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임 직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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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국 초대 환경청 장관 | |
일본국 초대 오키나와개발청장관 | |
<colbgcolor=#3CA324><colcolor=#ffffff> 일본국 제26-38, 40-43대 중의원 의원 야마나카 사다노리 山中貞則 | Yamanaka Sadanori | |
출생 | <colbgcolor=#ffffff,#191919>1921년 7월 9일 |
가고시마현 소오군 스에요시촌 (현 가고시마현 소오시) | |
사망 | 2004년 2월 20일 (향년 82세) |
일본 도쿄도 | |
학력 | 타이베이 제2사범학교 (졸업) |
직업 | 정치인 |
최종 당적 | |
의원 선수 | 17 (중) |
지역구 | 가고시마현 제3구 (중선거구) → 가고시마현 제5구 |
약력 | 오키나와 개발청장관 미나미닛폰신문 기자 대장사무차관 제35대 과학기술청 장관 제49대 농림대신 초대 농림수산대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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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정치인. 생전 일본을 대표하는 경제통 정치인으로 손꼽혔다.2. 생애
1921년 7월 29일 일본 가고시마현 소오군 스에요시촌에서 태어난 야마나카는 구제 미야코노조 중학교 - 대만 타이베이시에 위치한 다이후쿠 제2사범학교 (현 타이베이 교육대학)을 졸업하고 교사 자격증을 취득, 대만 타카오주 (현 가오슝시, 핑둥현 일대)의 국민학교에서 교사일을 시작했다. 그후 징집으로 군에서 복무한 뒤 1946년 일본의 패전으로 복원령이 떨어져 고향인 가고시마로 돌아갔다.이후 가고시마 지역 신문사인 미나미닛폰신문에서 기자로 활동하다 1947년 가고시마현 현의원에서 당선되었다. 이후 1953년 제2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자유당 소속으로 구 가고시마 3구에 입후보해 첫 당선되었다. 1955년 보수합동으로 자유민주당이 창당되자 이에 합류했고, 고노 이치로의 춘추회에 소속되었다.[1]
1958년 제1차 기시 노부스케 내각이 발족하자 대장 정무 차관에 취임하였고, 감격한 야마나카는 재정과 세금 관련 공부에 매진했고, 당시 품목마다 설정이 얽혀있어 세율 조정이 힘들었던 물품세의 대개정을 이루었고, 이것이 국회 내의 굴지의 경제정책통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된다.[2]
1961년 자민당 부간사장, 1963년 중의원 대장 위원회 위원장을 거쳐 1970년 제3차 사토 에이사쿠 내각에서 총리 부총무장관으로 첫 입각에 성공했다. 이후 미국과의 오키나와 제도 반환 문제와 국제 통화 위기 문제 회피 등을 다뤘고 1971년 오키나와 반환을 맞이해 초대 오키나와개발청장관과 초대 환경청 장관직을 맡았다.[3]
1973년 다나카 가쿠에이 내각에서도 방위청 장관을 맡아, 연속 입각에 성공한다. 1974년 자민당 정무조사회장직에 오르지만, 다나카 내각이 록히드 사건으로 인해 무너지면서 정조회장직에서 물러나야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나카소네 야스히로와 불화를 맺으며, 파벌 탈퇴 후 1978년까지 무파벌 상태를 유지했다.
1979년 세제조사회장에 취임해 조세 관련 업무에 큰 영향을 끼치며 "조세업계의 신", "미스터 세금" 등의 별명을 얻었다. 같은해 자민당 내부의 40일 항쟁에서는 나카소네파의 대표로서 강경한 반 오히라 마사요시파로 활동했다.
1982년 나카소네 내각 출범 당시 통상산업대신에 취임하지만 지병인 당뇨병으로 얼마 못가 사임했다. 1990년 세금 업계의 최고 책임자로서 소비세 도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고, 이 여파로 인해 같은해 2월 치러진 제3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사회당의 아리카와 세이지에게 28표 차이로 밀려 처음으로 낙선해 당시 언론과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4]
1993년 제4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국정에 복귀한 이후에는 같은 파벌에 소속된 야마사키 타쿠를 도우며 그가 근미래정치연구회를 결성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야마사키가 1998년 자민당 총재선에 독자 출마하자 근미래정치연구회를 탈퇴하고 나카소네가 소속되어 있던 지수회에 합류했다.
2001년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국정과제로 "성역없는 개혁"을 내걸며 도로특정제원 등 세금 관련 부문에도 개혁을 하고자 했고, 그 도움을 얻기 위해 세제 분야의 전문가인 야마나카의 사무소를 방문해 협력을 얻고자 하였다. 그러나 야마나카는 취재진들이 보고 있는 앞에서 "세금 같은건 50년 밖에 다루지 않아서 잘 모르겠다"며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다.
2003년 제4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당선되어 당시 최고령 정치인으로 기록되었다. 하지만 다음해인 2004년 2월 20일 폐렴으로 인해 8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이로서 55년 체제 이전에 첫 당선된 국회의원은 모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3. 소속정당
소속 | 기간 | 비고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947 - 1950 | 정계 입문 |
| 1950 - 1955 | 입당 |
| 1955 - 2004 | 신설 합당[5] |
4. 선거이력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47 | 제1대 가고시마현의회 선거 | 가고시마현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 (-%) | 당선 | 초선 |
1951 | 제2대 가고시마현의회 선거 | | - (-%) | 당선 | 재선[6] | |
1953 | 제2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구) 가고시마 3구 | 34,078 (17.1%) | 당선 (2위) | 초선 | |
1955 | 제2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30,383 (15.0%) | 재선 | |||
1958 | 제3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 52,035 (25.5%) | 3선 | ||
1960 | 제2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53,088 (26.6%) | 당선 (1위) | 4선 | ||
1963 | 제3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59,284 (29.4%) | 5선 | |||
1967 | 제3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58,241 (28.12%) | 6선 | |||
1969 | 제3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59,880 (31.03%) | 7선 | |||
1972 | 제3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49,911 (24.80%) | 당선 (2위) | 8선 | ||
1976 | 제3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56,502 (27.08%) | 9선 | |||
1979 | 제3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52,313 (24.73%) | 10선 | |||
1980 | 제3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58,352 (27.17%) | 11선 | |||
1983 | 제3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58,474 (26.68%) | 12선 | |||
1986 | 제3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87,672 (40.42%) | 당선 (1위) | 13선 | ||
1990 | 제3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62,460 (29.13%) | 낙선 (3위) | |||
1993 | 제4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89,515 (43.84%) | 당선 (1위) | 14선[7] | ||
1996 | 제4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가고시마현 제5구 | 106,373 (61.30%) | 당선 (1위) | 15선 | |
2000 | 제4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10,962 (60.64%) | 16선 | |||
2003 | 제4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00,851 (61.59%) | 16선[8] |
5. 일화
야마나카는 가고시마현 출신의 호쾌한 인품과 세제 관련 일화 등 여러가지 에피소드들을 남겼다.- 초선 의원 시절 요시다 시게루 총리에게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위해 매번 본회의장 입구에 기다리고 있었지만, 요시다가 자신의 인사를 받고도 무시하자 "이봐! 기다려! 요시다, 뭐야 그 태도는!"이란 호통을 치며 소란을 피운 일화가 있다.
- 1988년 소비세 도입 문제로 자민당 본부에서 회의가 열렸을때 야마나카는 "전원 낙선한다는 각오로 임하라"는 말을 하며 회의를 시작했다. 소비세 문제 논의 중 당세조 부회장 무토 가분 의원이 "소비세는 국민들의 이해를 위해서라도 1년 동안의 유예기간을 가지고 시행해야 한다, 그러므로 소비세 법안은 1990년 상반기에 실시해야 한다"라는 의견을 냈을때 야마나카는 "누가 1년의 유예기간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는가? 나는 1989년 4월 시행으로 이미 결정했다"라며 무토의 의견을 묵살했다.
- 소비세 도입시의 세율에 대해서 대장성에서는 5%를 주장했지만 자민당의 세금조사 결과 저소득층에 대한 배려를 고려한 야마나카의 방침으로 3%가 되는 것으로 결정했지만, 5%를 당연시하고 있던 요시노 요시히코 당시 대장 사무차관은 자민당 세금조사에 따라 소비세율 3%라는 결정을 들었을 때 차관직에서 경질되고 말았다.
- 세제조사회장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최고 고문으로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어, 제1차 모리 내각 발족시 새 경제정책에 자민-공명-보수 3당과 관계 관료들의 합의를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야마나카가 해당 정책에 반대해 그 정책이 무산된적이 있다.
- 방위청 장관 재직 시절 74식 전차의 이름을 "야마나카식 전차"로 명명할것을 방위청 장비국에 요구했으나, 기각되었다.
6. 기타
- 1970년 초대 오키나와개발청장관으로 재직하며 일본 본토보다 낙후되있던 오키나와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고, 오늘날 오키나와 지방에는 그의 공을 기려 그의 동상이나 이름을 딴 거리가 존재하고 있다.[9]
- 2014년 4월 가고시마현 소오시에 위치한 야마나카의 옛 자택에 야마나카 사다노리 기념관이 개관했다.# 이때 개관 행사 당시 나카이마 히로카즈 오키나와현지사가 참석했고, 이때 야마나카에게 제1호 명예 오키나와현민증이 수여되었다.
[1] 1964년 고노의 사망 이후에는 나카소네 야스히로의 정책과학연구소에 합류했다.[2] 야마나카가 대장 정무차관에 발탁될 당시, 대정 사무차관들이 풋내기인 그가 정무차관에 오르는게 말이 안된다며 이 인사를 저지하려 시도했지만 실패로 끝났다.[3] 단, 환경청 장관으로 재직한건 내각 개조 이후 단 4일 뿐이었고 실질적인 환경청 장관 임무는 농림대신직을 지냈던 오이시 부이치(大石武一, 1909-2003)가 수행했다.[4] 한때 개표방송에서 "야마나카 당선 확실"이라는 보도가 뜨며 당선 만세 삼창까지 했으나, 개표가 진행되고 당확이 취소되면서 현장에는 지지자가 모두 떠나는 사태가 벌어져 당확보도의 오차가 문제가 됐다.[5] 일본민주당과의 신설 합당.[6] 1953.3.24 사퇴 (중의원 선거 출마)[7]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의 마지막 중선거구제.[8] 2004.2.20 임기 중 사망[9] 그는 과거 사쓰마번이 류큐국을 속국으로서 지배했던 역사에 대한 속죄의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1971년 닉슨 쇼크 당시 오키나와현에 한해서 1달러 환율을 360엔으로 유지시켰으며, 슈리성 복원 정책도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등 오키나와를 배려하는 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분류
- 일본의 남성 정치인
- 일본 환경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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