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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이치가야에 있던 육군사관학교. 1941년부터 해당 건물은 육군성 청사가 되었다. 이후 육상자위대 동부방면대 주둔지가 있었으며, 이 시절에 이곳에서 미시마 사건이 일어났다. 현재 해당 부지에는 방위성이 자리한다. |
1937년의 일본육사 기록영상.
1. 개요
[ruby(陸軍士官學校, ruby=りくぐんしかんがっこう)] / 陸軍士官学校일본 제국 육군의 장교를 양성하던 교육기관. 1868년 교토에 세워진 병학교(兵學校)[1]가 기원이다.
사관학교 예과는 2년 동안 교육을 받은 뒤에 3월에 졸업하여 4월부터 상등병으로 복무하다가 10월에 본과로 진학하는 구조가 된다. 37기부터 적용된 일이다. 본과에 가면 1년 10개월간 교육을 받은 뒤에 견습사관(상사)이 되어 다시 교육을 받고 소위로 임관한다.
일본해군병학교는 철저히 학력주의에 근거하여 성적을 공표했고 진급 순서도 졸업 성적대로 했지만 육사는 성적을 공표하지 않았고 육사 성적도 일본 육군에서 중요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일본 육군은 육사 교육기간의 문제 때문에 초급장교들의 질이 낮았기 때문이다. 예과는 군사교육이 살짝 들어간 고급교육과정이라 정말 군사교육을 제대로 받는 것은 1년 10개월짜리 육사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본 육군에서는 양성기관이 아닌 보수기관인 육군대학교 진학여부와 육군대학의 성적이 더 중요했다. 육대 우수 졸업자는 천황이 직접 하사한 군도를 받았다. 육대는 장군이 되기 위한 필수 코스였다. 육군대학을 나오지 않으면 대좌까지밖에 진급할 수 없으며 고급 지휘관이나 주요 참모로 올라갈 수도 없었다. 그래서 육대 입학 자체도 경쟁률이 매우 높았는데, 사단장의 인사 고과엔 휘하 사단에서 사실상 후배들인 육대 입학자를 몇 명이나 냈냐가 반영될 정도였다. 그리고 일본군은 평시에 소대가 없었기 때문에 위관급은 중대에 배치된 신병들을 교육 시키거나 당직 근무를 서는 일만 했는데, 똘똘한 위관급들의 경우 일체의 과업을 면제시키고 입시 공부에만 전념케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일본육군사관학교의 부대 별칭은 상무대(相武台)[2]였다. 한국의 장성군에 있는 그 상무대(尙武臺)와는 관계 없다. 한자도 다르게 쓴다. 작명방식을 일본군에게 배웠을 뿐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아무런 근거가 없는 낭설일 뿐이며, 상무(尙武, 무를 숭상함), 진무(振武, 무력을 떨침), 신무(神武, 귀신 같은 무예), 충무(忠武, 충성스런 무) 같은 말들은 한중일을 막론하고 한자문화권에서 군인을 교육하는 관청이나 무관에게 주어지는 시호 등등 예전부터 흔하게 많이 쓰던 말들이며 심지어 무술을 수련하는 무파 등에서도 쓰던 말들이다. 대(臺, 台) 역시 높고 평평한 시설물을 뜻하는 말로서[3] 그 자체로 성문(城門)이나 사열대의 의미도 있기 때문에 군에서 많이 쓰던 글자다.
2. 역사
상술했듯 기원은 1868년 교토에 세워진 병학교(兵學校)이다. 1869년에는 오사카로 이전하고 1871년엔 도쿄로 이전한다. 병학교 출신은 기수가 없었으며, 명치 3년에 한번, 명치7년 3번 모집 후 대략 2년간 교육 받고 졸업 후 다시 1년이 지나 소위로 임관하였다. 교육중에 세이난 전쟁이 터져 교육 기간이 불안정 했다.(1872년 이전의 일본은 태음력이라 연도 표기가 1년 정도 오차가 있을 때가 있음. 명치 3년은 서기 1870년 2월 1일~1871년 2월 18일에 해당함)
사관생도(士官生徒) 1875년~
1874년에 육군사관학교 조례가 생기면서 1875년에 사관생도 1기가 입교한다. 1기생은 1875년 1월 28일에서 2월쯤에 입학하여 1877년 7월 18일에서 12월 22일 사이에 117명이 졸업 하였다. 중간에 세이난 전쟁이 터져 2기생과 함께 참전하여 34명이 사망 하였다.(한국판 육사 생도 1~2기생 ㅠ.ㅠ[4]) 사관생도 3기는 세이난 전쟁 영향으로 입학이 연기되어 1877년 5월에 입교하여 1879년 12월 22일에 96명이 졸업하였다.
이 사관생도 제도는 11기까지 지속됐고 총 1,285명의 장교를 배출했다. 교육기간은 병과마다 달라 보병이나 기병은 2년이었고 1876년엔 3년으로 변경되었다. 포병과 공병은 3년이었지만 1881년에 5년으로 늘어났다. 당시의 교육 방식은 프랑스의 사관학교를 본 뜬 것이었다.
사관후보생(士官候補生) 1890년~
1887년에는 프로이센군식으로 사관후보생을 받게 된다. 1890년에 제1기가 입교한다. 이들은 육군유년학교를 졸업한 이들로 일병에서 상병으로 잠시 복무를 하다가 들어간다. 중학교 출신자는 12월에 생도 일병으로 입대해 이듬해 6월에 상병으로 진급한다. 도조 히데키가 입학한 17기(1904년~1905년)의 경우 중앙유년학교 출신 300명[5] + 일반 중학교 출신 63명 하여 총 363명이었다.[6]
참고로 1909년 일본 정부는 대한제국군의 장교 양성기관인 육군무관학교를 폐지하고 이들은 육군 유년사관학교를 거쳐 일본육사 26기와 27기에 나눠서 입교시켰다.
육군사관학교본과(陸軍士官学校本科) 1925년~1945년
1920년에는 사관학교를 둘로 나누어 육군사관학교 예과라고 불리게 되고 육군사관학교는 육군사관학교 본과로 바뀌게 된다.
1925년에 입학한 37기부터 이에 해당된다.
이전까지는 졸업월의 차이로 유년학교 졸업생은 상등병으로 일반 구제중학교 출신은 일등병으로 근무하다가 상등병이 된 이후 얼마 뒤 예과에 들어가는 체계였는데 이미 어느 정도 교육을 받아 적응에 큰 지장이 없던 유년학교 출신들에 비해 일반 구제중학교 출신은 생판 맨바닥에 그대로 헤딩하는 꼴이라 이로 인해 문제가 생겼기 때문.
1937년엔 본과가 다시 육군사관학교로 돌아간다. 예과는 육군예과사관학교로 분리 독립하고 현재의 육상자위대 아사카주둔지가 위치한 곳으로 이전한다. 육사는 가나가와현의 자마로 이전하고 1938년엔 교육기간이 1년 8개월로 단축된다. 1941년에는 1년으로 단축된다. 전쟁에 인원이 부족하니 막 줄인 듯 하다. 웨스트포인트도 전시에 6개월 빨리 임관시킨 적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3년 6개월은 교육시켰다. 한편 육군예비사관학교라고 교육기관을 설치하여 예비 군장교들을 1년간 교육시킨다.
항공병과는 1937년에 육군항공사관학교로 독립시킨다. 이들은 병으로 근무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육사를 졸업 후 항사로 가는 방식이라 별도의 기수가 없었다.
3. 교육방식
5년제인 구제중학교(심상중학교에서 명칭 변경) 4학년 2학기(16세) 부터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응시 할 수 있었으나, 보통을 5학년 졸업하면서 응시하였고 육사 과정도 이에 맞추어져 있었다. 하지만 이런 자격 요건 때문에 조선인들이 다니던 4년제 고등보통학교(이하 고보) 출신들은 지원 자체가 불리했다. 또한 중학교에는 교련과목이 있어 육사 입시에 도움이 되었지만, 고보는 교련 과목이 없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일제강점기 말기인 1933년부터 조선인도 입교 가능했는데 주로 조선반도내에 일본인을 위해 설치된 구제중학교에 다니던 조선인들이었고, 고보 출신도 소수나마 있었다.지원자들은 지방의 연대 본부로 가서 3일간 시험을 치렀다. 이틀은 국어(일본어), 영어, 수학, 기하학, 역사, 지리학, 물리학, 화학, 작문 등 학과 시험이었고 마지막날은 신체 검사였다. 입교 전에 헌병대에서 가정 환경을 엄격히 조사하며 술집, 극빈자 등을 제외한 중류 이상을 선발한다.
일제 말기에는 한 기수에 2천 몇백명씩 뽑았다. 원래는 예과 2년 + 본과 2년 구조였으나 이 역시 말기에는 예과 1년 + 본과 1년 8개월로 대폭 단축 되었다. 조선인들은 일제 말기부터 입교 가능해졌으니 모두 이 과정이었다.[7]
특이하게 일본은 병종, 병과, 부대가 예과를 마칠 때 결정된다. 기본적으로 본인이 희망 병과/부대를 밝히나 TO등을 고려해서 배정되다. 그리고 예과 교육이 끝나면 4~6개월간 해당 부대로 가서 '대부(隊付)'을 받는다. 1개 연대에 평균 5~6명의 생도가 배정되는데 전선에 있는 부대까지 가서 교육 받을 수 없기 때문에 해당 연대의 생도까지 대신 받아 1개 연대에 15명씩 파견된다.
대부교육은 대위급인 훈육중대장이 담당하며 처음에는 상등병 계급장을 달지만 일반 병사와 구분하기 위에 상의 목 깃 오른쪽에는 계급장, 왼쪽에는 별을 달았다. 실습이 끝날 때는 오장(하사)을 거쳐 군조(중사)로 진급한다. 이 기간중 계급에 맞추어 분대장을 맞거나 교대로 병사들과 내무생활을 하며 병사들에 대한 실정과 심리를 파악하게 된다.
다만 생도 숙소는 따로 있었고, 식사는 철저하게 장교 식당에서 선배 장교들 사이에 앉아 실시하였다. 교대로 매일 한명씩은 연대장과 식사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본과로 올라가면 2년 과정인데 중일전쟁(1938년)이 발발하여 1년 10개월로 단축되었고, 이는 다시 1년 8개월까지 줄었다.
본과를 졸업하면 견습사관이 되는데 조장(상사) 계급장을 달고 대부교육을 받았던 그 부대로 배치되어 신병들을 교육[8] 시키거나 당직근무를 서다가 약 6~8개월 후에 정식 소위로 임관되게 된다. 이 기간중에 자신의 병과 학교에 가서 교육도 받게 된다.
이런 식이기 때문에 일제말기 기준으로 예과 1년 + 본과1년 8개월으로 순 교육시간은 짧으며, 대부교육+견습사관 기간까지 합쳐야 보통 4년, 길면 4년 반이었다. 시대마다 다르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이런 루틴이었다.
한일병탄 시기인 육사 26기(홍사익, 이응준 등)의 경우 1912년 5월 육군중앙유년학교(예과3년+본과2년 과정)를 졸업하고 6개월간의 대부교육후 12월 1일 육사 입교, 1914년 5월 26일 육사 졸업, 6개월 간의 견습사관 근무 후 12월 25일 보병 소위로 임관했다. 이 당시는 유년학교 졸업 후 육사 1년6개월 + 견습사관 6개월 과정이었던 것이다. 이후 딱 2년뒤에 중위로 진급한다.
그리고 대부교육, 견습사관으로 근무했던 연대 또는 독립대대를 원대라고 하는데, 보통 중위때 갈수 있는 3년 과정의 육군대학교도 파견 형식이라 다시 원대로 오게 된다. 또한 원대의 연대장과는 일종의 사제지간이라고 할 수 있는 특수 관계로 평생 밀어주고 끌어주게 된다. 뭐 다른 부대로 전임 갈 사람은 간다.
3.1. 교육과정
예과때 배우는 교과목으로는 수신, 국어 및 한문[9], 외국어[10], 역사(일본사, 서양사), 수학(삼각법, 기하, 기하 및 미적분, 대수 및 미적분), 물리학, 지리 및 지질, 심리 및 논리, 법제 및 경제, 도화로 세부과목까지 포함해 총 16개의 과목을 배웠다. 여기서 외국어가 402코마(コマ)[11], 수학이 318, 국어와 한문이 269코마를 차지했고 물리학과 화학이 각각 167, 100코마씩 차지했다. 이외에 군사교육은 교련, 진중근무, 사격, 검술·체조·유도·마술, 훈화, 학과, 내무지도 및 검사과정을 배웠고, 이 밖에 각 견학과 야영훈련, 유영훈련도 했다고 한다.본과때는 전술학, 전사, 군제학, 무기학, 사격학, 항공학, 축성학, 교통학, 측도학, 마학, 위생학, 교육학(군대교육, 일반교육), 외국어, 교내교련, 교외교련, 진중근무, 사격, 검술·체조·마술, 전령범·복무제요등을 배운다. 외국어는 보통문서를 독해 하고 일상 회화와 작문 가능한 정도에 그쳤으며 본과에서는 주로 군사에 관한 군사문서 독해력을 상승시킨다. 이 외에도 현지 전술, 측도 훈련, 야영 훈련, 각급 견학도 했다.
4. 패전 후
미군이 점령하여 현재는 주일미군의 기지인 "캠프 자마(座間)"가 되었다. 2007년에 마이클 잭슨이 위문공연을 오기도 했다. 육상자위대 간부후보생학교는 후쿠오카에 새로 자리잡았다.1961년 12월 12일엔 육사 출신의 장교들이 쿠데타를 기도하려고 한 것이 발각된 3무사건(三無事件)이 일어나기도 했다. 왜 3무냐면 이 쿠데타를 기도한 육사 모임인 국사회(国史会)란데서 내건 게 무세금, 무실업, 무전쟁(無税・無失業・無戦争)이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무슨 쿠데타를 기도했는지 알 수 없고 쿠데타에 쓰려던 장비도 일본도와 소총 몇 개가 전부였고 체포된 인원도 13명이었다. 이 중 가장 계급이 높았던 인물은 사쿠라이 타쿠타로(桜井徳太郎, 당시 64세)로 육군 소장 출신이었다. 미카미 다카시(三上卓, 당시 53세)는 5.15 사건에 참여한 일본군 해군 장교로 중좌 출신이었다.
이케구치 에칸(池口恵観, 1936-)[12]은 당시 25세로 참여했는데 중의원이었던 바바 겐지(馬場元治, 1902-1968)의 비서가 된지 2달만에 일어난 사건이라 문제가 됐는데 용케 잘 빠져나가고 지금은 불교에 입문하여 승려로 활동하고 있다. 이케구치 에칸은 당시 총리를 암살하고 군국주의적 일본을 부활시키려던 쿠데타에 참여했는데 정작 2012년엔 북한을 방문하여 북일수교가 이뤄져야하며 식민지배에 사죄한다고 말했다. 이 인간은 아베 신조와도 친분이 있다.
5. 조선인 일본군
만주국육군군관학교와 더불어 대한민국 육군의 창군 멤버 상당수가 여기 출신이다. 나라가 일본 제국에 합병되었기 때문. 초기 육군참모총장들도 일본 육사 출신이 많았다.초대 육군참모총장인 이응준(26기), 2대/4대 채병덕(49기), 3대 신태영(26기), 5대 정일권(55기 상당[13]), 6대/8대 이종찬(49기), 9대 이형근(56기)이 일본 육사 출신이다. 즉 7대/10대 육참총장인 백선엽만 만주국육군군관학교 출신이고 나머지는 다 일본육사 출신.
계급으로 보면 이응준, 유승렬, 김석원은 일본 육군 대좌, 신태영은 중좌, 채병덕과 이종찬은 소좌 출신이며 정일권은 만주군 대위 출신이다.
대한민국 합동참모의장으로 가보면 초대 이형근(56기), 2대 정일권(55기 상당), 3대 유재흥(55기), 4대 백선엽 순서이다.
조선말기 관비 유학생으로 약간명씩 유학하고 있었는데, 조선의 육군무관학교가 1909년 폐지되며 일본중앙유년학교-일본육사 강제 편입된 홍사익 중장, 이응준 대좌, 유승렬 대좌, 안병범 대좌, 신태영 중좌, 박승훈 소좌(만주군 중교), 이대영 소좌, 김준원 대위등 13명은 일본육사 26기[14], 김석원 대좌, 백홍석 중좌, 장석륜 중위 등 20명[15]이 일본육사 27기로 마지막 조선인 일본 육사 출신이다. 그리고 조선 왕족이나 이형석(45기)등 극히 일부를 제외하곤 한동안 일본 육사 입학의 길이 막혀 있다가 조선무관학교의 아들 세대인 49기(1933년)에서 채병덕, 이종찬 등 조선인 2명이 입교 한다.[16] 이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조선에 살던 일본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이후 매 기수별로 약간명씩 조선인들이 입교 한다.(만주군관학교 출신 유학생은 별도)
몇 안 되는 일본 육사 출신끼리는 매우 친했는데 유승렬(26기) 대좌의 아들이 유재흥(55기) 대위, 신태영(26기) 중좌의 아들이 신응균 소좌(53기), 김준원 대위의 아들이 김정렬(1917)(54기), 안병범(26기) 중좌의 아들이 안광수(58기), 김석원(27기) 대좌의 아들이 김영수(57기)였고, 이응준(26기) 대좌의 사위가 이형근(56기), 백홍석(26기) 중좌의 사위가 채병덕(49기)으로 서로 가족관계를 맺게 된다. 약간 경우가 다르지만 이응준 대좌의 장인은 일본육사 15기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갑이다. 즉 이들은 가족 같은 사이도 아니고 그냥 가족이었다.
또한 이하영 자작의 아들이 이종찬(49기) 대위라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입교가 허락된 49기 이후의 조선인들은 태어날 때부터 사상이 검증된 친일파였다. 그렇기 때문에 회고록 같은 것을 보면 자신이 학창시절 일본인 학교를 다닐 때, 조선인이 자신 빼곤 없다시피 했다고 한다. 예를 들어 함경북도 경흥군에는 일본인이 다니던 심상소학교 1곳, 조선인이 다니던 보통학교가 1곳 있었다. 이 중에서 유승렬 대좌의 아들 유재흥은 심상소학교를 다녔으며 일본육사에 갈 자격이 있었고, 반면에 동급생격이었던 경흥 보통학교에 다니던 정일권은 만주국육군군관학교에 가야만 했다.[17]
그리고 일본군에서 장군으로 승진하기 위해서는 일본육군대학 졸업이 필수인데 조선인들은 여기에 갈 수 없어 대좌가 진급 한계선이라 '대좌정지'라는 말까지 존재 했었다. 다만 홍사익만은 시범 케이스로 유일하게 육군대학을 나와 중장까지 승진이 가능했다. 다만 이 이 모든 것들에 대해 조선 왕족들은 예외이다. 막판에 조선인 육대 제한 규정이 풀려서 유재흥 대위가 1945년 5월에 시험을 보았으나, 일본패망.
대한민국 공군의 경우엔 초대 공군참모총장인 김정렬이 육군항공사관학교 출신이며 장지량도 육항사 출신이다. 김창규는 일본 육사 출신이다. 8대 박원석 또한 육항사 출신이다. 대한민국 해군의 경우에는 간도특설대 출신으로 이뤄졌던 대한민국 해병대의 인원들을 제외하면 설립 주체가 일본군과 무관했고[18], 또 일본 해군 역시 조선인에 대한 문호가 극히 좁았던 관계로[19] 한국 해군에는 일본군 출신 참모총장이 없다.
11대 송요찬은 일본 육군 하사관 출신이다. 12대 최영희는 일본 센슈대학교를 다니던 중에 학병으로 소위가 되어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였으며 장도영은 토요 대학을 나온 뒤에 일본 육군 소위로 참전. 김종오도 일본주오대 재학 중에 육군 소위로 끌려갔다. 민기식은 만주국 건국대학을 나온 뒤에 일본 육군 소위로 참전했다. 16대 참모총장인 김용배도 일본 육군 소위 출신이며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한 김계원도 일본 육군 소위로 전선에 갔다. 1969년에야 한국 육군사관학교 출신 서종철이 19대 육군참모총장으로 취임했다.
자세한 사항은 위키백과를 볼 것.
일반적으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분류되는 일본 육사 출신 조선인임에도 일본군을 거부하고 독립군으로 가거나 일본군 내에서 공작활동을 하여 독립군을 이롭게 한 독립운동가들도 존재한다. 다만 이들은 전원 조선 시대 유학가거나 한일병탄으로 강제 유학가게 된 케이스.
대표적인 예가 노백린(11기)과 지청천(26기), 김경천(23기) 등이 있다. 노백린은 경술국치 전에 졸업해 대한제국군에 소속되었다가 군대 해산 후 망명, 지청천은 졸업 후 일본 육군에 소속했다가 1919년에 만주로 망명, 김경천은 경술국치 전에 입학해 1911년 졸업 후 일본 육군 소위 임관을 거부했으나 '독립전쟁을 벌이려면 일본군에 들어가 군사 기밀을 빼와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중위로 복무 중 1919년에 지청천과 함께 만주로 망명했다.
조선인 입교가 다시 허가된 채병덕, 이종찬의 49기 이후로는 이렇게 독립군으로 이동하는 경우가 아예 없었다. 어차피 이들은 사상검증이 끝난 조선귀족 또는 조선인 일본군들의 자제들로 일본학교에서 일본인들과 함께 자라 조선말조차 잘 못하였다.
여담으로 일본육사에서는 일요일 주간에 휴식을 주었다. 동경 출신들의 경우 집에 가서 쉬지만, 지방 생도들은 각현에서 출자한 '일요 하숙'에서 휴식을 취했다. 일요 하숙은 현별로 사관 학교 주변에 방 1~2개를 얻은 것으로 푹 자거나 먹고 싶은 것을 먹을 수 있는 목마른자의 샘물 같은 곳이었다.
조선인 입교가 가능해진 49기부터 채병덕, 이종찬 등은 이런 일요 하숙이 없어 곤란해 하였는데, 선배인 이형석(45기)의 안내로 히로시마 현인회인 초수회에 몇 차례 간 적은 있었으나 1933년 6월에 이형석이 졸업하면서부터는 맞아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다가 당시 일본군 교육총감부 중좌였던 영친왕 이은이 육사의 조선인 생도들이 일요하숙 문제로 고생한다는 소식을 듣고 왕족부 무관 김인욱 소좌를 보내 도쿄의 요쓰야에 이들을 위한 일요하숙(고토 운송점 2층)을 마련해주었다. 이때 채병덕은 이종찬과 함께 친목모임을 결성했는데, 신라의 옛 이름을 따 <계림회>라는 이름을 붙였다. 사실 조선인이라고 해도 한 기수가 2천여 명에 달해 선후배는 물론 동기라도 병과가 다르면 전혀 볼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한자리 수밖에 안 되던 육사 재학 중인 조선인들은 모두 일요일마다 계림회에 모여 친목을 다졌고, 이 때문에 일본 육사 출신자들은 돈독한 유대관계는 여기서 나왔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영친왕 이은은 1년에 한번 이들을 불러 중국집에 불러 포식시켜 주고, 참석 할 수 없을 때는 시종 무관(이형석)을 보냈다. 그리고 육사 생도들은 정월마다 이은, 모모야마 켄이치, 이우의 집에 들러 세배를 하였다. 이때 이은의 집은 너무도 웅장해서(일제패망 후 프린스 호텔로 개조) 일본인들 사이에서는 황족 중 제일 부자라는 말이 돌았을 정도였다.
다만 만주군관학교에서 유학온 정일권, 박정희 등은 조선인 생도들과는 전혀 교제가 없었고, 계림회에 왔다는 기록도 없었다.
5.1. 국군 창설
해방 직후 일본 육사 대선배인 26기 이응준 대좌의 집에 동기인 유승렬 대좌, 신태영 중좌, 안병범 중좌, 박승훈 소좌, 이대영 소좌, 김준원 대위와 27기인 김석원 대좌, 백홍석 중좌, 장석륜 중교[20]등이 모여 안방에 앉아 신생 조선인 부대 창설을 위해 논의 하였을 때, 그 아들/사위들인 채병덕 소좌, 김정렬 대위, 유재흥 대위은 옆방에 모여 듣고만 있었다고 한다. 이 아들 사위/아들 세대에서는 가장 선배인 채병덕과 동기인 이종찬만이 소좌이고 나머지 전원 그 이하계급이었다.[21]이후 미군정은 '경찰예비대'를 창설 준비를 영어에 능통한 만주군 출신 원용덕에게 요청한다. 그는 일본 육사의 중심인 이응준 등 사설 군사단체의 간부들을 모아 1945년 11월 20일에 미군정청에서 회의를 열었다. 회의결과 좌익계는 제안에 거부한다며 장내를 빠져나갔고, 자신들만이 국군이 될것이라고 생각한 광복군계도 거부하였다. 결국 만주군관학교 대선배 원용덕과 일본육사 대선배인 이응준 둘이서 면접으로 군사영어학교 학생을 뽑아 '경찰예비대' 창설을 준비하였고 이는 국군 창설로 이어졌다.
원용덕은 군사영어학교 부교장으로 창군의 주역들을 교육 시켰고, 이응준은 미군정의 고문이 되어 국방경비대 창설을 설계하였다. 또한 군사영어학교에는 110명 중 일본 육사 출신이 13명이 들어 갔다.[22] 이중에서 이응준은 대령으로 임관, 이형근, 채병덕, 유재흥, 장석륜은 대위로 임관했다.
최초에 국방경비대가 운용될 때 각 연대마다 2명의 미군 고문관이 파견되었다. 만주군 출신은 만주군 시절부터 배속된 일본군 장교의 감독/지휘를 받았기 때문에 미군 고문관과의 관계에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일본 육사 출신들은 미군 고문관을 받아들이지 못해 충돌이 많았다. 미군과 관계가 좋기로 유명한 백선엽이 만주군 출신이고, 그 반대의 경우로 미군들이 노발대발한 김석원이 일본 육사 출신인 것은 이런 연유가 있기 때문이었다.
이후 1948년 12월 10일 이응준과 채병덕은 대한민국 국군 최초로 5명의 장성 일원이 되고, 이응준은 초대 육군총참모장에 취임한다. 두달 후에는 채병덕과 함께 소장으로 진급한다. 채병덕은 이응준의 후임으로 2대 육군총참모장이 되었다.(당시 34세))
사단장급으로 보자면 초대 1사단장이 김석원 대령(26기), 2사단장 유승렬 대령(26기), 3사단장 이응준 소장(26기)로 동기들이었으며 6사단장에는 아들인 유재흥 대령(55기), 8사단장엔 사위인 이형근 준장(56기)이 임명되었다.
그리고 한국 전쟁중이던 1952년에 신태영(26기)이 4대 국방부장관에 임명된다.
5.2. 조선인(한국인)
일본 육사는 1874년 개교하였는데 1883년 박유굉(사관생도 11기)이 그 예비코스인 육군 '유년생도', 1886년 '사관생도'로 진학한 이래 1945년까지 60년간 조선인 114명을 배출 하였다. 여기에 1940년대 전반에 2년제 만주군관학교를 졸업한 초급장교 3명과 4년제 만주국육군관학교(신경) 예과 졸업자로 일본 육사 본과에 편입한 24명을 추가하면 모두 141명에 달한다. 다만 만주군에서 위탁 교육으로 들어온 편입생들은 일본육사 예과 수료생들과 교류가 없었다. 이는 일본 육사 총 졸업생 5만2천명 에 비하면 약 0.27% 가량.이들은 크게
- 초기 - 조선 시대 말기 관비유학생들
- 중기 - 대한제국이 망하면서 육사 26기, 27기로 넘어간 육군무관학교 출신들
- 말기 - 그리고 육군무관학교 출신들의 아들/사위 세대로 나눠서 볼 수 있다.
<초기 - 관비 유학생>
관비 유학은 관비 유학인데 박유굉 처럼 조선의 지원이 끊겨 구걸하다 시피 하며 살거나, 강제 귀국 후 사형당한 경우도 있다.이 당시의 조선인 육사 출신들은 조선으로 돌아와 복무 하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러일전쟁 후 일본이 대한제국을 장악하자 군내 요직에 대거 진출 한다. 하지만 군대 해산(1907년)으로 대부분 강제 전역 당하고 한일합방(1910년)으로 예우상 일본군의 고위직 계급을 받거나, 한일합방 이후 조선인 왕공족의 무관으로 오랜기간 복무하여 일본군 고위직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입교 하고 나서 조선이 망해 일본군이 된 중기, 처음부터 일본군이 될 목적으로 육사에 입교한 말기 조선인 생도와는 차이점. 다만 노백린, 이갑, 유동열 등은 국외로 망명하여 독립운군동에 헌신 하였다.
-사관생도 11기-
박영효가 수신사로 도일할때 수행원으로 와서 게이오의숙(慶應義塾)[24]에서 일어를 속성으로 공부했다.
1883년 1월 유년생도로 입교, 1886년 사관 생도로 승격.
- 박유굉: 본국의 탄압으로 졸업 1년을 앞두고 자살(1888년 5월 27일).
(사관생도 11기 다음 기수부터 사관후보생 1기로 개편됨)
-사관후보생 7기?-
무과출신으로 의화군(의친왕)의 수행원으로 도일.
1895년 5월 육사 입교, 1896년 3월 10일 수학증서 받음.
이 시기는 청일전쟁으로 수학연한이 단축되어 기수가 불분명함.
7기와 8기는 귀국후 주로 육군무관학교에서 교관으로 근무
-8기?-
1896년 한국의 육군장교 6명(부위 2명, 참위4명)과 관비유학생 4+1명 입교. 장교들은 아관파천으로 인한 정세 혼란으로 전원 회국 명령. 관비 유학생은 1895년 게이오 의숙을 거침. +1에 해당하는 이희두는 군출신이긴 하나 장교는 아니어서 회국 명령은 안받아 관비유학생들과 함께 졸업 한다.
일본 <육군사관학교> 연표에는 아래 11명이 최초 조선인 입교생이라고 하지만, 이들 전에 박유굉, 이병무가 있었음. 기수 불분명.
1907년 군대 해산기준 군부대신 이병무, 연성학교장 이희두, 무관학교장 조성근.
- 성창기: 대한제국군 참령
- 조성근: 대한제국군 참장, 일본군 중장, 중추원 참의
- 권태한: 대한제국군 부령
- 왕유식: 대한제국군 정령, 일본군 소장
- 이대규: 대한제국군 참령
- 김상열
- 박장화: 대한제국군 복무
- 장명근
- 최병태
- 박희병: 중퇴 후 도미.
- 이희두: 대한제국군 참장, 일본군 소장
-11기-
관비유학생으로 뽑혀 도일한 유학생중 21명이 게이오 의숙, 세이조 학교를 거쳐[25]
1898년 12월 육사에 입교, 이듬해 11월에 졸업함
졸업은 했는데 본국의 지원이 끊겨 일본영사관의 도움으로 겨우 '참위'계급을 받았으며, 사정사정해 겨우 귀국 했지만 일심회 사건으로 다수가 처형 당하거나 옥고를 치르는 등 어렵게 살았다.
- 강용희 : 대한제국군 정위
- 권승록 : 대한제국군 정위, 일본군 중좌
- 권호선 : 대한제국군 참위
- 김관현 : 대한제국군 정위, 중추원 참의
- 김교선 : 대한제국군 정위, 중추원 참의
- 김규복 : 대한제국군 참위
- 김상설 : 대한제국군 부위, 경무청 경무관, 중추원 참의
- 김성은 : 대한제국군 부령
- 김형섭 : 대한제국군 정위, 일본군 대좌
- 김홍남 : 대한제국군 정위
- 김홍진 : 대한제국군 참위
- 김희선 : 대한제국군 정위, 임시정부 군무차장
- 노백린 : 대한제국군 정령, 임시정부 국무 총리 및 초대 군무총장
- 방영주 : 대한제국군 참령
- 어담 : 대한제국군 정령, 일본군 중장, 중추원 참의
- 윤치성 : 대한제국군 부령
- 이기옥 : 대한제국군 정위
- 임재덕 : 대한제국군 참령
- 장인근 : 대한제국군 정위
- 장호익 : 대한제국군 참위
- 조택현 : 대한제국군 참위
-15기-
대한제국 정부의 국비생 혹은 사비생으로 도일한 유학생 8명이 세이조학교를 거쳐 1902년 12월 육사 입교, 이듬해 11월에 졸업함.
육사 졸업후 도쿄 근위사단에서 견습사관 생활 할 때 러일전쟁이 터져 일본군 부대를 따라 관전장교 자격으로 전선 시찰함. 이러 러일전쟁으로 조선을 사실상 일본이 장악하자 그들의 지원으로 근대 교육을 받지 않은 무관들이 대거 군직을 떠나고 육사 15기 등이 요직에 등용됨.(11기중 일부 망명한 자들도 이때 귀국.) 특히 육군무관학교, 연성학교(구식장교 재훈련기관), 유년학교(무관학교의 예과과정에 해당) 등 3대 군사교육기관을 장악했다인데, 고작 2년 후 군대해산.
군대 해산후에는 1931년까지 '헛총 메고 빈 대궐 지키던' 1개 대대 규모의 '조선보병대'의 고위대원으로 남거나, '조선군사령부부'라는 이름으로 왕공족부무관이 되었다. 아래 일본군 대좌 어쩌구는 일본군으로 전공을 세워 받은 게 아니라 수십년간 조선 왕공족의 무관을 하며 받은 계급.
이중에서 독립군인 유동열은 육사출신 독립군의 대부로 해방 후 국군 창설의 산파역할을 한 3인 중 하나.[26]
- 김기원 : 대한제국군 참령, 일본군 중좌
- 김응선 : 대한제국군 참령, 일본군 대좌
- 남기창 : 대한제국군 참령
- 유동열 : 대한제국군 참령, 임시정부 초대 참모총장 및 군무총장, 미군정 통위부장
- 박두영 : 대한제국군 참령, 일본군 대좌, 중추원 참의
- 박영철 : 대한제국군 참령, 중추원 참의
- 이갑 : 대한제국군 참령, 독립군
- 전영헌 : 대한제국군 부령
<중기 - 대한제국의 유복자들>
여기서부터는 일본 육사로 넘어간 후 대한제국이 망하는 바람에, 대한제국군이 되지 못하고 일본군으로 생활하게 된다.대부분이 3년제 육군무관학교 재학중 1909년 폐교되어 도쿄중앙유년학교로 편입되었다가 대한제국 멸망 이후 일본 육사로 진학하게 된 케이스이다. 이후 1933년까지 조선인들에게 일본육사의 문호가 열리지 않았다. 다만 조선 왕공족이나 그들의 어학우로 조선귀족 등 극소수가 개별적으로 입학하였다.
앞서 언급한대로 중위까지만 근무하며 군사기술을 익힌 후 독립운동에 뛰어들기로 한 약속을 지킨 것은 김광서, 이청천, 조철호, 이종혁, 이동훈 등 5명이다. 나머지중 반절은 1925년 대규모 군비축소 때 군대를 떠났으며, 해방 당시 군직에 있던 사람은 10명 내외로 홍사익/영친왕은 중장, 유승렬/이응준/김석원 등 3인은 대좌, 나머지는 중좌에 그쳤다. 장군이 되기 위해서는 육사 졸업 8년 안으로 3년제인 육군대학교(이하 육대)에 진학해야 하는데 왕공족 3총사 외에는 홍사익만 육대에 갈수 있었다. 홍사익은 학구파로 원래 성적이 매우 뛰어났기 때문에 어차피 성적도 좋은거 그냥 영친왕 이은의 어학우 삼아 입학 허가가 났다는 게 다수설이다.
"일본군 장교라도 전원 친일파는 아니다. 독립운동 한 사람도 있다"는 주장은 이 시절 육사생중 딱 4명(김경천, 지청천 조철호, 이동훈)을 뜻한다. 이들 대부분이 대한제국 시절 일본으로 유학 갔다가 나라가 망해 어쩔 수 없어 일본육사로 진학한 경우였다. 이후 기수 중에서 독립운동가는 단 한사람도 없었다.
-23기-
대한제국의 황실 장학생으로 1909년 12월 입교, 1911년 5월 졸업.
-26기-
육군무관학교가 폐교됨으로 2학년 생도 18명이, 1909년 일본 육군유년학교 3학년에 입교. 1912년 12월 육사 진학. 13명이 1914년 5월에 졸업
또한 후배인 27기를 합쳐서 유학생 총 10명이 한국 병합 반대, 질병, 성적 불량등으로 중퇴함.
육사 26기~27기 생도들은 처지가 같아 사이가 매우 돈독했는데, '전의회'라는 친목 단체를 만들었고 그 회장에는 선배인 김경천을 추대하였다. 그리고 중위를 달면 다 같이 탈출하여 독립운동에 힘쓰기로 했는데 이를 지킨 것은 김경천과, 26기에는 지청천, 조철호, 27기에서는 이동훈, 이종혁뿐이다.
이후 이응준 등은 국군의 산파역을 하였고, 김준원, 신태영, 유승렬, 이대영등이 국군에 뛰어 들었지만 나이가 너무 많아 기력이 딸려 6.25때는 대부분 2선에 있었다.
- 권영한 : 일본군 중위
- 김준원 : 일본군 대위, 육군 준장. 김기원(15기)의 동생이자 김정렬(54기)의 아버지.
- 민덕호 : 일본군 중위
- 박승훈 : 일본군 소좌, 만주군 상교, 육군 소장
- 신태영 : 일본군 중좌, 육군중장, 3대육군총참모장, 4대 국방부장관
- 안병범 : 일본군 대좌, 육군 준장(추서)
- 염창섭 : 일본군 중위
- 유승렬 : 일본군 대좌. 육군 소장
- 이대영 : 일본군 소좌, 육군 준장
- 이응준 : 일본군 대좌, 육군 중장, 초대 육군총참모장
- 지청천 : 일본군 중위, 한국광복군 총사령관
- 조철호 : 일본군 중위, 6.10 만세운동 중 체포
- 홍사익 : 일본군 중장, 육군대학교 35기, B급 전범으로 교수형
-27기-
육군무관학교가 폐교됨으로 1학년 생도 25명이, 1909년 도쿄중앙유년학교 예과 2학년에 편입. 1913년 12월 육사 진학. 20명이 1915년 5월에 졸업
- 김석원 : 일본군 대좌, 육군 소장
- 김인욱 : 일본군 중좌
- 김종식 : 일본군 대위
- 김중규 : 일본군 중위
- 남우현 : 일본군 중좌
- 박창하 : 일본군 대위
- 백홍석 : 일본군 중좌, 육군 소장
- 서정필 : 일본군 중위
- 원용국 : 일본군 대위
- 유관희 : 일본군 대위, 육군 대령
- 윤상필 : 일본군 소좌
- 이강우 : 일본군 중좌
- 이동훈 : 일본군 소위, 3.1 운동중 물고문으로 사망, 건국훈장(애족장)
- 이동혁 : 일본군 중위, 독립군
- 이희겸 : 일본군 중위
- 장기형 : 일본군 중위
- 장석윤 : 일본군 중위, 육군 대령
- 장성식 : 일본군 중위
- 장유근 : 일본군 중위
- 정훈 : 일본군 중좌
-29기-
영친왕은 1907년 일본의 학습원, 중앙유년학교를 거쳐 1915년 11월 육사 입교, 1917년 5월 졸업. 어학우로 이완용 내각의 대신 조중응의 아들 조대호와 본인의 외사촌 엄주명이 따라갔다. 다만 후자는 중앙유년학교 시절 신병으로 1년 휴학.
-30기-
- 엄주명 : 일본군 중위, 한국군 준장
-42기-
의친왕의 장남 이건 역시 일본의 학습원과 토쿄중앙유년학교를 거쳐 1926년 4월에 육사 입교, 1930년 7월 졸업
- 모모야마 켄이치 이건 : 일본군 중좌, 육군대학교 51기, 일본에 귀화
-45기-
의친왕의 차남 이우는 운현궁 호주권 상속으로 왕공족이 됨. 역시 학습원과 도쿄유년학교를 거쳐 1929년 4월 육사에 입교, 1933년 7월 졸업. 다만 44기로 입교한 이형석은 신병으로 1년 휴학하여 45기로 졸업
이형석은 이시기에 특이 케이스인데 본인 말로는 "본격적인 조선인 입교를 압두고 시범적으로 나를 선정한 게 아닌가 싶다"고 증언하였다.
- 이우 : 일본군 대좌(추서), 육군대학교 54기, 원폭으로 전사
- 이형석 : 일본군 소좌, 육군 소장
<말기 - 조선인 입교 가능>
만주사변이 일어난지 2년 후 부터 일본측의 입장이 바뀌어 조선에 있는 일본인중학교에 다니던 극소수의 조선 학생들에게 학교장과 배속 장교들이 간절히 권유하여 그 중 일부가 육사에 지원하게 된다. 당시 중학교는 5년제로 4학년 1학기를 마치면 입학자격이 부여되었고, 이후 조선인들이 다니던 고등보통학교(이하 고보) 출신들도 간간히 보인다. 처음에는 매년 2~3명씩 입학하다 태평양 전쟁이 일어난 이듬해(1942년)에 6명으로 급증하였다.이들은 선배인 육사 26기~27기 거의 대부분이 보병이라는 점에 착안하여[27], 만약 독립이 되면 우리나라 군대에 신기술이 필요할 것이라는 생각에 대부분이 기술병과를 선택 하였다. 초기, 중기에 대한제국에서 유학온 생도들과 달리 이들은 일본군이 될 목적으로 일본육사에 온 순수한 친일파. 이들은 조선말 조차 잘 하지 못하여, 해방후 육사에서 일본어를 섞어 강의했다거나, 명령을 내리는데 발음이 부정확해서 알아 들을 수가 없었다는 일화가 있다. 그러나 장차 독립된 조국의 군대에 도움이 되기 위해 기술병과를 지원했다는 점에서 식민지 청년들의 고뇌를 엿볼 수 있다.
조선인 입교가 가능해진 첫 기수인 49기의 채병덕과 이종찬은 영친왕 이은의 후원으로 일요일에 외출하여 쉴 수 있는 하숙을 얻었고, 그 이름을 '계림회'로 등록하여 학교측에 신고 하였다. 이곳은 육사 26기, 27기 선배들이 쓰던 일요 하숙집과 같은 건물이었다. 채병덕과 이종찬 이후 후배들은 모두 계림회원에 속하며 총 45명이다.
이들 중 해방 당시 육사 또는 육군예과사관학교에 재학 중이던 제 59기, 60기, 61기생을 제외한 선배들은 대다수가 참전 경험이 있으며 전사자도 다수. 해방 후 육사 26기~27기가 국군 창건의 산파 역할을 했다면 6.25를 겪으며 육군과 공군의 최고 간부층을 형성한 것이 이들 육사 말기생들이다.
일제 패망 당시 최종 계급은 49기~53기는 소좌, 54기~56기 대위, 57기 중위, 58기는 소위였고 59기~61기는 육사 또는 예과사관학교 재학중 이었다.
일본군 계급 뒤 전사 표기는 물론 일본군으로 전사한 것이며, 국군 계급 뒤 전사는 6.25중 전사. 추서는 전사 후 1계급 특진 한 경우로 역시 전사자이다.
-49기-
1932년 겨울 당시 평양중학교 4학년 채병덕과 조선귀족 이하영(1858) 자작의 손자이자 경성중학교 학생인 이종찬이 응시 합격하여 이듬해 4월 예과에 입교 하였다. 이후 1937년 6월 졸업.
-50기-
1934년 4월 입교, 1937년 12월 졸업. 지인태는 1938년 6월 육군항공사관학교 졸업
- 이용문 : 일본군 소좌, 육군 소장(추서)
- 지인태 : 일본군 항공 중위(추서)
-52기-
1936년 4월 입교, 1939년 9월 졸업
- 박범집 : 일본군 소좌, 공군 소장(추서), 초대 공군참모부장
- 최명하 : 일본군 항공 중위(추서)
-53기-
1937년 4월 입교, 1940년 2월 졸업.
- 신응균 : 일본군 소좌, 육군 중장
- 박재흥 : 일본군 소좌
-54기-
학제 개편으로 육군사관학교 예과가 육군예과사관학교로 바뀌어 패망 때 까지 유지됨
1937년 12월 육군예과사관학교 입교, 1940년 9월 육사 본과 졸업.
- 강석호 : 일본군 중위, 전사
- 김정렬 : 일본군 항공 대위, 공군 중장, 초대/3대 공군총참모장, 국방부장관
- 노태순: 일본군 중위, 전사
-55기-
1938년 12월 입교, 1941년 7월 졸업.
-56기-
1939년 12월 입교, 1942년 12월 졸업
- 김종석 : 일본군 대위, 육군 중령, 숙군으로 사형
- 이형근 : 일본군 대위, 육군 대장, 초대 연합참모본부총장, 9대 육군참모총장
- 최정근 : 일본군 항공 소좌(오키나와 전투 중 카미카제로 2계급 추서)
- 최창식 : 일본군 대위, 육군 대령, 한강교 조기 폭파로 사형
-57기-
1941년 4월 입교, 1944년 4월 졸업.
- 김영수 : 일본군 중위, 전사
- 김호량 : 일본군, 육군 소령, 전사
- 정상수 : 일본군, 전사
-58기-
1942년 4월 입교, 1945년 6월 졸업
- 박원석 : 일본군 항공 소위, 공군 중장, 8대 공군참모총장
- 신상철 : 일본군 항공 소위, 육군 준장, 공군 소장
- 안광수 : 일본군 소위, 육군 대령
- 정래혁 : 일본군 소위, 육군 중장, 국회의장
- 최복수 : 일본군 소위, 육군 대령, 전사
- 한용현 : 일본군 소위, 공군 대령
-59기-
1943년 4월 입교, 1944년 10월 본과 진학
- 김재곤 : 패망 직후 일본인 구대장이 사살
- 장창국 : 육군 대장, 9대 합동참모의장
- 홍승화 : 행적 불분명(도일?)
-60기-
1944년 3월 입교, 1945년 7월 본과 진학
- 김태성 : 육군 대위
- 이성구 : 행적 불명
- 이연수 : 공군 준장
- 이재일 : 서울대 물리학과
- 장지량 : 공군 중장, 9대 공군참모총장
- 조병권 : 육군 소령, 숙군으로 사형
-61기-
1945년 4월 입교.
- 김은수 : 감사원 국장
- 김중환 : 행적 불명
- 김차경 : 한국전력회사 근무
- 오일균 : 육군 소령, 숙군으로 사형
- 정만영 : 한국통신기술연구소장
- 조병하 : 카이스트 이학교수
- 조철형 : 행적 불명
- 최용기 : 도일함
- 성명 미상 1명 : 한인준?
<만주 육군군관학교 유학생>
만주사변 당시 만주의 지배자였던 장쉐량이 빤스런 할 때 버리고 간 6만 병력을 베이스로 삼아 일본은 독립군 토벌 목적의 만주군을 만들었다. 기존의 만주인 장교들의 보충 교육을 위해 2년제 봉천 군관학교를 설립했고, 이후 일본 육사를 모방하여 4년제 신경 군관학교를 만들었다.(합쳐서 만주국육군군관학교문서에 표기)
만주군관학교 입학생 T/O를 반띵하여 일본계 반, 만주계(대만, 조선인 포함) 반으로 구성하였다. 일본계는 일본 육사 시험에서 아깝게 떨어진 자들이 울며 겨자먹기로 만주까지 간거고, 조선인은 대체로 한반도 북쪽에 살던 고등보통학교 출신자들이었다.
2년제 봉천 군관학교 출신 3명(김석봉, 석희봉,정일권)은 졸업 후 장교로 임관한체로 일본 육사 본과에 편입한 것이며, 4년제인 신경 군관학교 출신자의 경우 2년 교육 후 일본인 전원과 만주계 중 우수 학생들은 일본육사 본과에 유학생대 라는 이름으로 편입되었다. 유학생들은 제복에 '만'자 표지가 있었고, 육사생도와 섞이지 않은채 자신들끼리만 교육 받고 성적도 따로 매겼다. 그리고 신경학교 5기생 부터는 조선인들은 일본계로 인정 받아 전원 일본 육사로 유학갈 자격을 얻었다. 일본 육사 재학기간이 엿가락 처럼 변경되는 시절이라(1년10개월~1년) 만주군관학교와 일본육사의 기수는 정확하게 일치하지는 않는다. 이와 같은 만주 유학생 출신은 총 27명.
졸업 후에는 물론 만주국으로 돌아가 만주군이 되며, 관동군 산하의 일본군들이 고문이라는 이름으로 일거수 일투족을 통제하는 꼭두각시 군대였다. 장점이라면 일제 패망후에 소련군이 관동군을 시베리아로 끌고 갔지만, 만주군은 군대 취급도 안하여서 그냥 집으로 올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 육사에서 2년 유학했음에도 일본육사계열로 분류되는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만주군계이다. 초창기 대한민국 육군은 만주계, 일본육사계, 학병계라는 3대 파벌이 있었는데 이중에서 정일권과 백선엽이 수장격.
만주군 출신 박정희가 일으킨 5.16 쿠데타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여 오랜 기간 정부와 군의 권력을 장악한다. 단적인 예로 박정희가 의장인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이주일이 부의장, 박임항, 박원석, 최주종, 김윤근이 위원이다. 반면에 순수 일본 육사 출신의 최고위원은 정래혁만 있다뿐.
말기의 일본육사 출신들과 마찬가지로 이들 역시 자의에 의해 일제에 부역한 빼도박도 못할 친일파. 그중에서 일부는 사병까지 전원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될 정도로 악명높은 간도특설대에서 복무한다.
-54기 상당-
봉천군관학교 5기, 졸업 후 만주군으로 임관한 다음 1939년 3월 육사 본과 편입
- 김석범 : 만주군 상위, 간도특설대, 해병대 중장, 2대 대한민국 해병대사령관
- 석희봉 : 간도특설대, 사망
-55기 상당-
봉천군관학교 5기생이나 만주군 기병학교를 거치느라 1년 늦은 1940년 4월에 육사 본과 편입
- 정일권 : 만주군 상위, 육군 대장, 5/8대 육군참모총장, 2대 연합참모본부총장
-56기 상당-
신경군관학교 1기 예과 수료, 1941년 8월 본과에 편입
만주군관학교 조선인 11명 중 무려 6명이나 성적 우수로 일본 육사에 올 수 있었다.
- 김민규 : 육군 대위
- 박임항 : 만주군 중위, 육군 대장
- 이주일 : 만주군 중위, 육군 대장
- 조영원 : 사망
- 최창언 : 육군 중장
- 최창륜 : 만주군 항공장교, 인민군 보병공급 부장, 육군 대령, 전사
-57기 상당-
신경군관학교 2기, 1942년 10월 본과 편입
-58기 상당-
신경군관학교 3기, 1944년 5월 본과 편입
- 강태민 : 육군 준장
- 최주종 : 만주군 중위, 육군 소장
-59기 상당-
신경군관학교 5기, 1944년 10월 본과 편입. 이 기수부터 일본계로 인정 받아 5명 전원 일본 육사 편입했음.
- 강문봉 : 육군 중장
- 김태종 : 행적 불명
- 이용술 : 행적 불명
- 황택림 : 육군 대위, 숙군으로 사형
- 이00 : 행적 불명
-60기 상당-
신경군관학교 6기. 9명 중 7명 1945년 7월 본과 편입. 한달 후 일본 패망.
- 김기준 : 사망
- 김석권 : 사망
- 김세현 : 육군 중위
- 김윤근 : 해병 중장
- 김학림 : 육군 소령, 숙군으로 사형당한
- 이우춘 : 사망
- 정정순 : 육군 중령, 전사
6. 유명 출신인물
사실 그 일본의 육군 장교 양성기관이고, 거기에 일본군이 일본 정치에 끊임없이 개입했기 때문에[28] 거의 대부분의 일본 육군 장교출신들, 그리고 상당수의 일본 정치인들이 일본 육사를 나왔다. 상술했듯 한국계도 상당수였다. 다만 한국쪽은 만주국육군군관학교 출신들도 제법 있으며, 중국에서도 일본육사를 간 케이스가 여럿 존재한다.6.1. 일본인
- 우가키 가즈시게(1기): 우가키 군축의 그 우가키가 맞는다. 기요우라 게이고 내각부터 제1차 와카쓰키 레이지로 내각에서 제35대~37대, 하마구치 내각에서 39대 육군대신을 지낸 뒤 제6대 조선 총독을 역임했으며, 이후 1938년 제1차 고노에 내각에서 외무대신을 맡았으나 이후 정계를 은퇴. 최종 계급 육군 대장.
- 시라카와 요시노리(1기): 러일전쟁에 참전한 경력이 있으며 상하이 파견군 사령관, 관동군 사령관, 다나카 기이치 내각에서 제38대 육군대신을 역임. 한국인들에게는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훙커우 공원 의거로 인해 암살당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최종 계급 육군 대장.
- 무토 노부요시(3기): 러일전쟁과 시베리아 출병에 참전한 적이 있으며 이후 관동군 사령관에 이어 요직으로 손꼽히는 육군 3장관의 세 자리[육군3장관] 중 둘에 해당하는 교육총감과 육군참모총장을 지냈다. 최종 계급 육군 대장.
- 미나미 지로(6기): 러일전쟁에 참전했으며 관동군 사령관과 제2차 와카쓰키 내각에서 제36대 육군대신을 역임했고 이후 제7대 조선총독 직을 맡는다. 한국인들에겐 민족말살정책으로 유명하다. 총독 퇴임 이후 추밀원 고문, 귀족원 의원 등을 지냈고, 일본이 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이후 A급 전범으로 기소되어 1946년 종신형이 선고되었으나 건강 문제로 1954년 가석방, 1955년 사망한다. 최종 계급 육군 대장.
- 하야시 센주로(8기): 러일전쟁에 참전했으며, 이후 조선군 사령관, 교육총감을 거쳐 사이토 내각 - 오카다 내각에서 제39대, 40대 육군대신을 맡는다. 이후 정계에 입문해 외무대신, 문부대신을 역임했으며 제33대 일본국 내각총리대신을 맡았으나 내각불신임결의안을 맞고 얼마 안 가 사퇴한다. 최종 계급 육군 대장.
- 아라키 사다오(9기): 죽창 장군이라는 별명이 있었고 정치 군인의 행보를 보였다. 헌병사령관 시절 기타 잇키 등 극우 인물들과 교류하고 과격한 청년장교단을 이끄는 황도파의 핵심인물로 있었다. 육군 교육총감 직을 맡던 중 이누카이 내각에서 육군대신으로 발탁, 뒤이은 사이토 내각에 이르기까지 제37, 38대 육군대신을 역임한다. 하지만 황도파가 극단으로 치닫자 점차 견제를 받게 되었고, 이에 청년 장교들을 가라앉히려다 이들에게도 신망을 잃게 되어 육군대신을 사임했다. 2.26 사건이 일어나자 같은 황도파였던 아라키는 공범 혐의가 씌워질까 우려, 쿠데타군에게 원대복귀를 요구했지만 이 일로 제대로 찍혀 이 이후 진행된 황도파의 제거 작업으로 인해 예편되었다. 이후 1938년 제1차 고노에 내각과 히라누마 내각에서 문부대신으로 발탁, 황도교육을 추진하고 사상의 자유를 억압하는 데 앞장섰으나 이로 인해 제2차 세계 대전 패전 이후 극동군사재판에서 A급 전범으로 기소, 구속되어 종신형을 선고받는다. 병으로 1955년 가석방되었고 1966년 사망. 최종 계급 육군 대장.
- 마쓰이 이와네(9기): 러일전쟁에 참전했으며, 관동군 산하 특무기관장을 역임했다. 대만군 사령관을 거쳐 대장으로 진급한 후 예편했으나, 상하이 전투가 발발하며 중일전쟁이 시작되자 현역으로 복귀하여 중지나방면군 겸 상하이 파견군 사령관을 맡아 전쟁을 지휘한다. 그가 지휘하던 병력들이 난징 대학살을 일으켰는데, 그는 결핵으로 당시 지휘 계통에선 물러나 있었지만 어쨌든 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에 놓였고, 패전 이후 극동군사재판에서 A급 전범으로 기소, 하지만 난징 대학살 당시엔 병석에 있었단 이유로 A급이 아닌 B, C급 전범으로 기소되어 교수형으로 사형이 집행된다. 최종 계급 육군 대장.
- 아베 노부유키(9기): 육군성 군무국장, 육군차관, 육군대신 사무대리[30], 대만군 사령관을 거쳐 외무대신과 제36대 일본국 내각총리대신을 역임. 하지만 의회의 불신임으로 사퇴 후 마지막 조선총독으로 부임한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을 선언 후 미군이 한반도에 진주하고 9월 9일 존 리드 하지 중장과 만나 항복 문서에 조인했으며, 이후 재조선 일본인들을 버려두고 가족과 함께 도망치다 걸리기도 하고, 일본인들을 철수시킬 자금을 마련한다며 조선은행권을 남발하여 조선에 인플레이션 공황을 만들어내기도 했으며, 미국 측에 조선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심어주기도 했다. 이로 인해 광복 이후 조선은 각종 경제 사회적 혼란을 겪게 되었으니 떠나면서 끝까지 재를 뿌린 셈. 최종 계급 육군 대장.
- 혼조 시게루(9기): 러일전쟁과 시베리아 출병에 참전. 이후 일본 육군 제10사단장, 관동군 사령관, 시종무관장 등을 역임하였다. 관동군 사령관 당시 만주사변을 일으켰고, 그 공으로 남작 작위를 수여받고 퇴역한다. 2차대전 패전 이후 연합군 측이 체포명령을 내리자, 11월 30일 일본 육군대학 내 보도회 이사장실에서 할복으로 자살했다. 최종 계급 육군 대장.
- 데라우치 히사이치(11기): 한국 통감과 초대 조선총독, 제18대 일본국 내각총리대신을 지낸 데라우치 마사타케[31]의 아들로 아버지를 따라 군인의 길을 걸었다. 조선군 참모장, 대만군 사령관을 거쳐 히로타 내각에서 제42대 육군대신을 지냈고, 1937년에는 육군교육총감 직을 맡게 되었으나 중일 전쟁이 발발하자 북지나 방면군 사령관으로 전보된다. 이후 1941년 11월 남방군 총사령관으로 이동하여 태평양 전쟁의 작전 계획을 입안하였으며, 전쟁 발발 이후 남방총군을 지휘하며 일본군의 동남아시아 전역을 총괄한다. 1943년 원수로 진급했으며[32] 남방군 사령관 재직 중 그 임팔 전투를 결재한 최종 책임자 중 하나이기도 하다. 극동군사재판에서 전범으로 기소된 후 1946년 포로수용소에서 뇌경색으로 숨졌다. 최종 계급 원수 육군 대장.
- 고이소 구니아키(12기): 육군성 군무국장, 육군차관, 관동군 참모장, 조선군 사령관을 거쳐 7대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의 뒤를 이어 1942년 조선총독에 취임한다. 이후 1944년 제 41대 일본국 내각총리대신이 되어 태평양전쟁을 이끈다. 관동군 근무 시절엔 만주국의 성립에 앞장섰으며 조선 총독 시절엔 미나미 지로의 뒤를 이어 민족말살정책을 강화시켜, 학도병 제도와 강제 징용 및 징병제를 실시했고 근로정신대나 위안부제도를 실시하며 한반도에서의 착취를 지휘했다. 1944년 사이판이 미국에 점령당하자 책임을 지고 물러난 도조 히데키의 뒤를 이어 41대 일본국 내각총리대신에 취임했다. 하지만 그는 군 내에 우군이 별로 없었고, 당시 일본 정계의 정치 싸움 끝에 무난하다고 총리에 지명된 터라 군의 지지를 받지 못했고 거기에 시게미츠 마모루 외무대신을 해임하려다가 반발한 귀족 출신 원로들과 해군 출신들의 탄핵으로 인해 지명 8개월 만에 총리대신 자리에서 물러나고 만다. 2차대전 패전 이후 1948년 극동군사재판에 A급 전범으로 기소되어 종신금고형을 받고 수감됐고 1950년 옥중에서 사망한다. 최종계급 육군 대장.
- 스기야마 하지메(12기): 일본군 삼대오물 중 한 사람 맞는다. 그런데 정작 역대 일본 육군 중 단 두 명만이 할 수 있었던 육군 3장관직[육군3장관]을 모두 거친 인물이란 게 특징. 러일전쟁에 참전했었으며 2.26 사건을 진압할 당시 육군사관학교장을 지내기도 했다. 이 공로로 육군대신에 지명되어 제44대, 45대 육군대신을 역임한다. 엘리트 가도를 걸었으나 문서에서 볼 수 있듯이 한심한 작전 입안 및 업무능력으로 무려 덴노인, 군사 전문가도 아닌 히로히토에게 직접 갈굼을 당하기도 했고 그 임팔 작전을 무타구치 렌야의 얼굴을 봐서라도 결재해 달란 희대의 뻘짓을 저지르기도 했다. 전후 패전의 책임을 지고 유서를 남기고 권총자살. 최종 계급 원수 육군 대장.
- 하타 슌로쿠(12기): 육군성 군무국장, 대만군 사령관과 관동군 사령관을 거쳐 육군 교육총감 직에 올랐다. 1937년 말 난징대학살이 터지자 당시 사령관이었던 마쓰이 이와네의 경질을 주장했고, 이후 마쓰이의 뒤를 이어 중지나방면군 사령관이 되어 전쟁을 지휘한다. 1939년 아베 노부유키가 일본국 내각총리대신이 되자 아베 노부유키 내각의 육군대신에 임명, 아베에 이은 요나이 내각에서도 육군대신을 역임(48, 49대)한다. 1941년 지나파견군 총사령관이 되어 중국으로 돌아갔는데 이때 일본군은 각종 중국 민간인 대규모 학살 등을 저질렀다. 1944년 원수로 진급했고 1945년 4월 일본군의 본토결전에 대비해 히로시마에 제2총군이 창설되자 사령관에 임명된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될 당시 현장에 있었으나 기적적으로 위기를 넘겼고, 이후 8월 18일 관동군 시찰 차 하얼빈에 갔다가 만주 작전으로 남진한 소련군에 붙잡힌다. 당시 소련군은 그가 원수였고 당시 관동군 사령관 야마다 오토조 대장보다 선임이란 이유로 그에게 항복문서의 조인을 요구했고, 일본군이 항복한 이후 극동군사재판에서 A급 전범으로 기소되어 종신형을 언도받는다. 허나 1954년 가석방으로 출소했고, 이후 1962년 사망한다. 최종 계급 원수 육군 대장.
- 고모토 다이사쿠(15기): 관동군 소속 참모로 1928년 황고둔 사건을 일으킨 주역 중 하나. 이 사건으로 장쭤린이 암살되면서 봉천군벌과 일본과의 관계가 틀어졌고 당시 일본 정계와 국제정세에 큰 파장을 가져오며 시끌시끌해졌지만 그를 싸고 돈 군부 내 세력으로 인해 처벌을 받지는 않고 예편되는 순에서 마무리된다. 그 후 국공내전에 개입했다가 홍군에 붙잡혔고 전향을 거부하다 1955년 옥사한다. 최종 계급 육군 대좌.
- 우메즈 요시지로(15기): 참모본부 편제동원과장, 육군성 군무국 군사과장 등을 거쳐 참모본부 총무과장을 맡았고, 이후 2.26 사건 당시 2사단장으로서 진압에 참가하고 이후 육군 차관에 임명된다. 이때 황도파를 군에서 몰아내는 숙군 작업을 맡았는데 이 때문에 우익 인사들의 반발을 사 그를 비방하는 투서가 뿌려지기도 했다. 이후 1939년 관동군 사령관에 취임했고, 1944년 도조 히데키가 사이판 함락에 책임을 지고 물러나자 그 후임으로서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된다. 도조 히데키는 당시 총리와 육군대신, 참모총장을 겸직하고 있었는데 총리 직에서 물러나는 대신 육군대신 직은 유지하려 했으나, 육군 3장관[육군3장관] 회의에서 당시 교육총감이었던 스기야마 하지메와 손을 잡고 도조를 밀어냈고, 스기야마가 육군 대신을 맡게 된다. 참모총장이 되어 일본이 항복할 때까지 해당 직을 유지하였는데, 그는 육군대신 아나미 고레치카와 본토결전을 주장해 왔지만 1945년 8월 14일 최종적으로 히로히토가 항복을 결정하고 이를 공식화하자 이에 따르며 육군 청년 장교단의 궁성사건 움직임에 반대하고 나섰다. 최종적으로 전쟁이 끝나자 항복 조인식 당시 시게미츠 마모루 외무대신과 함께 미 해군 아이오와급 미주리함 함상에 올라 항복 문서에 조인한다. 이후 극동군사재판에서 종신금고형이 언도되었으나, 복역 중 1949년 사망한다. 최종 계급 육군 대장.
- 오카무라 야스지(16기): 일본군 최악의 전쟁범죄자 중 한 사람. 신멸작전으로 수많은 중국인들을 학살했으며 일본군 위안부를 만들어낸 인간이기도 하다. 상하이파견군 부참모장과 관동군 부참모장 등을 거쳐 대장으로 진급, 북지나방면군 사령관이 되었으며 1945년 8월 대본영이 포츠담 선언을 수락한다는 소문이 돌자 당시 당초 이에 불복하려 했으나 덴노의 결정이 내려지자 이에 승복한다. 종전 이후 장제스와 손을 잡고 치안을 유지하며 무장을 국민혁명군에 전달하는 조건으로 재중 일본인들을 귀국시키는 데 기여하기도 하며, 이후 전범재판에 회부될 위기에 처하자 모든 책임을 마쓰이 이와네에게 넘기고 병을 이유로 빠져나와 처벌을 받지 않는다. 전후 중국 국민당과 협력관계를 이어갔기에, 전범 기소를 피했고 1966년 병사한다. 최종 계급 육군 대장.
- 도이하라 겐지(16기): 육사 16기와 육군대학을 거쳐 참모본부 지나과(중국과)에 배치되어 오랫동안 근무했지만 집안 연줄 탓에 진급과는 인연이 없어 40세가 되도록 소좌 계급에 머물러 있었으나, 황실과 연줄을 만들어 베이징 무관보로 전출되었고, 이후 황고둔 사건을 주도한다. 1931년 펑톈의 특무기관장에 임명되어 만주로 일본 자본을 침투시키는 역할을 맡았고 이어 만주사변의 발발에 주도적 역할을 맡았다. 이후에도 각종 첩보 및 정치공작을 진두지휘했고 화북분리공작을 고안, 실행하고 각종 정치사건 및 군사작전을 주도하였다. 왕징웨이 공작을 이끌어 왕징웨이 정권을 성립시킨 이후 1938년부터 관동군 사령관을 맡았고, 이후 육군사관학교장과 군사참의관을 역임하고 1941년 진주만 공습과 남방작전을 입안하는 데 참여하였다. 동부군 사령관과 남방 싱가포르 7방면군 사령관을 거쳐 1945년 4월 교육총감에 임명되었고 이후 1945년 8월 14일 아나미 고레치카, 우메즈 요시지로 참모총장과 함께 히로히토 천황이 결정한 항복에 승복, 찬성하는 결의문에 서명한다. 1945년 9월 전쟁 지도 및 남방군 시절 포로 학대 혐의 등이 적용되어 A급 전범으로 극동군사재판에 서게 되었고 1948년 12월 22일 사형이 집행되었다. 최종 계급 육군 대장.
- 이타가키 세이시로(16기): 관동군 참모부장 및 주만주 대사관 국방무관, 관동군 참모장을 역임하였고 1938년 제1차 고노에 내각에서 제46대 육군대신에 임명되어 47대까지 연임한다. 지나파견군 참모장을 거쳐 노몬한 사건으로 일본군이 소련군에 대패하자 이후 조선군 사령관에 임명된다.이후 남방군으로 전보되어 7방면군 사령관이 되었고, 1945년 싱가포르에서 루이 마운트배튼에게 항복하며 종전을 맞는다. 1948년 극동군사재판에서 사형이 언도되었고, 12월 교수형으로 사형이 집행된다. 최종 계급 육군 대장.
- 안도 리키치(16기): 영국령 인도제국 주재 국방무관과 육군 참모본부 근무를 거쳐 육군성 병무과장과 육군 보병학교장을 맡았고, 1940년에는 남지나방면군 사령관 직을 맡게 된다. 이 때 남지나방면군이 나치 독일에 항복한 프랑스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무단으로 진주, 당시 비시 프랑스를 압박하여 인도차이나 파견군을 베트남에 진주시키게 된다. 이는 미국을 자극하여 외교적 마찰이 발생, 미국은 석유 금수와 자산동결 조치를 일본에 취하게 되는데 안도 리키치는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1941년 1월 예편된다. 하지만 1941년 11월 현역으로 복귀, 대만군 사령관에 임명되었고 레이테 만 해전 이후 대만 방위가 위험에 처하자 대만 총독 직을 겸임하게 되면서 최후의 대만 총독이 된다. 종전 이후 중화민국에 항복했고, 이후 상하이로 압송되었으나 감옥에서 음독자살한다. 최종 계급 육군 대장.
- 도조 히데키(17기): 제2차 세계 대전이나 태평양 전쟁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이름 한 번은 들어봤을 제국주의, 군국주의 일본의 상징 그 자체이자 아돌프 히틀러와 베니토 무솔리니, 히로히토와 동급의 취급을 받는 추축국의 전쟁범죄자. 육사를 거쳐 육군대학에 들어갔지만 3수 끝에 들어가고 성적도 매우 좋지 않았으나, 관동군 헌병사령관[35] 직을 맡으면서 잔혹하게 반일세력을 탄압하며 악명을 떨쳤고 1936년 황도파가 주도한 2.26 사건을 진압하면서 세력을 넓히게 된다. 1937년 관동군 참모장 당시 루거우차오 사건을 확대시켰고, 이후 일본군의 대륙침략에 앞장섰으며 이후 고노에 후미마로 내각에서 제50대 육군대신을 역임하며 일본을 추축국에 가입하도록 이끌고 태평양전쟁을 기획한다. 하지만 중일전쟁이 수렁에 빠져들자 태평양전쟁까지 일으키는 건 역부족이라 생각해 개전 반대파로 선회했지만, 육군 강경파가 전쟁을 주장하며 결국 이들을 달래기 위해 제40대 일본국 내각총리대신에 취임한다. 하지만 육군 강경파의 전쟁 여론을 잠재우는 데 실패했고, 그는 군을 달래기 위해 히로히토를 설득, 결국 1941년 12월 진주만 공습을 명령, 태평양전쟁을 일으킨다. 이후 전쟁 초반 일본군이 파죽지세로 진격하자 힘을 얻게 되었고, 문부 및 군수, 상공대신까지 역임하며 막강한 권력을 휘둘렸으나 이후 미드웨이 해전을 기점으로 일본군이 열세로 전환되자 육해군과 정계의 신임을 잃게 된다. 하지만 그는 육군 참모총장과 해군 군령부총장을 경질하는 것으로 대응했고, 이후 총리대신과 육군대신, 육군참모총장 세 자리를 겸임하며 권력을 휘둘렀다. 하지만 일본군은 제대로 반격을 시작한 미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고, 결국 1944년 7월 사이판이 미군에 함락되자 책임을 지고 총리 직에서 물러났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군부와 정계에 영향력을 행사했으나 도조를 견제하려 한 히로히토의 의지로 스즈키 간타로가 총리직을 맡게 되었고, 이후 일본 정부의 항복 교섭을 방해하며 끝까지 항전을 주장했으나 결국 일본은 항복한다. 이후 당연히도 전쟁과 패전의 원흉으로 일본 국민들과 세계 여론의 비난을 받게 되었고, 역시 당연히도 제국주의 일본의 전쟁 지도자로서 A급 전범으로 기소되어 극동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교수형으로 사형이 집행된다. 최종 계급 육군 대장.
- 야마시타 도모유키(18기): 히로시마 육군유년학교와 육군중앙유년학교를 나왔고 육군대학교를 28기로 졸업후 스위스와 독일에서 유학생활을 한 뒤 귀국후에는 육군성 군사과장, 군사조사부장등을 역임하였다. 이후 태평양전쟁이 시작되고 25군 사령관이 되어 싱가포르 전투에서 영국군 싱가포르 주둔군 사령관인 아서 퍼시벌에게서 항복을 받아내는 전공을 세웠으나 황도파 출신이었기에 도조 히데키 등의 통제파에게 견제를 받아 만주로 좌천되기도 한다. 그러던 중 전황이 불리해져 패전이 다가오자 필리핀 방어전을 맡으라는 임무를 받게 되었으나 이미 대세는 기울었고, 필리핀 방어전에서 마닐라를 무방비도시로 선언하고 잔존부대를 루손 북부의 산악지대로 이동시켜서 지연전을 펼치는 전략을 수립했으나, 그에 반대한 해군 병력은 마닐라 대학살을 일으킨다. 그의 가혹한 부하 관리와 포로 대우는 결과적으로 학살과 전쟁범죄를 유발했고 최종적인 필리핀 방면군의 최고 지휘관은 그였기에 결과적으로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전범으로서 교수형에 처해진다. 최종 계급 육군 대장.
- 이마무라 히토시(19기): 도쿄대학 법학부를 지망했으나 아버지의 이른 죽음으로 어머니와 많은 형제들을 돌봐야 했기에 육군사관학교로 진학한다. 육군유년학교와 사관학교를 나온 뒤 육군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으며 이후 5사단장으로 중일전쟁에 참전, 난닝 공략에 전공을 세우고 태평양 전쟁 개전 시엔 16군 사령관으로 남방작전에서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공략을 맡는다. 점령 이후 자바 섬에선 민간인 학대를 금하고 보호하란 명을 내렸지만 그를 물러터졌다고 본 대본영은(...) 그를 대장으로 진급시키며 제8총군 사령관으로 라바울로 보냈고 식량과 보급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둔전책을 고안, 종전시까지 라바울을 방어했으나 미군이 굳이 라바울을 건들려 하지 않아 그대로 전쟁이 끝난다. 패전 이후 휘하 장병들의 교육과 복지에 고심했으며, 본국으로 돌려보내는 임무를 맡은 뒤 자살을 시도했으나 실패, 이후 호주군 주관 전범재판에서 10년형을 선고받고 네덜란드 동인도제도에서도 전범재판을 받았으나 그가 현지인을 학대하지 말도록 지시한 점이 인정되어 네덜란드에선 무죄판결을 받는다. 이후 부하들을 걱정해 그들이 있는 라바울로 이감을 자처, 맥아더를 비롯한 이들의 높은 평가를 받았고 석방 이후 저술활동을 하다 병사한다. 최종 계급 육군 대장.
- 기무라 헤이타로(20기)
-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왕(20기)
- 이시와라 간지(21기)
- 무타구치 렌야(22기)
- 스즈키 데이이치(22기)
- 아마카스 마사히코(24기)
- 다치바나 요시오(25기)
- 도미나가 교지(25기)
- 사토 고토쿠(25기)
- 미야자키 시게사부로(26기)
- 쿠리바야시 타다미치(26기)
- 하나야 타다시(26기)
- 사토 겐료(29기)
- 사나다 조이치로(31기)
-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34기)
- 츠지 마사노부(36기)
- 세지마 류조(44기)
- 다카히토(48기)
6.2. 중국인
- 천이(5기)
- 쑨촨팡(6기)
- 양위팅(8기)
- 쉬충즈(14기, 보병과 3기)
- 천두슈(15기)
- 차이어(16기, 기병과 3기)
- 취퉁펑(16기)
- 우광신(16기)
- 푸량쭤
- 리례쥔
- 탕지야오(17기, 보병과 6기)
- 청첸(17기, 보병과 6기)
- 쉬수정(19기)
- 장덩쉬안(19기, 공병과 5기)
- 자오헝티(20기)
- 옌시산(21기)
- 허잉친(28기)
- 주사오량(28기)
- 탕언보(39기, 포병과 15기)
[1] 육군병학료(陸軍兵学寮)에서 병학교로 변경함. 병(兵) 학교(學校)가 아니라 병학(兵學) 교(校). 병학, 즉 군사학을 가르친다는 뜻이다. 해군사관학교에 해당하는 일본해군병학교는 이 명칭을 유지했다.[2] 정확히는 자마시로 이전하고 나서부터. 그 이전에는 육사 위치에서 따온 이치가야대(市ヶ谷台)라고 불렸다.[3] 무대(舞臺)는 춤추기 위한 높고 평평한 시설물이다.[4] 한국전쟁 당시에도 육사 생도 1~2기생이 끌려가서 1/4정도가 사망 하였다. 그러다 육군종합학교로 옮겨져서 육종 1~2기생으로 장교 임관 하게된다. 그나마 졸업을 앞두었던 생도 1기는 1955년에 육사10기로 인정 받았으나 교육기간이 한달도 안되던 생도 2기는 그냥 없는 사람 취급 받아 육사 기수도 부여 받지 못했다.[5] 청일전쟁 후 군비확장의 일환으로 도쿄, 센다이, 나고야, 오사카, 히로시마, 구마모토 등 과거 진재가 있던 곳에 유년학교 6개가 생겼다. 각 정원은 50명으로 총 300명. 2년동안 지방에서 배우다가 3년째 도쿄의 중앙유년학교에서 교육받게 된다.[6] 유년학교 출신들은 일반 중학교 출신을 깔보았다. 스스로를 'D' 또는 '카디'라고 하였는데 프랑스어로 유년 사관학교 출신이라는 뜻이다. 일반 중학교 출신들은 공포(Platpatrone 독일어임)에 질려 소리만 지른다는 뜻의 'P'라고 불렀다. 심지어 사관학교 교관이나 구대장이 P임이 밝혀지는 순간 말을 듣지 않았다.[7] 대한제국이 살아 있을때 넘어갔던 조선인들의 경우, 당시는 육사예과가 아니라 일본중앙유년학교 졸업후 본과로 넘어갔다.[8] 일본군은 신병교육대가 없고 자기 부대에서 고참들과 섞여 자면서 교육 받는다.[9] 국어, 한문, 작문[10]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러시아어, 중국어 중 하나를 선택[11] 1코마가 50분 단위이다.[12] 법명으로 속명은 사메지마 마사즈미(鮫島正純)였다.[13] 만주국육군군관학교예과 2년 교육후 성적 우수자에 대한 특례로 일본육사 본과로 유학갔다.[14] 탈출하여 독립군이 된 지청천, 김경천 장군 포함[15] 탈출하여 독립군이 된 이종혁 포함[16] 조선인이 다니는 고등보통학교에는 교련 과목이 없어서 육사 입시에 불리했다. 채병덕, 이종찬은 일본인이 다니는 중학교 출신. 이후 1934년 9월부터 고보에도 일본군 장교들이 파견되어 교련교육이 시작된다.[17] 한동네이긴 하지만 학교가 달라 서로 몰랐다. 이후 정일권은 성적우수로 일본육사로 유학오게 되어 유재흥과 같은 55기가 된다. 다만 교육을 따로 받아 서로 모르는 것은 여전했다.[18] 초대 해군참모총장 손원일 제독(중화민국 상선학교를 졸업하고 중화민국과 독일 상선에서 항해사로 일했다.) 등 창설 멤버 대부분이 민간 상선사관 출신들이었다.[19] 1943년에야 수병에 한해 지원을 받았고, 그나마 함정에는 배치하지 않고 육전대나 설영대(시설대), 항공대, 육상 경비대 등에만 배치했다. 해군병학교는 패전시까지 조선인의 입학을 불허했으며, 소수가 일본인 가정에 양자로 들어가 서류상 내지인(일본인)으로 분류되어 입학 및 임관한 바는 있다.[20] 일본군 중위 후 만주군으로 옮겨 중교까지 승진[21] 그렇기 때문에 채병덕이 자신보다 7기수 아래이자 계급도 대위인 이형근이 장인빽으로 대한민국 군번 1번을 받았다고 분노하며 최초의 계파 싸움이 벌어졌다.[22] 군사영어학교 수료로 쳐준 이응준 포함[23] 일본의 황족이 입학하면 어학우 자격으로 같이 가서 시중 들어주는 사람이 있는데 조선왕공족도 이런 예를 따랐다.[24] 후쿠자와 유키치가 도쿄에 만든 사립 학교로 현대의 게이오기주쿠대학의 전신. 구한말에 조선인 유학생 수백명이 도일하였는데 상당수가 게이오의숙에서 1년 가량 일본어와 기초학과에 해당하는 '보통학'을 공부했다.[25] 일본 중앙유년학교와 동격의 학교로 명성이 높음. 1885년에 창립되었으며, 초기에는 세이조학교 또는 육군유년학교 출신자만 육사에 갈 수 있었다. 1897년에야 육군보충조례에 의해 5년제 심상중학교 출신자도 육사 입교 가능[26] 다른 2명은 육사 26기 이응준 대좌, 만주군 원용덕 중교.[27] 33명중 3명만 기병. 나머지는 전원 보병[28] 애초에 육해군 대신 현역 무관제를 유지했기에 현역 군인인 육해군의 장성들이 내각에 참여하는 구조였고, 이들이 내각 조각에 참여를 거부하면 내각이 무너지기 때문에 내각은 군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거기에다 일본국 내각총리대신부터가 상당수가 군인 출신이었기도 하다.[육군3장관] 육군대신, 참모총장, 교육총감[30] 이 시절 하마구치 내각에서 무임소대신을 맡는 방식으로 업무를 맡았다.[31] 조선총독을 지내며 무단 통치로 악명높았던 그 사람 맞는다. 아버지인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1871년 일본 육사 출범 전에 소위로 임관했다.[32] 다만 일본군에서 원수는 계급이 아니라 칭호기에, 여전히 육군 대장이었다. 즉 원수 육군 대장.[육군3장관] [육군3장관] [35] 사실 육군대학 출신이면 갈 일이 없는 한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