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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문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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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천황 군대의 본질3. 대전략에서의 실패
3.1. 잠수함 활용 통상파괴 전략 부재
4. 연합군에게 애초부터 밀리던 경제력과 국력5. 산업 기반 시설의 준비 미흡6. 낮은 인적자원 수준7. 초기 이후 대책 없는 전선 확대8. 일본군의 무기체계9. 문제 많은 인사제도10. 장교들의 역량 부족11.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12. 전투 교리와 훈련의 막장성
12.1. 비실용적인 사관학교의 교육 과정12.2. 바보라는 전제하에 만든 작전계획12.3. 이 지는 걸 전제로 하는 훈련
13. 조종사 관리 실패
13.1. 타국에 비해 낮은 계급 부여13.2. 인적자원관리 실패13.3. 비실용적인 훈련
14. 자살 특공15. 전투원과 정신력만을 강조16. 후방상황17. 숭숭 뚫리는 암호18. 허위 전과와 정신승리19. 병영부조리20. 일본의 전쟁범죄

[clearfix]

1. 개요

메이지 유신의 인사들 중 일본군을 창설한 인물들은 유럽, 미국 등지에서 근대 군사 사상개념을 일본 사회에 맞게 변형시켜 들여왔다. 그리고 한 때는 매우 성공적인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도입된 근대 군사 사상과 개념이 지속적으로 발전하여 새로운 개념을 창출하거나 외국의 첨단 기술과 사상을 받아들이는 발전으로 가는 건 아니었다. 일단 도입된 것들이 진작에 퇴출되어야 할 과거 문화의 안 좋은 잔재들인 그릇된 무사도할복과 결합하는 것도 모자라서 근대화 과정에서 생긴 육군과 해군의 문화의 차이 등의 새로운 폐습과 결합하여 안 좋은 방향으로 시너지 효과를 내면서 결국 태평양 전쟁에서 패전하는 비참한 결과를 만들었다.

군사적 측면에서 일본군의 가장 큰 문제점은 무기를 직접 운용하는 일선부대의 문제보다는 그것을 뒷받침하는 행정, 전략전술의 결함이었다. 여기에 육해군 간의 대립, 각 군 내에서 다시 벌어진 각 파벌 간의 대립, 다시 그 파벌 내 각 부서 간의 대립, 자국 정부에 대한 무시, 대미 개전을 위시한 전략적 삽질이라는 오판, 경직된 계급체계, 총력전에 대한 무지, 보급 및 군수지원 경시, 민간 경제 등에 대한 지식 결여가 합쳐져 총체적 난국으로 다가왔다.
일본군의 행동전술은 잡병 수준이다. 단체로 모여서 돌격밖에 할 줄 모르며 제대로 된 중화기도 없었다. 악에 받쳐 싸우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신력이라는 말도 안 되는 힘으로 화력 차이를 극복하려고 한다.
존 바실론
장군님. 저는 이러한 전투 방식은 일찍이 듣지도 보지도 못했습니다. 일본군은 포로가 되기를 거부합니다. 그들은 수류탄으로 자폭하거나 자결을 기도합니다.
미 해병대 제1사단 알렉산더 밴더그리프트 소장과달카날 전투가 끝난 뒤 해병대사령관 홀컴 중장에게 보낸 보고서 中
일본군한테 중화기란 단지 장식품일 뿐이다. 그들은 정신력의 일본 문명이 서구 문명보다 우월하다고 믿는다. 이것이 소위 '야마토 정신'의 정체이며 우리 나라에 대한 경멸감의 원인이기도 하다. 이번 전쟁으로 그들도 무엇인가를 깨닫겠지만 그러기까지 치러야 할 대가가 너무나 클 것이 두렵다.
미국 해군, 과달카날 전투보고서
모두들 안심하라. 저들은 헛된 망상에 빠져 온갖 병영부조리로 인해서 내부로나 외부로나 상당히 흔들리고 있다. 이제 우리의 승리가 눈 앞에 있다!
장제스, 국민혁명군 장병들에게 연설 중에
이에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天皇「日米事起こらば、陸軍としては[ruby(幾許, ruby=いくばく)]の期間に片づける確信ありや」
杉山「南洋方面だけは三箇月くらいで片づけるつもりであります」
天皇「汝は支那事變當時の陸相なり。その時、陸相として『事變は一箇月位にて片づく』と申せしことを記憶す。しかるに四箇年の長きに亙り、未だ片づかんではないか」
杉山 (恐懼して、支那は奧地が開けてをり、豫定通り作戰し得ざりし事情を、くどくどと辨明申し上げた。)
天皇「支那の奧地が廣いと言ふなら太平洋はなほ廣いではないか。如何なる確信あつて三箇月と申すか 」
히로히토: 사이에 이 벌어지면 육군은 어느 정도의 기간 안에 정리할 수 있다고 확신하는가?
스기야마: 남양 방면만큼은 3개월 정도 안에 정리할 생각입니다.
히로히토: 자네는 지나사변[1] 당시 육군대신[陸相]이지. 그때 육군대신으로서 (지나)사변은 1개월 정도면 정리한다고 말했던 것을 기억하네. 그렇지만 4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아직도 정리가 안 되지 않았나?[2]
스기야마: (몹시 두려워하면서, 지나는 오지가 펼쳐져 있어 예정대로 작전이 불가능했던 사정을 구구절절 변명함)
히로히토: 지나의 오지가 넓다면 태평양은 더 넓지 않은가? 무슨 확신이 있어 3개월이라는 말을 하는 건가?
고노에 후미마로(1946),《최후의 어전회의》,[3][4] 7장,[5][6] 東京: 時局月報社, p.43(1946)[이미지]/p.901(2015).
(밑줄은 이 문서, 후리가나는 2015년 판, 한도 가즈토시(2004)[8]의 박현미 번역을 일부 수정)

본질적인 측면에서 일본군의 가장 큰 문제점은 일본군의 내부가 아니라 일본 사회 전체에 만연한, 천황 무오류의 무비판적인 확신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에서 시작한다. 이 탓에 일본 전체가 천황이라는 교주와 일본군이라는 사제 집단이 운영하는 광신주의 종교집단처럼 굴러갔다.

이런 상황에서는 미리 준비를 하고 기습해서 몇 번의 전략적 성공이 있었다 할지라도 오래 가지 못한다. 그리고 일단 패배가 시작되면 실패를 교훈 삼아서 전략적 오류를 수정하고 실패를 스스로 고칠 생각이나 엄두도 내지 못하는 특성이 생긴다.

결국 똑같은 잘못을 계속 반복한 후 패전이 가까워 광신주의 종교 집단이 몰락할 때의 공통적인 결말인 근거 없는 낙관주의와 정신승리, 공동체의 내부 모순으로 인한 붕괴조차 받아들이지 못한 채 교주와 사제들이 신도들에게 책임을 돌리며 목숨 걸기를 강요하는 행태를 벌였다. 이런 정신적 근간이 패전 후에도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도 패전을 부정하는 일본 극우의 준동까지 이어진 것이다.

실제로 그 시절을 살았던 사람들이 늙어서 1980년대가 되어서도 집에 쇼와의 사진을 두고 거기다 절이나 만세를 하는 경우가 많았고, 쇼와가 죽자 애도 기간이라며 광적인 자중과 엄숙을 보여주었다.

2. 천황 군대의 본질

후지와라 아키라는 『일본군사사』에서 '천황 군대의 본질'을 다음과 같이 알려주고 있다.
…여러 원인의 근저에는 천황 군대의 본질적인 성격이 존재하고 있었다. 국민병사인권을 무시하고 천황을 위해 생명을 바치는 것이 최대의 미덕이라고 하는 메이지 이래의 국민교육과 군대의 분위기가 병사의 생명 경시를 낳았다.…정신주의의 강조와 병사의 생명 경시는 러일전쟁 이후 특히 현저하게 되었는데, 쇼와 시대가 되자 그것은 포로의 부정으로 이어졌다.…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죽을 때까지 싸울 것이 요구되어, ‘옥쇄’라는 이름의 전멸이 반복되었다.…병사의 생명을 무시하여 포로를 최대의 치욕이라고 한 일본 군대는 적국의 포로에 대해서도 비인간적인 대우를 했다.…선전포고를 하지 않았던 중국에 대한 침략전쟁에서는, 전면전 상태이던 1937년 8월 5일 육군차관 통첩으로, 교전법규에 각종 조약을 “모두 적용하여 행동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았다”고 하고 있다. 1941년의 영국과 미국에 대한 개전에 있어서의 천황의 조서에서는, 국제법 준수 항목은 사라지고, “힘차게 궐기하여 일체의 장애를 분쇄하라”고 하고 있다. 포로를 치욕이라고 하여 국제법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한 것이 남경대학살이나 포로학대의 원인이 되었다. 특히 중국에 있어서는 중국인에 대한 멸시와 중국인의 뿌리 깊은 저항에 대한 반감 때문에 방화, 폭행, 강간, 살인이 반복되었다. 자국 병사의 생명조차 존중하지 않는 일본군이 적국의 군인인민의 생명을 무시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일본군대는 천황의 군대이며 천황제 지배체제를 지키기 위한 군대였을 뿐, 국민을 지키기 위한 군대가 아니었다. 창설 이래 거듭된 대외전쟁은 국민의 생활과 생명이 위협받기 때문에 일으킨 방위전쟁이 아니라, 국가와 그 지배자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침략전쟁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국민을 지켰는지 어떤지는 국토가 전장이 되었을 대 혹은 그것이 예상되었을 때 명백하게 드러났던 것이다. 현재도 오키나와 전투의 실태를 밝히기 위한 노력이 계속되고 있지만, 그 결과는 군이 국민을 지키기는 커녕, 자신의 생존을 위한 일반인을 희생시켰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오키나와 연구자에 의한 다수의 연구 및 보고가 있다. 1982년 문부성이 교과서 검정에서 주민학살을 부분을 삭제시켰을 때, 오키나와의 여론이 격분하여…현지 신문들이 학살에 관한 증언을 발굴하여 연재했다. 일본군이 주민을 학살한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국민을 지키기는 커녕 무의미한 죽음을 강요한 군대는, 타국에 대해서는 무시무시한 침략군이었다. 일본국민은 잊었어도 침략의 희생이 된 아시아 각군의 국민은 그 피해와 굴욕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교과서문제의 국제화를 계기로 중국과 동남아시아에서 새삼 일본군에 의한 학살과 폭행 사실을 발굴하여, 기념비를 세우고 교과서에 특필하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 일본의 군사사는 이 역사적 사실을 은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직시하여 그 원인을 분명히 밝히려는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될 것이다.
후지와라 아키라, 『일본군사사. 상, 전전편』, 서영식 옮김 (서울 : 제이앤씨, 2013), pp.347-349.
쉽게 말하면, 일본 군부는 '우리는 천황의 군대다'라는 이름으로 군 내부의 온갖 부조리를 정당화시키고, 모자란 기술력이나 공업 능력을 정신력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병사들을 세뇌하며 '천황의 뜻'을 위해선 목숨도 아까워하지 말라는 프로파간다로 전 병사들을 세뇌하기에 이르렀다.

문제는 아무리 세뇌된 병사라고 할지라도 그들이 감정이 없는 로봇이나 기계가 아닌 한 반드시 스트레스나 부조리에 의한 분노가 쌓일 텐데, 이를 '너는 선택 받은 황국의 군대다'라는 식의 세뇌로 적국의 병사나 민간인, 혹은 자국의 민간인 등에게 풀도록 지시하였다는 거다. 자국의 민간인까지 저렇게 개차반 같은 취급을 하니 식민지였던 조선이나 대만, 1609년에 사쓰마 번의 침공으로 속국이 된 후 1879년에 완전히 일본으로 편입되어 간신히 일본 본토화하는 류큐 왕국의 중심지인 오키나와 같은 곳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결국 이는 타지에서의 무제한적인 약탈, 살인, 강간이나 타국 민간인들을 총알받이로 써먹는 반인륜적인 전쟁범죄로 드러나게 되었다.

사실 이 문제의 진짜 핵심은 글을 읽게 되면 자연스럽게 드는 생각이 결론이 된다. "그러면 히로히토가 일본군의 수장 맞잖아?"

3. 대전략에서의 실패

사실 일본군은 나름대로 새로운 시도를 많이 벌인 선구자적인 측면도 있다. 일본 육군스페인 내전과 더불어 도시에 대한 대규모 공습도 해봤는데, 대표적인 예시가 충칭 대공습이다. 몇 년 후 도쿄를 대규모로 폭격(도쿄 대공습)한 커티스 르메이에게도 영향을 주었을 정도다. 그리고 세계 최초전차의 집단운용을 통한 기동작전[9]을 시도했다. 다만 일본군은 이들의 효용성을 그다지 인지하지 못했고, 오히려 연합군이 이를 더 잘 활용했다. 할힌골 전투에서 얻은 전훈은 그냥 무시하고 해당 전투를 패배한 전투라 하여 노몬한 '사건'으로 축소시키며 은폐하기에 바빴다. 그 뒤로도 전차는 물론 기본적인 대전차 수단에조차 딱히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았다. 전략폭격을 수행하는 역량도 연합군이 압도적이었다.

일본 육군이 줄곧 열강 최약체였던 반면[10] 일본 해군은 외형적 하드웨어 면에서는 군축조약의 기준으로 보나 실제 총 톤수 기준으로 보나 3위 정도를 유지했다. 영국대서양지중해에 대부분의 전력을 집중하고 있었고, 태평양에 신경을 쓰고 있었던 미 해군진주만 공습으로 큰 타격을 입으며 1941년 시점에서 일본군 해군은 18만 톤을 기록, 13만 톤 정도까지 내려간 미국보다 우위에 서면서, 태평양에서는 일시적으로 연합군을 상대로 우세했다. 상대가 상대여서 그렇지, 육군국인 프랑스이탈리아에 비하면 전체적으로 우수한 하드웨어를 보유했다고 할 수 있다. 레이더 등 전자기기는 대전 기간 내내 열강 최저 수준이었지만[11] 광학기기는 매우 우수하여 전후 니콘이라는 광학기기 업계의 선도기업을 만들어 냈다.

그 외에 제로센도 여러 외부적 요인이 겹친 덕에 태평양 전쟁 초반 한정으로는 괜찮은 기체였고, 항공모함 관련 기술력 역시 독일에 한 수 가르쳐 줄 정도였다. 양국이 전쟁에 투입한 장비들의 수준 차이를 보면 대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 싶겠지만, 베르사유 조약 체제 하의 독일에서는 군사기술 습득이 사실상 금지되었다. 육군이야 소련과 맺은 비밀조약을 이용해 어떻게든 연구가 이어질 수 있었다지만, 군함 정도 되는 물건은 그게 어려우니까.

그러나 타란토 공습의 영향을 받은 진주만 공습으로 거함거포주의의 종말을 증명했던 일본군은 정작 미국이 본격적으로 항공주병 체제로 전환하는 사이 오히려 일본군은 여전히 전함이 주력이라는 인식을 버리지 못한 안일한 운용으로 세계 3위의 전력조차 제대로 운용하지 못하였다.
정말로 일본해군은 귀축영미의 물량 때문에 패했나
진주만 공습 이후로도 거함거포주의를 버리지 못했다고 지적하는 NHK의 다큐멘터리.
일 해군의 신비주의적인 야전 계획

심지어 항공전통상파괴전 관련 소프트웨어는 열강 최하위인 육군만도 못한 수준이었다. 남방작전을 위한 육군 병력 수송을 위해 390만 톤에 달하는 수송선을 징발했고, 이는 민간 경제 활동과 군수물자 생산에 필수적인 민수용 수송선량 300만 톤을 침해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일본 전사연구가의 관련 글 #2.
소프트웨어로는 러일전쟁 시절보다도 퇴보했음을 지적하는 3편
시레인 방위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NHK의 다큐멘터리, 이 부분은 육해군 공통 문제다.
해군은, 1944년 이후 침공해오는 미 함대와 수륙양용부대를 요격함에 있어. 함대의 주 전력인 기동부대의 항모, 특히 정규항모를 공격 목표로 삼는 것을 고집했습니다. 그에 비해 육군은, 해병대나 육군 병사를 수송하는 수송선을 공격목표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당시 미 기동부대의 방공능력으로는 그 방공망을 돌파해 방공망의 중심에 위치하는 항모를 공격하는 것은 곤란합니다. 또한, 미 기동부대의 내습은 해병대, 육군의 육상 병력과 함께 그 작전 목적인 요지(구체적으로는 도서지역)을 공략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하지만 기동부대와는 달리 수송선단의 직접호위는 정규항모와 비교해 소형인 호위항모 등의 비교적 취약한 전력이 담당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엄중히 방어된 기동부대의 정규항모보다 공격 성공 가능성이 높습니다. 또한, 육상 전력에 큰 피해가 나오거나, 상륙한 육상 전력에 대한 보급을 유지하지 못하게 되면 요지 점령 목적은 달성 불가능합니다. 적의 작전 목적을 저지한다는 의미로 보면, 육군의 견해가 목적에 적응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에 비해, 해군은 '적 함대의 주력을 격파하면, 그 재건에 시간이 걸려 전쟁 지속이 곤란해진다. 그러니 적의 주력을 공격한다'라는 생각을 러일전쟁의 승리로 굳히게 되었습니다. 그 가상적이 미국으로 바뀐 이후에도, 이 생각은 유지됩니다. 이 점에서 보아 해군은 자신들이 생각하는 주적을 격멸한다는 것에 총력을 기울인 것이 됩니다. 또한, 진주만 공격까지는 그 주적은 전함이었지만, 미드웨이 해전 이후 그 주적은 항모가 됩니다. 전쟁의 양상이 변화했는데도 불구하고, 종래의 발상이 거의 고정관념화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해군이 항공운용의 원리원칙을 지킨 것은 어떤 의미로는 종래의 관념에 사로잡힌 것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보급 및 군수지원 경시는 일본 해군에 수많은 병폐를 남겼다. 이는 대잠 능력이나 해상 호위 능력에서도 치명적인 약점으로 드러났고, 1943년 4월 이후 암호 해독과 호위 항공모함의 투입 등 효과적인 대잠 체계가 갖추어지며 대서양에서 연합국의 상선 손실이 격감하는 반면(예시[12]) 일본의 수송선 손실은 전쟁이 진행되며 확대일로를 걸었고(예시) 이는 해상 호위를 포기한 채 적 전투함 공격만으로 제해권을 장악할 수 있다고 믿은 극단적인 함대결전주의의 대가라고 할 수밖에 없다.[13]

개전 직전 경제 및 군수물자 생산을 위해서는 민수용 수송선이 최소 300만 톤이 필요하다고 추산되었지만 해상 수송로 방위를 방폐하면서 건설한 세계 3위 해군으로는 연합군의 통상 파괴를 막을 수 있을 리가 없었고, 1943년 이후 두드러지는 보급 문제와 병기, 군수물자의 신뢰성 및 품질 저하도 섬나라의 경제 활동에 필요한 최소한의 수송선도 유지하지 못한 것에 기인한다. 상술한 유라 후지오의 기고문은 일본 육해군항공 양쪽이 상정하지 않은 전장에서 싸우느라 그 근간이 꺾여버릴 정도의 타격을 입었음을 지적한다. 외적 덩치는 일견 강대국 수준으로 키웠지만, 그렇게까지 해도 아시아 지역강국 수준밖에 안 되는 역량으로 한 수 아래로 얕보던 중국조차 제대로 제압하지 못하면서 미국과 양면전쟁을 벌였으니 결과는 뻔할 수밖에 없다.

일견 눈부셔 보이는 대전 초반기 남방작전의 성과조차 실은 서전기의 기습 효과 및 연합군이 태평양 전선에 배치했던 기종이 2선급이었다는 점에 힘입은 것에 불과하다. 미드웨이 해전 이후 미 해군, 육군이 모두 1선급 작전기를 투입하며 성능 차이가 역전되고 개전 시의 베테랑 탑승원의 소모와 맞물려 급속하게 소모율이 증가했다고 방위성 전사연구연보 15호는 지적한다.

덤으로 일본은 거리의 혜택을 많이 보았다. 육군이 넘사벽으로 강한 독일은 일본과 추축국으로 동맹이었고, 소련은 일소 중립 조약으로 태평양 전쟁이 끝나기 직전까지 일본과 전투가 없었으며, 둘 다 육군국이라 만일 일본과 사이가 틀어져서 전쟁이 발생하더라도 해군이 빈약하여 원거리까지 이동을 한 후에 일본 해군을 전면전으로 박살내기 전까지는 일본 본토를 직접 공격하기가 어려웠다.

해군력이 강한 영국도 거리나 국력상 일본 본토까지 완전히 제압하긴 어려웠다. 애초에 남방 작전 시점에서 영국은 대독전에 주력하느라 상술한 유라 후지오의 지적대로 태평양 전선의 전력이 2선급이었으므로 일본의 초기 공격 성과가 좋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영국은 동아시아의 식민지를 반 년 만에 빼앗겼고 실론도 해군에 털렸다. 이 과정에서 실론 해전이 일어났는데 영국은 독일, 이탈리아 해군과 이미 싸우고 있는 상황에서 잠시 소강 상태에 접어들자 차출 가능한 병력을 돌려서 대응하였으나 주력 전함이 느려터진 리벤지급 전함이었으며, 아직 고성능 함재기도 배치되기 전이라 비행장 인근이 아니면 제공권 장악도 장담하기 어려운 상태였으므로 패전하게 된다. 그래서 한동안 태평양 전쟁에서 물러나 있다가 임팔 작전의 주력을 담당하면서 재등장했고 전쟁 막바지에 와서야 미얀마를 겨우 수복하고 미국 태평양 함대의 보조 전력으로 일본을 공격한 것이 영국의 태평양 전쟁에서 보인 제대로 된 성과의 전부였다.

이런 상황에서는 일본도 충분히 싸워볼 만 했다. 비록 양면전쟁의 페널티는 일본도 마찬가지였고, 남방작전 시점에서 일본군은 연합군 상대로 압도적 양적 우세도 없었으며 미영이 그런 것처럼 당장 동원할 수 있는 여력은 똑같이 제한되어 있었다지만 거리의 혜택이 존재하므로, 초반 기습으로 중요 거점을 장악한 후 우주방어에 돌입해서 협상으로 종전하면 사실상 일본의 승리로 전쟁이 끝날 수 있던 것이다. 덤으로 나치 독일이 활약해서 유럽의 열강들이 일본 쪽에 신경을 쓰지 못할 상황이 되면 더 좋다.

그러나 태평양 지역에 강력한 이권과 관심을 가진 미국을 애써서 무시한 것 자체가 문제가 있었다. 미국은 육군도 충분히 강하고 그것을 일본 본토에 상륙시키고도 남을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은 선전포고 없는 기습으로 진주만 공습 같은 강력한 한 방을 때려서 상황이 정리될 수준의 약한 국가가 아닌 데다가, 국력이 강력한 미국과 소모전을 펼치면 결국 망하는 쪽은 일본이었다. 결국 기본적인 발상과 생각이 잘못되었으니 결과가 그 지경이 된 것이다.

물론 이런 발상과 생각 같은 소프트웨어도 따지고 본다면 그만큼 돈을 써야 한다는 반론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일본 이상으로 막장이라는 중국군충칭에서 농성해서 지구전을 펼치면 어떻게 될 거라는 상황 판단 하나는 잘한 점, 아니면 유고슬라비아나 이후의 베트남 같은 나라들도 전략적 판단 하나는 잘한 점을 감안할 때, 그토록 거대한 규모로 운용되었던 일본군의 문제가 심각했던 것이 확연하게 눈에 들어온다.

애초에 일본 내부에서도 생각이 그나마 정상적인 사람들은 존재해서 미국과의 전쟁은 불가능하다, 무리다 하는 목소리는 수없이, 심지어 최상층부에서조차 나왔다. 그런 정상적인 판단을 끝끝내 어거지로 뒤엎어가며 전쟁을 벌이고 확대했으니 더더욱 일말의 변명도 용납되지 않는다.

일본도 이를 생각은 한 모양인지 함대결전점감요격작전에 쓸 각종 무기와 장비를 개발해서 실전에 배치했다. 물론 두 항목에 특화하느라고 기본적인 성능이 안 나와서 문제가 된 경우가 많았지만 성공적인 것도 많아서 산소어뢰는 비밀병기라 칭해도 좋을 만큼 위력 하나는 괜찮았다. 당장 대전기 관련 문서들을 봐도 숱하게 나오는 기록들이 '화력만 충분하면 나머지는 전장에서 알아서 운용할 테니 제발 쓸 만한 무기를 보내달라'는 요청 내지 호소들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산소어뢰의 화력 자체는 최초 등장 시점에서 확실히 좋은 축에 들었다.

문제는 이렇게 잘 나가는 무기도 지지부진한 개선과 제공권의 상실로 갈수록 써먹기 어려워졌다는 것. 결국 패전 직전까지 가면 자살특공인 카미카제, 가이텐 등의 삽질까지 하면서 전쟁을 이어나가다가 끝내 패전한다. 최종적으로는 패전한 데다가 도덕적, 윤리적, 경제적, 전후의 타격 및 인권 등 여러 가지 문제까지 발생했으니 답이 없다.

3.1. 잠수함 활용 통상파괴 전략 부재

대국적 전략 면에서 추축국은 예외 없이 치명적 오판으로 점철되어 있었으니 넘어가더라도, 한 번 소멸했다가 1933년에 겨우 재건했고 영국 해군의 20% 전력도 안 되리라 보였던 독일 해군은 부족한 전력이었으나 유보트를 사용한 통상파괴를 이용하여 아직 준비가 덜 되었던 영국을 상당 기간 괴롭혔다. 이는 후술하겠지만 미국과 달리 대다수의 물자를 해외에서 사들였던 영국의 특수성 때문도 있다.

상술한 NHK다큐멘터리를 보면 개전 직전 일본은 1차 대전기 같은 섬나라인 영국의 수송선 상실량이 연간 보유량의 10% 정도였다는 것에 근거해 연간 예상되는 수송선 손실을 60만~80만 톤으로 추산했다. 하지만 막상 일본의 실제 총 수송선 손실량은 800만 톤이 넘어가고 한 달에 50만톤 이상을 상실한 경우도 있다.

참고로 영국은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무제한 잠수함 작전으로 매월 약 15만 톤 이상, 최대 55만 톤 이하의 피해를 입었고 타국의 손실까지 합치면 그 배 안팎이었다. #1, #2 제2차 세계 대전 시기에는 개전 후 2년 내로만 영국 해군은 대략 1000만 톤 안팎으로 피해를 본 것으로 추산된다. 다른 기사에서는 연합군 전체는 총 1,500만 톤을 손실했다고 한다.

다만 상선의 소티 대비 손실률은 전 기간을 통틀어서 1.7%이고 유보트가 잘 나갈 때도 2.5% 수준. 그리고 유보트가 격침시킨 배의 절반은 빈 배이고 정말 중요한 물자는 별도로 빠른 수송선에 적재하고 매우 엄중한 호위를 받았기에 실질적으로 군사물자가 손실된 경우의 수는 일본의 예측 수준을 크게 넘지 않았을 가능성도 높다.

하지만 유보트의 진정한 가치는 유보트가 때려잡은 상선에 있는 게 아니라 연합군이 여기에 대응하기 위해서 엄청난 비용을 퍼붓게 했다는 것이다. 가령 영국이 호송선단을 형성하면서 상선의 효율이 2/3으로 대폭 감소했는데, 이건 유보트가 직접 준 피해와 비교할 수 없는 규모이다. 거기다 주요 물자나 수송선 대다수에 일일이 호위함대를 붙여야 하는 만큼, 이 호위함대에 붙일 전력들은 전장에서 자동으로 배제될 수밖에 없었다. 이는 나치 독일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라서 실제 독일 해군 총사령관이었던 카를 되니츠는 이미 전세가 절망적이던 2차대전 후반기에도 유보트 출격을 강행했는데, "전과를 기대할 수 없지만 출격은 지속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대서양의 연합군 해군 전력이 모두 독일 본토로 몰려든다"는 이유를 들었다. 실제로 연합군은 몇 척 안 되는 유보트 때문에 전쟁 막바지까지 대서양 상선 호위에 엄청난 물량을 할애해야만 했다. 한 마디로, 독일이 그 열세에 놓인 해군에도 불구하고 역설적으로 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제외한 상륙전을 저지할 수 있던 이유도, 압도적인 해군 물량 다수가 수송선 호위로 빠져나갔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러한 특수성 때문에 독일에서는 잠수함 통상파괴를 유력한 전략으로 여겼고, 영국에서는 심각한 위협으로 간주해 각각 공격과 방어에 진력했다. 이 때문인지 몰라도 유독 유럽 전선에서의 해전은 육상전에 비해 조명 받지 못한 것도 백미. 하지만 일본은 함대결전 전력 구성에 정신이 팔려 해상 수송로 방위나 통상파괴는 안중에도 없었다. 예시.

여기에 대해서 '핑계 없는 무덤은 없다'고 일본군이 잠수함을 이용한 통상파괴를 고려하지 않은 데는 나름 합리적인 이유가 있다고 주장한다. 첫째로, 미국은 대륙 국가라서 내륙에서 철도를 운용하기 때문에 잠수함을 통한 민간 선박에 대한 통상파괴가 거의 의미가 없다. 반면 영국은 해상 무역이나 수송이 국가의 존립에 중대한 영향을 준다. 둘째로 대서양은 상대적으로 바다가 좁고, 무역 항로가 대체로 정해진 상황인 데다 미국-영국 및 영국-아프리카 식민지+인도 등의 무역항로가 밀집되어 있어서 민간 선박도 많은지라 충분히 통상파괴 작전을 할 가치가 있었으나, 일본이 활동할 태평양, 어쩌면 인도양은 훨씬 권역이 넓은 반면에 아시아 지역이 상대적으로 후진 지역임을 감안하면 격침시켜야 할 적국선박도 상대적으로 적었다. 그리고 특히 일본이 단기 결전을 중시하는 상황임을 고려하자면 통상파괴를 통한 소모전이 단기 결전을 통한 승리에 그다지 기여하지 못하는 점도 고려할 수 있다.

그러나 이건 지도만 한 번 살펴봐도 바로 논파되는 수준의 아전인수정신승리에 가깝다. 미국이 태평양 전쟁을 수행하면서 미국 본토 서해안에서 하와이까지 선박으로 물자를 수송한 후 하와이에서 호주 같은 중간에 있는 중요 거점까지 선박으로 물자를 수송한 다음에 과달카날 같은 일선까지 선박으로 물자를 수송하는 3단계 해상 물자 수송을 하므로, 해당 구획마다 잠수함을 파견해서 통상파괴전만 수행해도 대서양에서 유보트가 동일한 작전을 하는 것에 비해 3배의 효과를 달성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설령 일본 잠수함이 미국 수송선을 1척도 격침시키지 못하더라도 미국은 일본 잠수함에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3단계 루트 전체에 대해서 호송선단을 조직한 후 수송 작전에 돌입해야 하므로 태평양에서 작전하기가 매우 고달파진다.

덤으로 일본이 함대결전을 노리더라도 일단 적이 지치고 힘들어야 승률이 높을 것이 아니겠는가? 바로 이런 효과를 노리고 점감요격작전도 구상하고 연구한게 일본군이다. 단기결전이건 뭐건 간에 적군 수송로를 개박살내는 것은 고대부터 현대전까지 무조건 필수로 해야 하는 사안인데 이걸 무시한 것에서 이미 답이 없다.

실제로 일본 해군이 개전 초반의 전성기에 통상파괴전을 약간 한 전력이 있다. 일본 해군은 전성기에는 인도양실론, 마다가스카르 일대까지 진출하기도 한 바 있는데 해당 권역은 영국과 인도를 오가는 민간 선박들의 항로와도 겹치는 지점이라 해당 구역을 오가는 잠수함들은 주로 영국의 민간선박을 공격함으로써 재미를 봤다. 예시. 과달카날 전역 초반에도 일본군 잠수함 일부가 현지의 독자적인 판단으로 통상파괴전을 실시하였고 나름 재미를 보았다.

하지만 이렇게 실시한 통상파괴전은 단기간의 일시적인 사례에 그쳤다. 덕분에 미국은 태평양 전쟁 초반이 지나가자마자 수송선에 대서양 방식으로 엄청난 규모의 호송선단을 만들고 호송부대도 만만치 않게 붙여야 할 필요가 없음을 알아챘다. 그래서 미국 본토에서 하와이까지는 그냥 수송선이 자유롭게 단독 항해하고 하와이부터 호주 같은 중간에 있는 중요 거점까지는 G4M 같은 일본 해군 항공대의 장거리 폭격기의 공격 같은 것에 대비하기 위한 최소한의 호위를 붙였으며, 중간에 있는 중요 거점에서 과달카날 같은 일선에 갈 때나 호위 부대를 제대로 붙였다. 그리고 일선에 가는 수송선도 대서양처럼 큰 규모의 호송선단도 아니었고 호송부대도 적절한 수준의 숫자였다.

덕분에 과달카날 전역 초기에 미국 수송선이 현지에 도착하자마자 제한된 시간에 황급하게 물자를 내던지듯이 해안에 던져버리고 긴급 철수하던 시절은 빠르게 사라지고, 솔로몬 제도 중간에 있는 뉴조지아 섬을 공격할 때부터 일선 보급도 여유가 있게 된다. 덤으로 울리시 환초 등 일본군이 점령한 환초를 점령한 후 빠르게 물자를 효율적으로 해군기지화한 것도 일본군의 방해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게 다 통상파괴전 따위는 안중에도 없던 일본군의 실책이다.

그리고 일본이 상대적으로 자기 영해를 지킬 여력이 있었던 1943년보다 일본의 제해권이 본격적으로 무너지는 1944년부터 민간선박의 파괴가 극심해졌다. 위에서 언급한 800만 톤의 민간 선박의 대부분은 1944년 이후에 발생한 현상을 가지고 일본 해군 전투함대가 박살나버려 제해권이 통째로 넘어간 탓에 뭔가 대처할 수단 자체가 없어서 망했다고 보는 시각이 있는데 이 역시 답이 없는 시각이다.

그 이유는 어뢰 스캔들만 봐도 알 수 있다. 미국 어뢰의 치명적 결함 및 해당 결함을 일선의 잠수함을 비롯한 장병들 탓으로 돌리면서 책임을 회피한 미 해군 병기국과 랄프 왈도 크리스티(Ralph Waldo Christie) 제독이 적극적으로 문제 해결에 방해를 놓았기 때문에 1943년 9월에 와서야 간신히 어뢰 문제가 해결된 것이다.

그 전에는 미국 잠수함이 일본이 제해권을 쥔 해역에 가서 어뢰를 발사해도 어뢰가 모조리 고장나거나 잠수함으로 되돌아와서 스스로 자살하는 식의 대참사가 벌어져서 일본 수송선을 못 잡은 것이지 일본 수송선 포착은 매우 잘하고 있었다. 그러니 어뢰의 문제점이 해결되기 시작한 1944년부터 실적이 크게 오르면서 제대로 통상파괴전을 수행한 결과 일본 수송선의 피해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그래서 1945년에 이르면 더 이상 격침할 배가 부족해서 목선 같이 어뢰 쏘기가 곤란한 작은 배를 상대로 미국 잠수함이 수면 위로 올라와서 덱건을 쏘거나, 아예 수병들로 구성된 소규모 상륙부대를 보내서 철도를 파괴하는 등의 사태까지 발생한다.

이미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일본이 1942년에 만든 해상호위총사령부의 보고에서 다 드러난다. 해상호위총사령부가 매일 보고 올리는 게 호위함선의 절대적 부족과 그로 인한 대참사니 말 다한 셈이다. 호송선단 1개에 해방함 1척을 호위랍시고 붙여주니 미국 잠수함에게 수송선단과 함께 해방함까지 격침 당하는 대참사가 나는 것이다. 그리고 인원이랍시고 붙여준 것도 퇴역한 장교에 훈련 받지 못한 신병에다가 복무 부적합자 등 써먹기 곤란한 사람만 준다고 연합함대를 맨날 욕하는 상황이 해상호위총사령부의 보고마다 등장한다.

그러므로 일본 해군 주력함대가 괴멸되어 제해권을 상실함으로서 공습에 일본 호송선단이 노출된 것은 그냥 막타 들어간 것에 가깝다. 이미 해상 수송로가 어뢰가 정상화된 미국 잠수함 덕분에 마비 상태에 돌입하기 시작한 상황에서 그나마 정신을 조금 차려서 호위함선을 대잠전 위주로 좀 더 늘린 몇 안 되는 대규모 호송선단이 잠수함과 공습의 연합 공격에 당하면서 완전괴멸된 것이 정확한 해석이다. 덤으로 공습 피하려고 호송선단이 육지의 항공기 엄호를 받을 수 있는 연안항로로 움직이다가 잠수함 울프팩 습격에 수송선단은 물론 호위함대까지 당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런 식으로 정규 항공모함까지 당한 게 시나노이다.

결국 전쟁 패전 직전이 되어서야 일본의 잠수함에게서 적을 수색하는 산개선이나 산개면 같은 딱 걸려서 격침 당하기 좋은 임무나 적 군함을 노리라는 답 없는 임무를 늦게나마 제외하고 태평양 지역에서 자유롭게 통상파괴전 하라고 내보냈으나, 이미 일본의 잠수함 숫자가 크게 줄어들어서 거의 성과가 없었다. 하지만 이런 와중에도 가뭄에 콩 나듯이 격침 전과가 나왔으며, 인디애나폴리스 침몰사건 같은 대박이 터지기도 했으니 일본이 통상파괴전을 등한시한 것이 얼마나 멍청한 짓이었는지 잘 보여준다.

4. 연합군에게 애초부터 밀리던 경제력과 국력

일본군아시아를 제패할 수 있었던 것과 아시아 국가들 중 가장 먼저 1류로 올라설 수 있었던 이유는 다른 아시아 국가들의 군대와 경제가 제대로 근대화/조직화되지 못했던 것과 당시 아시아에서 가장 탄탄하고 강대한 경제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은 1910년,[14] '독점자본주의' 단계로 넘어가게 될 정도로 경제력이 커진다. 여기에 제1차 세계 대전을 정점으로 엄청난 경제 성장을 이룩한다.

그러나 중후반 들어서면서 슬슬 일본군의 한계가 눈에 띄기 시작했다. 영국군이야 1945년이 돼서야 다시 아시아에 발을 들였으니 상관 없고, 중국군은 그 열악한 상황에서도 대륙타통작전 등을 통해 대처를 좀 한 축에 속했다. 그러나 사실상 미군에게 물량, 무기의 질, 전략, 기타 인프라 측면에서 압도당하게 되었다.

일단 무기의 질은 초기에 좀 나은 축에 속했던 병기조차도 업그레이드가 현저히 느린 편인 데다 그나마 그럴싸한 후속 병기들도 미군에 미치지 못했으며, 기존분에 비해서도 물량이 모자랐다. 반면 미군은 최고 혹은 그에는 약간 못 미치지만 그래도 몇 년 사이 엄청난 업그레이드를 거쳐 양질의 무기들을 콘비프 통조림에 소시지 마냥 대량으로 뽑아대고 있었다. 물론 일본군에도 Ki-84 하야테와 같이 성능이 나름 괜찮은 병기들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일본의 공업 능력이 매우 부족하여 이를 위한 대규모 생산라인 설치는 엄두도 내지 못했다. 당장 전선에서 병력과 물자가 갈려나가는 마당에 새로운 부품과 공장 생산라인, 그리고 시간을 요구하는 신형 후속 병기를 위해 투자할 여력 따위는 없었다.

일본만큼은 아니지만 역시 연합군에 비해 부족한 산업 역량을 가졌던 독일도 어떻게든 수없이 다양한 신형 무기를 개발하고 개별 생산라인을 올렸지만 생산량이 매우 부족한 건 매한가지였다. 사실 1944년 기준 독일의 GDP 수치는 여전히 개전 초 공업지대의 대규모 상실의 여파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소련보다 훨씬 높았고, 전 유럽의 공장자원을 사용할 수 있었던 데다가 실제 사용한 군비도 소련이나 영국보다 훨씬 높았고, 사실상 미국 다음 가는 수준이었다. 그래서 생산량이 나름 많은 편이었는데도 독일의 당시 GDP군비를 감안하면 실제 생산량보다 훨씬 많이 나와야 정상이었다. 이건 당시의 나치 독일도 충분히 인식하던 문제였고, 실제로 당시 독일 수뇌부는 빨라도 1944년 이후를 기점으로 연합군과 개전을 해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1944년 ~ 1945년 시기이면 1차 대전으로 갈려나간 공업지대의 복구가 완전히 완료되고, 기술력을 통해 최신예의 장비들을 쌓을 시간도 충분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전쟁으로 공장이 박살나는 와중에도 미국 다음 가는 GDP를 1944년 기록함으로써 사실임이 입증됐다.

하지만 너무 빨리 개전해버린 데다가 군수업체끼리의 알력 다툼과 총력전 체제로의 전환이 이뤄지지 않았고, 무엇보다 지나치게 중구난방으로 '다품종 소량 생산'이라는 전쟁 병기가 가지면 안 될 생산법을 지닌 탓에 가지고 있는 공업력을 100% 발휘하지 못한 것이다. 독일의 장비를 보면 알겠지만 과하게 종류가 많다. 물론 후대에 게임을 개발할 게임사나 밀덕들이야 환장할 요소지만, 현대의 모든 군대가 그러하듯이 전쟁 병기는 최대한 소품종으로 대량 생산을 하는 게 더 적합하다. 가령 독일군은 전차만 무려 7~8종 가까이 뽑아댔는데, 소련처럼 그냥 5호 전차 판터티거 2 같이 쓸 만한 놈으로 이원화만 시키고 모든 생산 라인을 집중했어도 규모의 경제로 어마어마한 전차를 뽑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당시 나치 독일도 이런 문제점을 알았지만, 전장의 상황이 너무 다급해서 중구난방으로 개발하느라 다품종 소량 생산이 유지되었다.

반면 미국과 소련은 M4 셔먼, T-34-76과 같은 전차들을 소품종 대량 양산하면서 규모의 경제를 실현시켰고, 이를 통해 압도적인 생산량을 보일 수 있었다. 오늘날 밀덕들은 타 참전국보다 훨씬 다양하고 많은 종류를 자랑하는 2차대전 나치 독일군의 병기 목록을 보며 즐거워하지만, 이는 결국 독일의 생산 능력을 갉아먹는 요인이 되었다. 알베르트 슈페어 같은 사람도 이에 대해 문제 의식을 가졌고, E 시리즈 같은 해결책도 강구했지만 지지부진했고, 결국 패전했다.

또한 일본은 보급에 대한 마인드나 인프라가 현저히 부족했으며, 정보전에서도 미국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국방은 군인의 전유물이 아니다. 또한 전쟁도 군인만 수행하는 것이 아니다. 만에 하나 국방비가 미국에 맞먹을 수준이라 할지라도, 러일전쟁 시기와 같은 소액의 재정으로는 미국과 전쟁을 펼칠 수 없다.[15] 그리고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돈이 어디서 나오느냐를 곰곰히 생각해본다면 미국 이외에 국채를 사줄 만한 나라는 없다. 그런데, 그러한 미국이 적이 된다 하면, 그러한 방법은 조기에 차단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미국과 일본과의 전쟁은 불가능에 수렴한다. 기본적으로 국방은 국력에 상응하는 무력을 갖춤과 동시에 국력을 함양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외교적 수단에 의해 전쟁을 최대한 피하는 것이, 현재 세계 정세의 국방의 본의에 따르는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
21대 내각총리대신 원수 해군대장 정2위 공1급 자작 가토 도모사부로

당장 일본은 석유 연료의 92%를 수입에 기댔고, 그 중 75% 가량을 미국으로부터 수입하였다. 물론 정밀 공작 기계의 대부분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그 석유와 기계를 공급해 주던 미국과는 사이가 갈수록 나빠지기 시작했고, 끝내 이것이 진주만 공습의 결정타가 되었다. 한 마디로 생필품과 자금을 대 주는 물주에게 자기 능력도 고려하지 않고 한 판 뜨자고 개긴 격이었다.

굳이 물주와 붙을 생각이었으면 그 전에 미리 물자를 비축하고 군대를 훈련 시키며 자금을 융통하고 수입이 필요한 물자를 얻을 다른 수입원을 강구한 뒤에 붙는 게 도리다. 물론 이것도 장기전을 생각해보면 힘든 일이다. 그런데 이미 중국과의 오랜 전투로 인해 물자와 인원을 날로 소모하기만 했고, 미국 이외의 다른 국가들과의 관계도 부쩍 나빠진 상황에서 개전을 결심한 것이다. 일본의 마인드는 "한타 싸움에서 이겨 굴복시켜 협상해서 끝내자!!"였지만, 미국의 눈에는 헛바람 들어 날뛰어대니 자살하고 싶어 환장한 것으로 보인 셈이다.

당장 이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전비다. 2차대전 전 기간을 통틀어서 일본군의 총 전비는 미국의 1/8도 안 된다. 게다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미군이 투입한 전비의 70% 이상이 유럽에 투입되었다고 한다. 거기다 냉정하게 말하면 한타에서 이기지도 못했다. 그나마 승리한 진주만 공습조차도 정작 물자 시설은 전혀 건들지 않고 전투함과 전투기만 실컷 부숴댄 탓에 미군이 물자 시설로 빠르게 복구해서(...) 결과적으로 별 효용이 없었고, 정작 진짜 '한타'라고 부를 만한 미드웨이 해전과달카날 전투, 레이테 만 해전 등은 모두 패했다.

다시 말하면, 일본은 아무리 열강이라도 지구 반 바퀴를 돌아와 상륙전까지 감행하는 원정은 상당한 지출과 시간을 요구하니 적당히 방어만 잘 하면 우리가 이길 수 있다고 단단히 착각했던 것. 일본도 미국이 강대국임은 알았겠지만 그들은 이런 거리적, 지리적 이점을 믿고 개전했다고 볼 수도 있다. 실제로도 상륙전은 일반적인 지상전에 비해 비교도 안 되는 많은 전비와 자원 소모를 유발하며, 일본도 전간기 식민지들을 다 일일이 상륙해서 점령해 봤기 때문에 이 점을 매우 잘 알았다. 또한 일본의 국력이 어디까지나 미국과 비교했을 때 크게 열세였던 것이지 기본적으로 강대국의 반열에 들기에는 모자람이 없는 수준이었다. 실제로 일본보다 확실하게 공업력과 경제력에서 앞선 나라들은 미국, 소련, 독일, 영국 정도였다.

실제로 해군이 빈약한 소련 상대로도 미국만큼의 물량은 안 됐던 영국 상대로도 이 전략은 어느 정도 선방은 했다. 실제로 영국은 자국 영토를 나치 독일에게 위협 받고 있기에 자국 주력 함대를 모조리 대서양 북해 인근에 투사시키는 바람에 유럽 대서양 북해 함대와 비교 자체가 불가능하게 부실한 Z함대, 일명 '영국 동양 함대'를 보냈다가 말레이 해전에서 말아먹으면서 일본의 이런 확신만 굳건하게 만들어놨다.

문제는 미국의 이 일본의 상상 이상이었다는 것이다. 미국이 강대국임은 알고 있었지만 공업 능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미국의 인구는 일본의 2배였으며, 미국인의 당시 국민 소득일본인보다 17배나 많았다. 철강 생산량은 일본의 5배였으며, 석탄 생산량은 7배, 그리고 자동차 생산량은 자그마치 80배였다. 이러다 보니 당연히 일본이 밀릴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함선 건조량으로 비교하면 더욱 차이가 심각해진다. 민간 상선부터 보면, 미국은 전쟁 기간에 총 3,399만 톤이 넘는 상선을 건조했지만 일본은 불과 400만 톤의 상선을 건조했다. 그나마 건조한 상선들도 미 해군에 의해 격침되어 일본 경제는 그야말로 고사되기 직전이었다. 예시.

전투함으로 넘어가서 비교해보면, 일본은 한 해에 건조한 항공모함 숫자가 10척 이상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미국은 각종 전투함을 한 해에 기본 두 자리 단위로 생산하여 1943년에는 65척이나 건조했으며, 구축함 생산량도 128척에 달해 일본 구축함 생산량의 10배를 넘어섰다. 그리하여 미국은 2차대전 중 수송함 리버티선 2,810척과 각종 항공모함 151척[16]을 건조했다. 그러나 일본 해군의 항공모함은 18척 뿐이었다.

그리고 미 해군은 이렇게 복붙 수준으로 대량으로 건조한 주력함들을 태평양 전선에 부담 없이 투입할 수 있었다. 미국의 동맹인 영국은 세계구급 해군 국가였던 반면 독일은 영국을 상대하기도 벅찬 해군력을 보유한 국가였고, 실제로 독일은 영국 해군도 제대로 제압하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독일은 미국을 해군으로 칠 가능성이 없었고, 따라서 미국은 굳이 대서양에 해군력을 투입할 이유가 없었다.

일본은 미국인들이 향락적인 문화에 빠져 전쟁을 싫어할 것이고, 반면 일본인들은 정신적으로 우월하기 때문에 이길 것이라고 자기들 멋대로 판단하고 있었지만 실제로 전쟁이 터지자마자 그동안 전쟁 개입을 반대하던 분위기는 다 사라지고 미국인들이 너도 나도 일본과 전쟁하겠다고 자원입대하던 상황이었다.[17] 이렇다 보니 전쟁 기간 동안 미군의 총 병력은 1,236만으로 불과 600만을 동원한 일본보다 갑절의 전투 병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예시.

일본은 미국 뿐만 아니라 다른 열강들에 비해서도 뒤쳐진 경제력과 총력전 역량을 지니고 있었다. 나치 독일은 비교적 짧은 기간에도 점령지에서 다량의 소강과 무쇠를 생산했지만, 일본은 식민지인 조선만주에서 그보다 매우 뒤떨어지는 수준의 생산력을 지녔다고 평가된다. 독일 본토와 일본 본토를 비교해봐도 독일이 일본보다 몇 배 앞서는 건 마찬가지였다. 예시. GDP 면에서도 영국, 나치 독일, 소련보다 한참 뒤떨어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예시. 철강 생산량 면에서도 나치 독일과 영국보다 한참 뒤쳐졌으며, 전차와 항공기 생산 부분에서도 나치 독일에 비해 한참 밀리는 수준이다. 예시. 그럼에도 독일군은 항상 연합국 대비 전차와 항공기가 부족했던 상황이었을 정도였으며, 이런 악조건 하에서도 나치 독일이 홀로 유럽 전선에서 연합군을 상대로 어마어마한 전투력을 발휘했기 때문에 일본이 득을 봤다. 실제 독일은 양면전선도 아니고 무려 전선을 3개(영국-독일 전선, 북아프리카 전선, 독일-소련 전선)나 만들어놓은 상황이었다. 그나마 영국과 독일 간에는 항공전 정도만 있었다고 해도 2개 전선을 만들고 수 년이나 버틴 셈이다. 심지어 생산력을 100% 발휘 못하는 상황에서 이 정도면 대전략이 망해서 그렇지 제대로 버티긴 한 셈이다.

그러므로 나치 독일 없이 일본 단독으로 연합군들과 싸웠다면 거리의 장벽이고 뭐고 간에 다 씹어먹고 1945년까지 버티지도 못하고 일찌감치 패망했을 가능성이 훨씬 높았을 것이다. 애초에 실제 역사상에서도 1939년 9월에 개전한 나치 독일보다 한참 늦은 1941년 12월에 개전해놓고 패전은 나치 독일이 1945년 5월인데 반해 일본은 1945년 8월이므로 나치 독일보다 전쟁 기간이 압도적으로 짧다.

5. 산업 기반 시설의 준비 미흡

일본의 경제력이 기본적으로 떨어진다는 것도 문제였지만 전쟁 수행에 필수적인 산업 기반 시설의 준비도 상당히 미흡하여 그나마 확보한 자원을 제대로 못 써먹었다.

전쟁에 필수적인 자원 중 하나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자원이 강철이다. 그리고 강철을 생산하려면 제철소가 있어야 하며 철광석을 사용하여 제련, 제강을 거쳐 강재를 생산하는 선강일관공장(일관제철소)여야 철광석에서 강철을 직접 뽑아낼 수 있으므로 전쟁 시에도 제대로 작동할 수 있다.

그리고 고철, 환원철, 선철 등을 원료로 삼아 제강 후 강재를 생산하는 독립 제강 공장을 제강소라고 부른다. 이런 시설은 고철을 구할 수 없으면 강재를 만들 수 없으므로 철광석이 있더라도 강철을 생산할 수 없어서 전쟁 시에 가동하기가 곤란하다.

일본 제국도 이걸 잘 알고 있었기에 일관제철소를 가급적 많이 일본 본토에 설립하려고 애쓰고 1934년에는 일본제철(日本製鐵)을 설립하여 관영제철소와 민영제철소를 통합해서 반관반민의 국책회사(国策会社)를 만들어서 강재 생산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생산량을 늘리려고 했다.
연도 선철 강괴 일반강 압연강재 특수강 압연강재
1934 186 201 143 -
1935 200 237 160 -
1936 203 273 181 -
1937 216 289 201 -
1938 230 305 218 -
1939 270 306 222 -
1940 283 310 216 0.4
1941 344 318 215 0.6
1942 337 342 231 0.8
1943 356 375 246 4.3
1944 309 330 213 12.6
1945 102 106 61 7.2
생산 단위는 1만 톤

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전쟁 직전 및 전쟁 시 상황인데도 생산량이 그렇게 많이 늘어나지 않았다. 철강 생산량이 압도적으로 늘어난 미국을 제외하고라도 영국이나 나치 독일보다도 못하다.

이렇게 된 이유는 간단했다. 일본제철 산하의 제철소 중 상당수가 일관제철소가 아니라 제강소였고, 일관제철소이더라도 완전한 수준이 아니거나 시설 용량이 작았기 때문이다. 기존 시설을 그대로 유지하면 전쟁 시에 써먹기 곤란하므로 기존 제철소의 시설을 늘리고 제강소를 일관제철소로 바꾸면서 필요한 시설을 추가로 건설하는 등의 대공사 및 개고생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다른 국가가 신규 제철소를 엄청난 규모로 건설하거나 기존 제철소를 대규모 확장할 때 일본은 기존 제철소의 개판 같은 상황부터 바로 잡아야 했던 것이다.

제강소가 많았던 이유도 경제적인 사유가 있었다. 원래 일본 본토의 철광석은 품질이 낮았고 일본 본토에서 생산하는 역청탄도 품질이 낮아서 철광석을 녹일 때 쓰는 코크스를 만들려면 차라리 고급 역청탄이 많이 나오는 대영제국 같은 곳에서 역청탄을 수입해서 쓰는 편이 더 나았기 때문이다. 특히 전간기에는 영국령 인도의 철이 아시아 시장에 본격적으로 진출했다. 게다가 잊으면 안 되는 것이 첫째로 일본은 철과 석탄이 부족한 국가이며, 둘째로 조선은 일본보단 낫지만 자원부국 수준은 아니라는 것이며, 셋째로 국제적인 수준의 자원 매장지인 만주를 획득한 건 좀 늦었다는 것이다.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역시 미국발 대공황이다. 제철업계라고 해서 대공황이 봐줄 리가 없고, 1차대전 이후 덩치를 키워보려던 일본 제강업계는 대공황을 얻어맞아야 했다. 일본의 제강 수요는 1.수입산 고철을 녹여 철강으로 가공 2.만주산 철광석을 철강으로 가공 으로 나뉘었는데 전쟁이 터지며 고철 수입은 차단되었고, 만주의 산업화를 본격화하기 전에 전쟁이 터졌다.

구체적으로 미국 같은 곳에서 고철을 수입해서 평로(Open Hearth furnace, OH)를 사용하여 중유 같은 일반적인 연료로 가열하여 고철을 녹여서 제철하여 쓰는 편이 용광로를 건설해서 철광석을 코크스를 사용해서 녹이는 것보다 비용이 저렴해서 제강소가 많아졌던 것이다. 평로에서도 철광석을 녹여서 선철로 만드는 게 일단 가능하긴 하나 고로라고 불리는 용광로에 비해 매우 비효율적이므로 주로 고철을 녹이는 데 많이 사용하였다.

이리하여 일본제철이 만들어진 해인 1934년 10월부터 1937년까지 5회에 걸친 확장 계획으로 철강 생산량을 늘렸으나 제철소 숫자는 창립 당시의 6개소에서 8개소로 2개밖에 늘어나지 못했고, 용광로가 없이 평로만 보유한 제철소가 2개소였으며 철광석 등 외부의 자원을 철도 같은 육상 운송으로도 공급 가능한 일본 본토 외부에 있는 제철소도 한반도에 있는 겸이포제철소(兼二浦製鉄所)와 청진제철소의 2개소밖에 없던 데다가 가장 마지막에 만든 청진제철소(清津製鉄所)는 1942년 5월 25일에나 용광로를 가열하기 시작했고 연간 선철 생산량이 35만 톤 수준으로 작았다.

여기에 더해서 굳이 제철소 같은 중요 시설을 일본 본토가 아닌 식민지 따위에 건설하면 안 된다는 업계 관계자 및 여론의 문제도 있어서 한반도에 있던 제철소 2개소도 겸이포제철소는 미쓰비시 그룹이 1918년에 건설했다가 1차대전 후의 해군 군축 및 전후 불황 때문에 용광로 1기만 간신히 돌리는 식의 개점휴업 상황에 있다가 일본제철로 넘어가면서 되살아난 것이며, 청진제철소도 조선총독부조선 주둔군이 합심해서 자기네들이 관할하는 한반도에도 일관제철소가 꼭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것이 일본제철의 확장 계획과도 연관이 되었기 때문에 건설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리고 제철소 통합 관리 시작도 늦었다. 1931년만주사변이 터지면서 서방 열강들과 일본 제국과의 관계가 악화하기 시작하였는데도 불구하고 이미 1차대전 시기부터 논의가 시작되어 1931년에 관민합동의 합자회사를 설립해야 한다고 구체적인 목표를 잡기도 했으나 무산되었다. 1933년에서야 일본제철주식회사법(日本製鐵株式會社法)을 만들고 적용을 시작했으나 원래 목표인 11개사 중 아사노 재벌(浅野財閥)이 소유한 3개사는 자산평가에 불만이 있다고 참가를 안했고, 토카이강업(東海鋼業)은 참여 의사는 있으나 주주의 반대로 참가를 못하는 사태가 발생하여 7개사만 참여하는 등의 우여곡절이 많아서 1934년 1월에서야 일본제철이 창립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미 전쟁이 시작되었는데 매우 늦은 결정이었다.

추가적으로 일본제철에 참여하지 않은 회사에 대한 보복도 있어서, 1936년까지 일본 정부는 아사노 재벌이 소유한 회사에 용광로의 신설을 허가하지 않았다. 용광로 1기가 아쉬운 판국에 미친 짓을 한 것이다.

이런 식으로 태평하게 시간을 낭비하다가 1940년 10월에 미국이 철광석과 고철을 일본에 수출하는 것을 금지하게 되자 그동안 편안하게 평로에서 미국에서 수입한 고철을 녹여서 일본 국내 소요량의 대부분을 충당하던 일본 철강업계에 비상사태가 터져버렸고, 고철 부족이 심화되자 소련-일본 불가침조약으로 소련에게서 비싸게 고철을 사서 재료를 충당하는 임기응변으로 일단 파국을 틀어막게 된다.

그제서야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처럼 철광석 같은 자원에 인접한 일본 식민지나 일본군 점령지 지역에도 제철소를 건설하려고 했으나 태평양 전쟁 개전 초반에 일본군의 성과가 좋으니 계획이 다시 쓰레기통으로 들어가버렸고, 1942년 이후에 점점 전선이 후퇴하기 시작하자 그제서야 베이징시 교외에 있던 중화민국 소속이었던 제철소를 기반으로 해서 1942년 12월에 북지나제철(北支那製鉄)을 설립했다.

하지만 이미 시기는 늦어서 제철소 설비를 늘리려고 해도 신규 생산이나 수입이 곤란해졌기에 일본 국내에 있던 제철소에서 시설을 뜯어다가 현지로 이전해서 이설하는 과정을 거쳐야 했고, 나중에는 이전할 설비도 모자라서 오사카제철소(大阪製鐡所)를 통째로 해체해서 점령지에 건설할 신규 제철소용으로 써먹으려고 했다. 이미 제철소의 양적 증가가 불가능해진 것이다.

결국 해상수송로가 무너지기 시작하자 일본 내부에서 조달 가능한 저질의 철광석과 저급 역청탄 같은 상태 안 좋은 자원만 사용 가능해지면서 1943년을 끝으로 생산량이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고, 1945년 3월의 도쿄 대공습을 시작으로 공습이 격화하면서 제철소들이 피해를 입기 시작했다. 해안가에 위치한 제철소 2개소는 미국 전함의 함포 사격을 제대로 두들겨 맞고 재기불능 상태에 놓이면서 패전하게 된다.

덕분에 일본 제국태평양 전쟁 기간 동안 금강산선의 창도역 - 내금강역 구간을 뜯어간 것처럼 이미 설치해서 운용 중인 선로와 기반 시설을 뜯어서 다른 곳에 사용하는 불요불급선 같이 아랫돌 빼서 윗돌로 쓰는 답 없는 행동을 해야 했고, 각종 금속을 공출해가는 사태까지 발생하게 된다.

이미 1차대전부터 자립 및 유사시 독자적인 운용이 가능해야 한다고 느꼈던 제철소도 저 지경이었으니 다른 산업 기반 시설인 석유 관련 산업 같은 것은 더 말할 것도 없을 지경이었으며, 이렇게 부실한 산업 기반 시설은 일본 제국의 전쟁 수행 능력을 더 떨어뜨리는 중요한 원인이 되고 만다.

6. 낮은 인적자원 수준

2차 대전기부터는 장교뿐 아니라 사병들의 교육 수준도 중요해졌다. 단순히 행군하고 해먹고 을 쏘는 것까지는 일본군처럼 소학교 4학년 수료자를 징병해도 가능하다.[18] 일본인이라면 1910년 이후에는 초등교육은 98% 이상 받았으니 여기까지는 징병제로 데려와도 문제가 없다.

문제가 되는 것은 그 다음으로, 2차대전 시기가 되면 소대 단위 행동보다는 분대 단위, 심하면 개개인이 전술적 행동을 이해해야 하는 상황이 되면 초등교육만 수료한 인원으로서는 한계가 있다. 1940년대까지도 일본인의 약 절반(1935년 38%, 1940년 46%)만이 중등교육을 받았고 고등교육을 받은 인원은 소수에 불과했으며, 일본군은 그나마 좀 배운 인원은 '먹물'이 들었다고 마뜩찮아했으니 병사들의 평균 학력이 높을 수가 없었다. 세계적인 고학력자 인플레가 시작된 건 2차대전 이후이니 딱히 일본만 그런 게 아니라 고졸이면 그럭저럭 먹물, 대졸이면 어디서든 엘리트였던 시기임을 생각하면 식자층은 한정된 자원이었다. 대학생은 모조리 장교 예비군으로 두던 폴란드 등, 고교생이나 대학생은 부사관과 장교층 인력풀로 두던 시대다.

대전 후기 일본군이 광란의 징집을 하고 있을 때에도 징집률이 70%에 불과했던 것은 일본군이 자비로워서가 아니라 나머지 30%는 문맹, 병약자 등의 이유로 도저히 군인을 시킬 수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병력 소요는 한정 없이 늘어나는데 징집할 사람은 부족하다보니 한 짓거리가 현역 생활을 마친 예비역들을 다시 징집하는 것.

대한민국의 병역 이행 방식으로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1평시에는 전체 신검 대상자 중 20% 정도인 신체검사 1급인 인원들만 현역에 입대한다.
2전쟁이 발발해서 병력 수요가 4배로 증가했다 가정하자. 이 경우 2급 중 절반 정도를 현역입영 대상자로 하고, 나머지는 현역 군필자 중 1급 출신 예비군 6년차까지를 동원한다.
3전쟁이 치열해져서 평시의 10배에 해당하는 병력 소요가 발생한다. 이제 나머지 2급을 현역으로 징집하되, 예비군을 10년으로 늘려서 이전 현역 복무자를 징집하여 병력 소요를 맞춘다.
4이제 평시 대비 병력이 20배쯤 필요하지만, 기존에 징집한 인원들이 상당수 전사했다. 이제 예비군 편성 기간을 15년으로 올리고 3급과 4급, 심지어 5급까지 현역으로 징집한다.

읽어보면 알겠지만, 뒤로 갈수록 소집되는 병력의 평균적인 전투 능력이 떨어질 것이란 예상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중일전쟁 시기부터는 한군두, 한군세가 현실이 되었다. 알기 쉽게 설명하려고 과장법을 쓴 게 아니라 진짜로 저랬다. 그리고 전선이 확장되고, 그 확장된 전선에서 그나마 징집한 멀쩡한 인원들이 대거 죽어나가면서 뒤로 갈수록 징집 기준이 낮아지고 조선인대만인 같은 식민지인들까지 죄다 끌어다 써야 했다. 이 때 상황이 얼마나 심각했냐 하면 육군성이나 참모본부가 조선인 징병을 반대한 이유가 선민의식 뭐 그런 게 아니라 무학에 문맹, 병약한 자들까지 징집하다 보니 신체 건장한 조선인들이 군대에 들어오면 일선 내무반은 조선인들이 주도권을 쥐게 될 것이 걱정되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조선은 식민지였기 때문에 교육 지원이 더욱 적었다. 1940년대 조선인의 초등교육 취학률은 남자 60.8%, 여자 22.2%였다. 이 정도 교육 수준일 경우 징병, 징용을 막론하고 생산성이 매우 낮다. 그리고 그런 인원들에게 복잡한 임무를 시킬 수 없으니 반자이 돌격, 카미카제, 대전차 총검술 같은 총알받이 역할을 맡긴 것이다.

거기다 일본 경제 자체가 농업의 비중이 상당히 높아서 평소 종사하는 산업 인력의 징집이 산업 자체의 약화로 이어지기 십상이었다는 점도 문제였다. 일본군이 식민지에서까지 지원병을 모집하고 학병 제도를 실시하여 조선인 청년들을 강제로 전장에 끌어낸 것은 다 이런 이유 때문이다. 에초에 일본에도 쓸 만한 인간이 부족하니 식민지의 인재들까지 끌어다가 총알받이로 내몰았다.

한편 전술적 역량을 지닌 인재가 일본군에 사병으로 입대한다 한들 지휘 능력을 발휘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일본 육군 선임병이나 장교들은 현대의 도시 출신 고졸 수준인 당시 구제중학교 졸업 수준의 학력만 되어도 '고학력자는 반항하기 쉽고 적응도가 낮다'면서 싫어했다. 상관명령을 의심하면 죽도록 구타나 당했다. 따라서 지휘체계가 마비되고 부대가 전멸해서 각자 알아서 살아남아야 하는 상황에서나 제한적으로 스스로의 생존을 위해 지휘 능력을 써 볼 수 있었다.

장교로 입대해도 마찬가지인데, 장교 임관까지는 어찌저찌 시켜줬다 쳐도 그냥 하급 장교로 총알밥이나 만드는 게 전부였다. 일본군은 장교와 사병의 관계를 귀족과 피지배층의 관계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형님처럼 믿을 수 있는 중대장, 부하의 의견을 자유롭게 표명할 수 있는 소대장 같은 것은 일본군에서는 많지 않았던 셈이다. 일본군은 소위가 부대에 도착해서 의자에 앉으면 병사가 군화를 벗기고 닦도록 시키는 등 극히 귀족적인 태도를 취했다. 다른 부대에서 보급품을 도둑질해오라는 상관, 그냥 기분 나쁘다고 매질하는 상관, 부하들이 굶어 죽어도 자기는 기생집에 가는 상관, 부하들의 이야기는 절대 듣지 않고 구타와 총살을 수단으로 해서 뭐든지 강요하는 상관이 많이 있었다. 그러니 사병들에게 자발적인 전술적 행동이 나올 리가 없다. 반자이 돌격이든 옥쇄든 카미카제든 시키는 대로 해야 할 뿐이다.

제1차 세계대전 초반에는 유럽 군대들도 귀족과 피지배층의 관계를 유지했다. 제정 러시아군은 중대장이 부하들 앞에 나서야 하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겼고, 일선에서 사병들과 함께 뛰어야 하는 소대장과 하사관들은 가급적 평민 출신이 맡게 했다. 장교들이 귀족적으로 부하들에게 태도를 취하는 것도 당시로선 서구권, 특히 유럽 군대에서도 일상적인 편이라 크게 문제되진 않았다. 심지어 부대의 선임 하사관만이 그 부대의 최선임 장교의 장화를 닦고 신겨줄 수 있었다. 그렇지만 유럽은 1차대전을 겪으면서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상관으로서의 중대장과 소대장의 리더십의 중요성을 알게 되면서 그런 인식을 없앴는데 일본군만 그대로 유지한 것이다.

육군에 비하면 해군은 그나마 사병들의 질이 좀 높은 편으로, 를 타면 수당 등이 많이 붙고 진급도 빨랐으며, 도 육군보다 멋지고 복지도 좋았기에 고학력자들이 조금이나마 많이 지원한 편이었다. 게다가 기계류를 다루거나 행정 업무 등을 수행해야 하는 해군 특성상 수병, 하사관들도 많이 배워야 했고, 전역하면 해군에서 배운 걸로 적당한 직장을 구하거나 개업할 수도 있었다. 게다가 말단 분대에서도 어느 정도의 지휘권을 요구하는 육군과 달리 함정함장 1인 외 지휘관이 없이 모두 부서장, 부서원일 뿐이므로 지휘 전술을 익힐 필요 없이 자신이 맡은 분야 한 가지만 잘 하면 되기에, 교육시키는 쪽도 받는 쪽도 육군보다 유리한 측면이 있었다.

장교의 인적 자원 역시 해군 쪽이 좀 더 높았다고 볼 수 있는데, 양쪽 모두 사관학교에서의 교육이 현대적으로는 부적합한 부분이 많았다지만 해군은 서구권의 영향을 보다 많이 받았고, 적어도 해군병학교 생도들이 받은 각종 교양 수업은 육사의 붓글씨와 유교 경전보다는 훨씬 선진적이고 실용적이었다. 또한 장교에 대한 우대 수준이 육군보다 훨씬 높았기 때문에, 해군병학교가 아닌 해군기관학교나 해군경리학교 등을 통해 들어오는 비병과 사관들도 육군의 유사 비전투 병과 장교들보다 우수한 학력의 자원들이 차지했다. 특히 해군 주계과 사관(현 한국 해군 기준으로 보급, 경리 장교+행정 업무 전담)은 전후 정제계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친 이들이 군복무 루트로 애용한 것으로 유명하다.

7. 초기 이후 대책 없는 전선 확대

일본군은 일단 아시아에서는 최강이었다. 청일전쟁이나 러일전쟁에서 보여준 판단력 역시 그렇게 나쁜 수준은 아니었다. 물론 203고지 같은 삽질이 있었지만, 당시 시점에서 육군 강국인 프랑스, 독일도 훗날 참호전에서 병사들이 녹아내린 것을 보면 정상참작의 여지는 있다. 그래도 이 때는 언론플레이나 포로에 대한 대접, 보급로 확보 측면에서 괜찮기라도 했다. 심지어 적에게 포로로 있다 잡힌 병사들에 대해 딱히 기밀을 누설한 게 아니라면 건드리지 않았고, 칭찬할 게 있으면 훈장도 줬다.

그러나 일본은 지속된 승리로 스스로의 역량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자국의 역량을 과신했다. 보통 그 시점을 대략 1919년 시베리아 출병으로 잡는다. 일본은 급격한 근대화의 여파로 이어진 군국주의 체제에서 정상적인 판단력을 잃어가기 시작했고, 결국 일본은 동으로는 한국 보천보에서 서로는 미얀마에 이르기까지 전선을 늘렸으나 이는 일본의 역량을 엄청나게 아득히 뛰어넘는 군사적 역량이 필요했던 것이었다. 끝내는 진주만 공습과 이어지는 태평양 전쟁에서 그 허실을 드러내게 되었다. 그리고 어떻게든 될 거라는 예상은 원폭 2방과 일본 본토의 초토화라는 결과로 나타났다.

7.1. 시작은 괜찮았다

일본군은 국제연맹을 탈퇴한 이래 위임 통치령으로 보유한 북마리아나를 포함해서 펠렐리우 같은 남양 군도에 속하는 지역을 요새화하고 라바울, 타라와 같이 개전 초반에 점령한 지역도 긴급하게 요새화했다. 이를 바탕으로 일본은 태평양을 쓸어담고 나치 독일이 유럽에서 이겨주길 기다리면서 버티는 전략을 수립했다.

그리고 이 전략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는 듯 보였다. 태평양 전쟁 직전 당시에 영국은 나치 독일영국 본토 항공전을 치르는 탓에 외부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고, 미국도 본격적인 전쟁은 아직 생각하지 않았다. 네덜란드는 아예 본국이 나치 독일에게 점령 당한 상태였다.

한편 아시아에 주둔한 영국군의 식민지군을 구성한 병력들은 사기가 영국군의 제국주의, 훈련 부족 등으로 인해 그다지 높지 않았다. 식민지군이라 해도 2선급 병력만 보낸 건 아니었으나 식민지인으로 구성된 동아시아권 주둔 영국군 부대의 질이 좋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다.

미군도 진주만 공습 직후에는 눈 앞의 피해가 막대한 터라 잠시 제 역할을 못했다. 진주만 공습은 분명 국제 정치적 측면에서 비열한 행위고 향후 외교적 수습이 거의 불가능해질 정도로 외교 관계를 붕괴시켰지만, 전술적으로만 보면 괜찮은 성과를 거둔 행동이었다. 필리핀 자치령 주둔 미군은 제법 공군 세력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나마도 진주만의 뒤를 따라 박살났다. 그리고 필리핀군의 전력이 그리 좋지는 않았으며 영국군만큼 공중, 해상 지원도 없었다. 그나마 드럼 요새와 바탄 반도 지형의 우세 덕에 힘입어 태평양 전쟁 초기에는 웨이크섬와 더불어 가장 일본군을 애먹인 축에 속했다.

7.2. 소모전을 강요 받은 중일전쟁

중일전쟁 내내, 특히 국민정부수도충칭시로 이전하고 전열을 정비하기 이전의 어려운 상황에서 중국군은 상당히 분투했다. 하지만 장제스의 중앙군처럼 중국군에서 우수하다고 취급 받는 부대들도 따지고 보면 그냥 좀 싸울 줄 아는 알보병이었고, 이 중앙군의 전체 병력도 몇 개 사단에 불과했다. 특히 직속군 중에서도 뛰어났던 독일식 사단들조차 인원와 장비가 완편되진 않았다. 즉, 전차, 항공기, 함포포병 등의 압도적인 화력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오송 전투에서 일본군이 1개 사단이 날아가는 등 커다란 피해를 입었다고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일본군의 예상에 비해 큰 피해였을 뿐이다. 이는 태아장 전투와 백단대전에서도 마찬가지이며, 중국군 입장에서도 이전에는 진짜 오합지졸이었던 중국군이 그래도 좀 싸울 줄은 아는 군대라는 점을 확인한 것 빼고는 좋게 평가하긴 어렵다. 즉, 중일전쟁 초기의 상하이 전역에선 장제스의 오판으로 인해 중국군이 대패한 것이 맞다.

이렇게 나름 괜찮은 전투 성과를 거두었음에도, 일본군은 중국으로의 보급 면에서 심각한 문제를 겪었다. 게다가 일본군은 난징 대학살신멸작전을 일으켜 광활한 중국 본토에서 민중의 지지를 전혀 못 받게 되었다. 따라서 아무리 많은 병력을 넣어봐야 연안지대의 점과 선, 그것도 상하이, 텐진 같은 대도시와 각 도시 사이를 연결하는 철로 주변 정도만 점령할 수 있었다.

이에 후방의 드넓은 농촌지대에선 마오쩌둥공산당이 게릴라전으로 일본군을 괴롭혔고, 장제스의 국민당은 내륙으로 숨어들어갔다. 이후 각지의 군벌들과 연합하여 지형민심의 힘, 여기에 더 저질이긴 하나 여전히 많은 보병과[19] 미군측 지원부대인 플라잉 타이거스, 그리고 더 나아진 대일전략으로 버텼다.

결국 일본군은 국민당, 공산당, 군벌을 섬멸해서 전쟁을 끝내기엔 중국 땅이 너무 큰 관계로 병력 부족과 병참선의 압박이 심하고, 그렇다고 철수하기엔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쏟아부은, 그야말로 막장 상황과 맞닥트렸다. 그렇다고 중국 안쪽으로 진군하면 할수록 보급선이 길어져서 차단당할 위험이 있었고, 지형지물도 모르는 곳에서의 전투는 게릴라에게 기습받기 딱 좋았다.

또한 아무리 몇몇 전투에서의 성과가 좋아도 중국군을 상대로 무한정으로 싸우다가는 일본의 인적 자원이 먼저 고갈될 지경이었다. 실제로 중일전쟁 기간 중에도 중국은 대학생에 대해서는 징병을 하지 않았다. 중국 대륙에는 무려 5억 명이나 되는 인구가 있었고, 따라서 정말 전쟁이 길어진다면 모를까 당장은 굳이 대학생까지 징집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반면에 식민지를 제외한 일본 열도의 인구는 6500만~7천만 정도였다. 따라서 이러한 막장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태평양 전쟁 이전에 서구의 지원을 차단해 중국이 제풀에 나가 떨어지게 하는 것이 일본의 주 전략이었다. 이를 위해 하이난을 점령하고, 인도차이나로 진출해 하노이 루트를 차단했으며, 결국에는 태평양 전쟁 개전 시점에서 전선이 버마까지 늘어졌다. 그리고 일본군은 이렇게 늘어진 남방 전선을 태평양 전쟁 내내 감당하지 못했다.

중일전쟁 직전 경제규모의 경우 중국과 일본은 큰 차이가 없었으나 일본이 중국보다 근대화와 산업화가 일찍 진행되어 중국보다 우월한 산업력과 기술력을 보유했지만, 일본 본토+조선+대만 1억, 중국 4억 5천에 달할 정도로 기본 인구 규모가 크게 차이났기 때문이다. 중일전쟁 초반에는 전세의 차이로 일본군의 기세에 밀렸지만, 전쟁 중후반부터는 일본군에게 지속적인 소모전을 강요하면서 일본군의 점령지가 점과 선의 형태에 그치게 만들었으며, 중일전쟁은 결과적으로 중국이 승리한 전쟁이다. 국민정부는 태평양 전쟁 발발 이후 수많은 일본군 병력을 중국 대륙에 묶어두며 일본 제국의 패망에 크게 일조했다. 이러한 여파로 중국은 이후 상임이사국에 등극하며 국제적인 발언권을 얻게 되었다. 기존 열강이 우려했던대로 아편전쟁 같은 국지전이 아니라, 총력전전면전에서 중국을 상대하기에는 아무리 중국의 국력이 약해졌더라도 부담스럽다는 것이 어느 정도 증명된 셈이다.

7.3. 결과: 스스로 무너지다

결국 일본군이 전선을 너무 대책 없이 늘린 대가는 태평양 전쟁 후반에 제대로 치르게 된다. 일본군은 같은 추축국독일과 제대로 협력하기는 커녕[20] 자기네 육해군 대립도 컨트롤 못했고, 그 결과는 수많은 학살과 착취 행위 같은 끔찍한 결과로 나타났다. 반면 미군은 강력한 문민통제를 바탕으로 자국군 컨트롤에는 별 지장이 없었을 뿐더러 오히려 전세계적으로 영국, 소련, 중국, 프랑스, 폴란드 등과도 잘 연계했다. 비록 서부전선에서는 전차 운용 선진국인 영국군에게 한 수 접고 들어가고 소련에게는 호구처럼 굴었으며, 중국을 너무 몰랐지만 그래도 일본에 비하면 팀웍도 좋았다. 마지막으로 전략을 보더라도 미국은 통상파괴나 잠수함 운용 분야에서 일본과는 비교를 불허했으며, 항모 운용은 완전히 역전했다.

육군이야 반자이 돌격이나 정신주의 일색의 1차대전형 군대였던 일본군과 1차대전 중에도 그렇고, 유럽에서 몸소 최신식 기술을 연마한 미군의 기량 차이는 말할 것도 없다. 딱 하나 우세한 것이 있다면 일본군이 방어를 하는 입장이라 개별 지점을 그럭저럭 잘 요새화해서 버틸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걸 좀 잘 한 축이었다고 여겨지는 것은 중반의 타라와 전투나 막바지의 이오지마 전투, 오키나와 전투다. 심지어 일본은 공군이 가장 전성기였던 시점에도 둘리틀 공습을 당했고, 당시 영미권은 폭격기 운용에 관해서 최강의 역량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래서 일본군은 중국군에겐 계속 이겨왔지만 미군이 점차 전투력을 회복하고 보강하여 달려들자 전사자 교환 비율은 심하면 1:10, 1:20, 후반기 맥아더의 필리핀 탈환전에서는 1:26에 육박했다.

그러나 이오지마 전투와 비슷하게 전상자를 기준으로 한다면 해당 비율은 훨씬 줄어든다. 출처에 따르면 사상자는 미군 쪽도 루손 섬에서만 10만은 넘어간다. 루손 섬에만 한정하면 일본은 23만 가량이라고 하고 말이다. 예시 1, 예시 2. 미군을 상대로 한 전투에서 전사자+부상자 교환비는 대부분의 전투에서 1:1.5~1:2 남짓하여 생각보다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즉, 보급이고 뭐고 없고 화력도 크게 뒤쳐지는 열악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미군 상대로 입힌 사상자 숫자를 보면 일본군이 결코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한 것은 아니며, 미군도 악을 쓰는 일본군의 제압에 적지 않은 출혈을 입어야 했다. 그런데 사상자가 아닌 순수 사망자 교환비만 계산해보면 툭하면 미군 상대로 1:5~1:20 같은 그야말로 막장스러운 교환비가 나온다. 이런 이상하게 극단적인 사망자 교환비의 원인은 다음과 같다.

이러한 요소들의 결합으로 일본군은 그야말로 기괴할 정도로 부상자가 적고 극단적으로 높은 사망자 비율을 자랑했다. 보통 전사자가 부상자보다 적어야 정상이다. 가령 2차대전 내내 손실 통계를 보면 대부분의 국가들이 전사자는 부상자 수 대비 약 20%~50% 정도이며, 지독한 동원에 소련에 의한 보복 학살까지 당한 나치 독일도 사망자 500만 명에 부상자 700만 명으로 전사자/부상자 비율이 70% 정도로 그나마 좀 높은 편이다. 하지만 일본은 전사자 210~230만 명, 부상자 33만 명으로 전사자가 부상자에 비해 700%가 넘는 이상하고 기형적인 비율이 나온다.

결과적으로 미군 상대로 열악한 상황에서도 보여준 전투력과 미군에게 강요한 전투 손실 자체는 상당했지만, 국가적 전쟁 수행의 측면에서 볼 땐 그야말로 뻘짓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다시 전선에 복귀시킬 수 있는 병력들까지 모조리 날려버린 꼴이다. 전투로 인한 교환비가 1:1.5~2 정도로 미군 상대로 선전했다고 자위해봐야 결국 복구 불가능한 영구적인 인력 손실은 미군보다 몇 배에서 심하면 십수 배나 많이 입은 것이다. 숙련된 베테랑 장병이 쌓일 수가 없는 것은 더 이상 말할 필요도 없다. 전쟁 말기 베테랑의 전멸이라고 하면 흔히 일본 육군/해군 항공대파일럿들을 연상하지만, 이는 다른 병종에서도 마찬가지였다.

8. 일본군의 무기체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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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문제 많은 인사제도

일본 육군은 육군대학교 성적, 일본 해군은 해군병학교 졸업 성적을 기준으로 진급시켰다. 육군은 무모하게 돌출 행동을 하는 자들은 군에 큰 피해를 주었더라도 매우 높이 평가해서 빨리 진급시켰고, 반대로 해군은 가만히 있는 자들을 진급시켰다. 봤다시피 양쪽 모두 인사고과 기준이 엉망이었다. 그리고 평상시 뿐 아니라 전시에도 이런 비정상적인 인사고과를 했다.

해군의 경우 해군병학교 출신 사관은 졸업 성적만 좋으면 특별히 큰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한 대좌 정도는 승진을 보장했다. 이 때문에 장교들은 튀는 행동을 삼갔기 때문에 승진에서 누락되지 않으려고 소극성과 보신주의를 보여주었다. 반대로 해병 출신 병과사관들은 포술, 수뢰 같은 병과가 아닌 항해 출신이면 제독이 되기 힘들었다. 결국 성적이 저조한 사람도 좋은 성과를 내봤자 나아지는 게 딱히 없으니 도전을 포기해버리고, 반대로 성적이 좋은 사람도 가만히 있으면 출세길이 보장되어 있는 마당에 쓸데없이 위험 부담을 짊어질 필요가 없으니 도전을 포기해버렸다. 군 조직 전체가 적극성이 거세되어 버린 것이다. 진주만 공습이나 미드웨이 해전에서 항공함대 사령관 나구모 주이치 제독이 보이던 소극성과 보신주의는 이러한 분위기를 배경으로 한다.

그나마 일본 육군은 해군보다는 적극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을 높이 평가했고, 그런 사람들이 승진에 유리했다. 물론 일본 육군도 기본적인 방침은 육군대학을 졸업한 사람을 우선 진급시키는 것이라 비육대 출신들은 중좌 달 때까지만 버텼다가 나름 좌관급이라고 대접해주는 사회에서 인생 이모작이나 하러 나갔지만, 이들도 그래도 17년 동안 버텨서 소좌로 근속 승진을 하고 그 후 몇 년 후 중좌를 달고 사회에 나가면 어쨌던 꽤 괜찮은 액수의 은사금이 매달 나왔던 데다가 전문학교나 대학 교련교수 혹은 동척이나 만철 같은 국책회사 간부 같은 그럴 듯한 직책이 나왔고, 동네 예비역들 사이에서 완장질하는 것도 가능했다. 우리나라의 소령중령직업보도반 갔다 사회 나가는 것보다야 대접이 좋긴 했다.

또한 중일전쟁이 터지면서 초급 장교가 매우 부족해지자 위관급의 문을 크게 열어서 식민지 출신 조선인이라고 해도 대위까지는 현장에서 승진도 가능했고, 기존의 일본육군사관학교 출신들은 최소한 전시에는 비육대 출신도 대좌를 달아봤고 참사관 같은 명예직이라면 소장까지도 달아봤다.

문제는 육군대학교 나와서 핵심 보직 라인 탄 인원 외에는 전략 전술에 대한 발언권 같은 게 거의 없다시피 했다는 거다. 츠지 마사노부 같은 영관급의 대좌가 작전의 신 따위로 불리면서 현장 지휘를 독자적으로 하는 동안 라인 못 탄 사람들은 그저 저딴 놈이 내리는 말도 안 되는 명령에 따라서 반자이 돌격이나 해야 했다.

이리하여 일본 육군의 그나마 몇 안 되는 유능한 지휘관들은 대부분 기껏해야 군단장(중장) 정도에 머물렀다. 그 이상의 제대를 지휘하더라도 대부분 후방에서 뒤치다꺼리나 실컷 하거나 무능하고 질떨어지는 인간들이 더 높은 자리들에 있었으니 뭐라도 해보고 싶어도 그러기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해군은 그래도 나았지만 어디까지나 육군보다 낫다 정도의 수준이다.

또한 군사 작전에서 무조건 적극적인 거라고 절대 좋은 게 아니다. 일례로 상대가 진지와 방어선을 구축하고 만일 휘하 부대에 그런 방어선을 돌파할 전력이 부족하다면 그것을 돌파할 수 있는 포병, 항공 전력을 인내하며 기다리다가 합동해서 돌파하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교리인데, 이 군대는 그냥 닥치고 무작정 돌격하는 만행을 저지르기 일쑤였다.

만주사변을 획책한 이시와라 간지, 정부의 명령도 무시하고 조선주둔군을 동원해 관동군을 지원해 만주를 침략한 하야시 센쥬로, 그리고 츠지 마사노부무타구치 렌야 등은 무모함을 적극성으로 포장해 높이 평가한 일본 육군의 고과 진급 시스템이 낳은 희대의 똥별들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형편없는 시스템에서 육성된 일본 육군의 고위급 인사들은 대부분 제대로 된 전쟁을 수행하지는 못하면서 하극상, 쿠데타 같은 짓이나 일삼는 떨거지들 뿐이었다. 정작 고위급의 자리에 올랐어야 할 진정한 실력자들은 이런 떨거지들 휘하에서 복무하며 말도 안 되는 명령을 받고 수행해야만 했다. 아무리 무능한 인간이라도 인맥이나 사상만 맞으면 스케일이 큰 사고를 쳐도 넘어가고 오히려 멀쩡하고 유능한 자를 잡아다가 일선에서 내몰아버리니 조직이 제대로 굴러갈 수가 없다.

일본군 똥별들에 대해 삼간사우, 삼대오물 등을 콕 찝거나 대한민국 독립유공자라고 조롱하면서 특정 똥별의 잘못된 행각을 부각하는 식의 접근이 많다. 그러나 일본군의 패전은 그런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어리석은 행동을 하도록 교육시킨 잘못, 높은 자리까지 진급시킨 잘못, 미래에 잘못될 가능성을 예측하기 위해 중간에 확인하지 않은 잘못, 잘못을 뻔히 발견하고도 쫓아내지 않은 잘못 등 수많은 인사제도의 오류가 중첩되었기에 만들어진 잘못들이다. 모든 조직에서 무능력한 상사는 일부 있기 마련이고, 모든 군대에서 병영부조리는 늘 나왔다. 하지만 일본군은 무능한 상사가 적시에 해임되지 못하였고, 이러한 악습들을 오히려 권장하는 쪽으로 갔다. 결국 일본군의 병영부조리는 암세포처럼 커졌다. 기업에 있어서도 채용, 승진, 감사, 징계, 해고가 모두 엉망진창인데 잘 돌아가는 회사는 찾기 어렵다.

일본군의 병영부조리 역시 겉으로는 잘못된 인물들의 악행이지만 원인은 부실한 인사제도에 있다. 당시 일본군 상층부에서는 가혹행위를 통제하려는 시도 자체는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통제 수단은 중대장이 중대원들을 사열시켜놓고 '가혹행위를 당한 사람은 손을 들라'는 정도의 유치하고 솜방망이스런 수준에 머물렀다. 군인칙유를 문자 그대로 믿는다면 중대장의 질문은 덴노가 직접 명하는 것과 같으므로 중대원들이 거짓말을 할 리가 없으므로 이렇게 질문했을 때 가혹행위가 없다는 대답이 나온다면 중대장이 가혹행위를 통제하기 위한 노력을 충분히 하고 있다고 말해도 좋았을 것이다. 그리고 일본군 상층부에서 볼 때도 가혹행위 설문조사를 실시해서 가혹행위가 없는 것으로 밝혀졌으니 그 노력이 성과를 거두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군에 대한 불만을 말할 수 없고 자유로운 부대 이동이 불가능하며 신고에 대해 손해배상이 이뤄지지 않는 상황에서 병영부조리가 무슨 군인칙유나 복창하는 것만으로 자연스럽게 해소되기를 바라는 것은 실로 어려운 일이다.

그나마 가혹행위를 막으려는 형식적인 노력이 있긴 했는데, 실제 가혹행위 혹은 구타로 사망자나 불구가 되는 자가 나오면 헌병대가 출동해서 조사하므로 간부들의 인사고과에 빨간줄이 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사건을 은폐할 수 있다면 은폐하려고 노력을 더 많이 기울였다는 아이러니가 발생하였다.

또 육군은 보병헌병, 해군은 병과(항해, 수뢰, 포술) 사관들에게만 권한과 승진이 집중되었다. 알다시피 전쟁은 단순히 보병과 항해사관만으로 하는 게 아니다. 일본군 패전의 큰 원인으로 치중, 통신, 포병, 기갑과 항공 등 다른 병과의 능력 부족이 꼽히고 있다.

엄밀히 말하자면 각종 병과를 맡은 참모 개개인의 능력치야 각 분야에서 전문성이 뛰어난 사람들도 많았는데, 문제는 이 쪽 참모들의 발언 자체가 그들의 계급을 떠나 군대 운용에 영향을 줄 만큼의 힘이 없었다는 거다. 이들의 계급이 높지 않은 것 자체는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이런 환경에서 아돌프 갈란트커티스 르메이 같은 파일럿 출신 지휘관이 나올 확률은 거의 제로였다. 또한 파일럿의 경험을 통한 효율적인 항공 전략의 수립도 사실상 못했다.

장군급 계급이 사실상 3단계밖에 없어서 일본군이 아무리 계급보다는 직책이 우선인 조직이라고 해도 동급 계급이 맡은 직책이 서로 달라서 동급 계급간에 명령이 내려지는 사태도 흔했다. 이러니 강력한 명령을 내리는 것은 아예 서로간의 관계를 파탄시키는 급에 해당하기 쉽기 때문에 형식만 명령이지 간접적인 두루뭉실한 문서가 전달되고 이걸 감으로 두들겨 맞춰야 하는 촌극이 발생한다.

당장 대장이 맡을 수 있는 직책 중 중장이 못 맡을 직책은 조선총독 정도밖에 없었다. 육군대신이나 교육총감과 같은 최고위 자리들도 중장으로 보임하는 게 가능했다. 사단장 위의 군사령관은 당연히 중장이었고, 군사령관 위의 방면군 사령관도 중장 보임이 가능했던 데다 원칙상 대장 보임인 방면군 위의 총군사령관조차도 중장이 임명된 예가 있었다.

이런 기형적 인사제도의 문제는 19세기 대부분 유럽 국가들의 장성들이 3성 장군이 대장인 것을 본떠와 만들어진 것인데, 세계 대전을 겪으며 유럽은 군 조직이 방대해지자 소장대령 사이에 준장 계급을 추가시켰고, 독일군은 아예 대장 위에 상급대장까지 만들어 해결했다. 하지만 일본군은 이런 세계적 추세와 변화를 따라잡지 않고 19세기에 제정된 인사제도에만 과하게 집착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식으로 여단 - 사단 - - 방면군 - 총군의 지휘관을 모두 차이 나는 계급으로 제정한다면 6~7성 장군까지 나와야 하니 조직 구조의 문제라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차라리 그렇게 계급을 신설하는 게 더 나았을 것이다. 당장 임팔 작전의 총지휘관 무타구치 렌야도 중장이고 휘하의 31사단장 사토 고토쿠도 중장이니 말 다 했다.

거기에 육군성해군성, 그리고 전시에 이 둘 위에 같이 설치한 대본영무능으로는 일본군 제일이었다. 거기다 그도 모자라서 관동군연합함대까지 끼어 넷이어 파벌 싸움을 하기까지... 참고로 현대 일본인들은 오만방자하고 자기만 옳다고 우겨서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을 가리켜 '대본영 참모'라고 하고, 무슨 일이 생겼을 때 물어보거나 보고하지도 않고 오로지 자기 주장대로만 하는 사람을 '관동군'이라고 부른다. 즉, 육군 내에 말 안 통하는 대본영과 보고도 없이 사고부터 치는 관동군과 한 판 붙는 양상이라는 것.

여기에 육군의 경우 육군대학교를 졸업해야만 대좌 이상으로 진급할 수 있었다. 이후 진급은 육군대학의 성적순으로 결정되었고, 이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바꿀 수가 없었다. 그런데 육군대학 응시는 일본육군사관학교 졸업 성적 상위 20% 안에 들어야 할 수 있었다. 거기다 유년학교 출신이 아니라면 아무리 육사에 육대 졸업자라도 차별 당했다. 물론 유년학교를 나오지 않더라도 육사나 육대를 갈 수는 있었지만, 비유년학교 출신 육사 육대 출신도 차별했던 게 당시 일본 육군의 분위기였다. 1942년 과달카날 작전 당시 대본영 항공참모였던 구몬 아리부미(久門有文) 중좌의 사례가 있다. 육대에서도 우등 졸업을 한 소위 '군도조'에 명색이 대본영 작전참모였는데도 유년학교가 아닌 사범학교에서 육사로 진학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대본영 주요 회의에서도 이 사람을 빼놓은 채로 회의를 했고, 과달카날 작전이 승산이 없다면서 항공전력 지원을 반대하는 의견을 아예 묵살한 채로 일선 부대좌천까지 시켜버렸다. 참고로 저 짓거리를 할 때 대본영 참모들의 좌장 노릇을 하면서 구몬하고 얼굴 붉히고 대판 싸운 자가 다름 아닌 츠지 마사노부. 참고로 구몬과는 육사에 육대 동기였다. 결국 구몬 중좌는 혼자 비행기를 알류샨 열도로 몰고 간 채로 실종되는데, 분노로 인한 자살로 보고 있다고 한다. 전혀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즉 비육사, 비육대 출신이라면 어떠한 대공로를 세워도 이 구조를 깨트릴 수가 없었다. 비육대 출신이 대좌로 승진하려면 중좌에서 전사하여 1계급 추서 받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러나 추축국 독일 국방군은 달랐다. 독일 제국 시절부터 독일군, 특히나 참모진영은 철저한 실력주의를 고수해온 덕에 장교가 4천 명으로 제한되었던 전간기 시기에도 독일군은 유능한 자원들을 보유했고, 이는 재무장 선언 후 빠르게 군세를 확장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당시 세계에서 손꼽히는 강대국들인 미국, 소련, 영국을 상대로, 그것도 양면 전쟁을 치르면서 한때나마 모스크바, 런던까지 위협하며 6년이나 전쟁을 끌고 간 건 독일군 사령부와 지휘관들의 능력을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그 독일 국방군도 군비 제한 시기에 현존 장교 자원들을 향후 대부대 지휘관으로 써먹기 위해 주로 전술적 역량 배양에 집중한 결과 전략적 안목을 갖추는 데 소홀했고, 그 결과 전투에선 이겼지만 전쟁에서는 패하는 독일군의 전형을 야기했다고 평가받는다. 그나마 실질적인 지휘 능력에 올인하고도 이런 문제가 발생했는데, 유교 경전 같은 데에 시간을 할애한 일본군의 상태가 얼마나 심각했을지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자위대는 이러한 결점을 의식했는지 군수 출신의 항공막료장, 통신과 출신의 육상막료장, 주계 직별 출신의 해상막료장을 배출하는 등 비전투병과 출신들이 육상, 해상, 항공자위대의 총수를 1번씩은 해 봤다. 그래도 장성의 90% 이상은 방위대학교 출신이긴 하지만, 비전투병과 출신의 각군 참모총장은 미군조차 드문 걸 고려하면 현재는 꽤 나아진 것이다.

사실 연고(가문 또는 출신 지역, 본적, 서열)가 진급에 영향을 끼치거나 사관학교 성적이 진급에 중요한 요소가 되고, 특정 병과(주로 전투병과) 우대, 일부에게만 고급 교육 이수 기회 제공은 제2차 세계 대전 일본군 뿐만 아니라 시대를 막론하고 다른 나라의 군대들에서도 나타나는 현상이다. 당장 같은 2차 세계대전 당시의 독일 국방군만 해도 인구의 1% 이내인 귀족 출신이 대령의 25%를 차지했고, 일반참모는 전체 장교 중 1% 가량만이 취득했다.

그러나 이러한 기준이 있더라도 전시나 그에 준하는 위기 상황에서는 이러한 인사 기준에 더하여 별도의 특진 제도 등을 통해 능력 있는 장교들을 현장에 배치하기 마련이다. 애초에 평화 시에는 전투에 재능 있는 군인보다 관리에 재능 있는 군인이 전투력 유지와 전력 건설 측면에서 유능할 수도 있다. 즉, 평시의 '관리형' 장교들은 주로 교육 훈련이나 조직관리와 같은 분야에 투입하고, 전시에 두드러지는 '현장형' 장교들을 특진 등의 형태로 전투 부대의 지휘를 맡기는 것. 물론 평시고 전시고 능력 있는 장교가 갑이긴 할 것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다른 국가들을 예로 들자면 미국은 (물론 이전부터 유능하다는 평가를 받기는 했으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가 1941년 준장으로 진급한지 2년도 안 돼서 대장으로 승진하고 유럽 전선을 총괄할 연합원정군 최고사령관이 되었다. 조지 S. 패튼도 인격 문제로 인하여 전간기에는 한직을 전전했으나, 2차대전이 발발하자 수많은 불화에도 불구하고 전선 지휘를 맡아 정예 부대들을 지휘했다.

독일의 경우에는 에르빈 롬멜은 당시 총통이었던 아돌프 히틀러를 수행하며 얻은 개인적인 친분으로 인해 기병이나 기갑 병과가 아님에도 제7기갑사단장으로 임명되어 프랑스 침공에서 대공을 세웠다.

즉, '진급 기준이 불합리했다'는 관점 뿐만 아니라 '전시임에도 불구하고 평시의 진급 기준만을 고수했다'는 관점에서도 일본군 인사 체계의 불합리함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10. 장교들의 역량 부족

대부분 국가들의 장교가 소대장부터 시작하여 소부대 지휘 기술을 습득하는데 반해 일본은 평시에 분대 - 소대가 없다. 그러니 분대장도 없고 소대장도 없다. 내무반 - 중대로 바로 이어지는 구조가 있을 뿐.

일본군은 신병훈련소가 따로 없고, 자대에서 기초 교육과 주특기 훈련을 모두 받는다. 게다가 그 기간이 무려 6개월에 달한다. 그럼으로 평시의 일본군 부대는 그 자체가 하나의 훈련소이다. 그러니 소대장, 분대장이 없어도 되는 것.

자칭 최강의 관동군조차 1945년 8월 9일 소련군이 쳐들어 오는 날까지 평시 편제를 유지했다. 그러다 보니 갑작스러운 공세에 전시 체제로 전환되어 소대-분대로 재편하기 전에 이미 다 쓸려나가 버리는 사태가 일어났다.

일본군의 최대 특징이 지휘관은 근엄하게 앉아서 기안 올라온 작전의 가부만 결정하고, 지휘관이 할 일은 다 참모장이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장교가 할 일은 다 하사관들이 하고, 하사관들은 병졸들을 쥐 잡듯이 잡는 구조이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병졸들의 훈련은 하사관들이 담당한다. 내무 생활의 경우 아예 중대에 '내무계'라는 이름으로 준위가 한 명씩 있어 그가 책임지고 관리한다.[21]

그럼 중소위 같은 초급 장교들은 무얼 하는가? '장교의 3술'이라고 불리는 검술, 기마술, 전술을 연마한다. 여기서 전술은 소대를 지휘하는 게 아니라 책을 보면서 공부하는 것을 '전술' 연마라고 한다. 그리고 주번사관으로서 근무하며 가장 중요한 육군대학교 입시에 몰두한다. 육사 졸업 후 2년 차부터 지원 가능하며 최대 8년 차까지 육대 입시 시험을 치를 수 있다. 이렇게 지휘관 경험 없이 중소위 시절을 보낸 후에야 대위로 승진하는 것이다. 육대 합격하여 3년을 갔다 온 사람조차 소대장 지휘 경력도 없는 것은 당연 지사. 그나마 뭔가 해볼 수 있는 보직대대장이나 연대장부관이 되는 것 정도. 이러다 보니 일본의 중소위들의 자질은 심각하게 부족하였다. 아니 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도 육사 생도 시절부터 승마 훈련 시간이 비정상 적으로 높았다. 현대 한국의 육사처럼 생도 시절에는 교육 받고 소위로 임관하여 실무를 익히는 게 아니라 육사 때도 장교의 3술, 소위가 되어도 장교의 3술만 갈고 닦는 것이다. 애초에 검술을 수 년간 익혀 검성이 되었다 치더라도 대체 현대전에서 그딴 걸 어디다가 쓴단 말인가.

그나마 쓸 만한 건 전술 공부였는데 이것도 하다 보니 크게 잘못되었다. 사실 일본군 초창기에는 육해군 모두 유럽에서 번역해온 최신 군사학에 관심이 많아 장교들은 이를 탐독하였다. 그런데 러일전쟁의 승리에 도취한 이후 유럽 군사학에 대한 연구는 사라지고, 대신 '전범령'[22]만 읽으면 모든 것이 해결될 수 있다는 전범령 만능주의로 빠져든다. 이 책은 세계 최고의 실전 사례를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는데 각종 교전 또는 교범을 해설한 교령으로 이루어져 있다. 의도는 좋은데 일본군들은 '이 전범령만 공부하면 충분하다'라는 사고방식을 갖게 된 것이다.

심지어 육대에서도 러일전쟁 이전에는 세계 군사학의 최첨단을 학습하는 게 수험 공부였지만, 러일전쟁 이후에는 전범령을 암기하고 그것을 어떻게 운용하는가에만 중점을 두게 되었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일본 군사계의 수준은 급속히 추락하였다. 이러한 풍조는 1차대전을 지나 2차대전 때까지 유지되었다.

이 전범령 암기라는 것이 점점 교조화 되었는데, 한가지 예를 들자면 '군기란 무엇인가?'라는 문제가 나온다면 이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보병 조전 강령 제4 '군기는 군의 명맥이며, 전장마다 경우를 달리해서 각종 임무를 지닌 전군을 대장부터 일등병에 이르기까지 맥락 일관하게 일정한 방침에 따라 중심일치의 행동을 취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즉 군기가 느슨한가 긴장되어 있는가는 실로 군의 명운을 좌우하는 것이다.'"라고 책에 나온 그대로 써야 정답이다.

그리고 대위가 되어 비로소 중대장이 되어도 지휘관으로서 자질을 다지기에는 부족했다. 일본군 중대의 주 업무는 신병들을 6개월씩 훈련 시키는 신병 부대장으로서의 업무이다. 그러나 일본군은 이 업무를 모두 하사관들에게 맡겼다. 그리고 병력들을 관리하는 내무 생활은 준위가 담당한다.

신병 훈련 시 일단 장교는 교관, 하사관은 조교, 병은 조수가 되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하사관 조교들이 다 한다. 주로 상등병인 조수에게만 훈련을 맡기는 경우도 있었다.

일본 육군에서 지휘관의 역할은 준위가 작성한 '품의'를 상급 기관에 올리는 것이 전부이다. 지휘관은 단지 통수에만 충실할 뿐이고, 모든 실무는 준위가 담당하였다. 장성이 되면 입도 뻥긋 안 하고 가만히 있으면 참모장이 모든 것을 다 해준다. 오히려 이런 지휘관이 근엄하다며 이상적인 지휘관상으로 추앙되는 것이 일본군이었다.

2차대전 당시 미군의 평으로는 '일본군 장교들은 멍청하나 하사관들은 쓸 만하다'고 하였는데, 문제는 일본군에서 하사관은 직업군인이 아니라 짬 좀 찬 병졸로서 대우한다는 것이다. 호봉제가 아니어서 아무리 20년을 근무해도 월급은 소위보다 적은데 결혼 유무와 관계 없이 영외 생활을 할 수 없어 지원율이 극히 낮았다. 군조, 조장을 달아도 존경 받는 게 아니라 '사회 나가면 할 게 없어서 남아있는 놈' 취급 받았다. 일단 장교들부터 하사관들을 천시하였다. 말보다 주먹으로 하사관을 다스렸다. 그리고 하사관들이 숙련되기도 힘든 게 준위를 달아도 겨우 40세에 정년이라는 점이 문제였다. 그냥 12년을 근무하면 나오는 은사금을 보고 근무할 뿐이었다.

일본 해군 역시 준위에 해당하는 병조장이 장교가 할 일 대신 다 하였다. 여기에 일본 해군은 특유의 명령 체계가 있었는데 아무리 경험이 많든, 심지어 계급이 더 높든 간에 병학교 출신의 정규 사관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들어 지휘관 유고시 정규 사관 그것도 (전투)병과사관에게 지휘권이 승계되고, 그 다음이 기관 사관이며, 그 다음은 일반 고등학교 출신이 보통인 예비사관, 마지막이 병조장 5년 근무 후 승진 가능한 특무사관이었다. 즉, 해군에서 수십 년 짬밥을 먹으며 산전 수전 다 겪은 특무대위라도 정규사관학교 출신인 소위에게 복종해야 했다. 특무 사관의 경우 2계급 낮은 대우를 했으니 특무대위가 소위 취급 받았다. 그리고 특무사관은 대위까지가 보통이고 소좌부터는 거의 없다시피 했으니... 답이 없다. 결국 모순이 너무 심해 특무사관 제도는 폐지해버렸는데 이에 피해를 입은 사람이 사카이 사부로. 최고의 비행 실력과 실적을 갖고 있으면서도 병조장에서 더 이상 승진이 안 되다가 패망 직전에 제도가 아니라 특혜에 의해 소위로 승진하였다.

그리고 기관병과는 희한하게 무시하여, 지휘관 유고시 기관병과 중좌가 병과 소위에게 복종하는 현상이 일어났다. 그리고 주계과, 법무관, 군의관은 어떤 경우에도 지휘권의 계승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같은 장교끼리도 차별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이는 1944년에야 병과 사관과 기관 사관 사이에 차별이 해소된다. 주계사관의 경우 대학 나온 엘리트들이 병역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특혜 같은 보직이라 지휘권에 별 관심은 없었다. 예비사관들은 애초에 2년 복무하러 왔는데 고학력이라고 예비사관학교를 나와 장교가 된지라, 얼른 소집 해제되어 집에 갈 생각만 하는 사람들이고.

이런 병과 사관만 중시하는 풍조는 수많은 부작용을 야기하였는데, 2차대전의 예를 들자면 당시 해군은 230개의 해군 공병대를 편성하여 대부분을 태평양 전장에 배치했는데 그 운영과 관리를 책임질 지휘관을 토목 전문가가 아닌 병과 사관으로 임명해 버렸다. 이건 단순한 관행이 아니라 해군의 규정인 '내령'에서 해군 공병대의 갑을병정 4종류 모두 지휘관은 병과사관을 부대장으로 임명한다고 규정해 버린 것이다. 그리고 이를 보좌하는 역할에 기술병과 사관을 임명한다고 되어 있었다.[23] 일본군은 미군처럼 불도저와 화물차가 아니라 곡괭이와 삼태기로 일한다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긴 했지만 그래도 지휘관의 병과 문제도 단단히 한 몫 하였다.

뉴기니 서북부에서 축성(공병) 참모가 비행기로 정찰 후 항공기지로 적합하다고 판단하여 귀한 4개 기계화 공병대를 투입했다가 알고 보니 웅덩이라 아무것도 못해보고 자멸한 적도 있었다. 이때도 축성 참모는 공병 출신이 아니라 병과 사관이었다.

또한 일본군은 평시든 전시든 '연공서열'에 의한 승진만 한다. 아무리 멍청하고 전쟁 시 실적이 나빠도 육대만 나오면 을 단다. 그것도 육사 기수대로. 그렇기 때문에 지휘관은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는 것이 승진의 지름길이었다. 어차피 실무는 소부대 지휘관은 준위가, 대부대 지휘관은 참모장이 다 해준다. 지휘관은 근엄하게 자리 잡고 통수에 전념할 뿐이었다. 그 통수라는 게 아무 말도 안 하고 참모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다가 최종적인 가부만 결정해 주는 것이다.

이는 대본영 레벨로 올라가도 마찬가지라 덴노조차도 가만히 앉아 통수권(Yes or Yes 중에서 선택 가능)만 행사하고 있었다. 일인지하 만인지상신분수상의 경우 퇴역한 육군 대장 출신은 대본영 회의에 참석할 권리조차 없었고, 현역 대장인 수상만이 작전 심의에 참여하지 않는 조건으로 대본영 회의에 참석할 수 있었다. 도조 히데키 수상의 경우 현역 육군 대장이었기 때문에 대본영 회의에 참석할 수는 있었지만 겸직하고 있는 육군 대신으로서의 발언권, 즉 작전과 무관한 발언만 가능하였다.

11.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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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전투 교리와 훈련의 막장성

전체적으로 보면 총을 든 사무라이를 만들려 했다고 볼 수 있을 정도로 교리와 훈련이 너무 후진적이었다. 그마저도 그 정도로 끝나면 다행이나, 실제론 반자이 어택의 근간이 된 야마토 정신이란 근거 없는 미신까지 팽배했다.

육군의 기본 훈련 기간은 24주로, 미군의 14주에 비해 길지만 일본군 교관들은 들에게 총검필수적인 공격무기라고 가르쳤다. 총검술 자체는 다른 국가에서도 가르쳤으나, 당시 일본의 총검술은 근접전 때의 격투술이 제외된 근대 총검술이었다. 또한 파일럿과 기관총에도 을 적용할 정도로 그 정도가 타국 이상이다. 또 개개인의 조준사격보다는 부사관분대사격을 지휘하는 공동 소총 사격을 강조했다. 이는 보병 개개인이 연발 화기를 들고 다니고 포병, 기갑, 항공지원이 쏟아지는 현대전에서 지킬 만한 교리와는 거리가 멀다. 활강식 머스킷 들고 줄 서서 총을 쏴야 명중률이 나오던 전열보병 시절 교리를 복붙한 것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국군 훈련소 역시 피치 못해 총검술로 근접전을 하더라도 기회가 온다면 사격하여 적을 처리하는 게 최선이라 가르치며, 이게 정상이다. 그런데 일본군은 전차 앞에서도 총검술을 하라고 하니 전과가 나올 리가 있나?

정글에서 행군을 할 때는 무조건 분대장이 앞서고 그 뒤로 병사들이 한 줄로 나란히 걸었다. 이 때 적과 정면으로 마주치면 당연히 맨 앞의 분대장이 죽고 부대 건제는 무너졌다. 군필자라면 알겠지만, 군대에서 이동 방식을 배울 때 안전한 후방에서 이동할 때나 신속히 빠져나갈 때는 종대로 이동하고 앞에 뭐가 있는지 알 수 없을 때, 정밀한 수색이 필요할 때, 적이 앞에 있음이 확실할 때는 횡대로 이동한다. 소총수들의 화력이 어떤 대형에서 극대화되는지는 말할 필요도 없거니와 종대로 수색하면 수색 가능한 범위가 확연히 줄어든다는 걸 고려하면 일본군의 방식은 유사시 분대장은 걍 나가 죽으라는 소리다. 이 점은 위의 전열보병 시절 교리보다도 못한데, 개활지에서 행군할 때 종대를 지키더라도 교전 시에는 횡대로 전환하거나 험지에서는 산개하는 등의 전술적 유연함은 전열보병 시대 경보병들이 멀쩡하게 보여준 적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 때에도 분대장은 대열의 중간 위치에 있어야 되고, 대열의 선두는 부분대장이 위치하는 게 기본이다.

병사들을 징집할 때 도시보다는 농촌 출신을, 고학력자보다는 학력이 상대적으로 낮은 자가 더 좋은 인적 자원으로 간주했고 대학생 이상의 고학력자들은 징집에서 배제했다. 이는 국가에 대한 충성심과 상명하복을 위해선 학력이 높은 게 쓸모 없다고 여긴 것이다. 쉽게 말해서 '배운 놈'들은 체제에 반항하고 군기를 따르지 않을까봐 꺼렸다는 것으로, 일본군 스스로가 이렇게 평가한 문서 자료가 버젓이 남아 있다. 이 때문에 중일전쟁이 터지고 본격적으로 징집 대상이 확대되자 대학 진학 인원이 늘어나는 통에 군부가 골머리를 썩는 웃지 못할 일마저 발생했다. 미국이나 영국, 독일 등에서도 대학생 등을 징집하지 않은 사례는 있었지만 이는 국가를 위한 귀중한 인재를 보존하기 위해서였고, 정 고학력자들이 참전할 때는 가급적 정규 군사 교육을 시켜서 장교부사관 등으로 임관하도록 했다. 중화민국에서는 중일전쟁 기간에도 대학생 등 고학력자들을 징집하기는커녕 아예 자원 입대하는 것조차 막았다가 1944년에야 자원자들을 대상으로 모병을 실시해서 '지식청년군'이란 부대를 만들어 군사 교육을 시켰다. 다행히 이들은 대부분 교육 도중 전쟁이 끝나서 전원 귀가했다.

게다가 일본군은 전쟁 막바지에 병력이 부족해지자 부랴부랴 대학생들까지 징집했는데, 정작 이조차도 제대로 된 용도가 아닌 엉뚱한 용도로 써먹으려는 거였는데, 위의 미국이나 독일처럼 제대로 교육 시키지도 않고 그저 반자이 어택용 총알받이나 카미카제로 내몰았다. 영화 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를 보면 일반 대학생도 아니고 과거나 지금이나 충분히 지식인으로 통하는 중앙 일간지 기자가 병사로 징집되는 장면이 있는데,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 밀러 대위의 원래 직업이 뭐였는지 생각하면 실로 대비되는 부분이다. 그래도 나름대로는 장교 혹은 부사관으로 써먹으려 했고 정훈자원 등으로 활용하려 했다지만, 죽창사건만 봐도 도통 상노답이다. 지식인으로서의 위치로 보자면 중앙일간지 기자의 뺨싸대기를 수십 번은 후려칠 수 있는 무려 30대의 도쿄대 법정대학 교수 씩이나 되는 훌륭한 인재를 이등병으로 징집한 사례도 있었다.

전함 운용 교리도 심각하게 엽기적이었는데, 16.1인치 주포를 장비한 고속전함나가토급 전함후소급 전함이나 이세급 전함같은 구식 전함과 발을 맞추겠단 이유로 최고 속력을 25노트로 줄여버렸는데, 역으로 나중엔 최고 속력이 딸려서 함대 이동에 걸리적거린다는 이유로 잘 쓰지도 못했다. 차라리 속도를 28~29노트대로 끌어올려서 항공모함 호위에 쓰거나(충분히 가능했다), 하다못해 27노트 정도까지만 속도를 높여 야마토와 발을 맞추기 좋게 만들고 나가토급과 야마토급을 고속전함으로 따로 편성하는 쪽이 나았을 것이다. 함대와 발이 맞지 않으면 최고 속력까지 가속하지 않는다는 기본 중의 기본인 방법이 있는데, 대관절 머리에 뭐가 들었을지 심히 의문이 드는 부분. 야마토급 전함의 경우도 고의적으로 항속거리를 줄여버렸다. 이유는 항속거리가 길면 기름을 많이 먹어서... 이탈리아리토리오급 전함의 항속거리를 짧게 만들기는 했지만 이것은 '우리 이탈리아 해군은 좁은 지중해에서만 활동하니 항속거리를 줄이는 대신 다른 성능에 투자하자.'라는 판단으로 처음부터 일부러 항속거리를 짧게 만든 것이다. 반면 일본은 전장이 넓은 태평양이었으니 항속거리를 늘릴 가치가 충분했고, 성능 강화를 위해서가 아니라 이미 목표 성능을 달성한 상황에서 고작 기름을 많이 먹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항속거리를 줄여버렸다.

심지어 신형 전함이란 이유로 함대결전사상을 위해 제대로 쓰지도 않았다. 혹여나 함선에 흠집이라도 날까 매우 귀중하게 다뤘다. 반면 미국은 진주만 공습의 피해를 메꾸기 위해 가릴 것 없이 투입이 가능하다면 모조리 있는대로 다 쏟아부었다. 이로 인해 탄생한 게 바로 엔터프라이즈 신화. 만일 미국이 일본처럼 소극적으로 나섰으면 요크타운 3자매의 전설 같은 건 없었을 것이다. 만약 진주만 공습으로 미국 전함 함대가 주저앉아 있을 때 나가토급과 갓 취역한 야마토를 위시한 함대로 빠르게 밀어붙였더라면 미국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낸다는 일본의 목표를 달성했을 수도 있다. 이때 미국은 한창 어뢰 스캔들로 인해 잠수함 함대나 뇌격기나 모두 어뢰 관련된 건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었으니 전함 함대가 몰려온다면 당장 전함이 없는 미국은 할 수 있는 수단이 없었다.

한창 전세가 역전된 미드웨이 해전만 하더라도 제로센이 미군 항공대를 묶고 전함 함대가 밀어붙였으면 미드웨이 해전도 승전을 거뒀을 수 있었을 것이다. 미드웨이 해전도 항공전이었지만, 일본 해군이 후방엔 함대전을 위한 전함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전함이 놀지 않고 밀어붙이면 함재기로 전함을 저지한다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므로 퇴각 외에는 뾰족한 수가 없다. 전차와 마찬가지로 진격하는 적 전함을 막아세울 수 있는 가장 좋은 대책은 같은 전함 뿐이었다. 야마토급 전함 격침 사례에서 항공 공격이 일방적으로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격침에 몇 시간이나 걸렸다. 전함의 방공 능력이 낮아 항공기에 침몰한 사례이기도 하지만, 당시 항공기의 대함 능력이 낮아 전함 격침에 수 시간이 걸리던 사례이기도 하다. 수만 t짜리 거대한 강철 덩어리가 떡장갑을 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함에게 가장 무서운 건 자신과 비슷한 체급의 함선에서 날아오는 1톤짜리 강철 포탄이었다. 과달카날에선 잘 버티던 기리시마가 워싱턴의 일제사 한 번으로 격침되어 버렸다.

일본군은 전함을 거의 놀리다시피 했지만 미군은 전함을 수송 작전이나 해군 함포 지원 방공망 형성등에 적극 활용했다. 어느정도냐면 뉴욕급 전함 같은 당대에 이르러선 엄청 구식이 되어 버린 전함까지도 개장을 거쳐 방공과 상선 호송, 상륙 작전에서의 포격 지원등 노인 학대급으로 정말 아득바득 알차게 써먹었다. 물론 일본도 콩고급 전함 같은 경우가 있지만 이는 미국과 달리 앞서 언급한 함대결전사상에 의거하여 야마토급 전함 같은 최신함 대신 총알받이나 되라고 소모품 격으로 보낸 어처구니 없는 발상하에서 벌어진 일이다. 미국은 아이오와급 전함 같은 최신함도 가능한한 최대한 투입시킨걸 보면 할말을 잃게 만드는 부분이다. 이러한 점은 당대 일선의 일본 해군들에게도 너무나도 어처구니 없게 느껴졌는지 야마토급 전함의 1번함 야마토는 호텔, 2번함인 무사시는 료칸(일본식 여관)이라고 조롱했을 정도였다. 해석하자면 "우리는 전선에서 싸우는데 니들은 뒤에서 뭐하고 놀고 있냐?" 라는 것. 또한 1번함인 야마토는 그렇게 아껴놓고는 태평양 전쟁 말기인 오키나와 전투때 특공으로 투입되어 콩고급 전함과 비슷하게 윗분들의 체면을 위해 무의미하게 소모가 된다.

특히 과달카날 전역에서조차 이런 식으로 군함을 너무 아낀 건 치명적인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과달카날 전역이 태평양 전쟁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며 해당 지역에서의 해전들로 미군들도 크게 고전했던 걸 보면 일본은 절대로 여기서 전력을 아껴서는 안 되었다. 2차 대전 당시에 전함의 쓸모가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고, 이런 용도로 쓸 수 있었다. 오히려 일본은 야마토 이후 전함 건조를 접었지만 미국과 영국은 태평양 전쟁 발발 이후에도 전함을 수 척 건조했으며, 이런 함포 지원 용도로는 한국전쟁, 심지어 먼 훗날 베트남전 때도 써먹었다. 일반적으로 전함 한 대가 가지는 화력은 포병 3개 사단의 것과 맞먹는다는 평가를 받는다.

사실 태평양 전쟁 이전인 중국 전선에서는 일본군이 많은 승리를 거두었으나 몽고 - 만주 접경에서 소련군을 얕보고 선빵을 날렸다가 할힌골 전투에서 엄청난 피해가 났다. 이때 바로 정신을 차려야 했지만 일본군은 자신들의 패배로부터 학습을 하지 못했고, 별다른 개선점도 없이 그냥 여태까지 하던 그대로 쭉 밀고 나가기만 했다.

정확히 말해서는 학습하지 못했다기보다는 일본의 근대화 과정에서 나타난 경직된 체계로 인해 변화를 꺼리게 된 데다가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고 싶어했던 군부의 높으신 분들이 문제점을 뻔히 알면서도 고치지 않았다. 그리고 이는 쌓이고 쌓이다 일본군 내부에서 수많은 병사들이 갈려나가고 미군의 일본 본토 상륙이 임박하자 뒤늦게 고쳐보려고 했으나, 결국 전쟁이 끝나고 군대가 해산될 때까지 전혀 고치지 못했다.

여기에 대해서 일본은 당시에 투입된 소련군은 매우 정예였다는 말을 하는데, 답은 양측 다 틀렸다. 실제로는 대숙청의 영향을 받아서 당시 상황에서는 정예급이라고 보기에는 문제점이 상당했다. 대숙청의 영향은 아무리 빨라도 독소전쟁 초반, 늦으면 모스크바 공방전까지 그 영향력이 남아서 할힌골 전투 당시 소련군은 이오시프 스탈린이 심어둔 정치장교와 능력이 다소 떨어지는 장군들만 남아 있었다. 스탈린이 대숙청으로 인한 이런 문제점을 깨닫고 뒤늦게 소련군을 정비한 때는 1940년대였다. 할힌골 전투에 투입된 일본군 또한 정예와는 거리가 먼 23사단으로 신병으로 구성된 부대이다. 또한 투입된 물자나 인력을 봐도 할힌골 전투에 더 공을 들인 건 소련군 쪽이다. 이후 대숙청에서 살아남은 장교들이 훈련을 했으며, 모스크바 전투 때는 다른 정예 병력이 초토화된 후라서 유일한 정예 병력으로 남았기에 원거리에서 동원된 후 나치 독일군을 패퇴시킨 전력으로 성장한다.

12.1. 비실용적인 사관학교의 교육 과정

현대 서구식 군사학이나 군사 기술에 집중하는 대신 17세기 사무라이 전통 교육을 토대로 상명하복에만 집중한 교육을 했다. 장교를 사무라이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일본육군사관학교, 일본해군병학교, 육군대학교, 해군대학 어디든 간에 이런 비판을 피해갈 수 없었다.

우선 정신교육을 한답시고 교과 과정의 상당 부분이 군사학이나 군사 기술이 아닌 17세기 사무라이들이 공부한 사서오경류를 가르쳤는데 조갑제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를 보면 일본 육사 교과 과정의 반 이상이 이런 유학 공부였다고 한다. 주자어류에 나오는 정신일도 하사불성(精神一到 何事不成) 같은 유교 경구를 장교들의 머리 속 깊이 박아두고 전선에서도 어구에 기반을 둔 작전을 적절히 실현해서 패전의 원인이 되었다. 성리학은 길고 폭 넓은 유교 사상 중에서도 이론 중심적이고 형이상학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데, 좋게 말하면 심오하고 나쁘게 말하면 뜬구름 잡는 소리인 철학을 상명하복 마인드를 정당화하는 프로파간다로 써먹은 것이다.

이는 고전 동양 사상에 충실한 교육도 아니었고 전국시대무사도에 충실한 교육도 아니었다. 유교에서 군국주의상명하복만 빼내어서 강조한 잡종 교육이었다. 근대화탈아입구에 그토록 열을 올리던 일본이 속으로는 이토록 보수적으로 굴었다는 걸 알 수 있다.

먼저 전근대 동양에서 무관이라면 반드시 무경칠서를 읽어야 했다. 그 중 제일로 놓였던 것이 손자병법이다. 손자병법은 시대를 초월한 명저로 달달 외울 만한 가치가 충분하지만, 일본군은 이 손자병법을 철저히 무시했다. 손무는 첫 장부터 '전쟁이 최선이 아니며,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최선이니 명분이 없거나 국력이 뒤진 상태에서 전쟁을 하는 것은 극력 피하라'고 했으며, 또한 전쟁은 단기로 끝내서 장기전이 되는 것은 최대한 피하라고 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이를 싸그리 무시하고 중일전쟁,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다가 멸망했다.

손자병법에서는 당연히 병참의 중요성도 강조했으나, 일본군은 이 가르침도 무시했고, 특히 무타구치 렌야는 보급이란 적에게서 얻는 것이라는 망언을 했다. 물론 손자병법에서 식적일종 당오이십종이라며 적의 식량 1종을 빼앗아 먹으면 아군의 식량 20종에 해당하는 것으로 취급했었기 때문에, 얼핏 보면 이 발언이 아주 근거 없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럴 만한 게 전근대 시대에서는 식량이 그냥 떠오르는 게 아니라 인력이나 동물로 운반해야 했기 때문에 아군이 힘들게 운반한 것보다 적의 것을 약탈하는 것이 힘들게 보급로 걱정하지 않고 바로 사용할 수 있었으니 효율이 좋았고, 이건 적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그만큼 (적이 공격자일 경우) 그 힘들게 운반한 군량을 탈취해 적을 엿먹이라는 의도도 있었다.[24]

하지만 손자병법에는 분명히 "적에게서 탈취하는 것만으로는 전쟁을 할 수 없다"는 내용이 있고, 따라서 아군의 기본 병참의 중요성 또한 언급했다. 하지만 일본군은 이 역시 싹 씹어버렸다. 설령 적의 것을 탈취해서 사용할 수 있다 쳐도 그건 식량 정도에나 먹히는 얘기지, 각종 무기가 등장하는 현대전에서는 적이 아군과 동종의 탄환을 쓰지 않는 이상 탄환을 노획해서 쓸 수 없으므로 저 발언이 망언인 것은 바뀌지 않는다.

무기를 노획해서 그걸 쓰면 그나마 좀 낫긴 한데, 전쟁이 무슨 게임도 아니고 적군한테서 노획한 장비를 사용하는 법을 바로 파악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무기 정비를 위해 무기를 분해하는 방법도 알아야겠지만, 받침대가 오목한 것 때문에 무릎 위에 넣고 쏘는 것으로 착각된 89식 척탄통의 예시에서 보듯이 무기를 사용하는 것도 그냥 그럴싸한 방법으로 쓰면 위험하다. 괜히 적군 무기 도감을 만들어 노획 무기 사용법을 교육시키는 것이 아니다.

또한 일본 제국은 무사도를 국가적으로 장려했다. 그러나 이 역시 전국시대의 무사도와 전혀 관계가 없는 짝퉁이었다.

원래 무사도도 시대에 따라서 변했다. 그러니까 전국시대의 무사도도 가마쿠라 시대에서 보면 근본 없는 짝퉁이다. 문제는 에도 시대의 무사도의 지침서인 하가쿠레는 에도 시대에 맞는 무사도를 제시한 것이 아니라 전란의 와중에 온갖 속임수와 비열함이 난무했던 전국시대적인 마인드를 무사도라고 했다는 것이다. 비슷한 개념인 기사도가 그 시대에 맞는 정신을 부여하기 위함인 걸 감안하면 참 문제가 많았다. 당연히 에도 시대에 이런 시대에 불필요한 무사도는 막부에 의해 규제되었고, 하가쿠레 역시도 음지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일본 제국의 무사도는 야마모토 쓰네토모가 에도 시대에 쓴 하가쿠레를 바탕으로 하는데, 이 책은 전문성이 전혀 없는 불쏘시개에 가깝고 저자 역시 입만 산 정신병자에 가깝다. 저자는 시마바라의 난이 끝나고 20년 뒤에 태어나서 전쟁 경험이라고는 쥐뿔도 없는 사람이다. 물론 저자는 대대로 사가 번을 섬겨온 이름 있는 사무라이 출신이긴 했다. 게다가 하필이면 이 사람 말고 무사도를 제시하는 책을 쓴 사람도 없었다. 때문에 막상 무사도를 부활시키려고 하다 보니 하가쿠레가 가장 마음에 들어서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 하가쿠레를 대신해 삼을 만한 지침도 없었다.

이러니 원판부터 온갖 속임수와 비열함이 난무했던 전국시대적인 마인드를 기본으로 해서 그나마 실전 경험이 전혀 없는 자가 전문성이 전혀 없는 식으로 무사도라는 것을 써놓은 책을 경전으로 삼았으니, 일본군을 전국시대 수준이라고 말하는 것도 오히려 전국시대 쪽에 엄청난 실례나 다름 없는 소리인 셈. 사에키 신이치의 저서 전쟁터의 정신사 - 무사도라는 환상(戦場の精神史―武士道という幻影―)(한국 출판본 제목: 무사도는 없다)에서도 이 하가쿠레의 무사도를 깠다.

일본 해군은 그나마 기계를 다루는 일이 많아서 이런 병맛 나는 짓은 안한 듯 하지만, 지나치게 기술 과목을 중시한 나머지 리더십이나 위기 대처 능력을 기르는데 소홀했다. 해군이라는 군종 특성상 육군 정도까지는 막장이 아니었다고 하지만, 오히려 서구 문물을 잘못 받아들여 자기네들의 편협한 시각으로 잘못 해석해 다른 방향의 문제를 일으키는 등 결국 피장파장이었다.

일본군 공통으로 사관학교 출신에 대한 엘리트주의는 심각해서, 비사관학교 출신에 대한 차별은 엄청나게 심했다. 당시 기술직 장교들은 학사장교 형태로 배치했는데, 더 웃긴 사실은 비사관학교 출신 장교는 아무리 계급이 높아도 사관학교 출신 장교의 명령을 받아야 했다는 것이다. 비사관학교 출신의 좌관급 장교조차 사관학교 출신 소위의 명령을 받아야 했다. 이렇게 되니 토목공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관학교 초짜 소위가, 수많은 공사판에서 경험을 쌓은 비사관학교 출신 좌관급 공병장교를 지휘하는 경우도 벌어지는 등 사관학교만 나오면 자네가 주임원사인가?를 시전할 수 있는 골품제 사회가 되었다. 사관학교 출신의 우대가 심한 한국군도 이 따위 짓거리를 시도라도 했다가는 닥치고 하극상으로 군사재판 감이다.[25]

12.2. 바보라는 전제하에 만든 작전계획

적이 바보라는 전제 하에 작전 계획을 수립했고, 이런 작전계획으로 인해 패전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고치지 못했다. 당시 일본군이 집권할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천황의 황군'이라는 정통성 때문이다. 일본군이 경찰과 대립하고, 수상암살하는 미친 짓을 저지르고도 끝내 집권까지 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일본이 천황을 절대적인 존재로 받드는 국가신토국교로 채택했고, 군부가 '천황의 뜻을 받드는 황군'이라는 명분을 내세웠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천황의 말은 항상 옳은데 군이 주장하는 것은 곧 천황이 주장하는 것이므로 성경무오설처럼 군의 주장도 항상 옳아야 했기 때문에 후술할 문제점들을 알면서도 고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문제점을 인정하고 고친다면 당시 군부가 내세우던 천황의 신성성과 무오성이 훼손되고, 이는 곧 천황의 권위와 엮어 내세우던 자신들의 권력과 정통성이 훼손된다. 그렇다고 천황이 나설 수도 없었다. 군부는 결코 일본과 천황을 위해서가 아니라 철저히 군부의 이익을 위해 움직였다. 전후 책임을 전부 천황에게 떠넘기려고 한 자도 있었으니 말 다했다. 그 때문에 군부는 항상 '폐하의 군대', '황국신민'과 같이 천황의 권위를 강조해왔으며, 문제점을 지적하는 일부 양심적인 사람들에게 '천황 폐하를 무시하는 비국민'이라고 낙인을 찍어가면서까지 비판을 막아왔던 것이다.

손자병법에 나오는 '지피지기(知彼知己) 백전불태(百戰不殆)'가 바로 이런 바보 짓을 하지 말라고 적어놓은 구절이다. 정확히 말하면 저 문구가 있는 손자병법 모공 편과 용간 편이 적의 정보를 무시하고 덤비면 설령 이기더라도 무조건 큰 손해를 본다는 사실을 경고하기 위해 있는 것이다.

이렇게 적을 경시하면 위험하다는 건 누구나 알 만한 상식인데도 일본군은 애써 그걸 무시했다. 적은 바보라고 계속해서 스스로를 세뇌했고, 그런 전제 하에 작전을 세웠다. 이런 식으로 스스로를 세뇌하는 모습은 1943년 3월 1일 삼간사우의 멤버이자 육군성 군무국장인 사토 겐료 소장이 의회에서 중의원질문미군을 상세히 해부했다면서 한 답변에서 엿볼 수 있다. 놀랍게도 밑에 있는 답변들은 하나 같이 일본군 스스로 지고 있는 문제점과 유사하다.
1. 미 육해군은 정말로 실전 훈련이 떨어진다.
2. 대규모 병단을 상당히 졸렬하게 운용한다.
3. 미 육군의 전술은 전근대적인 전술로 많은 결점이 있다.
4. 정치군사와의 연계가 불충분하다.
그런데 이렇게 육군 군무국장이 외국 군대에 대해 의회에서 보고하는 것 치고는 지나치게 추상적이고 무의미한 내용들이다. 미군의 실전 훈련이 떨어진다면 어떤 훈련에 어떤 오류가 있는지, 대규모 병단의 모범적인 운영은 어떤 것이고 미군의 운영 방식은 어떤 식이며 그것이 어째서 문제가 되는지, 수많은 전근대적 전술 중에 미군이 채택한 것은 어떤 전술이며 일본군이 그것을 어떻게 파훼할 수 있는지, 미군 수뇌부와 워싱턴 사이에 어떤 갈등이 있었고 그것이 개전 시 일본군에게 어떤 이점이 되는지 정도의 설명과 근거도 없는, 정보 분석 내용이라기보다 미군은 바보라는 것을 토 달지 말고 믿으라는 일종의 선언인 셈이다.[26]

게다가 해군이고 육군이고 지나칠 만큼 초기 계획에 매달리는 경향이 있었다. 따라서 적이 예상대로만 움직이는 상황을 상정해 놓는 안일하고 무모한 작전 계획이 현장의 보고나 정보로 수정될 기회도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일본군이 못 싸운 것도 아니다. 계속 연이어 유리한 상황으로 이어지다가 미국이 한타 싸움을 작정하고 계획할 당시에도 이렇게 했다가 정규 항공모함 4척을 그냥 말아먹었다. 예컨대 일본 해군의 작전 계획에는 야간에 적 함대를 기습하는 내용이 있었는데 이는 적 함대는 야간에 회피나 기만 없이 원래의 진로를 유지하며, 일본 해군은 적의 위치를 파악했지만 적은 일본군의 접근을 눈치 채지 못한다는 전제로 작성했다. 이는 1942년 8월까지는 사보 섬 해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어느 정도는 통하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레이더 기술이 워낙 빨리 발전하면서 1942년 12월에는 에스페란스 곶 해전에서 나오듯이 이미 터무니없는 내용이 되어버렸다.

이런 일본군의 작전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일본 함정들은 적에게 발각되지 않도록 서로 전혀 통신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위치와 적 함대의 위치, 그리고 다른 일본 함정의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해서 포위망을 형성한 뒤 정확한 타이밍으로 정확한 지점을 향해 공격하는 서커스에 가까운 묘기를 펴야 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방안을 고안하는 데는 전혀 관심이 없었으며, 오히려 포위망을 더 복잡하고 정교하게 디자인하는 작업에만 골몰했다. 그야말로 쓸모 없는 설정놀음 그 자체였다.

진짜 문제는 일본군이 미 해군과 결전을 벌이기 위한 작전의 핵심인 점감요격작전에 있었다. 이는 미 함대가 접근할 때 동남아시아 여기저기에 매복해 있던 항공기들이 일정한 시간차를 두고 발진해서 미 해군 함정들과 함재기들은 한쪽에서의 공격에 대응하다가 다른 쪽에서 다시 공격을 당하는 식으로 우왕좌왕하다가 큰 피해를 입게 되고, 그렇게 만신창이가 된 미국 함대를 함대결전을 통해 결정적으로 격파한다는 것이었다. 언뜻 그럴 듯하게 들린다.

하지만 일단 준비 과정부터 문제다. 비행기를 매복시키고 써먹으려면 활주로가 필요한데 비행기야 숨긴다 쳐도 활주로를 어떻게 숨긴단 말인가? 과달카날 전투가 시작된 계기가 과달카날 섬에 건설 중인 활주로를 보고 그 기지가 완성될 경우 미국 - 호주 간의 보급선을 위협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서둘러 공격한 데서 시작했으니 활주로를 숨기기란 어렵다. 물론 나름 숨겨보겠다고 활주로 한가운데 나무를 심었다가 뽑고 이동식 위장 가옥을 이동시켜서 촌락처럼 보이게 하는 등 여러 가지 꼼수를 고안했지만 그래봤자 들키는 것은 시간 문제일 뿐이다. 설상가상으로 이 작전을 하려면 미군은 일본군의 위치를 아직 모르는 상태에서 일본군이 미군 함대의 위치를 먼저 파악한 후 각지에 흩어져 있는 기지들이 유기적으로 연합해서 작전을 펼쳐야 하는 것이 기본 전제이다. 즉 미군은 그 많은 항공기를 가지고도 정찰조차 안 하고 무작정 진격하고, 일본군은 고질적인 통신 문제나 지휘권 문제에도 불구하고 사방의 일본군 전체가 정확한 타이밍으로 미군의 위치를 찾아서 공격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기본 전제가 되는 셈이다.

실제로 도상연습에서 점감 요격 격파 연구만 하는 장군으로 유명한 나카무라 료조 중장이 미군을 맡아 연구한 대로 움직이자마자 일본 연합 함대가 일본 근해까지 밀려서 전멸하는 결과가 나왔다. 이 때문에 장교들이 항의하자 그는 구 일본군 2대 명언 중 하나[27]인 "미군이 우리 뜻대로 움직인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문제다!"란 명언을 남겼다고 한다. # 이후 나카무라 중장은 2.26 사건 이후 파벌 싸움에 얽혀서 퇴역했다.

또한 이러한 사건에도 일본군은 정작 미군 함대를 어떻게 먼저 찾아낼까, 기지들이 어떤 수단으로 통신을 하고 누가 어떻게 작전을 지휘할까도 제대로 고려한 적이 없다. 단지 어떤 타이밍에 어떤 식으로 공격하는 것이 좋을지만 예술적으로 다듬었을 뿐이다. 그 결과 결전을 위해 준비한 기지들은 미군이 먼저 발견하고 선제공격을 받아서 변변한 저항조차 못하고 처참하게 각개격파 당했다.

덤으로 적을 찾아내는 수단도 탐조등, 조명탄, 견시, 수상기 같은 광학적인 방식에만 집중하고 수색에 가장 잘 어울리는 레이더는 무시했다. 심지어 일본군은 1938년부터 레이더의 기초가 되는 전파에 대한 연구마저 금지시켰다. 그것도 최소 1942년 초반까지 그랬으니 그 이후에 레이더를 개발해봤자 때가 늦었다. 사실 광학적인 방식을 잘했냐면 그것도 아니어서(...) 탐조등 성능의 열악함으로 전략 폭격에 잘 대응하지 못하는 원인중 하나가 됬고, 수상기 같은 경우엔 엔진 성능의 열악함으로 속도와 항속거리등의 문제가 발생하였고 이로인해 정보에서 밀리게 된다. 전체적으로 일본 수뇌부의 기술 경시 태도 때문에 모든 분야에서 어떤 방식을 취하든간 성과와 효율을 보기 어려웠다.

일본군은 양동 작전처럼 한 부대가 적의 주의를 끄는 동안 다른 부대가 작전 목표를 달성하는 방식을 선호했으나, 정보 수집 능력과 상황 대응 능력이 따라주지 않았고 적군이 예상대로 움직여주지도 않았다. 무리한 양동작전은 매우 복잡한 데다 스스로의 힘을 분산시키게 되므로 패전의 지름길이 된다. 양동작전이 효과를 보려면 적군이 자신들의 예상대로 움직여주거나 아군이 우월한 정보력과 기민한 대응 능력을 가지고 있을 때나 가능하다. 이렇게 양동작전을 운영하는 게 좋은 조건이 갖추어질 때만 양동작전을 사용하는 게 바람직하며, 손자병법에서도 양동작전으로 강한 적과의 충돌 없이 목표를 점령하는 것은 좋다고 서술되어 있다. 그렇지 않을 때는 넓은 지역에 흩어진 부대들이 지휘권이나 통신 등의 문제로 유기적으로 협력할 수 없다면 부대를 산개시키지 않고 전투력을 집중하는 것이 상식적이다. 일본은 정보 수집 능력은 등한시하면서도 적군이 우리 예상과 다르게 움직일 경우에 대한 대책마저도 없는 작전이나 세워대고 있었던 것이다.

위의 점감 요격 작전도 그렇지만 미드웨이 해전에서도 미군의 수색 및 탐지를 회피하기 위해 함대를 상호 지원이 불가능할 만큼 광범위하게 분산했다. 그 결과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본대는 나구모 주이치 기동부대가 얻어터지는 사이 아무것도 못하고 손가락만 빨다가 되돌아왔다. 이 사실을 안 아카기의 전투기 비행대장 이타야 시게루가 '전쟁 구경이라도 할 생각인가.'라고 비난했을 정도다. 그러고는 미군의 주의를 끈답시고 알류샨 열도를 공격해서 귀중한 전력을 무의미한 곳에 박아놓고 나중에 구출하러 가느라 고생했다. 게다가 알류산 열도 점령은 원래 계획상으로도 미끼용으로 공격만 하는 것일 뿐 점령할 필요는 없었고, 더군다나 원래 계획마저 어그러진 상황에서는 전혀 점령할 필요가 없었는데 미드웨이의 패전을 가리기 위해 점령을 강행한 것으로, 아무런 전략적 가치도 없었다.

그나마 미드웨이에서 참패했다면 반성이란 걸 해야 하는데, 나구모 주이치동부 솔로몬 해전에서 정규 항공모함 류조를 미끼랍시고 따로 떼놓았다가 무의미하게 격침시키는 삽질을 했다. 게임에서는 크기가 작다며 경항모 취급이지만 류조는 엄연히 정규 항모였고, 미드웨이에서 대패한 후 일본군에는 정규 항모가 류조, 쇼카쿠, 즈이카쿠 3척밖에 없었다. 개조 항모인 히요와 준요도 미군은 정규 항모로 간주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5척밖에 안 된다. 그렇게 귀한 정규 항모를 마구 내다버리면 어떻게 전쟁을 하나?

레이테 만 해전에서는 그나마 미끼 작전은 성공했지만, 그것이 성공했다는 것을 다른 함대에 알리지 못해서 물거품이 되었다. 더 정확히는 알리긴 알렸는데, 그 다른 함대가 받지도 못했고 해당 함대는 자신들의 후방에 미군 함대가 매복해 있다는 전혀 엉뚱한 정보를 받고 돌아가버린 것이다. 이게 레이테 만 해전의 삽질인 구리다 턴이다. 물론 구리다 턴의 원인은 무전기만이 아니지만. 구축함 히어만 단 한 척을 잡지 못해서 야마토, 나가토, 하루나 전함 3척이 빤스런을 시전한 어이없는 전투 실력도 한 몫 했다(...)

적의 탐지를 회피하기 위해 함대를 무작위적으로 널리 분산시키는 것은 현대 미군 항모전단 운용 전술에도 쓰이는 기본적인 전술이다. 다만 상호 지원이 가능할 정도로는 가까워야 하고, 현대 미군은 데이터 링크를 통해 모든 함정이 전황을 잘 파악하고 있다는 차이가 있다.

일본군의 야간 작전 계획 같은 것은 실전에서는 쓸 일이 없어서 그나마 문제는 적었다. 사보섬 해전이나 타사파롱가 해전 같은 경우에는 저런 전제가 실제로 적용돼서 상당한 성과를 올린 사례가 있는 건 사실이지만 매번 그런 일이 일어나기를 바랄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리고 과달카날 해전처럼 먼저 발견하였음에도 오히려 패퇴한 경우도 있다.

12.3. 이 지는 걸 전제로 하는 훈련

위 문단하고 이어지는 문제인데, 훈련할 때도 처음부터 적이 지는 것을 전제로 한 훈련이라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이 일상다반사였다. 훈련이라는 것이 실제 전쟁과 거기에서 벌어지는 최악의 상황에도 대비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훈련의 의미 자체가 사라지는 뻘짓이다. 설상가상으로 이런 훈련을 하면서 결과가 불리하게 나오면 판을 뒤집어엎는 수준의 조작질을 공개적으로 했다. 사실 저건 놀랄 만한 일도 아닌 게, 저러한 훈련을 받고 자기 과신에 빠진 나머지 상황이 잘못 돌아가거나 자신들이 질 거라는 생각이 전혀 없었다 보니 저러한 꼼수에 꼼수를 이어가며 엉터리 수를 두었을 것이 뻔하고, 이것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조차도 못했을 것이다. 상술된 문단에서도 저러한 뒤틀린 사고방식을 일갈하는 장군이 있었을 정도다. 상관+주변 눈치 때문에 판정을 공정하게 내리기도 힘든 환경인 것도 한 몫 했다.

미드웨이 해전 직전 벌어진 워게임을 예로 들자면 미국 항공모함에 의해 4척뿐인 일본 항모 중 2척이 침몰하고 2척이 대파하는 결과가 나오자 그런 일이 벌어질 리 없다며 도로 부활시키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이는 당시 대항군 지휘관이자 판정관을 겸했던 연합함대 참모장인 우가키 마토메가 자신에게 불리한 결과가 나오자 "폐하의 정강인 항모에 기량이 엉망진창인 미군기가 감히 폭탄을 떨어뜨릴 수 있을 리 없다"라고 억지를 부리는 동시에 "미군의 폭격 명중률은 우리 군 명중률의 1/3 수준이다. 그러니까 피해량도 1/3로 계산해야 한다"는 기적의 논리를 내세워 결과를 뒤집었다.

다만 미드웨이 해전의 경우 당시 일본 육군, 해군, 연합함대 제독의 의견이 다 달랐고 연합 함대 제독이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키기 위해 그랬다는 말도 있다. 그러나 전투 감행을 위해서였더라도 적이 지는 걸 전제로 한 훈련을 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28] 더 자세한 것은 미드웨이 해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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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만화 '몽환의 군함 야마토'에서 상술한 뻘짓을 하는 장면

아무튼 우가키는 아카기에 9발의 폭탄이 명중하다니 말도 안 된다며 3발 소파로 판정을 바꿨고, 이후 미드웨이 해전에서 미군은 아카기에게 1발의 폭탄밖에 먹이지 못했다. 우가키의 억지가 들어맞은 것으로 보이지만, 그 1발로 일본 해군의 대들보인 아카기가 격침되었다. 명중률이 1/3이라면 피해량도 1/3이라는 우가키의 논리가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게다가 카가는 워게임에서처럼 10발은 넘을 것으로 추정되는 명중탄을 먹어 격침되었다.

여기에 더해서 실전에서 맞붙자, 오히려 미국 항공모함이 이론상이 아닌 물리적으로 부활해서 일본군에게 빅엿을 먹였다. 게다가 그 항공모함은 이전 해전에서 반쯤 얻어터진 상황에서 억지로 다시 굴러져야 했던 상황이었다.

13. 조종사 관리 실패

일본의 조종사 훈련 과정은 훈련 내용이 어려워서 수료에는 50개월-64개월이 필요했고, 매년 졸업하는 조종사는 100명에 불과했다. 이 훈련이 성적순으로 잘라서 소수정예의 초인적인 실력을 가진 조종사를 양성하려는 의도였다.

13.1. 타국에 비해 낮은 계급 부여

육해군이 각기 보유한 항공대의 경우 장교와 부사관과 병이 모두 조종사에 지원할 수 있는 것은 타국과 동일하였으나, 문제는 그 지원자들이 훈련을 이수하고 임관한 시점에서도 계급이 그대로라서 계급의 조종사가 나타났다는 거다. 그 병 계급 달고 있던 조종사 중에 하나가 다름 아닌 사카이 사부로. 그가 해군 사등수병부터 군생활을 시작한 건 맞는데, 그가 비행 교육을 받고 비행사가 되었을 때 그의 계급은 해군 삼등병조, 우리 식으로는 하사였다. 그리고 해군 병조장, 즉 준위에서 소위로 진급한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진급에도 대단히 인색하여 부사관 계급의 조종사가 장교 계급으로 진급하는 일이 사실상 불가능했다. 앞서 언급한 사카이 사부로도 많은 상급자들이 자발적이고 적극적으로 승진 신청을 넣어준 덕분에 전쟁 말기에 소위로 진급했는데, 이렇게 진급한 사례가 그 이전까지 단 1건에 불과했다.[29] 그래서 주변 사람들은 물론 사카이 사부로 스스로도 일본에서 2명밖에 못 누린 영광을 누렸다고 말했으니 정말로 말 다 했다. 그래서 같은 조종사 동기간에도 계급 격차가 심하므로 조종사 내부에서의 차별과 멸시가 심했다. 이런 점 때문인지 일본산 창작물들을 보면 이등병 전투기 조종사가 당당하게 등장하는데, 일본군에선 진짜 이게 가능했으니 이런 소리가 나오는 것이다.

일본군이 이런 삽질을 하는 사이 다른 나라에서는 조종사로 임관하면 최소 부사관 이상 기본 장교 계급을 부여하거나 빠르게 진급시켰는데, 미국 육군항공대의 경우 비행학교를 졸업하거나 여러 경로를 통해 조종사가 되면 학력 등과 관련 없이 무조건 장교로 임관시켰다. 영국은 기본적으로 부사관이나 장교였다. 독일 등은 병이나 부사관 신분의 조종사는 있지만 장교로의 진급도 쉬웠다. 테오도어 바이센베르거, 발터 슈크, 후고 브로흐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렇게 타국이 조종사들에게 좋은 대접을 해준 이유는 장교나 부사관을 길러내는 만큼의 수고가 들어가고, 그만큼의 책임을 져야 하는 보직이기 때문이다. 2차 세계대전 기준으로 P-40 전투기 1대의 가격은 M4 셔먼 전차 1대와 비슷한 수준인 44만달러 근처였는데, 셔먼 전차는 5명이 탑승하여 분업하지만 전투기는 단 1명이 조종하고 전투까지 해야 한다. 게다가 못해도 수백 시간의 비행 훈련을 받아야 임무에 투입이 가능하고, 비행기의 특성상 조종사가 마음만 먹으면 적당히 싸우거나 수틀린다 싶으면 도망치기도 좋고 심지어 적국에 망명하기도 쉽다. 이 정도면 병사가 담당하기에는 너무 크고 중요한 일이다.

평소 일본군 같이 병들에게 가혹한 갈굼을 하는 곳에서 값비싼 전투기를 이등병에게 주면 전투기째 들고 탈영이 발생할 가능성이 무지막지하게 높다. 이런 무기를 운영하는 사람에게 장교 계급을 주는 것은 앞서 말한 이유 외에도 대접을 해줌으로써 이런 문제를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물론 이 문제를 일본군도 아주 무시한 건 아니라서 해군의 사병 조종사를 양성하는 예과 연습생 과정에 선발되면 수병 신분의 연습생도 하사관의 피복을 지급했다.

실제로 값비싼 무기를 가지고 투항하면 포로수용소에 잡아넣지도 않고 막대한 상금과 함께 영웅으로 대접하는 국가가 많았으며(이웅평 참고), 삐라 등을 통해 적군에게 적극적으로 해당 행위를 권장까지 했다. 실제로도 장비나 병력을 들고 투항하면 가져온 장비나 병력 숫자에 비례해서 계급을 주기도 했다. 전투기 조종사는 기본 소령, 전차장은 기본 상사였고 병력은 100명이면 중위, 500명이면 소령이 기본이었다. 하지만 일본군은 그걸 철저하게 무시했기에 조종사들은 불합리한 명령을 받았고, 자신의 희망에 맞는 적절한 정비도 못 받은 불량 비행기를 몰면서 사투를 벌여야 했다.

13.2. 인적자원관리 실패

연합군 쪽은 일단 조종사들 인원도 늘어났고, 진주만 이후 초창기에는 부족한 조종사를 수급하기 위해 3기 이상 격추시킨 경험이 있는 조종사들을 바로 본토로 보내서 후진 양성이라는 명목하에 교관으로 임관시키고 해당 조종사들은 조종사 훈련생에게 자신의 노하우를 전수했다. 전쟁 후반기쯤 가면 그동안 양성한 조종사의 숫자가 충분하다고 보고 양성 속도를 약간 줄이는 대신 훈련을 크게 강화해서 조종사들의 기량이 상향 평준화된 반면 일본군은 오히려 베테랑 에이스들을 최전방에 내세우며 소모시켰다.

인적 자원의 유지에 대한 관점 차이는 비행기 설계에서도 나타났다. 가뜩이나 처참한 내구성으로 하늘을 나는 관짝 혹은 가솔린통이라고 불리는 제로센에서 100대 중 몇 명이나 살아남을 것인가? 제로센으로 격추되어 포로가 된 사람은 신의 선택을 받은 사람일 것이다. 반면 미국은 조종사의 가치가 매우 컸기에 생존성을 극대화하였기에 비행기가 격추되어도 조종사 생존률이 상당히 높다. 조지 H. W. 부시도 비행기가 격추돼서 해상에 불시착했으나 잠수함에 구조되었거나 PBY 카탈리나를 통해 구조된 자들도 많았다. 그렇게 생존한 조종사는 다시 와서 조종간을 잡지 못하는 부상을 입지 않는 이상 재투입된다. 생사의 기로에서 살아 돌아온 조종사의 경험치는 귀중하고, 그들의 기술을 최대한 초보 조종사들에게 전수 시킬 수 있지만 이렇게 가치가 큰 조종사를 일본군은 카미카제로 굴리는 미친 행동을 벌이며 1회용품처럼 소모했다. 이러니 공중 교전에서 일본군이 연합군에게 밀리는 것은 너무 당연지사이다.

일단 특공기를 제외하면 일본군 항공기도 낙하산이 있었다. 애초에 제로센 같은 경우는 낙하산을 조종석 좌석 쿠션으로 사용하게 설계되었다. 문제는 사카이 사부로의 책에서도 나오는 말이지만 비행 중 소변을 앉은 자리에서 그대로 보기 때문에 막상 낙하산이 필요한 상황이 되면 쿠션으로 쓴 낙하산이 젖어서 내구성이 일시적으로 하락해서 낙하 시 찢어지기 쉽기 때문에 쓸모가 없다는 점이다. 그리고 적지에서 포로로 사로잡히느니 차라리 그대로 죽으라는 분위기가 만연했기 때문에 실제 탈출자는 거의 없었다. 게다가 이런 인식이 만연했으니 당연히 낙하산 탈출 훈련 같은 건 굳이 제대로 받을 필요도 없었다. 또한 사카이 사부로에 의하면 몸에 착용하는 낙하산의 스트랩이 매우 불편하여 비행기 조종에 지장을 주기 때문에 미착용으로 타는 파일럿도 굉장히 많았단다. 당연하지만 2차대전 당시 외국 조종사의 낙하산은 비행기 조종에 지장이 전혀 없었다. 어차피 일본군은 조종사의 탈출 따위 관심 없었기 때문에 효율적인 낙하산 하네스 개발 같은 건 생각지도 않은 것이다. 결국 탈출하면 살 수도 있는 수많은 조종사를 본인들 손으로 죽여버렸다.

중일전쟁부터 참전한 사카이 사부로 역시 한쪽 눈의 시력을 거의 잃어버리자 출격이 금지됐고 훈련 교관으로만 있을 것을 명 받았으나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조종사 수가 딸리자 직속상관들에게 가장 믿음직한 에이스 취급을 받으며 실전에 출격했다. 이에 대해 책에서는 '대전 후반에 보충으로 합류한 애송이 조종사들 그 누구보다도 해군 비행학교 시절 퇴교 당했던 나의 동기들이 더 뛰어난 조종사일 것'이라는 문구로 일본군을 비판했다.

그리고 저렇게 비행훈련 과정에서의 탈락자들을 전쟁이 터지기 전에 빨리 재소집해서 재훈련시켜서 조종사로 써먹으려는 계획도 없다시피 했다. 그래서 조종사 훈련 탈락자들은 비행기 정비병 훈련생으로 전환되거나, 그냥 육군 알보병으로 전환된 후 실전에서 불타는 항공모함과 운명을 같이 하거나, 전선의 버려진 기지를 사수하다가 전사하거나 해서 막상 다시 조종사로 써먹으려고 보니까 생존자가 별로 없었다.

인적 자원을 배치할 장소의 선별에도 문제가 있었는데, 과달카날 전역 이후 일본군은 항공모함에 실을 함재기 조종사를 대거 보충해야 했다. 연이은 전투로 함재기 전력이 고갈되었기 때문이다. 일본군도 나름대로 열심히 함재기 조종사를 양성했지만, 정작 그 조종사와 함재기들을 지상 기지에 배치했다. 밀리는 전선을 수습해보자는 의도였을지 몰라도, 그러면 항공모함에 실을 함재기와 조종사가 없어지는 게 문제다! 당연히 일본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기껏 키운 양질의 함재기 조종사가 없어졌다. 결국 일본군은 함재기 조종사를 다시 키워야 했지만, 일본 해군의 명운을 건 결전의 순간인 필리핀 해 해전에 투입될 함재기 조종사들은 상술한 뻘짓으로 항공모함에 이착함도 제대로 못하는 풋내기들만 남았다. 결국 이 전투에서 일본군 전투기는 마치 새 사냥을 당하듯 맥없이 격추되었다. 함재기 조종사가 되려면 지상 기지에서 출격하는 조종사가 모르는 여러 가지 재주들을 배워야 하므로 육성이 쉽지 않다는 점을 망각한 대가였다.

13.3. 비실용적인 훈련

어느 나라 군대에서든지 정해진 TO가 넘는 지원자가 몰리면 TO를 넘어간 인원은 무조건 잘리게 되어 있다. 예를 들어 필요한 조종사는 100명인데 요구사항에 걸맞은 후보생이 2~3백명쯤 있다면, 선발 과정 중에 사소한 결함이나 핑계로 잘리는 사람이 나올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일본군은 그 선발 과정에서 또 똥군기와 오컬트로 좋은 자질을 가진 조종사 후보자를 여럿 날려먹었다. 그 중 가장 압권은 모든 과정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비행학교 졸업 전날에 "군복 단추를 잘못 잠갔다"고 복장 불량으로 퇴교시키고, 졸업 전날 몰래 을 마셨다는 이유로 퇴교한 것이다. 사카이 사부로의 자서전 '대공의 사무라이'에는 이런 식으로 사소한 규정 위반에도 "정신머리가 썩었다!"라면서 퇴교 시킨 사례들이 다반사였다고 나온다.

그가 졸업한 츠치우라 해군 항공대의 경우 1500명이 지원해 70명이 합격했는데, 10개월간의 훈련 기간 중 45명이 탈락하여 조종사가 된 사람은 겨우 25명뿐이다. 이 정도면 조종사가 아닌 장인을 키우는 수준이다.

태평양 전쟁 발발 시 일본 해군은 평균 650시간, 육군은 500시간의 비행 시간을 경험한 우수한 조종사가 3500명이나 있었다. 그러나 진주만 전투 같은 일방적인 대승에 55명의 조종사를 잃었는데 이 정도만 해도 인력 손실이 부담될 정도였다. 그리고 이후 몇 번의 전투만으로 해군 조종사 대부분을 날려먹고, 이후 급하게 양산한 초보 조종사들로 메꾸게 된다.

당연히 전쟁이 거듭되며 조종사는 죽어나가고 필요한 비행기 숫자와 조종사 숫자는 계속 늘어났고, 모자란 조종사 수요를 맞추기 위해 이런 혹독한 선발 기준은 갈수록 낮아진다. 1943년 이전: 700시간, 1943년 이후: 500시간, 1944년: 275시간, 1945년: 90시간이다. 2년 사이에 훈련 시간이 1/8 정도로 급감한 셈이다.

미드웨이 해전필리핀 해 해전 등을 거치며 숙련된 조종사를 대량으로 잃은 뒤에는 반대로 비행기 이륙하고 착륙할 줄만 알면 죄다 전선에 투입할 정도로 선발 과정이 날림이 된다. 이 시기에는 사카이 사부로가 자신이 비행학교에 있을 때 군복 단추 따위로 퇴교 당한 아까운 동기들이 다수의 일선 조종사들보다 더 뛰어난 조종사였다고 회고할 정도가 된다.

그러나 선발 과정이 비교적 양호할 때도 교과 내용 중에는 비행과 아무 상관 없는 검사수업 등이 있었다. 20여 명을 일렬로 앉혀놓은 뒤 비행기로 이륙한다고 생각하고 뛰어보라며 훈련생을 서전트 점프로 날게 만든다는 황당한 과목도 당당히 정식 훈련 과정으로 있었고, 훈련생에게 행하는 신체 검사 중에는 손금골상학 검사도 있었다(사카이 사부로의 자서전에서 인용).

14. 자살 특공

일본 육군에 반자이 돌격대전차총검술이 있다면 일본 해군에는 카미카제, 후쿠류가 있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고. 그리고 카미카제를 해군만 했다고 아는 사람이 많은데, 일본군 육군 항공대도 했다. 단적인 예로 카미카제용 무기 중 하나인 Ki-115 츠루기. 이건 해군이 운용한 MXY-7 오카와 달리 육군과 해군이 공동으로 개발한 자폭 전용 항공기다. 참고로 저 기체를 육군에서는 츠루기(劍, 검)라 불렀으나, 해군에서는 토카(藤花, 등나무 꽃)라고 불렀다.

한편 초반에 뜨거운 맛을 본 미군 사이에서는 일본군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슈퍼맨, 정글의 스페셜리스트라는 인식이 컸지만 수기나 포로들의 고백을 통해서 '이놈들도 인간이구나'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물론 미군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일본군의 저항은 그야말로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이어진 덕분에 미군은 가면 갈수록 엄청난 화력을 쏟아부었고, 결국 그것은 일본군의 피해를 늘리는 원인으로 작용한다.

일본군이 어찌어찌 반자이 돌격으로 미군의 진지에 돌입하는데 성공한 데다, 또한 운 좋게 미군이 일본군과 별반 다를 게 없는 무장을 한 상태였더라도 일본군이 후나사카 히로시가 아닌 이상 육박전으로 돌입하면 미군들이 평균적으로 일본군보다 체격이 더 좋았고, 더 잘 먹고, 훈련 수준도 뛰어나 주먹질과 야전삽만으로도 칼을 든 일본군을 쉽게 제압했다. 심지어는 군도를 든 일본군 병사가 미군 진지를 야습했는데 오히려 맨손의 미군 병사에게 멱살 잡혀서 내던져졌다는 극단적인 실례까지 있다. 오히려 미군이 야밤에 반자이 어택을 펴서 일본군 진지를 날려버린 적도 있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일본군의 정식 작전 교리가 '미국, 영국 놈들은 겁쟁이. 작전 계획을 바꾸려는 놈들은 참모감이 못 됨. 닥치고 착검돌격. 일본은 신이 지켜주는 나라다. 근성으로 어떻게든 된다!'였다.

참고로 이 항목은 전술한 '문제 많은 인사제도'와 내용이 연결된다. 이유인 즉, 문제 많은 인사제도 항목에서는 전투기 조종사도 계급을 이등병으로 주는 얼척 집나간, 속된 말로 '개지랄'을 하고 있는데 그들의 용도가 자살 특공이기 때문에 계급을 저렇게 준 것이다. 한 번 쓰고 버릴 인원들에게 장교 계급은 아깝다고 판단한 것이다. 기껏 훈련한 군인과 값비싼 전투기의 용도가 고작 1발의 탄환에 불과했던 것이다.

현대까지도 이러한 자살성 공격이 일본인들에게 로망 같은 걸로 남아 창작자의 성향과 무관하게 대중매체에서 이러한 자살성 공격이 묘사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가장 적나라한 사례가 애니메이션 콕핏.

15. 전투원과 정신력만을 강조

군인정신력보다 물자가 더 중요하다는 발언을 하는 것 자체가 반역으로 간주되고, 기술자 등을 특별 취급하는 것은 장병들의 사기를 떨어뜨릴 수 있다고 받아들이는 판국이었다. 그래서 물자, 기술자, 연구원, 지원 인력 등이 필요한 여러 부분에서 뒤쳐졌고 그 결과 수많은 전투의 패배를 불러왔다. 일본군에도 이러한 문제를 인식한 사람들이 있었지만 전투원만을 우대하는 문화 때문에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뭐 하나라도 개선해보고 싶어하고 바꿔 보고 싶어하면 고급 장교들은 상명하복을 하지 않는 위험분자로 간주되어 예편, 나머지는 구타 당할 뿐이었다. 정신력 강조로 인하여 전쟁 역사상 가장 또라이 같은 작전인 반자이 돌격이 나오게 되었으며, 말 그대로 "텐노 헤이카 반자이(天皇陛下万歳, 천황 폐하 만세)"만 외쳐대면 적군이 쫄게 된다는 아주 어이가 없는 짓거리였다. 당연히 병력 손실은 심각.

미국의 생산력의 10%도 안 되는 일본은[30] 부족한 자원과 인력을 최대한 관리하고 효율적으로 사용해도 장기전이 힘든 상황인데, 오히려 정신력으로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다는 헛소리를 하며 엉망인 장비조차 제대로 지급하지 못했다. 현실은 냉혹한 법, 설령 병사 개인의 자질이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제대로 된 장비가 없으면 전투 효율이 떨어지며, 보급이 충분하지 않다면 치열한 전투 후 파손된 장비와 부족한 탄약, 굶주림, 부상 등으로 인해 급속도로 전투력이 감소할 수밖에 없다. 한 마디로 가지고 있는 것을 제대로 활용하기보다는 아무 생각 없이 모두 털어넣은 것이다. 제1차 세계 대전독일 제국이 물자를 효율적으로 쥐어짜서 항복할 즈음엔 1주일치밖에 안 남은 것과 대조된다.

이렇게 비효율적인 물자 관리로 전투기가 큰 피해를 보았다. 갖고 있던 주력기 A6M 제로센은 물론이고 이후 겨우 뒤늦게 개발된 신형기들이 많은 피해를 입었다. 카미카제 작전으로 남아나지 않던 파일럿들까지 희생시켰으니, 일본 패망의 가장 큰 결정적 원인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육해군의 다른 병과들 역시 생산과 보급을 등한시한 전략으로 전투력이 떨어지고 심각한 인명 피해를 입었다. 육군은 무타구치 렌야임팔 전투, 해군은 지속적인 보급을 경시하고 도박이나 다름없는 함대 결전 사상에 찌들어 써먹지 못한 야마토급 전함이 그 사례들이다. 육군의 임팔 작전은 보급과 장비의 부족으로 제대로 싸우지도 못한 병사들을 정글에서 희생시켰고, 해군의 야마토급 전함은 보급 능력 부족으로 지속적인 전투가 불가능해 결국 항구에만 머물러 야마토 호텔이란 멸칭이 붙기도 했다. 야마토급 전함을 항공모함으로 개조한 시나노도 역시 유지 보수 능력과 숙련공의 부족으로 빠듯한 건조 기한을 맞추다 보니 결국 부실공사를 하게 되었다. 어뢰 피격 시 내부를 차단하는 격벽 등의 공사 자체가 부실했기 때문에 잠수함의 어뢰 피격 후 우왕좌왕하다 함재기 한 번 제대로 못 날려보고 침몰한 것이다.

일본인들이 생산하는 물자는 전쟁이 길어질수록 질과 양 모두 하락하기만 했다. 결국 무기는커녕 쇠파이프라도 제대로 찍어내는 게 용할 지경에 이르게 된다. 총력전에서는 무엇보다도 전쟁 물자와 식량, 연료 등의 필수적인 요소의 생산을 유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데 이에 실패한 것이다. 영국이나 미국은 정밀 기계와 표준화품질관리, 그리고 숙련공을 징병하지 않고 방위산업체에 근무하게 한 반면 일본은 세 조치 모두 반대로 했기 때문이다. 일본군은 숙련공들을 군인으로 징집한 뒤 그 자리를 정신대 여학생, 조선인 징용공들, 외국인 포로 등으로 메웠다.

2차대전 당시 남성들이 대량으로 징병되면서 빈 자리를 비숙련 여성 인력으로 채우는 것은 전세계적으로 드문 일이 아니었다. 여성운동이 활발해진 게 이 당시의 여성의 사회 진출 때문이라는 설도 있을 만큼 보편적이었다. 하지만 영국이나 미국은 정밀 기계와 표준화된 품질관리 덕에 미숙련된 여성 인력을 동원해도 일정한 품질의 제품을 만들었다. 1인당 자본 투입량이 월등하다면 미숙련 노동력으로 양질의 제품을 대량생산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애초에 마르크스공산주의 도래를 예견하면서 제시한 근거 논리가 이렇게 자본 투입량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노동자본은 가치가 하락하여 결과적으로 근로 대중들이 받는 월급만으로 다 소화 못할 엄청난 양의 잉여 물자가 넘쳐나 분배의 패러다임이 바뀌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일본은 공업 분야에서 표준화된 품질관리가 불가능해서 숙련공의 중요성이 대단히 높았다. 일본은 숙련공의 세심한 마무리로 품질이 관리된 만큼 숙련공의 부재는 물자의 품질과 양에 바로 타격을 주는 요인이었다.

게다가 자체적으로 만들어내는 공작 기계의 품질은 유럽 기준으로는 저급품이었기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원래 정상적인 너트육각형인데 너트도 조악하게 만들어서 오각형 볼트, 너트(숫 나사, 암 나사) 같은 것이 정식 출고된 장비에 다닥다닥 붙었다. 오죽하면 독일에서 수입한 공작 기계를 적재한 공작함 아카시의 작업 능률이 국산 공작 기계가 주류인 본토 해군 공창보다 훨씬 좋았을까? 그래서 아카시가 격침되자 일본 해군의 보수 및 보급 능력이 격감했다.

사실 제1차 세계 대전 초기에 유럽 각국도 비슷한 삽질을 했지만, 유럽에서는 몇 주 내에 실수를 알아채 기술자들을 공장으로 돌려보내고 오히려 공장주들에게 군인들을 선발해서 일하게 할 권한을 주는 식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 물론 일본에서는 몇십 년이 지나도 그런 거 없다. 1차대전 초기에는 유럽 각국 정부가 모두 전쟁이 단기간에 끝날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에 생산에 신경 쓰지 않았을 뿐이며, 몇 주가 지나면서 전쟁이 장기화되고 소모적으로 변한 것을 깨닫고는 곧바로 본격적으로 생산량을 높이기 위한 조치를 취한 것이다. 그러나 일본은 이미 장기화된 소모전을 치르고 있는 상황에서 저런 삽질을 했다.

그와 달리 미국은 전선에 나와있던 수십만 명의 장병이 아닌, 본국의 공장에서 일하던 수천만 명의 시민이 엄청난 양의 전시 물자를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엄청난 물자를 토대로 장병들이 막대한 전과를 올릴 수 있었던 것이다. 당연히 미국이 올린 전과의 밑바탕에는 하루에도 몇 천발의 포격을 몇 주일씩 퍼부을 포탄, 항공 지원, 용감하게 전진하는 병사들을 지원해 줄 신뢰성 높은 전차, 1분당 일본군의 몇 배 이상의 총탄을 뿜어내는 일선부대에 계속 지급되는 탄약과 병기, 식량, 각종 부품, 의약품의 보급과 후송 지원이 있었다. 그리고 미국의 보급 능력은 체계적 생산 관리에 기반한 대량생산과 일선의 의견이 반영된 정책, 숙련공과 연구원을 우대하는 문화가 있어서 나올 수 있었다.

일본군은 전투원만을 우대하고 비전투인원을 무시하는 성향 때문에 라바울에서 철수할 때 전투기만 파일럿과 함께 날아가버리고 정비 인원은 그냥 방치했다. 물론 이때 현실적으로 정비원들을 철수 시킬 수단이 별로 없었던 것도 사실이기는 하다. 하지만 전설적인 에이스 파일럿 에리히 하르트만의 일화에 따르면 전황 악화로 포위된 비행장에서 탈출할 때 전투기의 무전기 등 비행에 필요 없는 장비를 버리고 생긴 공간에 정비병들을 태워 이륙하여 무사히 탈출한 일화가 있다. 게다가 애당초 저 지경까지 간 것 자체가 여차하면 정비원들은 내버려두고 가도 된다는 암묵적인 인식 때문이었다. 덕분에 대량의 정비원이 전쟁터 한가운데 고립돼서 전투가 끝난 후에 고스란히 포로가 되었기 때문에 일본군은 얼마 지나지도 않아 숙련된 정비원이 부족해서 고생했다.

게다가 정비병이라고 하니 전문성이 낮아 보이지만, 일본군은 극도로 까다로운 과정을 담은 조종사 교육의 낙오자들을 정비병으로 육성했기 때문에 이들은 급하면 약간의 가르침만으로 바로 조종사로 사용이 가능한 수준의 고급 인력이었다. 제대로 된 전투기 하나를 만드는 데는 10개월이 들지만, 제대로 된 조종사를 양성하는 데에는 10년이 걸린다는 말이 있다. 이런 사람들이 육성되는 수마저 한계가 있었음을 감안한다면 답이 없다. 이런 막장 사례는 나열하자면 끝이 없는데, 이에 대해 일본 해군의 에이스 사카이 사부로가 자서전 '대공의 사무라이'에서 개전 전 일본군이 조종 교육생 과정 중 아주 사소한 행위마저도 군기 위반으로 간주하고 퇴소 시키거나 다른 특기를 부여해 전용한 사람들을 제대로 써먹었다면 전쟁 후기의 조종사 부족 문제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렇게 초반에 유용한 인원들을 허무하게 날려버린 결과 생산 능력과 정비력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전시에 미숙련 노동자를 다수 공장에 투입해서 공장 인원이 8배 증가하는 거야 타국에서도 있던 일이고 처음엔 운용이 힘들어지지만 곧 미숙련 노동자가 숙련까지는 아니어도 중간은 하는 수준으로 능력이 향상되므로 생산성이 올라가고 생산량도 늘어나는 것은 2차대전 중의 기본 중 기본이었다.

그런데 일본의 경우에는 패전 5개월 전인 1945년 3월 9일의 도쿄 대공습 이전까지는 둘리틀 특공대 같은 일부 사례를 제외하고는 제대로 공습이 오지도 않았고, 공습이 시작되더라도 제트기류 때문에 투하한 폭탄이 모조리 빗나가서 미국의 공습이 일본 민간인의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될 정도로 공습 피해가 없다시피 했다. 생산 시설도 멀쩡하며 숙련공도 그렇게 많이 줄지는 않았는데 생산량이 떨어지고 불량품이 다수 발생하며 그나마 만든 물건도 현지 부대에서 정비병이 재분해해서 쓸 만한 부속을 모아서 재조립하는 사태가 발생하게 된다. 1942년부터 1945년까지 3년 동안 영미 연합군의 융단폭격을 맞으면서 독일 본토 항공전을 치른 나치 독일이 1945년에 도달해서야 생산품의 품질이 극도로 떨어진 것과 비교하면 천지 차이인 이유가 있다.

애초부터 유럽 열강에 비해 물건을 대강 만들어서 숙련공이 세심하게 수정한 다음에 납품하는 방식이었으니, 비숙련공이 다수 생산 라인에 참여하면서 숙련공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수정해야 할 분량이 늘어난 게 문제였다. 덤으로 비숙련 노동자가 중간 수준으로 숙련하는 속도도 바닥을 기었다. 이러니 공업 규격이 있어도 소용이 없다시피 했고 개발자들이 수제로 만든 프로토타입 병기가 양산품보다 성능이 우월한 웃기지도 않는 사태가 발생한다.

이런 것을 해결하려면 평소에 숙련공을 많이 육성해야 하는데, 단기 결전에만 매달려서 개전 초반에 숙련공을 엉뚱한 곳에 써먹어서 숫자를 줄인 일본이 대책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나마 숙련공이 징병이 덜 된 것이 일본의 중구난방식 징병 체제의 허점을 개인별로 몰래 뚫은 것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피해가 더 클 수도 있었다.

결국 늦게나마 식민지 사람들까지 이용하기로 하고 2차대전 말에 일본은 조선에서도 군용 항공기 생산을 하도록 했는데, 이 당시 준비 과정을 보면 항공기 정비 생산을 위해 모집된 인원들은 징용 등에서 면제되었다. 또 전시였음을 생각할 때 상당한 기간인 2개월에서 1년 정도의 장시간의 교육을 일본의 항공기 생산 업체에서 받도록 상당히 배려했다. 그러나 애초에 본국 시민들보다는 의욕이 적을 수밖에 없는 식민지 사람을 썼다는 것 자체가 문제였고, 식민지 사람들의 교육 수준이 더 낮았던 덕택에 육성 속도가 일본 본토 주민보다 더 늦었으니 이미 때가 늦었다.

정비병의 경우에도 뒤늦게서야 필요성을 인정하고 찾았으나 대부분이 죽거나 구할 수 없는 곳에 고립되었으므로, 미군이 개구리 뜀뛰기 전략으로 공략 안하고 넘어간 섬에 있는 비행장 같은 곳에 배치된 정비병을 일본 잠수함을 파견해서 구출했는데 그 숫자가 100여 명을 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니 정비병 부족도 해결이 불가능했다.

이렇게 답 없는 일본의 생산 체제는 결국 일본 본토 공습으로 딱 5개월소이탄을 이용한 저공 야간 공습을 사용해서 커티스 르메이가 끝장을 낸다. 여기에는 미 해군의 함재기 폭격과 미 전함의 함포 사격도 함께 했다.

16. 후방상황

이들은 전쟁에서 패하면 어떤 결과인지, 혹은 자기들이 틀렸으면 어떤 결과가 나오나 따위는 신경조차 쓰지 않은 인간들이었다. 그들은 패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도록 스스로를 세뇌 시키기에 이르렀다. 정신승리의 예시.

전세가 기운 후에는 군부나 고위 관료들도 일본이 전쟁에서 이긴다는 건 이제 계란으로 바위치기가 됐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패배에 대한 언급을 하는 것은 금기로 취급했기 때문에 논의와 언급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나마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하려고 내세운 논리가 일단 국지전에서 승리한 다음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종전 협상을 유도한다는 거였다. 문제는 일본이 내세운 그 논리란 것이 선제 공격을 강하게 날리면 상대가 겁 먹고 협상 테이블에 나오리라는 것인데, 그저 일본 본인들의 희망사항에 불과하다는 거다. 이미 태평양 전쟁 발발 전에 총력전 연구소에서도 이런 사유를 내세우면서 정 전쟁을 벌이겠다면 무조건 장기전을 각오하라고 했다. 물론 이 의견은 기각당했다. 덤으로 선전포고도 없는 기습으로 진주만 공습으로 미국에게 타격을 주고 시작하면서 미국을 분기탱천하게 한 시점에서 외교적 수습의 길을 막아버리는 자충수까지 작렬해버렸다.

이래놓고 남방작전 등으로 초반의 전과가 좋으니까 외교적 수습 같은 것은 그냥 머리 속에서 지워버리고 전선을 실컷 늘리기만 하면서 그냥 현 상황이 유지되기만 바라는 식으로 행동하다가 미드웨이 해전을 시작으로 슬슬 밀리기 시작하면서 방어전에 돌입했으나, 이 때도 포기해야 할 곳을 알아서 포기도 못 하고 다 쥐고 있으려다가 정예 병력이 라바울 같은 먼 곳에 고립 당하는 최악의 사태를 만들어서 전황이 악화된다.

이런 식으로 상황이 나빠지자 군부나 고위 관료 모두 종전에는 입을 다물고 1억 총 옥쇄까지 부르짖으며 총력전을 주장했다. 그러나 총력전이 뭔지 몰랐던 그들은 귀중한 인적 자원만을 모두 소비한 채 자멸하였다.

뿐만 아니라 전쟁하고 전혀 상관 없는 일반 일본 국민이나 당시 일본 내 식민지 출신이었던 조선인, 대만인, 점령지의 중국인 등을 포함한 엄청난 숫자의 민간인들이 고위층들의 이러한 태도 때문에 억울하게 희생되었다. 그 예로 오키나와 전투에서 오키나와 사람들은 엄청난 희생을 치르게 되는데, 이 전투에서 많은 민간인이 참전을 강요 받고 희생되자 미국은 일본 본토에서도 이러한 일이 연속적으로 일어날 수 있다는 생각에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올림픽 작전을 계획했다.

이런 상황에서 평소에 해상 호위나 통상 파괴전을 등한시한 결과 해상 보급로가 전쟁 중반부터 점점 막히면서 일본 본토에 자원이 잘 안 들어오게 되고 생산력이 크게 떨어지게 되었는데, 뒤늦게 여러 가지 꼼수를 썼지만 도통 해답이 안 나왔다. 대표적으로 연료가 떨어져가자 정어리 기름을 윤활유로 쓰고, 송근유를 연료로 쓰는 상황이었고, 정작 쓰겠다고 만들어놓은 송근유마저도 원유를 20만 kL나 비축했으나, 하필 폭격 때문에 500kL 정도밖에 정제할 수 없었다고 한다. 또한 정제한 송근유 역시 조악한 품질에 불과해서 전후에 남은 양을 미군 지프에 실험 삼아 넣으니 지프가 고장났다고 한다.

17. 숭숭 뚫리는 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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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호화 기계 B 형(퍼플)의 미국 복원품

일본은 전쟁 전 독일에니그마를 베낀 '암호화 기계 B 형'을 각국 대사관과 본토에 두고 최고위 암호를 만드는 데 사용했다. 97식구문인자기(九七式欧文印字機: 유럽 알파벳을 쓰는 97형식의 타자기)라 불리던 '암호화 기계 B형'은 에니그마보다 우수해서 에니그마의 약점인 반사판 장치가 없었다. 덕택에 독일에서도 이 기계의 암호를 끝끝내 못 풀었다.

서방측은 일본 최고위 암호인 97식을 뚫기 위해서 97식에 퍼플(PURPLE)이란 암호명을 붙이고 해독하는 데 어떻게든 힘을 기울였다. 결국 전직 유전학자 윌리엄 프레더릭 프리드먼을 중심으로 SIS1930년대부터 연구를 거듭한 끝에 이들 휘하에 있는 프랭크 로렛이 퍼플을 뚫는데 성공하고 여기에 Magic이라는 코드명을 붙인다. 게다가 이 암호를 뚫기 위해서 아예 퍼플을 상상해가며 위 사진 같은 모조품을 만들었는데, 나중에 1945년에서 1952년 사이에 찾아낸 퍼플 원본을 미국에 가져와 비교해보니 놀랍게도 짝퉁 주제에 연기가 좀 나고 조잡했다는 걸 빼고는 원판과 거의 비슷했다.

덕분에 태평양 전쟁 때 미군은 맵핵을 켜고 전쟁을 하는 상황이었다. 당장 진주만 공습 직전 일본은 미국 대사관에 선전포고문을 보냈고, 이후 미국도 일본과 동시에 일본 대본영이 보낸 선전포고 암호문을 해독했는데, 벌써 진주만에 폭격을 맞은 뒤였긴 했지만 일본 대사관보다 먼저 해독은 했으니[31] 전보 내용을 다 알던 미국 쪽에선 일본 대사가 공습 이후에나 선전포고를 한 점을 비꼬아 비난을 실컷 퍼부었다. 그래서 일본은 제대로 된 선전포고를 하지도 않았고 최후통첩 수준의 문서를 그것도 제대로 전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전범 재판 때 가중처벌을 받는다.

이후 미국이 아직 쇼 미 더 머니를 덜 시전했던 미드웨이 해전 때는 일본군이 AF를 공격할 거라는 상세한 계획까지 파악했고, 암호 해독반의 지략으로 일본군의 목표가 미드웨이인 것을 알아낸다. 그들은 공격 목표가 AF라는 것을 파악한 뒤 AF가 정확히 어딘지 알아내기 위해 공격이 예상되는 미드웨이에 '이 부족하다'는 희대의 미끼를 던졌고, 거기에 일본군이 '적 AF에 물이 부족하다'라는 송신을 하여 미국이 일본의 공격 목표를 파악할 수 있었다. 이후 빈사 상태의 요크타운을 간신히 수리하는 등 미드웨이 방어에 전력을 집중했고, 결국 일본군 항공모함 4척을 용궁으로 보내버렸다. 거기에 연합함대 사령관인 야마모토 이소로쿠솔로몬 제도 시찰의 목적지와 도착 시각을 알아내서 P-38 라이트닝을 보내 G4M에 타고 있던 이소로쿠를 벌집으로 만들어 버렸다. 전후 의회에서 벌인 조사에서 조사단은 암호 해독이 전쟁을 몇 년 앞서 끝낸 주역으로 평가하고 이를 계기로 국가암호전담기관인 NSA가 만들어지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미군이 푸는 데 가장 어려움을 겪었던 것은 일본군이 머리를 짜내 고안해낸 암호가 아니라 일반 시민들이 쓰던 가고시마 사투리(가고시마벤)였다. 가고시마 사투리는 독일에서 잠수함 U-511(일본 제식명 로500)을 도입할 때 처음으로 사용되었으며, 당시 미군에 있었던 가고시마(가지키) 출신 2세 데이비드 아키라 이타미가 해독하였다. 이에 맞서 미군도 나바호족 원주민들을 무전병으로 써서 적군이 감청해도 못 알아듣게 했다. 영화 '윈드토커'를 보면 나온다. 한국도 6.25 전쟁 당시 수 차례 무전에 제주도 사투리를 사용한 바 있다. 이렇게 사투리를 포함한 소수 언어를 사용하는 건 상당히 효과적일 수밖에 없다. 어차피 사투리건 소수민족의 언어건 화자가 소수라서 평시엔 굳이 배울 필요성을 못 느끼고, 전시에도 그런 사람을 구하기가 쉽지 않다. 설령 감청되더라도 다른 사투리나 다른 소수 언어를 찾으면 그만이다.

일본군은 야전 암호 관리는 상당히 허술해서 일본도 자신들의 97식 암호가 뚫린다는 걸 어느 정도 눈치 채고 있었지만, 일본군은 "양키놈들이 우리 거 읽고 있다는 의심이 드니까 조심해~!"라고 전문을 보내고 암호 기계에 군사 기밀이라는 에나멜 딱지를 붙이는 것 말고는 아무런 조치도 안 했다. 앞서 말했듯 자기도 못 깨고 독일도 못 깨니 안심한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로 저런 짓을 한 이유는 자기네 일본어가 엄청나게 어려운 언어이기에 코쟁이들은 절대로 못 풀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지만, 불행히도 이건 엄청난 착각이었다. 이미 미국에는 재미 일본인들이 바글바글대고 있었으며, 진주만 공습 이후 오히려 적극적으로 미군에 입대해 100대대처럼 유럽 전선에서 활약하기도 했다. 재미 일본인들의 경우 오히려 다른 미국인들보다도 더 적극적으로 나서서 전쟁에 참전하려 했는데, 당시 진주만 공습에 대한 미국 국민의 여론이 상상 이상으로 험악했기 때문이었다. '독립 이후로 단 한 번도 영토를 공격 받은 적이 없는 미국'이라는 이미지가 손상된 미국 국민들의 자존심은 어마어마했는데, 일본은 선전포고도 없는 기습으로 그 자존심에 제대로 스크래치를 낸 것. 차라리 같은 백인 국가가 그랬다면 모르겠으나, 동양인의 섬나라가 미국 영토를 공격했다는 사실은 인종차별백인우월주의가 팽배하던 당시 미국 국민들에게 한없이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또 가뜩이나 만주국 수립과 중일전쟁을 계기로 미국에서 일본에 대한 감정이 점점 안 좋아지는 상황이었는데, 진주만 공습을 계기로 미국 전체에서 'Kill more Japs!'가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재미 일본인들은 진주만 공습으로 인해 미국 내에서 유형, 무형의 차별을 받게 되었고, 이런 인식을 개선하기 위해서라도 자진해서 일본을 상대로 싸울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현 일본의 환상과 달리 대니얼 이노우에를 비롯한 재미 일본인 출신의 참전용사들은 현 일본 우익과 우경화에 대한 감정이 상당히 좋지 않으며, 일본의 로비에도 불구하고 번번히 일본의 우경화를 막으려고 하는 편이다. 게다가 이들을 지휘했던 사람 중 한 명이 한국계 미국인이니 더더욱 좋게 보일 리가 없다. 이는 제주 4.3 사건으로 제주도가 소위 '빨갱이 섬' 취급을 받자 제주도의 젊은이들이 오명을 씻고자 상당수가 자원해서 해병대에 입대했고, 결국 6.25 전쟁 당시 제주도 출신 장병을 통신병으로 배치되어 제주도 사투리로 감청하는 북한군을 곤란하게 했었던 사례와 꽤나 유사하다.

거기다가 미군은 재미 일본인에게 전혀 의존하지 않고 일본어 통역 장병까지 손수 양성해 1년도 안 되는 기간에 수십 명에서 1만 명으로 늘렸고, 이렇게 양성된 일본어 통역장교들을 몇 명씩 전방사단에 배치했다. 모든 군대는 동맹군은 물론 적군의 언어를 해독해야 되기 때문에, 당연히 동맹군의 언어 외에도 적국의 언어를 배운 통역 장병을 양성하는 것이 상식이다. 현재 한국군어학병 중에서는 영어, 중국어, 러시아어, 일본어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당장 미군 역시 해당 작전 지역의 언어를 교육하는 것에 많은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 이 때문이다. 암호는 기본이지만 작전 지역의 대민 업무를 위해서라도 필요하다. 더 웃긴 건 정작 일본군에서는 태평양 전쟁 같은 전시 상황에 적국어를 배우거나 구사하면 간첩이나 반역으로 처벌을 받는다고 했었다는 거다.

암호책 같은 것은 없어져도 걍 없어졌다라 치고 신경 꺼버릴 정도로 관리가 상당히 허술했다. 뉴질랜드군소해함 HMNZS 키위1943년 1월 29일 과달카날 근해 순찰 중 자기보다 덩치가 더 큰 일본군 잠수함 I-1을 발견하고는 오클랜드에서 외박이나 따자는 생각[32]으로 3번에 걸쳐 충각 공격을 하는 등 다소 무리를 해서 잠수함을 겨우 격침시켰다. 그런데 이 잠수함에는 코드북 및 각종 기록이 있었다. 그리고 HMNZS 키위함의 승조원들은 전원 포상휴가를 얻었다.

보통 이런 암호 해독 문서는 유사시 긴급 폐기하기 위해 겉표지에 납이 있어서 바다에 던지면 돌덩이처럼 가라앉게 하거나, 물을 뿌리면 잉크가 확 번지게 해서 알아보기 어렵게 만들거나, 아니면 기름 먹인 종이에 인쇄를 하여 잘 타게 만드는 등의 조치가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일본군은 기본적인 조치도 게을리 했다. 결국 일본군은 멀쩡한 암호책만 연합군에게 넘겨주었다. 그나마 일부 잠수함 승조원들이 암호책 중 당시 쓰이던 부분만 들고 도망쳤지만, 이미 쓴 거나 나중에 쓸 부분은 남기고 갔기 때문에 당시 쓰이던 암호책 부분도 쉽게 패턴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이를 뒤늦게 알아챈 일본군 측에서 폭격을 가했지만 늦어도 너무 늦었고, 연합군에선 배를 건져 올린 뒤 암호책을 다 쓸어갔다. 그리고 그냥 외박 바라고 잠수함을 격침한 소해함의 함장과 유일한 전사자 1명은 소 뒷걸음질 치다 쥐 잡은 격으로 미군 해군십자장을 받았다. 커먼웰스니 당연히 조지 6세에게서 훈장을 수여 받는다.

또한 암호를 사용할 때도 암호 내용을 평문으로 재전송하거나, 높은 암호라고 준 걸 낮거나 시간이 지난 암호로 전송하거나, 문서에 쓰이는 상투적인 말투까지 그대로 암호화를 하거나 쓸데없는 말까지 모조리 암호화했다. 심지어 어느 병사가 실수로 평문으로 무전을 하자 질책한 것까진 좋았는데... 방금 보고한 평문을 암호로 다시 보고하게 했다. 이런 행위들을 보면 일본군의 암호는 적들을 도와주기 위한 것으로 봐도 무관하다.

물론 일본에서도 대응책을 마련했다. 일단 일본군도 특수 코드북을 만들었다. 이렇게 만든 특수 코드북을 A-GO 작전에 써먹으려고 들고 왔지만, 하필이면 기함에 직격타를 맞아 코드북은 증발하고 이 코드북으로 보낸 모든 전신은 다 무용지물이 되어버려서 끝내 미군에게 패했다. 이 코드북 얘기도 그렇지만 암호를 만들려는 일본군의 삽질은 계속 이어졌다.

반대로 일본군의 암호 해독 능력은 심히 개판이었다. 적국은 일본군 최상급 암호 전문도 해독하는 판국에 일본의 암호 해독실은 미군의 중급 정도의 암호 메시지조차 못 풀었다. M-138-A로 만들어지는 최상급 암호는 아에 건드릴 생각도 못했다. 물론 M-138-A은 독일도 이전의 암호 체계였던 M-94처럼 파훼해 보려고 어떻게든 노력했지만 결국엔 종전까지 못 풀었고, 1960년대까지 살아남았던 체계라 일본군이 딸린다기보다는 제퍼슨 디스크가 시대를 앞서간 암호였긴 했으나 그걸 감안해도 최소한 시도는 해 본 독일에 비해 시도도 제대로 못한 일본의 수준이 더 떨어졌다.

결국 일본군이 해독을 하려고 제일 공들이던 물건은 미 해군에서 가장 낮은 암호 체계로 간주하던 물건이었다. 나중에 이것조차도 못 풀어서 암호 쪽은 GG쳐버리고 그 대신 통신 분석에 힘을 쏟기 시작했다. 심지어 오래되고 푸는 방법도 있던 플레이페어 암호도 못 풀어서 쩔쩔 매는 바람에 어느 한 사람이 살아남아 훗날 미국 대통령이 되었다. 결국 일본군은 전파 위치 탐지와 감청에 집중했고, 어느 정도 공을 세우기도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게다가 이런 짓은 동맹국 나치 독일에게도 본의 아니게 손실을 안겨다 주었다. 사실 암호가 숭숭 뚫려나가는 건 독일도 마찬가지여서 영국 본토 항공전 당시에도 이미 줄줄 새고 있었으나, 역시 끝까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나마 크릭스마리네의 암호는 좀 더 오래 버텼지만 말이다. 당시 주독 일본 대사 오시마 히로시(大島 浩)는 퍼플 암호기로 독일의 현주소를 본국에 보고하였다. 이 중에는 대서양 방면에서 연합군의 상륙 작전을 저지하기 위해 어떤 전략을 할지에 관한 정보도 있었다. 평문이나 다를 바가 없는 비밀 전문을 바탕으로 연합국은 상륙 지점으로 노르망디를 택하였다. 이런 이유로 인해 오시마 히로시는 3국 동맹 결성으로 전범 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아야 할 몸이었으나, 이런 공로(?)로 대신 감일등되어 무기징역을 선고 받는 선에서 끝났다.

여기서 일본군을 위한 약간의 변명을 하자면 이는 연합군이 암호 해독을 너무 잘 한 결과물이기도 하다. 당장 동맹국인 독일의 암호도 영국 본토 항공전 때 이미 줄줄 새고 있었지만, 역시 자신들의 암호가 줄줄 새고 있다는 걸 끝까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나마 크릭스마리네의 암호가 좀 더 오래 버티고 중간에 한 번 방식을 바꿔서 연합군을 엿먹이기는 했다.

일단 일본도 자기들 나름대로는 신경을 쓰기는 써서 난수표를 교체하는 정도의 조치는 취하고 있었다.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격추되었을 때 일본군이 추가적인 근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도 미국이 난수표를 변경한 지 2주도 안 된 암호를 해독할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전에는 미국에서 해독하는 데에만 1~2달 정도나 걸렸었다고 한다. 거기에 암호를 해독하고 있다는 것을 들키는 것을 막기 위한 미국의 치밀한 기만 작전과 추가적인 증거를 확보하려는 자신들의 시도가 실패로 돌아갔다는 점이 겹쳐서 암호가 새어 나가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

물론 미국의 사기적인 암호 해독 능력과 치밀한 기만 작전을 감안하더라도 같은 짓을 계속 하면서도 미국이 계속 비슷한 어려움을 겪을 거라고 생각했다는 점에서는 상당히 부주의했다는 지적을 피하기는 어렵다. 미군은 일본군 쪽에서 아예 암호 해독이 불가능하게 아메리카 원주민들인 나바호족의 언어를 그대로 사용했는데, 이게 일본군 입장에서는 듣도 보도 못한 해괴한 외계어인지라 아무도 해독할 수 없었다.

나중에야 나바호족의 언어라는 걸 알고 나바호족 출신 미 해병대원 하나를 포로로 잡아 해독을 시켰지만, 이 포로의 보직이 하필 암호 통신병이 아니었기에 하나도 도움이 되지 못했다. 미군은 나바호족 언어에 당시 미군이 쓰던 계급명이나 장비를 일컫는 단어들이 없었던 점을 고려하고 해독도 어렵게 할 겸 '잠수함'은 쇠물고기, 대령은 미군 대령 계급장에서 따 온 독수리 하는 식으로 교신을 주고 받았기 때문에 이런 용어들에 대한 교육을 받은 전문 통신병이 아니면 이게 대관절 뭔 소린지 당최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는 일본군이 가고시마 사투리를 사용한 것과 비슷한 전략이다. 외국인을 상대로 사투리를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곳이 없을 테니까... 단지 미군은 정상인이고 일본군은 멍청이였을 뿐이다. 그리고 승리의 여신은 정상인의 손을 들어주었다. 사실 일본어라고 해도 도호쿠벤 등의 다른 방언을 비롯하여 일본어와는 상이한 차이가 있는 류큐어아이누어도 있으니 이걸 사용해도 됐다. 하지만 군사에 대한 무지와 자만에 사로잡힌 일본군은 이런 암호로서 활용이 가능한 방언이나 언어들을 무시하고 어차피 뚫릴 독자 암호만을 계속 고집했으니 이로 인한 결과는 안 봐도 비디오였다.

18. 허위 전과와 정신승리

사실 전장에서 전과가 부풀려지는 것은 항상 있는 일이다. 원래 패전은 책임이 두려워 축소되고 승전은 상을 받기 위해 부풀려진다. 이는 전쟁뿐 아니라 어디에서도 똑같다. 연합군도 개인의 무용담을 통해 여러 명이 한 전과를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전과가 부풀려지며 전후에 누구의 전과가 진짜인가로 법적 공방이 벌어지기도 했다. 소련군의 경우 프로파간다 차원에서 고의로 전과가 터무니없이 부풀려지기도 했으며, 독일 공군이 그나마 전과를 정확하게 적기 위해 철저한 관리를 하긴 했는데 이게 영국 항공전에서 조종사의 과장 보고로 작전이 꼬인 것 때문에 빡친 괴링의 지시로 이루어졌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보통은 전과를 부풀려도 자국민을 선동하기 위한 선전물인 만큼 상층부가 실상을 알고 있으며 국민들을 기만하고 속이는 정도에 그치기 마련이지만, 독재 정권에서는 높으신 분들의 심기를 건들지 않기 위해 조작된 수치가 올라가며 선전 목적으로 고의적으로 부풀려진다는 게 문제고 이건 군국주의를 채택한 추축국 공통의 문제인데, 특히 일본군의 경우 그 상층부들까지도 조작된 수치를 진짜로 믿고 있었다. 그래서 일본의 경우 이런 식의 주작질이 전황 판단에도 영향을 줄 정도로 심각했다.

예를 들어 미드웨이 해전의 경우 일본은 요크타운을 격침시키고 항모 넷을 말아먹어놓고서는 전과 발표를 미군기 120기 격추, 미 항모 2척 격침[33], 일 항모 1척 격침 및 1척 대파, 중순양함 1척 격침으로 발표했다. 이걸 자기들이 전술적으로 이겼다고 발표한 거다.

해군에 심어놓은 스파이 덕에 패전을 육군이 진실을 알았다는, 구 엔하위키나무위키의 해당 문서의 서술과 국내 인터넷 카더라와 달리대본영에 보고 및 육군에게 통보할 때는 정상적으로 보고했으며 향후 수송 및 보급로 안전에 대해 해군과 대책회의도 가졌다. 애당초 미드웨이 해전 당시 상륙 부대부터가 훗날 과달카날에서 첫 증원군으로 소모되었던 육군의 이치키 소좌의 연대 전투단이었으므로 육군에게 패전을 숨기기도 어려웠다.

그러나 미드웨이 해전 이후 대본영이 엉터리 발표를 한 건 사실이다. 오죽하면 대본영발표의 내용이 이 때부터 공식 발표를 거짓으로 함을 뜻하는 관용어가 되었겠는가. 그리고 작전참모 같은 중책을 담당한 경우가 아니라면 영관급 장교도 미드웨이 해전의 패배를 알 수 없을 정도로 패배 사실이 숨겨졌다. 이런 증상은 점점 심해지고 육군과 해군간의 보고도 거짓으로 점철되었다.

이 와중에 오직 히로히토가 대본영에서 덴노용으로 혼자서 받아보는 보고만 그나마 정상적이었다. 그래서 도조 히데키가 히로히토에게 보고를 올리자 히로히토가 자신이 받아보는 자료를 제시하면서 틀린 점을 지적하기도 했다. 일본의 수상 겸 육군대신을 포함한 여러 각료를 겸하는 독재자에 매우 가까운 사람도 제대로 된 정보를 못 받아볼 지경이었던 것이다.

이런 정신승리는 과달카날 전투 패배와 야마모토 이소로쿠 사후, 1943년 여름에 코가 미네이치가 새 연합함대 사령장관으로 임명되면서 더 심각해졌다. 일단 미 함대를 기지항공대로 타격하려던 로호 작전이 미군의 훨씬 더 강화된 방공망에 항공 전력이 싹 갈려나가는 와중에도, 어쨌든 피해를 줬으니 작전은 성공이라는 식으로 물타기를 시도했다. 여기에 1943년 11월경, 미군이 타라와 상륙을 위해 항모 임무 부대를 투입하자 일본 항공대는 미 항모 한 척에 어뢰를 맞춰놓고 적 공모 8척 격침이라는 허위 보고를 올렸다. 이는 코가 사령장관이 미군이 타라와 전투에서 승리하고 돌아가자 일단 미군 기동부대가 격퇴되었으니 이번 함대 결전은 일본의 승전이라는 정신승리를 하게 만든다. 실제로는 전함은 연료가 없어 참가가 불가능했고, 중순은 라바울 기지 타격으로 손실을 입어 수리 중이었으며 항모는 함재기가 충분하지 않았다. 결국 경순양함과 잠수함으로 함대 결전이랍시고 대응하는 추태를 보였지만, 미군 입장에서는 결전이라고 할 것도 없는 수준의 전력이었다.

이 허위 승전의 결과로 일본 육군은 미군이 한동안 중국에 개입할 수 없을 것이라고 오판하여 그간 소련을 상대하기 위한 예비 전력인 관동군을 빼서 중일전쟁에서 확실한 승리를 얻기 위해 투입하였고, 이후에는 도조의 아시아 신질서 구상과 겹쳐 임팔에다 모조리 밀어넣었다. 그리고 1944년 말의 필리핀 방어전을 앞두고 벌어진 대만 항공전에서는 적장이던 윌리엄 홀시 제독으로부터 희대의 드립을 당하기까지 한다.

결국 미드웨이 이후의 일본군은 수뇌들이 자신들의 진짜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책임 회피를 위한 주작질을 스스로 믿게 되었고, 이는 일본이 연합군을 상대로 제대로 된 전략을 짜는 것조차 방해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불태이라 하지만, 적이 어떤 상태인지를 파악하기도 전에 자신이 어떤 상황인지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면서 전쟁을 무슨 수로 이기겠는가?

결국 일본군의 이런 정신승리가 결국 거대한 재앙을 불러오게 된다. 포츠담 선언이 발표된 1945년 8월 1일 시점에서 나치 독일이탈리아는 일찌감치 항복했는데, 일본 제국만은 끝까지 정신승리질을 해가며 개기고 있었다. 이에 미국은 지나치게 강력하다 보니 자기들도 쓰는 걸 다소 부담스러워해서 어지간하면 안 쓰려고 했는데, 신무기 실험도 할 겸 어쩔 수 없이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를 감행한다. 그리고 도시 두 곳이 생지옥이 되고 나서야 일본군의 정신승리가 멈췄다. 3번째 원자폭탄 투하 예정지가 미국은 코쿠라시, 일본은 교토시로 예상하는 막판 중의 막판에서도 이 와중에 일명 '소장파' 군인 일부는 항복을 거부하고 결사항전을 주장하고 있었다. 궁성사건 참고. 그리고 당시 만주에 있던 관동군은 소련군의 만주 전략 공세 작전으로 그냥 갈려나갔다. 결국 옥음방송을 내면서 일본은 항복한다.

상술되었듯이 시대에 뒤떨어진 군사 교육을 한다든가, 야마토 정신이니를 운운하며 물질적, 생리적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단 망언을 지껄이며 자살 특공을 한 것이 군 체제의 모순을 정신승리로 극복하려 한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는 당시 일본군이 너무나도 비대한 권력을 가졌던 것과, 당시 일본군에 만연했던 부정부패가 원인이다. 예로부터 부정한 정권이 자신들을 합리화하거나 비판으로부터 눈을 돌리기 위해 취했던 수단이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 일본군은 그 일환으로 엄숙주의, 공안정국, 복고주의를 내세웠다. 이는 물론 일본 사회든, 군대든 당대로부터 퇴보하는 결과를 불러왔다. 결론적으로 부정한 정권이 자신들의 변명거리로 내세운 정책이 나라를 아주 제대로 말아먹은 것이다.

좀 다른 이야기이긴 하지만 이러한 정신승리 풍조는 민간에도 펼쳐졌는데, 일본 본토 폭격의 영향이 없던 일부 지역은 항복을 인정할 수 없다며 소요 사태를 일으키기도 했다. 마츠에 소요 사건 참조. 브라질의 이민자 일본인들도 제한된 정보 속에서 항복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자기들끼리 맞다 아니다로 싸워 20명이 넘게 죽은 병맛 나는 짓을 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한동안 브라질에서 일본계들은 광신도 취급을 받았다. 관련 글. 그리고 정신승리는 현재에도 이어져서 일본 극우 세력들이 은밀하게 내세우는 슬로건의 주류 사상이기도 하다. 모든 면은 아니지만 다이쇼 로망에도 어느 정도 스며들어 있음은 부정할 수 없다.

19. 병영부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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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일본의 전쟁범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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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일전쟁을 일본 제국에서 일컫던 말. 지나는 중국이란 뜻이며, 사변은 중일전쟁을 사변으로 축소시키려는 일본의 관점이 반영된 표현이다.[2] 스기야마 본인이 적은 《스기야마 메모》에서는 "예정대로 될 것 같은가? 네가 대신일 적에 장제스는 금방 항복할 것이라고 했지만 아직 못하고 있지 않나."(「予定通リ出来ルト思フカ、オ前ノ大臣ノ時ニ蔣介石ハ直グ参ルト云フタガ未ダヤレヌデハナイカ」)라고 나온다. (후지와라 아키라(藤原彰) 외,《천황의 쇼와사(天皇の昭和史)》85쪽).[3] 《최후의 어전회의 : 고노에 후미마로 공식 수기》(最後の御前會議 : 近衛文麿公手記)[4] 2015년 판은 《전후 구미 견문록》까지 합쳐 《최후의 어전회의·전후 구미 견문록 - 고노에 후미마로 수기 집성》(最後の御前会議 戦後欧米見聞録 - 近衛文麿手記集成)"이라는 제목으로 나왔다.[5] 폐하, 고함, 힐책. 스기야마 총장, 말을 잇지 못하다(陛下、励声、御詰問。杉山総長答うるを得ず)[6] 1946년판 수기의 권두 목차에서는 "폐하, 스기야마 참모총장을 힐문"(陛下・杉山参謀総長を御詰問)으로 되어있다.[이미지]
파일:konoe43p.jpg
[8]쇼와사》(昭和史) 1, 박현미 역, 루비박스, 304쪽(원문 356쪽).[9] 전차의 집단운용 자체는 제1차 세계 대전 기간인 1917년에 벌어진 캉브레 전투에서의 연합군으로 전투용 전차 378대를 포함하여 무려 476대의 전차를 동원한 바 있다.[10] 당장 일본 육군의 전차가 바로 그 악명 높던 치하 시리즈였다.[11] 사실 이건 일본의 삽질로 인해서 진가를 발휘를 못했다고 봐야 한다. 야기-우다 안테나 문서 참고. 보면 알겠지만 저걸 만든 사람은 일본인이다.[12] 단, 해당 링크에서 영국 쪽 자료에 오류가 좀 있다. 영국에서 배치한 전투기의 최대 속력을 650km/h라고 했는데 템페스트가 695km/h, 스핏파이어도 720km/h의 속력을 기록했다. 일본의 경우 4식전은 일본에서 테스트 한 결과는 640km/h지만 미국에서 테스트했을 시 680km/h를 기록.[13] 비유하자면, 마치 현대 총력전을 프로 복서간의 타이틀 매치처럼 했던 것이다. 프로 복서 정도 되면 복서라는 전투원 1명에 수많은 세컨드 서포터들이 달라붙어 복서를 지원하고, 양 코너의 경기가 끝나고 승패가 갈리면 세컨드들은 복서의 운명에 따라 바뀐다. 총력전의 개념을 받아들여 국가를 운영했음에도 정작 전쟁의 승패를 단지 전투원들끼리의 1대1 단판 승부에 승리하면 다 먹는 중세 시대 전쟁하듯 치렀던 것.[14] 이 해의 우리나라는 일본에 의해 경술국치라는 비극을 맞은 해였다.[15] 실제로 일본은 러일전쟁 때 무려 7년치 예산을 쏟아부었다. 그런데 당시 러시아는 혁명이 일어나 나라가 어수선해 전쟁을 벌일 여력이 부족해 먼저 을 떼버린 것이다. 러일전쟁이 벌어진 기간이 1년 정도임을 감안해보면 이게 만일 2년, 3년 이상 더 갔다면 일본의 부담은 훨씬 더 컸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번의 상대 미국의 경제력은 당시의 러시아보다도 더 강대했으며, 러일전쟁 당시 일본을 지원해줬던 국가가 영국과 미국이었다는 거다. 한 마디로 자기네들 부담을 좀 덜어줄 여력까지 있던 국가를 상대로 한판 뜨자는 실로 미친 제안을 한 것.[16] 정규 항모 28척 및 나머지 대부분은 경항모 및 호위항모. 카사블랑카급 호위항공모함 50여척 포함.[17] HBO의 드라마 밴드 오브 브라더스에 등장하는 인물 중 하나인 카우드 립턴의 증언을 들어보면 당시 분위기가 어땠는지 잘 알 수 있다. 그가 살던 곳은 인구가 많지 않은 시골이었는데도 입대 심사에 탈락했다는 이유만으로 3명이 자살했다고 한다. 비슷한 시기를 다루는 또 다른 드라마 더 퍼시픽에서도 이 점이 잘 나타난다. 주인공 중 한 명인 유진 슬레지는 폐질환을 앓고 있어 부모가 가지 말라고 만류했는데 이를 무시하고 입대했다.[18] 조선총독부 육군병지원자훈련소 채용규칙 (1940.4.7 개정판) 제1조.[19] 국민정부 시대나 중공 정부 시대 때나 중국의 인구는 극상위권이다(국부천대 당시: 5억 8천만 1위, 2023 현재: 14억 2567만 2위, 대만정부는 2023 현재 2336만 명 57위).[20] 문제는 중화민국과 나치 독일은 동맹 관계였다. 중일전쟁 터져서 관계가 끊어진 것.[21] 조장은 '서무계', 군조는 내무반장이다. 그리고 오장 또는 오장 대우 상병이 내무반의 실세였다.[22] 육군에는 각 병과마다, 예컨데 '보병조전'이나 '기병조전'이라는 조전(전투원칙 및 방법, 군사교련 제식을 규정한 교칙서)이 있고 또 '검술교범' '체조교범' 등 술과마다 교범이 있다. 그 밖에 군대 전반에 걸쳐 '작전요무령' 또는 내무에 대한 마음가짐을 쓴 '군대 내무령'이 있는데, 이들 일괄해서 전범령이라 불렀다[23] 이러한 문화는 현대 일본에도 남아 장관을 뽑을 때 해당 분야의 문외한이라도 상관 없고 실질적 업무는 아랫사람들이 담당하는 것이라는 인식이 있다. 때문에 PC를 만진적도 없고 USB가 뭔지도 모르는 사람이 사이버보안 장관이 되기도 했다.[24] 애초에 후에 이어지는 故殺敵者, 怒也, 取敵之利者, 貨也 이라는 문장이 이어지는데 이 자체가 사실상 적을 치기 전에 적의 자원을 먼저 치라는 의미를 가진 구절이다.[25] 한국군의 사관학교 출신 우대는 어디까지나 진급이 타 출신에 비해 빠르다는 거지 하극상을 용인한다는 말이 아니다. 짬밥 역시 어느 정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쏘가리 따위가 자네가 주임원사인가를 구사했다가는 상관한테 조인트 까일 정도는 된다.[26] 사실 저 시점에선 의회에서 저런 발언에 대해 비판을 할 세력 자체가 없었다. 고노에 후미마로가 총리가 되고 대정익찬회를 만들어 사실상 여당 1당 체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 덕에 저 시점에서 의회는 의제의 타당성을 검증하는데가 아닌, 그저 정부 방침을 선전할뿐인 극장이 된지 오래였다. 그런 환경이니 저런 한심한 소리가 나온것.[27] 나머지 하나는 만주사변의 주역이자 전쟁 초기에 큰 전공을 세웠던 이시와라 간지가 육군대학 시절 '기관총의 가장 현명한 운용 요령은 무엇일까?' 라는 문제에 "기관총을 항공기에 장비시켜 술주정꾼이 걸으면서 소변을 보듯 전방위 화망을 형성해 적 행군 종대에 퍼붓는다"라고 구술한 것.[28] 다만 일본 항공모함이 2척 터진 순간 이미 게임 끝이라 그 워게임을 더 잡고 있을 이유는 없어서 다시 리셋했다고 최근에 밝혀졌다. 그리고 당시 우가키가 말한 3발 소파는 맞긴 맞았다. 다만 그 중 한 발이 크리가 떠서 문제였지... 워게임을 리셋하는데 항의하는 참여자들도 있었으나, 앞서 언했듯이 굉장히 높으신 상관인 참모장이 그러니 그냥 닥치고 리셋하는 수밖에 없었다.[29] 이 유일한 사례가 도조 히데키의 부친 도조 히데노리인데, 이 케이스는 일본육군사관학교 설치 전인 서남전쟁 시기의 일이라 이후 일본군의 진급 병폐와 직접적으로 비교하기는 상당한 무리가 있다. 그리고 히데노리는 이후 일본 육사가 개교하면서 입교, 수석 졸업 후 정식으로 임관했다.[30] 미국의 한 공장의 생산력이 일본과 독일의 전체 생산력보다 훨씬 높을 정도이니 애초에 상대가 불가능했다.[31] 출처 Toland, 『Infamy: Pearl Harbor And Its Aftermath』, 1983.[32] 그때 함장아내가 오클랜드에서 임신 중이었다.[33] 물론 이것은 요크타운이 격침에 가까운 치명타를 맞고도 보수반의 처절한 데미지 컨트롤로 화재를 진압하고서 항행 능력을 복구했기 때문에 일본측에서는 요크타운이 아니라 다른 항모를 발견하고 공격한 것으로 인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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