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임 지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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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국 제20대 방위청 장관 | |
<colcolor=#fff><colbgcolor=#3CA324> 일본국 제24-34, 36-38대 중의원 의원 마쓰노 라이조 松野頼三 | Matsuno Raizō | |
출생 | 1917년 2월 12일 |
구마모토현 야마가시 | |
사망 | 2006년 5월 10일 (향년 89세) |
도쿄도 미나토구 | |
학력 | 도쿄도립대학 부속고등학교 (졸업) 게이오기주쿠대학 법학부 (정치학 / 학사) |
정당 | |
의원 선수 | 15 (중) |
의원 대수 | 23, 24, 25, 26, 27, 28, 29, 30, 31, 32, 33, 34, 36, 37, 38 (중) |
지역구 | 舊 구마모토 1구 |
가족 | 부친 마츠노 츠루헤이 장남 마쓰노 요리히사 손녀 마츠노 미카 |
악력 | 구마모토 전기철도 대표이사 총리 부총무장관 노동대신 보안청 장관 농림대신 자유민주당 정무조사회장 자유민주당 총무회장 |
군사 경력 | |
임관 | 육군경리학교 (6기) |
복무 | 일본제국 육군 |
1941년 ~ 1945년 8월 | |
최종 계급 | 소령 |
참전 | 태평양 전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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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전직 정치인.2. 생애
1917년 2월 12일 일본 제국 구마모토현 가모토군 (현 야마가시)에서 정치가 마츠노 츠루헤이의 3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유년기 시절에는 도쿄로 이주해 일본 굴지의 명문 사립학교인 아자부 중학교를 거쳐 게이오기주쿠대학 법학부 정치학과를 졸업했다. 대학교 졸업 이후 히타치 제작소에서 근무하다가 1940년 일본 해군 경리학교에 입학해 소령으로 임관했고, 1945년 태평양전쟁 종전과 일본의 패망으로 군생활의 끝을 맞이했다.종전 이후 아버지 쓰루헤이가 요나이 내각의 철도대신을 역임했다는 이유로 GHQ에 의해 공직추방을 당하자, 그를 대신해 구마모토 전기철도 대표이사를 거쳐 정계에 진출했다. 마쓰노는 요시다 시게루의 비서를 거쳐 1947년 제2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일본자유당 소속으로 구 구마모토 제1구에서 1위로 첫 당선에 성공한다. 이후 요시다 시게루의 자유당을 거쳐 1955년 자유민주당 합당에 참가했고, 자민당에서 사토 에이사쿠파 (주산회)에 소속되어 사토의 최측근인 사토파 5봉행(다나카 가쿠에이, 호리 시게루, 아이치 기이치, 하시모토 도미사부로, 마쓰노 라이조)에 속했다.
이후 사토파 5봉행의 일원으로서 기시 노부스케와 사토 에이사쿠 형제에게 자주 등용되었고, 1958년 6월 제2차 기시 내각에서 총리 부총무장관으로서 처음 입각한 것을 시작으로 노동대신, 방위청 장관, 농림대신과 같은 요직들을 맡았다.
1966년 농림대신 재직 중 딸 부부와 라스베가스 등의 관광지들을 사비가 아닌 관비로 여행했다는 사실이 야당에 의해 밝혀졌고, 이것이 검은 안개 사건[1]으로 커지며 대신 자리에서 경질되었다. 중의원 해산 직후 치러진 1967년 제3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낙선하지는 않았지만 한동안 입각과는 먼 정치생활을 해야만 했다.
1972년 사토의 퇴진으로 일어난 후계 다툼인 각복전쟁에서는 사토의 뜻을 이어 받아 후쿠다 다케오를 지지했다. 1974년 다나카 가쿠에이가 록히드 사건으로 실각하고 미키 다케오가 후임 총재에 오르자 자민당 대다수 파벌들이 미키를 총재에서 끌어내리려는 미키 내림에 참여했다. 하지만 미키 내림의 과정에서 칠일회의 수장인 후쿠다와의 의견 차이로 사이가 점차 소원해졌고, 마쓰노는 후쿠다파에서 미키의 측근으로 라인을 갈아탔다.
미키는 마쓰노를 나카소네 야스히로의 뒤를 잇는 후임 간사장직에 앉히려 했지만, 오히라 마사요시와 후쿠다 다케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그리고 이 일을 계기로 후쿠다에게 단단히 찍힌 마쓰노는 후쿠다파에서 탈퇴하여 무파벌을 유지하였고, 후쿠다에게 배신자, 하구레(はぐれ)[2]라는 소리를 들으며 비난 당했다. 그리고 이러한 마쓰노의 입장을 유일하게 이해해준 사람이 있었으니, 그것은 다름아닌 당시 초선의원이었던 고이즈미 준이치로였다.[3]
1979년 1월, 미국의 군용기 제작회사 노스롭 그루먼사가 자신들이 제작한 군용기 E-2기의 일본 내 매입을 위해 일본의 무역회사 닛쇼 이와이(현 소지츠)사로 부터 고위층들에게 로비를 지시한 사실이 미국 증권거래위원회에 의해 밝혀졌다. 이와 관련해 도쿄지방검찰청의 특별수사부의 수사 중 마쓰노가 닛쇼 이와이 로부터 5억엔의 정치 헌금을 수뢰한 사실이 드러났고, 중참 양의원 청문회의 증인 심문에서 야당 의원들에게 강한 질책을 당했다.[4] 마쓰노는 그해 7월 25일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고 의원직 사퇴와 함께 자민당을 탈당했다. 그리고 10월에 열린 제3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정치 인생 처음으로 낙선을 겪는 굴욕을 당했다. 1년뒤 제3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당선되어 국정에 복귀했고, 그 직후 자민당에 복당하였다.
1984년 자민당 총재 선거를 앞두고 다나카파의 분열 속에 니카이도 스스무를 총리로 옹립하려는 니카이도 옹립구상 계획을 세웠다. 니카이도와 마쓰노는 같은 요시다 스쿨 출신이자 규슈지방 출신, 사토 에이사쿠 로부터 중용 받은 경험이 있어 뜻을 같이 했던 사이였다.
1990년 제3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자민당 심판과 세대 교체 열풍으로 낙선하며 정계에서 은퇴했다. 이후 전 구마모토지사 호소카와 모리히로가 정계에 진출할때 그의 후견인 역할을 해주었고, 정치 원로로서 고이즈미 준이치로 내각의 발족과 민주당 - 자유당의 합당(민유합병)에 숨은 기여를 하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했다.[5]
2006년 5월 10일 도쿄 미나토구의 병원에서 심부전으로 인해 8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라이조는 병원 입실 3일전 위장 통증으로 인해 입원했으나 실제론 심장에 문제가 있었다는게 추가 검진을 통해 밝혀졌고, 뒤늦게 병원측에서 심장 마사지를 했지만 효과를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그의 사후 정3위와 욱일대수장이 수여되었다.
3. 소속정당
소속 | 기간 | 비고 |
| 1945 - 1948 | 정계입문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948 | 정당 해산 |
| 1948 - 1950 | 창당 |
| 1950 - 1955 | 창당 |
| 1955 - 1979 | 합당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979 - 1980 | 비리 혐의로 인한 탈당 |
| 1980 - 2006 | 복당 정계은퇴 사망 |
4. 선거이력
연도 | 선거 종류 | 지역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47 | 제2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구마모토 1구 | | 48,174 (15.71%) | 당선 (1위) | 초선 |
1948 | 제2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 67,268 (20.75%) | 재선 | ||
1952 | 제2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 53,258 (13.74%) | 당선 (2위) | 3선 | |
1953 | 제2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54,880 (14.98%) | 당선 (1위) | 4선 | ||
1955 | 제2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51,574 (13.79%) | 당선 (4위) | 5선 | ||
1958 | 제2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 88,361 (20.74%) | 당선 (2위) | 6선 | |
1960 | 제2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78,816 (20.48%) | 7선 | |||
1963 | 제3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84,667 (20.86%) | 8선 | |||
1967 | 제3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82,785 (19.66%) | 당선 (2위) | 9선 | ||
1969 | 제3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80,888 (17.45%) | 당선 (1위) | 10선 | ||
1972 | 제3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81,704 (16.86%) | 당선 (2위) | 11선 | ||
1976 | 제3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94,173 (17.46%) | 12선[6] | |||
1979 | 제3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67,082 (12.45%) | 낙선 (6위) | ||
1980 | 제3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83,988 (14.96%) | 당선 (5위) | 13선 | ||
1983 | 제3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 82,787 (14.94%) | 당선 (3위) | 14선 | |
1986 | 제3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77,469 (13.29%) | 당선 (5위) | 15선 | ||
1990 | 제3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78,538 (12.20%) | 낙선 (7위) |
5. 기타
- 생전에는 좌담의 명수로서, 기자들과 단독 인터뷰가 있을때마다 밤을 샐때까지 자신의 일화를 계속해서 얘기했던 것으로 유명했다. #
[1] 당시 자민당 내에서 고위층 인사들의 잇단 비리와 권력 남용 사태가 야당과 언론에 의해 발각된 사건이다.[2] 일본어로 떠돌이, 외톨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단어 이다.[3] 라이조는 준이치로의 부친인 고이즈미 준야와 두터운 친분을 가지고 있었고, 후쿠다파에서 준이치로의 후견인 역할을 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4] 특히 일본 여성계의 대모인 이치카와 후사에(市川房枝, 1893-1981)로 부터 강한 질책을 당해, 그 잘못을 인정한 마쓰노가 자신의 혐의를 모두 인정했다는 후일담이 있다.[5] 한편 라이조의 정계 은퇴 이후의 지반은 장남 마쓰노 요리히사에게 이어저, 2012년 민주당 정권이 붕괴되기 이전까지 보수 강세의 구마모토현에서 혁신 세력이 유지될수 있었던 기반을 다졌다.[6] 1979.12.15 의원직 사퇴 및 자민당 탈당
분류
- 일본의 남성 정치인
- 자유당(1950년) 국회의원
- 자유민주당(일본) 국회의원
- 1917년 출생
- 2006년 사망
- 야마가시 출신 인물
- 제23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24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25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26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27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28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29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30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31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32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33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34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36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37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38대 일본 중의원 의원
- 게이오기주쿠대학 출신
- 일본 방위대신
- 일본 노동대신
- 일본 농림수산대신
- 정3위
- 욱일대수장
- 심부전으로 죽은 인물
- 일본의 정치인 자녀
- 일본 제국의 군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