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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ruby(朝鮮軍, ruby=ちょうせんぐん)]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에 주둔했던 일본군.
대한제국이 멸망한 이후 한반도 지역의 명칭은 조선으로 환원되었고, 이에 조선에 주둔하는 군대라는 의미로 조선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만주의 일본군을 관동군, 대만의 일본군을 대만군이라고 했듯이 조선의 일본군을 조선군이라고 칭한 것이다.
당연하지만, 1907년에 해산된 조선의 정규군인 조선군과는 전혀 관련이 없으며, 현대 대한민국에서는 점령군 명칭을 친절하게 구분지어줄 필요도 없고 진짜 조선군과 오해하기도 쉬워서 통상적으로 조선에 주둔한 일본군에 대해서는 '조선군'이란 단어를 쓰지는 않고 그냥 '일본군, 조선 주둔 일본군'으로 쓰인다.[1][2]
2. 배경
한반도와 일본 열도 간에는 고대에서부터 개화기 이전 전근대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몇차례 군사적 충돌이나 접점이 있었다.[3] 일본 제국의 군대인 일본군을 처음 접한 것은 근대의 운요호 사건부터다. 메이지 유신을 편 이후 다시 정한론이 득세하자 신생 일본 해군은 1875년 운요호 사건을 일으키고 이듬해 강화도 조약을 체결시킨다. 이후 1880년에 일본 공사관을 경비하기 위해 파견된 6명의 인원이 한반도에 처음 주둔한 일본군이다. 이들은 군부대는 아니고 국방무관이었다.1882년 임오군란 이후 일본 공사관이 공격당하는 피해를 본 일본은 조선 조정과 제물포 조약을 체결하여 공사관수비대 명목으로 1개 중대 병력을 한양도성 안에 주둔시키었다. 이렇게 조선에 주둔하게 된 일본군은 주둔부대 교체 시기에 2개 중대를 바탕으로 갑신정변에 개입했다가 청군과 무력충돌을 벌였다. 청군 측의 병력이 일본군의 열배에 가까운 2,500명이었기 때문에 일본군은 수적으로 압도당했다. 일본측은 군인 4명을 포함한 40명의 사망자를 낸 채 인천을 거쳐 나가사키로 탈출했다. 하지만 갑신정변 이듬해인 1885년 4월 이토 히로부미와 이홍장이 텐진조약을 체결하면서 양측은 조선에서 군대를 철수 시키고 파병이 필요한 경우 서로에게 사전에 고지하기로 타협했다. 일본은 2개 중대 병력을 청군 2,500명과 교환하고 조선에 다시 개입할 수 있는 명분을 확보하여 조선에서 영향력을 외교적으로 만회할 수 있었다.
1894년에 조선 조정이 동학농민운동을 제압하려는 목적으로 청군에 도움을 요청하자 청일간에 맺은 톈진 조약에 의거해 일본군도 조선에 다시 들어온다. 하지만 진짜 난을 진압하려고 온 청군과 달리 일본군은 조선을 점령하려고 인천에 상륙한 다음 남산에 포대를 설치하고 경복궁을 점령해 버린다. 그리고 동학군이 아닌 청군에 기습 공격을 퍼부으며 청일전쟁을 일으켰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은 청나라에게 처참한 패배를 안겨주고 일본은 청나라 세력을 조선에서 배제시키는데 성공했다. 전쟁으로 청나라를 조선에서 쫓아냈지만 삼국간섭으로 조선에 대한 영향력이 도로 축소되고 러시아의 영향력이 강화되었다. 일본측은 상황타개를 위해 이듬해에 군인 출신 외교관 미우라 고로가 명성황후 시해를 주도하여 을미사변에도 가담하였다. 이후 아관파천으로 러시아군이 한국에 주둔하고 조선에는 친러정권이 수립되었고 일본의 영향력은 축소된다. 당시 일본은 러시아와의 대결을 시기상조로 보아 부담스럽게 여겨 우선 협상을 택했다. 일본은 1895년 5월 조선내 일본인 및 전신 보호를 명분으로 서울에 2개 보병 대대, 부산과 원산에 각 1개 중대, 철도연선에는 임시헌병대만을 주둔시키고 나머지 병력을 철수 시켜 러시아와 긴장국면을 조성하는 것을 회피하였다. 러시아 역시 영국과 일본이 협력할 것을 우려하여 일본과 타협에 나섰다. 이듬해인 1896년 양국은 베베르-고무라 각서를 통해 양측은 동수의 병력을 조선에 주둔시키기로 합의하였다. 일본은 서울, 원산, 부산에 육군 4개 보병중대 및 200명 미만의 헌병을 조선에 주둔시키었다. 이 병력은 한국주차대라 불리었고 러일전쟁 직전인 1903년까지 유지되었다. 그동안 일본은 군비를 확충하는 한편 영국, 미국과 외교적 보조를 맞추며 지지를 확보하였다.
1904년, 한반도를 사이에 두고 러시아와 일본 양측간에 러일전쟁이 발발하였다. 일본은 러일 전쟁 중 한반도를 확보하기 위해 한국주차군을 편성하였다. 개전 후 대규모 일본군이 한국에 상륙해 인천에 주둔한 러시아 함선을 박살내고 다시 한성을 점령, 중립을 선언한 대한제국을 협박해 한일 의정서를 강제로 체결한다. 사실상 이 때부터 한국은 일본군에 점령된 것이나 다름없다.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자 1905년 을사조약 체결을 강요하면서 대한제국은 사실상 패망했다. 이 때 이토 히로부미의 명령 아래 일본 육군 병력들이 덕수궁을 점령하여 고종과 관료들을 위협하는 역할도 맡았다.
을사조약 이후 일본군은 조선군을 계승한 대한제국군을 강제로 해체시키려 들었고, 대한제국군은 이에 맞서기 위해 남대문 전투 등 교전을 벌였으나 일본군에 의해 진압당하고 쫓겨났다. 이후 잔존 대한제국군이 주축이 된 의병이 전국적으로 일어나자 일본군은 호남 지방으로 남하해 남한 대토벌 작전을 벌이면서 의병운동을 무자비하게 짓밟았다. 이렇게 한반도 안의 조직적인 저항은 일본군에 의해 사실상 사라지면서 1908년 남한 대토벌 작전 이후 일본군은 일제강점기가 끝날 때까지 한반도의 유일한 군사 조직으로 군림하게 된다.
3. 창설
조선군의 직접적인 기원이 되는 군사조직은 러일전쟁 당시인 1904년 창설된 한국 주차군이다. 이들은 대한제국에 대한 무력 압박 및 항일 의병 진압에 투입되었으며, 기존 조선군의 강제 해산에도 동원되었다. 이후 경술국치로 대한제국이 일본 제국의 식민지가 되고 조선총독부가 들어서자 조선 주차군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이 시기까지는 조선에 주둔하는 부대가 별도로 정해진 것이 아니라 본토 주둔 사단들이 2년 로테이션으로 한반도에 파견되는 형식이었다. 그리고 필요에 따라 대대 또는 여단 등의 개별 부대가 증파되곤 했다. 처음에는 1개 사단이 주둔했지만 1910년 2월부터는 주둔 사단이 2개 사단으로 늘어난다.그러던 것이 한반도의 영토화가 확고해지면서 1915년에 한반도에 상설 주둔하는 육군 2개 사단이 필요하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이에 따라 준비된 19사단(나남. 현 함경북도 청진시), 제20사단(경성부)의 2개 사단이 한반도를 군관구로 하여 정식으로 편성되면서 1918년에 조선군 사령부가 발족했다. 2개 사단 편성이 완료된 것은 1921년. 이것이 이 항목에서 설명하는 "조선군"이다.
이들은 조선을 군관구로 하고 있으면서도 병력은 대부분 일본 본토에서 차출하여 충원했다. 조선인에게는 병역 의무가 없었고, 병역 의무가 있는 조선 거주 일본인은 숫자가 적어서 2개 사단의 병력 수요를 제대로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4]
조선군 사령부 본부는 지금 주한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용산 일대에 위치했으며, 육군 20사단 사령부 및 예하부대, 조선 주둔 해군 사령부도 이곳에 주둔했다. 1930년대의 지도를 보면 현재의 용산고등학교 일대에 78연대/79연대/포병대 주둔지가 있었고 경리단길에는 사격장이 있었다. 동부이촌동에는 기병대가, 서빙고에는 공병대가 주둔했다.
육군 뿐 아니라 해군 역시 주둔했는데, 진남만과 영흥만에 방비대를 두었다가 1916년 4월부터 일본이 만든 해군도시이자 군항인 진해구에 군항부를 두고 구축함을 배치했다. 지금 진해가 해군도시가 된 것도 이 영향이다.
4. 지휘체계
조선총독부는 일본 내부부국 산하기관으로 도쿄도에 있는 일본 제국 내각총리대신의 소관 기관이듯, 조선군 역시 일본 제국 육군 참모본부의 지휘통제를 받는다. 조선총독은 천황의 칙령으로 위임을 받은 범위 내에서 조선의 방위를 위한 군사 권한을 행사한다. 그러나, 일본 군부는 천황이나 내각의 통수권을 무시하고 스스로 통수권을 행사한만큼 조선총독의 군령권은 제한되었다. 1910년의 한일합방 당시에는 아예 주차군의 전 지휘권이 조선 총독에게 있었으며 이들이 조선의 치안을 담당했다. 3.1운동 시절까지 조선사람들 괴롭히던 "육군 헌병"이 바로 조선군 소속. 1919년 이후 "협조를 요청할 수 있다"고 규정이 변경되었으나 이때는 조선 내의 치안 업무가 경찰 담당으로 넘어가서 크게 의미는 없었다. 이 조치는 조선 통치에는 직접적인 영향이 별로 없었지만 조선군 사령부가 조선총독부로부터의 독립성을 강화하게 되었다. 이후로 조선군이 능동적으로 관동군의 대륙 진출에 협력하는 등 대외활동에 보다 자유롭게 나설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5]5. 임무
조선군의 임무는 한반도 주둔 및 치안 확보, 대러시아-소련 방비 그리고 대륙정책 및 대륙 침략 관여와 대비 정도로 정리할 수 있다.치안 유지 이외에 대외적인 조선군의 1차적인 임무는 만주 및 소련 국경의 방어였다. 만주사변과 만주국이 성립하면서 만주로부터 대규모의 침략을 받을 위험은 없어졌지만 만주를 거점으로 한 독립군의 활동은 1920년대 이후로도 수시로 있었으므로 이에 대한 방어의 필요가 있었다. 또한 소만국경에서도 1935년부터 분쟁이 빈발하여 소련과의 마찰 위기가 상존했으며, 한소국경에서도 긴장이 고조되어 장고봉 사건이 발생하는 등 위기가 고조되자 1930년대 후반부터는 이에 대한 대비가 강화되었다.
그 외에 병력이 부족한 관동군을 지원하여 중국에 대한 침략활동에 나서기도 했다. 만주사변을 일으킨 관동군은 본국에 병력 증원을 요청했는데 당시 재정부족에 시달리던 본국 정부는 침략의 확대를 거부했다. 이에 관동군에 동조한 조선군 사령관이 독단으로 20사단 병력을 재편성해 조직한 1개 여단을 월경시켜 관동군의 지휘를 받도록 했으나, 이러한 독단적인 조치에 대해서 본국에서는 아무런 처벌도 가하지 않았다. 도리어 전쟁이 확대되면서 1개 여단이 증파되었고, 20사단 사령부까지 나갔다. 그리고 20사단은 중일전쟁의 확대로 아예 본격 참전 테크를 타게 되며, 1939년 말이 되어서야 소집 해제로 조선에 복귀하였다.
이뿐 아니라 조선군은 만주사변 발발 시점에서 독자적으로 간도를 침공하려고 획책하기도 했다. 이 당시 간도는 장학량 정권의 지배하에 있는 변두리 지역이었는데, 관동군 주력은 만주의 핵심을 제압하느라 이런 변두리까지 손을 뻗칠 능력이 되지 못했다. 간도는 조선인이 많이 거주하는 곳으로 항일 게릴라의 주요 근거지였던 탓에 이 기회를 타서 조선군이 직접 토벌하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전선 확대를 꺼리는 중앙 정부의 견제로 인해 이 출병은 성사되지 못했고 곧 만주국이 수립되면서 불가능한 것이 되었다. 이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해 전쟁 스케일이 커지자 다수의 전투부대가 남방전선으로 차출되었다. 여기에 전황이 점점 악화되면서 미군의 일본 본토 및 한반도 침공 가능성이 커졌다. 1945년에는 본토결전을 대비한 결호작전을 위해 일본군의 구조가 개편되면서 조선군은 해체되고 한반도는 17방면군 예하 조선군관구에 속하게 되었다. 여기서 17방면군은 전선에서의 전투를, 조선군관구는 후방의 지원 업무를 담당하며 사령관과 참모장은 겸임이었다.
태평양 전쟁 말기에는 소련의 침공 위험이 높아졌다. 그 결과 17방면군의 주력은 한반도 중부 및 남부 지역(38선 이남)에서 미군의 침공을 대비하는 한편 한반도 북부 지역(38선 이북)에서의 작전권한은 17방면군으로부터 관동군에게 넘어갔다. 하필이면 이 경계가 삼팔선이어서 일본이 남북분단을 유도했다는 설이 나오기도 한다. 이후 한반도 전역에서 부대를 새로 편성하고 장비와 병력을 충원하며 방어 준비를 하던 중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라는 핵펀치를 얻어맞고 만주 전략 공세 작전으로 마지막 희망인 관동군마저 소련군에게 무참하게 박살이 난 후 일본 본국이 손을 들면서 조선군이 가열차게 건설한 방어시설들은 모두 무용지물이 되었다.
6. 활동
해방 직후인 1945년 9월 10일, 서울에서 미군의 감시 하에 본국으로 철수하는 조선군 장병들.
6.1. 창설 초기
주차군 시절에는 본토 사단들이 교대로 파견을 오다가 조선군으로 정식 개편될 때는 19, 20 두 개의 상비사단이 설치되었다.1910년 부터 상비사단 설치 문제가 제기되었는데 당시 일본의 경제력상 큰 논란이 되었다가 1915년 12월에 사단 사령부 설치 후 1920년에 마지막 연대가 창설되어 배치 완료된다. 이후 1943년까지, 그러니까 일제강점기 내내 아래의 2개 사단 편제였다.
- 제19사단(나남) - 73연대(나남), 74연대(함흥), 75연대(회령), 76연대(나남), 기병27연대(나남), 산포병25연대(나남)
- 제20사단(용산) - 77연대(평양), 78연대(용산), 79연대(용산), 80연대(대구[6]/대전[7]), 기병28연대(용산), 야포병26연대(용산). 공병20연대(용산)
각 사단은 2개 보병여단 4개 보병연대의 4각 편제였다. 포병연대, 공병연대, 치중연대가 있었으며 평시 병력은 각 사단 1만 2천명이었다. 조선군이라고 하여 조선 사람이 있는 것은 당연히 아니고 19사단은 도후쿠, 20사단은 간사이, 규슈 지역에서 병력 충원하였다. 다만 조선이 망하면서 일본 육사로 넘어간 일본 육사 26기~27기 조선인 장교들이 있었다.[8] 그리고 19사단은 두만강 연안의 국경 경비를, 20사단은 북서부 압록강 유역과 남한지역의 경비를 담당하였다. 이들 2개 사단은 1925년 4개 사단을 폐지하는 우가키 군축에도 살아 일본 육군을 대표하는 17개 사단의 일익을 담당한다.[9]
6.2. 중일전쟁기: 전시체제 돌입
1930년대 중후반 이후 일본 군부가 노골적인 대외 팽창 의도를 내비치며 이웃국가들에 전쟁 도발을 일삼았다. 이에 따라 조선군의 편제에도 변화가 생겼고 조선군은 일본제국의 대외 침략에도 상당한 관여를 했다. 특히 1937년 7월 중일전쟁 발발이후 조선군은 전투부대로 재편되어 예하 사단에 고사포연대, 통신대대, 치중병 연대가 새롭게 편재되었고 완편 체제인 2만5천명을 꽉꽉 채운다.7월 7일 노구교 사건 직후 조선군사령관 구니아키는 육군에 조선군 예하 20사단이 화북으로 출동 가능함을 알렸다. 중일 양국군이 휴전협정을 체결한 당일날인 7월 11일 밤 20사단은 관동군 예하 2개 혼성 여단과 함께 화북 파견을 명받았고 제20사단에는 응급동원령이 하달되었다. 20사단은 8월부터 일본 내지로부터 증강된 다른 사단들과 함께 북지나방면군 제1군에 편입되어 중국 전선에 투입되었다.
이듬해인 1938년 7월에는 보병 제73연대를 중심으로한 19사단 병력이 훈춘 인근 장고봉에서 소련군과 무력충돌을 벌였다가 노몬한 전투의 프리퀄을 찍으며 박살이 난채 물러났다. 같은 해 10월부터는 조선지원병 제도가 생기면서 본격적으로 조선인 병사들이 입대한다. 조선인들은 중대당 1~2명으로 분산배치했는데 가능한 연고지 인근 연대로 갔다. 전쟁 말기 조선인 비율이 높아졌지만 제1선 부대 20%, 후방부대 40%, 근무부대 80%라는 한도가 있었다.
중일전쟁이 뜻밖에도 장기화 국면에 접어들자 일본군은 곤경에 처했다. 또한 소련한테 괜히 시비털었다가 대소관계도 악화됨에 따라 소련을 대비하기 위해 중국에 파견된 관동군 및 조선군 병력을 다시 복귀시킬 필요가 있었다. 1939년 11월 7일 20사단은 동원 해제되어 다시 주둔지인 경성으로 복귀했다.
한반도와 만주 사이의 경계는 본래 국경경비대가 맡았으나, 1936년 6월 부로 철수한다. 이후 한만국경 경비는 전적으로 경찰의 소관이 되었다.
6.2.1. 세 번째 상주 사단 창설
중일전쟁이 장기화되어 병력이 부족해지자 일본군은 본격적인 군비증강에 나섰다. 일본 육군참모본부는 종전의 4단위 체제인 사단을 3단위로 재편하고 추출한 연대 1개씩을 모아 신규사단을 편성하기 시작했다. 조선군 역시 1939년에 기존 제19, 20의 2개 사단 체제에서 각 사단의 1개 연대씩을 차출하여 평양에서 신규 상주사단인 제30사단 편성에 착수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면서 전쟁의 양상이 확대되어 급박해졌다. 이런 이유로 신규 제30사단의 편성은 더디게 진행되었고, 태평양 전쟁이 중반에 접어든 1943년 5월에서야 완료되었다.- 제30사단(평양) - 74연대(함흥), 77연대(평양), 41연대(히로시마)
6.3. 태평양 전쟁기: 남방전선 파견
태평양 전쟁이 발발한 이후에도 조선군은 한동안 한반도에서 주둔군 임무를 수행했다. 하지만 미드웨이 해전과 과달카날 전투 패배를 기점으로 전황이 급격히 기울기 시작했다. 악화된 전황 때문에 조선군 예하 부대는 차례 차례 남방 전선으로 파견되었다.상주사단이 전장으로 파견되고 한반도의 원 주둔지에서는 파병인력외 남은 잔류인원으로 '유수사단'(留守師團)이 편성되었다. 일본군 사단의 인원규모가 워낙 크다 보다 1개 사단을 파병하고도 남은 유수 부대의 규모도 상당했다. 6개월 초병 교육 중 검열에 탈락했다는 이유로 남거나, 서무 업무를 위해 잔류하기도 했다. 이들 유수사단은 조선군 뿐 아니라 일본의 다른 상설사단들도 전선으로 동원되면 원 주둔지에서 편성되어 유수 및 병력보충 임무 등을 수행하여 파병된 본대를 행정적으로 지원했다.
가장 먼저 20사단이 1943년 1월 동부 뉴기니로 파병되었다. 25,591(보충병 5,250명 포함) 명 중 24,780명이 전사하고 꼴랑 811명이 생환하여 전사율이 무려 96.8%에 달했다. 이 중에서 육군특별지원병[10]은 1,901명[11]이 동원되어 1,603명이 전사하고 298명이 살아남아 전사율이 84.3%였다.
30사단은 편성된지 1년 정도 지난 1944년 5월, 필리핀 민다나오/레이테만으로 파병되었고 이곳에서 보병 제41연대와 합류하여 사단 창설 이래 전 전력이 처음으로 온전히 합류했다. 하지만 41연대는 이전부터 계속 격전에 투입되었던지라 전력이 반으로 줄어있었다고 한다. 이후 맥아더의 미군과 40만 vs. 40만의 드림매치를 벌인다. 16,249명이 동원되어 12,832명이 전사하고 3,237명이 생환하여 전사율이 79%에 달한다. 이 중에서 조선 육군특별지원병은 1,247명이 동원되어 977명이 전사하고 270명이 생환하여 전사율이 78.3%에 달했다.
1944년 2월에는 제49사단이 조선에 잔류한 유수 20사단 및 일본 나라현의 독립 64 보병대를 기간으로하여 경성에서 편성에 착수했다. 49사단은 창설이 완료되자마자 1944년 6월 무다구치 렌야의 임팔작전으로 전황이 급박해진 버마전선으로 떠났다. 다른 19, 20, 30 사단과 달리 조선군의 상주사단이 아니었다. 따라서 다른 사단들처럼 유수사단도 편성되지 않았다.
- 제49사단(경성) - 106연대(경성), 153연대(경성), 168연대(경성)
조선에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19사단은 필리핀에서 격전이 한창이던 1944년 11월 동원 되었고 다음달인 12월에 필리핀 루손으로 파병되었다. 12,328명 중 전사 8,233명, 생환 4,095명으로 66.8%의 전사율을 기록한다. 20사단내 조선인은 1,888명으로 941명이 전사하고 947명이 생환하여 전사율 49.8%이다.[12]
이 시점에서 한반도에 잔류한 조선군 예하의 주요 부대는 다음과 같다.
- 조선군사령부
- 유수 제19, 20, 30 사단
- 독립혼성 제101연대
- 나진, 부산, 여흥만, 여수 요새
- 마산중포병연대보충대, 고사포 제152연대, 독립고사포 제41, 42대대
- 조선군항공정보대
- 기타 등등
6.4. 대전말: 본토 결전 준비
자세한 내용은 결호작전 문서 참고하십시오.조선군으로서는 갖고 있던 사단을 모조리 투입한 보람도 없이 1945년 무렵에는 마리아나가 무너지고 필리핀이 무너지고 이오지마가 무너지고 미군이 일본 본토 코앞까지 밀고 들어왔다. 미군의 일본 본토 상륙이 임박해오자 1945년 1월 20일 대본영은 대미 본토결전을 부랴부랴 준비하기 시작했다.
1월 22일을 기점으로 대본영은 오키나와를 제외한 황토, 즉 일본제국 본토의 주요 지역에 작전을 담당할 방면군과 군정을 시행할 군관구로 통수조직을 개편했다. 일본 열도에는 11, 12, 13, 15, 16의 5개 방면군이 새로이 편성되고 방면군을 행정적으로 지원할 군관구들이 설치되었다. 단 임무의 충돌이 없도록 방면군과 군관구의 사령관은 겸임했으며 방면군과 군관구는 참모의 상당수도 공유했다.
한반도 역시 본토결전을 대비하여 조선군의 군제개편이 실시되었다. 조선군은 1945년 2월 17일 대미 작전을 수행할 17방면군과 군정권을 행사하는 조선군관구사령부로 분리되었다. 다른 방면군-군관구와 마찬가지로 17방면군과 조선군관구사령부 역시 사령관과 참모장이 겸임하였다. 사령관에는 조선군 사령관인 이타가키 세이시로가 유임했다.
6.4.1. 제17방면군
일본열도의 다른 방면군과 마찬가지로 이름만 방면군으로 바꾸었다고 없던 전력이 하늘에서 뚝 떨어질리는 없었고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대본영과 17방면군, 조선군관구는 중국, 만주 등 전선에 나가 있던 병력을 이관받는 한편 일본본토 및 한반도에서 중장년층 아저씨들을 마구잡이로 재소집하는 등 필사적으로 병력 보강에 나섰다. 총독부의 협력 아래 조선인에 대한 대규모 징용, 징병도 시행되었다.1945년 이후 조선군(17방면군) 예하에 편성된 부대는 아래와 같다. 사단 단대호만 보더라도 태평양전쟁 말기에 급하게 창설된 2류 부대.
- 제17방면군
- 제120사단(대구)
- 제150사단(광주)
- 제160사단(군산)
- 제320사단(경성)
- 독립혼성 제127여단(부산)
대본영은 <제국 육해군 작전계획 대강> 제1차로 2월 28일 자로 제150, 160사단을 '연안배비사단'을, 2차로 4월 상순부터 120사단으로 '결전사단', 3차로 5월 하순부터 '제320사단'등으로 '연안배비사단'을 만들라는 명령을 내린다.[14] 조선인 대규모 징병도 이와 관련 있는데 17방면군 중 제58군과 이에 배치될 예정인 120사단을 제외하면 약 120,000명인데 1/3 정도인 약 40,000명이 조선인이었다.
6.4.1.1. 제58군 창설: 제주도 방어 준비
자세한 내용은 결7호 작전 문서 참고하십시오.- 제58군(제주시)
- 제96사단(제주 중앙) - 292연대, 293연대, 294연대
- 제111사단(제주 서남부) - 243연대, 244연대, 245연대
- 제121사단(제주 서북부) - 262연대, 263연대, 264연대
- 독립혼성 제108여단(제주 동부) - 642 ~ 647대대
제주도 주둔 육군 병력은 총 74,781명이며[17] 그중에서 대충 1/3정도가 조선인이었다.[18] 위의 4개 사단/여단은 만주/일본에서 온 부대라 조선인 비율이 10% 남짓이었고, 그 다음으로 큰 부대가 제1특설근무대[19]인데 노가다 부대로 6,620명 중 본부와 일본인 십장들을 빼면 거의 조선인이어서 대충 5,000명쯤 되었다. 58군 소속이 아닌 잡다한 육상근무중대, 특설경비공병대, 특설경비중대도 거진 조선인이었다. 그 외에 수만 명의 제주 도민들이 진지 공사에 동원되었다.
6.4.2. 조선군관구
조선군관구 사령부는 제17방면군의 작전지역인 한반도 내에서 군정권, 구체적으로 병력 보충, 인력동원, 보급, 교육훈련, 의료, 경리 등 제반 군사행정 전체를 총괄했다. 여러 임무 중에서도 본토결전이 임박한 당시에 가장 시급했던 문제는 당연 징병업무였다.종전에 한반도에는 19사관구와 20사관구의 두개의 사관구가 존재했다. 두 사관구는 각각 19, 20사단의 위수지역을 담당했다. 하지만 상술했다시피 재조선 일본인만으로는 두 사단에 필요한 병력자원을 징집할 수 없어 19, 20사단은 일본본토로부터 인력을 충원받았다. 때문에 두 사관구는 일본 본토의 사관구나 연대구와는 달리 연고지의 징집대상자를 사단에 보충하는 업무를 수행하지 못했다. 재조선 일본인들도 호구상 본적은 일본 본토의 출신지역으로 등록되어 있고, 해당 지역을 연고지로하는 해당 사단 및 연대에 징집되었다. 두 사관구의 역할은 실질적으로 조선 내 일본인 징병 대상자에 대한 징병검사를 수행하는 정도에 그쳤다.
이렇듯 2차 세계대전 발발이전까지 조선군은 한반도 내 일본인 및 한인을 직접 동원하는 조직을 갖추지 않았다. 그랬던 것이 조선인에 대한 지원병제도[20]를 시작한 다음 해인 1939년, 조선군은 두 사관구 산하에 동원 전담 기구인 6개의 육군병사부를 설치했다. 이어서 1942년 5월 전쟁이 점차 확대되어가면서 조선 내 징병제 실시가 결정되었다. 학도지원병제도와 징병제 실시를 앞둔 1943년 8월, 조선군은 기존의 6개 병사부(경성, 평양, 나남, 함흥, 대구, 광주)에 7개(신의주, 해주, 춘천, 대전, 전주, 청주, 부산)를 추가하여 각 도마다 하나씩 13개의 병사부를 설치했다. 병사부장은 대좌급이 담당했고 기존 사관구는 폐지되어 각 병사부는 조선군사령부에 직속으로 배속되었다. 병사부의 설치는 한반도에서 징병제 시행준비를 염두에 둔 조치였다. 병사부가 설치된 다음해인 1944년 4월부터 한인을 대상으로 제1기 징병이 실시되었다.
패전이 임박한 1945년 2월 대본영이 본토결전을 준비하기 시작하면서 한반도에서 동원체제도 개편되었다. 가장 특징적인 것은 종전의 조선군이 제17방면군과 조선군관구사령부로 분리되면서 동원임무가 조선군관구사령부에 부여되었다는 것과 기존 13개 병사부가 병사구 지구사령부로 격상되었다는 점이다. 기존 병사부 부장이 대좌급이었던 반면에 병사구 지구사령부는 지구사령관에 소장급이 임명되었다. 조직 역시 종전의 2과에서 3과체제로 확장되었다. 본토결전을 앞두고 동원 및 관련 업무가 크게 증가한데 따른 대응이었다. 여기에 추가적으로 확대재편된 동원조직을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종전에 폐지되었던 사관구 제도가 부활하였다.[21] 1944년 4월 10일에 유수19사단(나남), 유수20사단(평양), 유수30사단(경성)을 나남/평양/경성 사관구로 개편하고, 대구/광주 사관구를 신설하여 5개 사관구- 13개 병사구 지구 체제가 확립되었다.[22]
6.4.3. 대소전 방비
17방면군과 조선군관구는 있는 병력 없는 병력 박박 긁어 모아 어떻게든 대미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17방면군의 주력은 한반도 남반부와 제주도에 집중되었다. 하지만 얼마지나지 않아 아뿔싸 이제 소련의 참전 가능성이 문제가 되었다.1945년 5월 나치독일이 패망하면서 소련군은 대규모 전력을 만주로 돌릴 여력이 생겼다. 국경지역에 엄청난 소련군 전력이 집결하자 일본군도 뭔가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눈치 채고 있었다. 관동군은 한반도의 제17방면군을 자신들 휘하에 둘 것을 요구했고 더 나아가 북지나방면군까지 포함하여 대소전을 대비하는 제3총군을 창설할 것을 주장했다. 하지만 미국과의 결전준비에 여념이 없던 대본영과 17방면군은 별로 관심이 없었다.
결국 1945년 5월 30일에 들어 대충 대동강 이북을 관동군 작전지역으로 넘기고 제17방면군은 그 남쪽만 관할하기로 일종의 타협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한반도 북부 지역에서의 인력 동원 및 행정업무는 여전히 조선군관구사령부의 관할이었다. 어정쩡한 타협안인 셈이었다. 한반도 일부지역이 관동군 관할로 들어가면서 오히려 관동군에게도 대미전에 대한 책임도 같이 부여되었고 관동군은 졸지에 (적어도 명목상으로나마) 대미전과 대소전을 동시에 준비해야되는 병맛 넘치는 상황이되었다.
- 제34군(함경북도 경흥)
- 제59사단(함흥)
- 제137사단(청평)
- 제133독립혼성여단
- 제79사단(나진)
한편 한반도 중남부의 제17방면군은 소련군의 만주 침공이 시작된 다음날인 8월 10일 06:00 부로 관동군에 배속되었다. 소련군의 침공이 시작되자 대본영은 어떻게든 조선만큼은 전후에도 식민지로 확보해보려는 심산으로 관동군에게 만주국을 포기하고 한반도를 수비하라고 명령했다. 간도 일대의 산악지대에서 최후의 방어를 준비하던 관동군은 이 명령을 상큼하게 씹어버린다. 17방면군은 관동군에 비해서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소련의 만주침공과 원자폭탄 투하 이후 천황이 항복을 선언하면서 갑작스러운 종전이 이루어졌다. 이후는 다들 아는대로 38선을 기준으로 한반도 북부는 소련군이 남부는 미군이 진주하였다. 17방면군의 주력은 한반도 남반부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 미군에 항복 할 수 있었다.[23] 제17 방면군은 동년 9월 9일 미육군 24군단장과 정전협정을 체결하였다. 패망 직후 미군 보고서에 의하면 38선 이남의 일본군은 제주도의 58,320명을 포함하여 179,720명이라고 한다. 이 수치에서는 17방면군 산하 부대 중에서 38선 이북~대동강 까지 주둔한 일본군 부대는 제외된다.
7. 일본군 패잔병
일본으로 귀환하는 조선 주둔군을 담은 영상.
1945년 8월 15일의 종전 선언 이후에도 북한 지역에서 소련군을 상대로 항전 또는 자폭[24]하는 병사들이 일부 존재했으나 대부분은 조용히 손 들고 항복했다.
1945년 종전 당시 한반도 주둔 일본군의 병력은 38선을 기준으로 북한에 117,110명[25], 남한에 230,258명[26] 합계 347,368명이었다.[27] 종전 이후 탈영이 발생하기도하고 조선인 군속 등은 제대시키거나 귀가하기도 하는 등 전쟁말기 혼란으로 당시 한반도 주둔 일본군의 인원현황은 자료마다 다소간의 편차가 존재한다.
7.1. 남한
소련군이 빠르게 장악한 한반도 북반부와 달리 남반부에서는 조선군이 종전 직후에도 최강의 무력집단으로서 치안을 통제하고 있었다. 소련군은 이북 땅까지만 내려왔고 미군은 일본 본토에 아직 진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선군은 총독부와 여운형이 협상을 통해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 권력을 넘기기로 했다는 사실을 알자 극력 반발하여 무력으로 건준의 권력 접수를 막았고 시가지에 전차, 장갑차를 포함하는 무장병력을 들여보내 조선인들이 장악했던 행정 및 언론기관들을 무력으로 탈환하면서 반항하지 못하도록 위압했다. 이로 인해 남한 지역에서는 계엄령이 선포된 것과 같은 상태가 되었다. 그러는 한편 불만을 터뜨릴 우려가 있는 조선인 병사들은 즉각 제대시켜 집으로 돌려보내고 현지에 가족이 있는 일본인 병사들도 제대시켜 가족을 추스리게 했다.9월 6일에 서울에 도착한 미군 선발대와의 교섭을 통해 9월 8일 미군이 진주할 지역에서의 즉각적인 일본군 병력 철퇴 및 무장해제 일정이 논의되었으며, 9월 16일에는 38도선 이남의 일본군 병력 전체가 정식으로 미군에게 항복하였다. 그리고 미군의 진주 일정에 따라 조선군은 순차적으로 담당 구역을 인계하였다. 서울의 조선군 군사 시설들을 미군이 사용하여 주둔하기 시작했다. 미 8군 사령부는 조선군 사령부 자리다.
한반도에 진주한 미24군단의 지시에 따라 제17방면군은 1945년 9월 9일 대본영 육군명령 특제2호를 통해 9월 12일 0시부로 전투서열을 해체했다. 9월 12일에 17방면군사령부가 해체되면서 조선에 있던 일본군은 이제 경성 위수관구 사령부에 속하게 되었다. 이들은 자신들 스스로가 세우고 미군에게 승인을 받은 철수 계획에 따라 인천항과 부산항을 이용(대전 이북은 인천, 이남은 부산)하여 일본으로 철수하였다. 이때 8월 15일 이후 제대했던 병사들도 재소집(일본인만 해당)하여 군적에 넣은 후 철수시켰다. 포로수용소 경비병, 헌병 등은 전범 혐의에 대한 조사를 받았다. 병력의 철수는 11월 초에 완료되었으므로 사령부는 11월 20일에, 서울에 있던 연락부는 12월 22일에 철수하였다.
일본군의 귀환은 제17방면군이 해체된지 약 2주 후인 9월 27일부터 개시되었다. 1945년 10월 28일까지 남한에서 귀환한 일본군은 176,241명이었다. 귀환 도중 2,686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반도 주둔 일본군의 귀환은 11월 20일 경성 일본군연락부대 14명이 귀환한 것을 마지막으로 완료되었다. 다만 북한이나 만주 등지에서 탈출 해온 일본병을 위한 귀환은 그 후에도 계속되었다.
병기 파기를 맡은 작업대는 미군의 감시 하에 전국 각지의 일본군 기지에서 회수된 일본군의 무기들 중 총기나 화포류 등은 대부분을 바다에 버리고 전차나 항공기는 소각 후 고철로 처리했으며 일부 신형 항공기의 경우 미군이 시험용으로 가져갔다. 폐기를 면한 일본군 무기는 주로 소화기들로 이것들은 신생 대한민국 국군과 경찰에게 넘어갔다. 일부 장비는 현재도 남아 육군박물관에 전시 중이다.[28] 병기 파기를 맡은 작업대는 1946년 4월 26일에 귀국하였으며 이로써 조선군의 존재는 완전히 사라졌다.
결7호 작전으로 제주도 방위를 위해 주둔했던 제58군은 상급부대인 제17방면군 사령부와는 별도로 9월 28일에 미군에 따로 항복했다. 항복 이후 제주항을 통해 일본으로 돌아갔다.
다만 1명의 일본군 잔존병이 한라산에서 주민들에게 발견되기도 했다. 이후 이 일본군은 주민들의 설득으로 어찌저찌 산에서 내려왔고 4.3 사건 당시 진압병력들의 길잡이로 활동하다가 빨치산에게 작전 중 사살되었다.
7.2. 북한
북한 지역에서는 이미 소련군이 들어와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으므로 일부 지역에서는 19일까지 교전이 계속되었다. 이후 각 지역에 소련군이 진주하면서 9월 15일까지는 전 일본군의 무장 해제가 완료되었다. 그리고 남쪽에 있던 일본군 장병들이 본국으로 귀환한 것과 달리 이들은 시베리아로 가서 통나무를 옮기게 된다.8. 예하부대
}}} {{{#!folding 기타부대 }}} |
조선군 설치 이후 2개 상주사단이 편성되었다. 조선총독부와 조선군 측에서는 상주사단을 3개로 늘릴 것을 조선군 설치 이래 꾸준히 요구했다. 세번째 상주사단인 제30사단은 중일전쟁 이후에야 편성에 착수하여 태평양전쟁 중반기에 편성이 완료되었다. 태평양 전쟁 이후 전황이 악화됨에 따라 상주사단인 19, 20, 30 사단은 한반도를 떠나 남방전선에 투입되었다. 상주사단 외에 경성에서 49사단이 편성되었고 49사단은 편성 직후 버마전선에 투입되었다.
요새사령부:
군사적 요충지가 되는 항구와 그 주변 항구와 도서 지역에 위병소, 포대 및 관측소와 같은 군사시설을 설치하고 관할했다. 진해만 요새는 남해안 일대 마산, 충무, 진주, 부산을 관할했다. 영흥만 요새사령부는 동해안 일대 원산, 성진, 청진을 관할했다. 나진 요새사령부는 웅기, 경흥 일대를 관할했다. 나진 요새사령부는 1936년에 설치되어 대소련 거점으로 활용되었다.
헌병대:
조선헌병대는 군사경찰에 관한 업무는 조선군사령관의 지휘를, 행정 및 사법경찰에 관한 사항은 조선총독의 지휘를 받았다. 헌병대는 치안업무 외에 국경경비임무까지 수행했다.
8.1. 종전시점
볼드체로 표기된 부대는 펼치기/접기가 적용되어 있음제17방면군 |
{{{#!folding 방면군 직할 *전차제12연대(광주: 943명) *독립야포병제10연대(평양: 1,850명) *박격포제30대대(서울: 856명) *박격포제31대대(광주: 1,200명) *고사포제151연대(부산: 2,704명) *고사포제152연대(서울: 2,003명) *독립고사포제42대대(평양: 830명) *독립고사포제46대대(청진: 660명) *독립기관포제20중대(대령강: 140명) *독립기관포제21중대(포항: 140명) *{{{#!folding 12공병대사령부(서울: 사령부 100명 예하 2,700명) *독립공병제125대대(서울) *독립공병제128대대(대구) *독립공병제129대대(광주) }}} *전신제4연대(대전: 1,170명)*제86독립통신작업대(대전, 이하 독립통신작업대 총원 1,500명) *제87독립통신작업대(대전) *제88독립통신작업대(대구) *제89독립통신작업대(서울) *제90독리통신작업대(서울) }}} {{{#!folding 요새부대 *부산요새사령부(부산: 170명) *나진요새사령부(나진: 180명) *영흥만요새사령부(원산: 120명) *여수요새사령부(여수: 80명) *부산요새중포병연대(부산: 999명) *나진요새포병대(나진: 300명) *여수요새중포병연대(여수: 320명) }}} |
조선군관구사령부 |
{{{#!folding 사관구 *나남사관구부대(나남: 6,300명) *보병 제1보충대(나남) *평양사관구부대(평양: 6,300명)*보병 제2보충대(함흥) *포병 보충대(나남) *공병 보충대(회령) *통신 보충대(나남) *치중병 보충대(경성) *보병 제1보충대(추을) *경성사관구부대(서울: 12,077명)*보병 제2보충대(평양) *포병 보충대(추을) *공병 보충대(평양) *통신 보충대(추을) *치중병 보충대(추을) *보병 제1보충대(경성) *대구사관구부대(대구: 5,488명)*보병 제2보충대(경성) *보병 제3보충대(대구) *포병 보충대(경성) *공병 보충대(경성) *통신 보충대(경성) *치중병 보충대(경성) *보병 제1보충대(대구) *광주사관구부대(광주: 5,800명)*보병 제2보충대(마산) *포병 보충대(대구) *공병 보충대(대구) *통신 보충대(대구) *치중병 보충대(대구) *보병 제1보충대(광주) *보병 제2보충대(전주) *포병 보충대(광주) *공병 보충대(나주) *통신 보충대(광주) *치중병 보충대(송정리) *마산중포병연대 보충대(마산: 500명) *야전포병제15연대 보충대(회령: 495명) *독립공병제23연대(수색: 395명) *조선군관구교육대(평양: 70명) *조선군관구방역부(부산: 64명) *인천조병창(인천: 252명)[32] *평양병기보급창(평양: 71명) *조선육군화물창(대전: 238명) *부산병참부(부산: 462명) *부산수송통제부(부산: 102명) *나진수송통제부(나진: 90명) *제12야전보충마창고(회령: 600명) *조선포로수용소(서울: 24명) *경성육군구금소(서울: 15명) }}}
{{{#!folding 경비대 *제41경비대대(630명) *제141~160경비대대(11,400명) }}}
총계:276,157명 |
[출처1][출처2] ※(인원현황에는 군속 포함.) |
9. 사령관 목록
역대 조선군 사령관은 모두 육군 소속이였다. 해군은 조선군과는 별도로 경남 진해에 '진해요항부'라는 해군 기지를 세웠으며 해군 병력을 파견하였다.<colbgcolor=#b0313f> 한국 주차군 사령관 | |||||||
{{{#!wiki style="margin: -0px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 <colbgcolor=#fff,#1f2023>순서 | 이름 | 계급 | 재임기간 | |||
1 | 하라구치 겐사이(原口兼済) | 중장 | 1904년 3월 11일~1904년 9월 8일 | ||||
2 |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35] | 대장 | 1904년 9월 8일 1908년 12월 21일 | ||||
3 | 오쿠보 하루노(大久保春野) | 대장 | 1908년 12월 21일~1910년 8월 24일 |
조선 주차군 사령관 | |||||||
{{{#!wiki style="margin: -0px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 <colbgcolor=#fff,#1f2023> 순서 | 이름 | 계급 | 재임기간 | |||
1 | 오쿠보 하루노(大久保春野) | 대장 | 1910년 8월 24일~1911년 8월 11일 | ||||
2 | 우에다 아리사와(上田有沢) | 중장 | 1911년 8월 11일~1912년 1월 14일 | ||||
3 | 안도 사다요시(安東貞美) | 중장 | 1912년 1월 14일~1915년 1월 25일 | ||||
4 | 이구치 쇼고(井口省吾) | 중장 | 1915년 1월 25일~1916년 8월 18일 | ||||
5 | 아키야마 요시후루(秋山好古) | 중장 | 1916년 8월 16일~1917년 8월 6일 | ||||
6 | 마쓰가와 도시타네(松川敏胤) | 중장 | 1917년 8월 6일~1918년 5월 29일 |
조선군 사령관 | |||||||
{{{#!wiki style="margin: -0px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 <colbgcolor=#fff,#1f2023> 순서 | 이름 | 계급 | 재임기간 | |||
1 | 마쓰가와 도시타네(松川敏胤) | 중장 | 1918년 5월 29일~1918년 7월 24일 | ||||
2 | 우쓰노미야 다로(宇都宮太郎)[36] | 중장 | 1918년 7월 24일~1920년 8월 16일 | ||||
3 | 오바 지로(大庭二郎)[37] | 중장 | 1920년 8월 16일~1922년 11월 24일 | ||||
4 | 기구치 신노스케(菊池慎之助) | 중장 | 1922년 11월 24일~1924년 8월 20일 | ||||
5 | 스즈키 소로쿠(鈴木荘六) | 중장 | 1924년 8월 20일~1926년 3월 2일 | ||||
6 | 모리오카 슈세이(森岡守成) | 대장 | 1926년 3월 2일~1927년 3월 5일 | ||||
7 | 가나야 한조(金谷範三) | 중장 | 1927년 3월 5일~1929년 8월 1일 | ||||
8 | 미나미 지로(南次郎)[38] | 중장 | 1929년 8월 1일~1930년 11월 22일 | ||||
9 | 하야시 센주로(林銑十郎)[39] | 중장 | 1930년 11월 22일~1932년 5월 26일 | ||||
10 | 가와시마 요시유키(川島義之)[40] | 중장 | 1932년 5월 26일~1934년 8월 1일 | ||||
11 | 우에다 겐키치(植田謙吉) | 중장 | 1934년 8월 1일~1935년 12월 2일 | ||||
12 | 고이소 구니아키(小磯国昭)[41] | 중장 | 1935년 12월 2일~1938년 7월 15일 | ||||
13 | 나카무라 고타로(中村孝太郎) | 대장 | 1938년 7월 15일~1941년 7월 7일 | ||||
14 | 이타가키 세이시로(板垣征四郎)[42] | 대장 | 1941년 7월 7일~1945년 2월 1일 |
제17방면군 · 조선군관구 사령관 | |||||||
{{{#!wiki style="margin: -0px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 <colbgcolor=#fff,#1f2023> 순서 | 이름 | 계급 | 재임기간 | |||
1 | 이타가키 세이시로(板垣征四郎) | 대장 | 1945년 2월 1일~1945년 4월 7일 | ||||
2 | 고즈키 요시오(上月良夫) | 중장 | 1945년 4월 7일~1945년 11월 30일 |
- 대전에서 잔류병 귀환 업무를 하던 사령부가 일본으로 최종 철수한 것이 20일, 완전히 폐지된 것이 30일이다.
10. 조선군에서 복무한 유명인사
순수한 일본군으로서 조선군에 복무한 사람만 기재. 구 황실에 속한 의장대인 조선보병대는 제외한다.- 김석원: 20사단 78연대 소속 대대장
- 백홍석: 경성 육군사령부 과장
- 신태영: 용산정차장 사령관
- 이응준: 조선군 대구사령부, 서울 용산정차장사령부 복무
- 채병덕: 부평 소재 인천조병창 공장장.
11. 진해요항부
진해요항부(要港部)[43]에 배치된 함정은 순양함 이상 대형함은 드물었고 주로 항만 경비 목적의 소형함정들이었다. 진해 외에는 함경도 라진, 제주도에 전진기지를 두었으며, 경비전대와 항공대(1936년 10월 1일 창설)를 배치하였다. 조선군이 육군대신의 통제를 받지 않았던 것과 반대로 진해요항부는 해군 군령부와 해군대신의 통제를 받는 정상적인 통수체계 하에 있었다.전방도 아닌 일개 식민지 영토에 주둔한 요항부 등급이었기 때문에 일본 해군 고위장성들에게는 유배 간다는 소리까지 나올 정도로 한직으로 취급되던 곳. 이곳을 거쳐간 일본 제국 해군 출신 인사 중 상대적으로 유명한 인물로는 이후 제 23대 연합함대사령장관과 제 39-41·49-52대 해군대신을 역임하고, 제 37대 내각총리대신이었던 요나이 미쓰마사가 있다. 총리 역임 전후로 총 7차에 걸쳐 해군대신을 지냈고 종전 내각 당시 사실상 최후의 해군대신으로서 태평양 전쟁 종전과 항복을 주장한 인물.
1941년 12월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자 진해요항부는 진해경비부로 승격되고 요항부 '사령관'도 경비부 '사령장관'으로 승격되었고 병력과 장비가 증강되었다. 패전이 가까워 오던 1945년 7월 20일에는 특별육전대가 창설되었다. 8월 15일 패망을 맞은 후 1945년 11월 30일 진해경비부는 폐지되고 부대는 해산되었다.
12. 전후 장비 처리
12.1. 파기
미군은 일본군의 군사능력 제거에만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막대한 양의 총기, 화포, 탄약을 바다에 버렸고 전차, 항공기[44] 등은 소각하여 고철로 만들었다. 인천 부평에 있던 조병창 시설[45] 역시 파기하고 파묻어버렸다.12.2. 생존
소총과 개인장구류 일부, 그리고 연습기 등 극소수의 항공기[46]는 파기되지 않았다. 소형 군용함선도 상당수 살아남아 한국 해군으로 넘어왔지만, 큰 배가 있지도 않았을뿐더러 제대로 된 배는 모조리 승조원들이 일본으로 몰고 가 버렸으므로, 남은 건 죄다 연안이나 오가는 소형 경비정 수준이었다. 미완성 상태인 배들도 마찬가지였다.파기되지 않고 남은 일본제 총기는 미국제 장비가 지급되기 전까지 창설 초기 대한민국 군경의 주무장이 되었는데, 그 수량은 38식/99식 6만 정과 정당 50발의 탄약이었다고 한다. 신문기사
심지어 창고에 방치되어 있던 이 일본군장 및 총기류 중 일부가 2000년대까지 살아남아 있는 것이 일부 군 복무중인 밀리터리 매니아들에게 목격[47]되기도 했다.
그리고 일부는 민간인들에게 넘어가 치안에 악영향을 미쳤다. 처리되지 못한 무기들이 몇몇 좌/우익 단체로 흘러들어가 사용되었던 사례가 있으며 양 정치 단체끼리 총격전도 빈발했다. 당시 미군정은 사태가 발생하면 주동자들의 총기는 압수했지만 민간에 뿌려진 총기들을 회수할 계획도 능력도 없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이런 행위는 불법화되었으나 정권의 비호를 받는 자유당 시기 정치깡패들은 한동한 중무장을 유지하기도 했으며, 한국 전쟁의 혼란기까지 겹쳐 민간에서도 완전히 회수되지 못하였다. 이는 1960년대 이후 빨치산 토벌과 함께 병행된 강경한 단속 이후 사라진다.
다만 일부 물량은 80~90년대까지 민간에서 살아남아 멧돼지 사냥 등에서 엽총으로 쓰인 모양이다. 동네 어르신, 외삼촌 등이 구구총으로 멧돼지를 잡더라는 회고담이 2000년대 초에 가끔 인터넷에 올라오곤 했다. 탄약은 어떻게 구하냐고 했더니 "만들어서 쓰지"라는 답이 돌아왔다고.
12.3. 만약 미군이 일본군 장비들을 그대로 한국군에 인도했다면?
미군이 이 일본군 장비들을 몽땅 없애지 않고 대한민국 국군에 인도했다면 북한군의 침략에 보다 효과적으로 맞설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의견도 일부 있다. 이는 아시아 각지에서 일본군 장비를 전후에 유용하게 사용한 사례가 많기 때문이다.- 북한군도 창설 초기에 소련제 장비를 보급받기 전에는 소련군이 압수했다가 넘겨준 일본군 총기를 사용했으며, 일본제 항공기도 소수 사용했다고 한다.[48]
- 제2차 국공내전 당시 중공군이 치하를 비롯한 일본군 장비를 아주 유용하게 사용했다.
- 인도차이나 전쟁: 베트남 주둔 일본군은 전투 없이 항복했으므로 남겨진 물자가 많았다. 베트남 주둔 프랑스군도 본토에서 중장비를 많이 받아오지 못해 많은 양의 일본제 장비를 사용했다. 그래서 프랑스군과 베트남 독립군 둘 다 일본군의 잉여 군수품을 잘 활용했으며 프랑스군은 하야부사와 같은 군용기도 운용했다.
- 인도네시아 독립전쟁: 인도네시아 독립군측이 일본군 잉여 군수품 및 장비(군용기까지)를 잘 활용한 예이다. 이쪽은 일본군 병사들까지 수천 명이나 갖다써서 장비에 익숙한 인원도 있었다.
하지만 북한군의 소련제 무장에 비해 성능이 떨어져 별 도움이 안 됐을 가능성이 크다는 반론도 있다. 중국 국부군은 개판이었으며 북한군의 수준 또한 그리 좋은 수준은 아니었지만 대대급 훈련도 제대로 하지 못한 초기 한국군보다는 나았으며, 한국전 초기엔 상태가 좋지 못했다지만 그 미군도 몰아붙였다. 또한 설사 보유한다 하더라도 소련제 무기로 무장한 북한군과의 질적 차이는 그리 달리질게 없었다. 당장 일본군의 주력 치하 따위와 북한군의 소련제 T-34를 비교하면 같은 중형전차라는 카테고리로 묶는 것 자체가 무안할 지경[49]이나 마찬가지인데다 장비의 유지 보수 또한 간과될 것이 아니다. 부품이 떨어지면 다시 갈아끼워야 하고 지속적으로 정비가 이루어져야 하나 일본제 전차 및 항공기의 부품이 떨어지면 수급할 방도가 없거나 힘들다. 배보다 배꼽이 커져 일본 장비를 굴릴 자원으로 다른 데 쓰는게 나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좋은 장비를 미군에게 많이 공여받아서 필요없다는 의견도 있다. 대전차전력만 봐도 국군이 공여받은 57mm 대전차포는 초기형 치하 따위는 말할 것도 없고 치하 개량형과도 비교될 물건이 아니다.
다만 이런 이야기들은 진지하게 따지고 고찰하기 보다는 미군정이 워낙 한국군의 무장에 인색했기 때문에 일본군의 무기를 흡수해 사용하자는 것은 어차피 없는거 그거라도 써야 될 판 아니냐 하는 아쉬움에서 나오는 경우가 많으며 미군이 참전하고 한국군에 대한 대대적 재무장이 이루어지는건 역사대로 기정사실이니 북한군의 남침과 낙동강 전선까지의 그 공백을 어떻게 최소한이라도 메꾸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의 반영이다. 보통 그런 주장을 하는 군사 매니아들은 총기류나 기갑장비보다는 항공장비나 화포류에 관심을 보이는 편이다. 총기류야 워낙 수량이 많다보니 폐기하고도 충분히 유용했지만 사실 성능도 신통치 않았고, M8 그레이하운드를 육본직할로 고이고이 모시던 당시 국군의 사정상 찬물 더운물을 가릴 필요는 없었지만 상술했듯 일본 기갑차량의 악명이 워낙 높은데다 T-34를 저지시키지 못할 것은 똑같을터라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화포 또한 성능이 좋지 못한 것은 매한가지였으나 공수부대용 경 야포나 소구경 박격포 밖에 없던 국군의 사정상 유용했을거라 생각되고 있는데 아무래도 화포라는 무기체계가 질보다는 수량에서 오는 이점이 크다고 판단되며 북한과 정교한 대포병사격을 하며 포격전을 벌일 것은 아닐 것이라 판단되기 때문이다. 보통 한국군의 부족한 약점을 최대한 가리면서도 북한과의 실질적 전력차이를 상대적으로 줄일 수 있는 것들이 아쉬움을 받는 편이다.
실제로 광복후 조선인 출신 조종사들이나 항공인들이 발족한 단체가 공군 창설을 준비하며 일제 항공기들을 인수하려 했고, 미군정이 관심을 보이기도 하였으나, 항공인 2명이 '날 수 있는 기체를 그냥 내버려둘 수 없다'면서 미군의 비행 금지령을 무시하고 비행을 하는 바람에 미군정이 없던 일로 해 버리고 일제 공군기들을 예정대로 분쇄해버린 사례가 있다. 신생 한국군의 가장 부족하던 전력 중 하나가 항공부분이기에, 남겨놓은 것을 조금이라도 활용했다면 적어도 우리 전력에 마이너스는 안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해군 쪽은 그나마 사정이 조금 나아서 일본군이 남겨놓은 소해정 등의 소형함을 활용할 수 있었다.
일본군의 무기가 대량으로 남아있었다면 통제되지 않은 채 민간으로 유출되어 오히려 치안 악화로 이어질 여지도 있었다. 실제로 광복 후 혼란속에서 일제 무기들이 민간에 흘러간 흔적들이 보이며 혼란스러운 당시 정치 상황을 따라 적극적으로 사용되었다. 경찰과 총격전까지 벌인 1946년 철도 파업 때는 파업단의 무기고에서 아리사카 60정에 일제 기관총, 그리고 무려 척탄통까지 나오기도 했다. 여순 사건 때는 반란군이 군용으로 보유하고 있던 아리사카 소총[50]을 대로에 쌓아두고 분배하기도 하였으며, 관련 증언을 들어 보면 1960년대에 마을 멧돼지 사냥에 숨겨놓은 은닉 아리사카 소총이 종종 나오기도 했다는 증언도 있고 실제로 경찰이 압수 및 자진 반납받은 불법 총기 목록을 보면 아리사카 소총 등 일제 총기 두어자루가 #,보인다. 1990년대 초까지도 이런 총기들이 불법무기 신고 때 한두 자루씩 신고되곤 했다.
[1] 일례로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 각시탈에서는 조선군사령부에서 나온 군인으로 행세하는 독립투사가 주인공을 경찰서에서 빼내며 일본 순경을 갈구자 순경이 부동자세가 되어 설설 기는 장면이 묘사된 적이 있는데, 이 때 이 이름을 낯설어하는 시청자들은 왜 일본 경찰이 독립투사에게 굽신거리냐며 순간 의문을 품기도 했다. 그 정도로 교과서 및 대중매체에서 '조선군'이라는 호칭이 등장한 예가 극히 드물다. 반면 오해의 여지가 없는 관동군이라는 명칭은 한국에서도 자주 쓰인다.[2] 일본군으로 뭉뚱그리지 않고 용어로 굳이 구분해야 한다면 일본음을 그대로 옮겨 조센군이라 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현대 한국에서 조센이란 단어는 사전적 의미 이상의 부정적 의미가 담겨있어 거부감이 크다.[3] 더 자세한 이야기는 일본/군사사 및 왜구문서 참조.[4] 경기도 거주 일본인 1천여 명이 용산에서 징병 검사를 받았다는 1936년의 동아일보 보도가 있다.[5] 1919년 이후 조선군 사령부가 총독부로부터 독립성을 강화할 수 있었던 것은 3.1 만세운동 수습차원으로 파견된 신임 총독 사이토 마코토가 육군출신이 아니라 해군출신이기에 육군파벌에서 의도적으로 이렇게 하였다라는 의견도 있다. 당장에 사이토를 제외한 모든 조선총독들은 육군대장 출신이고, 내각총리 후보군에 속하였던 자들로 막강한 파벌세력을 배경으로 삼고 있었다. 조선에서 우대할 인간이 이왕 이외에는 존재하지도 않는 존재로 입법, 사법, 행정, 군사등 전권을 천황으로부터 부여받았다라고 할 정도인데, 조선군 사령관이 무시할 위치들이 아니다.[6] 1~2대대[7] 3대대[8] 조선인 장교를 연대별 1명을 초과하여 둘 수 없다는 암묵적 룰이 있었다. 그럼 1개 사단에 조선인 최대 인원은 7명?[9] 일본은 이들 17개 사단만 상설 사단이라며 우대하여 주로 관동군에 배치되었다. 전쟁이 장기화되며 이후 찍어낸 백여 개의 사단들은 특설 사단이라 부르며 예비역들 중심의 2선 부대로 중국전선이나 태평양으로 가서 옥쇄한다. 전쟁 막판에는 관동군의 상설 사단은 본토결전을 대비하여 일본 등으로 빼내고, 관동군 역시 특설 사단으로 채워진다.[10] 일제가 조선인을 징병한 것은 1944년부터의 일로 그 전에 뉴기니로 차출된 20사단에 배속된 한인은 지원병으로 동원되었다.[11] 징병제 시행 이전 동원자 1,745명, 징병제 시행 이후 동원자 32명, 징집연도 미상 124명.[12] 조선인의 낮은 전사율의 이유 중 하나는 조선인이 튼튼해서였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당시 일본군은 말라리아로 많이 죽었는데, 조선인들은 위생부족으로 육군특별지원병훈련소 입소했을 때부터 이미 말라리아에 걸려 있는 비참한 상황이었다. 그 바람에 항체가 생겨 태평양 전선에서 말라리아에 잘 걸리지 않았으며, 상관이 먹지 말라는 썩은 물을 먹고도 조선인만 멀쩡했다고 한다. 그래도 일본군이 공격할 때는 조선인을 선봉에, 후퇴할 때는 후위에 세워 병들어 죽기 보다는 싸우다 죽은 조선인이 많았다.[13] 종전 당시를 기준으로 적어 놓은 부분이 있다. 가령 120사단은 원래 대구 일대에 주둔했다가 1945년 8월 20일 제주도로 배치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앞선 8월 9일 소련군이 만주를 침공하면서 서둘러 평안도 지역으로 이동하던 중에 종전을 맞았다. 종전 시점에서 사단 주력은 서울 용인에 위치했었고 사단 예하 보병 제261연대는 평양에 먼저 도착한 상태였다. 부대의 위치는 전부 철도를 따라 존재한다. 그럼으로 철도가 없는 강원도 일대에는 부대가 없었다. 강원도 삼척에 약간의 해안포 중대 정도. 17방면군 각 사단이 주둔한 곳들은 사관구 거점이기도 하지만, 철도선의 분기점이기도 하다. 군산 역시 철도가 광주와 순천으로 갈리는 분기점이었다.[14] 3차에 걸쳐 총 6개 방면군 45개 사단이 신설된다. 이들 전부가 조선과 일본에 배치되었다.[15] 또한 총기조차 반밖에 없었고(일본군은 원래부터 치중병은 군인이 아니라며 총이 없긴 하다.) 총검만 가지고 있었는데 그래도 전체의 10%는 총검 조차 없었다.[16] 58군 사령관은 나가쓰 중장 -> 노보루 도야마 중장, 94사단장은 이이누마 중장 -> 다마다 요시로 중장, 111사단은 이와사키 도미오 중장, 121 사단장은 마사이 요시토 중장, 108여단장은 히라오카 츠토무 소장이다.[17] 이중 58군은 61,000명. 미군자료에는 총병력 66,780명[18] 미국쪽 자료에는 49,979명이 일본으로 돌아간 후 소집해제되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최대 20,000명이 조선인이라는 의견도 있고, 패망 후 현지 소집해제된 조선 거주 일본인 + 조선인 + 탈영하여 미리 일본으로 빤스런한 일본인을 다 합쳐야 17,161명이라며 그중 조선인은 대충 10,000 여명이라는 견해도 있다.[19] 본부와 각 660명인 제4~13중대로 편성[20] 육군특별지원병제도[21] 사관구사령관은 중장급이 임명되었다.[22] 조건,일제강점기 말기 '조선 주둔 일본군' 상주사단의 한인 병력동원 양상과 특징,(한국독립운동사연구 vol.51, 2015-08)[23] 단 대구에 배치된 120사단은 원래 8월 20일에 제주도로 이동할 계획이었는데, 소련이 쳐들어 오자 평양으로 이동하였다. 사단 본대는 운 좋게도 평양으로 이동 중 경성에서 종전을 맞았고 선발대는 평양에 도착했다가 소련군에게 잡혀 시베리아로 간다.[24] 비행기를 몰고 서울 한복판에 격돌한 조종사가 있다.[25] 제17방면군 및 조선군관구 예하 부대 외에 함경도에 주둔하던 관동군 예하부대를 포함[26] 제주도 주둔 제58군 합산[27] 모리타 요시오, 조선종전의 기록(巖南堂書店, 1964) pp24~25, 219.[28] 완전한 것은 아니고 잔해 수준의 보존상태이다.[29] 태평양 전쟁이 발발한 이후 1942년 7월 1일자로 진해만요새사령부는 부산요새사령부로 명칭이 변경되고 사령부 및 예하 병력도 부산방면으로 옮겨졌다.[30] 통천, 고성, 양양, 강릉, 삼척 울진 제외[31] 통천, 고성, 양양, 강릉, 삼척, 울진만 관할[32] 전쟁 말기에는 한반도에 병력, 특히 포병전력이 집중되면서 탄약 수요가 급증했다. 인천 조병창의 경우 1945년 6월 중순경 학생을 중심으로 13,740명이 노무에 동원되었다. 이중 4,036명이 평양 출신이었다.[출처1] 미야타 세츠코, 조선군 개요사 중 부표 제4 조선군부대일람표 (도쿄 不二出版, 1989)[출처2] 민족문제연구소 역, (소화 20년 7월 10일 현재) 제17방면군 조선군관구 제부대 통칭호 소재지 일람표, (일본 국립공문서관 아시아역사자료센타 소장자료)[35] 2대 조선총독.[36] 3.1 운동 진압의 주역이다.[37] 시베리아 출병 당시 제3사단장으로 임무를 수행한 바 있다. 부임 이후 간도로 군을 월경시켜 간도참변을 일으켰다.[38] 7대 조선 총독.[39] 독단 월경의 장본인. 후에 육군대신과 내각총리대신을 역임하는데...지 맘대로 군대를 움직이고도 이따구로 영전하니 일본군이 망할 군대인 것이다.[40] 후에 육군대신. 2.26 사건에 동조하다가 예편되었다.[41] 8대 조선 총독, 후에 총리대신.[42] 만주 사변을 주도한 그놈 맞다. 조선을 떠난 4월에는 싱가포르 주둔 제7방면군 사령관이 되었고 영국군에 항복하였으며, A급 전범으로 처형되었다. 꼴 좋다[43] 당시 일본 제국 해군의 기지는 3등급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가장 큰 기지를 진수부, 다음을 경비부, 가장 작은 기지를 요항부라고 분류했다.[44] Ki-84 하야테 등의 고성능기는 몽땅 시험용으로 가져갔다고 하는데, 남아있는 사진 등을 보면 Ki-61 히엔까지는 그냥 다 파괴해 버렸다.[45] 이 조병창을 담당하고 있던 책임자가 바로 채병덕이었다. 채병덕은 해방 이후 한국군 창설에 이 조병창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리라고 생각해서 파손되지 않도록 잘 관리하고 있었는데, 미군이 아주 서슴없이 시설을 파괴해 버리는 바람에 크나큰 허탈감을 느꼈다고 한다. 그래서 나중에 어떻게 살려내기는 했지만. 이걸 본 미군은 군수행정에 유능하다고 평했는데, 당사자 입장은 어땠을련지...[46] 기록상으로 유일하게 국군에서 사용된 것으로 확인되는 일본기는 타치카와 Ki-9 훈련기로 한국전쟁시 한국공군 마킹을 하고 대구비행장(K-2)에서 찍은 사진이 있다.[47] 안타깝게도 회고담을 인터넷에 올린 이들 일부의 증언으로는 목격 시점이 불용물자로 소각처분되는 현장이었다고 한다. A급 진품 일본군장을 직접 불에 처넣어야 했다고... 군장과는 달리 무기류는 그다지 쉽게 파기처분되지 않으니 38식이나 99식 소총 중 일부는 지금도 치장물자로 있을 가능성도 있다. 육군정비창에 입고된 출처불명(베트남전 노획품?)의 Kar98k를 보았다는 목격담도 있으니...[48] 북한공군 마킹을 한 하야부사의 일러스트가 떠돌기는 하지만 이는 결국 재생에 실패했다고 한다. 하지만 북한군도 일본군 훈련기나 수송기는 몇 기 활용했다고 알려져 있다.[49] 참고로 독소전 초기에 나온 T-34와 한국전쟁기간 북한군이 사용한 T-34는 명칭과 생산력만 같은 전차이다. 당장에 오산에서 미군이 털렸던 이유 중에 하나가 T-34에 대한 대비를 안해서인데, 미군이 파악한 전차의 성능과 눈앞에서 돌격해오는 전차의 성능이 많이 달랐다.[50] 본래 이 총은 14연대가 장비하던 것으로 새로 M1 개런드를 지급받고 나서 반납해야 하는 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