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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기야마 하지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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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일본 제국 육군기.svg 일본군 삼대오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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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타구치 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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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기야마 하지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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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미나가 교지

<colcolor=#fff> 일본 제국 제26·30대 육군대신
스기야마 하지메
杉山元 | Sugiyama Hajime
파일:sugiyama.1.jpg
<colbgcolor=#b0313f> 출생 1880년 1월 1일
후쿠오카현 코쿠라
(현 후쿠오카현 기타큐슈시)
사망 1945년 9월 12일 (향년 65세)
도쿄도
재임기간 제26대 육군대신
1937년 2월 9일 ~ 1938년 6월 3일
제30대 육군대신
1944년 7월 22일 ~ 1945년 4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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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0313f><colcolor=#fff> 학력 육군대학교 (22기)
약력 제26·30대 육군대신
서훈 내역 금치훈장[ruby(金鵄勲章, ruby=きんしくんしょう)](2급과 4급)
대훈위 국화대수장[ruby(大勲位菊花大綬章, ruby=だいくんい きっか だいじゅしょう)]
군사 경력
임관 일본육군사관학교 (12기)
복무 일본제국 육군
1901년 ~ 1945년
최종 계급 원수
주요 보직 교육총감
북지나방면군사령관
몽골주둔군사령관
일본육군참모총장
제1총군사령관
주요 참전 러일전쟁
제2차 세계 대전
}}}}}}}}}

1. 개요2. 생애
2.1. 출세가도를 달리다2.2. 막장의 시작2.3. 임팔 작전의 결재
3. 후대의 평가4. 사진5. 매체에서
5.1. 영화5.2. 드라마5.3. 게임

[clearfix]

1. 개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 제국 육군 원수. 육군 3장관(육군대신, 육군참모총장, 육군교육총감)을 거쳐 원수까지 된 2인 중 한명이다.[1]

무타구치 렌야의 활약(?)이 너무나도 특출난 나머지 한국에서는 인지도가 낮으나 일본에서는 삼대오물(三大汚物)중 한 명으로 꼽는 패장이며, 중일전쟁을 확대시킨 인물 중 하나이자 태평양 전쟁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까이는 인물이다.

2. 생애

2.1. 출세가도를 달리다

1880년 후쿠오카에서 고쿠라 번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24세에 육군사관학교 출신 엘리트 장교로 임관하여 러일전쟁에 제12사단 예하의 보병 제14연대 제3대대 부관으로 전쟁에 참전했다. 그러나 1904년 10월 8일의 사하 전투에서 얼굴을 다쳤고, 이 부상으로 오른쪽 눈을 크게 못 뜨는 후유증을 얻었다 이 문서 맨 위의 사진만 보아도 왼쪽 눈과 오른쪽 눈의 크기가 확연히 차이가 날 정도다. 그래도 전공을 인정받아 무척 젊은 나이에 영관에 올랐다. 그렇게 러일전쟁 이후 일본 육군의 최대 파벌 중심인 육군대학교을 졸업하고 출세 가도를 달린다.

1910년대에는 찬드라 보스와 접견하여 뒤에 임팔 작전의 동맹인 자유 인도군과의 접점도 있었고, 필리핀 등 인도차이나에서 외교 및 첩보 활동을 하며 착실하게 경력을 쌓아나갔다. 이후 1920년대에는 일본 육군성 항공과장을 지냈으며 청년 장교들이 일으킨 2.26 사건을 진압할 당시에는 육군사관학교 교장으로 군부 세력의 선봉으로 활약했다. 이후 내란을 진압한 공로를 인정받아 육군대신에 올랐다.

육군참모총장, 육군대신, 육군 교육총감이라는 3대 요직을 모두 경험한 엘리트였고 최종 계급은 일본 육군 원수였다.

2.2. 막장의 시작

육군 대장으로 승진한 스기야마 하지메는 하야시 센주로 내각에서 1937년 육군대신으로 취임해 제1차 고노에 내각 때까지 유임했다. 만주사변 당시 육군 차관이었으며, 루거우차오 사건이 일어나자마자 중국은 1개월이면[2] 전역을 정복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개전에 적극 찬동하였다.

하지만 제2차 상하이 사변에서 적잖은 피해를 입으며 상하이 점령에만 3개월을 소진했다. 예비역 중심으로 급히 소집된 일본군은 폭주하여 닥치는대로 학살과 약탈을 자행, 난징 전투로 중화민국의 수도 난징을 함락한 후 난징 대학살 사건을 일으켰다.

독일의 중재로 중국과 휴전을 하려한 트라우트만 공작은 결렬되었고 제1차 고노에 내각중화민국 정부를 상대하지 않으며, 말살하겠다는 고노에 담화를 발표해서 외교 창구까지 닫아버렸다.

일본은 중화민국을 일개 군벌 정부로 얕잡아보고 수도를 함락시켰으니 항복할 줄 알았으나 장제스는 수도를 충칭으로, 주력부대를 우한으로 옮기고 필사적으로 항쟁했다. 일본은 중국인의 저항력을 낮잡아보며 침략을 계속했다. 허나 마지막 대도시인 광저우, 우한이 함락됐음에도 중국의 저항은 계속되었다. 중국의 명목상 2인자 왕징웨이를 포섭하여 괴뢰정부를 수립하여 중국의 분열을 유도한다는 왕징웨이 공작 역시 실패로 돌아갔고 장제스의 권위만 공고화되면서 전쟁은 계속 길어졌다.

스기야마 하지메는 1938년에는 육군대신 직을 사임하면서 다시 군사 참의관을 했다가, 1938년 12월에는 북지나 방면군의 사령관으로 취임하여 산시성의 공략전을 지휘했다. 그러나 전쟁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1941년 9월, 미국의 대일 석유 수출금지 조치로 미국과의 전쟁이 계획되자 고노에 총리로부터 관련 계획을 보고받은 히로히토 천황은 경악하여 참모총장 스기야마와 군령부총장 나가노 오사미를 즉시 소환해서 해명할 것을 고노에에게 지시했다. 부름을 받고 달려온 스기야마는 도조 히데키와 함께 작전을 설명하며 "진주만 공습미국은 3개월이면 태평양의 제해권을 완전히 잃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때 히로히토1928년황고둔 사건에 대해 한심한 보고를 올린 다나카 기이치에게 성질을 낸 이후로 13년 만에 이례적일 정도로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면서 스기야마 하지메의 주장을 논박하는 사태가 벌어졌는데, 현장에 배석했던 고노에가 수기로 기록한 당시의 대화 내용이 참으로 가관이다.
天皇「日米事起こらば、陸軍としては[ruby(幾許, ruby=いくばく)]の期間に片づける確信ありや」
杉山「南洋方面だけは三箇月くらいで片づけるつもりであります」
天皇「汝は支那事變當時の陸相なり。その時、陸相として『事變は一箇月位にて片づく』と申せしことを記憶す。しかるに四箇年の長きに亙り、未だ片づかんではないか」
杉山 (恐懼して、支那は奥地が開けてをり、豫定通り作戰し得ざりし事情を、くどくどと辨明申し上げた。)
天皇「支那の奥地が廣いと言ふなら太平洋はなほ廣いではないか。如何なる確信あつて三箇月と申すか 」
히로히토: 일미 사이에 일이 벌어지면 육군은 어느 정도의 기간 안에 정리할 수 있다고 확신하는가?
스기야마: 남양 방면만큼은 3개월 정도 안에 정리할 생각입니다.
히로히토: 자네는 지나사변[3]당시 육군대신[陸相]이지. 그때 육군대신으로서 사변은 1개월 정도면 정리한다고 말했던 것을 기억하네. 그렇지만 4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아직도 정리가 안 되지 않았나?[4]
스기야마: (몹시 두려워하면서, 지나는 오지가 펼쳐져 있어 예정대로 작전이 불가능했던 사정을 구구절절 변명함)
히로히토: 지나의 오지가 넓다면 태평양은 더 넓지 않은가? 무슨 확신이 있어 3개월이라는 말을 하는 건가?
고노에 후미마로(1946),《최후의 어전회의》,[5][6] 7장, 폐하, 고함, 힐책. 스기야마 총장, 말을 잇지 못하다(陛下、励声、御詰問。杉山総長答うるを得ず)[7] 東京: 時局月報社, p.43(1946)[이미지]/p.901(2015).
(후리가나는 2015년 판, 한도 가즈토시(2004)[9]의 박현미 번역을 일부 수정)

스기야마의 엉망진창의 답변을 들은 덴노가 스기야마에게 질책을 하자, 그는 고개만 푹 숙인 채 아무 말도 못했다. 그러자 해군 군령부총장(軍令部総長) 나가노 오사미가 "일미관계를 환자에 비유하면 수술을 해야만 하는 고비와도 같다"면서 스기야마를 거들면서 일단은 군부에서도 협상을 최우선시하고 있지만 만약에 일이 잘못될 경우 '수술'과도 같은 긴급한 조치가 환자를 살릴 수 있듯이 대책을 준비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일단 군부도 외교를 최우선시하고 있다는 답변을 들은 히로히토는 일단 수긍하고 둘을 돌려보냈고 몇 달 후 일본은 미국과 전쟁에 돌입했다.

이날 히로히토는 태평양을 곧 정리할 것이라는 것 외에 그 많은 섬에 어떻게 상륙작전을 신속하게 할 수 있을 것인지를, 과거 일본 해군의 모의 훈련 결과를 토대로 의구심을 표했지만, 스기야마는 확실히 이길 수 있느냐는 덴노의 질의에 쩔쩔 매면서 연습을 많이 했으니 훈련과는 다르지 않겠냐는 식으로 변명하다가 극대노한 히로히토가 소리를 지르는 상황에 이르게 했다. 히로히토 입장에서 보면 임팔 전투도 그렇고, 수십년을 일본군 고위 장교로 지냈다는 작자가 군에 대해 기초적인 공부만 한 자신보다도 군에 대해 무지한 발언들을 하고 있으니, 덴노 입장에서 보면 화가 안 나는게 이상한 상황이긴 하다.

2008년 일본 TBS TV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 드라마 《시리즈 격동의 쇼와, 그 전쟁은 무엇이었던가 - 일미전쟁과 도조 히데키(シリーズ激動の昭和 あの戦争は何だったのか 日米開戦と東條英機)》 2부(1부는 다큐멘터리, 2부는 드라마 형식)에서 이때 히로히토와 스기야마의 대담이 그대로 등장한다.(해당 장면)[10][11]

알디시피 태평양은 조금 넓은 바다 정도가 아니라 지구상 모든 육지를 더한 것보다 넓다. 태평양은 바다 총 면적의 약 절반, 지구 전체 면적의 약 3분의 1, 러시아의 약 10배, 중국의 약 17배에 이른다. 그래도 그를 위해 실드를 쳐준다면, 바다는 육지와는 다르게 높이가 일정하고 장애물이 없기에 같은 면적이라면 바다를 관리하기가 더 쉬울 수는 있다. 어디까지나 같은 면적의 바다라면.

뭐, 그 결과는 모두가 알 것이다. 일단 진주만 공습 이후 석 달간 남방에서만큼은 파죽지세로 진군하여 싱가포르를 점령하고 영국령 인도와 교전할 정도였지만, 태평양에서는 알다시피 밀리고 있었다.

2.3. 임팔 작전의 결재

무타구치 렌야임팔 작전을 승인했다.

대부분의 참모장작전과장이 무타구치의 작전에 '이건 현실적으로 가능한 작전이 아닙니다.'라고 반대했으나, 스기야마는 이렇게 말하며 결재를 통과시키라 명령했다.
작전 입안에 참여한 무타구치 장군과 데라우치 장군의 얼굴을 봐서라도 결재해 주게.

여기서 데라우치는 데라우치 히사이치, 초대 조선 총독이었던 데라우치 마사타케의 장남으로, 당시 동남아시아 지역의 일본군을 총지휘하는 남방총군 사령관이었다. 즉, 나라의 흥망이 걸린 대작전을 입안 참여자가 자기랑 같은 일본 육군 내 최대 파벌이었던 육군사관학교-육군대학교 출신 파벌이라며 어설프게 확인하고 승인했다. 후대에 개념 없다고 까이는 도조 히데키임팔 작전의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라 단언했으며, 히로히토는 "각료들이 모두 찬성했다면 짐 역시 따르겠지만, 이게 정말 현실적으로 가능한 작전인가?"라 되물었다고 한다.[12]

스기야마가 이런 짓을 저질러, 무타구치 휘하에 있던 10만 가까운 남방 전선의 일본군 중 1만 5천 명 정도만 갖은 고생 다 하고 귀환했다. 그래서 다른 전선들에 비해 전력이 온존되어 있었던 버마 전선은 완전히 무너져, 1945년 초 인도 제국군과 버마 국방군에게 지고 버마를 완전히 내줬다.

그래도 일본군의 파벌을 이용해 고이소 내각에서 다시 육군대신으로, 1945년 스즈키 간타로 내각이 서자 본토 결전을 위한 제1총군의 사령관으로 임명받았다. 그러나 일본이 패전한 뒤에는 자신이 무능해서 패전했다는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자신은 권총으로, 부인은 청산가리로 부부가 나란히 자살했다. 사족으로 남편에게 자살을 할 것을 강권한 것은 스기야마의 부인이었다. 그녀는 패전 후 매일 남편에게 미 헌병대가 그들을 체포하기 전에 자살해야 한다며, 언제 자살할 것이냐고 남편을 다그쳤다는데 9월 12일이 되자 스기야마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고 권총자살을 하게 되고, 부인 역시 남편이 자살한 것을 확인하자 바로 청산가리를 먹고 자살했다고 한다.

3. 후대의 평가

전쟁이 끝나자 전후의 책임을 지고 권총으로 생을 마감했으며 자신의 책임을 통감한다는 유서를 남긴 탓인지 다른 삼대오물보다는 낫다고 옹호받는 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저지른 일들이 없어지는건 아니기 때문에 완전히 긍정적인 평가인 것은 아니지만, 그나마 군인으로서 최소한의 양심은 있었다는 점 때문에 그렇다. 모든 잘못이 본인 탓이며 이에 대해 진심으로 사죄한다는 유서를 남긴 사람을 욕하기는 좀 그러니 말이다.

한국에선 도미나가 교지, 무타구치 렌야와 함께 독립운동가라는 농담을 듣고 있다. 물론 이건 비아냥도 있지만 인간으로서 양심은 있었으니 희화하는 개념도 있다.[13]

그가 전쟁 중에 남긴 메모는 '스기야마 메모'라 하여 구 일본군의 당시 상황을 알려주는 귀중한 전사 사료로 보존받는다.

4. 사진

파일:attachment/스기야마 하지메/1.jpg 파일:attachment/스기야마 하지메/2.jpg

5. 매체에서

5.1. 영화

5.2. 드라마

5.3. 게임



[1] 다른 사람은 우에하라 유사쿠.[2] 3개월 설도 있고 5개월 설도 있다. 아래 고노에 후미마로의 태평양 전쟁 관련 기록에서는 히로히토의 발언에서 "중국은 1개월 만에 정리할 수 있다고 하지 않았나?"라고 1개월인 것으로 나온다.[3] 당시 일본에서 중일전쟁을 일컫는 말[4] 스기야마 본인이 적은 《스기야마 메모》에서는 "예정대로 될 것 같은가? 네가 대신일 적에 장제스는 금방 항복할 것이라고 했지만 아직 못하고 있지 않나."(「予定通リ出来ルト思フカ、オ前ノ大臣ノ時ニ蔣介石ハ直グ参ルト云フタガ未ダヤレヌデハナイカ」)라고 나온다.(후지와라 아키라(藤原彰) 외,《천황의 쇼와사(天皇の昭和史)》85쪽)[5] 《최후의 어전회의 : 고노에 후미마로 공식 수기》(最後の御前會議 : 近衛文麿公手記)[6] 2015년 판은 《전후 구미 견문록》까지 합쳐 《최후의 어전회의·전후 구미 견문록 - 고노에 후미마로 수기 집성》(最後の御前会議 戦後欧米見聞録 - 近衛文麿手記集成)"이라는 제목으로 나왔다.[7] 1946년판 수기의 권두 목차에서는 "폐하, 스기야마 참모총장을 힐문"(陛下・杉山参謀総長を御詰問)으로 되어있다.[이미지]
파일:konoe43p.jpg
[9]쇼와사》(昭和史) 1, 박현미 역, 루비박스, 304쪽(원문 356쪽).[10] 작중 히로히토 역은 노무라 만사이, 스기야마 하지메 역은 히라노 다다히코(1938~2014)가 맡았는데, 해당 배우가 오페라 가수를 겸업한 터라 육군 장성으로써의 성량감 있는 대사를 소화하기 수월했을 뿐더러 배우의 키도 177cm로 실제 스기야마 하지메의 비대했던 체구와도 맞아떨어졌다고 일본어 위키백과에서 설명된다.[11] 이 대화 직후에 나오는 "맹세코 이길 수 있겠나!" - "맹세코라고는 말씀 드리기 어렵습니다..."(絶対ニ勝テルカ / 絶対トハ申シ兼ネマス) 부분은 《스기야마 메모》(杉山メモ)에 나온다.
파일:sugiyama2.jpg
[12] 사실 히로히토는 어린 시절 가쿠슈인에 입학했을 때부터 군사교육을 받았고, 일본육군사관학교도 졸업했던 만큼 군에 대해서 문외한은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반인보다 식견이 낫다는 정도고, 사관학교는 물론 육군대학에서까지 교육을 받은 뒤 수십 년에 걸친 실전경험을 쌓은 직업군인들보다 더 나은 교육을 받았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몇 년 동안 이론으로만 군사교육을 받았던 아마추어가 수십 년 동안 실전을 거친 고위 장교들보다 더욱 정확한 판단을 내리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벌어졌던 것이다.(물론 히로히토 본인이 어지간한 장군들보다 타고난 군사적인 센스가 더 나았다는 평가도 있긴 하지만..)[13] 사실 일본군이 어떤 집단이라는 지를 알면 이들은 그나마 최소한의 양심이 있었다고 할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