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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검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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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사
1.1. 초창기1.2. 프랑스식의 정착
1.2.1. 정검술(正劍術)1.2.2. 군도술(軍刀術)1.2.3. 총검술(銃劍術)
1.3. 전통주의자들의 반격1.4. 간략화의 시대1.5. 실전경험으로 인한 강화
2. 일본군 검술의 신화와 딜레마3. 일본군 검술이 현대 일본무도에 남긴 흔적4. 교범, 자료


이 문서에서는 일본 제국기 일본군에서 가르치던 검술에 대하여 서술한다.
일본군에서는 도검술뿐만 아니라 총검술을 비롯한 백병전 기술 전체를 검술이라 정의한다. 구 일본군에서 가르치던 검술.

1. 역사

1.1. 초창기

무진전쟁을 치른 이후 일본 신정부는 폐번치현을 통해 각 번들이 독자적으로 보유한 군대를 해산하고 장비들을 회수하여 국가가 운영하는 국군을 창설하게 된다. 그 전신이 된 어친병(御親兵)을 비롯한 초창기 일본군은 모두 사무라이 출신들로 구성된 군대였으며, 이미 수준높은 검술을 배운 상태였으므로 이때는 검술을 군대에서 따로 교육시켜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없었다. 총검술의 경우 네덜란드에서 수입한 교범을 참고하거나, 전통적인 창술 유파의 지도를 받아 변형시켜서 가르쳤다.

1872년 11월 징병령을 발효하면서 검술에 대한 경험이 없는 민간인들을 군대에 징집하게 되었다. 이들은 총은 물론 일본도조차 만져본 적이 없었으므로 군대에서 검술을 가르칠 필요가 생겼으나 당시의 일본군은 숫자도 채 3만이 안 되었고 군대에서 집단적으로 백병전 기술을 가르쳐본 경험도 없었다.

당시에는 각 번에서 회수한 장비들이 제각각이라 난맥상도 심했고 각 연대별로 독자적인 백병전 검술을 지도했으며, 육군 히메지연대에서는 사부리류가, 오와리번 육군병학료 토야마 출장소(육군 토야마 학교의 전신)에서는 관류가 창술을 변형시킨 총검술을 지도했다. 이런 각 부대별로 체계가 다른 난맥상을 타개하기 위해 육군병학료 토야마출장소가 1874년 2월에 육군 토야마 학교로 개칭, 일본군의 표준 백병전 검술을 연구하게 된다. 이때 프랑스에서 체조교육을 위해 파견한 주크레 중사가 체조 외에도 프랑스식의 검술과 총검술을 가르쳤으나, 주크레 중사는 원래 검술 부문에서는 완전히 문외한이며 형식적으로 가르치는 수준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이때의 검술은 수준도 낮고 제대로 정착되지도 못했다.

그리하여 일본식의 검술훈련이 그대로 유지가 되어 1880년 메이지 덴노가 토야마 학교를 방문했을 때에 보인 시범에서는 2.2m의 목총을 이용하여 전통 창술 호구를 착용하고 대련을 하는 등, 전통 창술의 변형과 유신때 수입한 서양 교범이 뒤섞인 갈피를 못잡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1]

1877년 발발한 서남전쟁에서 사츠마 무사들의 발도 돌격에 징집된 일본군들이 영혼까지 털리며 총검술을 제대로 쓰지도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장교들은 세이버(Sabre)를 패용하였으나 익숙하지도 않고 잘 쓰지도 못하여 큰 곤란을 겪었으며 급히 일본도를 구해다 투입했다. 구 사무라이들을 모병해 만든 경찰 발도대만이 대등한 전투력을 보여주었다. 일본에서 군용검술에 관해 이야기할 때 이 서남전쟁 탓에 일본군이 검술을 돌아보고 개선하였다는 말이 있으나 사료상으로 일본군은 이후에도 굳이 도검을 쓰는 기술을 보강한 적은 없으며 일본 검술 부활 논의는 이루어졌으나 3년 정도의 복무기간으로는 제대로 배울 수도 없고 서남전쟁 승리의 비결은 결국 정부군의 화력이었다는 점 탓에 흐지부지된 것이 사실이다.

오히려 검술을 돌아보고 진지하게 개정한 것은 경찰이었다. 서남전쟁에서 검술로 대활약한 것도 경찰발도대였고 이것을 교훈삼아 1877년에 각 유파의 정수를 모은 경찰공식검술인 경시류(警視流)를 창설했으며 무사 출신들은 경찰에 훨씬 많이 복무했다. 이 경시청류는 검도에도 많은 영향을 끼친다.

1.2. 프랑스식의 정착

전통 창술의 영향이 짙은 검술 교육과 기존의 교습법이 서남전쟁에서 아무런 쓸모가 없었던 교훈을 반영하여 일본군은 프랑스에서 백병전 교관단을 초청하며 1884년 8월에 라뷔에 중위가 이끄는 교관단이 토야마학교에 도착한다. 라뷔에 중위는 당시 일본군의 검술교육 전반에 대해 강한 비판을 제기했으며, 특히 총검술에 대해서는 교관단이 일본군과 직접 수차례 대련까지 벌여가며 프랑스식 검술교육으로의 전면개정을 군 수뇌부에 요구하였다. 이에 따라 일본식의 교육이 완전히 폐지되고 프랑스식의 검술이 일본군에 정착되게 된다. 라뷔에 중위와 교관단은 1887년 귀국하지만 그의 검술 교육은 그대로 남아 1889년 일본육군 최초의 검술교범으로 편찬된다.

1.2.1. 정검술(正劍術)

문무관이 예식 때 착용하는 대례복(大例服)에 착용하는 정검(正劍/스몰소드)를 사용하는 검술. 정검은 실전에서 쓰지 않음에도 검술을 교육하는 것은 라뷔에 중위가 전수한 검술체계가 바로 이 정검을 배워 검술의 기본이치를 깨우친 다음 그 기본이치를 바탕으로 군도와 총검술까지 바로 익힐 수 있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즉 1889년 교범을 통달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과목.

제일 먼저 준비자세(構備)에서 칼을 올리고, 준비운동을 한 다음 칼을 들고, 무릎을 굽히고, 팔을 뻗은 다음 전방을 향해 런지하는 순서대로 기본자세와 기본공격법을 익힌 다음, 사람의 상체를 위 좌우, 아래 좌우 총 4개의 공간으로 나눈 검선(劍線)의 개념을 주입하고 모든 공격은 4개의 검선 중 빈 곳으로 들어가며 다시 방어의 요령이 4개의 오프닝 중 적의 공격이 들어오는 공간으로 칼을 휘둘러 쳐내는 것임을 교육한다. 그리고 4개의 검선을 각각 방어하는 7개의 요령(이로하 노래)인 이, 로, 하, 니, 호, 헤, 토 7가지의 방어법을 교육하였다.

1.2.2. 군도술(軍刀術)

사브르 검술을 수록하였다.[3] 정검술의 검리와 공유되는 부분은 별로 많지 않아 사실상 별개의 검술. 정검술과 마찬가지로 준비자세에서 칼을 뻗고 런지하는 것을 기본으로 삼고 보법의 개념도 동일하다. 세이버 특유의 회전동작인 물리네(Moulinet)를 검의 전회(劍ノ轉回)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다만 정검술이나 총검술과는 달리 베는 무기로써 검선 개념은 교육하지 않으며, 검선 개념이 아닌 부위별 공격과 그에 대항한 부위별 방어의 요령으로 설명되어 있다.

1.2.3. 총검술(銃劍術)

정검술의 시스템을 거의 그대로 수용한 방식이지만 일부 일본 전통 창술의 흔적이 남아있기도 하다. 사용하는 도구는 기존에 쓰던 창술용 호구와 목총에, 유럽식의 펜싱 바요넷 2종을 사용하도록 기재되어 있다. 보법과 검선의 개념을 비롯하여 찌르기의 기술과 개념, 방어법이 정검술과 거의 같으나, 공격/방어법은 총검의 특성상 정검술보다 단순화되어 있다.

1.3. 전통주의자들의 반격

그러나 일본이 새롭게 모델로 삼은 독일군은 화력&기동이라는 두가지 키워드를 중심으로 한 전술체계를 구축했으며, 일본군에서도 이에 따라 검술에 너무 힘을 써서 배울 필요는 없다는 의견이 제기된다. 모델이 된 유럽국가들도 총기의 발달과 화력의 증가로 인하여 기병조차도 도검전투가 벌어지는 일이 드물 지경이 되어버려, 일부 검술 종목의 폐지와 간략화가 대세가 되어가는 것이 19세기 후반의 현실이었다.

더욱이 1890년 토야마학교장으로 취임한 오쿠보 하루노(大久保春野) 대령은 프랑스식의 검술을 싫어하였으며 이유로는 공격성이 부족하고 형식적이며 일본인에 맞지 않다는 이유로 일본식으로의 전면개정을 주장하였다. 이때 전통적인 일본식의 양손검술을 부활시키려 했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육군내 프랑스식 검술 신봉자들에 의해 이 점만큼은 관철되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당시의 제식군도는 어디까지나 세이버였으므로 양손검술을 배워도 의미가 없다는 의견이 있어 프랑스식의 한손군도술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오쿠보가 시작한 일본식으로의 변형은 검술과장인 츠다 고주(津田教修)[4]대위에 의해 완성되었으며 내용 자체는 기존과 크게 차이나지는 않게 되었지만 한손용으로 개량한 죽도와 목총을 사용하고 호구를 쓰고 훈련하는 형태로 바뀌었다. 이 내용은 육군대신 오야마 이와오(大山巌)의 검인 아래 1894년 4월 검술교범 개정으로 반영되었다. 여러 서적에서 공통적으로 나오는 이야기인데, 정작 1894년 교범은 기술이 좀 단순화되었을 뿐 프랑스식의 검리는 건재하다. 총검술에서는 여전히 검선의 개념과 유럽식의 기본동작을 하고 있고 군도술에서도 별반 달라진 것이 없다. 당시 육군 내에서 상당히 많던 프랑스 검술 신봉자들과 전통주의자들의 주장이 충돌하다가 찾은 협의점이 검리는 프랑스식, 훈련도구는 일본식으로 가는 것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시대의 내부 문제에 관한 내용은 패전시 이루어진 일본군의 문서 소각 등으로 인해 관련자의 기억이나 단편적인 군문서에 의존하므로 서적이나 사람들마다 말이 틀리고 부정확한 부분이 있다.

일본육군 검술교범 1894년(메이지 27년)판의 변경점은 다음과 같았다.

1.4. 간략화의 시대

이에 따라 러일전쟁이 끝나고 2년이 지난 1907년에 육군대신 데라우치 마사타케의 인가를 받아 다시 검술교범이 개정된다. 메이지 40년 검술교범은 그 내용이 더욱 축소되었는데, 세부사항은 다음과 같았다.

이후 1915년에 검술교범이 다시 개정되었다.

일본육군 검술교범 1915년(大正5年)판의 변화는 다음과 같다.
기존 과목들처럼 죽도와 호구를 이용했으며, 검리와 기술은 검도의 것을 차용하였다. 기술은 처음부터 매우 간략하게 만들어졌으며, 머리베기, 목찌르기, 손목베기, 오른허리베기 총 4개의 공격법과 다시 그 공격을 반격하는 기술로 구성되어 있을 뿐이었다. 사실상 교양 수업 수준에 다름아닌 체계로, 이 교육법은 1932년에 낭패를 보게 된다.

1915년 검술교범도 토야마 육군병학교에서 연구/출판한 것이었으며, 이때 토야마 학교는 열의를 가지고 연구단을 파견하여 설상검술이나 다양한 진검 기술을 연구하고 고류 유파의 비전서를 수집하기도 했다고 하나 정작 교범에서는 검도 기술을 유용한 것만 수록되었다.

1차 대전에서 보여진 참호전과 그에 따른 야간침투, 참호격투의 양상은 일본군으로 하여금 백병전 교범 개정의 필요성을 느끼게 하였으나, 1923년 취임한 육군대신 우가키 가즈시게의 우가키 군축, 그리고 탱크와 항공기 같은 미래 신무기의 도입과 연구가 중시된 탓에 검술 개선은 뒷전으로 밀리게 된다. 이때 현대전(어디까지나 당시)에 맞지 않는다고 하여 실전군도의 폐지 논의까지 있었으나 실전군도의 패용만큼은 겨우 지켜냈다. 1차 대전 초반까지는 유럽 장교들 모두 칼을 차고 다녔으나, 전쟁이 진행되면서 참호전에서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차지 않았으며 전후에도 유럽에서는 장교들의 패도 문화는 소멸했다.

이때 토야마 육군병학교는 독자적인 진검술 연구의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한다. 1915교범의 제정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기도 한 검술연구의 중심지인 이곳에서는 일차적으로 죽도와 호구를 이용한 1915교범의 내용이 진검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다고 판단하고 고류 유파들의 비전 두루마리를 수집하여 연구하거나 후나코시 기친을 비롯한 가라데의 고수를 초빙하고 검술계의 명사들을 초빙하여 기술연구에 매진하는 등 다양한 업무를 진행했으며, 1925년에는 나카야마 하쿠도(中山博道)외 3인의 검객들의 연구용역을 받아 행군시 적 기습에 대항한 거합발도술 5본을 제정하는 등의 작업을 수행하고 이것을 군도의 조법(軍刀の操法)이라고 불렀다.[10]

1.5. 실전경험으로 인한 강화

토야마 육군병학교의 독자적인 검술과는 별개로 육군제식검술이 개정되는 계기가 발생하는데 이것이 바로 1932년 발생한 제1차 상해사변이었다. 육군과 해군육전대가 상해 시내로 돌입해 전투하면서 백병전이 발생하였는데 여기서 1915년 검술교범의 약점이 만 천하에 드러난 것이다.

그 문제점이란 우선 죽도와 호구를 이용한 시합을 주로 하다 보니 짧고 작게 치는 자들이 많았는데[11] 진검을 이용해서는 제대로 적을 살상하지 못했으며 서로 거리를 유지하는 행동을 하는지라 돌격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고 치명상도 가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프랑스식 돌격주의를 강조하는 일본군의 보병전술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행동으로 매우 심각한 문제점으로 받아들여졌다. 이에 따라 즉각적인 검술교범 개정의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토야마 육군병학교가 그동안 싾아 온 다양한 연구에 따라 기존 1915년 교범의 문제점을 보완한 1934년 검술교범이 등장한다.

일본육군 검술교범 1934년(昭和9年)판의 특징은 다음과 같았다.

이와 병행하여 이전부터 독자적으로 연구해 오던 진검술 커리큘럼도 빠르게 개정된다. 1935년에 검술교범 주해를 내놓으면서 이토 키요시(伊藤清司) 소장을 주축으로 한 내외부 인사들이 모여 기존의 호신용 거합발도술 체계를 개정하여 호신발도술 6종과 돌격검술 1종을 포함한 총 7개의 발도술 체계를 정립하게 된다. 그외에 독자적으로 교육하던 돌격검술과 베기수련의 방법도 체계를 갖추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우선 1940년 11월에 육군장교의 친목단체인 해행사(偕行社)를 통해 전군에 거합발도술과 진검베기 수련법을 수록한 소책자 <군도의 조법(사용법) 및 시참:軍刀の操法及試斬> 을 배포했고, 더불어 1942년 1월에는 역시 해행사를 통해 토야마학교 특유의 돌격검술의 내용과 훈련법을 수록한 『단기속성교육군도(일격필살)훈련요령』을 배포, 토야마 육군병학교의 독자적인 검술을 보급하게 된다.

흔히 하는 오해로 전후 토야마 육군병학교의 진검술체계 이른바 토야마류가 일본사회에 넓게 퍼진 탓에 일본군의 2차대전 당시의 검술이 토야마류였다는 인식이 있는데, 토야마 육군병학교의 검술은 토야마학교에서 후반기교육을 받은 장교준사관이 아니고서는 직접 배울 기회 자체가 없었다. 겨우 책자 배포라는 형태로 전군에 알려졌을 뿐 제식검술로 채용된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당시 일본과 조선의 모든 육군훈련소에서는 1934년 교범에 의거한 검술훈련을 했다.

해군은 독자적인 검술교범을 따로 연구하기보다는 육군에서 제정한 내용을 따라가는 경향을 보였다. 특이한 부분으로, 군무원이자 검객이었던 타카야마 마사요시(高山政吉)가 남경상륙전에 종군하면서 경험한 내용을 바탕으로 타카야마류 백병발도술(高山流白兵拔刀術)을 창시하고 이것을 마이즈루의 해군병학교, 해군기관학교에서 가르쳤으며 토야마 육군병학교의 진검술 커리큘럼의 제정에도 상당부분 관여하였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토야마학교에 대한 기여 여부만큼은 확인되지 않는다. 현재 일부 일본인들이 육군검술을 표방한 토야마류에 대해 해군검술 타카야마류의 이미지를 덧씌우고 있으나, 토야마류가 그러하듯이 타카야마류도 해군 전체의 검술이 아닌 극 일부의 기관에서 교습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2. 일본군 검술의 신화와 딜레마

일본군이 시대착오적인 검술관을 가지고 2차대전에 이르는 현대전의 시대까지도 병사들의 검술훈련에 집중하고 그 검술능력도 높았다는 시각이 있으나, 실제로는 별 차이가 없거나 오히려 부실한 점이 있었다.

1차대전 이전까지는 각국의 군대에서 군도술을 교습하였으므로 교범을 비교해 볼 수 있는데, 군도술만큼은 일본이라고 해서 더 나을 것 없이 대체적으로 동일한 내용과 구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군대의 핵심인 총검술에서는 큰 차이가 있었다. 미국 육군의 1917년 총검술교범(Notes on bayonet training - compiled from foreign reports)에서는 1차대전의 참호전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교통호와 야전축성장애물에 대한 설명을 하고 참호에 돌입하여 찌르기와 공격해오는 적을 참호에서 올려 찌르는 방법, 개머리판을 이용해 가격하는 방법과 기본적인 총검 대 총검술, 맨손으로 총검을 제압하는 기법까지 다양한 내용을 해설하고 있다. 그러나 대척점에 있는 일본육군 1915 교범의 총검술 파트를 보면 3가지의 찌르기와 그에 대한 3가지의 방어법이 존재할 뿐, 다양한 상황에 대한 대처를 가르쳐주지 않는다.

2차대전에서도 미군FM 총검술파트(FM 23-25 Bayonet)에서 일대일, 일대다, 2대3 등의 다양한 조우 상태에서의 전법과 더불어 개머리판의 적극적인 사용, 적 나이프와 총검 탈취, 트레이닝 스틱을 이용한 훈련법 등을 교습하는 데 비해 일본군 1934교범에서는 1915교범의 3가지 찌르기와 방어법에 근접격투와 몸통박치기가 덧붙여진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일본군이든 미국군이든 징집된 병사로써 원래 일반인이었으므로 결국 군대에서 어떤 교육을 받는가가 역량을 결정하게 되는데, 일본군은 오히려 교육내용면에서 부실했다. 이 점 탓에 영미군 포로를 이용한 총검술연구에서도 일본군이 밀렸고, 과달카날 전투에서 미 해병대에게 적극적으로 총검돌격을 걸었으나 오히려 체격과 기술에서 열세를 면치 못했다.

양손군도술 측면에서도 1차대전 이후 신설된 양손군도술은 실전과 많은 괴리를 가지고 있어서, 토야마 육군병학교에서 독자적인 진검술교리를 연구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나 실제 토야마학교의 진검술교리를 배울 수 있었던 인원은 매우 적었다. 1934년 교범이 1차 상해사변의 경험을 바탕으로 개정되었으나, 군도술의 내용은 1915년의 내용을 바탕으로 매우 일부의 요소만 약간 변경된 것이었으며 여전히 죽도와 호구를 이용한 시합형태의 교습을 중심으로 삼는 만큼 근본적인 문제점이 해결되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가장 실전적이라고 여겨진 토야마 육군병학교의 교범조차도 기본적으로 돌격하여 내려베기(수직, 좌우 대각선)과 찌르기만을 가르치기 때문에 고전검술의 관점에서 보면 기초 중의 기초만을 가르치는 데에 지나지 않았다. 직접 배울 수 있었던 것은 소수에 지나지 않았던 토야마 학교 진검술조차 이러했던 만큼, 이러한 현실속에 일본군만이 특별히 검술을 잘 했기를 바라기는 어렵다.[12]

일본군이 검술의 프러페셔널처럼 여겨진 것은 2차대전까지도 장교준사관들이 군도를 패용하고, 중일전선에서는 특히 하사관병도 카타나를 패용하는 것을 묵인하여 그 인상이 특이하게 받아들여진 점, 그리고 프랑스식의 정신교리를 채용하여 공격적인 전술과 백병전을 선호하는 행동, 그 선두에서 장교가 칼을 빼들고 돌격을 선도하는 모습을 전쟁 내내 보여준 점이 강한 인상을 남긴 탓이 크다.[13]

3. 일본군 검술이 현대 일본무도에 남긴 흔적

토야마 육군병학교에서 만든 군도의 조법 체계는 전후 토야마류라는 이름으로 새출발하여 특유의 베기 위주의 수련으로 강렬한 인상을 주고, 군복과 군도 대신 전통옷을 입고 전통 카타나를 쓰는 등 전통의 이미지를 덧씌우면서 군국주의의 거부감을 희석하고 대중적인 인기를 얻는 데 성공했으나, 총검술과 단검술은 각각 총검도, 단검도라는 이름으로 남아는 있되 1934년 교범에서 추가된 근접격투술이나 몸통박치기 기술 같은 다양한 실전적 기술은 사라져 버렸고[14][15] 완전히 스포츠화되어버렸으며, 거기에 보기에 상당히 단조롭고 재미가 없어 보이기까지 해서 자위대원들이나 극히 일부만이 즐기는 마이너한 무도로 전락했다.

유럽식 한손군도술은 완전히 소멸해서 지금은 하는 사람이 전혀 없으며, 양손군도술은 처음부터 기존에 존재하던 검도의 체계를 일부만 빌려와서 만든 것이었으므로 차라리 그냥 검도를 하는 것이 훨씬 깊고 수준높은 체계를 향유할 수 있기 때문에 토야마류를 수련하면서 자연히 군도술 체계까지 익히는 것이라면 모를까, 굳이 군도술 교본을 보면서 따라하는 사람은 없다. 애초에 기술로 보나 검리로 보나 그냥 간략화된 검도다.

교범들 자체는 디지털화되어 남아 있으나 객관적으로 보아도 무술적 가치는 매우 낮고, 1889년 교범이 그나마 나으나 이조차도 원형인 유럽 교범이 더욱 수준이 높기 때문에 무술적 성취를 위해[16] 일본군 검술교범에 매달리는 사람은 거의 없다. 사실 그도 그럴 것이, 오랜 역사와 수많은 전쟁을 거쳐오며 깊고 넓은 체계를 갖춘 기존의 무술들과 달리 군대에서 빠르고 쉽게 군인들을 교육시켜 단시일 내에 필요최소한의 소양을 갖추도록 만들기 위한 체계였으니 그 깊이가 얕을 수밖에 없다.

토야마 육군병학교의 검술과장으로 전후 토야마학교 기간병과 간부들을 결집시켜 토야마류를 부활시킨 모리나가 세이(林永淸)도 1934년 교범을 전후에도 가지고는 있었지만 그 내용이 토야마류의 커리큘럼에 포함된 적은 없다.

나카무라류의 창시자인 나카무라 타이사부로(中村太三浪)는 흔히 토야마학교에서 군도의 조법을 배운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1934년 교범에 의거한 훈련을 받고 1934년 교범의 내용을 교습하는 검술교관이 된 것일 뿐이라는 이야기가 있다.[17] 나카무라류만의 특징인 창vs검의 형은 실제로는 나카무라가 만주에서 이종백병검술 강좌를 교습하면서 스스로 고안해서 만들어낸 총검vs양손군도의 형이었고, 군도의 조법을 배운 것은 1953년 이후 토야마류에 합류하면서 배우게 된 것이라고 한다.

4. 교범, 자료



[1] 19세기 후반이었던 당시 소총에 착검까지 하면 약 160~170cm정도가 되었다. 2.2m는 착검시 최고로 긴 영국군의 브라운베스 수석총의 롱 랜드패턴(대형모델)보다도 약 50cm가 더 크고, 일반적인 당시의 총에 비하면 60~70cm에 달하는 차이가 났다. 말 그대로 창술 유파의 관점에서 만들어진 목총이었다.[2] 일견 형식화된 동작 같지만 실제로는 검이 먼저 가고 몸이 나중에 따라간다는 검리를 순서대로 구현한 것이다. 몸이 먼저 나가면 공격하기도 전에 맞게 된다.[3] 당시 일본군에서 제식군도는 한손으로 쓰는 19식 세이버뿐이었다. 실전에서 일본도 칼날을 장착하고 양손으로 사용하는 양손세이버를 사용하면서 이를 실전군도라 부르기는 했으나 어디까지나 비공식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다.[4] 츠다잇텐류 2대 종가이기도 했다. 츠다잇텐류는 실전되어 실체는 알 수 없으나 남은 언급들을 종합해보면 일종의 거합발도술이었던 듯 하다.[5] 카타를 의미한다.[6] 총을 교차시킨 다음 그대로 찔러버리는 기술.[7] 총을 교차시킨 다음, 아래로 내렸다가 반대쪽으로 들어올리면서 목을 찌르는 기술.[8] 총을 교차시킨 다음 아래로 내리고 그대로 배를 찌르는 기술[9] 양손세이버는 속칭이고, 군내부에서는 실전군도라고 불렀다. 한손으로 쓰는 제식군도(Sabre)는 지휘도라고 불렀다. 장교는 평시에는 지휘도, 전시에는 실전군도를 패용하고 다녔으며, 둘 다 구입해 소지해야만 했다.[10] 이것이 이른바 토야마류의 시초였다.[11] 작은 공격은 장기간의 수련기간과 습득기간이 필요한 탓도 있고, 초기 검도경기에서는 한판과 득점의 개념이 현재의 검도와 달라 잔심이 부족하지만 툭 치기만해도 득점이 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12] 사실 이는 '군도술'이기 때문에 가지는 근본적인 한계이다. 군인들을 데려다놓고 기존의 검술 수련처럼 수년 이상을 진득히 수련하며 소양을 쌓아 가는 것은 현실적이지 못하기 때문에, 군대의 검술인 군도술 체계에서는 필요한 동작들만을 추려 속성으로 익혀서 실전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가령 일본군의 양손군도술 체계에는 검술의 기초 중의 기초라고 할 수 있는 '자신의 검으로 적의 검을 상대하는 기술' 자체가 없다. 20세기 초중반 당시의 전쟁터에서 적군과 칼을 맞대고 싸워야 할 일은 거의 없을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과감히 빼 버리고, 그 대신 군도를 빠르게 뽑아 강하게 베어 적군을 신속하게 참살하는 것을 주안점으로 삼았던 것이다.[13] 비슷한 예로 중국군의 항일대도가 있다. 이쪽은 영미군과 직접적으로 공동전투를 벌인 적은 거의 없어서 서구에서의 인식은 적으나 중국 내부에서는 항일투쟁의 상징으로까지 부각되는 물건이다. 그리고 사실 패용비율과 실전투입으로 따진다면 일본군도보다 훨씬 많이 쓰였다.[14] 심지어 총검술에서 너무나 당연한 공격 기술인 개머리판 공격마저 금지된다.[15] 일본무도는 전후 무도라면 경기를 일으키는 미군정의 지배를 받으면서 어떻게든 무도를 살려보려고 노력했다. 그 결과 전쟁 전의 과격하고 야성적인 부분들은 어쩔 수 없이 삭제했고, 검도도 유술기를 걸거나 쓰러진 상대를 찌르는 등의 과격한 부분이 사라졌다. 당연히 군대용 무술인 총검술과 단검술이라면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1953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이후 미군정이 사라지면서 무도들도 부활했지만 스포츠화된 부분을 다시 과거로 되돌리지는 못했다.[16] 물론 당시의 검술에 대한 연구나 복원 목적으로는 참조하기도 한다.[17] 1939년에 토야마학교에 입학하여 교관교육을 받기는 했다. 하지만 그가 받은 것은 검도/총검술 교사책임서 즉 양손군도술과 총검술만 수료한 것이며, 그가 군도의 조법을 배웠다는 증거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