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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국 제40대 운수대신 | |
일본국 제19·26대 건설대신 | |
일본국 제27·28대 내각관방장관 하시모토 도미사부로 橋本登美三郎 | Hashimoto Tomisaburo | |
<colbgcolor=#3333cc><colcolor=#fff> 출생 | 1901년 3월 5일 |
이바라키현 나메가타군 이타코정 (現 이바라키현 이타코시) | |
사망 | 1990년 1월 19일 (향년 88세) |
도쿄도 신주쿠구 | |
학력 | 와세다대학 (정치경제학 / 학사) |
정당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지역구 | 舊 이바라키현 제1구 |
의원 선수 | 12 (중) |
의원 대수 | 24, 25, 26, 27, 28, 29, 30, 31, 32, 33, 34, 35 |
서훈 | 훈1등 욱일대수장 |
약력 | 아사히신문 특파원 시오라이촌 촌장 중의원 의원 제19·26대 건설대신 제40대 운수대신 수도권 정비위원회 위원장 제27·28대 내각관방장관 자유민주당 총무회장 자유민주당 간사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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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전직 정치인.2. 생애
1901년 3월 5일 이바라키현 나메가타군 이타코정 (현 이타코시)에서 태어났다. 구제 사하라 중학교 (현 치바현립 사하라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와세다대학 정치경제학부에 입학, 졸업후 1927년 아사히 신문사에 입사했다. 이후 만주에 특파원으로 파견된 것을 시작으로 중화민국에서 활동했다.1936년부터 1937년 8월까지 난징 지국에 근무하면서 난징통신국장으로 근무했다. 이때 일본군이 난징을 점령 했을때 후배 기자 15명을 데리고 선두에 섰다. 이 당시 벌어진 난징대학살에 대해선 학살을 부정하는 부정론적 입장을 표명했다.
이후 외신부장, 동아부장을 역임하고, 일본이 패전한 1945년 아사히 신문을 퇴사했다. 1946년 제2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무소속 후보로 이바라키현 전현구 선거구에 입후보 하지만 낙선, 이후 시오라이촌의 촌장으로 추대된다. 이듬해인 1947년 제2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민주자유당 후보로 구 이바라키현 제1구 선거구에 입후보 하여 첫 당선에 성공한다.
당선 이후 우정관계와 전기통신관계와 밀접한 우정족 의원으로 활동했고, 1955년 보수 합동 당시 하시모토의 은사 요시다 시게루가 자민당 참여를 거부했고 요시다의 측근 사토 에이사쿠도 이를 따랐다. 하시모토는 사토의 신당 불참가를 이유로 2명이 참가하지 않는 한 신당 참가를 거부하는 것을 표명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3명은 무소속으로 남았다.
1957년 사토의 친형 기시 노부스케가 자민당에 입당하자, 기시와 이케다 하야토의 설득에 의해 하시모토는 요시다, 사토와 함께 자민당에 입당한다.
1960년 미-일 안보조약 체결 문제로 자민당과 사회당의 격한 대치가 이어지는 가운데 5월 19일 국회의사당에서 알박기 투쟁을 하고있던 사회당 의원들을 경찰력을 동원해 강제로 끌어내어 조약 체결을 강행 처리하지만, 국회 밖에서의 안보투쟁으로 상황은 점점 더 악화되어 갔다.
당시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 환영 위원회의 위원장을 맡고 있던 하시모토는 우익단체와 경찰력만으로 시위대를 억제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암흑가(야쿠자)의 힘을 빌려 시위를 제압하는 조치를 취했다. 이런 혼란 끝에 신안보 조약은 성립 되었지만, 여러가지 혼란과 민심악화로 인해, 6월 23일, 기시 내각은 총사직하며 해산되었다.
1960년 이케다 하야토가 이끄는 제1차 이케다 내각의 건설대신 겸 수도권 정비위원회 위원장으로서 첫 입각했으며, 사토 에이사쿠의 측근으로서 다나카 가쿠에이, 호리 시게루, 아이치 기이치, 마쓰노 라이조[1]와 함께 사토파 5봉행 (佐藤派五奉行)의 한 축을 차지하였다.
1964년 사토 내각이 발족, 내각 관방장관, 건설 대신, 당 총무 회장, 운수 대신직을 역임했고, 사토의 퇴진으로 일어난 각복전쟁에선 다나카파의 주요간부로서 총재 선거에서 다나카 가쿠에이를 옹립, 다나카 내각 성립을 계기로 자민당 간사장으로 취임했다.
운수대신 재임 중이던 1970년, 일본항공 소속 항공기가 상공에서 극좌파들에 의해 납치되는 요도호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당황한 일본정부는 운수상인 하시모토와 야마무라 신지로 운수 정무차관을 한국에 급파하여 범인들과의 협상을 추진한다. 이 시기, 하시모토는 본인 스스로 인질이 될 것을 주장하지만, 사토 총리는 현직 각료인 하시모토를 위험에 빠뜨릴 수 없다고 하여, 야마무라 운수 정무 차관이 대신 인질이 되었다.
그 후 운수대신으로써 일본 고도경제성장기의 운수행정을 수행하고 있었지만, 재임 중 전일본공수로부터 거액의 뇌물을 수뢰받은 혐의가 드러나, 록히드 사건의 주요 용의자 중 하나로 지목되어 다나카 가쿠에이 총리와 함께 체포된다. 체포 직후 자민당을 탈당하고 곧이어 치러진 34회 중원선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했지만, 전체 3위로 당선에 성공했다.
1977년 3월 5일에는 이바라키현 시오라이초의 사찰에서 불교 신자 100명과 공양을 드리고 있던 도중, 록히드사건에 불만을 품은 남자에게 칼로 왼쪽 어깨를 찔러 경상을 입는 사건도 발생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전임 경호원을 두라는 의견이 측근으로부터 있었지만 하시모토 본인이 자민당 간사장 시절부터 신변 경호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내 거절하였다고 한다.
1980년 제3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낙선한 이후로 정계에서 은퇴했다.[2] 록히드 사건에서는 1심·2심에서 징역 2년 6개월 집행 유예 3년, 추징금 500만엔의 판결을 선고 받았다. 상고 중인 1990년 1월 19일 향년 88세의 나이로 사망했고, 재판은 공소 기각 처분 되었다.
3. 소속 정당
소속 | 기간 | 비고 |
| 1946 - 1948 | 정계입문 |
| 1948 - 1950 | 창당 |
| 1950 - 1955 | 합당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955 - 1957 | 탈당[3] |
| 1957 - 1976 | 입당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976 - 1990 | 록히드 사건으로 인한 탈당 정계은퇴 사망 |
4. 선거 이력
연도 | 선거 종류 | 지역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46 | 제2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이바라키 전현구 | | ? | 낙선 (14위) | [4] |
1947 | 제2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이바라키 1구 | 25,882표 (10.9%) | 낙선 (5위) | ||
1949 | 제2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 54,060표 (22.5%) | 당선 (1위) | 초선 | |
1952 | 제2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 37,331표 (12.3%) | 당선 (5위) | 재선 | |
1953 | 제2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54,887표 (17.7%) | 당선 (2위) | 3선 | ||
1955 | 제2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38,922표 (12.3%) | 당선 (4위) | 4선 | ||
1958 | 제2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 73,034 66,860표 (21.2%) | 당선 (1위) | 5선 | |
1960 | 제2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69,923표 (21.0%) | 6선 | |||
1963 | 제3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68,202표 (22.2%) | 7선 | |||
1967 | 제3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70,460표 (21.7%) | 8선 | |||
1969 | 제3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76,082표 (20.7%) | 9선 | |||
1972 | 제3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00,909표 (25.4%) | 10선 | |||
1976 | 제3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73,034표 (18.6%) | 당선 (3위) | 11선 | |
1979 | 제3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73,643표 (18.4%) | 당선 (1위) | 12선 | ||
1980 | 제3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70,020표 (14.7%) | 낙선 (5위) |
5. 나리타 공항의 건립 관련 문제
- 나리타 국제공항이 현 위치에 건립시킨데 큰 기여를 한 인물이다. 하시모토는 관방장관 재직 시절인 1965년 신도쿄 국제공항 (현 나리타공항) 부지를 치바현의 토미사토시로 하기로 내정했지만, 다음날 열린 기자회견에서 갑자기 각료 회의에서 공항 건립 부지를 변경할것이라고 발언해 주변의 혼란을 주었다.[5] 이시하라 신타로에 따르면, 당시 3선을 노리던 사토 에이사쿠 총리가 자민당 부총재인 가와시마 쇼지로로부터 협력을 얻기 위해 하시모토의 동의를 구해 공항 건설 부지를 변경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이시하라가 주장한 이야기의 시간대가 맞지않고,[6] 도쿄만 매립설을 지지하던 가와시마가 산리즈카 건립설을 처음부터 주장한것이 이상하다고 이 발언을 반박하는 의견도 있다.
- 이후에도 운수상 재임 시기인 1971년 공항부지 건설을 둘러싸고 원주민과 경찰간의 유혈사태가 발생하자, 아무리 유혈사태가 발생하더라도 끝까지 공항 건설을 완수하겠다는 강경론을 내세웠다. 그해 나리타시 시장 선거를 앞두고 공항 건설 반대파의 회장 토무라 잇사쿠와 회담을 가졌지만, "공항 건설은 중지하지 않는다", "공항 범위 내에 토지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토무라)과는 논의하지 않는다" 라고 되돌려 보내는 등, 회담은 아무런 논의도 하지 않은 채로 20분만에 끝났다.
6. 기타
- 독실한 불교신자로 유명했다. 간사장 재임시절 승려들이 정치인들의 행태에 대해 비판하자 "젊은이가 신흥 종교에 빠지는 비율이 늘어나는 이유는 마음의 어딘가를 놓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을 구하기에는 정치의 역할도 크지만, 뭐니뭐니해도 그들의 마음의 틈새를 메우는 것은 종교가의 의무가 아닌가. 그런데 당신들은 종조가 어렵게 일군 번영 위에 책상다리를 하고 오히려 으스대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지금이야말로 스스로 설법을 해서 젊은이를 구하기 위해 진력하는 것은 어떨까." 라고 말했다.
[1] 마쓰노 요리히사의 부친.[2] 낙선 후 하시모토의 지역 기반은 같은 (구) 나메가타군 출신이자 현 중의원 의장인 누카가 후쿠시로가 계승했다.[3] 자유민주당 창당에 불참여.[4]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의 마지막 대선거구제.[5] 이때 치바현 지사 업무를 대리 수행하던 부지사 가와카미 키이치도 이날 라디오 뉴스를 전해 듣고 해당 소식을 알았을 만큼 공항 건설 부지 변경 계획은 갑작스럽게 정해진것이었다.[6] 일본 운수성이 신도쿄 국제공항 토미사토 건립 계획을 처음 세운 시기는 1963년 12월이고, 사토의 총재 3선은 1968년 11월이다. 즉 5년 1개월이나 시간 차이가 나는 셈이다.
분류
- 일본의 남성 정치인
- 이타코시 출신 인물
- 1901년 출생
- 1990년 사망
- 일본 내각관방장관
- 일본 운수대신
- 일본 건설대신
- 자유당(1950년) 국회의원
- 자유민주당(일본) 국회의원
- 자유민주당(일본) 간사장
- 제24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25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26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27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28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29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30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31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32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33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34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35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와세다대학 출신
- 기자 출신 정치인
- 욱일대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