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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국 제21대 내각총리대신 가토 도모사부로''' | |||
<colbgcolor=#0230AE><colcolor=#c3c965> 출생 | 1861년 2월 22일 | ||
아키국 아키군 오테정 (現 히로시마현 히로시마시) | |||
사망 | 1923년 8월 24일 (향년 62세) | ||
도쿄부 도쿄시 아카사카구 (現 도쿄도 미나토구) | |||
재임기간 | 제21대 내각총리대신 | ||
1922년 6월 12일 ~ 1923년 8월 24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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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 슈도칸[1] 해군대학교 (갑종1기) | ||
작위 | 자작 | ||
정당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
약력 | 제21대 일본국 내각총리대신 제20-24대 해군대신 제7대 제1함대 사령장관 제9대 쿠레 진수부 사령장관 제9대 해군성 군무국장 제2대 해군차관 제8대 제1함대 참모장 제5대 연합함대 참모장 | ||
군사 경력 | |||
임관 | 일본해군병학교 (7기) | ||
복무 | 일본제국 해군 | ||
1883년 ~ 1923년 | |||
최종 계급 | 원수 | ||
참전 | 청일전쟁 러일전쟁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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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해군 군인, 정치인. 제21대 일본 제국 내각총리대신을 역임하였다.2. 생애
1861년 히로시마에서 하급 무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해군병학교와 해군대학교를 졸업하였고, 청일전쟁에 순양함 "요시노" 의 포술장으로서 종군하여 황해 해전에서 활약하였고, 러일전쟁 때에는 연합함대 참모장 겸 제1함대 참모장으로서 쓰시마 해전에 참전하였다. 해전 당시 총알이 빗발치는 상황에서도 안전이 보장된 사령탑에 들어가지 않고 함교 위에서 군인들을 독려한 것으로 유명하다. 또한 자신의 주특기인 포술을 활용하여 러시아 전함을 격침하는 전술과 2인자로써 부하들을 하나로 묶는 리더십을 발휘하는 성과로 승리를 쟁취한 큰 역할을 한다. 그리고 나중에 야마모토 곤노효에의 뒤를 이어 해군 군령부장이자 동기인 시마무라 하야오와 함께 '88함대' 구축에도 앞장 선 인물.그 후에는 해군차관, 구레 진수부 사령장관, 제1함대 사령장관을 거쳐 1915년 제2차 오쿠마 시게노부 내각의 해군대신으로 취임하였다. 이후 그는 데라우치 마사타케, 하라 타카시, 다카하시 고레키요 내각 등 다섯내각(자신의 총리대신 시절 내각까지 포함)에서 계속 해군대신직을 유임하였다. 사이토 마코토에 이어 해군대신 재임 기간은 역대 2위를 기록하고 해군대신으로 근무하던 당시 도고 헤이하치로가 1909년 군령부장 은퇴 이후 해군에 큰 어른으로서 제대로 된 판단을 못하고 쓸데없는 아집을 부리기 시작할 때 적절히 고집을 꺾고, 제압하여 실리를 찾았다. 그리고 뒤에 기술하는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에서 가토 히로하루 등 후배 파벌 즉 후일 함대파의 말도 안되는 주장을 자신이 해군에서 쌓아온 실력과 카리스마 있는 리더십으로 현실성 없는 주장을 제압하며 당시 해군성 최고 1인자로서 권력을 충분히 발휘한 마지막 해군대신으로 평가받는다.
해군력 군축을 위한 1921년 워싱턴 회의에는 일본 제국 수석 특명전권대사로 참여하였다. 회담 직전 하라 다카시 총리는 "국내의 일은 내가 정리하겠습니다, 가토 대신은 워싱턴에서 마음 껏 회담에 임해 주세요."라고 이야기 했을 정도로 신임을 받았다. 참석 당시 각국 기자단에게 '촛불'이라는 별명을 보일 정도로 처음에는 무시당했지만 미국이 주축이 된 군축 방안에 적극적으로 나서서 오히려 "위기의 세계를 구하는 밝은 촛불"이라는 칭송을 받을 정도였다. 또한, 워싱턴 회의 2차 총회에서 국방은 군인만의 전유물이 아니며 민간의 공업력과 무역 등 다양한 이해관계에 얽혀 있음으로 군비만 늘리는건 회의에 참가한 모든 국가를 파국으로 향하는 길임을 제대로 파악한 연설을 통해 참가국 군축에 방향으로 결정짓는 역할을 한다. 이로인해 일본 자국 뿐만 아니라 미국, 영국 등 열강에서 정치와 경제 모두 잘 아는 군인으로 평가받았다.
당시 가토는 러일전쟁의 참전 경험으로 전쟁으로 인한 재정문제가 발생 할 뿐만 아니라 여러 피해 부분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군비 부분에 있어 절대 이길 수 없는 미국, 영국과의 전쟁은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리고 일본의 국력을 기르는 동안 외교 수단으로 전쟁을 방지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임한 것으로 보인다.
해군대신으로 재임중이던 1922년 6월 22일 입헌정우회의 지지를 받아 내각총리대신에 취임하였다.
총리대신 취임 후 |
하라의 후임 다카하시 고레키요 총리는 1922년 내각불일치를 이유로 총사퇴를 결의했다. 본디 다카하시 고레키요가 사임한 것은 개각을 단행코자 벌인 일련의 고육지책이었으니, 즉 하라의 사후 정우회의 총재와 총리대신을 이어받기는 하였으나 다카하시의 천성이 관료 체질이지, 정치가 체질이 아니었던 까닭에 정우회 내 장악력도 떨어졌고, 내각 내에도 나카하시 토쿠고로 문부대신과 모토다 하지메 철도대신, 도코나미 다케지로 내무대신 등 반대편이 많았던 것이다. 나카하시, 모토다, 도코나미 3인은 특히 다카하시가 추진했던 개각에 반대한 '비개조파'였는데[2] 이에 다카하시는 내각 총사퇴를 하여 이런 반대파들을 내쫓고 내각을 새로 구성하여 당시 위태로웠던 다카하시 자신의 당내 장악력을 확고히 할 생각이었다. 자기가 다시 총리로 뽑힐 줄로 알았던 것이다.
그러나 전 총리이자 원로인 마쓰카타 마사요시는 다카하시 내각이 사임하자 기요우라 게이고 추밀원 의장과 의논하고 당시 몸져 누워있던 원로 사이온지 긴모치 전 총리의 양해를 얻어 다카하시의 계산과는 반대로 가토를 추천했다. 군축이 이루어지는 도중에 일본 해군의 반대를 억누르기 위해 해군의 '원맨 대신'이라 불리고 있는 신망이 높았던 가토가 적임자였고, 워싱턴 회의의 수습에도 잘 맞는 인물이었기에 원로들을 중심으로 지지를 받았다. 정우회는 당초의 계산과는 다르게 가토에게 총리직이 돌아가자 반대공작을 펼쳤고, 가토 본인도 끝끝내 고사하여 마쓰카타는 총리 대신 후보 2순위였던 가토 다카아키 헌정회 총재와 접촉하게 된다.
가토가 조각을 못하게 막으면 총리직은 결국 다시 다카하시에게 넘어갈 거라고 생각했던 정우회 측은 이 소식에 당황하였고, 헌정회에게 정권을 줄 수 없다고 하여 황급히 가토 해군대신(해상)에 대한 지지를 선언했으며, 상황이 급변하자 마쓰카타도 다시 가토 해상과 조각논의를 재개하여 결국 가토 해상이 정권을 잡게 된다. 다 된 죽을 못 먹게 된 가토 다카아키는 이 사건 이후 원로의 간택받기를 포기하고 의회주의, 이른바 헌정의 상도를 고집하게 된다.
원로들의 지지로 출범한 내각이었기에 국무대신들은 주로 귀족원 출신, 특히 연구회 소속 의원들로 구성되었고, 정우회 출신은 있었지만 전원이 귀족원 출신이라 중의원 의원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실무는 차관을 중심으로 내각을 꾸려나갔으며, '사무관 내각'이라는 조롱을 듣기도 했다. 경제적 불황 속에서 워싱턴 회의를 이행하는 내각의 특성상 행정과 재정 개혁을 실시하게 된다. 해군의 경우 '88함대' 구축도 포기하고 전함 14척을 폐기, 건조되던 전함 6척도 생산을 중지했다. 육군도 야마나시 한조 육군대신의 이름을 딴 '야마나시 군축'에 의거, 1922년 8월, 1923년 4월 두 차례에 걸쳐 군인들과 군수업 노동자들도 정리해고 되었으며, 병역 단축 역시 시행되었다. 당시 일본에 부담을 주던 시베리아 출병도 기한에 맞춰 철군을 완료시켰다. 군 출신 총리여서 이러한 계획을 정댱 정치인보다 원활히 진행할 수 있었고 이 당시 일본의 재정 부담은 대폭 줄어들어 군비 억제를 통한 재정적 개혁에도 성공했다. 여러 부분의 현안을 처리하는 것도 이미 계획이 짜여져 있었기에 적절히 실무를 처리하는 차관급 대신으로도 유지가 가능했다.
현직 군인 출신 총리의 내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배심법이 통과되어 사법과 무관한 민간인들도 재판에 참석할 수 있었으며, 중의원 선거법 조사회를 설치하는 등 보통선거를 원하는 여론을 경청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불법화되었던 공산당이 결성되자 공산당원들을 무차별로 체포했다.
그러나 가토는 건강이 좋지 않았다. 심지어 화장실 문 너머로 대화했을 정도로 상태가 안 좋았고, 내각 성립을 비롯, 워싱턴 회의 때도 '잔촉 내각' 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얼굴빛이 창백했다고 한다. 1922년 11월 대장암 진단을 받은 후 지속적으로 상태가 악화되어 그 해 12월의 제국 의회 개원식에도 참석하지 못했고, 1923년 8월 24일에 62세로 사망한다.
그가 사망한 뒤 우치다 고사이 외무대신이 총리 권한대행을 맡았으며, 연구회를 중심으로 오카노 게이지로 사법대신을 총리로 옹립하여 정권을 연장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불발로 끝났다. 시행착오 끝에 야마모토 곤노효에 전 총리가 한 번 더 총리직을 맡게 되었으나, 하필 이 공백기간 중에 관동 대지진이 발생했고, 총리의 공백으로 인해 정부의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만약 그가 오래 살아 있었다면 재해 수습이 빨랐거나 조선인 대학살도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뛰어난 능력과 개념에 비해 건강이 받쳐주지 못한 비운의 정치인.
3. 여담
위장이 약한 탓에 건강에 신경을 써야 했다고 한다. 폭식을 하지 않고 소식을 했다고. 워싱턴 군축 회의 때도 약간의 식사를 하자 "예전 포츠머스 회의에 나왔던 고무라 대표가 폭식을 하다가 위장을 나빠져서 일을 그르친 것을 보고 반성하는 의미로 가토 대표는 식사를 줄이고 있다."라고 주장했다. 특히 취임 전부터 건강이 안 좋았는데 치질, 대장염을 앓고 있어서 지인들이 "가토 해군대신이 총리직에 임명 되면 건강을 해친다. 해군대신으로도 충분하지 않나? 제발 원로들과 가토 대신을 설득해달라."라고 할 정도로 우려를 표했다. 심지어 임명 직후에도 "건강은 좀 어떠십니까?" 라고 묻자 "응..."이라고 힘 없이 짤막하게 말했다고.젊은 시절 해군에서 1, 2위를 다툴 정도로 폭주한 애주가였다고 한다. 해군에서 근무 했던 사이토 마코토도 "아침부터 컵에 술을 따라 마시고 일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라고 할 정도로 일본 해군은 음주가 많은 편이었다.
같은 지역 사람을 쓰는 일을 싫어했다. 고향 친구들과 만난 자리에서 그는 "같은 지역 사람이어도 능력의 유무에 따라 기용한다. 고향 사람들은 섭섭하겠지만 공무에 있어 어쩔 수 없다. 공적인 것은 배제하고 내가 사적으로 어려운 자를 도와주는 선에서만 도와준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메이지 시대 당시 사쓰마, 조슈 번의 친목질에서 일어난 폐해를 보고 절대 있어서는 안 될 일이라는 신념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만화를 좋아하던 총리였다. 신문이나 잡지에 나오는 만화를 스크랩해서 보존하며 가족들에게 보여주면서 만화에 대해 평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는 평소 무뚝뚝하고 조용한 성격이었지만 대화를 할 때 촌철살인에 가까운 풍자를 잘하는 편이었는데, 만화에서 보고 배운게 아니냐는 설이 있다.
일본군 해군은 보통 군정권을 담당하는 해군대신과 군령권 담당자인 해군 군령부장 간 완력 싸움이 자주 발생했는데 가토 도모사부로가 해군대신으로 재임하던 시기 해군 군령부장으로 해군병학교 동기이자 러일전쟁에서 같이 활약한 명장인 시마무라 하야오와 둘도 없는 친구 사이라서 두 기관 간 다툼 대신 협력, 제휴가 활발하게 운영되었다.
마지막 일본 제국 해군대장인 이노우에 시게요시가 전후에 평가한 역대 해군대장 1등, 2등, 3등 대장 분류에서 1등 대장은 단 세명 뿐인데 가토 도모사부로와 야마모토 곤노효에, 요나이 미쓰마사다.
메이지 시대, 해군 분대장으로 복무 할 때 파나마 지역으로 군사연습을 하러 갔다. 쓰쿠바 호에서 당직 근무를 하던 도중 갑자기 고래가 출몰하자 허공에 발포를 명령했다. 총성에 놀란 함장이 "왜 지시 없이 발포했습니까?"라고 묻자. "놀라실거 없습니다, 함장님. 바다에서 커다란 괴물이 나와 진로를 방해할 경우 큰 일이 날 수 있기에 녀석들을 보호 차원에서 놀라게 하여 조용히 보내주려고 허공에 대고 쐈습니다." 함장은 크게 웃더니 "함부로 쏘면 안 됩니다." 라는 말을 남기고 허공에 발포하는 것을 허가했다고 한다.
평소 사진을 보면 건강도 안 좋았고 무뚝뚝한 군인의 모습을 보였지만, 기념일에 손자와 함께 찍은 사진에서는 기분 좋게 웃었다고 한다. 그 순간 기자가 잽싸게 촬영해서 그 모습이 신문, 잡지 뿐만 아니라 해외까지 보도 되었다. 손자들에게 편지를 쓸 때는 읽기 편하게 가타카나로 적었다고 한다. 그도 여느 집 할아버지와 다르지 않게 아이들을 좋아했다. 총리에 오르고 나서 후미진 나가타초의 관저에서 사는 것보다 그동안 살았던 조그만 집에서 귀여운 손자들과 함께 사는 게 좋다고 말할 정도로 가족을 좋아했다.
4. 대중매체에서
언덕 위의 구름(드라마)에서 쿠사카리 마사오(草刈正雄)가 연기했다. 실제 인물의 병약하고 초췌한 외모에 비해 배우가 너무 잘생겼다는 것이 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