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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230ae><colcolor=#c3c965> 출생 | 1901년 3월 27일 | ||
야마구치현 쿠마게군 타부세정 | |||
사망 | 1975년 6월 3일 (향년 74세) | ||
도쿄도 미나토구 도쿄지케이카이의과대학 부속병원[1] | |||
재임기간 | 제61대 내각총리대신 | ||
1964년 11월 9일 ~ 1967년 2월 17일 | |||
제62대 내각총리대신 | |||
1967년 2월 17일 ~ 1970년 1월 14일 | |||
제63대 내각총리대신 | |||
1970년 1월 14일 ~ 1972년 7월 7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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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 | 형 사토 이치로[3], 기시 노부스케 누나 4명[4], 여동생 3명[5] | ||
배우자 | 사토 히로코 | ||
자녀 | 장남 사토 류타로[6] 차남 사토 신지[7] | ||
손주 | 손자 사토 에이지, 손녀 사토 미치코, 사토 미카 | ||
증손주 | 증손자 사토 에이스케 | ||
친인척 | 조카 기시 노부카즈, 아베 요코 조카사위 아베 신타로 외종손 아베 히로노부, 아베 신조 종손 기시 노부오[8] 종증손 기시 노부치요 손녀사위 아다테 마사시 | ||
학력 | 쿠니키 심상소학교 (졸업) 야마구치 중학교 (졸업) 제5고등학교[9] (졸업) 도쿄제국대학 법학부 (독일법학 / 학사) | ||
정당 | |||
지역구 | 야마구치 2구 (중선거구) | ||
의원 선수 | 10 (중) | ||
의원 대수 | 24, 25, 26, 27, 28, 29, 30, 31, 32, 33 | ||
약력 | 고등문관시험 합격 철도성 관료 운수성 철도총국 장관 운수성 차관 제4대 내각관방장관 중의원 의원 제3대 민주자유당 정무조사회장 초대 자유당 정무조사회장 제2·5대 자유당 간사장 제3대 전기통신대신 제3대 우정대신 제4·21-22대 홋카이도개발청 장관 제7대 건설대신 제3대 자유민주당 총무회장 제64대 대장대신 제22대 통상산업대신 제12·13대 과학기술청 장관 제5대 자유민주당 총재 제91대 외무대신(내각총리대신 겸직) 제61-63대 내각총리대신 | ||
칭호 | 종1위 대훈위 국화장경식 도쿄제국대학 법학사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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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정치인. 제61~63대 내각총리대신을 역임했다. 7년 8개월을 재임하며 훗날 외종손자 이전까지 전후 최장 재임 총리였다. 8년 가까운 그의 집권기간동안 일본은 미국으로부터 오키나와를 반환받았고, 더불어 미국, 소련 다음 가는 경제대국으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하였다.[10] 또한 이 시기 자유민주당은 최전성기라고 평가받아, 이케다 하야토와 함께 자민당의 최전성기를 열고 이끈 인물로 평가받는다.기시 노부스케 전 내각총리대신의 친동생이며[11] 고노에 후미마로 내각 밑에서 일했던 마츠오카 요스케 외무대신은 그의 백부뻘 되는 사람이다. 그리고 부인은 외사촌지간이다.[12] 또한 일본 역사상 최장 집권 총리인 아베 신조의 외종조부이기도 하다.
영향력과 존재감에 있어서 형인 기시 노부스케, 역대 최장수 참의원 의장인 시게무네 유조(重宗 雄三)와[13] 더불어 조슈 고산케(長州御三家)라고 불리었다.[14]
별명은 인사의 사토(人事の佐藤), 귀 밝은 에이사쿠(早耳の栄作)다. 별명이 아예 쇼와의 요괴였던 형 기시 노부스케가 그랬듯이 이 사람도 주도면밀한 정치가였다. 그 외에
비핵 3원칙[17]을 내세운 공로로 1974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는데, 이로써 일본인으로서 최초의 노벨평화상 수상자가 되었다. 형은 전범재판에까지 회부된 인물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참 아이러니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2. 생애
도쿄제국대학 재학 시절 |
형 기시 노부스케 가족, 사촌 요시다 히로시[18]와 함께한 사토(맨 뒤) |
철도성 시절[19] |
1901년 야마구치현 타부세정(田布施町)에서 양조업을 영위하던 사토 히데스케의 3남으로 태어났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양조장은 대개 지역 유지가 경영했고 사토의 집안도 그랬다.[20] 공부를 매우 잘했기에 명문 구제 야마구치 중학교와 구제 제5고등학교를 거쳐 도쿄제국대학 법학부를 독일법 전공으로 졸업했다. 사실 그의 큰형 이치로와 둘째형 기시 노부스케도 이름난 수재들이었는데, 고향에서는 사토 삼형제를 가리켜 '머리는 위에서부터, 배짱은 밑에서부터'라고 일컬었다.
1923년 12월 고등문관시험 행정과에 합격하였고 1924년 4월 대학 졸업 후 철도성[21] 관료로 입성했다. 그러나 '해군 창설 이래 최고의 수재' 라고 불렸던 큰형 이치로나 일찍이 혁신관료로 주목받아 출세가 빨랐던 둘째형 기시에 비해 사토는 출세가 상당히 늦고 관료 경력에 곡절이 많았다. 1938년 철도성 감독국 철도과장, 1940년 감독국 총무과장, 1941년 감독국장, 1942년 감리국장, 1943년 운수통신성으로 개편된 뒤 자동차국장을 거쳤는데 육군의 고위 인사나 운수통신대신 고토 케이타 등과 마찰을 빚고서 1944년 오사카철도국장으로 좌천된다. 이 자리는 본성 국장 출신자가 갈 자리가 아니었기에 좌천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게 전화위복으로 작용한다. 오사카에 좌천되어 있던 덕에 1945년 패전 후 연합군에 의해 공직 추방을 당하지 않았던 것이다. 형 기시는 만주국의 고관을 지냈고 특히 도조 히데키 내각의 대신으로 입각한 경력 탓에 몇 년간 공직 추방을 당했다. 고위직이 쓸려나간 덕에, 그전부터 친분이 있었던 요시다 시게루에게 발탁되어[22] 1946년 운수성 철도총국 장관을 지내며 전쟁으로 붕괴된 철도망의 재건과 국철노조의 공세에 수완을 발휘하였고,[23] 1947년 가타야마 데쓰 내각에서도 운수성 차관을 지냈다. 이후 가타야마 내각의 실력자 니시오 스에히로(西尾末廣)로부터 내각관방차장[24] 취임을 제의받았지만 거절하고 아시다 히토시 내각이 붕괴된 후 출범한 2차 요시다 내각에서 비의원의 신분으로 1948년 내각관방장관에 취임한다. 이걸 보면 이미 그때 사토는 관료로서의 업무능력뿐만 아니라 정치력도 인정받았던 듯 하다.[25] 1949년 치러진 전후 최초로 치러진 중의원 총선거에서 무난하게 당선되었는데 이때 친우들이 많았던 사회당으로 출마하려고 했다가 형의 일갈에 일본 자유당 소속으로 출마했다고 한다. 이후 자유당 간사장 임기 중 비리 스캔들로 잠시 태클이 걸린 것 빼고는 꽤 무난한 출세 가도를 달려왔다. 형인 노부스케가 내각총리대신에 오르자 대장대신을 맡았고, 라이벌인 이케다 하야토 휘하에서도 통상산업대신을 맡는 등 요직을 많이 맡았다.
사실 사토의 집권엔 사법적인 운도 따랐다. 대표적으로, 그 유명한 '지휘권 파동'으로 살아남은 주인공이다. 당시 조선업 진흥을 위해서 조성한 기금의 정치자금 유용을 놓고서 수사를 진행하던 도쿄지검 특수부는 사토를 체포하려 했으나 요시다의 압력을 받은 이누카이 다케루[26] 법무대신이 검사총장에 대한 수사지휘권을 발동해서 사토에 대한 체포를 저지했다. 그리고 지휘권을 발동한 이누카이는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임해 버렸다… 이로 인해 여론의 반발이 일었고 이어진 선거에서 여당이 좋지 못한 성적표를 받으면서 6년 간 집권했던 요시다 내각은 붕괴했다. 이후 일본에서 법무대신의 수사지휘권은 사실상 사문화되었다. 한편 이때 호되게 당한 일본 검찰은 이 일을 교훈 삼아 후일의 록히드 사건 수사에서는 철저히 비밀유지를 해가며 다나카를 죄어 들어가 기습적으로 체포에 성공했다.
사토가 총리 자리를 의식하기 시작하면서 이케다와의 관계가 틀어지기 시작했는데, 그의 일기에서도 날이 갈수록 이케다에 대한 표현이 냉소적으로 변하는 걸로 보아선 상당히 불편한 관계였던 듯 싶다. 그러다가 이케다가 후두암으로 사임하자 자민당 총재 자리에 올랐다. 자동적으로 총리 자리 획득.[27]
총리에 취임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행. 가서 논란거리가 남아있었던 오키나와를 돌려받기 위해 린든 B. 존슨 대통령과 회담했지만 신통치 않자 오키나와로 달려갔다. 거기서 오키나와 주민들에게 일본은 당신네들을 한시도 잊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나서 다시 밀사를 통해 미국과 재협상 돌입. 그런 식으로 계속 밀어붙이자 지친 리처드 닉슨 美 대통령은 1972년 오키나와를 일본에게 돌려줬다. 이때 핵무기도 빼고 군대만 남기기로 합의한 일명 비핵 3원칙을 대대적으로 선언했고 이 공로를 인정 받아 1974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28]
오랜 기간 집권하였고 더욱이 집권 이래의 목표였던 오키나와 반환 완수라는 업적을 남기고 영광스러운 퇴진을 하였지만 그 이면에는 후계자를 정할 때 상당히 골머리를 앓았는데, 사토는 원래 후계자로 후쿠다 다케오를 점찍어두고 있었다. 그러나 정치 실세로 급성장한 다나카 가쿠에이를 막지 못했고 각복전쟁이 일어나는 걸 무력하게 지켜보았다. 어느새 커버린 계파원 다나카 가쿠에이의 힘을 보고 질려버린 사토는 총리 자리를 내던지듯이 사임하였다.
다만 형인 기시가 대놓고 다나카 혐오를 보인 탓에 겉으로만 다나카를 견제했을 뿐, 뒤로는 다나카를 은근히 지원했다는 주장도 적지 않다. 실제로 사토는 다나카가 10회 참의원 선거의 패배[29]와 정치자금 문제로 후쿠다 다케오와 미키 다케오 등으로부터 공격을 받을때 다나카에게 힘을 실어주었기 때문이다. 이후로도 자민당 원로회의에서 다나카를 씹어대는 형 기시와 말싸움까지 벌일 정도였다고. 이 무렵 다나카는 사토를 방문한 자리에서 눈물까지 흘렸다고 하며, 사토는 퇴임 후 가진 인터뷰에서 "후쿠다는 형 기시의 직계라고 보는게 정확하고, 나의 직계는 다나카"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총리 자리에서 물러나고 1974년 노벨평화상까지 수상한뒤 1975년, 74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30]. 최후가 약간 어이없는데 5월 19일 요정 신기라쿠[31]에서 열린 야마구치현 출신 정재계 실력자들의 모임인 장영회에 참석하였다가 뇌졸중으로 쓰러져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깨어나지 못하고 약 3주 뒤 사망하였다. 사후 대훈위국화장경식과 대훈위국화대수장이 동시에 추증됐다.
2.1. 총리로서의 활동
61대 총리 취임 후 |
각료 인선 후 기념 촬영을 한 사토 에이사쿠 내각의 모습 |
1964년 11월부터 1972년 7월까지 7년 8개월(2798일)동안 집권했다. 이는 총 재임 기간으로는 아베 신조, 가쓰라 다로에 이은 3번째 기록이며, 연속 재임 기간으로는 2020년 8월 24일에 아베 신조에게 경신당하기 전까지 최장 기록이었다.#[32] 이케다 하야토와는 구마모토 제5고등학교 동창이자, 요시다 시게루의 휘하에서 정치 생활을 해낸 요시다 스쿨 세대[33]. 그러나 총리 자리를 두고 동기나 친구 따위의 감정은 젖혀둔 채 사토가 총리 자리에 올라가는 시절은 지키려는 이케다와 뺏으려는 사토의 난투극으로 얼룩졌다.
전후 일본에서 가장 오랜 기간 집권한 영광을 누렸지만, 명문가 출신, 엘리트, 완벽주의자에 공무원 시절 생긴 깐깐한 성격까지 더해서 대중의 인기를 크게 받진 못한 케이스였다. 사토의 위엄있는 외모 또한 대중적 인기에는 오히려 마이너스가 되었다. 사토의 화려한 배경과 더불어 평범한 국민들 입장에서는 굉장히 거리감 있는 인물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게다가 사토는 입이 매우 무겁고 정책 결정 과정이나 인사(人事)에 있어서도 보안 유지를 중시하여 언론을 통해 적극적으로 정책을 홍보한 전임 총리였던 이케다 하야토와는 다르게 언론과도 사이가 별로였다. 오죽하면 언론계에선 '아와시마(淡島, 사토의 자택 소재지)[34]에 특종은 없다'는 말이 유행하였을 정도였다고 한다.
사토 사임회견 당시 이야기다. 깐깐한 성격 탓에 언론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사토는 사임회견에 신문사 기자들은 오지 않게 하라고 지시를 내려놨는데, 이게 싸인이 맞지 않아서 결국 신문사 기자들이 우루루 몰려와 회견을 기다렸다. 하지만 기자들을 본 사토의 반응은 매우 냉담했고, 급기야 "TV는 어디 있어! 신문사들 앞에서 이야기하기 싫어! 기자들은 나가! 난 국민과 직접 대화하겠다!"라고 소리쳤다. 그러자 신문사 기자들은 보란듯이 모두 빠져나갔고, 때문에 총리 사임회견이라는 빅 이벤트 장소에 남은 건 사토와 그의 보좌관 몇, 그리고 그를 촬영하는 TV 카메라맨 뿐이었다는 매우 훈훈한(?) 이야기. 하지만, 정작 당시 일본 국민들도 총리 사임에 별 관심이 없었다. 여기서 총리사임 기자회견 당시 모습을 볼 수 있다(약 1분 17초쯤 부터). 우루루 빠져나가는 신문기자들과 텅 빈 회의실에서 혼자 기자회견하는 모습이 일품이다.
또한 사토 집권 시기에 공명당으로 인한 범우파 표의 분열이 일어나, 자민당의 득표율이 50%대 중반을 기록하는 압도적인 수준에서 40%대 후반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일본 야권의 지지기반 또한 다당화되어가며[35] 자민당과 사회당 득표가 동시에 떨어지는 덕분에 의석의 현상유지는 가능했다. 공명당, 공산당, 민사당의 득표율과 의석이 불어나는데 반해 사회당의 의석수와 득표율은 오히려 떨어졌던 것. 사실 1960년대 중반부터 도쿄도를 비롯한 상당수 지자체에서 야당이 집권했지만 이러한 경향이 중/참의원 총선거로까지 이어지지는 않았다. 자민당 약세지역인 대도시에서도 야당 후보들이 각개각패 당하는 형국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사토는 마지막 선거인 1971년 참의원 선거에서 63석을 확보하는데 그치면서 낮은 인기를 확인했고, 지지율이 20%대로 떨어지면서 임기를 마감했다.
50년대 자민당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부총재 오노 반보쿠는[36] 이누카이 다케루[37] 전 법무 대신을 가리켜서 얼굴만 희멀건 쭉정이라고 무시하고 다녔는데, 이누카이의 은혜를 입은 사토가 이누카이에게 안부 인사 한번 다녀오지 않은 것을 친우인 오키 신지로 과기청 장관을 통해 알고는 격노하면서 이누카이를 자파로 초빙하였다. 이후 오노는 사토가 이누카이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은 것을 보고는 대놓고 반 사토를 외치고 다녔는데, 정작 사토는 장례식이 끝나고 반년 후에 이목을 숨겨가며 은인인 이누카이의 집으로 와 문상을 했다고 한다.
실제로 오노 반보쿠와는 견원지간이었다. 사토는 오노를 가리켜 지성없는 나니와부시(浪花節)[38], 오노는 사토를 가리켜 거만한 관료라고 서로 씹어댔다. 오노의 추모회에서는 서민적인 이미지의 오노가 반짱이라고 불리는 것처럼 자신도 에이짱이라고 불렸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나중에 "따로 칭찬할 거리가 없잖나." 라며 그저 서민적인 친근함 외엔 볼 게 없어서 그런 별명이 붙은 거라는 말도 했다. 실제로 후에 개그맨 출신 정치인인 요코야마 노크가 '에이짱'이라 불렀더니 무지하게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고 한다.
사실 사토가 총리, 총재가 되고 대파벌의 장으로 성공한 데는 다나카 가쿠에이라는 부하의 존재도 컸다. 사토는 다나카를 부려서 당내의 정보를 철저히 긁어모았고, 그것을 토대로 정치활동을 했다. 1950년대에 사토에게 붙은 별명인 "귀 밝은 사토"는 다나카의 헌신이 아니었다면 붙여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사토는 중의원에서 야당 의원의 질의에 대한 답변 도중에 "다나카는 나의 오른팔"이라고 공개적으로 언급할 정도였다.[39][40]
요약하면 사토는 대중적인 스킨십에는 워낙 취약해서 그다지 인기가 없었다. 그럼에도 사토가 장기 집권을 할 수 있었던 비결은 첫째, 막대한 자금 동원력[41]. 둘째, 교묘한 당내 역학관계 조정과 실력자들에 대한 인사[42][43]. 셋째, 참의원 내 자민당 세력에 대한 확고한 통제[44], 넷째는 야당 지지층의 다당화 경향으로 인한 일본사회당의 세력 약화, 마지막으로 개요에 설명했듯이 경제 호황을 들 수 있다.
3. 한국계 도래인 후손 설
이 문단은
<조건>
* 토론 관리 방침의 근거 신뢰성 순위 7순위 이상의 근거자료 위주로 서술하고, 그 외 한국계 도래인 설에 대한 주관적 의견은 최소화하여 서술한다.
* 사토 에이사쿠와 아베 신타로, 아베 신조가 공개 석상에서 한국계 도래인인지 아닌지를 직접 발언한 내용이 없음을 서술한다.
* 사토, 아베 가문이 도래인 후손이라는 내용이 명시되어 있는 일본 내 역사학적 기록이 확인되지 않음을 서술한다.
* 토론 관리 방침의 근거 신뢰성 순위 7순위 이상의 근거자료 위주로 서술하고, 그 외 한국계 도래인 설에 대한 주관적 의견은 최소화하여 서술한다.
* 사토 에이사쿠와 아베 신타로, 아베 신조가 공개 석상에서 한국계 도래인인지 아닌지를 직접 발언한 내용이 없음을 서술한다.
* 사토, 아베 가문이 도래인 후손이라는 내용이 명시되어 있는 일본 내 역사학적 기록이 확인되지 않음을 서술한다.
- 한국계 도래인 집안 설이 있다. 김충식 <동아일보> 논설위원이 2006년에 발간한 책 <슬픈 열도-영원한 이방인 사백년의 기록>의 내용에서, 임진왜란 직후인 1598년 일본에 끌려간 도공으로 일본의 도자기 종가를 이루게 된 심수관(沈壽官) 가문의 14대 후손을 인터뷰하는 과정 중 1964년부터 72년까지 일본 총리를 지낸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1901~75)가 죽기 1년 전인 1974년 자신을 찾아와 사토 집안도 임진왜란 이후 일본으로 건너온 한국계임을 직접 고백했다고 밝혔다는 것이다.
- 2016년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도 심수관 14대는 같은 얘기를 한다.14대는 사토 전 총리가 이 휘호를 써준 날을 어제처럼 기억한다. 사토 전 총리는 차를 대접받은 뒤 “좋은 차였습니다”고 인사하고는 “수관 씨, 몇 대째입니까”라고 물었다고 한다. “14대입니다”라고 하니 “저는 좀 더 짧을 겁니다. 당신네는 게이초(慶長·1596∼1615년) 때 왔는데 우리 선조는 그 뒤에 온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러고는 붓과 벼루를 청해 글씨를 써줬다는 것이다. 묵이식지는 말로 하지 않아도 알아줄 것은 다 알아주고 통한다는 뜻이다.이에 대해 14대는 “그 말의 진위를 따져보지는 않았지만 사토 총리의 고향인 야마구치(山口)는 예로부터 조선반도와의 교류가 가장 활발했던 지역이라 가능한 얘기일 것”이라고 말했다. 사토 에이사쿠는 아베 현 총리의 외할아버지인 기시 노부스케(岸信介)의 친동생이다. 1975년 세상을 떴다.#
- 이와 관련해서 사토 에이사쿠가 생전에 공개 석상에서 자신이 한국계 도래인 후손인지 아닌지에 대해서 직접 발언한 적은 없다.
- 현존하는 일본 내 사료(史料) 중에서 사토 가문의 시조가 도래인이라고 기록된 사료가 발견된 적은 없다.
4. 가족관계
자세한 내용은 아베 신조/가족관계 문서 참고하십시오.5. 선거 이력
연도 | 선거 종류 | 지역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49 | 제2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야마구치 2구 | | 52,850 (16.2%) | 당선 (1위) | 초선 |
1952 | 제2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 60,875 (17.8%) | 당선 (2위) | 재선 | |
1953 | 제2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68,386 (20.5%) | 당선 (1위) | 3선 | ||
1955 | 제2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63,229 (19.1%) | 당선 (1위) | 4선 | ||
1958 | 제2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 72,545 (19.7%) | 당선 (2위) | 5선 | |
1960 | 제2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74,830 (21.2) | 당선 (1위) | 6선 | ||
1963 | 제3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94,785 (26.0%) | 당선 (1위) | 7선[45] | ||
1967 | 제3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88,859 (22.5%) | 당선 (1위) | 8선[46] | ||
1969 | 제3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96,979 (23.1%) | 당선 (1위) | 9선[47] | ||
1972 | 제3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66,282 (15.2%) | 당선 (2위) | 10선[48] |
6. 여담
총리 시절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모습 |
- 외종손인 아베 신조가 나이가 들어갈 수록 점차 사토 에이사쿠의 얼굴을 닮아갔었다. 청장년기의 아베는 젊은 시절의 사토와 그리 닮지 않았지만, 나이가 노년에 들어서자 용모가 비슷해지는 경향이었다. 허나 아베는 사토보다 평균수명이 더 높은 뒷세대에 태어났음에도 암살로 인해 사토보다 더 젊은 나이에 숨졌다.
- 퇴임 후인 1974년 "핵무기를 만들지도, 가지지도, 들이지도 않는다"라는 비핵 3원칙을 내세운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받았는데, 당시 일본에서는 총재 선거에서 예전 보스의 심기를 거스른 다나카 가쿠에이가 사토와 관계 회복을 위해 전방위 로비를 편 끝에 노벨상을 안겨준 것 아니냐는 소문도 꽤 돌아다녔다고 한다. 어쨌든 결론적으로 형 기시 노부스케는 전범, 동생은 노벨평화상 수상자라는 이색적인 기록도 낳게 되었다.
- 일본에선 한때 신임 미국 대통령을 가장 먼저 만난 일본 총리는 단명한다는 속설이 있었는데, 이게 사토 이후의 일본 총리들에게 해당된다. 그 정점은 아무래도 빌 클린턴을 만나고 자민당 38년 여당의 종지부를 찍은 미야자와 기이치 총리와 버락 오바마를 만난 아소 다로 아닐까 싶다. 아베 신조는 도널드 트럼프를 만나고도 몇 년 더 재임하여 최장 재임 총리가 되었지만 제 명에 못 살고 암살당하여 다른 의미로 단명 총리가 되었다.[49] 조 바이든을 처음만난 스가 요시히데도 바로 그해에 총리직에서 내려와야 했다. 다만 아이러니하게도 사토가 만난 리처드 닉슨은 워터게이트로 반대 상황이 되었다. 물론 이런 속설은 총리 자리에 2년 이상 있기 힘든 일본 정치 자체의 특성 탓도 커보인다.
- 아이러니하게도 생전에는 대중적 인기를 누리지 못했지만 사후에는 일본에서 실시된 각종 총리평가 여론조사에서 요시다 시게루, 기시 노부스케, 이케다 하야토, 다나카 가쿠에이, 나카소네 야스히로와 같이 높은 순위를 차지하는 경우가 많다.
- 대외적인 이미지와는 달리 사적으로는 상당히 남을 돌봐주길 좋아하고 의리가 있었다고 한다. 철도성 관료 시절 대립했던 국철 노조원들이 은퇴 후 어려움을 겪자 도와주거나 중국에 근무하던 시절 인연을 맺은 홍사익의 유족들이 미국 이민을 가는데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면을 드러내는 성격은 아니었다.
- 히라누마 다케오를 비서로 두었다.
- 차남 사토 신지가 아버지인 에이사쿠의 출신지가 속한 야마구치현 제2구에서 중의원을 역임한 적이 있다.
- 야마사키 토요코의 소설 '운명의 인간(運命の人)'[50], 화려한 일족(華麗なる一族), 불모지대(不毛地帶)등에서는 '사하시 케이사쿠'로 이름이 약간 변경돼서 등장했다. 형인 이와오 전 총리와 함께 일본의 석유 이권을 장악하고 거기서 나오는 막대한 자금으로 정재계위에 군림하는 초거물이다.
- 나카소네 야스히로는 회고록에서 자신의 재상학(宰相學)은 사토 에이사쿠의 지도를 받은 것으로 여기고 있으며 "요시다 시게루의 재상학이 천성적인 것이라면 사토 에이사쿠의 재상학은 열심히 배우고 노력한 것"으로 평가하였다.
- 취미는 독서로, 총리가 된 후 업무에 바빠 책 읽을 시간을 갖지 못하자 ‘다이제스트 담당비서’를 두고 읽고 싶은 책을 요약토록 한 후 그걸 읽었다고 한다. 대통령 후보 시절의 김영삼이 지속적으로 자질 논란에 시달리자 측근들이 사토의 사례에서 힌트를 얻어 따라했고 김영삼도 처음에는 측근들의 뜻을 따랐으나 대통령이 되고 나서 점차 흐지부지되었다고 한다. #
- 본인의 장례식에서 미키 다케오 총리가 괴한에게 구타당한 일을 계기로 시큐리티 폴리스가 창설된다.
- 일본 역대 총리 중 첫 20세기 태생 총리이다. 동시대 인물이자 훨씬 늦게 사망한 쇼와 덴노와도 동갑이다.
- 헨리 키신저는 오키나와 반환을 둘러싸고 협상을 거듭한 사토의 식견을 높이 평가하여 사토 사후인 1979년 일본을 방문하였을 때도 사토 사저를 방문하여 사토의 영전을 조문하기도 하였다.
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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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케이카이는 한자로 자혜회(慈恵会)라 읽는다. 때문에 한국에서는 자혜회병원이라는 이름으로도 많이 불린다.[2] 혼전성은 기시.[3] 해군 중장[4] 타케코, 코마, 오토요, 치요코.[5] 미사오, 토시코, 야스코.[6] JR 니시니혼 이사, JR 니시니혼 호텔개발 회장, 데이고쿠 석유 고문 등 역임[7] 정치인. 운수상, 통산상 등 역임[8] 원래는 외종손이지만, 형 기시 노부스케의 양손자로 입적하여로 종손이 되었다.[9] 1949년 신학제 개편 때 구마모토대학에 통합되었다. 평생의 원수 이케다 하야토 총리와 동문이다.[10] 1969년 일본이 서독을 추월해 제1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 된 시기가 사토 에이사쿠 집권기이다. 일본이 소련까지 추월하고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 된 것은 나카소네 야스히로의 집권기인 1986년의 일로, 이후 2010년 중국에게 추월당할 때까지 20년 이상 세계 2위 자리를 유지했다.[11] 기시 노부스케와 사토 에이사쿠 형제의 아버지의 본성은 기시였는데, 데릴사위로 오면서 성을 사토로 바꾸었다. 하지만 기시 노부스케는 부친의 원래 성인 기시를 형제 중에 홀로 이어받았고, 사토 에이사쿠는 외조부와 아버지의 성인 사토를 이어받았으므로 형제끼리 성이 다른 것이다.[12] 사촌혼에 대해 한국이나 중국 등 일부 나라는 법으로 금지하고 있지만, 사촌 항목을 봐도 알 수 있듯 사촌혼을 인정하는 국가는 의외로 많다. 아니 한국, 중국, 미국 일부 주들 정도를 제외한 전세계 대부분의 국가들에서 허용된다. 물론 현대화되면서 유럽이나 일본도 젊은 세대들 사이엔 사촌혼이 상당히 터부시되는 경향이 있지만, 그래도 사촌혼이 우리나라처럼 그리 이상하게 받아들여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간 나오토 총리가 사촌혼을 했다가 일각에서 멸시받은 것처럼 사촌혼을 한 인물이 배척받는 사례도 없지는 않다.[13] 당시 참의원을 가리켜 시게무네 왕국이라고 할 정도였다.[14] 비슷하게 이들의 야마구치현 선배들인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토모, 이노우에 가오루를 한데 묶어 조슈삼존(長州三尊)이라고 불렀다.[15] 젊었을때 요정을 가면 게이샤들이 사토를 무더기로 따랐다고 한다.[16] 일본 가부키의 최고 명문가인 이치카와 종가 나리타야의 당주가 대대로 습명하는 '이치카와 단주로'에서 따온 별명. 이치카와 단주로는 그 시대 가부키계에서 절대적인 위치를 가지는 당대 최고의 가부키 배우로 여겨지기에, 단주로라는 이름이 미남의 대명사로 쓰인다.[17] '핵무기를 만들지도, 가지지도, 들이지도 않는다'고 선언[18] 吉田寛, 요시다 시게루의 맏사위였다. 요시다 시게루의 장녀 사쿠라코(桜子)(1910년 출생)의 남편으로 요시다 시게루처럼 외교관이었다. 아메리카국 제1과장 역임. 젊은 나이에 병사.[19] 형 기시 노부스케도 젊은 시절엔 콧수염을 길렀었다. 둘 다 종전 후 이미지 쇄신을 위해 밀었다.[20] 원래 집안에 대대로 양조의 권리가 인정되었고, 이 권리를 일시적으로 다른 곳에 대여하고 있었으나 1898년경 부친이 야마구치현청 공무원을 퇴직한 뒤 양조장을 시작했다. 어린 시절 지역에서 사토 가의 도련님으로 유명했던 모양.[21] 1943년 체신성과 합쳐져 운수통신성으로 개편된다.[22] 사토의 사촌동생이 요시다의 사위였다. 즉 전후 일본의 이름난 명문들중에서도 손꼽히는 요시다 가문과 기시-사토 가문은 혼맥으로 연결되는 규벌(閨閥)을 이룬다고 할 수 있다.[23] 이때 사토와 더불어 해운총국 장관을 지내며 철도의 사토, 해운의 아리타라고까지 불렸던 거물 관료가 아리타 기이치(有田喜一)였지만 아리타는 훗날, 요시다 시게루 대신 아시다 히토시의 요청에 응하였고 결국 사토와 비교하면 굉장히 평범한 정치인으로 머물렀다. 그래도 각료를 세차례나 지낸 정계의 중진이었다. 사토가 워낙 거물로 성장해서 그렇지...참고로 아리타가 처음 입각한게 사토 정권때였다.[24] 현 내각관방 부장관[25] 내각관방장관은 한국의 국무조정실장, 대통령비서실장의 역할이 합쳐진 요직으로 내각에서도 핵심 자리이며 당연하지만 조정력이 탁월한 인물이 맡는다.[26] 자유주의자로서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대의 최후 총리였던 이누카이 쓰요시의 외아들이었다. 참고로 다케루는 1920년대 내내 소설가로 꽤 나갔던 경력이 있다.[27] 이케다도 내심 사토가 자신의 뒤를 잇길 바랬는지 사토가 총재로 지명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비서관인 이토 마사나리에게 "잘됐다, 사토라면 내가 편하지"라고 말하였다고 한다.[28] 하지만 훗날 알고보니 이게 다 거짓 아니냐는 얘기도 나돌고 있다.[29] 이때 다나카는 선거에 500억엔에서 1천억엔을 동원하였다고 한다.[30] 그야말로 부와 권력과 명예 세가지 분야에서 모두 최고까지 다 누렸다고 볼 수 있다.[31] 일본에서 가장 비싼 요정으로 아쿠타가와상과 나오키상의 심사가 열리는 곳으로도 유명하다.[32] 요시다 시게루보다도 더 긴 총리 생활을 하였다.[33] 이케다를 정계로 끌어들인 게 사토라고 알려져 있다.[34] 현재의 세타가야구 다이자와(世田谷区 代沢). 다케시타 노보루 등도 거주하던 도쿄의 손꼽히는 부촌이다.[35] 일본의 선거제도가 중선거구제였기 때문에 제1야당에게 표를 몰아주는 식의 투표행태가 먹히지 않았던 측면도 있다. 물론 소선거구제라해도 2012년 이후의 일본에서는 다당화 경향이 뚜렸히 나타나기는 한다.[36] 한국에는 역도산의 후견인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37] 5·15 사건으로 살해당한 이누카이 쓰요시 전 총리의 아들이다. 극동국제군사재판 당시 증인으로 출석하기도 했다.[38] 일본의 악극 중 한 종류로 라쿠고와 달리 샤미센의 반주에 따라 이야기의 내용을 가창과 말로 전달하는 형태였으며 메이지 시대에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주로 서민적 의리와 인정에 호소하는 작품이 많았다.[39] 이미 사토 집권기부터 사토파의 정치자금은 사토4:다나카6의 비율로 모금되고 있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파벌 내부에서 다나카의 비중이 매우 컸다.[40] 조선 의옥(造船疑獄) 사건 경험 때문인지는 몰라도 사토는 본인이 직접 정치자금을 만드는걸 상당히 꺼렸다.[41] 사토의 풍부한 자금은 부하 다나카 가쿠에이, 경제 4단체를 중심으로 일본 경제를 장악한 재계 주류의 전폭적인 사토 정권 지원에서 기인한다.[42] 인사의 사토라는 별명이 여기서 나온 것이다. 더불어 고노 이치로, 오노 반보쿠등 사토에 맞설만한 당인파 거물들이 잇달아 죽은 이유도 컸다.[43] 이에 대해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총리는 "가와시마 쇼지로(川島正次郞), 호리 시게루(保利茂), 후쿠다 다케오, 다나카 가쿠에이등의 명마를 잘 다루어 장거리를 완주하였다"고 평가하였다.[44] 당시 참의원의장이던 시게무네 유조(重宗 雄三)는 천황이라 불리울 정도로 참의원내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고 이를 통해 자민당 총재 선거 때마다 80표 이상을 동원하며 이케다, 사토 정권을 지탱하였다.[45] 1964.11.09~1967.02.17 제1차 내각[46] 1967.02.17~1970.01.14 제2차 내각[47] 1970.01.14~1972.07.07 제3차 내각[48] 1975.06.03 사망[49] 사망 당시 67세였다. 일본이 세계에서 평균 수명이 가장 긴 국가임을 감안하면 67세 사망은 단명이나 다름없다.[50] 2012년에 TBS에서 10부작 드라마로 제작된 바 있다.[51] 정치인은 스포츠 관련한 인원들을 정치에 동원할 수 있고, 스포츠계는 정치인의 영향력으로 보조금을 받는다던지 하는 녹색당과 청색당 시절부터 내려오는 상부상조하는 관계다.
분류
- 일본의 남성 정치인
- 노벨평화상 수상자
- 일본국 내각총리대신
- 일본 우정대신
- 일본 외무대신
- 일본 내각관방장관
- 일본 경제산업대신
- 일본 재무대신
- 일본 국토교통대신
- 일본 건설대신
- 타부세정 출신 인물
- 1901년 출생
- 1975년 사망
- 당 대표/일본
- 자유민주당(일본) 총재
- 도쿄대학 출신
- 자유당(1950년) 국회의원
- 자유민주당(일본) 국회의원
- 제24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25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26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27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28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29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30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31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32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33대 일본 중의원 의원
- 뇌혈관질환으로 죽은 인물
- 고등문관시험 출신
- 쇼와 시대
- 기시·사토·아베 가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