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정치인에 대한 내용은 김응선(1964) 문서 참고하십시오.
일본군의 장성급 장교 | ||
{{{#!wiki style="margin: -0px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 <colbgcolor=#b0313f> 대장 大將 | |
육군 陸軍 | 시라카와 요시노리 | 우가키 가즈시게 | 미나미 지로 | 아베 노부유키 | 야마나시 한조 | 도조 히데키 | 고이소 구니아키 | 도이하라 겐지 | 마쓰이 이와네 | 야마시타 도모유키 | 이타가키 세이시로 | 이마무라 히토시 | 기무라 헤이타로 |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왕 | 오카무라 야스지 | 쿠리바야시 타다미치† | 다치바나 요시오 | 아나미 고레치카 | 가와베 마사카즈 |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 왕 |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 왕 | |
해군 海軍 | 야마모토 곤노효에 | 스즈키 간타로 | 사이토 마코토 | 나구모 주이치† | 요나이 미쓰마사 | 이노우에 시게요시 | 오카다 게이스케 | 시마다 시게타로 | 이토 세이이치† | |
중장 中將 | ||
육군 陸軍 | 창덕궁 이왕 은 | 홍사익 | 무토 아키라 | 이시이 시로 | 스즈키 데이이치 | 도미나가 교지 | 무타구치 렌야 | 이시와라 간지 | 사토 겐료 | 사토 고토쿠 | 미야자키 시게사부로 | 히구치 기이치로 | 이병무 | 조동윤 | 혼마 마사하루 | 오시마 히로시 | |
해군 海軍 | 야마구치 다몬† | 오자와 지사부로 | 우가키 마토메 | 모리 쿠니조 | 기무라 마사토미 | |
소장 少將 | ||
육군 陸軍 |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 친왕 | 이희두 | 조성근 | 왕유식 | 김응선 | 어담 | 이치키 기요나오† | |
해군 海軍 | - | |
※ 문서가 있는 경우만 기재 ※ 윗 첨자 † : 사후 추서 | ||
※ 둘러보기 | 일본군 원수 | ||
}}}}}}}}} |
金應善
1881년 ~ 1932년
1. 개요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의 군인, 친일반민족행위자. 최종계급은 일본군 소장이었다. 본관은 금화(金化).# 독립운동가 김응선과는 동명이인이다.2. 생애
1881년 평안남도 안주군 동면에서 태어났다. 1896년 청일전쟁 당시에 우쓰노미야 다로[1]가 그를 발탁해 그해 5월 일본에 유학을 가서 도쿄 아카사카구 나카노 정(仲之町) 소학교와 세이조(成城)학교를 졸업하고 1902년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였다. 병과는 보병.[2]1903년 일본육군사관학교 15기로 졸업해 견습사관으로 근무했다.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일본군 소속으로 참전했다. 그후에 대한제국군으로 소속을 옮겨 육군무관학교 학도대의 육군유년학교[3] 교장을 지냈다. 일본 정부는 대한제국의 군부에 일본 유학파 출신의 친일 군인을 주로 배치했고 그도 그 중 하나였다.
1907년 군대 해산 당시 계급은 보병참령(소령)이었다. 군 해산 후에 황태자궁의 배종무관으로 임명됐다. 1910년에 그나마 잔존하던 조선군 병력이 완전히 일본군 소속으로 바뀌면서 그는 조선군주차사령부로 근무지를 옮겼다. 그 후에 이은의 왕세자궁 무관으로 근무했고 1923년에 대좌로 진급했다.[4] 1931년에는 육군소장으로 진급했고 같은 해에 28년의 군생활을 마치고 퇴역했다.
1932년에 사망했다.