이니 그 준비를 하자"가 아니라, "미국인으로 지내면서 차별받지 않도록 노력하자"가 되는 것이다. 이전의 조선인이 앞으로 평균적인 대일본제국 신민이 되도록 노력한 이들에 대한 평가는 어떻게 해서라도 긍정적으로 나오기는 어려울 것이다. 자치론자들에 대한 비교대상이 국가내 소수민족 옹호론이 아니라 비시 프랑스 등이 되는 것도 같은 맥락.

4.4. 해방 이후: 미군정과 이승만

해방 이후 38도선 이남을 통치하게 된 미군정은 행정의 안정화와 반공주의를 위해 친일파 관료들과 인사들을 대거 재기용했다.
제2조. 정부 등 전 공공사업 기관에 종사하는 유급 또는 무급 직원과 고용인, 그리고 기타 제반 중요한 사업에 종사하는 자는 별도의 명령이 있을 때까지 종래의 정상 기능과 업무를 수행할 것이며, 모든 기록 및 재산을 보호•보존하여야 한다.
미국 태평양 방면 육군 총사령부 맥아더 사령관 명의 포고 1호(1945.9.9.)

미군정은 38도선 이남의 일본군은 무장해제 시켰지만 일경으로 복무했던 조선인 경찰들은 거의 그대로 기용했으며 조선총독부 산하 관리들도 변함이 없었다.[4]

군정 경찰은 경무국이라는 이름으로 1945년 10월 21일에 창설됐다. 1946년 11월 기준으로 상위 계급의 간부가 된 군정 경찰의 82%에 달하는 사람들이 친일 경력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일본인이 훈련시킨 사람들을 계속 쓰는 일이 현명한 처사인지 의문을 제기합니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은 경찰로서의 자질을 갖춘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일본인을 위해서 훌륭한 업무를 수행했다면 우리를 위해서도 그럴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일본인이 훈련시킨 사람들을 경찰에서 몰아내는 일은 공정하지 못한 것입니다."[5]
이 이유에는 맥아더 사령부의 규정에도 나와 있듯이 "...공산주의에 대한 방벽을 구축하는 것"[6]이라는 목적이 제일 컸다. 일제는 일제강점기 내내 치안유지법 등으로 반공을 추구했으며, 친일파들이 해방 공간에서 반공의 1인자들이라는 건 분명한 사실이었고 이러한 조건은 미군정이 친일파들을 신뢰하기 충분한 것이었다. 미군은 어제의 동료이자 오늘의 적을 상대하기 위해 불과 한달 전까지 피 튀기게 싸우던 어제의 적의 하수인들을 고용한 것이다.

게다가 미군정은 해방된 조선에 대한 인식이 극히 부족했다. 항복 조인식을 끝낸 하지 중장이 제일 먼저 벌인 일은 항복문서 제5항 제1호를 통해 총독부의 존속과 관료들의 유임을 결정한 일이었다. 하지는 미군정 초기부터 기자들에게 '나에게 필요한 지식을 주는 사람은 일본인 뿐'이라고 공공연하게 말하고 다녔다. 거기에 더해 일본인을 제외한 한국인을 '준 우호적' 또는 '해방된 국민'으로 대우하라는 맥아더와 스틸웰 장군의 조언도 무시하고 휘하 장교들에게 한국인을 '준 적국인'으로 취급하라고 지시하는 어이없는 모습을 보일 정도였다. 하지뿐만 아니라 그의 정치 고문이었던 랭던은 한국인에게 분열, 아첨, 과도한 이기주의, 강력한 대립, 아량 부족 등이 있다며 혹평을 해댔다. 이러한 한민족에 대한 왜곡된 시선은 일본의 탓이 컸는데 일본군 조선군사령부가 패전 후 오키나와의 미 24군단에 한반도 상황을 타전하면서 남한 사회가 공산주의 세력에 물들어있다거나, 치안 질서가 문란할 대로 문란해져 있다고 왜곡했기 때문이다.[7] 이런 왜곡된 인식 속에서 미군정이 믿을 만한 건 일본인에 가장 가까운 친일파들이었다.
"조금만 불똥이 튀어도 폭발할 것 같은 화약고, 이것이 남한의 현재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한가지 고무적인 현상은 높은 교육수준을 가진 수백 명의 보수주의자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비록 이들 대부분이 일제에 협력하였지만 이러한 오명은 곧 사라질 것이다. 이들은 서구식 민주주의를 원하고 있으며 가장 큰 그룹이 한민당이다."
미군정 정치 고문 베닝호프(H.M.benning-hoff)의 초기 보고서[8]
미군정은 행정 인력뿐만 아니라 자신들에게 맞는 정당 세력을 원했고 그런 정당이 있었으니 바로 한국민주당이었다. 한국민주당은 초기에 송진우를 비롯해서 흥사단, 동아일보 계열, 호남지역 정치세력, 심지어 사회주의 우파 세력 등 비교적 다양한 세력을 모은 정당이었으나 1945년 12월 밀 송진우가 암살당하자, 김성수 등 친일 인사들을 중심으로 재편되게 되었다. 거기다가 1946년 10월 좌우합작운동을 두고 사회주의 우파세력이 떨어져 나가면서 더욱 친일적인 성향을 띄게 되었다. 지금 한국인이 볼 땐 한민당의 성격 변화는 한국사의 불행이었지만 당시 미군정에겐 입맛에 더욱 좋게 된 것이었다. 미군정은 한민당을 중심으로 1948년 정부수립 이전까지 남조선과도입법의원과 한국교육위원회 등 정치 조력을 위한 각종 조직에 친일 인력을 기용했다.

1947년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은 '민족반역자•부일협력자•전범•간상배에 대한 특별법'을 만들었다.[9] 그러나 미군정은 이 법을 통과시킬 경우 친일파들이 대거 잘려나가게 될 것임을 알고 있었고 인준을 거부했다.

1948년 5.10 총선거와 제헌국회를 거쳐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됐다. 이어서 8월에 헌법 101조를 바탕으로 국회에 특별위원회가 구성되었고 9월 반민족 행위 처벌법이 통과되어 친일반민족행위자를 청산하려는 시도로 10월에 반민특위가 만들어졌다.

반민특위는 범국민적 호응을 받으며 1949년 1월부터 활동을 시작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친일 세력, 특히 경찰들이 거세게 반발했는데, 노덕술 등은 아예 반민특위의 고위직에 대한 암살을 계획했다. 암살 대상 중에는 무려 대법원장이었던 김병로, 국회의장 신익희, 검찰총장 권승렬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눈에 뵈는 게 없었던 거다[10] 그러나 이 암살 시도는 사전에 걸리는 바람에 이루어지지 못했다.

반민특위가 활동하자, 한민당 등 친일 세력을 기반으로 하던 이승만 역시 심기가 불편할 수밖에 없었고 담화를 내면서 친일파 청산보다 반공이 우선이라며 반민특위의 활동에 제약을 걸기 시작했다. 당연히 반민특위는 반발했으며 대법원장 김병로는 반민특위의 활동이 정당하다는 담화를 발표하며 맞대응했다. 이승만은 계속 반민특위를 방해하는 담화를 발표하다가 반민법 개정안을 내며 반민특위를 없애려 했으나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되지 않았다.

조바심이 난 이승만 정부와 경찰은 국회 프락치 사건을 일으켜 반민특위를 지지하던 국회의원들을 간첩으로 몰아버리고 아예 경찰들이 반민특위의 사무실을 습격하여 직원을 연행하는 등 극단적인 방법을 서슴치 않았다.[11] 이승만 정부는 마지막으로 반민법의 시효를 1950년 6월에서 1949년 8월로 단축시키는 개정법을 통과시키기에 이르렀다.

결과적으로 반민특위의 활동은 682건의 친일행위를 조사하는데 그쳤으며 체포 305명, 미체포 173명, 자수 61명, 559명 특별 검찰 송치, 221명 기소에 기소된 자 가운데 특별재판부에서 실형을 받은 사람은 사형 1명 무기징역 1명을 포함해 이광수, 최남선, 최린 등 12명 밖에 없었다. 그 외에 공민권 정지 18명, 무죄 6명, 형 면죄 2명이 있었다. 그마저도 실제 사형 집행은 1명도 없었고 대부분 감형이나 형 집행 정지로 풀려났다.[12]

그렇게 반민특위는 이승만과 경찰 등 정부의 직접 방해로 인해 해체되고 가장 적시에 할 수 있었던 친일파 청산은 허망하게 막을 내렸다. 이로 인해 이승만 정권의 정통성에 취약성이 생긴 것은 물론이다.[13]

이상으로 내용들을 정리하면 용이한 행정과 냉전에 따른 반공 논리를 위해 미군정은 친일파들을 선택했으며, 이승만은 자신의 권력욕을 위해 친일파를 비호하였고 이 때문에 대한민국 역사가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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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이데올로기와 권력 외에도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이 해방 이후에도 버젓히 활동할 수 있었던 것에는 앞서 베닝호프의 보고서에도 언급되었듯이 당시 한민족으로서 고등교육을 받은 계층이 매우 적었다는 현실적 이유도 있었다. 일제 강점기 당시 제도권 교육은 일제가 완전히 통제하고 있었고, 그러한 교육의 기회 자체도 매우 한정적으로 주어졌기 때문에 당시 일본과 한반도 내 제도권 교육 체제 하에서 고등교육을 받기 위해선 싫어도 표면적으로라도 친일적 의사를 보이거나, 실력 그 자체가 아주 뛰어나야 했다. 해방 직후 한국의 문맹률이 무려 78%에 달했던 만큼 국가 운영에 필요한 고등 인력이 극히 드문 마당에 고등 인력들도 출세를 위해 친일을 해야만 했으니 미군정 때 등용된 사람들 중 친일 인사가 많았던 것은 결코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14]

한반도 이외 지역의 대표적인 고등교육 수혜층은 중국이나 소련, 미국, 영국 등지에 있었는데, 소련 내에서 고등교육을 받고 정치적 입지를 다진 인물들은 자본주의를 표방하는 남한 지역에서 등용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중국이나 미국에서 교육받은 인재들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인물들이거나, 이승만과는 정파를 달리하는 세력이었기에 역시 등용되기 힘들었다. 임시정부에 있으면서 삼민주의를 제창한 조소앙이라거나 한국독립군 총사령관이었던 지청천, 임시정부의 초대 대의원에서부터 국무원 비서실장과 의정원 부의장까지 겸임했던 신익희, 일본군에 징집되었다가 탈출하여 광복군이 되고 나중에 고려대학교 교수 및 총장까지 역임한 김준엽 등은 일본의 교육을 받았으면서도 중국 영내에서 독립운동에 투신했고 황포군관학교를 나온 김원봉, 스탠퍼드 로스쿨 법학 박사까지 따고 OSS의 훈련까지 받은 유일한 등 무장독립운동세력도 사상으로보나 지식으로보나 일제강점기 내의 조선총독부의 조선인 하급 관리들이나 친일 지식인들 이상으로 뛰어난 인재들이었다. 일각에서는 이런 인재들이 총독부 산하 관리들에 비해 행정실무 능력이 한참 뒤떨어졌다고 주장하는데 임시정부와 군대 운영, 미국에서 기업까지 성공한 이들이 행정 실무에서 모자랐다는 말은 말이 되지 않는다. 단지 임시정부 출신들과 미국에서 귀국한 독립운동가들은 머릿수에서 친일파들에 비해 부족했고 미군정과 이승만이라는 권력층의 선택과 경쟁에서 밀려난 것이다.

건국준비위원회 역시 각지에 지부를 설치하고 친일파 세력을 누르고 잠깐이나마 행정 실무를 담당한 세력이었다. 중앙 조직과 강령을 정비하고 지방 145 곳의 치안과 행정을 담당했던 건준위는 내부의 분열이 없었고 미군정이 실체를 인정했더라면 친일 세력을 대체할 상당한 행정 집단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남한에서는 미군정청이 세워지자마자 부정당하여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북한에서는 인민위원회가 소련군을 대신하여 자치를 하다가[15] 11월 중순부터 북조선 5도 행정국이 설치되어 건준위와는 무관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탁 통치가 무산되고 좌우익이 서로 대립하는 상황에서 행정 기구를 운영하고 정책을 입안할 계층은 일제 강점기 당시 식민지 체제 하에서 중등교육 이상[16]을 받고 은행 등의 경제기구나 총독부, 법원 등과 같은 관청, 군경 기관 등에서 실무 경험을 축적한 친일파들로 국한될 수 밖에 없었다. 이들이 해방 공간의 기득권 세력으로 자리잡은 것은 문제 상황이긴 하나 이들 모두를 쳐낼 경우 미군정청의 업무가 마비된다는 심각한 문제점이 있었다.

그러나 이 때문에 일제 강점기에는 민족을 팔아먹었던 자들이 해방이 되고 나자 아무 일 없었단 듯이 그대로 돌아와 민족의 지배자 노릇을 했다는 것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문제점이다. 당시 국민들로서는 환장할 노릇이었다. 대구 10.1 사건제주 4.3 사건, 여순사건은 모두 친일경찰의 일제강점기 때와 다름없는 사고 방식과 행위가 결합되어 일어났거나, 그 안에서 경찰의 피해가 커진 사례들이다. 친일 세력이 청산되었더라면 이러한 일들이 없었거나 최소한 줄었을 수 있었다.

동족을 고문하고 탄압한 친일파들은 미군정이승만제1공화국의 요직을 두루 거쳤으며, 특히 친일 경찰의 경우 노덕술, 이정용 등이 6.25 전쟁 전후의 국민 탄압과 민간인 학살에 앞장서 훈장을 받았다. 간도특설대 출신인 백선엽 등도 대표적인 인물이다. 박정희[17] 정부에서의 박흥식 등이 한일협정 추진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포상을 받기도 했다. 이들은 당시 밀어닥치던 매카시즘의 광풍으로 반민족행위자에서 반공 투사, 구국의 영웅으로 거듭났다.

친일반민족행위자 척결 문제에서 한가지 특이점은 해방 직후 반민특위가 이승만 정권의 비호로 인해 정작 힘과 재력을 가진 친일반민족행위자는 잘 건드리지 못하고, 식민지 시기 고등교육을 받은 친일 예술가나 학자들을 잡아 가뒀다는 점이다. 사실 이들은 유력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이 교육을 출세의 수단으로 삼았던 것과는 달리 순수 학문을 지향하며 일제 제도권 교육을 따랐고, 상대적으로 열악한 환경에서 교육과 학문에 종사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을 비호해 줄 세력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반민특위의 조사를 그대로 받게 되었고, 유력자는 조사와 처벌을 제대로 받지 않은 데 비해 자신들은 고초를 겪는다며 당시 체제에 대한 비관을 갖게 된다. 실제로 리승기, 채희국[18], 계응상[19]반민특위에 불려가 상당한 고초를 겪었고, 당시 반민특위와 대한민국 정부에 대한 강한 반감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북한 정권 차원에서 이들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데려갔고 이들은 북한의 초기 학계 정립에 지대한 기여를 했다. 이러한 초기 지식인들의 이탈[20]한국전쟁 직후 남한은 20년 가까이 학문의 질적 저하를 겪었고, 학문의 펀더멘탈 측면은 70년대 중반에 가서야 어느 정도 닦이게 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들의 친일 행위가 묵인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이병도와 같이 남한 내에 남았던 친일 예술가, 학자들도 상당수 있었다. 이들은 제대로 처벌이 되기는커녕 여전히 학계에 중진 인사로 활약했기 때문에 제법 일제 치하에 받았던 교육과 성과들을 바탕으로 남한의 학계들[21]을 성립했다. 그런 학계들이 교정과 비판을 거치며 지금에 이른 것이다.

4.5. 6.25 전쟁과 몰락, 재기 시도

그러나 해방 이후 소극적 처벌로 넘어가던 친일파들도 냉전이라는 거대한 시대의 흐름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당대 친일파들은 토지를 기반으로 한 지주 엘리트 출신 세력들이 숫자상 다수를 차지하였는데 해방 이후 이승만이 민심을 얻기 위해 토지 유상 분배 같은 자영농 육성 정책을 펼치고[22] 이후 6.25 전쟁으로 온 국토가 전쟁터가 되고 역사 이래 유래가 없는 인구 이동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지주 계열 친일파들의 물적 재산 상당수는 전쟁 중에 불타버리고 인적 관계 커넥션은 기존 사회가 붕괴되면서 새로 맺어야 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심지어 북한군이나 빨치산 게릴라에 의해 이들 계층에 대한 조직적인 납치, 살인까지 자행되면서 낙동강 전선 이남으로 피난하지 못한 지역 토호 계열의 친일파는 이 시기 사실상 몰락하게 되고 지식인, 예술가 계열 중 살아남은 일부도 기존의 위세를 상실하였다.

매국노 일가의 말로도 비슷하여 해방 후에도 일제강점기 때와 같은 권세를 누린 경우도 거의 없다시피하고, 그 극소수조차 독립운동에 참여하거나[23] 국가 유지에 필요한 인력으로 일한 적이 있는 경우[24][25]에 국한되어 있으며, 나머지 매국노 후손들은 대부분 해외로 이주하거나 나름대로의 유력 인사가 된다고 해도 증손대 이후가 되어야 가능할 정도로 완벽하게 몰락했다.[26]

조선귀족 가문 대다수도 해방 전 이미 재산을 탕진했고, 1930년대까지 친일 재산을 유지한 친일파들도 10명 남짓이며,(출처[27]) 해방 이후 기득권을 유지한 조선귀족 집안 역시 민병석 일가[28]민영휘 일가,[29] 이해승 일가[30] 정도를 제외하면[31] 전무하다.[32][33] 상기한 기사에서도 후손에게 재산을 넘겨준 친일파들은 정계에서 활동하거나 귀족 출신이기보다는 상업에 종사하거나 사회단체에서 활동한 인물들이 많은 편이라고 언급되었다.

이후 이들의 빈 자리는 경제성장기의 산업화 엘리트들과 민주화 운동 세력 같은 신흥 세력이 차지하게 되었고 살아남은 소수의 친일파들은 이들 신흥 엘리트 집단과 인맥관계를 맺어 재기를 노력하는 시도가 있었다.[34] 교육을 통해 민족주의가 다시 우세해지면서 이들은 표면적으로는 이승만 정권 초기의 '친일 출신 반공 = 애국자'라는 공식의 위세를 가지지는 못했고[35] 친일 행태를 숨긴 채 다른 분야의 업적으로 애국자라는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일제 시기에 활동하던 친일파들이 전쟁 후에도 한국의 주류 엘리트 세력 구성에서 어느 정도 유의미한 지분을 가지던 것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인 이승만 정부와 장면 내각, 박정희정부 정도까지며 한국 전쟁의 여파와 급격한 공업화와 경제발전 등 극적으로 변화하는 시대 속에 자본가, 기업가, 미국 유학파 지식인 등 새로 떠오르는 엘리트 집단에 빠르게 밀려났고, 지역유지형 친일파들 역시 도시화 및 이촌향도 현상, 새마을운동 등 농촌 사회의 급격한 변화 때문에 기존의 영향력의 기반을 거의 상실했다. 그 이후로 이들은 나이를 이기지 못하고 사망하거나 그 자손과 함께 은퇴하여 지역 유지 이상을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5. 해외의 친일반민족행위자

5.1. 미국의 친일반민족행위자

미국 정치가였던 더럼 스티븐스가 남한과 북한 모두 같은 입장에서 본다면 확실한 대표적 친일혐한혐중행위자다. 그는 미국 현지에서 한국인들은 일본의 지배를 받은 것에 감사해야 하며 은덕을 베풀 줄 알아야 한다는 망언을 하여 재미 한인사회와 국내 지성인들의 비난을 받아왔다가, 1908년 재미 교포 출신 독립운동가 전명운, 장인환에게 저격당해서 사망했다.

1890년~1900년대 무렵 러시아 제국의 '남하정책'으로 만주를 비롯한 극동아시아 지역에 관심을 가지자, 미국과 영국은 '러시아 제국에 견제하기 위해 일본 제국을 키워줘야 한다.'는 외교 정책을 나아갔었고, 이는 1920년대 워싱턴 회의 체제까지만 해도 미국은 일본과 우호적인 관계에 있었다. 하지만, 1931년 만주 사변중일 전쟁을 전후로 미국은 일본에 강한 반일여론으로 전환되었고 결국 미국은 중국[36]과 우호적 관계를 확실히 맺고 혈맹 관계까지 맺게 된다.

미국 본토와 일본 본토가 멀리 떨어진 탓에 거의 없다시피 할 정도로 적지만 미국에서도 단순한 친일이 아닌 친일 부역자가 있었다. 존 세머 판스워스라는 해군 소령은 돈을 받고 해군 기밀을 일본에 유출한 혐의로 1936년 체포되었고 11년간 교도소에서 복역했다. 아나스타시 본샤츠키윌리엄 더들리 펠리같은 일부 극우 인사들은 진주만 공습을 일으킨 일본 제국에 온정적인 주장을 하다 간첩으로 찍혀 법적 불이익을 받기도 했다.

5.2. 중국의 친일반민족행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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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을 가장 엄격하게 처벌했다. 더불어 같은 혐일 국가인 북한과 맞먹는 수준.

물론 중국도 친일반민족행위자가 있었다. 대표적 친일반민족행위자가 왕징웨이라고 기술하는데, 그가 단순히 권력을 위해 나라 팔아먹은 친일반민족행위자라고 표현하기는 어렵다.[37] 물론 결과적으로 그가 일본에 도움을 준 것은 비판받아야 하는 사실이다. 아무튼 만주사변, 중일전쟁,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일본에 협력한 중국인들이 있었으며, 그 범위가 넓어서 단순히 생계형 친일반민족행위자에서 소위 매국노, 이중간첩까지 광범위하게 그 수가 존재하였다.

그리고 중국이 일본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뒤 제2차 세계 대전의 승전국이 되었고, 중국국민당 장제스중국공산당 마오쩌둥은 모든 중국인들로 하여금 모든 일본인들을 매우 엄격하게 처벌하고 가차없이 사형을 때리라고 직접 헌법으로 제정했고 일본인들을 처벌하지 않으면 중국인들에게도 연대책임으로 죄를 물었다. 물론 중국인들이 일본인들을 상대로 이덕보원(덕으로 원한을 갚는다.)을 한 것은 맞지만, '''모든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 절대로 아니다. 그리고 이덕보원은 중국인들에게도 적용되었다. 그리고 정반대로 일본인들도 중국인들이 주최한 인민재판에 의해서 엄청 많이 처벌받고 사형당하고 그랬다. 단순히 생계형 친일을 한 중국인들과 일본인들에게만 이덕보원의 개념으로 용서를 해 주고 심지어는 중국 국적으로 편입시켜서 중국인으로 대우를 해 줬지, 전쟁범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중국인들을 마구 학대한 중국인들과 일본인들에게는 가차없었다.

5.3. 타국의 과거사 청산과 비교해볼 점

서구권의 과거사 청산은 대체적으로 추축국 협력자들에 대해 공소시효 자체를 두지 않는다.[38] 서구권의 과거사 청산은 크게 두가지로 나뉜다.

식민지배 피해국으로서의 친일반민족행위자 문제와 군사독재 같은 대한민국의 어두운 과거사를 인정하는 문제는 군부독재세력과 친일세력에 겹치는 부분이 많아 직접적인 연결성이 있는 주제이고 부정주의 움직임이 양측 일맥상통하기 때문에 둘 다의 예를 들어보도록 하겠다.

1. 추축국의 범죄적인 과거사에 대한 정당화/부정 움직임과 이를 처벌하는 법률
2. 추축국에 협력했던 자들에 대한 처벌.

1번의 경우는 서구권의 많은 나라에서 홀로코스트 같은 나치 독일의 과거사를 부정하거나 정당화하는 행위는 공민권 박탈이나 심한 나라에서는 10년 이상의 징역형에 해당하는 중죄로 단죄된다. 독일의 경우 나치의 과거사를 철저히 청산한 것으로 유명하며 심지어는 헌법으로 집회/결사의 자유나 표현의 자유 위에 나치 독일에 대한 청산이 서 있다.

나치 독일처럼 극단적인 주장을 가진 집단이 득세하는 일을 막기 위해, 비헌법적인 정강을 갖고 있다 판단되는 정당을 나라에서 합법적으로 해산을 명령해 까부술 수 있다. 민주주의가 보장하는 자유의 허점을 파고들어 권력을 잡은 것이 나치 독일인 것을 누구보다 아프게 피로 겪은 나라이기 때문. 한마디로, 민주주의의 대원칙은 극우들이 극단적인 주장을 할 자유도 어쩔 수 없이 보장하지만 극우파가 그 민주주의를 활용해 자기의 주의주장을 펼치고 권력을 잡아버리기라도 한다면 그 반대의 경우는 전혀 보장되지 않는다. 그 반대의 경우도 꽤나 아이러니한데, 한국의 몇몇 언론은 군부독재 당시 언론의 자유를 탄압하는 권력에 충실히 복무하다가 민주정권이 성립되면서 언론의 자유가 실현되자 이제는 그 언론의 자유를 충실히 활용해서 '아니면 말고' 식 보도로 특정인을 매장한다거나, 편향되거나 잘못된 정치적 주장을 퍼트리는 용도로 악용하며 맛나게 자유를 향유하고 있다.

2번의 경우, 대국이자 문명국을 자부하고 독일을 은연중에 야만인, 훈족으로 묘사하며 깔보던 프랑스에서는 그야말로 독일에게 나라를 빼앗겼던 자괴감과 부끄러움은 대단한 것이었다. 이는 독일이 나라를 뺏아가는 것을 도운 사람에 대한 분노로 표출되었는데, "초법적 척결"에 의해 수천여 명이 재판도 없이 즉결처형을 당했으며 "여성 협력자"로 불리는 여자 협력자들은 죽음은 면했지만 머리를 박박 깎이고 공개적으로 린치를 당했다.[39]밴드 오브 브라더스》에도 해방 후 길거리로 끌려나와 바리깡으로 머리를 깎이는 여자들이 묘사된다.[40] 그런데 이 장면은 프랑스가 아니라 네덜란드고, 나치가 워낙 학을 뗀 나머지 대부분의 유럽국가에서도 상황은 비슷했다.

이 대독협력자 청산을 프랑스어로는 "에퓌라시옹 레갈(Épuration légale)"이라고 하는데[41], 드골 정부의 공식 재판에서는 총 7,037명이 사형 판결을 받았고, 이 중에서 791명에게 실제 사형이 집행되었다. 이를 처벌하기 위해서 공민재판부(Chambre Civique)라는 기관을 설치, 국민부적격죄(Indignité nationale)라는 것으로 9만여 명이 징역이나 공민권 박탈 등의 처벌을 받는 등 조국을 팔아 일신의 출세와 번영을 도모한 대가는 상당히 엄혹했다.[42] 그러므로 서양의 청산이 매우 철저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친일반민족행위자 청산은 애시당초 악질 친일반민족행위자를 청산하는 것이지 모든 친일반민족행위자를 청산하는게 아니라는 점.

몇몇 과학자 같은 정작 나치 독일에 협력했던 여러 협력자들은 매우 유용한 사람들이었고 이들은 그대로 점령국 정부에 기용되어서 활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페이퍼클립 작전 등이 대표적. 미국의 저명한 사학자 마크 마조워는 나치에 저항한 레지스탕스들이 어제까지만 해도 나치와 협력해 자기를 토벌하려던 공무원들이 이젠 신정부에 합류하여 자신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발악적인 저항을 했다고 저술하고 있다. 그리스벨기에에선 나치 협력자들을 그대로 기용한 정부에 저항하는 소요사태가 벌어졌지만 곧 진압되었다. 한국에서 나치 협력자 청산으로 유명한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각국에서 죽은 사람들은 정말로 나치에 협조해서 친독파 짓을 한 사람보단 독일 군인과 사귄 여자, 독일군에게 빵을 팔던 장사꾼 등 정말로 자기를 방어할 힘도 없는 허약한 사람들에게 주를 이루었고 정당한 재판없는 학살이 벌어졌다. 프랑스 정부 공식 조사로는 그 과정에서 사망한 사람만 1만여 명으로 추산되었다.

구체적인 레지스탕스 대원이 좋아하던 여자와 결혼했단 이유로 레지스탕스들에게 원한을 사서 나치로 몰려서 처형당한 애꿎은 남자들도 많았다. 그것도 단순한 학살이 아니라 성폭행, 화형, 참수, 린치가 동원된 참혹하기 이를 때 없는 일이었다고 전후 자료들은 기록하고 있다. 이 정도면 사적제재의 폐해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으로, 이 부분은 훌륭한 청산 결과로 볼 게 아나라 한국전쟁 당시의 학살 등과 더불어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일에 가깝다. 최원식 교수처럼 프랑스 모델을 실패한 모델로 보는 학자도 있다. 이용우 교수의 견해. 프랑스 해방 후 부역자들에 대한 신속한 처벌을 요구하던 알베르 카뮈는 사적제재와 복수심이 들끓는 청산 행태에 대해 비판적인 스탠스로 돌아섰으며[43], 심지어 레지스탕스 내에서도 숙청 과정에 대한 문제 제기가 나타날 정도였다. 결국 드골은 부랴부랴 앞으로 나치 부역자들을 정부에서 처벌하겠다고 이 광란을 진정시켜야 했다. 물론 재판 대상 자체가 필리프 페탱과 같은 적극 협력자 처벌용도였기에 에서 나치 군인에게 몸을 팔았거나 잠자리를 제공했다는 이유로 처벌받은 사람은 당연히 없었다. 그러나 재판의 공정성 문제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정당한 재판 권리를 침해하지 않았느냐 하는 의문도 분명히 있으며, 계층에 따라 무죄방면율에 차이가 있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패탱의 죄의 경중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은데, 패탱이 순교자가 될 것을 꺼린 드골의 결정에 따라 패탱은 무기징역형에 처해졌다. 비시 프랑스 요인 중 사형 집행이 된 사람은 총리 피에르 라발뿐인데 이 자는 그냥 나치부역자가 아니라 반인륜 범죄자였고 매국 행위도 매우 적극적으로 했기에 사형에 처해진 것이다. 이외 사형이 집행된 나머지 나치 부역자들은 대부분 반인륜 범죄에 가담한 자들이었다.

그나마 나치와 어느 정도 연관이 있던 사람들만 죽은 것도 아니고 좌익 레지스탕스가 우익 레지스탕스를 반동으로 나치 부역자로 죽이거나 우익 레지스탕스가 좌익 레지스탕스를 나치 부역자로 몰아 죽이는 끔찍한 참상도 벌어졌다. 이념 대립으로 독립군끼리 서로를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몰아 죽인 격. 마치 제주 4.3사건한국전쟁 당시 반동분자와 빨갱이를 때려잡던 과정에서 민간인들을 학살하는 모습과 다를 바 없었다.

일각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후 서구의 나치 청산과 우리의 친일 청산을 비교하기는 어렵다고 하며 대신 제국주의 시대 때 식민지였던 다른 아시아, 아프리카 국가, 아일랜드를 비롯한 몆몆 유럽 국가들의 사례를 제시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식민지배를 다른 나라의 식민지배와 동일시하기도 어렵다. 일단 베트남미얀마는 대략 90년, 60년 이상[44], 대만은 50년 이상[45], 그리고 인도인도네시아, 수많은 아프리카중동의 여러 국가들, 유럽의 아일랜드, 그리스, 불가리아, 세르비아, 루마니아, 폴란드, 체코, 몰타, 보스니아, 핀란드 같은 나라들의 경우는 족히 100년 이상 식민지배를 받은 사례가 대부분이다. 우리나라는 기껏해야 35년, 그것도 20세기 들어서 식민지배가 된 것으로 식민지였던 다른 외국 국가들에 비해 식민지배 기간이 짧다고 할 수 있다. 거기에 더해서, 아프리카나 중동 서남아시아 국가들 같은 경우는 식민지 시대 이전에도 제대로 된 민족이나 국가적 가치관 형성이 미비했으며, 식민지 시대 때 영국, 프랑스 등 서구 열강들에 의해 민족,언어,종교,문화,역사등 전부 다 무시된체로 식민 종주국들의 편리에 맞게 일방적으로 국경선이 그려졌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식민지 시기에 서구 열강들이 남기고 간 식민 유산들을 전부 내재한 상태에서 독립하는 등 급조적으로 독립된 신생 국가들이 많았으며[46] 인도와 인도네시아는 영국, 네덜란드의 식민지가 되기 전까지 단일국가로 통일된 전례가 없었다.[47] 반면 우리나라는 일제가 점령하기 이전부터 이미 고려, 조선으로 대표되는 단일 공동체 의식이 확고하게 뿌리내리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대로라면 프랑스, 폴란드 등 2차 세계대전 중 추축국에 점령당한 국가들 및 이들 국가들에서의 전후 처리와의 비교는 더더욱 어렵다. 우선 2차 세계대전 발발과 동시에 추축국에 점령당한 이들 국가들과는 달리 한반도는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한참 전인 1910년에 일제의 지배하에 놓였으며, 그 당시에나 전후 처리 과정에서나 전시 피점령국, 승전국(연합국) 지위를 국제적으로 인정받지 못했으며,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도 연합국이 아닌 "특별 상태국"으로 규정되었다. 물론 한일병합조약의 적법성 여부에 대한 논란이 있지만 이를 차치하고서라도 한반도가 2차 대전 당시에 점령 당한 국가가 아니라 그 이전에 이미 식민지화 됐으며, 어떤 의미로든 전시 피점령국들과는 무시할 수 없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는 점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실제로 비시 프랑스의 존속 기간은 4년이 조금 넘는 수준, 독소 폴란드 점령 이후 폴란드 임시 정부가 들어서기까지는 5년 가량으로, 한반도 식민지배 기간인 35년보다는 훨씬 짧으며, 추축국의 점령 역시 레지스탕스, 빨치산, 민중 봉기 등으로 인해 일제의 한반도 통치보다 불안정했던 반면, 일제는 남한 대토벌 작전 등의 과정을 통해 무장독립운동의 씨를 말리고 식민지 체제를 안정적으로 시작했다. 이는 중국과 비교해도 마찬가지로, 중일전쟁은 8년동안 지속되었고, 만주사변으로 거슬러 올라가도 14년으로, 일본의 중국 침략은 일본의 한반도 식민 지배보다 더 짧게 존속되었을 뿐만 아니라 일제는 중국 영토 전체를 점령하지도 못했고, 만주를 제외하면 식민지 체제를 이식하지도 못했다. 이렇게 일본의 한반도 식민지 지배는 전시 피점령국들에 대한 지배보다 상대적으로 더 긴 시간 동안 지속되었다. 따라서 전시 피점령 상태에 놓였던 국가들과 비교하면 당연히 식민지 체제와 그 영향은 더 깊고 광범위한 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해방 이후 어느 선까지를 점령 세력에 대한 "부역"으로 간주할지, 이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될지에 대한 논란 역시 복잡할 수 밖에 없다. 가령 최린, 여운홍 등 독립운동에 가담했다가 후에 친일로 변절한 인물들이나,[48] 장지연처럼 항일-친일-재항일 등 복잡한 행보를 보인 인물들[49]을 따지면 더욱 복잡해진다. 여기에 더해 가족 중 친일 경력이 있는 인물들까지 따지면 더욱 복잡해 질 수 밗에 없다. 실제로 여운형여운홍 등 한 가족 내에서도 일관되게 독립운동을 한 인물이 있는 반면 친일 경력이 있는 인물도 있을 만큼 일제 식민지 지배의 영향은 깊고 복잡할 수 밖에 없었다. 물론 아프리카 및 아시아의 다른 피식민 국가들과 달리 한국은 일제의 식민지배 이전부터 민족 정체성 및 민족국가로서의 국가관 등이 확고했으며, 독립된 실체가 있는 국가로서 존속해온 기간 역시 이들보다 더 길기에 식민지 체제에 대한 협력 및 협력자들의 처리에 있어서 당위적 기준 역시 더 분명하고 확실할 수 밖에 없고, 식민지 지배에 대한 인식 역시 압도적으로 부정적이나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독립 후 식민지 체제의 잔재 청산에 있어서는 더 복잡할 수도 있으며[50], 2차대전 중 일시적으로 피점령 상태에 놓인 국가들의 추축국 부역자들 청산보다는 당연히 복잡한 양상을 띌 수 밖에 없다.[51]

5.3.1. 북한은 친일반민족행위자를 제대로 청산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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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중국 & 프랑스보다는 조금 더 청산 못 했고 대한민국보다 친일반민족행위자를 조금 더 청산했다고 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악질 친일경찰들이었던 노덕술, 최운하를 비롯해 관동군 헌병 출신 정일권, 김창룡 등이 이북 지역에서 신변의 위협받아 월남한 것을 비롯해 매일신보 부사장과 만주국 폴란드 주재영사관을 지낸 박석윤 등을 꼽을 수 있다.

이 수치를 근거로 북한측이나 남한 일각에서는 친일반민족행위자 청산이 상대적으로 부진했던 남한을 비판하였으며, 이는 더 극단적인 경우에는 대한민국은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이 장악한, 한민족의 정통성조차 없는 국가로 폄하하는 진보세력과 주사파들의 주장 명분을 남기기도 하였다.

다만 북한이라고 모든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이 처벌받은 것은 아니며, 심지어 관료, 고위층에도 친일반민족행위자를 등용됐다는 증거는 차고 넘친다. 뿐만 아니라 지금 북한의 수장 김정은의 어머니 고용희는 일제강점기에 친일행위[52]로 부를 쌓은 사업가 고경택의 친딸로 북한에서는 알면서도 쉬쉬하는 분위기다. # 대표적으로 북한에서 초대 내각 인사 가운데 정준택의 경우 일제강점기 때 광산업자를 지냈던 사람이다. 북한에서 유일하게 '자본가' 출신이었던 이종만은 일제강점기 말기 대화숙을 비롯해 많은 친일단체에 관여했음에도 북한에서 최고인민회의 의원직을 지낸 것을 비롯해 애국렬사릉에 안장될 정도로 북한에서 거물급이라는 것과 '공훈배우'로 극존칭 받던 황철 같은 자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북한에서도 친일 행위자 가운데도 기술 관료나, 정책에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다고 판단된 자들 일부가 등용은 되었다고 보는 대목이다.[53]

한편, 이들 친일반민족행위자 세력들이 북한정권에서 '주도권'을 쥐고 그 의도대로 세상을 움직이거나, 문화적·정치적·경제적 헤게모니를 쥐고 있었는가에 대한 부분은 좀 더 검토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정권 성립 이후 김일성은 아예 인재풀의 씨를 말려버렸다고 해도 좋을만큼 유례없는 대규모의 숙청을 통해 자신의 세력 외의 거의 모든 세력을 말살했기 때문이다. 친일이고 반일이고 간에 김일성에게 충성을 맹세하지 않으면 죽여버렸기 때문에, 설사 살아남은 자들이라 해도 친일 성향을 드러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54]

북한에서 친일경력자들이 두드러지게 많은 쪽은 특히 문화, 예술, 연극, 문학계열에서 상당히 많이 나타나고 있다. 대표적인 사람이 심영, 문예봉, 황철, 최승희를 비롯해 <김일성 장군의 노래>라는 시를 지어 김일성에 갖다 바쳤던 시인 이찬 같은 경우. 그러므로 북한은 마치 친일반민족행위자 청정국가인 마냥 해석하는 것은 옳지 않다. 워낙 막장이라 친일반민족행위자들까지 같이 쓸려나갔을 뿐.

북한이탈주민 출신인 동아일보 주성하 기자는 대한민국은 북한보다 친일반민족행위자 청산이 부진했던 것은 빼도 박도 못하는 사실이라며, 북한의 친일반민족행위자 청산을 비판/폄하하는 것은 보수파들의 왜곡이라고 주장한다. 다만 이들이 6.25 전쟁 등으로 사회참여를 했다는 점을 들어 극단적인 친일반민족행위자 처단에는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다.

친일문제는 어디까지나 어느 정권의 '정통성'을 따지는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부정적 영향을 끼친 자들에 대한 문제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 자세한 내용은 친일반민족행위자/북한 문서 참고.

6. 평가

친일파 친일파 그러는데 친일파는 있어야 하죠. 일본이랑도 친하게 지내야 되잖아요. 친미파가 있듯이. 흔히 친일파라고 일컫는 나쁜 놈들을 친일파라고 불러주는 건 너무 착한 거예요.

그들은 '민족 반역자'라고 불러야 하죠.
한국사 강사 강민성
일단 친일 부역자 청산 문제는 오늘날 현재에도 한국 근현대사의 가장 큰 암종에 속한다. 정치 논리 앞에서 구렁이 담타듯이 넘어간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일례를 들어, 대구 10.1 사건과 같은 사건 같은 경우 일어난 것도 1차적인 원인은 '친일반민족행위자' 경찰이었다. 이들 친일 경찰 출신자들은 경찰로서 제대로 된 직분을 하기는 커녕 오히려 조작과 고문에 능했던 자들이 상당수였다. 1970~80년대 기자로서 높은 평가를 받았던 조갑제친일 경찰 출신들이 오늘날 대한민국 사회에서 가장 큰 부정적인 해악을 끼친 자들로 이들은 반드시 단죄를 해야 한다고 규정내렸을 정도. (조작과 고문의 기술자들. 1987년. 한길사 책 참고.) 이들 '집단'으로서의 친일세력들은 대부분 매우 부패하고, 당시 사람들에게 인식이 상당히 안 좋았다.[55] 비슷한 일이 서유럽 레지스탕스들에게도 일어났다는 것을 이미 앞서서 서술한 바가 있다.

일단 대한민국의 초기 내각은 독립운동가 출신이 많았지만 하부 조직에 일본에 복무한 사람들이 굉장히 많이 잔류했고 60~70%에 달하는 공무원들과 법관들이 이미 일제 치하에 복무했던 사람들이란 통계가 1960년대 언론에 의해 제시된 바가 있다. 과거 친일 경력이 있는 자들의 건국의 주역, 이어 6.25의 영웅들이 되었으니 이들의 문제를 지적하는 것은 대한민국 정체성 흔들기라는 문제로 흘러가버리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과거 부역자들을 국가 재건의 대의를 앞세워서 면죄부를 준 것은 서유럽도 마찬가지였지만 최소한 서유럽이 국민적인 동의를 얻어 진행한 것과 달리 대한민국에선 이승만의 반민특위 습격을 비롯한 편법적인 방법과 친일청산에 적극 앞장섰던 무소속 구락부의 제헌 국회의원들을 때려잡았던 국회 프락치 사건등으로 친일청산 노력은 물거품이 되면서 오히려 오늘날 뿌리 깊게 남은 문제가 되었다.

친일 전력이 있는 인물들이 6.25 전쟁에서 활약하면서 과거에 대한 속죄를 확실히 했다면 모를까, 이들은 그대로 군부 쿠데타의 주역이 되어 친일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 자체를 공산당의 "대한민국 정체성 흔들기"등의 반체제, 반정부적인 행동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래서 친일 문제는 지금도 해결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학계에서는 이러한 점에 대한 논란에 대해 지속성, 반복성, 적극성 등을 고려해 '진상규명'하는 식으로 과거사 청산방식으로 나아가고 있다. 또한 무리를 무릅쓰고 지금 하자니 직접적인 이해당사자들이 생존해 있기 때문에 '진상규명' 방식으로 나가는 것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종합해서, 개인의 안위와 평안을 위해서 동족을 배반하거나 적에게 협력하는 짓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에 대한 선례를 만들었어야 했지만, 이러한 매국 행위에 대해 비참한 말로를 보여주기는 커녕 그 이후에도 계속 호의호식하게 두어 귀감을 심어주지 못하였으니 후대에 누가 다시 그런 짓을 하길 주저하겠는가? 이것이 바로 국가차원에서 볼 때의 친일청산실패에 가장 큰 폐해이다.

7.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

본 항목에는 친일반민족행적이 기술된 김승학의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 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친일진상규명위) 중 포함되어 있는 인물을 다룬다.

친일 행적이 있긴 하나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보기 힘들거나 애매한 사람은 물음표로 표기한다. 되도록이면 물음표 표시가 된 자들은 골수 친일반민족행위자라는 판단이 어려우므로 신중히 중립적으로 생각할 것. 특히 정치적인 인물의 기재는 작성자마다 반달이 있을 수 있으니 정치 성향에 어울려서 편향적으로 서술하는 행동은 하지 않도록 하자.

또한 여기 들어간 자들 중에는 단순 친일부역자도 많다.[56] 이들은 조선이 망하고 한참 지난 뒤 부역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거나 아예 조선이 망한 후 태어난 게 보통이고, 그 목적도 독립운동가를 고문, 탄압한 노덕술이나 김덕기 같은 자들은 별로 없고,[57] 단순히 먹고 살기 위한 것이나, 일반적인 입신양명이나, 심지어 민족을 위해 친일을 해야 한다고 믿은 자들도 있었다. 이미 나라가 망한 상태에서 후에 일제에 부역한 이들을 매국노로 부르기에는 적절치 않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물론 일본을 위해 한민족에게 해를 끼친 것은 분명한 반민족 행위다.
범례
생계곤란으로 인해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된 경우나 사죄한 경우(취소선)[58]
비자발적으로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된 사람들(■)
친일파들 중에서도 악질적인 인물(볼드체)
친일파인지 아닌지 논란이 있는 사람들(?)

7.1. 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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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매국 행위자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정의)
6. 을사조약·한일합병조약 등[59] 국권을 침해한 조약을 체결 또는 조인하거나 이를 모의한 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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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진회 관계자 #===
===# 갑신정변/갑오개혁 인사 #===
===# 을미사변 가담자 #===
===# 왕실/외척 #===
===# 관료 #===
===# 직업형 친일인사 #===
===# 경찰 #===
===# 군인 #===
2019년 국가보훈처는 국립대전현충원 안장자 중 친일 이력이 있는 총 11명에게 안장정보상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등록하기 시작했고, 이는 2020년 사망한 백선엽이 안장될 때도 예외 없이 적용되었다. 2023년 7월 5일 후신인 국가보훈부 측은 위 안장자 12명의 안장자 정보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 이력을 떼내는 쪽으로 검토한다고 밝힌 후, 24일 백선엽부터 먼저 친일 기록을 안장자 정보에서 지웠다.

===# 그 외 #===
참고로, 반민족행위처벌법의 초기의 기준은 장교 뿐만 아니라 관공서의 말단 공무원까지 포함되었다. 너무 광범위하다는 이유로 축소되었고, 한민당이승만대한독립촉성국민회는 "범위가 너무 광범위하면 공포와 불안을 조성할 것"이라는 핑계로 계속 축소하였고, 결국 관련법안을 1951년에 폐지시켰다.

7.3. 주의할 점

주로 어르신들 사이에서 "일제강점기일본군에 입대한 사람은 다 친일파냐", "창씨개명한 사람은 다 친일파냐"는 소리가 나오는데, 이는 친일반민족행위자 선정 기준이 잘 알려지지 않아서 나온 오해이다. 친일반민족행위자 선정 기준은 지속성, 반복성, 적극성이기 때문.

민족문제연구소에 따르면 친일 단체에 몸담은 모든 이를 친일파로 규정하진 않는다고 한다. #[78] 반면 촉탁이나 고등관 아래의 하급관리·면장[79]·서기·순사·헌병 보조원 등 최말단의 협력자라 할지라도 뚜렷한 친일행적이 있으면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한다고 명기했다. #

또 '귀족, 일본육군사관학교만주군관학교 졸업 경력만으로도 친일파냐?'라고 하는데, 한일합방에 공은 세운 자에 한해 조선귀족이 된 것이고, 자발적으로 일본군이 되기 위해 일본육사, 만주군관학교에 간 사람만 친일파인 것이다.[80] 작위를 거부하거나, 한일합방으로 인해 자동으로 일본 육사로 넘어가는 바람에 일본 육사 출신이 되었고 이후 독립군에 투신한 사람은 친일파에서 예외이다.[81]

또한 역사를 잘 모르는 젊은이들이 이런 점만 가지고 애먼 사람들을 친일파로 몰아가는 글을 올려서 소동이 빚어지기도 했다. 이런 이들에 의해 오해를 받은 대표적인 유명인사로는 김수환 추기경이 있다. 한편, 친일반민족행위자 선정 기준이 잘 알려지지 않은 상황을 정치권에서 악용하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누구누구 아버지는 일제가 세운 은행의 은행원이었으니 친일파 자손이다라는 식인데, 애초에 저 명단에 아무나 오를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래서 친일적인 기관에 소속되었다 할지라도 주도적인 역할을 하지 않았다면 명단에 오르지는 않는다. 그래서 일제강점기에 잠시 관제 단체에 몸담았던 김순남은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오르지 않았고, 최근우는 일본의 조직에 가담하였으나, 독립군으로 정보를 빼돌리는 스파이 역할을 맡았기에 명단에서 지워졌다.

단지 일제 하에 일선 학교에서 교사하면서 일본어를 가르쳤다느니, 일제의 공기업에서 단순 근무만 했다느니, 현대로 치면 말단 9~7급정도의 공무원이나 경위~순경 수준의 경찰 일을 했다느니 정도만으로는 친일반민족행위자에 해당하지 않는다. 때문에 조선총독부에서 잠깐 공무원 일을 했던 이상조선은행에서 근무했던 구용서는 친일인명사전에 오르지 않았다. 공무원이나 경찰 중 친일반민족행위자의 기준은 (현대 기준으로 치면) 최소 4급 공무원 이상 정도 되는 고등문관에 해당하는 군수, 경감 이상의 고위 경찰 정도에 국한된다. 물론 판사, 검사 같은 고위급 법조인들도 친일반민족행위자에 포함된다. 이렇게 기준이 너무 엄격하고도 높아서 아무나 친일반민족행위자의 반열에 오를 수가 없었다. 당시 2천만 인구 중에서 극 소수만이 친일반민족행위자에 해당한다.

또한, 친일반민족행위자 연구가 아직 걸음마 단계라는 점도 잊어서는 안 된다. 민족주의 좌파 성향 역사학자 한홍구도 문제 제기 과정에서 편향성이 보이며, 단순 폭로 수준에 그치고 있다고 지적할 정도. 기사 따라서 후속 연구 과정에서 현재의 명단은 얼마든지 수정, 보완될 가능성이 있다.

진짜 비난 받아야 할 사람들은 과거 흑역사는 감추고 잘난 척을 하는 일부 높으신 분들이다. 앞서 언급한 한홍구 교수도 당시 언론의 친일은 어쩔 수 없었지만, 적어도 민족정론지라는 자랑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지적했다. 또한 함부로 집안 자랑을 하는 후손들 때문에 저런 사실이 까발려지는 경우도 있다.

===# 잘못 알려진 사례 #===
지금은 잊힌 황당한 루머 중에 싸이보아을사오적의 후예라는 루머가 있었다. 2000년대 초반에 기사로도 언급되었는데 그 근거라는 게 성이 박씨, 권씨라는 것이어서 당연히 진지하게 믿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보아의 경우에는 독도가 어느 나라 땅인지 모른다는 말을 했다는 루머성 기사도 존재했다. 하지만 아래 나온 명단은 정말로 진지하게 논란이 되었던 사례다. 당사자로서는 정말 억울할 일.

8. 여담

9. 관련 자료

9.1. 문헌

9.2. 영상매체

10. 관련 단체

11. 관련 연구가

12. 관련 문서


[1] 전에는 ...(중략) ... 개화당을 꾸짖는 자도 많이 있었으나, 개화가 이롭다는 것을 말하면 듣는 사람들도 감히 크게 반대하지 않았다. 그런데 정변을 겪은 뒤부터 조정과 민간에서 모두 "이른바 개화당이라고 하는 자들은 충의를 모르고 외국인과 연결하여 나라를 팔고 겨레를 배반하였다."라고 말하고 있다. - 《윤치호 일기[2] 참고로, 이광수의 경우 전시체제 기간 동안 가장 적극적이고, 매우 많은 친일문학, 기사, 칼럼, 담화 등 발표하고 다녔는데, 이 부분에 있어 압도적으로 1위다. 반민특위 보고서에서도 그를 광병적인 열렬 협력자로 규정했다.[3] 출처 : 한국사 연구회, 새로운 한국사 길잡이 제3판 한국사연구입문, 지식산업사, 초판 제11쇄 318쪽 참고[4] 출처 : 한영우, 다시찾는 우리역사, 경세원, 제2전면개정판 6쇄, 533쪽 참고.[5] 출처 : 김왕식, 1994, <미군정경찰의 정치적 위상>,{이화여자대학교 한국문화연구원}, 210~214쪽 참고[6] 출처 : E. Grant Meado, American Military Government in Korea(New York: Kings Crown Press, Columbia University 1951), p.52[7] 출처 : 김영택, 2009, <친일세력 미 청산의 배경과 원인>, <한국학논총> 31, 502~516, 524쪽 참고[8] 출처 : FRUS, 1945, VI, pp. 1049~53, 1059~61[9] 남조선과도입법의원에는 한민당 뿐만 아니라 좌우합작위원회도 포함되어 있었다.[10] 덤으로 노덕술은 이승만에게 토사구팽 당하고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한 후에도 정신을 못 차리고 1965년 서울에서 흥신소를 운영하며 서울지검 검사이던 함정호를 미행하다가 발각되어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여담으로 검사 미행 사건이 발각되며 당시까지 서울에 있던 불법 흥신소들이 줄줄이 발각되었다고 한다.[11] 오늘날로 치자면 피의자 신분으로 수사를 받고 있는 경찰이 부패 정권과 결탁하여 경찰이 국회가 승인한 특검 사무실을 습격하여 특검을 연행한 셈이다.[12] 출처 : 고등학교 한국 근현대사, 금성출판사, 2008.3.1 2쇄, 266쪽. / 고등학교 한국사, 금성출판사, 2018.3.1 제2판 4쇄, 372쪽[13] 친일세력을 비호함으로 좌익세력의 공격대상이 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고, 민족해방운동전선에 참가했던 우익세력의 지지도 받지 못했다. <강만길, 고쳐 쓴 한국현대사, 창비, 2014.3.3 2판 13쇄, 276쪽>[14] 사실 식민지 부역자들을 독립 후에도 등용하는 건 흔한 레퍼토리이다. 한국은 지도자의 권력욕 때문에 악질 부역자들까지 면죄부 주고 등용해서 문제가 된 거지. 가령 콩고민주공화국은 독립 후에도 벨기에인 장교 휘하에 콩고군을 두려는 벨기에 식민 당국의 방침에 분노한 흑인들에 의해 백인 관료, 장교들이 모조리 쫓겨났고 대학교 졸업자가 16명밖에 되지 않던 막장 상황인 만큼 국가를 유지하기 위해 울며 겨자 먹기 격으로 아무런 경험이 없던 사람들을 관료, 장교들로 떼워야 했고, 당연히 사회 혼란과 함께 이후에도 혼란이 가중되며 나라가 완전히 파탄났다.[15] 소련군정은 민심을 얻기 위해 당장의 직접통치를 피했다.[16] 고등교육기관이란 대학을 의미한다. 일제 때의 고등보통학교나 여학교는 고등이란 단어가 붙었다고 해서 고등교육을 해주는 곳이 아니었으며 중등교육 기관이었다. 그나마 고등교육기관이라고 할 수 있는 경성제국대학의 한국인 인원은 총원의 3분의 1 밖에 안되었으며 학부도 3개 밖에 안되어서 많은 한국 지식인 배출에 한계가 분명했다.[17] 그 역시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올라 있다.[18] 북한의 역사학, 고고학계의 권위자. 해방 당시 이미 남한의 손보기 교수에 필적할 만한 인지도와 학문적 업적을 쌓았던 인물이다. 경성제국대학 역사학과 출신이다.[19] 계응상은 반민특위가 구성되기 이전 월북했으나, 해방 직후부터 일본에서 박사학위까지 받아왔다며 욕을 먹었다. 그런데 계응상은 도호쿠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일본에선 교수 자리를 구할 수 없어 중국 국민당 정부 산하의 대학에까지 가서 교수를 하다 일제 강점 말기 수원고등농림학교 교수로 귀국했던 인물이다. 이들은 대표 인물이고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당시 서울대학교의 교수 40%와 당시 서울대학교 법과대학(북한에서는 서울법정학교라 칭함)이 통째로 북한으로 올라가 버린다. 당시 북한은 식민지 시기 고등 교육을 받은 인사들을 친일 여부와 관계 없이 학계에 중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 인텔리에겐 북한이 오히려 학문적 자유성이 보장된 공간처럼 보였을 수 있다.[20] 하필이면 이때 이탈한 지식인들은 기초학문, 순수학문 전공자가 대부분이었다. 이 기초순수학문 인력의 상실은 해방 이후 대한민국의 학문지형을 기형적인 형태로 바꿨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한민국에서 기초순수학문 인력이 육성되기 시작한 것은 80년대 초로 이들이 학계와 연구기관에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을 때 즈음 IMF가 터지면서 채산성이 낮은 연구 기금과 인력이 대폭 축소되면서 기초 순수학문 분야는 거의 궤멸 수준으로 몰락해 버리고 말았다. 그나마 기초과학 부분은 2010년대에 들어서면서 그럴듯한 인프라들이 하나둘 갖춰지기 시작했지만 아직도 갈 길이 멀다.[21] 대표적으로 이병도가 있었던 진단학회가 있다. 이병도야 조선사 편수회에서 활약하여 빼도 박도 못하는 친일파지만, 진단학회는 일제강점기부터 순수하게 실증적인 역사를 추구했다는 점에서 한국 사학계에 일련의 업적은 남겼다. 그러나 진단학회도 해방 이후부터 바로 식민사관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즉 왜곡된 일제의 잔재적인 성과들도 있었다는 것이다.[22] 그러나 이승만 정부의 농지 개혁은 추진이 미비하여 지주들이 손해를 입기 전에 빨리 토지를 팔아 이익을 챙겼기에 지주들에게 큰 피해가 없었다.[23] 이순용. 참고로 이순용은 UCLA에서 공부한 엘리트이긴 했으나 독립운동 과정에서 미국 시민권을 얻은 후 공부한 것이라 집안 배경과는 완전히 무관하다.[24] 이종찬(군인), 민복기(판사)[25] 여담으로 을미사변 가담자의 자식들인 우장춘구용서도 후에 거물이 되긴 했지만, 본인들은 친일 행위에 전혀 가담하지 않았기에 오히려 동정 여론이 크거나(우장춘) 친일파 자손으로써의 인지도가 낮다(구용서).[26] 을사오적들의 후손들도 근황이 알려진 사람들은 평범하게 살았다고 한다. 이근택의 손자는 교사로, 권중현의 손자는 고미술협회 직원으로, 박제순의 손자 박승유광복군에서 활동하며 독립운동가로 활동했다가 광복 후에는 성악가로 활동했다. 경술국적 윤덕영의 종손이자 양자인 윤강로는 당대의 유명한 내과의였다. 정미칠적 + 경술국적조중응의 경우는 아들이 해방 후 호텔을 경영했다는 말이 있으나 진위여부가 불투명하다.[27] 대표적으로 민영휘, 이완용의 자손들, 박영효, 윤덕영 등이 있다.[28] 차남 민복기대법원장까지 역임하면서 매국 행위에 직접적으로 가담한 매국노 집안 중 해방 후에도 기득권을 유지한 유일무이한 집안으로 남게 되었다. 민복기의 사례를 '매국노 후손이 해방 후에도 기득권을 유지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처럼 언급하는 경우가 있지만 객관적으로 따지자면 '해방 후에도 '운 좋게' 기득권을 유지한 극히 드문 매국노 후손'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29] 자손들이 교육계, 경제계에서 활동하고 있다.[30] 손자와 증손자가 고급 호텔의 경영주이다.[31] 그조차 앞의 둘은 여흥 민씨 집안이었고, 이해승은 왕족이었다.[32] 네티즌 수사대와 친일 연구가들의 끊임없는 추적과 발굴에도 불구하고 조선귀족 후손이 기득권층으로 자리잡은 추가 사례가 전혀 보고되지 않은 것을 보면 해방 이후 기득권을 유지한 매국노/조선귀족 후손들은 이들이 전부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나마 정미칠적 + 경술국적인 고영희의 증손자 고중덕 정도가 농촌 유지이자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이긴 했다.[33] 공평하게(?) S급 독립운동가 집안까지 따지면 김구, 김좌진(아들, 손녀가 2대째 국회의원을 역임했다)의 후손들도 기득권층으로 자리잡았으며, 이회영의 손자들도 고위층으로서 잘 살고 있다.[34] 기존의 친일파들도 같은 집안에서 독립운동가와 친일부역자가 나오고 친일파 집안과 독립운동가 집안이 혼맥관계를 맺은 경우도 있었다.[35] 노덕술의 초라한 말로만 봐도 확인할 수 있다.[36] 장제스의 중화민국이지, 마오쩌둥의 공산당이 아니다.[37] 현대까지 왕징웨이는 중국 내에서 대대로 욕을 먹고 있지만, 당시 중일전쟁 개전 후 일본군의 쾌속진격에 중국 내 주전파도 화평을 고민할 정도였으며 외국의 지원도 없어 당시 중국은 희망이 없어 보이던 것도 사실이다. 또한 왕징웨이가 괴뢰정부를 세운 후에도 왕징웨이는 무조건 일본의 말만 듣지 않았으며 괴뢰국에서 독립하기 위해 이런저런 노력을 하였다.[38] 다만 워낙 시간이 지난지라 반인륜 범죄를 적극적으로 저질렀거나 피에르 라발과 같은 악질적 부역자들로 한정된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뒤늦게 나치 협력이 드러나 붙잡혀 감옥에서 노후를 보낸 모리스 파퐁.[39] 대부분 독일군에게 몸을 팔았다는 죄목이었다. 이 때문에 전후 머리 스카프에 대한 편견이 굳어져 한동안 스카프가 금기시되었는데, 이 여자들은 머리가 자랄 때까지 박박 깎인 상처투성이 대머리를 스카프로 숨겨야 했기 때문.[40] 이 장면에서 건조하게 설명하는 레지스탕스 대장의 어투가 압권이다. "저 여자들이 뭘 했죠?" "독일 놈들과 잤습니다. 그래도 저 창녀들은 그나마 나은 거에요. 그런 반역행위를 한 남자들은 죄다 총맞아 죽었으니까."[41] 참고로 위에 서술된 대독협력녀 망신주기는 '팜 통뒤(Femmes tondues)'라고 한다.[42] 다만 약 5만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1953년 사면령을 받았다. 출처 : 미완의 프랑스 과거사[43] 카뮈는 문학가이며 언론인인 로베르 브라지야크가 나치에 부역한 죄로 처형될 때 프랑스의 문학가들이 탄원서를 쓰며 브라지야크의 처형에 반대하는 일에도 동참했다. 그러나 드 골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고 카뮈는 알제리 전쟁 때에는 알제리에게 자치권을 줘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독립은 반대했다.[44] 베트남은 북쪽의 대월이 남쪽의 참파와 크메르가 차지하던 남베트남 지역을 18세기에 자국 영토로 편입, 정복한 나라이고 미얀마도 아라칸, 카친, 샨족 등 일부 미얀마의 소수종족들이 중근세 이전 미얀마의 다수종족인 버마족들과 각기 다른 나라들로 떨어져서 지낸 시기가 더 길어서 국민적 통일성이 한국만큼이나 확고하지 않다.[45] 거기에 더해 대만은 독자적인 민족국가를 세워 본 전례도 없었다. 대만 원주민들이 있었으나 이들마져도 청나라에게 복속되면서 이후 중국 대륙에서 대만으로 이주해온 중국인 한족들에게 대거 밀려 전부 소수집단으로 전락해버리거나 몆몆 원주민 집단들은 한족에게 동화되거나 학살당하여 사실상 멸족되었다.역사적으로 대만이 중국에게 먹힌 기간이 짧았음에도 불구하고 같은 언어와 종교,문화를 공유하는 중국의 한족이 이념, 정치적인 차이로 인해 분단된 국가로 인식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46] 오늘날 중동과 아프리카 지역 국가들에서 계속되고 있는 내전과 전쟁, 종교분쟁, 민족분쟁등의 원인이 뭔지를 생각해보자.[47] 인도와 인도네시아는 역사적으로 영국, 네덜란드의 식민 침략 이전 마자파히트나 마우리아, 무굴 등 단일 국가를 세운 사례도 있었지만 대체적으로 통일된 단일 국가보다는 여러 소국들로 분열되어 지낸 시기가 더 많았다.[48] 사실 최린 본인이야 친일 행각이 너무나도 분명했고 본인도 해방 이후에 이를 인정한지라 논란의 여지가 없지만 일제 후반으로 갈수록 원래는 친일 성향이 없었던 인물들이 소극적으로나마 부일에 가까운 행보를 보인 경우 애매해진다.[49] 심지어 이것도 장지연의 말년 행보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없어서 불분명하다.[50] 한국은 분명히 존재하는 실체인 민족국가 조선의 주권을 '찬탈'하고 식민지 체제가 들어선 반면, 식민지 지배국의 이해 관계에 따라 급조에 가깝게 형성됐거나 식민 지배가 매우 오랫동안 지속된 국가들의 경우 오히려 식민지 이전 체제에 대한 귀속 의식도 약할 수 밖에 없고 식민지 당국에 협력하는데 있어서도 당위적인 거리낌이 더 약할 여지도 크며, 전후에도 굳이 협력자들을 대대적으로 처단해야될 당위성 역시 떨어진다. 비슷한 예로 대만 역시 한국과 달리 일본의 식민지 지배 이전까지 독립된 실체로 존속한 적이 거의 없으며,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인식 역시 한국보다 좋은 편이다. 한국의 경우 식민지 지배 이전에 독립된 실체로서의 존재가 분명히 있었으면서도 식민 지배 기간이 그렇게 길지는 않았지만, 2차대전 중 추축국에 점령 당한 국가들과 비교하면 추축국의 지배가 미친 영향력이 훨씬 크고 깊기 때문에 다른 피식민국, 2차 대전기 피점령국들보다 오히려 점령 세력에 대해 어떤식으로든 협력한 이들에 대한 처리가 더 복잡해졌다. 다시 말해, 전자의 경우 굳이 식민 당국 협력자들에 대해 대대적인 청산을 하지 않을 개연성이 높고, 후자의 경우 추축국 부역자들이 누군지 선별하고 확실히 처단하면 되지만, 한국은 둘 다 아니었기에 상술했듯 애매한 경우가 더 많을 수 밖에 없었다.[51] 그리고 당연히 아일랜드, 그리스, 불가리아, 세르비아, 루마니아, 폴란드, 체코, 몰타 등 식민 지배를 받았어도 2차대전기 추축국의 식민 지배를 받지 않은 경우와 직접 비교하는 것은 더더욱 힘들다. 한국의 경우 2차대전기 추축국의 지배를 받았으면서도 전시 피점령이 아닌 식민지 지배를 당한, 따지고 보면 특이한 경우이다.[52] 정확히는 일본군에게 군복을 납품하는 행위[53] 다만 이들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회부된 자들은 예외다. 이들은 그나마 친일파에 관대했던 남한에서 악질 친일파로 인정받았기에 여기서 재판 받았던 자들(특히 고문경찰 출신)은 북한에 의해 처형된다. 특히 이들 중에는 "대한민국의 국시는 반공이다", "친일파를 처단하자고 하는 놈은 빨갱이"라는 논리를 내세웠기 때문에 그야말로 빼도박도 못하고 조용히 숙청당해야 했다.[54] 남한과 달리 북한은 '미제', '일제'를 극히 공격했고 지금도 공격하고 있기 때문이다.[55] '수도경찰 3년사'라는 당시 국립경찰(미군정시기 경찰 호칭)에서 작성한 문건에 따르면, '민중들은 왜정 시의 경찰관이라 하여 적대시하는 원차(怨嗟)의 울분이 등등(騰騰)하였다'고 지적하였다. 경찰과 법은 '낯선 전제권력의 꼭두각시'로 증오의 대상이었다. 오죽했으면 어느 한 지식인은 미군정 관리에게 친일 경찰을 제거해 주면 한국인은 모두 공산주의를 반대할 것이라는 편지를 쓸 정도였다. 또 한 가지 사례로, 이철승 국회부의장도 해방 후에는 극우반공주의 활동으로 악명을 떨쳤고(반탁운동으로 대단히 악명을 떨쳤다.) 정부 수립 후에는 '다른건 몰라도 악질 친일반민족행위자, 친일 경찰만큼은 확실히 처단해야한다!'는 입장을 피력까지 하면서 이승만 대통령한테 진정서를 보내기까지 했었다.#[56] 관료, 법조인 같은 실무 부역자와 군인, 말단 경찰이 이에 속한다.[57] 물론 하판락, 신상묵처럼 한일합방 후 태어났는데도 독립운동가들을 고문한 사례도 많다.[58] 특히 이로 인하여 후손까지 생계가 힘든 경우는 볼드체로 지정한다.[59] 한일의정서, 제1차 한일협약, 제2차 한일협약, 제3차 한일협약, 한일병합조약[60] 그나마 김석원 정도가 어느 정도 비교가 된다.[61] 다만 순사 시절 최태민이 독립운동가를 탄압했다는 증거는 전혀 없고 당시 최태민은 말단 경찰에 불과했기에 친일인명사전에는 등재되지 않았다. 애초에 최태민이 워낙 사기꾼이었던지라 순사로 일했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라는 설도 있다.[62] 최태민의 아버지 최윤성은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은 독립운동가였는데, 일제가 아버지의 명성에 먹칠을 하기 위해 기를 쓰고 순사로 임용했다고 한다. 물론 출세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이를 덥썩 받아먹은 최태민의 잘못이 더 크다고 할 수 있다.[63] 그의 아들 박지만이 이 기록을 자꾸 삭제하려 시도하고 있다. 박지만 문서의 '친일인명사전 배포금지 가처분 소송' 단락 참조.[64] 동명의 일본군 장성이 있는데, 해당인물은 윤봉길 의사 훙커우 공원 의거 당시 폭사당했다.[65] 이 사람은 더불어 일제 강점기 때도 군인으로서 모범적인 모습을 보인 참군인이었다. 한국인 입장에서는 빼도박도 못할 친일파라는 점이 흑역사이긴 하나, 그래도 대부분이 전쟁범죄나, 타군과의 쓸데없는 대립을 일삼는 막장 당나라 군대이던 일본군 내에서 끝까지 인간으로서의 양심을 지킨 사람이었다. 이 점도 위의 김석원과 동일한 경우다.[66] 승려의 도성출입금지를 해제한 것.[67] 독립운동가 김경천과는 당연히 동명이인이다.[68] 설립자 메리 스크랜튼 부인부터 6대 교장 앨리스 아펜젤러(헨리 아펜젤러 목사의 딸)까지는 모두 미국인 여성 선교사[69] 위안부로 팔아먹었다는 것은 과거에 정신대와 위안부의 개념이 혼용되며 생긴 오해이다.[70] 유관순 열사가 존경했다는 것이 딱히 문제될 것은 아니다. 김활란이 변절한 때는 1936년이고 3.1절 운동은 1919년에 벌어진 일이며 이전에는 여성 학사로서 교육에 힘썼기 때문에 당시에는 존경받았을 만했다.[71] 그래서 나치 독일이 일으킨 홀로코스트를 방조했다는 지적과 더불어 이런 일로 이해 당시의 교황이던 비오 12세는 지금까지 영구까임권을 얻어 까임의 대상이 되고 있다.[72] 굳이 변호를 해보자면, 당시 기준으로 문화예술인들은 일반적으로 친일+친북이 일반적이였다.[73] 그래서 형제의 변절에 분노한 유일한, 유특한 형제가 그를 투명인간 취급하면서 죽을 때까지 개무시했다. 특히 유일한 박사는 동생 유명한을 두고 "난 유명한이라는 동생은 둔 적 있어도, 야나기하라 히로시라는 놈은 모른다!"며 분노하기도 했다. 야나기하라 히로시는 유명한이 창씨개명한 이름이다.[74] 국방헌금 10,000원+유한 애국기(柳韓愛國機)' 1대 제작비 53,000원[75] 통합진보당 출신 이석기와 동명이인이다.[76] 이에 장우성 화백 측은 조선미술전람회라는 건 당시 화가들의 유일한 등용문이었고, 부동명왕상은 평화의 의미로 만든 것이라고 반박했으나 민족문제연구소의 박한용 연구위원은 “부동명왕상은 일본불교에만 존재한다”며 “부동명왕의 힘을 빌려 영국과 미국을 축출하고 일본 승리를 기원하는 전형적인 전쟁화”라고 재반박했다.[77] 참고로 더불어민주당 소속 홍영표의 조부이며 중추원 참의를 맡았다.[78] 만약 친일 단체에 몸담은 사람을 모두 친일파로 규정해야 한다는 논리대로라면 김일성 찬양 활동을 하던 북한 주민들은 통일 후에 모두 국가보안법을 적용해 처벌해야 할 것이다. 이들이 모두 진심에서 그런 행동을 했다고 보기도 어렵거니와 세뇌에 의해 그런 행동을 한 것이므로 그런 점을 고려해서 단순 가담자들은 명단에 올리지 않는 것이다.[79] 실제로 (박정희의 최측근격이던) 김종필의 아버지 김상배도 면장이었으나 친일 행적이 없기에 친일인명사전에는 등재되지 않았다.[80] 박승환만주군관학교 출신으로 여운형의 지시로 만주군 내 비밀조직 활동을 하였고, 박창암은 악명 높은 간도특설대 출신이지만 박승환의 조직에서 활동하였으므로 이 두 사람은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지 않았다.[81] 대표적으로 한국광복군 총사령관을 지낸 지청천 장군(일본육사 26기)이 있다. 일본 육사를 졸업한 뒤 일본군 교범을 들고 탈영하여 신흥무관학교의 교관이 되었으며, 이후 독립운동에 헌신했다.[82] 265대 교황 베네딕토 16세도 유년 시절 나치의 히틀러 유겐트 소속이었던 적이 있다고 공격받은 적이 있으나 이 또한 강제 가입이어서 문제가 되지 않았다.[83] 반대로 일제 공권력의 혹독한 고문에 시달렸던 사람들은 노인이 돼서까지 꿈속에서도 "다스케테!"(도와줘!)같이 고문/억압받는 상황에서 피해자가 낼 수 있는 어휘나 비명에 해당하는 일본어 어휘들을 잠꼬대로 하는 경우도 있다.[84] 해외에서 오래 지낸 사람들이 현지화되는 것과도 비슷하게 볼 수 있다.[85] 소설 꺼삐딴 리에서는 이러한 모습을 갖는 주인공이 등장한다.[86] 애초에 팔려는 나라의 주권에 손댈 위치에 있어야 매국도 하는 법이다.[87] 도리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요인들이 전부는 아니었다고 해도 이들보다는 자유민주주의에 가까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