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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조 히데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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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소네 야스히로 다케시타 노보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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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소카와 모리히로 하타 쓰토무 무라야마 도미이치 하시모토 류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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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부치 게이조 모리 요시로 고이즈미 준이치로 아베 신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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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고노에 후미마로
제2대

도조 히데키
제3대

고이소 구니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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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즈키 간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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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무경 (1869년~1879년) · 외무사무총재 (1873년)
초대
사와 노부요시
2대
이와쿠라 도모미
3대
소에지마 다네오미
4대
데라시마 무네노리
5대
이노우에 가오루
전전 외무대신 (1885년~194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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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대
이노우에 가오루
6대
이토 히로부미
7대
오쿠마 시게노부
8대
아오키 슈조
9대
에노모토 다케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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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
무쓰 무네미쓰
11대
사이온지 긴모치
12대
오쿠마 시게노부
13대
니시 토쿠지로
14대
오쿠마 시게노부
15대
아오키 슈조
16대
가토 다카아키
17대
소네 아라스케
18대
코무라 주타로
19대
가토 다카아키
20대
사이온지 긴모치
21대
하야시 타다스
22대
데라우치 마사타케
23대
코무라 주타로
24대
우치다 고사이
25대
가쓰라 다로
26대
가토 다카아키
27대
마키노 노부아키
28대
가토 다카아키
29대
오쿠마 시게노부
30대
이시이 키쿠지로
31대
데라우치 마사타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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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토노 이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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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토 신페이
34대
우치다 고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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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대
우치다 고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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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모토 곤노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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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인 히코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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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츠이 케이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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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데하라 기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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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대
다나카 기이치
40대
시데하라 기주로
41대
이누카이 쓰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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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자와 겐키치
43대
사이토 마코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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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대
우치다 고사이
45대
히로타 고키
46대
아리타 하치로
47대
하야시 센주로
48대
사토 나오타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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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대
히로타 고키
50대
우가키 가즈시게
51대
고노에 후미마로
52대
아리타 하치로
53대
아베 노부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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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대
노무라 기치사부로
55대
아리타 하치로
56대
마츠오카 요스케
57대
토요다 테이지로
58대
도고 시게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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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대
도조 히데키
60대
타니 마사유키
61대
시게미쓰 마모루
62대
스즈키 간타로
63대
도고 시게노리
전후 외무대신 (1945년~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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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대
시게미쓰 마모루
65대
요시다 시게루
66대
가타야마 데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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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다 히토시
69·70·71대
요시다 시게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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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73·74대
오카자키 카츠오
75·76·77대
시게미쓰 마모루
78대
이시바시 단잔
79·80대
기시 노부스케
81·82대
후지야마 아이이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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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84대
고사카 젠타로
85·86대
오히라 마사요시
87·88대
시이나 에쓰사부로
89·90대
미키 다케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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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대
사토 에이사쿠
92·93대
아이치 기이치
94대
후쿠다 다케오
95·96대
오히라 마사요시
97대
키무라 토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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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대
미야자와 기이치
99대
고사카 젠타로
100대
하토야마 이이치로
101·102대
소노다 스나오
103대
오키타 사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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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대
이토 마사요시
105대
소노다 스나오
106대
사쿠라우치 요시오
107·108대
아베 신타로
109대
쿠라나리 타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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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대
우노 소스케
111대
미쓰즈카 히로시
112대
나카야마 타로
113·114대
와타나베 미치오
115대
무토 카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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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대
하타 쓰토무
117대
가키자와 고지
118대
고노 요헤이
119·120대
이케다 유키히코
121대
오부치 게이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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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대
고무라 마사히코
123·124·125대
고노 요헤이
126대
다나카 마키코
127대
고이즈미 준이치로
128·129대
카와구치 요리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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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131대
마치무라 노부타카
132·133대
아소 다로
134대
마치무라 노부타카
135대
고무라 마사히코
136대
나카소네 히로후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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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138대
오카다 가쓰야
139대
마에하라 세이지
140대
에다노 유키오
141대
마쓰모토 다케아키
142대
겐바 고이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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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144대
기시다 후미오
145·146대
고노 다로
147-149대
모테기 도시미쓰
150대
기시다 후미오
151대
하야시 요시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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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대
가미카와 요코
153·154대
이와야 다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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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fff> 내무경 (1873년~1885년)
초대
오쿠보 도시미치
2대
기도 다카요시
3대
오쿠보 도시미치
4대
이토 히로부미
5대
오쿠보 도시미치
6대
이토 히로부미
7대
마쓰카타 마사요시
8대
야마다 아키요시
9대
야마가타 아리토모
}}}{{{#!wiki style="margin: -6px -1px -10px"<rowcolor=#ffffff> 내무대신 (1885년~1947년)
초대
야마가타 아리토모
임시대리·5대
마쓰카타 마사요시
초대
야마가타 아리토모
2·14대
사이고 주도
3대
시나가와 야지로
4대
소에지마 다네오미
임시대리·5대
마쓰카타 마사요시
6대
고노 도가마
7대
이노우에 가오루
8대
노무랴 야스시
9·12·19대
요시카와 아키마사
10·13대
이타가키 다이스케
11대
가바야마 스케노리
9·12·19대
요시카와 아키마사
10·13대
이타가키 다이스케
2·14대
사이고 주도
15대
스에마쓰 겐초
16대
우츠미 타다카츠
17대
고다마 겐타로
18대
가쓰라 다로
9·12·19대
요시카와 아키마사
20대
기요우라 게이고
21·23·25대
하라 다카시
22대
히라타 도스케
21·23·25대
하라 다카시
24·27대
오우라 가네타케
21·23·25대
하라 다카시
26·28대
오쿠마 시게노부
24·27대
오우라 가네타케
26·28대
오쿠마 시게노부
29대
이치키 기토쿠로
30·34대
고토 신페이
31·33·35대
미즈노 렌타로
32대
도코나미 다케지로
31·33·35대
미즈노 렌타로
30·34대
고토 신페이
31·33·35대
미즈노 렌타로
36대
와카쓰키 레이지로
37대
하마구치 오사치
38·44대
스즈키 기사부로
39대
다나카 기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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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치즈키 게이스케
41대
아다치 겐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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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하시 토쿠고로
43대
이누카이 쓰요시
38·44대
스즈키 기사부로
45대
야마모토 타츠오
46대
고토 후미오
47대
우시오 시게노스케
48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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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대
바바 에이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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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에츠구 노부마사
51대
기도 고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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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하라 나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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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다마 히데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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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스이 에이지
55대
히라누마 기이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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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나베 하루미치
57대
도조 히데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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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자와 미치오
59대
안도 기사부로
60대
오다치 시게오
61대
아베 겐키
62대
야마자키 이와오
63대
호리키리 젠지로
64대
미츠치 추조
65대
오무라 세이이치
66대
우에하라 에츠지로
임시대리
가타야마 데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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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무라 코자에몬
폐지
섭관 · 원정 · 헤이케 · 가마쿠라 · 무로마치
오다 · 도요토미 · 에도 · 내무경 · 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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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e5e5e5
1기 상공대신 (1925~1943)
초대
다카하시 고레키요
2대
노다 우타로
3대
카타오카 나오하루
4·6대
후지사와 이쿠노스케
5대
나카하시 도쿠타로
6대
타와라 마고이치
7대
사쿠라우치 유키오
8대
마에다 요네조
9대
나카지마 쿠마키치
10대
마츠모토 조지
11대
마치다 추지
12대
카와사키 타쿠키치
13대
오가와 고타로
14·18대
고도 타쿠오
15대
요시노 신지
16대
이케다 시게아키
17대
핫타 요시아키
14·18대
고도 타쿠오
19대
후지와라 긴지로
20대
고바야시 이치조
임시대리
가와다 이사오
21대
도요다 데이지로
22대
사콘지 세이조
23대
기시 노부스케
24대
도조 히데키
군수대신 (1943~1945)
초대
도조 히데키
2대
후지와라 긴지로
3대
요시다 시게루
4대
토요다 테이지로
5대
나카지마 치쿠헤이
2기 상공대신 (1945~1949)
25대
나카지마 치쿠헤이
26대
오가사와라 산쿠로
27대
호시시마 지로
28대
이시이 미쓰지로
임시대리
가타야마 데쓰
29-30대
미즈타니 조사부로
임시대리
요시다 시게루
31대
오야 신조
32대
시나가키 헤이타로
통상산업대신(1949년~2001년)
초대
시나가키 헤이타로
2·6·17대
이케다 하야토
3대
다카세 소타로
4대
요코오 시게루
5대
다카하시 류타로
7대
오가사와라 산쿠로
8대
오카노 키요히데
9대
아이치 기이치
10·11·12대
이시바시 단잔
13·14대
미즈타 미키오
15대
마에오 시게사부로
16대
타카사키 타츠노스케
2·6·17대
이케다 하야토
18대
이시이 미쓰지로
19대
시이나 에쓰사부로
20대
사토 에이사쿠
21·22대
후쿠다 하지메
23·24대
사쿠라우치 요시오
25대
미키 다케오
26·27대
칸노 와타로
19·28대
시이나 에쓰사부로
29대
오히라 마사요시
30대
미야자와 기이치
31대
다나카 가쿠에이
32·33대
나카소네 야스히로
34·36대
고모토 토시오
35대
다나카 다쓰오
34·36대
고모토 토시오
37대
에사키 마스미
38대
사사키 요시타케
38대
다나카 로쿠스케
39대
아베 신타로
41대
야마나카 사다노리
42대
우노 소스케
43대
오코노기 히코사부로
44대
무라타 케이지로
45대
와타나베 미치오
46·47대
타무라 하지메
48대
미쓰즈카 히로시
49대
가지야마 세이로쿠
50대
마츠나가 히카루
51대
무토 가분
52대
나카오 에이치
53대
와타나베 고조
54대
모리 요시로
55대
구마가이 히로시
임시대리
하타 쓰토무
56대
하타 에이지로
57대
하시모토 류타로
58대
츠카하라 슌페이
59대
사토 신지
60대
호리우치 미쓰오
61대
요사노 가오루
62·63대
후카야 다카시
64대
히라누마 다케오
경제산업대신 (2001년~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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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대
히라누마 다케오
3-5대
나카가와 쇼이치
6대
니카이 도시히로
7·8대
아마리 아키라
{{{#!wiki style="margin: -16px -11px" }}}
7·8대
아마리 아키라
9·10대
니카이 도시히로
11·12대
나오시마 마사유키
{{{#!wiki style="margin: -16px -11px" }}}
13대
오하타 아키히로
14대
가이에다 반리
15대
하치로 요시오
16대
에다노 유키오
17대
모테기 도시미쓰
{{{#!wiki style="margin: -16px -11px" }}}
18대
오부치 유코
19·20대
미야자와 요이치
21대
하야시 모토오
22·23대
세코 히로시게
24대
스가와라 잇슈
{{{#!wiki style="margin: -16px -11px" }}}
25·26대
가지야마 히로시
27·28대
하기우다 고이치
29대
니시무라 야스토시
30대
사이토 겐
31·32대
무토 요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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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e5e5e5
문부경 (1869~1885)
초대·7대
오키 다카토
2대
기도 다카요시
-
타나카 후지마로
3대
사이고 주도
4대
테라지마 무네노리
5대
고노 도가마
6대
후쿠오카 다카치카
초대·7대
오키 타카토
전전 문부대신 (1885~1947)
초대
모리 아리노리
임시대리
오야마 이와오
2대
에노모토 다케아키
3대
요시카와 아키마사
4대
오키 타카토
5대
고노 토가마
6대
이노우에 가오루
임시대리
요시카와 아키마사
7·10대·임시대리
사이온지 긴모치
8대
하치스카 모치아키
9대
하마오 아라타
7·10대·임시대리
사이온지 긴모치
11대
토야마 마사카즈
12대
오자키 유키오
13·31대
이누카이 쓰요시
14대
카바야마 스케노리
15대
마츠다 마사히사
16대
키쿠치 다이로쿠
17대
고다마 겐타로
18대
쿠보타 유즈루
19대
가쓰라 다로
7·10대·임시대리
사이온지 긴모치
20대·임시대리
마키노 노부아키
21대
코마츠바라 에이타로
22대
하세바 스미타카
20대·임시대리
마키노 노부아키
23대
시바타 카몬
24대
오쿠다 요시토
25대
오오카 이쿠조
26대
이치키 키토쿠로
27대
타카다 사나에
28·34대
오카다 료헤이
29대
나카하시 토쿠고로
30대
카마타 에이키치
13·31대
이누카이 쓰요시
32대
오카노 케이지로
33대
에기 카즈유키
28·34대
오카다 료헤이
35대
미츠치 추조
36대
미즈노 렌타로
37대
쇼다 카즈에
38대
코바시 이치타
39대
타나카 류조
40대
하토야마 이치로
41대
사이토 마코토
42대
마츠다 겐지
43대
카와사키 타쿠키치
44대
우시오 후사노스케
45대
히라오 하치사부로
46대
하야시 센주로
47대
야스이 에이지
48대
기도 고이치
49대
아라키 사다오
50대
카와라다 카키치
51대
마츠우라 시게지로
52대
하시다 쿠니히코
52대
하시다 쿠니히코
53대
도조 히데키
54대
오카베 나가카게
55대
니노미야 하루시게
56대
코다마 히데오
57대
오타 코조
58대
마츠무라 켄조
59대
마에다 타몬
60대
아베 요시시게
61대
타나카 코타로
전후 문부대신 (1947~2001)
62대
타카하시 세이이치로
임시대리
가타야마 데쓰
63-64대
모리토 타츠오
임시대리
요시다 시게루
65대
시모조 야스마로
66대
타카세 소타로
67대
아마노 테이유
68-69대
오카노 키요히데
70대
오다치 시게오
71대
안도 마사즈미
72대
마츠무라 켄조
73대
키요세 이치로
임시대리
이시바시 단잔
74-75대
나다오 히로키치
74-75대
나다오 히로키치
76대
마츠나가 도
77대
나다오 히로키치
78대
하시모토 료고
79대
마츠다 타케치요
80-81대
아라키 마스오
82-83대
나다오 히로키치
84-85대
아이치 기이치
86대
나카무라 우메키치
87대
아리타 기이치
88-89대
겐노키 도시히로
90대
나다오 히로키치
91-92대
사카타 미치타
93대
타카미 사부로
94대
이나바 오사무
95대
오쿠노 세이스케
96대
미하라 아사오
97대
나가이 미치오
98대
가이후 도시키
99대
스나다 시게타미
100대
나이토 타카사부로
임시대리
오히라 마사요시
101대
다니가키 센이치
102대
다나카 타츠오
103대
오가와 헤이지
104대
세토야마 미츠오
105대
모리 요시로
106대
마츠나가 히카루
107대
가이후 도시키
108대
후지오 마사유키
109대
시오카와 마사주로
110대
나카지마 겐타로
111-112대
니시오카 다케오
111-112대
니시오카 다케오
113대
이시바시 카즈야
114대
호리 고스케
115대
이노우에 유타카
116대
하토야마 구니오
117대
모리야마 마유미
118-119대
아카마쓰 료코
임시대리
하타 쓰토무
118-119대
아카마쓰 료코
120대
요사노 가오루
121대
시마무라 요시노부
122대
오쿠다 미키오
123대
코스기 타카시
124대
마치무라 노부타카
125대
아리마 아키토
126·127대
나카소네 히로후미
128대
오시마 다다모리
129대
마치무라 노부타카
과학기술청장관(1956년~2001년)
초대
쇼리키 마츠타로
임시대리
이시바시 단잔
2·3대
우다 고이치
4대
쇼리키 마츠타로
5대
미키 다케오
임시대리·6대
타카사키 타츠노스케
7대
나카소네 야스히로
8대
아라키 마스오
9대
이케다 마사노스케
10대
미키 다케오
11대
곤도 츠루요
12·13대
사토 에이사쿠
임시대리
이케다 하야토
14·15대
아이치 기이치
16대
우에하라 쇼키치
17대
아리타 기이치
18·19대
니카이도 스스무
20대
나메지마 나오키
21대
기우치 시로
22대
니시다 신이치
23대
히라이즈미 와타루
21·24대
기우치 시로
25대
나카소네 야스히로
26대
마에다 카즈오
27대
모리야마 킨지
28대
아다치 도쿠로
29대
사사키 요시타케
30대
마에다 마사오
31대
우노 소스케
32대
쿠마가이 타이사부로
33대
가네코 이와조
34대
오사다 유지
35대
나카가와 이치로
36대
야스다 타카아키
37대
이즈루키 미치유키
38대
타케우치 레이치
39대
고노 요헤이
40대
미쓰바야시 야타로
41대
이토 소이치로
42대
미야자키 기이치
43대
나카무라 기시로
44대
사이토 에이사부로
45대
오시마 토모지
46대
산토 아키코
47대
타니가와 칸조
48대
나카지마 마모루
임시대리
미야자와 기이치
49대
와타나베 쇼이치
50대
에다 사쓰키
임시대리
하타 쓰토무
51대
오미 미키오
52대
다나카 마키코
53대
우라노 야스오키
54대
나카가와 히데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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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카오카 리이치로
56대
다니가키 사다카즈
57대
타케야마 유타카
58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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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60대
나카소네 히로후미
61대
오시마 다다모리
62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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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부과학대신 (200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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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라카와 요시노리 | 우가키 가즈시게 | 미나미 지로 | 아베 노부유키 | 야마나시 한조 | 도조 히데키 | 고이소 구니아키 | 도이하라 겐지 | 마쓰이 이와네 | 야마시타 도모유키 | 이타가키 세이시로 | 이마무라 히토시 | 기무라 헤이타로 |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왕 | 오카무라 야스지 | 쿠리바야시 타다미치 | 다치바나 요시오 | 아나미 고레치카 | 가와베 마사카즈 |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 왕 |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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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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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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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국 제40대 내각총리대신
도조 히데키
[ruby(東, ruby=とう)][ruby(條, ruby=じょう)] [ruby(英, ruby=ひで)][ruby(機, ruby=き)][1] | Tōjō Hideki
파일:377149_hideki-todzo_ff.jpg
<colbgcolor=#0230AE><colcolor=#c3c965> 출생 1884년 12월 30일
도쿄부 도쿄시 고지마치구
(現 도쿄도 치요다구)
사망 1948년 12월 23일 (향년 63세)
도쿄도 도시마구 스가모 형무소
재임기간 제40대 내각총리대신[2]
1941년 10월 18일 ~ 1944년 7월 22일
서명
파일:도조 히데키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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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0230AE><colcolor=#c3c965> 부모 부친 도조 히데노리 (1855 ~ 1913)
모친 도조 치토세 (1861 ~ ?)
배우자 도조 가쓰코 (1890 ~ 1982)
자녀 장남 도조 히데타카 (1911 ~ 1966)
차남 도조 데루오 (1914 ~ 2012)
삼남 도조 도시오 (1925 ~ 2014)
장녀 도조 미쓰에 (1918 ~ ?)
차녀 도조 마키에 (1923 ~ 2000)
삼녀 도조 유키에 (1929 ~ ?)
사녀 도조 기미에 (1931 ~ ?)
친인척 증조부 도조 히데마사
할아버지 도조 히데토시
손녀 도조 유코 (1939 ~ 2013)
신체 163cm, A형
종교 국가신토불교 (정토종)
학력 육군대학교 (27기)
정당
약력 관동군 헌병사령관
제10대 관동군 참모장
제21대 육군차관
제16대 육군참모총장
제50-52대 육군대신
제64대 내무대신
제40대 내각총리대신
제66대 외무대신
제53대 문부대신
제25대 상공대신
초대 군수대신
훈장 훈일등욱일대수장
금치훈장(2등급)
서보대수장
Order of the German Eagle
Order of Saints Maurice and Lazarus
군사 경력
임관 일본육군사관학교 (17기)
복무 일본제국 육군
1905년 3월 ~ 1944년 7월 22일
최종 계급 대장
참전 중일전쟁
태평양 전쟁
}}}}}}}}} ||
1. 개요2. 생애3. 평가
3.1. 들어가기에 앞서3.2. 당대
3.2.1. 긍정적 평가3.2.2. 부정적 평가
3.3. 서양3.4. 중국3.5. 일본3.6. 한국
4. 여담5. 대중매체에서 6. 어록7.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일본 제국의 제40대 내각총리대신.

일본 육군 소속이며 최종계급은 대장이다. 일본육군내 통제파 파벌의 수장으로 일본의 군국주의화를 주도했으며, 결국 1941년 내각총리대신 겸 육군대신 겸 육군참모총장으로 태평양 전쟁을 시작한다.

대표적인 추축국 지휘관으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전쟁 프로파간다를 포함한 매체에 일본군의 이미지가 '안경을 쓰고 콧수염 기른 빡빡이'로 정착된 것[3]에 영향을 주었다.[4] 또한 워낙에 벌인 일이 거대하고 잔혹해서, 전후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미군은 자살하려던 도조를 되살려놓고는 도로 사형시켜 죽였다.

2. 생애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도조 히데키/생애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3. 평가

3.1. 들어가기에 앞서

도조 히데키는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일 뿐만 아니라 일본 제국의 군국주의화를 주도한 원흉이었고, 그 결과 사형에 처해졌기 때문에 오늘날 세계 질서에서 그가 긍정적으로 평가받을 만한 여지는 거의 없다. 즉, 당시 일본 제국은 전형적인 입헌군주제가 아닌 막부가 통치하는 나라에 가까웠으며, 그것도 일본 역사상 가장 광기에 찬 막부였다. 막부가 있으면 쇼군이 존재하는 법인데, 이 일본군 막부 내에서 쇼군의 위치에 있던 사람이 바로 도조 히데키였다.

다만 일각에서는 그가 개전 책임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5] 본인이 저지르지 않았던 악행조차 덤터기 쓰고 있는 억울함도 있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일본 제국의 최고지도자로 일본 육해군의 작전의 입안, 진행 사항 등을 보고받고 세세히 개입했으며, 악명 높은 731부대까지 직속으로 둔 히로히토 천황은 일말의 비판조차 할 수 없는 최고존엄이었으며, 패전 후에도 혼란을 안정시키려는 미국과 천황만큼은 살리려는 당시 일본의 합의로 일본은 명목상 입헌군주제[6][7] 천황은 실권이 없었다는 논리로 면책되었다.

또 당시 일본군 전체가 도조 히데키에게 복종했던 것도 아니었다. 육군 출신이라는 이유로 총리 도조 히데키가 일본 해군을 통제한다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한 측면도 있었고[8], 심지어 해군의 승패 여부조차도 모를 정도로 육군과 해군은 사실상 적군처럼 대립했다. 다만 이 사건 이후로 도조도 해군 군령부장을 경질하고 자신과 가까운 사람을 앉히는 등 나름대로 해군을 통제하기 위한 압력을 넣기는 했다.

물론 도조는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고 중일전쟁의 확대에도 크게 기여한 인물인 만큼, 전쟁 중에 일어난 모든 참상에 대한 책임이 그에게 있다는 것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다만 도조가 히틀러와 동일 선상에 놓일만큼 악랄한 독재자라고 보기에는 다소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히틀러는 본인이 직접 유대인 학살을 지시하고, 독소전쟁 당시 국제법을 어겨서라도 슬라브인 말살에 집중하라는 지시를 내린 만큼 독일군의 모든 학살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는 희대의 학살자임이 명백하다. 그러나 도조는 독재자에 군국주의자였을지언정 직접적으로 학살을 지시하거나 인종말살 따위를 외친 적은 없다. 난징 대학살을 비롯한 일본군의 학살 대부분은 현장 지휘관 혹은 휘하 장교가 독단적으로 저지른 일이었지 도조의 명령에 따른 것이 아니었다.[9]

한 마디로 히틀러와 달리 도조는 군부의 모든 악행에 관여한 인물은 결코 아니며, 당시 일본군에서 반인륜적인 악행을 저지른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 기무라 헤이타로, 다치바나 요시오, 이시이 시로 등에 비하면 그나마 상식적인 편에 속한다. 그렇기에 도조 히데키라는 인물을 단순히 같은 추축국의 수장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히틀러 같은 인물들과 동일선상에 놓고 보는 것은 지나치다는 주장도 꾸준히 나오는 편이다. 즉, 도조는 개전 책임자로서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도조를 히틀러 같은 만악의 근원으로 취급하다 보면 더 악랄한 자들의 책임이 묻힐 수 있다는 것.

그렇지만 딱 한 가지 확실한 건 악행의 여부를 떠나 본 문서에도 적혀있듯 최종 지휘관 측면에서 보자면 무능했다는 것이다.

3.2. 당대

3.2.1. 긍정적 평가

"병사들은 불안한 마음으로 입대한다. 귀관들은 이들을 아버지처럼 자애롭게 대하고, 나이가 많은 병사들에게는 형으로 대하도록 명령해야 한다. 그리고 입대하는 자의 가정환경, 본인의 직업, 능력을 모두 알아두어야 한다. 귀관들은 전역하는 그날까지 중대의 신병의 이름을 기억하라. 왜 그래야 하는가. 병사는 태어난 날은 달라도 죽는 날은 같을 것이기 때문이다. 함께 저승길을 갈 동료이기 때문이다."
- 1929년 4월 제1사단 보병 제1연대장으로 부임한 후 부하들에게 훈시한 내용

일반 병사나 부사관, 하급 장교들에게는 부드럽고 자상한 아버지 같은 상관이었다. 도조는 신병이 들어오면 일일이 부모를 찾아 뵙고 "귀한 자식을 맡겨주셨으니 끝까지 보살피겠습니다"라며 부모와 입대하는 자식 모두를 안심시켰고 형편이 어려운 가장이 입대하면 동사무소를 통해 생계비를 받을 수 있도록 하여 불안을 해소해 주었다.

게다가 도조는 평등주의에 철저하여 식사도 사병과 같은 것을 먹었다. 이건 그 당시 일본군 장성 치고는 대단히 이례적인 처신이었다. 특히 같은 군국주의자 항목의 하나야 타다시와 비교해 본다면 말이다. 항목 참조. 부하들을 어찌나 사랑했는지 한 번이라도 다른 반찬이 나오면 병사들의 식단에도 그 반찬이 있는지 일일이 확인하고는 만약 없을 경우 밥을 먹지 않았다고 한다.

게다가 부하에 대한 배려가 깊어 사단장 시절에는 병사들과 부사관들의 건강과 가족사항까지 세세하게 기록해 이름을 외웠고 부하인 부대장들에게도 병사들의 신상명세와 집안 사정 등을 꼼꼼하게 확인하도록 명했다. 그리고 그 부하들 중에 부모가 위독하다거나 집안에 큰 우환이 있을 경우 사단장의 권한으로 전역증도 발급했다고 한다.

부대 훈련 때도 도조는 군 생활이 병사들에겐 평생 남는 기억이 된다며 체력이나 전투 기술이 부족한 병사들에겐 핸디캡을 적용하여 훈련에 낙오하지 않도록 배려하였다. 심지어 시골 출신 병사가 도시 출신보다 면역력이 약해 결핵에 걸리기 쉽다는 군의관의 조언을 듣고 결핵 검진을 위해 당시(1920년대)로선 최신 기술인 X선 장비를'즉석에서' 도입하기도 했다.

또한 야전 부대장 때는 물론이고 총리 재임 시절에도 관저의 임원들과 수상관저를 지키는 병사들을 모아 식사를 대접하며 운동회와 보물찾기도 열었다고 한다. 심지어 도조의 운전기사 역시 "총리 각하만큼 훌륭하신 분은 진짜 처음 봤습니다."라고 증언했다.

3.2.2. 부정적 평가

그 놈은 헌병사령관 정도만 하고 예비역으로 물러나야지, 총리로는 안 어울린다.[10][11]
믿음직하거나 훌륭한 군인과는 3만 8천리 정도 떨어졌으며 정권을 잡는 정치적 능력은 제법 뛰어났으나, 국가를 이끌어나가는 정치가로서의 능력은 형편없었다.

얼마나 능력이 형편없었냐면은, 그 유명한 무능의 대명사 무타구치 렌야심복으로 쓰고 직속 상관으로부터 "이놈은 쓰면 안 됨."이라고 평가받던 츠지 마사노부를 인재라고 격찬까지 하면서 등용하는 안목이였다.
그의 수기에서 발췌

"싸움은 최후의 한순간에 결정되는 법인데 일본 제국이 가지고 있는 힘을 십분 발휘해보지도 않고[12] 적들의 선전책동에 휘말려 무릎을 꿇게 됐다."

"적의 위협에 겁먹고 손을 들어버리는 내각 지도자와 국민의 얼빠진 정신을 믿고 전쟁에 나선 것은 개전 당시 책임자로서 깊은 책임감을 느낀다."

"신폭탄에 움츠러들고 소련참전에 움찔해 무조건 항복하면 국민의 전투 의사는 급속히 사그라진다. 이런 사태는 군의 통수 지휘에 지대한 혼란을 일으켜 전투력을 저하시킨다."

"동아시아와 일본의 보호를 위해 많은 군인과 국민이 희생했는데 끝을 보지 못하고 섣불리 화평을 맺는 것은 적에게 종속되는 길."

나라가 망하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지도자라는 자가 자신 잘못이라는 말도 안하고 정작 남 탓을 하다가 죽었으니 지도자로써는 자질이 안되었던 인물임은 분명하다.

3.3. 서양

서양권 국가에서는 도조 히데키에 대한 반감은 거의 없다.

현대 서양에서는 더 꾸준히 까이는 나치도 있고, 일제에 대한 증오심 자체도 아시아권에 비하면 낮기 때문이다.[13] 그래도 안 좋은 이미지인 건 엄연한 사실이기 때문에 언급이 될만한 상황이 생기면 당연히 까이지만 히틀러 정도로 메이저하게 까이지는 않고 누군지 모르는 경우도 많다.[14]

3.4. 중국

파일:external/j.people.com.cn/10-1.jpg
써있는 말은 간체자"일본 A급 전범 도조 히데키가 중국 인민에게 사죄합니다." 즉, "중국 인민에게 사죄하라."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그대로 읽으면 일본 갑급 전범 동조영기 (도조 히데키)/향 중국 인민 사죄.
보통 중국에선 이런 대접을 받는다. 중국에서 도조 히데키 라고 하면 학을 뗀다.[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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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조 히데키 얼굴 모양 아이스크림
심지어 중국에서는 도조 히데키 얼굴 모양을 한 아이스크림이 등장했다. 사진에 나와있는 문구는 "국가의 치욕을 잊지 말자(勿忘國恥)"는 표현을 살짝 비튼 "국가의 치아를 잊지 말자(勿忘國齒)"[16]와 "만인이 함께 도조 히데키를 먹자. 3D 프린팅된 아이스크림."이라는 뜻이다.[17]

사실 이전에도 중국 국영 기업들의 반일 정서 이용 마케팅 사례는 종종 있었지만 전범의 머리를 씹어먹도록 하는 제품이 나온 것은 전례를 찾아보기 어렵다.

3.5. 일본

일본 우익들은 이 도조 히데키가 그 당시 최고지휘관의 심복이라 어쩔 수 없이 미화하지만, 우익에서도 '일본군을 말아먹은 졸장'이라고 욕하는 이들도 꽤 있다. [18]

우익적 견해로 유명한 베츠미야 단로는 도조를 가리켜 "그 놈은 인사계원으로나 쓸모 있고 지휘관으로서는 중대장조차 위험하다."고 적시했다. 실제로 도조는 연대장 시절에 인사계 이상으로 '사병들의 처우와 복장에 솔선수범한 군인'으로 평가받았다.
조조의 정치 방침은 몹시 위태로운 것이었음에는 틀림없다. 이민족이 많이 섞인 군대의 힘을 이용해 이민족을 제압하고 군대로 하여금 납입시킨 곡물을 배급함으로써 군대를 복종시키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그 운용에 차질이 생기면 곧 위험한 파탄이 일어날 듯하다. 그러므로 이 체제를 유지하는 데는 극도로 엄중한 법령의 실시가 불가결하게 된다. 그것은 평상시에도 사회 전체를 계엄령 하에 두는 것을 의미한다. 조조의 정책에서 보이듯이 중국 중세 역사의 추이는 이민족 대책과 토지 정책의 전개가 주축이 되어 진행된다. 더욱더 이 두 가지 문제의 이면에 공통된 요소를 탐색하면 그것은 다만 부양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필사적 투쟁이 거기에 있다. 이민족에게도, 빈민에게도 보다 잘 살고자 하는 따위의 한가로운 소망은 없다. 심각한 불경기가 침투한 시대에는 이민족은 이민족대로 식량을 구해 방황하고 빈민은 빈민대로 직업을 찾아 유랑해야만 했다. 그렇다 해도 이처럼 비참한 밑바닥 생활자를 토대로 해서 상류층에는 우아한 귀족 계급이 번영한 것은 어찌 된 일인가. 이것도 그다지 이상할 것은 없다. 계엄령이란 것은 받는 자에게는 도탄의 고통이지만 시행하는 측에는 그만큼 고마운 것도 없다. 그것은 일본의 전시 중 생활을 뒤돌아봐도 바로 알 수 있다.

일본의 동양 사학계 거장이자 전쟁을 겪은 세대인 미야자키 이치사다 (1901년 ~ 1995년)는 자신의 저서인《중국통사》226 ~ 227 페이지에서 조조를 비판하면서 간접적으로 도조 히데키를 깠다.

한마디로 조조와 도조 히데키는 능력의 차이와 무관하게 자신과 최측근들의 이익을 위해 자국 민중들과 다른 민족들을 탄압하고 쥐어짜 빈부격차를 더욱 심화시키고 국가의 문제점들을 악화시킨 공통점이 있다는 독설이다.

3.6. 한국

일제강점기를 겪었던 한국의 입장에서는 일제 군국주의 및 제국주의를 앞세운 만악의 근원으로 평가받는다.

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인식에만 근거한 것이다. 왜냐하면 도조가 본격적으로 두각을 드러낸 건 1936년 이후, 즉 한국 침략은 예전에 일찌감치 완료되고 한국에 대한 통치가 무단통치, 문화통치까지 다 끝나고 민족말살정책으로 진입한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본은 도조 히데키 총리대신 취임 이전부터 이미 제정신이 아닌 나라였다. 도조 히데키가 만악의 근원 취급을 받는 건 수상 취임 이전 육군대신 시절 주전파 대표로서 저지른 전쟁 선동 행각과 태평양 전쟁 개전에 책임이 있고, 이전에는 식민지나 전장의 사람들이나 겪는 고통을 본토에서도 겪게 한 것과 메이지 헌법 이래 큰 틀에서 지켜진 권력 균형을 현저히 위협했기 때문이다.

이미 일본은 중일전쟁 당시 38년에 국가총동원법을 제정해 법적으로는 본토건 식민지건 얼마든지 전쟁 목적을 위해 쥐어짤 수 있도록 준비를 해 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조선은 본토 정부와 별개로 총독부가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다스리던 곳이었다.

하지만 1943년 조선인 대학생들을 일본군에 강제징집시킨 것은 도조 히데키의 성명으로 나온 게 맞다. 본토 일본인과 다르게 조선인 대학생들의 경우 특별지원병제라고 해서 자원입대형식으로 징집했는데, 사실 말이 지원병제였을 뿐 징집에 응하지 않으면 가족들을 괴롭히거나 경찰들을 보내서 억지로 입대를 강요하는 등 사실상의 강제징집이나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한 술 더떠서 당시 교육을 총괄하던 일본 문부성(심지어 문부대신조차 도조 본인이 겸직하고 있었다.) 또한 이 분위기에 편승해서 일본의 각 대학에게 지원병에 응하지 않는 조선인 유학생들을 강제로 제적시키라는 통첩까지 보냈을 정도였다.

한 가지 아이러니한 점은 정작 도조 히데키 본인은 조선이나 대만 등 식민지 출신의 학생들 징집에 대해 부정적이었다는 것. 다만 날이 갈수록 물자 및 인적 자원이 부족해지면서 결국 식민지 출신 대학생들을 강제 징집하는 성명을 발표한 것이다.

4. 여담

파일:도조 히데키 뒤통수.gif
* 전범재판소에서 오카와 슈메이라는 극우사상가도 전범으로 기소되었는데, 재판장에 잠옷(...)을 입고 출두하거나, 재판정에서 도조 히데키의 뒤통수를 때리는 등 이상한 행동을 해 정신이상으로 실형을 면했다. 그가 말년에 쿠란일본어로 완역했으니 정신이상은 실형을 면하기 위한 연기였을 가능성이 크고. 실제로 연기였다.
이 연기로 실형을 면해 천수를 누렸고 1956년 사망했다. 죽을 때 연기였다고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다만 죄질이 워낙 약해 실제 기소됐다 해도 중형이 나왔을 가능성은 없다.[20]

파일:external/www.japanfocus.org/445-1.jpg

5. 대중매체에서

6. 어록

내 친구병졸 출신이지만, 나는 장군이오. 걱정할 거 없소.
스기야마 하지메가 작전이 정치에 질질 끌려가서는 안 된다고 조언하자 한 대답.
전력 비율은 삼분의 일이라 해도 일본에는 세계 그 어느 나라와도 비교할 수 없는 황국정신이 있습니다!
1941년 9월 일본과 미국의 전력차 비교 결과 도무지 미국을 이길 수 없다는 육군성 군사과의 보고에 대한 답변[39].
"생존이 위협당할 때 민족 간에 다툼이 일어나고, 국가 간에 불행한 전쟁이 시작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언뜻 보면 국제 정세를 냉철히 꿰뚫는 것 처럼 보이지만 중일전쟁태평양 전쟁을 주도해 일본 제국을 붕괴로 이끈 최악의 실책을 저질렀다는 것을 감안하면 모순적인 발언이 아닐 수가 없다.
연구에 대한 제군의 노고가 크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책상에서 이뤄진 연습으로 실전이라는 것은 제군이 생각하는 것과 다르다. 일노전쟁에서도 일본이 이길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겼다. 그 당시에도 삼국간섭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일본이 일어선 것이지, 이길 수 있다는 생각으로 한 것이 아니다. 전쟁은 계획대로만 되는 것이 아니며, 생각하지 못한 것이 승리를 부르기도 한다. 따라서 제군의 성과는 단순히 탁상공론이라 부를 수는 없겠으나 그 의외성이 반영되지 못했다. 제군은 이 책상연습의 결과를 경솔하게 발설치 말라.
총력전 연구소의 연구 결과에 대한 대응. 러일전쟁은 영미가 지원해 준 전쟁이었지만 태평양 전쟁은 그 영미를 적으로 돌리는 전쟁이었다. 더군다나 예기치 못한 변수로 인한 승리를 고려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정상적인 정신머리가 박힌 수뇌부는 예상 외 변수를 골칫거리로 여기지 유리한 변수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예측할 수 없는 '변수'란 당연히 전략을 불투명하게 하는 요소이므로, 최대한 부정적으로 생각해서 작전을 구상하는 것이 기본이다. 도조 히데키가 얼마나 안이한 생각으로 전쟁을 벌였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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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자체:
東条英機
[2] 제50-52대 육군대신, 초대 군수대신, 제25대 상공대신, 제53대 문부대신, 제66대 외무대신, 제64대 내무대신 겸직[3] 도조뿐만 아니라 일본 장성들의 생김새는 서로 비슷할뿐만 아니라 장병들 역시 빡빡이로 조발하는 경향이 강했다. 물론 안경은 끼지 않았지만 콧수염 빡빡이인 무타구치 렌야, 도미나가 교지, 스기야마 하지메라든지, 콧수염은 기르지 않았으나 안경 낀 빡빡이인 츠지 마사노부라든지. 물론 '안경 낀 콧수염 빡빡이'는 도조가 유명하고, 미국 신문의 만평도 보통 일본군의 수괴인 도조를 희화화했다.[4] 쇼와 덴노 역시 이와 비슷하게 묘사되었다. 다만 빡빡이는 아니다.[5] 역사적으로 악의 축에 섰다고 평가받는 국가들은 각자 자기 나라를 대표하는 극악무도한 독재자들이 최소 한 명씩은 존재했다. 나치 독일아돌프 히틀러, 이탈리아 파시즘베니토 무솔리니, 소련이오시프 스탈린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하지만 일본 제국은 앞서 말한 국가들과 비교해서 사악함에서 크게 밀리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상술한 케이스와 같은 이 나라를 대표할 독재자 포지션이 후술되어있듯 여러 사정상 그나마 도조 히데키 정도를 빼면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즉, '이런 비극이 일어난 건 순전히 다 이 놈 때문이다!'라고 분풀이를 할 대상이라는 것. 특히 미국이 전후 일본 통치를 고려해서 히로히토 천황의 전쟁책임을 묻어버리고, 천황제를 유지하기로 결정하면서 태평양전쟁 개전 당시 총리였던 도조 히데키가 전범재판에 세울 일본의 전쟁책임자로 결정된다.[6] 물론 말만 그렇지 오늘날 일부 중동 지역의 국가들처럼 엄연히 전제군주제스런 측면이 존재했다는 점에서 일종의 유사 입헌군주제라 볼 수 있었다. 실제 대일본제국 헌법에서 규정한 천황대권은 전제군주에 더 가까웠고, 이를 내각과 원로가 견제, 보좌하는 형식으로 이뤄졌는데, 천황대권에 대한 견제장치가 미흡하면서 천황 개인의 정치적 역량에 따라 얼마든지 재량을 발휘할 수 있었다. 일본 군부는 이 점을 십분 활용하여 폭주했던 것이고, 히로히토 입장에서도 이들을 방조 내지 소극적으로 지지하며 자신의 지위를 다져나갔다.[7] 친히로히토 사학자들 중에선 히로히토가 아무런 실권도 없는 허수아비라 끌려다닐 수 밖에 없었다고 하지만, 제2차 세계 대전 말미에 핵을 두 방이나 맞았다곤 해도 그럼에도 결사항전하자는 육군을 위시한 반대파의 의견을 일방적으로 묵살시키고 무조건 항복을 통과시킨 사람은 바로 히로히토 본인이었다. 물론 그럴 정도로 당시 일제 상황이 끝판에 몰려 있는 위기일발의 상황이기도 했다. 물론 이는 상술했듯 그 군부를 밀어주며 얻은 권위이긴 했지만, 히로히토는 마냥 얼굴마담은 아닌 군부도 상황에 따라 꺾일 수밖에 없는 영향력 정도는 있었다.[8] 물론 이건 도조 히데키의 개인 능력 문제지 그렇다고 도조 히데키가 권한이 없었다는 면죄부가 되진 않는다.[9] 태평양 전쟁 후반에 도조가 '귀축영미'라는 문구를 내세워 미군과 영국군을 악마화 하는 데에 앞장서기는 했으나, 이는 히틀러와 같은 인종말살 선동이 아니라 전세가 불리해지자 사람들의 투쟁심과 공포심을 자극하기 위한 프로파간다의 성격이 강했다.[10] 실제 일본군 제17사단장이자 자신의 부대에 위안부를 전면 금지시켰던 히라바야시 모리토는 도조가 총리였을 당시 부하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평가했다.[11] 이 발언은 부하들이 숨겨서 도조와 히라바야시 둘 다 고인이 된지 한참 지난 2009년에야 드러난 발언이다.[12] 태평양 전쟁 문서를 읽어본다면 알겠지만, 이 시기 일본은 발휘할 힘은 커녕 본국에서 1억 총옥쇄같은 망상을 하고 있는 시기였다.[13] 특히, 미국의 밀리터리 관련 픽션에서 나치 외에 가장 많이 악역으로 등장하거나 까이는 대상은 소련, 중국, 쿠바, 북한 등 공산 국가들이나 아랍 테러리스트들이지 일본군을 그렇게 까대지는 않는다. 자국을 비판하는 성향이면 되려 원자폭탄 투하를 까기도 하고...[14] 이름은 모르는데 그냥 2차 대전기 일본 총리로 아는 경우가 더 많다.[15] 많이 까이긴 하지만 중국에서는 독단적으로 학살을 저지른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가 넘사벽급으로 많이 까이는지라...[16] 수치를 뜻하는 치(恥)와 이를 뜻하는 치(齒)의 발음이 한국어에서도, 중국어에서도(chǐ) 같은 것도 포인트.[17] 이 아이스크림을 선보인 회사는 상하이의 아이스크림 브랜드인 아이시즌으로, 상하이 최대 유제품 회사인 국영 광밍 식품공사의 계열사다.[18] 우익들조차 거론하기 싫어하는 무타구치 렌야라든지 츠지 마사노부 같은 인간을 유능하다고 써먹었으니 오죽할까 싶다.[19] 체포 당시 치아 전체를 틀니로 바꿔야 했을 정도였다.[20] 그런데 정작 맞은 도조는 놀란 다음 뒤에 누군지 확인하고 그냥 웃고 치운다. 마치 친한 친구가 자기에게 장난으로 그랬다는 듯이 말이다.[21] 그러나 진짜 이 하녀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 건지 우습게도 나중에 도조 사후 이 조카는 그때 담소를 나누던 하녀와 결혼했다.[22] 그래서 히데키의 남동생과 그의 아들(= 위 문단에 언급한 조카)은 도조와 의절하였다. 어느 정도였냐면 남동생은 형의 사형 선고에 매우 고소해했고 야스쿠니 신사에도 일절 안 갔으며 그의 아들인 조카는 반(反) 극우 인사가 되었다. 게다가 부하들이 옥쇄를 준비하자 "바보 안경쟁이 두 마리[40]들을 위해 아까운 니네 목숨을 날리지 마라"라고 했다. 바꿔 말하자면 천황에 대한 충성심이 전혀 없었다는 말이다.[23] 그러나 1920년대 말에서 30년대의 일본 육군 내 분위기는 反초슈벌이었던지라 도조가 아니더라도 야마구치 현 출신들은 어차피 육대 입학이 좌절될 수밖에 없었다. 이 모두가 군 내에 강력한 파벌을 만들어버린 야마가타 아리토모 탓이지만. 위 주석에서 기술했듯 도조의 부친이 야마가타에게 그렇게 간언한 이유도 그것 때문이었다.[24] 그러나 중간에 일본 해군에서 이 기자를 육군 입대일 하루 전 날짜에 징병(전쟁 이후 해군도 징병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또한, 육해군 모두 징집 영장이 나왔다 해도 자기가 징집된 군과 다른 군으로 지원해 입대해버리면 징집 영장은 무효가 되었다.)하는 식으로 데려가 버려서 그는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당연히, 해군은 그 기자를 말단 수병으로 죽게 냅두진 않았고, 종전시까지 정훈 업무에 종사시켜 종전 시까지 살아남게 해 줬다. 자세한 내용은 죽창사건 항목 참조.[25] 이런 면모는 동맹국이었던 나치독일의 아돌프 히틀러나 하인리히 힘러와도 일맥상통했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자기 주변 사람들에겐 매우 자상하고 사려깊은 면모를 보이고 친절했지만 그건 자신을 건드리지 않았을 때에만 적용되는 말이었고, 누가 자신을 건드리는 순간 지금까지의 모습에선 전혀 상상할 수가 없던 잔혹한 뒷모습이 튀어나왔다.[26] 그런데 같이 사형당한 히로타 고키는 다른 사람들의 죄도 짊어졌다는 논란이 있다.[27] 웃긴 건 도조 히데키의 장남, 즉 이 여자의 아버지를 제외한 모든 도조 히데키의 자녀들과 손자, 손녀들이 도조 유코를 비웃었다고 한다.[28] 사실상 상대편의 질문에 제대로 된 대답을 죄다 회피하고 녹음기처럼 자기 할 말만 해댔다.[29] 그냥 적은 게 아니다. 윙드 후사르가 세운 교환비를 압도적으로 능가했으며 심지어는 충무공이 세운 교환비와 맞먹는 화려한 전적을 세웠다.[30] 일제 연간부터 전후까지 외교관으로 활동했던 부친 아래에서 자라 70년대 한국 정계에서 친한파로 통하다가 지금은 혐한에 앞장서며 일본 극우 홍보나 한다. 93년에 박태혁이라는 가명으로 한국을 헐뜯는《추한 한국인》이란 책을 내서 잘 팔리기도 했지만 이후에 수익 배분 문제로 고소를 겪으면서 자신이 쓴 게 드러나 책이 회수되기도 했다. 프라이드 대박 이후로 무르데카란 인도네시아를 무대로 한 일본 극우 영화를 만들었는데, 거기 묘사된 인도네시아인들이 인니인들 입장에서는 매우 모욕적으로 묘사되어서 이에 반발로 일본 기업들의 피해가 크면서 받은 소송 문제로 이후로 극우 영화 제작, 감수를 포기했다.[31] 현재 일본 방위성이 이 전철역 근처에 자리잡고 있다.[32] 히로히토라는 얘기도 있다. 실제로 당시 미국 매체들은 히로히토와 도조를 동일 인물인 것마냥 다뤘기 때문.[33] 일본식 클럽 샌드위치(club sandwich)를 만드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데 그 재료들이 하나하나 가관이다. 배급 카드를 썰고 고기 배급 카드 한 장을 중간에 넣은 다음 그걸 그냥 먹고는 이제 몽둥이(club)를 즐기면 된다며 몽둥이를 꺼내서 자기 머리를 내려친다.[34] 사실 생김새만 따왔을 것이다. 도조라면 절대 안 입을 일본 해군 군복을 입고 있기 때문.[35] 작중 조선만주, 호주에서 저항 세력들에게 밀려나고 있다는 대사가 나온다.[36] 오죽하면 천황이나 기타 궁정 대신들도 아는 미라이의 비밀을 '도조가 알아서는 안 된다'라며 대놓고 이야기한다.[37] 칠면조 사냥이 아닌 이 작품 한정의 대체역사. 여기서 전략적 무승부를 함으로서 지팡구의 역사는 바뀐다.[38] 본업은 전구바꾸는 일을 하신다고 한다.[39] 이 때 미국의 자원 생산량은 일본의 12배였고 포드사가 생산하는 군용차량이 일본 전체 군용차량보다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