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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8 08:35:38

하토야마 유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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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라타 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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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대
호소노 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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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다노 유키오
제16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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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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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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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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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모토 다케아키
이치카와 야스오
제21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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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나기다 미노루
제22대
류 히로후미
야나기다 미노루
제23대
우부카타 유키오
쓰지모토 기요미
가토 도시유키
제24대
기쿠타 마키코
미즈오카 슌이치
제25대
곤도 쇼이치
후쿠야마 데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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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카다 가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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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토야마 유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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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자와 이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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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대
에다노 유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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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그랜드 디자인」 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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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구시 히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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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이와 다카히로
가네코 에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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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시마 아키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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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라 슈지
오노 모토히로
키타가미 케이로
하마노 요시후미
노마 다케시
정권공약을 실천하는 모임
하토야마 유키오
다카키 요시아키
오카다 가쓰야
미카즈키 다이조
후쿠다 아키오
신바 가즈야
후루모토 신이치로
일신회
오자와 이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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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 유코
마쓰키 겐코
아오키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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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shuugiin_logo.png 중의원 (홋카이도 9구)
선거제도 개편 제41-45회
하토야마 유키오
제46-48회
호리이 마나부
}}}
일본국 제93대 내각총리대신
하토야마 유키오
鳩山由紀夫 | Hatoyama Yukio
파일:Hatoyama Yukio.jpg
<colbgcolor=#0230ae><colcolor=#c3c965> 출생 1947년 2월 11일 ([age(1947-02-11)]세)
도쿄도 고이시카와구
(現 도쿄도 분쿄구)
재임기간 제93대 내각총리대신
2009년 9월 16일 - 2010년 6월 8일
서명
파일:Yukio_Hatoyama_signature.svg
링크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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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230ae><colcolor=#c3c965> 조부모 조부 하토야마 이치로
조모 하토야마 가오루
외조부 이시바시 쇼지로[1]
부모 부친 하토야마 이이치로
모친 하토야마 야스코[2]
형제 누나 이노우에 가즈코[3]
동생 하토야마 구니오
배우자 하토야마 미유키
자녀 장남 하토야마 기이치로[4]
친족 조카 하토야마 지로
학력 가쿠슈인초등과 (졸업)
가쿠슈인중등과 (졸업)
도쿄도립코이시카와고등학교 (졸업)
도쿄대학 공학부 (계수공학 / 학사)
스탠퍼드 대학교 (공학 / 박사)
명예 학위 단국대학교 (정치학 / 명예박사)
부산대학교 (정치학 / 명예박사)
홍콩성시대학 (명예박사)
전주대학교 (명예박사)
신체 177cm, B형
종교 개신교 (침례회)
정당

[[무소속(정치)|
무소속
]]
지역구 (구) 홋카이도 4구 → 홋카이도 9구
의원 선수 8 (중)
의원 대수 38[A], 39[A], 40[A], 41, 42, 43 , 44, 45
약력 센슈대학 경영학부 조교수
하토야마 이이치로 비서관
중의원 의원
내각관방부장관 정무담당
제2대 신당 사키가케 대표간사
제7대 민주당 간사장
제2·7대 민주당 대표
제93대 내각총리대신
}}}}}}}}} ||
1. 개요2. 생애
2.1. 정계 입문 이전2.2. 정계 입문 이후2.3. 총리 취임 이후
2.3.1. 독도 발언에 관하여
2.4. 총리 퇴임 이후2.5. 정계 복귀 후
3. 가계4. 소속 정당5. 선거 이력6. 여담

[clearfix]

1. 개요

일본정치인. 제93대 내각총리대신을 역임했다.

2009년 제1야당 민주당의 당대표로서 일본 역사상 최초로 단독 정당에 의한 수평적 정권교체[8]를 이루어냈다.

2. 생애

2.1. 정계 입문 이전

1947년 2월 11일, 대장성 관료인 하토야마 이이치로와 이시바시 쇼지로 브리지스톤[9] 창업주의 딸 야스코의 장남으로 도쿄도 분쿄구 오토하의 하토야마가 저택(現 하토야마 회관)에서 태어났다.

명가 출신답게 가쿠슈인(学習院, 학습원)[10] 초등과와 중등과를 다녔고, 도쿄도립 코이시카와 고등학교를 거쳐 도쿄대학 공학부 계수공학과를 졸업[11], 이후 1976년 스탠퍼드 대학교에서 공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그해 도쿄공업대학 조수를 거쳐 1981년센슈대학 조교수로 임용되었으나, 1984년에 정계 입문을 이유로 퇴직하였다. 학계에서 상당한 엘리트 코스를 밟은 인물이기에 하토야마 유키오를 저평가하는 사람들도 "정계에 입문하지 않았다면 이름있는 공학자가 되었을 것."이라고 평하기도 한다.

1975년 3살 연상의 하토야마 미유키와 결혼했다. 다카라즈카 가극단 배우이던 미유키는 20대에 미국으로 무용을 공부하기 위해 건너가, 당시 전남편과 이혼하고 유키오와 결혼했다고 한다. 이후 슬하에 아들 하나를 두었다. 그런데 사실 그도 재혼이다. 유키오의 어머니 야스코 여사가 아들 혼사를 위해서 며느리인 미유키의 전남편에게 죄송하다고 사죄하며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기도 했다. 어쨌든 유키오가 아내를 처음 만났을 때 그녀가 유부녀였기 때문에.

파일:external/www.sisajeju.com/16485_8240_3750.jpg
결혼 당시 사진. 머리 스타일이 참 묘한데다 뭔가 발랄하다. 일본에선 이야미를 닮았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2.2. 정계 입문 이후

이후 1986년 자민당에 입당해 정계 입문, 다나카 가쿠에이 前 총리가 이끌던 목요회(木曜クラブ)의 신인으로서, 1986년 제3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는 가문의 지반이 있는 홋카이도에서 출마, 지역구 내 득표율 2위의 성적으로 당선되었다. 당시는 중선거구제였다. 1988년에는 '유토피아 정치 연구회' 라는 초파벌적 정치집단을 결성, 리크루트 사건 등의 당내 비리를 폭로하였고, 이 집단은 '신당 사키가케(新党さきがけ)'로 이어졌다.

1993년 정계 개혁의 소용돌이 가운데 자민당을 이당, 신당 사키가케의 창당에 관여하였고, 55년 체제의 붕괴와 함께 등장한 호소카와 내각에서는 내각관방 정무부장관을 담당하였다. 이후 성립된 자사사(自社さ, じしゃさ)(민당-일본회당-신당 키가케) 연립정권 하에서는 사키가케의 대표간사[12]를 맡았다. 1996년 사키가케를 일신하여 새로이 창당하고자 하였으나 실패, 그 해 여름 간 나오토, 남동생 하토야마 구니오 등과 함께 구 민주당을 창당하였다.
파일:2019112800002_2.jpg
1997년 3월 22일, 창당 이후 치러진 민주당의 첫번째 전당대회에서 공동대표 직에 연임된 하토야먀 유키오간 나오토

1999년의 당 대표 선거에서 승리하며 당수가 되었으나, 2001년 제19회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자민당에게 참패를 당한 것에 대한 책임론[13], 그리고 오자와 이치로가 있는 자유당과의 이른바 "민유합병" 추진이 오자와 알레르기를 가지고 있는 당내 신진당 출신 의원들[14] 대다수의 반발을 사서 대표를 사직하였다. 그럴 만도 한게, 민주당은 오자와가 신진당 당대표 시절 독재적 당 운영에 반발하여 신진당을 탈당한 의원들을 대거 영입하며 몸집을 키운 정당이었다.

그러나 대표 사직 후에도 당내 최대 파벌인 하토야마 그룹의 대표로서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후임 민주당 대표인 간 나오토는 오자와 자유당과의 합병에 소극적이었지만, 당시 민주당 최대 그룹 리더였던 하토야마가 "자유당과 합병하지 않으면 그룹 의원들을 이끌고 이당을 불사하겠다"는 협박과 더불어 그 자신도 세력 확대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으므로 오자와와 다시 교섭, 반하토야마파의 거두인 간 나오토가 민유합병을 진행시키자 반하토야마-반오자와 의원들은 구심력을 잃었고 결국 오자와의 민주당 입당은 성사된다.

제44회 중원선에서 참패해 책임을 지고 물러난 오카다 가쓰야 후임 대표가 된 마에하라 세이지는 하토야마 그룹과의 대립구도를 해소하기 위해 하토야마를 직접 간사장에 기용하였다. 그러나 호리에 메일 스캔들로 마에하라 집행부 체제가 흔들리자 하토야마 당시 간사장은 동반 사임을 요구했고, 이를 성사시킨다. 그런데 정작 자신은 공백이 된 민주당 대표 자리에 오자와 이치로를 적극 지원해서 결국 대표로 만들었고, 오자와는 그에 보답하며 하토야마를 간사장에 재기용 하였다. 마에하라는 격분했지만 이미 당권은 넘어간 상황.

2009년 5월 오자와 이치로가 정치자금 문제로 대표직을 사임했고, 오자와는 당원에게 인기가 많았던 오카다 가쓰야의 당선을 막고 하토야마를 당대표로 만들기 위해 차기 당대표 선거는 의원들만의 투표로 진행시키는 방침을 고수했고, 반발하는 의원들에게 '너희들은 언제나 반대! 반대! 최후만큼은 좀 말을 들어라!라며 일갈했다. 그렇게 열린 대표 선거에서 오카다 가쓰야를 꺾고 승리, 7년여 만에 당대표로 돌아왔다.

파일:external/blog.donga.com/20091103144342.jpg
파일:일본 민주당 리즈시절.jpg

2009년 8월 30일의 제45회 중원선에서는 단독 정당으로서는 사상 최다 의석인 308석을 기록하면서 대승, 9월 16일에는 중참 양원의 지명으로 제93대 일본국 내각총리대신에 취임하였다.

2.3. 총리 취임 이후

총리 취임 후에는 당과 내각의 포스트를 오카다 가쓰야 간사장을 외무대신으로, 오자와 대표대행은 간사장으로 조정했다. 선거 전에 내건 공약의 이행을 놓고 자민당 등과 대립, 연립정당인 사회민주당, 국민신당 등과도 마찰을 빚었다. 주요 공약은 아동수당, 고속도로 무료화, 오키나와현주일미군 후텐마(普天間) 기지 이전 등인데, 이 중 후텐마 미군기지 이전 문제로 인해 미국과 사이가 불편해져 대미 관계에 먹구름을 드리우게 되었고, 2010년 5월 말까지 이전지를 확정짓지 못하면 총리를 사임한다는 초강수를 두기도 했다. 이외에도 전 비서의 정치자금 비리 등으로 야당의 공격을 받았고 스스로도 이것을 취임 때부터 우려하고 있었다고 한다.

기본적으로 큰 정부의 복지수준을 주장하는 데 비해, 바로 다음 해에 예정된 제22회 참원선을 이유로 증세에는 반대하는 성향을 보이고 있었다.

외교에 있어서 그는 "자주외교"를 표방했으며 친아시아적인 스탠스를 강하게 취했는데, "우애"를 강조하면서 나름대로 동아시아 자유주의 정당에서 새로운 화두를 제시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중국에게 "미국을 배제한" 동아시아 질서를 제안하기도 했고 덕분에 한국, 중국 등으로부터 일본과의 원만한 외교관계 형성을 통해 모처럼만에 집권 초기에는 동아시아 지역 질서의 안정, 평화에도 새로운 전환기를 마련할 수 있다는 기대 섞인 반응이 나오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러한 친아시아적 외교 스탠스는 미국의 큰 반발을 불러와 결과적으로 총리직에 퇴임하게되는 원인 중의 하나가 된다.

하토야마는 뉴욕 UN 총회에 참석하고 그곳에서 후진타오에게 "미국과의 관계를 격하하고 중국과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고자 한다."고 말했는데, 이 발언이 미국에게 알려지고 이것은 미국의 분노 불러일으켰다(Asia's Reckoning). 그것도 모자라 하토야마는 일본 내 핵무기 반입 조약 내지 합의 등 공개, 대테러전쟁에 있어서 해상자위대의 미국 군함에 대한 연료공급 활동의 중단, 오키나와 미군기지 이전과 같이 미국에게 무리한 사항을 지속적으로 요구해 미국과의 관계를 극도로 악화시켰는데 당시 외무성의 간부가 미국에 가서 하토야마를 이해할 수 없고 멍청한(stupid) 일을 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미국을 달래야 할 정도였다. 그리고 하토야마는 아세안+3 회의에서 "미국을 배제한" 아시아 공동체를 만들자는 주장했다가 호주베트남에서 이 사실을 미국에 알리면서 미국은 하토야마 내각을 노골적으로 비난했다.

이런 미국과의 외교 참사는 내각 관료와 야당이 하토야마를 무시하는 좋은 빌미가 되었는데 일례로 2010년 5월 21일 참의원 본회의에서 마루카와 다마요 참의원 의원에 의해 이상한 사람이라고 야유를 들었다.

결국 사회민주당오키나와 후텐마 주일미군 기지 문제로 연정에서 사퇴하자 7월 참의원 선거의 패배를 막기 위해 2010년 6월 2일 총리직에서 사임했다. 오자와 간사장도 함께 사임했으며, 후임은 간 나오토 부대표. 결론적으로 외교문제에서 동맹국인 미국과 갈등을 일으키며 화를 자초한 셈이 되었다. 그렇다고 미국과 멀어진만큼 중국러시아를 상대로 얻어낸 외교적 이익도 전무했으며 아소 내각의 경제 참사 이후 일본 국민들의 기대로 총리까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를 방치하여 일본 수출기업들이 모조리 박살나는 등 경제적으로도 대실패, 거기에 내정조차 기대에 못 미치면서 정치자금 스캔들 등으로 인해 불명예 퇴임하게 된다.

2.3.1. 독도 발언에 관하여

소위 하토야마의 '독도 망언'으로 보도된 일련의 사건은, 2010년 4월 8일의 중의원 외교위원회에서 오카다 가쓰야 외무대신이 "불필요한 마찰을 부르지 않도록 하고 싶다. 그 단어(불법 점거)는 사용하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교섭하고 있다"고 발언한 것이 그 발단으로, 하토야마 본인은 그날 저녁의 기자회견에서 "우리의 생각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약간의 답변의 차이는 있을 수 있으나, 본인 또는 정부의 생각을 바꿀 뜻은 결코 없다"고 답변하였다. 결국은 표기의 문제로, 일본 정부가 일관되게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해온 것을 감안하면, 이를 '망언'이라 보도한 것은 과장이라 할 수 있다.

이와 별개로 하토야마는 총리직 퇴임 이후 자신의 트위터에 "다케시마의 날을 계기로 한일관계가 꼬여 있다. 우리는 역사의 사실을 보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일본이 수용한 포츠담 선언으로 독도 등 섬의 구속은 연합국 사실상 미국이 정하게 됐다. 미국2008년 독도는 한국령으로 정했다. 당시 가와무라 다케오 내각관방장관은 어떤 항의도 하지 않았다. 이 책임이 크다"라는 글을 게시한 적이 있다. 출처1 출처2

그 외에 2014년에는 아베 신조 내각의 우경화 행보가 동북아 평화와 한반도 통일을 가로 막고 있다면서, 독도 문제는 더는 건드려선 안된다고 강조한 적도 있다. [뉴스쇼 판] 하토야마 "독도 문제 더 건드려선 안돼" 2015년 한국을 방문했을 당시에는 "일본은 중국과는 센카쿠 제도, 한국과는 다케시마로 영토 갈등을 벌이고 있다"며 "일본은 패전국이기에 고유한 영토라고 말하기 어려운데 이는 일본 사람들이 역사를 제대로 배우지 않았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라는 발언을 한 적도 있다. 하토야마 전 日총리 "일본은 역사 잘 몰라 영토문제 일으켜"

2.4. 총리 퇴임 이후

2012년 4월 이란 방문으로 일본 정계를 발칵 뒤집었다. 미국이란 핵개발 문제로 인해 이란에 강력한 무역제재를 가하고 주변국들에게도 동참할 것을 요구하는 가운데 일본총리였던 하토야마가 "이대로 전쟁 분위기로 가는 것은 좋지 않다. 내가 직접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이란 대통령 등을 만나 이야기를 해보겠다"며 이란 방문을 감행했다. 미국 눈치를 봐야 하는 일본 입장에서 하토야마의 이런 돌출 행동은 외교적으로는 큰 악재일 수밖에 없다. 의원이 가도 외교적으로 말이 많을 정도로 민감한 사안인데 하토야마는 어쨌든 전임 총리이니 무게감이 다르다.

그리고 예상대로 이란에선 "하토야마 전 총리도 IAEA가 불공정한 잣대를 적용하고 있다며 비판했다"고 언론에 발표했다.# 하토야마 본인은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라고 곧바로 해명을 했지만 애당초 저렇게 이용당할 가능성이 누가 봐도 뻔한데 간 게 문제라는 비판이 자민당은 물론 민주당 내부에서도 나왔다.

이후 오자와 이치로와 마찬가지로 소비세 증세에는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결국 소비세 증세안이 통과되자 오자와는 자신의 계파를 이끌고 이당하여 신당을 차렸다. 이런 가운데 하토야마도 자신의 계파를 이끌고 이당해 신당을 창당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하토야마가 주도하고 있는 "소비세 연구회" 소속 중의원이 30명이기 때문에 이들 중 16명 이상만 이당해도 민주당의 중의원 과반이 붕괴되던 상황이였다. 다만 하토야마 측은 "나는 당내에서 일하겠다"라면서 이당 및 신당창당을 강력히 부인했다.

세간의 소문과는 달리 결국 민주당에 잔류했으나 중의원을 해산하고 총선에 임한 노다 총리가 TPP에 찬성해야 공천을 주겠다는 방침을 천명하자 이를 반대했고 결국 공천을 받지 못했다. 하토야마는 이당해서 무소속 출마를 강행할 수도 있었으나 결국 출마를 포기하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다. 사실상 정계 은퇴를 선언한 셈이다.

2013년 1월 17일 중국 내 학술단체의 초청 형식으로 중국 방문했는데, 일본이 책임 인정을 꺼리는 난징 대학살 추모 박물관을 방문했다. 여기에 중국과의 영유권 갈등이 강화되고 있는 센카쿠 열도(중국명 다오위댜오)에 문제에 대해 "분쟁지역임을 인정할 필요 있다"고 언급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일본 전임 총리가 한 발언이라는 점에서 일본에서는 대단한 충격으로 받아들이고있다. 한국으로 치자면 전직 대통령이 '독도는 분쟁지역 맞다'고 발언한 것과 다름없는 사건이다. 영유권 분쟁에서는 보통 실효지배 중인 측에서 분쟁의 존재를 부인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자칫 영유권의 변경 내지 타협 가능성을 인정하는 결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실제로 발언 직후 오노데라 이쓰노리 방위대신이 '역적'이라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특히 일본은 분쟁 지역 언급보다도 문제시 된 부분이 "중국 입장에서 본다면 일본에게 센카쿠 열도를 빼앗겼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라는 발언을 했는데, 어째 앞뒤 다 잘라먹고 "일본에게 빼앗겼다"라는 부분만 강조하면서 전직 총리가 "일본센카쿠를 훔쳤다"라고 발언했다면서 난리가 났다. 이게 민주당 내부에서도 심한 논란이 되어 강제출당된 모양이다.

2015년 3월 10일 크림반도에 직접 가 문제가 되었다. 일본 정부러시아의 크림 합병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서방과 함께 러시아 제재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서 하토야마는 "이번 방문 동안 크림반도의 실제 상태는 제가 일본에서 보고 들어왔던 것과 매우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라는 발언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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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8월 12일 서대문형무소를 방문, 유관순 열사가 수감되었던 감방에 헌화했으며 광장에 있는 추모비 앞에서 무릎 꿇고 도게자까지 하며 사죄했다. 역대 일본 내각총리대신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일본 정치인 중에서도 이렇게 공개적으로 도게자까지 해가며 사죄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는 점에서 한국에서 화제가 되었다.

특히 이번 행보는 도게자에 대해 일본에서 논란이 많이 일고 있는데, 일본에서의 최대의 사죄를 의미하는 도게자인지 한국에서의 상대에 대한 최대의 경의를 의미하는 큰절인지, 일본에서 의견이 분분하다. 큰절이라면 희생자들에 대한 추모의 입장이 되지만, 도게자라면 일본의 잘못에 대한 용서를 빈다는 입장이 되기 때문에, 일본의 입장에서는 민감할 수밖에 없는 문제이기도 하다. 물론 우리가 보기엔 도게자로밖에 안 보이지만, 큰절에 익숙하지 않은 일본인에게 큰절을 시키면 실제로 도게자처럼 한다.[15]

하토야마의 큰 결단이 경색된 한일관계에 획기적인 전환점이 될 수 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보는 관점이 있었다.

2016년 4월 중일관계의 악화가 대부분 일본에게 책임이 있다는 발언을 했다. 이젠 중국에서도 까임방지권 획득할 기세였다. 민주당(후신 민진당)은 호헌파 정당답게 대개 일본이 가해자라는 인식을 내세운다.(단, 영토 문제는 별개 취급한다.) 문제는 자민당이 장기 집권 중인 현 일본 정치 상황에선, 지지기반 자체가 약하다 보니 집권부터가 요원할 뿐더러 집권하더라도 정치력 부재로 상술되었듯 빨리 무너지기 쉽다는 것이다. 다만 자민당은 내부 계파 권력다툼이 한나라당-새누리당-자유한국당 계열보다 더 심각할 뿐더러 최근 아베 신조가 대부분의 계파를 제압한 상태에서 벗어나 다른 계파의 힘이 점점 커지면서 자민당 내 다른 계파에 넘어갈지도 모르는 상황이 되기 시작했다.

이후에도 계속 일본 전직 총리로서 역사적 과오에 대한 사과를 통한 한일, 중일 관계 개선에 힘쓰는 활동을 펼쳤으며 2018년 10월에도 방한하여 부산대학교에서 명예 정치학박사 학위를 받고 의인 이수현의 묘를 참배 한 다음 날 경남 합천에 있는 한국인 원폭피해자복지회관을 방문하여 다시 사죄 의사를 밝혔다. 강제징용 판결 이후에도 한국을 직접 방문해 대법원일본 기업에 대한 강제징용 배상 책임을 확정한 판결에 대해서 “엄중히 받아들여야 한다”고 강조하며, 일제강점기 강제징용과 관련 “굉장히 고통스러운 경험을 저희가 제공했다” “일본인들은 사죄하는 마음을 항상 갖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하는 등 한일 관계 개선에 힘쓰는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하토야마 전 日총리 “일본인들은 사죄하는 마음을 항상 갖고 있어야”

2019년에도 한국에 대한 행보를 보이고 있는데, 거창군에 방문하여 강연을 가졌으며, 천황의 뜻을 받아들여 한·일 과거사 인식을 적극 수용해 사죄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또, 나루히토의 방한 제안도 주장했고 위안부 합의안에 대해 일본의 책임도 강조했다.# 대한 수출 규제 이후에는 멀어진 한일관계에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으며, 관계악화의 책임은 일본에게 있다고 인터뷰를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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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에는 김대중대통령 부인 이희호 여사의 빈소를 방문해서 조문했다.# 우측의 안내하는 사람은 당시 국무총리였던 이낙연 전 총리.

8월에는 아리랑TV에 출연했는데 # 지소미아 종료에 대해서 "그 원점은 일본한반도식민지로 삼아 그들에게 고통을 준 데 있다"고 지적했다.#

9월에 하토야마 내각 수립 10주년을 맞아 혁신 세력 중심으로 재평가가 나오고 있다.#

10월 11일 오후 부산대학교 대회의실에서 열린 '통일 한국의 미래와 평화전략'이라는 주제의 특별강연에서 "전쟁 피해자가 더는 사죄하지 않아도 된다고 할 때까지 가해자는 사죄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폭력을 행사한 사람은 잊어도 피해자는 그 아픔을 결코 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이에 앞서 경남 김해 봉하마을을 찾아 노무현대통령 묘역을 참배하고 방명록을 남겼다. 이날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을 만났다.# 12일 오전 9시에는 부산 남구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을 방문했다. #

2021년 8월 26일에 경제·인문사회연구회가 주최하고 서울대 일본연구소와 한국법제연구원이 주관한 "국제심포지엄 - 한일관계,대전환을 논하다"에서 기조강연을 하였다.

오카야마현 츠야마시에서 열린 귀무덤 위령 행사에서 6.25전쟁 종전선언은 '시기상조'라는 입장인 것으로 보도된 일본 정부에 대해 "매우 잘못된 판단"이라고 비판했다.#

2022 베이징 동계올림픽에 정부 사절을 보내지 않는 것에 대해 어리석은 행위라고 비판하였다.# 특히, 굉지회 전 수장이자 총리였던 오히라 마사요시미야자와 기이치까지 언급까지 한다. 두 전 총리가 모두 중일 관계 개선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인물들이기 때문.

2022년 5월 9일, 다음날 취임식을 앞둔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과 접견해 한일 우호협력에 관하여 논의했다.#

2022년 9월 24일, 방한해 진도 왜덕산을 찾았다. 왜덕산진도 주민들이 명량해전에서 전사한 일본군 시신 100여구를 안장한 곳으로 왜구에게 덕을 베풀었다하여 왜덕산이라 이름 붙여졌다. 하토야마 유키오 전 총리는 24일 열린 위령제에 참석하여 분향을 하고 무덤 조성에 감사의 의사를 전했고 자신이 줄곧 말 해오던 지속적인 사죄를 다시 언급했다.

2022년 10월 6일, 국립5.18민주묘지를 방문하여 "민주화운동을 위해 애쓰신 영웅들에게 감사드린다"라는 내용의 방명록을 남겼으며 같은 날 오후 4시부터 전남대에서 '우애에 기반한 동아시아의 미래'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였다. 이 자리에서 하토야마 전 총리는 "윤석열 대통령은 8월 14일 위안부 기림의 날에 아무런 메시지도 내지 않았다.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를 존중하는 입장으로 보이는데, 일본 정부 입장에선 고마운 일이지만 이래서는 피해자분들께서 납득할 수 없을 것이다"라며 윤석열 대통령비판했다.

2023년 3월에 한국일본의 징용공 문제 해결을 가지고 기시다가 사죄해야 한다고 말했다.#

2023년 9월 1일. 도쿄 치요다구 국제포럼에서 개최된 '제100주년 관동대지진 한국인 순난자 추념식'에 참석했다.#

2023년 9월 13일, 전주대학교 스타센터 온누리홀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받고 한반도 평화와 한일관계 관련 특강을 진행하였다. 하토야마 전 총리가 모태신앙인데다 전주대학교도 개신교 미션스쿨인만큼 한병수 목사의 기도가 곁들여진 개신교적인 분위기에서 이루어졌다. 차종순 이사장, 임정엽 총동창회장, 김영진 전 농림부장관,[16] 유종근 전 전라북도지사, 김희선 세계한인교류협력기구 공동회장이 축사를 맡았다.

2.5. 정계 복귀 후

민주당이 한동안 선거에서 참패하는 중 2019년 10월 25일 공화당을 창당하면서 정계 복귀 선언을 했다. 총리 퇴임 후 2013년 민주당에서 강제로 출당 당하고(과거 청산의 의미로 윤리위에 같이 넘겨진 간 나오토에게는 솜방망이 징계가 내려지며 비교되었던 측면이 있다.), 경원시 당하면서 이에 대한 앙금이 많이 쌓였는지 이후 구 민주당계 정치세력에 대해 매우 냉담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당 이름만 보면 천황제 폐지를 목표로 하는 정당 같지만 하토야마 본인의 설명에 의하면 당명의 공화(共和)는 반드시 공화국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한자의 뜻 그대로 "함께 화합한다"는 의미로 천황제와 병립 가능한 이념이며 천황제를 반대하기 위한 정당은 아니라고 설명했다. 사실은 공화주의의 원래 의미이기도 하다. 공화주의 항목 참조.

물론 보수층들의 반응은 하토야마를 천황제를 반대하는 극좌, 역적으로 취급하고 있다. 2020년 연말이나 2021년 연초로 예상되는 중원선에서 공화당 후보로 출마하겠다고 밝혔다.기사 하토야마는 공화당 대표에 올랐고, 하토야마 유키오의 보좌관 출신인 스토 노부히코 전 중의원 의원이 간사장을 맡았다. 하토야마의 총리직 시절 실권자였던 오자와 이치로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오자와를 받아들일 의사가 없다고 선을 그었다. 오자와가 있는 국민민주당과는 연합할 생각이 없고 입헌민주당이나 레이와 신센구미와는 선거연대 정도는 가능하다고 발언했다.

2019년 10월 27일에는 공화당 창당 첫 일정으로 한국에 다시 방문하여, 경기도 용인시 에덴교회에서 예배에 참석하였다. 아베 신조 수상이 제대로 역사에 대해 사죄하고 후세에 대해 교육을 할 것을 촉구했다. 기사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사태로 하토야마 유키오 전 총리가 정부와 도쿄도가 "올림픽을 성사시키기 위해 감염자 수를 축소했다"며 "연기가 결정 되니 그제서야 외출 자제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25일 하토야마 총리는 트위터에 "고이케 유리코 도지사가 주말에 외출을 자제하라고 요청했다"며 "도쿄올림픽을 성사시키기 위해 감염자 수가 적게 보이게 해서, 도쿄가 코로나를 잘 억누르는 것처럼 (보이게 해) 엄격한 요구는 피해왔지만 연기가 결정된 직후 이런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고 썼다.

하토야마 총리가 트위터에 글을 쓴 건 고이케 유리코 도쿄도지사가 긴급 기자회견을 자청해 "이대로라면 도시 봉쇄를 해야 할 수도 있다'며 "4월 12일까지 외출을 자제해달라"고 호소한 이후다. 하토야마 총리는 도쿄도가 감염자 수를 축소했다는 구체적인 근거는 제시하지 않았다. 그는 "(도쿄가 감염자 수를 축소하는 사이)코로나는 퍼져버렸다"며 "당신은 도민 퍼스트가 아니라 올림픽 퍼스트 였다"고 지적했다.

아베 총리가 코로나19 신약으로 추진하는 아비간은 여성이 먹을 경우 기형아 출산, 남성이 먹을 경우 성기능 저하의 위험성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아비간에 대해서도 "아이를 만들고 싶은 남녀는 이 약을 복용하지 말라"고 부작용을 언급하였다.#

아베 총리가 사의를 표명하고 다음 날, 하토야마 전 총리는 "공산당만큼은 열심히 했다. 그 외의 야당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나. 아베 장기 집권의 제일 가는 공헌자는 바로 야당이다."라는 요지의 글을 올려 입헌민주당 등 민주당계 정당들에 대해 통렬하게 비판했다.

워낙 한심한 야당을 까는 글이라 답답함을 참고 참으며 야당을 지지하던 아베의 반대자들은 물론 평소에 하토야마를 악의 화신 취급하며 극렬히 까던 극우들조차도 "하토야마가 말하는 것치고는 정상적인 걸 말했다"라며 많은 공감을 받아 리트윗 3만개받았다.

하타 유이치로 사망 후 "나가노의 작은 오야코동 가게에 들렀더니 떡방아를 하고 있었다. 가게 주인이 내 옆에 검은 깨를 묻힌 떡을 놓고 유이치로 몫이라고 나직이 말했다. 현지에서는 모두 울었다고 한다. 사교성이 좋고 상냥한 하타 유이치로 군이었다. 정권교체 때 너무 신세를 많이 졌다. 그가 가 버리다니 병이 밉다. 삼가 명복을 빈다."고 .밝혔다.

2021년 4월 18일, 본인의 트위터에 그보다 이틀 전 있었던 미일정상회담과 관련해 "서툴고 불안한 느낌, 부끄러움이 전면에 드러났다. 외무성의 자존심 결여도 상당했으나 저녁 만찬을 거절당하고 햄버거와 함께 20분 정상회담에서는 불쌍했다"고 비판하면서 "그래도 바이든과의 최초 정상회담으로 일본은 자만하려는가"라고 비꼬았다.#

2021년 6월 2일에는 트위터에 "한국의 한 대선 후보가 독도에 대한 표기를 바꾸지 않으면 한국이 올림픽을 보이콧할 수 있다고 한다. 미국 지도에 독도는 한국 영토로 표기돼 있다 보수파는 친미라서 항의할 수가 없는 것인가"라는 글을 올렸다

49회 중원선에서 도쿄 2구[17] 출마설 등이 돌았으나 결국 불출마했다. 창당 후 2년만에 선거에 나오기는 무리가 크고, 괜히 야당 연대를 깼다고 비판의 도마에 오를 수도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2022년 4월 5일, 본인 트위터에서 부차 학살이 공정하게 심판되어야 한다고 발언하였다. 또한 우크라이나군의 동부(돈바스)에서의 친러파 1만 명 이상 주민 살해, 미군에 의한 이라크인, 아프가니스탄인 살해, 일본군에 의한 난징대학살, 미군의 원폭 투하도 마찬가지라고 주장했다.#

2022년 6월 공화당 기자회견 영상에서 2022년 7월 제26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는 본인을 포함한 간사장 및 공화당의 여러 후보들이 도쿄도 선거구가나가와현 선거구 등에 출마할 것이라고 했는데 정작 본인은 출마하지 않았고 스토 노부히코 간사장을 비롯한 공화당 후보자 전원이 선거에서 낙선했기 때문에 권토중래 후 차기 중원선에 출마할 것으로 보인다.

한편 2023년 12월 11일, 장남인 하토야마 기이치로가 국민민주당 당적으로 도쿄도 제2구 중의원 후보로 공인을 받음에 따라, 아버지와 정치적 행보를 달리하게 됐다. 도쿄 2구가 하토야마 전 총리의 동생이었던 하토야마 구니오가 중의원직을 보냈던 소선거구다보니 정치 세습 논란이 일었지만, 정작 유키오와 구니오가 2005년 이후는 사실상 남만도 못한 정적에 가까운 관계로 변해서 사이가 무척 좋지 않았다보니 논란이 커지진 않았다.

3. 가계

하토야마 가문
{{{#!wiki style="margin:-0px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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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D7003A> 1대 하토야마 가즈오
2대 하토야마 이치로
3대 하토야마 이이치로
4대 <rowcolor=#D7003A> 장남 차남
하토야마 유키오 하토야마 구니오
5대 하토야마 기이치로 하토야마 지로
※둘러보기 : 일본의 정치 가문
}}}}}}}}}

본래 하토야마 가는 미마사카 국 카츠야마 번 출신으로, 고조부인 하토야마 히로후사(鳩山博房)는 에도의 관료였다. 말 그대로 뼈대 있는 가계다. 증조부 - 조부 - 부친 - 본인과 남동생까지 4대가 줄줄이 전부 도쿄대학 출신들이다.

4.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1986 - 1993 정계 입문


[[무소속(정치)|
무소속
]]
1993 탈당

1993 - 1996 창당


[[무소속(정치)|
무소속
]]
1996 탈당[19]

1996 - 1998 창당

1998 - 2013 합당[20]


[[무소속(정치)|
무소속
]]
2013 - 2019 제명[21]
정계 은퇴


2019 - 2024 창당
정계 복귀


[[무소속(정치)|
무소속
]]
2024 - 현재 탈당

5. 선거 이력

연도 선거 종류 지역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86 제3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구) 홋카이도 4구

93,001 (16.11%) 당선 (2위) 초선
1990 제3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85,516 (14.74%) 당선 (3위) 재선
1993 제4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11,824 (21.07%) 당선(1위) 3선[22]
1996 제4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홋카이도 9구
131,936 (52.79%) 4선
2000 제4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31,500 (45.45%) 5선
2003 제4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41,442 (50.02%) 6회
2005 제4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50,050 (49.26%) 7선
2009 제4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201,461 (66.36%) 8선

6. 여담



[1] 브리지스톤 창업주[2] 혼전 성 이시바시[3] 혼전 성 하토야마[4] 국민민주당 소속 현역 중의원[A] 중선거구제 시절 (구) 홋카이도 9구[A] [A] [8] 정당 간 연합을 통한 수평적 정권교체는 호소카와 내각에서 실현한 바 있다.[9] 브리지스톤(Bridgestone)이라는 사명이 石橋(돌다리)라는 성씨를 반대로 뒤집어 영역한 것이다.[10] 본래 황족과 귀족을 위해 세워진 관립학교였으며, 패전 후 사립학교로 전환되고 평민에게 개방된 후로도 금수저들이 많이 다니기로 유명한 일관제 학교이다.[11] 조부 하토야마 이치로 전 총리와 부친 하토야마 이이치로 전 외무대신, 동생 하토야마 구니오 전 법무대신은 도쿄대학 법학부 출신으로 3대가 전부 도쿄대학 출신인 엘리트 집안이다.[12] 지금으로 치면 간사장(한국으로 치면 당 사무총장)에 해당되는 직책이다.[13] 의석 수는 늘어났지만 워낙 개선의석수가 적어서 그런거지 전회 참의원 선거에서 민주당의 추천을 받은 무소속의원들을 대거 영입했음에도 비례득표율은 전회보다 낮아지는 대참패였다.[14] 특히 민주당 창당에 참가한 구 민정당, 신당우애 출신 의원들을 말한다.[15] 여담으로 많이들 헷갈리는 사실인데, 큰절과 도게자의 큰 차이는 ‘손을 모으는지’의 여부이다. 도게자 문서 참고.[16] 안내 팜플랫에는 '농림수산부'라고 잘못 나와 있었다.[17] 하토야마 유키오의 조부인 하토야마 이치로의 정치적 기반이었고, 동생인 하토야마 구니오의 지역구이기도 했다.[18] 카이세이 중고등학교와는 무관하다.[19] 민주당 창당을 위한 탈당[20] 민정당, 사회민주연합, 신당우애와 신설 합당[21] 센카쿠 열도 실언으로 인해 강제 제명[22] 중의원 의원 총선거의 마지막 중선거구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