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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국 제16·22대 내각총리대신 야마모토 곤노효에 山本 権兵衛(山本 權兵衞) | Yamamoto Gonnohyōe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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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230AE><colcolor=#c3c965> 출생 | 1852년 11월 26일 | ||
사쓰마국 가고시마군 가지야정 (現 가고시마현 가고시마시) | |||
사망 | 1933년 12월 8일 (향년 81세) | ||
도쿄부 도쿄시 시바구 (現 도쿄도 미나토구) | |||
재임기간 | 제16대 내각총리대신 | ||
1913년 2월 20일 ~ 1914년 4월 16일 | |||
제22대 내각총리대신 | |||
1923년 9월 2일 ~ 1924년 1월 7일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230AE><colcolor=#c3c965> 휘 | 모리타케(盛武) | |
아명 | 곤베에(權兵衞) | ||
배우자 | 야마모토 도키코 | ||
유파 | 시현류 | ||
작위 | 백작 | ||
정당 | |||
약력 | 제7대 아마기함장 제5대 타카치호함장 초대 타카오함장 초대 해군성 군무국장 제11-13대 해군대신 제35대 외무대신(내각총리대신 겸직) 제16·22대 내각총리대신 | ||
군사 경력 | |||
임관 | 일본해군병학교 (2기) | ||
복무 | 일본 제국 해군 | ||
1877년 ~ 1928년 | |||
최종 계급 | 대장 | ||
참전 | 사쓰에이 전쟁 보신전쟁 청일전쟁 러일전쟁 | }}}}}}}}} |
1. 개요
일본 제국의 군인, 제16, 22대 내각총리대신.2. 생애
1852년 11월 26일, 사쓰마 번(현 가고시마현) 태생이자. 본명은 야마모토 곤베에로, 곤노효에라는 이름은 그가 군함의 진수식에 참석하였을 때 한 신관에게 받았다고 한다.[1]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해군병학교를 2기로 수료하고 태동기에 있던 일본 해군의 장교가 되었으나, 사실 그 이전에도 영국-사쓰마 전쟁과 보신전쟁에 사쓰마 번군의 무사로서 참전한 경험이 있었다. 그러다 보니 해군병학교 시절에는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맨날 싸움질이나 하고 다녔다고 한다. 돛대 빨리 올라가기 시합과 주먹질이 특기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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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의 모습 |
당시 해군의 대세를 이루고 있던 사쓰마 출신이었기에 일찍이 그 능력을 인정받아 그가 쓴 포술 교본이 일본 해군의 정식 교재로 채택되기도 하고 순양함의 함장 시절에는 밀사로 파견되어 위안스카이와 비밀리에 회담을 가졌지만, 군정가의 모습으로 주로 기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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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해군 시절 |
당시 해군대신이었던 사이고 주도와 콤비를 이루었다. 사이고 주도가 처음 부임했을 때 해군의 막후 세력자였던 곤노효에가 신임 해군대신을 교육할 겸 길도 들일 겸해서 자료+서류 뭉터기들을 보라고 제출했더니 사이고는 한 번도 읽지 않아서 곤노효에를 벙찌게 만들었다고 한다. 그리고는 폭발하려는 곤노효에에게 책임은 자신이 다 질 테니 실무자 측에서 생각하는대로 잘해보라는 대인배적인 멘트를 날렸다고 한다. 이 콤비는 사쓰마 번 출신자들을 우대하는 관행을 폐지하고, 보신 전쟁 때부터 해군에서 복무해 왔던 머리 굳은 고급 장교들을 대거 물갈이해버렸다. 곤노효에 역시 사쓰마 출신이었지만 동향이고 선배고 친구고 뭐고 예외가 없었다. 단 애매하다는 이유로 평가가 유보된 사람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도고 헤이하치로였다. 시바 료타로의 소설 언덕 위의 구름의 등장인물인 아키야마 사네유키[2]의 표현으로는 '선저에 달라붙은 따개비들을 깔끔히 청소해버렸다'고 한다. 또한 당시 러시아 제국 해군 예산 대비 일본 제국 해군에 예산이 4분의 1수준이었는데 야마모토는 최대한 효율을 끌어올리며 발트 함대와의 결전을 준비해놓는 수완을 발휘하였다. 그 후 결과적으로 일본 해군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모두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대청나라-대러시아 강경책을 지지하였으며 청일 전쟁 이후 해군 대장 겸 해군대신으로 진급했다. 1902년 남작, 1907년 백작에 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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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작 시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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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대 총리 취임 후. |
한편 총리를 번갈아가며 지내던 케이엔 콤비 중 가쓰라 다로는 실각, 사이온지 긴모치는 반대편의 정치공작인 다이쇼 덴노의 칙허를 이유로 총리직에 나설 수 없었다. 정치거두이자 육군의 거물인 야마가타 아리토모마저 연루된 다이쇼 정변으로 2차 사이온지 내각이 총사퇴되면서 호헌운동이 강력해진 분위기를 읽지 못한 원로들이 3차 가쓰라 내각을 설립했으나 분노한 민중이 의회를 포위하고 가쓰라의 사퇴를 요구하였다. 가쓰라는 중의원 해산으로 맞서려 했으나 중의원에서 폭동이 일어날 것이라고 경고하자 결국 61일 만에 사퇴하고 그 후임 총리로 지목된 것이 바로 야마모토 곤노효에였다. 야마모토는 정우회와 연합을 이룸으로 1913년 내각총리대신에 취임한다. 정당정치인들과 연합했으니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기 위해 민-군 간 분리에 힘쓴다. 대표적으로 군부대신 현역 무관제를 폐지, 퇴역 군인도 군부대신으로 부임할 수 있게 되어 군대가 현직 대신을 사퇴시키고 차기 총리 선출을 보이콧함으로 내각 구성에 훼방 놓는 걸 방지할 수 있게 되었다.[3] 이때 행정부 구조조정, 문관임용제 개편 등등 여러 개혁을 실시했다.
허나 얼마지나지 않아 해군에서 일어난 군수 비리인 지멘스 사건[4]의 책임을 지고 곧 사퇴하게 되었다.
사실 이 사건은 배경부터 상당히 복잡하다. 당시 일제는 국가채무의 지불불이행 선언을 하냐 마냐 운운할 정도로 경제상황이 심각했고, 육군도 사단증설[5]을 미루고 있었다. 그런데 해군의 요구만 받아들여졌고, 팽창시킨 전함건조 예산은 중의원에서 막무가내식으로 관철했다. 이에 더해 가난한 향사출신인 야마모토가 정작 해군내에서는 재산이 제일 많았던 것도 문제시 되었는데, 미천한 출신의 그가 봉급만으로 어떻게 재산을 불렸는지 의혹을 품은 것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지멘스 사건에 항의하는 3만 명의 시위대를 4천 명의 경찰이 강경 진압을 시도하다가 시위가 폭동으로 번지면서 귀족원으로부터 혹독한 질책을 받게 되고, 제출한 해군 예산안도 반려되었다.[6] 결정적으로 그간 야마모토와 동맹 관계였던 입헌정우회의 하라 다카시가 정우회의 단독 지도자로 자리매김하면서 다수당의 지위를 활용해 조각의 대명을 도모하자 야마모토 내각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다. 결국 귀족과 정당으로부터 동시에 버림받은 야마모토 내각은 매우 허망하게 무너졌다.
노년의 모습 |
1923년 관동대지진 직후 내각총리대신에 한번 더 오르게된 야마모토는 큰 피해를 입은 도쿄 일대의 재건에 애썼다. 당시 내각구성이 총리인 야마모토 본인을 비롯하여 고토 신페이 내무대신, 이노우에 준노스케 대장대신[7], 다나카 기이치 육군대신, 히라누마 기이치로 사법대신, 이누카이 쓰요시 체신대신 등 혁혁한 총리감 거물들로 조각했기 덕분에 독자세력화론도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오히려 선장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오르기 마련이다라는 속담처럼 재건 계획은 잘 풀리지 않았다. 또한 반정우회 세력의 결집에 경악한 정우회 총재 다카하시 고레키요가 야마모토 내각을 적대시하면서 곤경에 처하였다. 마침 그해 12월에 도라노몬 사건(히로히토 황태자 암살 미수 사건)이 일어나자 그 책임을 지고 사퇴하는 형식으로 2차 내각은 실각했다.
이후 정계에서 은퇴하여 가족들과 여생을 보내다 1933년 12월 8일 세상을 떠났다.
마지막 일본 제국 해군대장인 이노우에 시게요시가 전후에 평가한 역대 해군대장 1등, 2등, 3등 대장 분류에서 1등 대장은 야마모토 곤노효에를 비롯해 가토 도모사부로, 요나이 미쓰마사 단 세명 뿐이다.
3. 매체에서
무책임함장 테일러의 등장인물 야마모토 마코토의 선조라고 한다. 후손의 성격은 일본에서 이미징되는 선조의 성격과 거의 판박이인듯. 다만 몇 배는 더 대인배이면서도 또한 우주급으로 골때리는 상사를 만나 죽어라고 고생한다.애니에서는 전혀 나오지 않지만, 원작소설 우주제일의 무책임 남자에서 우주 태풍으로 우연히 과거로 가서 소요카제 승무원들이 돕는 황해 해전 때, 야마모토 마코토는 조상이 관여한 전투이니 못본척할 수 없어 홀로 일본군을 돕자고 하다가 키타구치 히데자부로 소령이 "이 전쟁 때문에 일본에게 먹힌 한국이 있는데, 자네의 그 말. 김경화 중위가 불편할 말이잖아?" 라는 말을 하자 멈칫하기도 했다. 다른 승무원들도 "우리가 끼어들면 역사를 바꿀 수 있는데? 왜 끼어드는 겁니까?" 라고 반대하고 타일러도 "부함장, 이건 아니지. 적어도 역사를 건드리지 말자고."라고 반대했다.
헌데, 똑같이 과거로 온 라르곤 제국군들이 있는데 그들은 더 먼저인 고자 15세 황제(즉 아자린 드 엘의 아버지인 선황)시대에서 온 이들이다. 이들이 자신들은 서구에서 온 군대 사절이라고 속여 청나라 해군을 도와서 놔두면 역사가 달라질 터이니 할 수 없이 소요카제 호는 일본군을 돕긴 하지만.... 나중에 원래대로 돌아온 뒤에 이것을 타일러가 스스무 후지에게 보고하다가 무슨 꿈이라도 꾸었냐고 면박만 당한다.
영화 박열에서는 시바타 요시유키가 야마모토 곤노효에 역으로 분했다. 히로히토가 저격을 당했다는 소식에 우왕좌왕하는 등 미즈노 렌타로에게 놀아나는 무력한 노인네 정도로 묘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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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자 표기는 權兵衛 그대로고 읽는 법만 바꿨다.[2] 러일전쟁에서 쓰시마 해전 승리의 주역이자 연합함대 작전 담당 선임참모 겸 제1함대 선임참모, 후일 해군 군무국장 등 요직을 역임한 후 중병으로 인해 해군중장으로 퇴역[3] 그나마도 민간인도 임명 가능하게 하려다가 군부에서 게거품을 무는 통에 퇴역무관으로 후퇴한 것이었음에도 매우 획기적인 조치였다. 당연히 군부, 그중에서도 육군이 매우 격렬하게 반발하였고 군부가 폭주하면서 군부를 달래기 위해 히로타 내각에서 다시 현역무관제로 환원해버렸다.[4] 당시 지멘스는 지멘스 요코하마지점의 지배인의 조카딸이 일본 해군 함정 본부 소속 장교의 아내인 점을 이용, 정보를 사전에 입수해 경쟁사보다 유리하게 입찰해 일본 해군의 통신·전기 장비 제품 계약을 따냈다. 그리고 계약에 대한 대가로 해군 장교들에게 리베이트를 제공했다. 그리고 이 리베이트 관련 기밀 서류를 훔친 지멘스 사원이던 카를 리히터가 지멘스 도쿄지점장에게 "정보가 공개되고 싶지 않으면 돈을 보내라"는 협박 문서를 보냈다. 도쿄지점장이 거부하자 리히터는 로이터 통신 특파원이던 앤드루 풀리에게 서류를 팔아버리고 자신은 독일로 귀국했다. 이 사실을 알게된 지멘스 중역들은 회사의 신용에 악영향을 미칠 것을 우려했고, 공개를 막기 위해 서류를 입수한 풀리와 접선해 1913년 11월 27일 기밀 서류를 5만 엔에 매입했다. 되찾은 서류를 요코하마 독일 영사관에서 파기하면서 사건은 일단락되었다고 여겼지만, 독일 정보기관에서도 이 사실을 파악하여 귀국한 리히터를 체포해 공갈미수죄로 기소했다. 재판에서는 뇌물죄가 인정되어 리히터는 징역형에 처해졌는데, 독일 법원에서 국제 관례를 무시하고 해당 사건에 관련된 일본 해군 장교의 실명을 공개해버렸다. 1914년 1월 21일 독일 언론들은 "일본 해군 함정본부 제4부장 후지이 데루고로 소장과 그 부원 사와자키 대좌에게 지멘스가 뇌물을 주었다"고 보도하면서 사건이 일본 사회에도 큰 파장을 일으켰다.[5] 한반도에 편성될 2개 사단[6] 이때 갓 건조에 들어갔던 후소급 전함 3,4번함의 예산이 완전 삭감당하여, 1915년 후반에 간신히 기공에 들어갈 수 있었다.[7] 나중에 하마구치 내각 - 제2차 와카쓰키 내각에서 다시 한번 대장대신을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